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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화로 춤추고 있는 용만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조선 초기 백자에 쓰인 청화 안료는 국내산이 아니다. 조선에서는 생산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에서 전량 수입을 해 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중국과의 외교 관계나 불가피한 국내 사정으로 인해 교역이 원활치 않을 경우 청화 제작에 차질이 생길 수밖에 없었다. 이런 경우 국내에서 비교적 손쉽게 구할 수 있는 철화 안료가 청화 안료를 대신해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추론이다. 그렇다고 하면 조선 백자에 철화가 처음으로 사용된 것은 언제 부터일까. 현재 실물로서 가장 오랜 된 것은 백자철화상선감태감정선명지석(白磁鐵畵尙善監太監鄭善銘墓誌石)이 있다. 이 지석으로 보아 적어도 1468년을 전후해 제작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하지만 15C 후반부터 16C 전반의 관요 가마터에서는 아쉽게도 철화를 볼 수 없으며 16C 후반에 가서야 약간의 흔적을 볼 수 있다.
17C에 이르면 백자 문양으로는 철화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많이 사용된다. 그 것은 임진왜란 후 청화의 수입이 거의 끊기다시피 해 철화가 그 대용으로 많이 사용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7C에도 초기의 관요 가마터인 탄벌리에서는 보이지 않고 상림리부터 시작해 선동리 송정리 유사리 신대리 지월리 궁평리 등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후에도 18C와 19C에서 계속 사용되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17C 철화를 대표하는 도자기로는 이화여자대학교 박물관 소장의 보물 제 645호인 백자철화운용문입호(白磁鐵畵雲龍文立壺)를 들 수 있을 것 같다.
백자철화운용문입호는 구연부가 안쪽으로 약간 기울어져 있고 어깨는 풍만하게 벌어져 있으며 아래로 갈수록 급격히 줍아지다가 굽에서 다시 벌어져 마무리 되는 형태다. 구연부에는 철화로 당초문을, 어깨로 이어지는 부분에는 복련대(伏蓮帶)를 장식하고 있으며 굽 위에는 이중으로 삼각문을 돌리고 있다. 몸체에는 여의두형의 구름무늬와 더불어 용이 살아 꿈틀대고 있는 느낌인데 17C 특징인 갈기와 수염이 앞을 향해 휘날리고 있다. 용의 비늘은 넓은 부채꼴이며 발톱은 세 개에 안경을 쓴 듯한 눈동자가 선명하다. 한 마디로 잘 생긴 백자입호에 적갈색의 철화용이 어울려 빼어난 장관을 이루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17C 관요산이 분명한 이 백자철화운용문입호는 어디서 제작된 것일까.
17C 관요인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마을 민가 뒤 밭에 주요가 위치해 있다. 여기서 30여 미터 떨어진 곳에 계곡에서 흘어내린 물이 도랑을 이루며 지나고 있다. 아주 오랜 전 이 도랑을 정비 할 때 나온 도편을 몇 점 갖고 있는데 아무래도 조금 떨어진 곳이기는 하지만 가마터에서 산일된 것이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여러 점의 도편이 뒤섞인 것이어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모양이나 철화의 색감과 문양 등으로 보아 보물 제645호인 백자철화운용문입호와 많은 유사성을 보이고 있어 주목된다. 물론 한 점의 도자기에서 나온 도편이 아니라 여러 점의 도자기에서 깨진 조각들이기는 하지만 이것들을 종합해 유추해 보면 왠지 모르게 백자철화운용문호와 강하게 동질성을 느끼게 되고는 한다.
도편은 모두 철화가 들어간 것으로 주구가 살아 있는 것이 2점, 몸체가 3점, 굽이 2점으로 합이 7점이다. 주구에는 빗금 사이에 당초문을 어깨 부분에는 복련대를 장식하고 있다. 몸체는 부채꼴 모양을 하고 있는 용의 비늘이 보이는 2점과 3개의 발톱이 보이는 발이 한 점이다. 굽은 제법 큰 것과 작은 것인데 두 점 모두 삼각문을 돌리고 있다. 이런 철화의 문양과 백자의 태토와 유색 그리고 적갈색의 철화 문양을 보고 있노라면 나로서는 어쩔 수 없이 백자철화운용문입호의 고향은 바로 이곳 상림리 백자 가마터라는 강한 심증을 떨쳐 버릴 수가 없게 된다.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1631년부터 1636년경에 운영된 가마터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는 인조(仁祖)가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을 몰아내고 집권한 1623년부터 재위가 끝나는 1649년 사이와 맛 물리는 시기이기도 하다. 말하자면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인조 집권 시기에 운영된 관요가 분명한 것이다. 반금친명(反金親明) 정책을 취해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을 겪는 등 중국과의 관계가 원만치 않았던 이 시기에 왕권을 상징하는 백자의 용 문양이 기운생동하고 있는 현상을 우리는 어떻게 보아야 하는 것일까. 아무래도 인조하면 저 삼전도(三田渡)의 굴욕이 떠오르건만 이 시기 백자호에서 철화로 춤추고 있는 용만은 가히 독립된 주권을 상징이라도 하듯이 힘이 넘쳐 보이고 있으니, 이를 어떻게 이해를 해야 옳을지 알 수 없는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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