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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모 특집] ‘이어령의 말’

김삼목 대기자
기사입력 2022.02.26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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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3년 강원도 철원 최전방에서 근무할 때, 고단한 세월을 견디는 데는 친구가 보내주는 월간 문학사상덕이었다. 봉투를 여는 순간 만나는 첫 페이지의 이 달의 말씀을 단숨에 읽는 만족감 때문이었다. 내게 이어령은 이 글의 필자로 존재하기 시작했다.


    오늘 선생의 부음을 들었다. 간간히 들어오기로는 몇 번의 수술, 그리고 투병 소식이었다. 만남도 있었다. 첫 만난남은 장관시절 표재순선생과 아리랑축제’기획안을 가지고 장관실에서 만난 일이고, 기억에 남는 만남은 아리랑TV' 명칭과 관련한 국제방송교류재단과의 간담회장에서다. 내가 제안한 아리랑방송을 탁견으로 평가하여 결정하는 계기였다.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지난해 시인 이근배 선생의 벼류 특별전오픈식장에서였다. 그 풍모에, 그 말주변은 변함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그 분이 운명을 달리했다고 한다.


    몇 년 전부터 인터뷰 기사의 들을 모은 컴퓨터 파일 일득록(日得錄)’을 갖고 있다. 지난 해 말 이선생의 말들도 보이는 대로 담았다. 오늘 선생을 기억하며 일부를 꺼내어 본다. 그런데 찾아야 할 한 마디를 찾지를 못했다. 그것은 장관 퇴임 인터뷰였는데 거시서 "이제는 형용사와 부사는 빼고 주어와 동사만으로 글을 쓸 것이다"란 선언이었다. 물론 지키지 않았다.


    하여튼 오늘 현란함과 다식(多識)의 변주를 반추해 보고 싶다. 내 개인 취향으로 모은 말일 뿐이다.


    # "나는 학자가 아니었다. 문학하는 사람이었다. 그 문학을 대학에서 강의한 거다. 문학만이 세상만사를 설명할 수 있다. 문학은 자연도 다루고 윤동주처럼 별도 노래한다. 세상에는 문학의 대상이 아닌 게 없다"(1986년 한 문학상 시상식 축사에서)


    # "일본이 축소 지향을 유지해 공업사회의 거인이 됐지만, 대륙 침략을 통한 확대 지향을 시도했던 것은 처참한 실패로 끝났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198988올림픽 평가회의에서)


    # "내가 장관으로서 가장 잘 한 일은 노견(路肩)’이란 행정 용어를 갓길로 바꾼 것이다.그리고 디지로그란 말을 쓴 것인데, 현실 변화에 창조적으로 대응하자는 의미로 쓴 말이다.”(8순 기념 모임에서)


    # "나는 소설가 김동리, 모더니즘 시인 조향, 소설가 이무영을 각각 '미몽(迷夢)의 우상', '사기사(詐欺師)의 우상', '우매(愚昧)의 우상'이라고 비판한 적이 있다. 오만이다. 화해하였다.”(2000 11 21 한 좌담회에서)


    # "존경은 받았으나 사랑은 못 받았다. 그래서 외로웠다. 다르게 산다는 건 외로운 것이다. 세속적인 문필가로 교수로, 장관으로 활동했으니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실패한 삶을 살았다. 겸손이 아니다. 나는 실패했다. 그것을 항상 절실하게 느끼고 있다. 내게는 친구가 없다. 그래서 내 삶은 실패했다. 혼자서 나의 그림자만 보고 달려왔던 삶이다. 동행자 없이 숨 가쁘게 여기까지 달려왔다. 더러는 동행자가 있다고 생각했지만, 나중에 보니 경쟁자였다"(2009년 04월 20일. 서울시청 강연에서)


    # "죽음이 목전에 와도 글을 쓰겠다"(2017년 암을 선고받아 두 차례 큰 수술 받은 후, 더 이상의 치료 중단을 선언하고)


    # "내가 돌상에서 돌잡이로 책을 잡은 걸, 어머니는 두고두고 기뻐하셨다. 그런 어머니 밑에서 자라서 나는 책을 읽고 상상력을 키우는 인간이 됐다. 짧게 말하겠다. 내가 닭은 빛을 토할 뿐 울지 않는다는 문장을 쓴 적이 있지만, 나는 계유생(癸酉生)이라 늘 울고 다니기만 했다”(201902월 27일. 울산시민강좌에서)


    # "문학의 가치는 정치적 불온성 유무의 상대성 원리로 재판할 수 없는 다른 일면을 지니고 있다. 서로 누운 자리는 달랐어도 우리는 같은 꿈을 꾸고 있었을 것이다. 보수·진보, 참여·순수 어느 한쪽의 흑백 하나로 보면 어떤 시인도 도그마의 희생양이 된다. 김수영에게 있어서 시는 자유요, 그 자체이다”(김수영 50주기 추모 문집 기고문)


    # "모든 공적인 직함을 내던지고, 은퇴하겠다. 나에게 지금까지는 죽음이 생과 함께 있었지만, 이제는 죽음과 직면했다. 오늘 할 수 있는 일들에만 전력투구하겠다. 지금 쓰고 있는 책만 10종이 넘는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쓰고 그렇게 내가 하고 싶은 일들을 하겠다"(매일경제 201504 14일자 은퇴 선언식에서)


    # "지성의 종착역은 영성(靈性)이다. 하나님도 인간이 너무 고통스러워하면 가엾게 여겨서 잠시 그 자비로운 손으로 만져줄 때가 있다. 배 아플 때 어머니 손은 약손이라고 만져주면 반짝 낫는 것 같지 않나. 그때 나는 신께 기도한다. 모든 게 선물이었다. 우주에서 선물로 받은 이 생명처럼, 내가 내 힘으로 이뤘다고 생각한 게 다 선물이더라.”(2021 07 27 인터뷰에서)


    # "코로나의 창궐에 대해서는 죽음을 통해 황폐화된 개인을 응시하게 된 것이며 죽음이 우리 사회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두고 봐야할 것이다

    코로나19를 통해 메멘토 모리를 다시 깨닫게 된다. 기독교에서 제일 큰 죄악이 인간의 오만이다. 우리는 인간 문명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았다. 전 인류가 이 세상 모든 가치 가운데 생명 이상의 것이 없다는 것을 동시에 깨닫게 된 것이라 생각한다"(2022 0124일 출간, 대화록 '메멘토 모리'에서)


    # "병이 깊지만, 병원 치료를 받지 않고 있어요. 어차피 누구나 마지막 동행자는 병이니까 싸움이 아니라 친구로 지내려고 합니다. 부동산이나 돈을 많이 가지고 있는 사람은 세상을 떠나도 그것이 그대로 남아 있지만 머리와 가슴속에 들어 있는 생각과 느낌은 글로 남기지 않으면 흙이 되고 맙니다. 그래서 더 이상 뒤로 미룰 수 없어 글 쓰는 일을 서두르며 마지막 시간을 바치고 있지요. 몸은 아프지만 지적 호기심이 사라지지 않으니, 오히려 눈빛이 빛난다고 주변 사람들이 놀라더군요. 고령화 시대에 인문학자는 삶의 마지막을 저렇게 맞이할 수 있구나 하는 것이 독자들에게 새해 희망의 의미로 전해지길 바랍니다.”(2018년 01월 05일  문화일보 인터뷰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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