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0 (금)

[특별기고] 선현의 유적 표지판, 방치 책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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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선현의 유적 표지판, 방치 책임은?

  • 특집부
  • 등록 2023.03.24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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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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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간사 강린당 안내판

 

경상북도 안동시 풍산읍 서미2길로 들어서면 해동(海東)의 수양산(首陽山)과 조선(朝鮮)의 백이숙제(伯夷叔齊) 유적지를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청음선생목석거유허비(淸陰先生木石居遺墟碑)’ 한 기와 서간사(西磵祠) 강린당(講麟堂) 한 채가 남아 있다. 주인공은 절의(節義)의 상징으로 추앙받고 있는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 1570~1652) 선생이다.

 

선생은 남한산성에서의 치욕을 곱씹으며 인조15(1637, 68) 고향이 아닌 본향(本鄕)으로 낙향해 권토중래(捲土重來)를 꿈꾸었다. 선조38(1605) 64세의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이 임진왜란이 끝난 뒤 그러한 마음으로 은거했던 유서 깊은 장소였다. 그러나 채 뜻을 이루기도 전인 그 3년 뒤(71) 심양으로 압송당하고 만다. 이러한 선생의 얼을 기려 낙향한 183년 뒤 그의 7대손인 화서(華棲) 김학순(金學淳, 1767~1845)이 비가 서 있는 바위 전면에다 목석거(木石居)’라고 대서특필(大書特筆)해 기념했다. 비 건립은 이보다 앞서 안동부사로 있던 송벽당(松蘗堂) 이정신(李正臣, 1660~1727)의 부탁으로 당숙(堂叔)인 지촌(芝村) 이희조(李喜朝, 1655~1724)가 지은 비문을 새겨 이루어졌다.


이희조는 연안(延安) 이씨(李氏)의 현조(顯祖) 백주(白洲) 이명한(李明漢)의 손자요 정관재(靜觀齋) 이단상(李端相)의 아들이다. 그는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門人)으로 조정에서 유현(儒賢)으로 대우받던 훌륭한 분이었다.


이정신은 선생이 82세로 세상을 떠난 58년 뒤인 1709(50) 5월에 안동부사로 부임해 유허를 둘러보며 무성한 잡초를 부여잡으며, "선생은 우리 동방의 백이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이곳 학가산은 선생에 있어서는 수양산이다. 그런데도 어찌 선생께서 고사리를 캐셨던 유적이 이처럼 민몰(泯沒, 자취가 아주 없어짐)되게 할 수 있겠는가(先生 我東之伯夷 而鶴駕 是先生之首陽 豈可使採薇遺跡 泯沒如此耶)”라고 탄식했고, 이에 작은 비를 세운 뒤 그 전면에다 청음선생목서거유허비(淸陰金先生木石居遺墟碑)’라고 한 뒤 당숙(堂叔)에게 비문을 부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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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석거 유허비 안내판

 

청음 김상헌 선생은 좌의정을 지낸 임당(林塘) 정유길(鄭惟吉)의 외손(外孫)이다. 대광보국(大匡輔國) 숭록대부(崇祿大夫) 의정부 좌의정 겸 영 경연사 감춘추관사 세자부(世子傅)를 지냈다. 21세 때 진사시에 합격한 뒤 27세 때 정시(庭試) 문과에 급제했고 39세 때 중시(重試)에 합격했다. 67세 때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국왕을 호종해 고수(固守)의 계책을 주장했다. ‘정축(丁丑) 척화신(斥和臣)’의 좌장(座長)이다.

 

681월에 묘당(廟堂)에서 항복의 뜻을 적은 국서(國書)를 찢고 척화(斥和)의 뜻을 분명히 밝혔다. 6일간을 단식하며 자결까지 시도했으나 그 뜻을 이루지 못하자 안동(安東) 풍산(豐山)으로 내려가 학가산(鶴駕山) 아래 서미동(西美洞)으로 들어가 목석(木石)’이라는 현판을 걸고 은거했다. 71세 때 청()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었고 그곳에서 안동(安東)에 남았던 부인의 상(7211)을 당했다. 이듬해에 병이 들자 의주(義州)로 보내졌다. 74세 때 다시 심양으로 피체되었다가 76세 때 세자와 함께 돌아와 양주(楊州) 석실(石室)에 은거했다. 77세 때 좌의정에 임명되었을 때 32차례나 상소해 끝내 벼슬에서 물러났다. 80세 때 효종이 즉위하자 다시 좌의정으로 기용되었다가 83세를 일기로 석실에서 세상을 떠났다.


종처럼 생긴 비 바위 전면에는 김학순이 쓴 목석거(木石居)’이라는 대자 글씨와 경진(庚辰) 중춘(仲春)선생(先生) 칠대손(七代孫) 본부사(本府使, 安東) 학순(學淳) 근서(謹書)’라는 표지가 있다. 그리고 측면에는 만석유허(萬石遺墟) 백세청풍(百世淸風)’이라는 선생에 대한 무한한 기림을 새겨두었다. 이는 청음이 이곳에 은거할 당시 공간을 만석산방(萬石山房)’이라고 이름했기 때문에 붙인 것이다.


김학순은 1709년에 이미 수립된 비를 오늘날의 위치로 다시 수립함과 아울러 청음이 은거했던 안동시 풍산읍 서미리 입구에 있던 거대한 자연석을 은자암(隱者巖)’이라고 이름 짓고 그 아래다 해동수양(海東首陽), 산남율리(山南栗里)’라고 새겼다. 본격적인 성역화를 한 것이다. 이는 청음 선생이 지향했던 정신이 저 중국의 백이숙제(伯夷叔齊)나 도연명(陶淵明)과 그 궤()를 같이한다는 후손(後孫) 또는 후학(後學)으로서의 무한한 기림이었다. 안동부사 이정신의 기념 이후 109년이 지난 때의 일이었다.

 

암각서(巖刻書) 아래에 경진춘(庚辰春, 1820) 부사(府使) 김학순(金學淳) ()’라고 이 일을 주도한 자신을 분명히 밝히고 있는데, 이는 안동부사로 재임 중인 김학순이 이 글씨를 썼다는 의미다. 김학순은 영남의 이름난 누각일 뿐 아니라 안동을 대표하는 아름다운 누각인 영호루(映湖樓) 누마루를 가로질러 걸린 초대형 현판을 쓴 주인공이기도 하다. 현판 문구는 영호루에 걸맞는 순조20(1820)에 안동도호부사(安東都護府使) 김학순이 쓴 낙동상류 영좌명루(洛東上流 嶺左名樓)’이다. 이 현판은 관각(館閣) 인사(人士)의 방달불기(放達不羈)한 법필(法筆)로 쓰여져 보는 이들을 경탄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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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간은 길었던 이글을 요약한다면 다음과 같다.


유허비 건립을 주도한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현손(玄孫)인 안동부사 이정신(李正臣)의 탄식

"선생은 우리 동방의 백이와 같은 분이시기 때문에 이곳 학가산은 선생에 있어서는 수양산이었다. 그런데도 어찌 선생께서 고사리를 캐셨던 유적이 이처럼 자취가 아주 없어지게 해서야 되겠는가(先生 我東之伯夷 而鶴駕 是先生之首陽 豈可使採薇遺跡 泯沒如此耶)”


이정신의 당숙인 이희조(李喜朝)의 당부

", 이곳에 있는 나무 한 그루 돌 하나라도 백세 이후에 이르도록 훼손하거나 상하게 말지니라!(惟此一木一石 嗟百世之後 勿毁勿傷)”


문제는, 안동시가 이곳에 유적지 소개 표지판 하나씩을 세웠다. 그런데 그 내용의 미흡함은 두고라도 결정적인 잘못을 하고도 십수 년 또는 몇 해 동안 수정하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류는 사진상으로도 단번에 확인할 수 있다. 목석거유허비 표지판에는 비를 세운 연대를 10년이나 잘못 표기하고 있다. 순조20(1820)이 정답이다. 또한 비를 세운 안동부사 김학순 다음 근서(勤書)’라고 표기했는데, ‘근서(謹書)’의 잘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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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이웃한 서간사(西磵祠) 강린당(講麟堂)’ 표지판이다. ‘강린당(講麟當)’이라 표기했고, 청음 김상헌의 자() 숙도(叔度)숙도(淑度)’라고 잘못 썼다. 또 지적할 것은, 강린당(講麟堂)은 보이는데 사당(祠堂)인 서간사(西磵祠)는 도대체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

 

이러저러한 안내문의 미흡한 내용을 포함한 오류들은 후손 된 이는 물론 누구라도 단번에 알 수 있는 것들이다. 사진으로 보더라도 목석거 유허비 표지판은 세운 지 십수 년을 상회하고, 서간사 강린당은 몇 해 되지 않아 보인다. 오래되었건 새로 세운 것이건 모두 문제다. 누구의 책임인가?

 

오래된 것은 무관심으로 방치된 느낌이고, 새로 세운 것에도 다시 이런 오류가 있다는 것은 더 큰 문제다. 이는 인다물풍(人多物豐)한 정보화 시대를 감안한다면 걱정이 아닐 수 없다.

 

이미 퍼 날려진 무수한 사진들은 어찌할 건가? 조속한 시일 내에 무결함은 물론 스마트한 표지판을 다시 제작해 세울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한국정신문화수도 안동의 부끄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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