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월)
유구한 세월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이규진(편고재 주인)
근래 우리 사회에서 윤동주 시인처럼 많은 사람들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는 인물도 흔치 않은 것 같다. 이처럼 인기가 있다 보니 해방 후 발행된 책 치고는 윤시인의 유고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 또한 값이 만만치 않다. 정음사에서 1948년에 나온 3주기 초판본은 천만원을 넘은 지 오래고 같은 출판사에서 1955년에 나온 10주기 증보판 또한 시중에서 백만원을 홋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런데 초판본과 증보판은 장정이 완전히 다르다. 따라서 수집가나 장서가라면 적어도 두 권 모두를 갖고 있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을 듯싶은 책들이기도 하다. 하지만 귀하기로 말하면 초판본이나 증보판보다도 더 귀한 것이 있다. 3주기 추도회를 맞추어 만들고자 한 초판본 표지가 완성이 안 되어 급히 10부를 만들어 증정한 최초본이 있는 것이다.
전에는 나도 최초본은 아니지만 초판본과 증보판 시집들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사정이 있어 책들을 정리할 때 모두 내 손을 떠났던 것 같다. 그 후로는 값도 만만치 않아진데다 옛날 같은 열정도 없다보니 나와는 인연이 없는 것이거니 하고 관심을 끊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근래 우연찮게도 1955년 10주기 증보판으로 나온 이른 바 재판본 <하늘과 바람과 구름과 시>를 구입했다. 이처럼 생각지도 않았던 것을 구입한 것은 표지가 너무 많이 헐어 스카치테이프를 붙이는 등 손상이 심해 값이 헐한 탓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와중에 다행인 것은 그나마 내용이 온전한 것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이 증보판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의 남루를 보면서는 많은 생각이 들고는 한다. 오래 된 귀중본이라고해서 깨끗한 것만이 능사일까. 잘 펼쳐 보지도 않아 곱게 보관하는 것만이 애정이요 사랑일까. 그것보다는 보고 또 보고 이웃에게도 빌려 주고는 해서 닳고 헤어지다 못해 남루를 뒤집어쓰고 있는 것이 오히려 책을 사랑한 애정의 증표는 아닐까. 청춘남녀가 결혼을 해 오래 살다보면 그 곱던 얼굴도 주름진 얼굴이 되는 것이 당연한 일이요 정상적인 결과이듯이 책 또한 세월의 무게를 견디다 보면 운명처럼 낡아져야 되는 것은 아닐까.
어찌 책뿐이랴. 어찌 도자기라고해서 그런 점이 없으랴. 깨지고 금가고 해서 원래의 제 모습을 잃은 채 버림받고 있는 도편들을 보고 있노라면 그동안의 험난했을 여정과 세월이 손에 잡힐 듯 보여 안타까워 지고는 한다. 남들처럼 온전하게 살아남아 박물관 진열실에라도 의젓이 앉아 있어야 할 것들이, 아니 소장가의 애무를 받으며 뜨거운 눈길과 애정으로 고임을 받아야 마땅했을 것들이 버림받고 잊혀진 채 편고재에 와 뒹굴고 있는 것을 보면 눈물겹도록 마음이 짠해지고는 한다.
분청상감용문매병편도 그런 것들 중의 하나다. 용이란 왕권의 상징이다. 조선 후기로 오면서 관요에서도 사번이 성행함에 따라 용충이니 용병이니 하는 것들이 일반인들에게도 흘러 들어갔지만 분청이 성행한 15,16세기에는 용이란 왕실 말고는 감히 시중에서 넘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분청상감용문매병이 어쩌다 많은 부분 손상이 되어 조각으로 남아 있는 것일까. 도대체 그동안 무슨 사연이 있었기에 이렇게 험한 모습으로 남아 있게 된 것일까.
분청매병은 전성기의 청자매병과는 달리 입술이 반구형이 아니라 밖으로 벌어지는 형태다. 어깨가 부풀어 올랐다 굽으로 이어지는 S선 또한 청자매병보다 굴곡이 심한 편이다. 분청상감용문매병편은 윗부분이 몽땅 사라져 버려 확실한 것은 알 수 없지만 그와 같은 분청매병의 특징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비록 상체를 잃어버린 불구의 몸이지만 남아 있는 부분의 문양을 보면 온전했을 때의 그 당당하고 화려했을 모양이 상상되고는 한다.
분청상감용문매병편은 몸체 중간부터 윗부분이 몽땅 달아나고 현재는 아래 부분만 남아 있다. 굽은 평굽인데 굽는 과정에서 무언가를 받쳤던 듯 가운데가 둥글게 유약도 안 묻어 있고 흙기운이 그대로 살아 붉은 태토를 보이고 있다. 휘어져 굽 쪽으로 벌어지는 밑 부분에는 백상감의 연판문을 장식하고 있으며 세 줄의 선으로 구분을 지은 남은 윗부분에는 흑백상감으로 용무늬를 새겼는데 몸체와 다리와 꼬리만 보일 뿐 머리는 날아가 버리고 없다. 그래도 남은 부분만 보아도 상당히 고급의 분청상감용문병이었음을 짐작케 한다. 유약이 안 묻은 안쪽은 물레자국이 선명한 가운데 태토가 두꺼워 전체적으로 무게도 상당히 나가는 편이다.
분청상감용문매병편은 어디서 사용되었던 것일까. 산화의 흔적으로 보아 도요지에서 파손된 것 같지는 않고 일단 무덤에 묻혔던 것만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고 하면 사용하다 무덥에 넣었던 것인지 아니면 생것 그대로를 묻었던 것인지도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궁금한 일이 어디 그뿐이랴. 애초에는 성했을 몸이 어디서 어떤 이유로 파손된 것인지도 궁금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여하튼 상체를 잃고 하체만 남은 이 분청상감용문매병편을 보고 있노라면 5백년 유구한 세월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그 고단했을 세월이 남의 일 같지 않게 안타까워 지고는 한다. 그러나 이 또한 오랜 세월을 감안해 사랑과 애정으로 보듬어 안지 않으면 안될 우리 조상의 체취요 유산이 아니겠는가.
사족이지만 장서가나 수집가들은 대개 책의 보관 상태를 중히 여긴다. 깨끗해야 시중에서는 값이 더 나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조금만 흠이 있어도 기피하는 결벽증 환자들도 더러 있다. 책뿐이 아니라 도자기도 마찬가지여서 개중에는 깨지고 금간 것에 대해 아예 손사래를 치는 사람도 있다. 그 자체로 나쁘다고만 할 수는 없는 일이지만 이처럼 청탁을 가리다 보면 맑은 물에 물고기가 안 꼬이듯 좋은 물건을 만지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는 일이다. 아름다움이 어찌 젊은 사람에게만 주어진 특권이겠는가. 주름지고 허리 꼬부라진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도 인간미 넘치는 아름다움은 있고 보면 헐은 책이나 깨진 도자기에도 나름의 의미는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이를 대하는 우리의 마음도 완전한 것에만 연연해하는 조급성을 탈피해 넉넉하고 푸근한 포용력은 필요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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