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6 (목)

[특별기고] 박승의,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 수상 소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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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박승의,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 수상 소감

  • 편집부
  • 등록 2022.12.0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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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대한민국 영주귀국 사할린 동포 박승의(파주시 )교수의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가 우수상을 받았다. 사진은 박승의 교수와 부인 김소자 여사. 2022.11.24.

 

사할린으로 이주한 한인여성의 이야기를 담은  '나의 할머니 김씨 이야기’가 KBS한민족방송이 주최한 '제 24회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성인 부문에서 ‘우수상’을 받았습니다. 사실 이번 수상이 처음이 아니었습니다. 2020년에 제 22회 KBS라디오 방송 체험수기 공모에서 나의 『가라우토로 팔려간 우리 이쁜 고모』가 '한민족'상을 수령했습니다. 심사위원님들께 나의 소박한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KBS 한민족방송은 지난 24년간 북방동포체험수기 공모를 펼쳐 우수작에 대해 수상을 해왔습니다. 2020년부터 ‘북방동포체험수기 공모전‘을 ‘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으로 명칭을 변경하고 고려인과 사할린한인 동포들 대상으로는 정체성 제고를 위해 특별히 ‘한민족상’을 선정해 수여했습니다. 제가 첫번째 수상자로서 영예를 안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2020년 11월 21일 토요일에 방영된 KBS라디오 한민족방송 '보고 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연출 김경희, 작가 김경순)은 토요초대석(진행 이소연, 박해상) 프로에 출연하여 수기작품에 대한 이야기 뿐만 아니라 사할린 한인 동포의 이야기를 들려주었습니다.


2020년 제22회 KBS 한민족 체험수기 공모 당선 '낮선 이름 앞에서 당당히' 작품집에서 김이정 소설가는 심사평에서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동포들은 "중국 동포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응모원고가 적지만 서사의 밀도와 인물들의 생동감은 뒤지지 않았습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혼자 또는 가족과 사할린에 강제로 이주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담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 산판과 군사기지 건설장에서 모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건강의 악화와 자녀의 양육 및 교육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모국귀환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지원 대상자들은 영주귀국을 선택하느냐, 사할린에 잔류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한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 지원 대상에 제외되기 때문에 또 다시 형제자매와 자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합니다. 이산의 이산은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됩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라면 주로 남자들이 강제로 동원되어 혹독한 노동에 시달린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을 찾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후토로 가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사실을 묘사한 글은 전혀 없습니다. 작은 글이나마 그들의 공적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나의 아버지의 고향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입니다. 사할린에 가족이 이주하게 된 것은 1929년경 고모가 제일 먼저 사할린 땅을 밟게 되면서입니다. 우리 부모님은 1939년 결혼 후 한달 반만에 강제모집으로 가라후토에 가게됐습니다. 그 당시 오찌아이 (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습니다. 어머니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셨고 시부모를 모시고 고향에 거주하기를 원했지만 임신 상태에서하여 일본을 경유해서 가라후토에 들어 오셨습니다. 사할린에서 누이가 태어나고 1942년 제가 태어났습니다. 그리고 1945년 해방 전 할머니와 큰 아버지 가족들도 사할린으로 이주해 왔다고 합니다. 1945년 해방을 맞았으나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끝끝내 타국의 땅에 묻혔습니다.


한국에서 일본 교장선생 집에서 가정부로 일하던 할머니가 아버지가 있는 사할린으로 오길 희망해 1945년 해방 직전 큰아버지 가족과 함께 사할린으로 이주해 와서 할머니를 비롯해 부모 형제가 모두 사할린으로 이주해 오게 되었다고 합니다. 할머니 이야기를 쓴 수기를 통해 국내에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사할린 한인 여성의 삶을 이야기해주었다는 점에서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사할린에서 여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남자들은 탄광에서 노동을 하고, 여자들은 아이 기르면서 텃밭에서 일하며 시장에 내다 팔고 고생 많이 했습니다.


모집꾼에 의해 속아서 사할린으로 이주하게 된 20대 젊은 한인들은 대부분 빈농 출신들입니다. 남자들은 탄광에서 석탄 채취 노동을 하거나 산림에서 벌목공으로 일을 했습니다. 그러나 월급이 많지 않았습니다. 여자들은 사할린의 혹독한 기후 조건 속에서 맨손으로 땅을 일구어 텃밭을 만들고 거친 농사일을 하며 아이를 돌보고 가족 뒷바라지를 하며 생활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들은 자녀에 대한 교육열이 강했다고 말합니다.


1945년 일제 패망 후 사할린에서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귀국했지만 조선에서 이주해간 한인들을 무국적 상태로 살아야만 했습니다. 젊은이들은 무국적이다 보니 사할린섬을 벗어나 대학을 진학하고 싶어도 못했습니다. 후에 일부는 소련 국적을 부여받아 모스크바에서 대학교육을 받거나 일부는 북한 국적을 부여받고 김일성대학에 입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남한이 고향인 사할린한인 대부분 무국적자로 있으며 한국으로 돌아가기만을 고대했습니다.


나는 1945년 해방 후 북한 교사가 가르치는 조선학교에서 7년간 조선어 교육을 받았습니다. 사할린국립사범대학에 들어가서는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면서 우리말을 많이 잊게 되었습니다. 1988년 서울 올림픽 이후 사할린땅에 ‘한국 붐’이 일었습니다. 이후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한국어를 공부하고 사할린국립대학에서 19년간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경제를 가르치는 한국학 교수로 재직하였습니다.


1990년대에 사할린의 '새고려신문'에서 '무궁화' 문학콩클을 진행했는데 많은 한국어를 배우는 학생들과 독자들의 작품들이 수상했습니다. 그러나 현재 사할린 한인 사회에서도 안타깝게도 한국어가 많이 잊혀져 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러시아에 정착해 사는 젊은 층에게서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필요성을 못느끼고 있기 때문입니다. 


저는 나이 40대에 들어서면서 한인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한국어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게 됩니다. 나는 여기에 희망을 두고, 사할린 한인의 우리말 언어문화 복원․재생 사업에 매진해 오고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 사할린 한인 1세대가 조국으로 영주귀국함에 따라 사할린 한인 문학 활동은 중단된 상태입니다. 


그래도 'K-한류' 붐을 타고 한국문화를 체험하고 한국어를 배우는 어린 세대가 늘어난다고 하니 다음 세대에서도 사할린 한인문학이 꽃 피울 수 있도록 바래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