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막소설 '아름아리'] 제7화 ‘1/694쪽’의 아리랑(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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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소설 '아름아리'] 제7화 ‘1/694쪽’의 아리랑(하)

1943년 만주국 수도 신경에서 만선학해사가 발행한 ‘半島史話와 樂土滿洲’, 이 책 속의 윤해영 시와 아리랑.

  • 삼목
  • 등록 2023.01.26 11:11
  • 조회수 1,338


묘한 여운을 간직한 채, 접어둔 이 책은 책장 속 깊이 들어갔다. 그리고 2년 여가 지난 어느날, 삼목은 아세안게임행사시 많은 문화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때 삼목의 눈을 번쩍 뜨이게 하는 행사의 한 자료를 접하게 되었다.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가곡 발표회라는 프로그램의 첫 순서 선구자’, 그 옆에 "윤해영 시, 조두남 작곡으로 되어있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그리고 그 해설 부분에서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조두남.jpg
작곡가 조두남(1912~1984)

 

"196312 30 시민회관, 조두남(1984년 작곡) 작곡 발표회에서 바리톤 김학근 불러 유명해진 곡. 이후 7년간 기독교방송의 정든 우리 가곡시그널뮤직으로 우리에게 친근해진 가곡이다. 작시는 작곡가와 함께 중국에서 활동한 시인 윤해영의 작품이다.”


그리고 선구자 3절이 병기되어 있었다. ‘2의 애국가로도 표현되는 가사이다.

 

1. 일송정 푸른 솔은 늙어늙어 갔어도

한 줄기 해란강은 천 년 두고 흐른다

지난 날 강가에서 말 달리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2. 용두레 우물가에 밤새 소리 들릴 때

뜻 깊은 용문교에 달빛 고이 비친다

이역 하늘 바라보며 활을 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3. 용주사 저녁종이 비암산에 울릴 때

사나이 굳은 마음 길이 새겨 두었네

조국을 찾겠노라 맹세하던 선구자

지금은 어느 곳에 거친 꿈이 깊었나


분명 애국적인 가사의 노래이다. 그러나 삼목은 곧 출판 할 아리랑 사설집 편집 최종 교정을 보면서도 미심쩍어 한 滿洲 아리랑과는 상반된 시상詩想이에서 일종의 불안감마저 들었다. 분명 만주 아리랑오족五族이란 어휘에서 친일시임이 분명하다는 생각이 짖어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삼목은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이 제공해준 정보 재만조선인통신在滿朝鮮人通信 16로만 출전을 밝히고, 윤해영 작품임은 명기하지 않은 채 수록했다.(‘민족의 숨결, 그리고 발자국 소리 아리랑’ 현대문예사, 1986. 214)


그리고 다시 2년이 지났다. 삼목은 당시 국립극장 허규 극장장, 기획자 이광수, 회원 원재식씨 등과 아리랑축제를 추진하는 등 동분서주할 때다. 그 와중에 몇 년 만에 다시 윤해영을 되살려 내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서지학자 김종욱 선생으로부터다.

 

엄정행.jpg
테너 엄정행 (1943년 2월 12일 ~ )

 

"예상했던 대로 만선일보에 안수길, 윤해영 같은 이들의 자료가 많이 나왔어요. 아세아문화사에서 만선일보 영인본을 냈어요. 그런데 김형이 우려했듯이 윤해영은 문제가 있어요. 아리랑만주라는 작품이 나왔는데, 확실해요. 그 가요 아리랑 만주와는 또 다른 작품이요. 윤해영은 결국 아리랑을 세 편 쓴 것이 되는데. 저녁에 만납시다. ‘滿洲 아리랑복사했으니까.”


1 아리랑 고개를 넘어서니

새 하늘 새 땅이 이 아닌가

후렴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


2 말발굽 소-리 끊어지면

-리 삽살개 잠이 드네


3 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

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


아리랑 만주보다는 간결한 작품이다. 만주국 기관지 만선일보’ 194111일자에는 신춘문예 민요부에 당선된 작품이다. ‘아리랑 滿洲1절의 "사천만 오족의 새로운 낙토와 이 작품의 3"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는 같은 맥락이다. 만주국의 이념인 五族協和의 표현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삼목은 강원대 박민일 교수에게 윤해영의 작품 사본을 송부하고 한숨을 내 쉬었다.

 

만선일보.png


"아리랑을 친일 도구로 쓴 것인가!”


삼목은 차마 윤해영의 아리랑 작품들을 언급하고 싶지가 않았다. 아리랑의 변절, 이런 막다른 표현이 겁이났기 때문이다. 얼마 후 박민일 교수로부터 친일아리랑이란 제목으로 발표한 글을 받았다. 읽지 않고 뒤처 놓았다. 그럼에도 친일 아리랑이란 표현이 가능할까라는 생각이 여운으로 따라왔다.


1995년 중반은 국학연구 붐이 절정에 이른 시기다. 이는 국내외에서 발간된 각종 간행물들이 국가기관이나 연구단체 등에서 수집하여 각 도서관에 비치됨으로서 가능했다. 만주지역에서 간행 된 출판물과 정기간행물도 이 시기 전후 영인 되어 연구 자료화가 가능했다. 만선일보(1936~1948)나 흥아협회 기관지 재만조선인통신’,‘중국조선족문학사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결과로 만주지역 조선인 문학에 대한 학계의 조명이 이뤄졌다. 이에 따라 윤해영이란 시인에 대한 작품도 조명되기에 이르렀다. 드디어 1995년 중반 이 시를 비롯한 윤해영의 시가 총 9편이 있음이 드러났다. 인천대 오양호 교수가 논문 윤해영 시의 율격과 시대의식 고찰에서 밝힌 것이다. 9편은 다음과 같다.


용정의 노래, 만주 아리랑, 오랑캐고개, 해란강, 아리랑 만주, 발해고지, 사계, 척토기, 낙토만주


이 논문의 결론은 "9편의 시에 나오는 선구자는 조두남 작곡의 가곡 선구자와는 정반대다. 결국 윤해영이 선구자 작시 이후 변절한 증표이다.”라는 것이었다. 이런 대비는 이미 가곡 선구자가 받고 있는 평가 때문이다. 예컨대 1990년 연변인민출판사가 간행한 중국조선족문학사의 이런 평가이다.


"선구자는 1930년대 초기에 창작된 후(조두남 작곡) 널리 보급되어 크낙한 영향력을 산생한 노래이다. 이 작품에서 시인은 현대의 령마루에 서서 흘러간 민족의 력사를 돌이켜 보면서 외래의 강포에 대항하고, 민족해방을 위하여 분연히 떨쳐나 슬기와 용맹, 절개와 위훈으로 자랑을 떨친 우리 조상들 특히 선구자들을 절절하게 추모하면서 민족의 비운을 찬몸에 지니고 나라와 미녹을 건져 낼 선구자들의 출현을 그 같이 고대하고 있다.
이 노래는 그 시적 정서가 비장하고 겨레의 넋이 세차게 사품치고, 민족의 념원과 정서를 대변함으로 하여 당시는 물론 오늘에 이르기까지도 아주 널리 전승 되여 불리우고 있다.”


이것이 1990년대 중반의 윤해영의 시에 대한 평가였다. 이로부터 윤해영은 선구자외의 작품은 친일 시로서 혐의嫌疑를 받게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의외의 문제가 제기된 것이다. 1984년 조두남선생이 작고할 때 까지도 문제가 없던 것으로, 1982년 세광출판사 발행 조두남 수필집 그리움에서 기술한 짧은 진술 때문이다. 요약하면 이렇다.


"1932년 목단강의 허름한 여관에 묶고 있었을 때 한 젊은이가 내게 용정의 노래를 주며 작곡해 달라고 사라졌다. 아마도 이 젊은이는 독립군이었을 것이다. 이후 그 젊은이를 만나지 못하고 해방이 되어 돌아와 선구자로 곡명을 바꾸어 발표했다.”


조두남은 이 책을 낸 2년 후 작고했다. 그런데 해방 전 까지 조두남과 함께 음악활동을 한 재 중국 음악인들이 한국과 교류가 이루어지면서 이 진술이 거짓이라고 전했다. 그러면서 조두남이 징병령 만세같은 친일 작품을 작곡한 과거를 숨기기 위해 그랬으며, 윤해영도 해방이 될 때까지 함께 음악활동을 했음은 물론, 친일 시를 썼다는 사실까지 전해지게 된 것이다. 급기야 한국에 유학을 온 연변 음악가 류연산씨가 2004일송정 푸른솔에 선구자는 없었다라는 책에서 다양한 증언과 자료를 통해 조두남과 윤해영의 친일 음악활동상을 밝혀 조국에 알린 것이다.


이런 결과로 조두남과 윤해영은 친일 음악가로 규정되었다. ‘선구자도 공적인 자리에서는 부르지 못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이니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슨 윤해영은 아리랑을 친일의 도구로, 민족 정서를 팔아먹은 반역의 시인이 되었다. 아리랑의 역사에서나 한국문학사에서나 세 편의 아리랑 시를 쓴 이는 윤해영이 유일함에도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2004년까지 조두남이 윤해영의 시 용정의 노래선각자로 바꾸고 시도 일부 개작하였다는 사실도 밝혀지게 되었다. 결국 윤해영의 용정의 노래는 애초부터 친일 시였다는 것이다. 삼목으로서는 자료적인 관심 외에는 어떤 해석도 더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책장 속에 넣은 半島史話樂土滿洲를 한 번도 꺼내 보지 않았다. 불편한 진실을 마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2005113일자 삼목의 일기장에는 여러 메모 한 모퉁이에 이렇게 쓰여 있다.


"어제 산 김연수의 몽상의 시인 윤해영을 대충 읽었다. 논의의 여지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문에서 "친일시인이 아니라 진솔한 민족시인"이란 규정 까지는 아니더라도 시적 해석 영역에서 이런 구절은 논의의 여지가 있을 듯하다.”


그리고 그 밑에 이렇게 다섯 문장을 인용하여 놓았다. 저자 김연수의 주장이다.

 

*"낙토만주는 고구려와 발해의 환유로 민족의 꿈이고 기도이며 또 기도가 소원하는 파노라 마의 내용이다.”

*"만주국을 찬양하는 시가 아니라 만주가 사실은 고구려와 발해의 땅이었으니 의당 지금도 우리의 땅이라는 저의가 담긴 시이다.”
*"오색기(五色旗)도 만주국의 국기인 오색기가 아니라 고구려의 오색기다.”
*"낙토, 오색기, 오족 등 그의 어용적 자세를 추정하게 하는 낱말들을 쓴 것은 실은 저의를 감추고 검열 등에 선수를 치기 위한 (검열관이 의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한전략이었다

*"시를 외향적 의미로 단정 짓는 무지한 현상이 안타깝다. 윤해영이야 말로 일제 강점기 재 만 시인 가운데서 가장 특출한 방식으로 저항정신을 구현하면서 저항의 길을 걸어간 한 사람의 저항시인이다. 그것은 민족의 꿈을 이렇게 아리랑 정서에 담아 검열과 감시의 장애물을 넘어 민족을 향해 읊은 진솔한 시인이 달리 없기 때문이다."


2011, 삼목은 한국의 아리랑문화’(국제문화재단 편)를 공동 집필했다. 그 중에 훼절의 아리랑, 악극 아리랑항목에서 1940년대 일제 국민총동원 체제 악극 상황을 파악했다. 일본어로 진행되는 나니오부시 아리랑같은 작품이 그 하나인데, 유독 아리랑을 표제로 내세운 작품들이 악극화 하였던 것이다. 당연히 연예단을 동원하여 군수공장 같은 곳의 위문공연용이었다. 이 현상에 대해 삼목은 이런 결론을 내린 바 있다.


"소수민족이나 식민지 상황에서 외세에 대한 최후적인 대항에서는 가장 민족적인 정서로 대응한다. 저항력과 결속력을 동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대동아전쟁의 말기적 상황에서 아리랑을 내세워 저항한 것은 이런 이유가 아닐까?”


삼목은 오랜만에 윤해영의 아리랑 시를 떠 올렸다. 그리고 나름의 매듭을 지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윤해영도 당시 만주국의 군사적 팽창의 위협 하에서 아리랑이라는 민족적인 정서를 내 세워 최후적인 저항을 한 것은 아닐까라는 해석이다.


삼목의 청춘시절 ‘1/694의 아리랑, 30여 년을 앓고 있다. 아리랑의 해석은 간단하지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