2024.06.02 (일)
이규진(편고재 주인)
문예지에 몸을 담고 있을 때 여류 작가인 손소희 여사가 연재를 했었다. 소설이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문단 이야기였는데 삽화도 본인이 직접 그렸다. 벌써 40여 년 전 일이라 내용은 기억이 없지만 원고료를 받으면 자주 냉면과 불고기를 사 주시던 추억만은 아직도 새롭기만 하다. 손여사를 생각하면 또 한 가지 생각나는 일이 있다. 본인의 첫 창작집으로 1949년 시문학사에서 나온 <이라기>가 없다고 해 구해 드린다고 약속을 했건만 지키지를 못했다. 원고 때문에 집으로 전화를 드리면 더러 남편인 김동리 선생이 받을 때가 있었다. 하지만 동리 선생에 대한 원고 청탁이나 그런 것이 아니다보니 괜시리 미안한 마음이 들고는 했었다.
김동리 선생은 1995년 작고를 하셨는데 묘비명을 미당 서정주 시인이 썼다고 한다. 한 분은 작가로 또 한 분은 시인이지만 함께 한 시대를 풍미했던 문단의 거목들로서 서로를 너무도 잘 알고 지내는 사이였으니 묘비명을 쓸 만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 묘비명에 이런 구절이 있다고 한다.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일 몸살을 앓던 탐미파`. 미당이 동리 선생에 대해 이런 표현을 한 것은 짐작이 아주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나는 그 모든 것을 떠나 그 말 자체를 즐기고 싶다.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일 몸살을 앓던 탐미파라니 이 얼마나 매력적인 문구인가. 나는 도자기에 푹 빠져 사는 그런 탐미파가 되고 싶지만 어디 언감생심 가당키나 한 일이랴.
어여쁘다라는 것은 예쁜 것의 옛스러운 말이다. 하지만 예쁘다보다는 어여쁘다라는 말이 얼마나 더 정겹고 맛갈스러운가. 그런데 여기서 눈여겨 볼 것은 예쁜 것도 그렇지만 어여쁜 것은 큰 것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는 사실이다. 크기가 40Cm가 넘는 백자달항아리를 두고 예쁘다던가 어여쁘다고 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궁색해 보인다. 적어도 도자기가 예쁘다던가 어여뻐 보이려면 귀엽고 깜직해 앙징스러운 맛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런 것이 어디 없을까 도편을 뒤적이다가 찾아 낸 것이 백자소각병편이다.
왼쪽에 밑 부분이 달아난 것은 분원리에서 직접 답사를 통해 만난 것이고 우측의 비교적 온전한 것은 시중에서 구입을 한 것이다. 굽은 그냥 잘라버린 밑굽이고 몸체는 8각의 면을 치고 입술은 말아 붙인 형태다. 그런데 두 점을 놓고 보면 밑 부분이 달아난 것과 온전한 것의 차이를 제하면 유색이며 크기며가 너무도 똑 같지 않은가. 한 마디로 말해 두 점은 같은 18세기 후반 분원리 가마터에서 같은 도공의 솜씨로 만들었다고 밖에는 달리 생각할 수가 없는 쌍둥이 형제가 분명한 것이다.
크기가 손가락만한 이 작은 백자소각병편은 용도가 무엇이었을까. 너무도 작아 음료나 그런 것을 담아 쓰기에는 적당해 보이지가 않아 보인다. 그렇다고 하면 용도는 화장용기밖에 없어 보이는데 아름다운 여인이 아름다움을 가꾸기 위해 귀한 향수라도 담아 두었던 용기는 아니었을까. 여하튼 이 작고 앙징스러운 백자소각병편을 보고 있노라면 어여쁜 것 앞에서는 매일 몸살을 앓던 탐미파라는 말이 왜 자꾸 떠오르는 것일까. 일본 민예관에도 이와 똑 같이 작고 귀엽고 앙징스럽게 생긴 병이 한 점 있어 멀리 떨어져 있지만 이들의 연관성이 늘 궁금해지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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