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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7)

여순사건, 반란인가 항명인가 민중항쟁인가

특집부
기사입력 2022.11.14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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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우린 너무 몰랐다'(통나무, 2019)를 펴낸 도올 김용옥의 고백이다. "내가 어렸을 때 여순반란이라고 들은 것은,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14연대의 군인들이 지창수 상사 등의 빨갱이 선동으로 반란을 일으켜 양민을 학살한 사건이라는 것이었다.


    대학교 때 현대사에 대한 의식이 생기면서, 그것은 반란이 아니고 제주에서 서청(서북청년회)과 경찰이 양민을 학살하는데 힘이 모자라 여수에 있는 군대까지 동원하여 제주도로 가라고 국가에서 명령하니까 지창수 등 14연대의 의식 있는 군인들이 그 명령에 불복하고 일어나서 시가전을 감행하다가 결국 쫓기어 지리산으로 들어가게 된 사건 정도로 이해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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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린 너무 몰랐다 - 해방, 제주4.3과 여순민중항쟁',  김용옥 (지은이), 통나무 출판, 2019.

     

    그래서 그때는 여순반란이 아니고, '여순항명사건'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요즈음에 와서 그것은 '항명'이 아니라 반드시 '민중항쟁'으로 인식되고 명명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의식을 갖게 되었다." 반란-항명-항쟁으로 인식의 전환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주철희도 여순항쟁으로 호명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한다. 이름을 옳게 정하는 것을 정명(正名)이라 한다. 명칭이 실재에 상응한다는 점에서 그렇다.


    여순사건에 대한 정당한 호명을 하려면 이런 주장들을 수용해야할까? 위키백과는 반란군에 의해 경찰 74명을 포함해 약 15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고 군경에 의해 2,500여명의 민간인이 살해당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기왕의 '반란'이라는 시각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하지만 여러 사람들의 노력으로 실상들이 밝혀졌고 지금도 밝혀지고 있는 중이다. 주철희는 여순항쟁으로 희생당한 사람이 만 오천 명에서 이만 명에 이른다고 주장한다. 19481019일부터 지리산 빨치산 토벌이 완료된 195541일까지를 포함해야하고 특히 4천명에서 5천명까지 전국의 감옥에 흩어져 수감되었던 관련자들이 6.25가 발발하면서 처형당하였으므로 이 숫자를 당연히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다.


    2만에서 3만에 이른다는 제주 4.3 희생자 숫자에 육박하는 규모임을 알 수 있다. 도올이 책 제목을 '우린 너무 몰랐다'라고 지은 까닭이기도 하다. 비로소 연구가 시작되었으니 실상들이 더 밝혀질 것이다.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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