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6 (목)

[국악신문] 이윤선의 남도문화기행(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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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윤선의 남도문화기행(83)

민요 중타령과 당금애기

  • 특집부
  • 등록 2023.02.27 00:33
  • 조회수 6,983


"동냥왔네 동냥왔네 산골의 중놈이 동냥왔네/ 

동냥이사 안 내리마는 줄 이가 없어서 몬 주겄네/(중략) 

왜 우리가 이러다가 애기를 배며는 어쩔것네/ 

애기배면 여려운가 뒷동산천 올라가서/ 

벅누눈을 긁어다가 정술에다가 타묵으며는/ 

속절없이도 떨어지네." 

 

임동권이 수집했던 남해지방 중타령의 한 대목이다. 비슷한 버전들이 또 있다. 

 

"동냥왔네 동냥왔네 산골 중이 동냥왔네/ 

동냥은 있네만은 줄 이 없어 몬주겄네/ 

울어매는 장에 가고 울아부지 들에 가고/

 우리올캐 친정 가고 우리오빠 처가가고(중략) 청우에라 섰던 중이 달라든다 달라든다/ 

못방으로 달라듬서/ 우리 둘이 이러다가 아가 배면 우쩌겄네/ 

딸이라도 놓거덜랑 물이라꼬 이름짓고/ 

아들이라 놓거덜랑 산이라꼬 이름짓게/ 

산에 가서저 부르니 물이 와서 대답하고/

 

물이라꼬 저 부르니 산이 와서 대답하네." 이 무슨 상황인가? 스님이나 중이란 호명은 어디로 날아가고 중놈이라는 상스런 호칭이 난무한다. 시주를 나온 땡중이 혼자 집을 지키는 소녀를 농락하는 장면을 그리기 때문이다. 

민요뿐만 아니라 다양한 방식으로 퍼져있는 맏딸애기(당금애기를 부르는 호칭 중 하나) 노래 중 일부다. 류경자는 그의 글 "무가 <당금애기>와 민요 '중노래, 맏딸애기류'의 교섭양상과 변이"(한국민요학 제23집)에서 민요 중타령을 인용하며 이렇게 분석한다. 

 

"현실에 기반을 둔 민요는 신화와는 다른 세계이다. 신화적 기반이 없거나 약화된 상황과 마주쳤을 때, 민요는 신화의 서사구조를 그대로 수용할 수 없게 되며, 자신들이 당면한 현실에 이끌림을 받을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외양상 신화와는 서사구조가 전혀 다른 파격적인 형태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파격 치고는 상당히 난해하다. 중의 농락 혹은 소녀와의 음탕한 정사를 노래한 것일까? 하지만 중타령이 제석의 계보를 잇는 신화에서 파생되었음을 주목하면 현상적인 노랫말만으로 이면을 톺아보기 어렵다. 불교의 쇠락과 중에 대한 비하가 기표라면 그 안에 숨은 보다 근원적인 기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당금애기 설화의 이미저리

 

당금애기 이야기는 60여 편의 각편이 있다. 그만큼 다양하다. 지역에 따라 시주 스님이 하룻밤 자고가면서 딸아기가 구슬 세 개를 품에 받는 꿈을 꾸고 잉태하는 버전, 시주를 받아가지고 나가면서 딸아이에게 쌀 세 톨을 먹게 하거나 손목을 잡고 혹은 머리를 만져 잉태하는 버전 등으로 각양각색이다. 


맏딸아기가 토굴에 감금되어 그 안에서 잉태하는 사례도 있다. 제주도의 경우는 삼형제가 과거를 봤다가 중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낙방하고 여차여차하여 무제(巫祭)를 받는 신이 되기도 한다. 처한 환경에 따라 종속된 신앙체계나 종교에 따라 스토리를 취사한다. 이들을 종합해보면 단군신화나 주몽신화와 아주 유사하다는 점을 눈치 챌 수 있다. 천상의 양(陽)과 지상 음(陰)의 교합, 지함 혹은 토굴 등 동굴이나 알을 통한 출산과 성장 스토리가 키워드다. 


여기서 주목하는 것은 지극한 비유와 상징을 통한 잉태와 출산 혹은 탄생에 이르는 구도여행이다. 우리나라 무속의 양대 신화인 오구굿의 바리데기, 나아가 세경본풀이의 자청비까지 유사한 이야기 구성이다. 심청가에서 물에 빠진 심봉사를 구출하는 장면, 흥보가에서 명당터를 잡아주는 도승, 심지어 저자거리에서 맏딸애기를 유혹하여 잉태시키므로 민중들의 비난 대상이 되는 땡중의 이미지까지 그 안의 알고리즘은 사실 다르지 않다. 이 이야기는 초상 마당에서 벌어지는 다시래기굿과 판소리, 무속의례의 제석굿, 각종 문학과 예술행위들을 횡단하며 다시 태어남과 거듭남이라는 거대 이미지를 재구성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