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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71)

신청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특집부
기사입력 2022.12.1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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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신청은 전국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경기재인청의 존재는 '경기도창재도청안(京畿道昌才都廳案)''경기재인청선생안'의 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건륭 사십구년에 작성되었으므로 1784년이다.


    남도지역에서는 나주장악청, 장흥신청, 여수 악공청, 진도장악청 등이 대표적으로 거론된다. 내가 참여해 이경엽 교수와 함께 연구 출판했던 '여수 영당 풍어굿, 악공청'(민속원, 2007)을 참고해보면 여수악공청의 중건은 1939년이다. 신청의 선생들 내력을 기록한 선생안(先生案)1928년에 작성되었으므로 여수 또한 역사를 조선시대로 올려 잡을 수 있다. '선생안'은 각 관아에서 전임 관원의 성명, 직명, 생년월일, 본적 따위를 기록한 책을 말한다.


    화면 캡처 2022-12-12 075557.jpg
    나주는 남도의 행정중심 도시로 크고 작은 공적 행사가 많았다. 금성관 망궐례, 향교 석전대례 둥이 대표적이다. 나주 신청은 삼현육각으로 행사들을 수행하였는데 그러한 전통은 자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나주신청 삼현육각 행악-나주신청문화관 제공

     

    이경엽 교수의 발표에 의하면 장흥신청은 1832(순조 32)'신청완문(神廳完文)'이 작성되는 것으로 보아 그 내력을 확인할 수 있다. 1894년 해체되었다가 1919년 중건되었고 1921년에는 외청 세 칸을 더 지어 신청 기능을 복원하게 되었다. 뜻있는 지역 유지들이 갹출하여 음악전수를 할 수 있게 된 내력을 적은 장악청중건기가 전한다. 악공청, 장악청, 신청 등의 용어가 병용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1936년 동아일보 기사는 진도 장악청 정보를 전해준다. 당시로부터 약 300여 년 전부터 진도읍 성내리 장악청(?樂廳) 속칭 신청(神廳)이 있어 일반 광대들에게 조선음악을 가르쳤다는 내용이다. 한자표기는 달라도 속칭 신청이라 했다는 언술이나 기타 내용들은 모두 신청(神廳) 관련 정보들이다. 이 언급을 적용해보면 신청의 존재가 1630년대로 소급된다.


    광해군 일기 10(1618) 1016일 기사도 참고가 된다. 재인들의 우두머리를 의미하는 산주재인(山主才人), 도산주(都山主)라는 호칭이 나오기 때문이다. 이 호명은 재인 집단의 존재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재인청, 신청, 광대청 등 전문음악인들의 집단과 생활을 추정해볼 수 있게 해준다. 이 정보들을 보면 신청이 전국적으로 존재했으나 전라도지역이 가장 활발했음을 알 수 있다.

     

    신청의 역사를 고려말 진도 장악청으로 올려 잡을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더 많은 연구와 추적이 필요해보이지만, 이른바 무계들의 집단이자 공사의 음악업무를 담당했던 신청의 역사가 매우 오래되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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