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2 (일)

[을지로 아니리] (28) “축! 유네스코 국내 추천 결정!” 대 "절대 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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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지로 아니리] (28) “축! 유네스코 국내 추천 결정!” 대 "절대 NO!"

을지로 아니리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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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시대 이후 건설된 사도광산 갱도, 태평양전쟁 기간 2천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조선인이 일제에 의해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강제노역했다.

 

일본 정부는 지난 1일 니가타현 사도 섬 사도광산을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공식 추천했다. 이 때문에 오지에 있는 사도광산이 유명해졌다. 일본인 중에도 이곳에 가 본 사람은 많지 않을 정도로 잊혀진 곳이다. 일본 혼슈(本州)는 전국 어디서도 이동하기 쉽지 않은 거리 탓이다. 도쿄(東京)역에서 신칸센을 타고 2시간, 니가타항에서 쾌속선을 타고 70분을 가면 사도 섬 료쓰(兩津). 거기서 다시 버스를 타고 1시간 20여분을 구불구불 산길을 올라야 사도광산에 이른다.


이 광산은 사도섬의 40여개 광산을 통칭하는 말이지만, 이번에 유네스코에 추천된 곳은 섬의 서북쪽에 있는 아이카와·쓰루시(相川·鶴子) 금은(金銀)광산과 니시미가와(西三川) 사금(砂金)광산이다. 이 중 에도(江戶)시대(1603~1867) 세계 최대 규모의 금 생산지로 유명한 아이카와 금은산에는 태평양전쟁 기간 동안 조선인 노동자가 대거 동원돼 구리와 철, 아연 등의 전쟁 물자를 채굴했다.


이 광산의 관람 가능한 곳은 에도시대 금광 일부를 재현한 소다유(宗太夫) 갱도와 메이지(明治)시대(1868~1912) 이후 사용된 도유(道遊) 갱도이다. 이 갱도가 활발하게 개척되었던 에도시대는 전국에서 10만 명이 몰려들었고, 일본에서 가장 부유한 지역 중 하나로 '도쿠가와 막부의 지갑'으로 불리기도 하였다.


이 광산 태평양전쟁 후반기에는 1200~2000명의 조선인 노동자가 동원돼 가혹한 환경에서 일했다. 시기상으로 이중징용으로 조선인들이 동원되었다고도 볼 수도 있다. 인간성이 말살된 희생이 있었던 곳이다. 그런데 이 광산 입구에는 이런 게시물이 세워져 있다.


"! 유네스코 국내 추천 결정! 쇼와(昭和)14(1939) 노동동원계획으로 조선인 노동자의 일본 동원이 시작, 쇼와20(1945) 9월 패전에 의해 조선인 노동자가 귀조(帰朝, 조선으로 돌아감)”


이 때문에 한국은 이 광산이 유네스코에 등재되는 것을 반대한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1인 릴레이 피켓 시위를 하고 있다.


"유네스코 사도광산, 아리랑과 함께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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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유네스코 사도금광, 아리랑과 함께 할 수 없다!> 1인 시위가 아리랑연합회에서 전국과 동포사회에서 릴레이로 펼쳐지고 있다. 사진은 사할린주이산가족협회 이수진 명예회장이 일본 정부에 보내는 메세지이다. 이수진(1942년생)회장의 아버지(이은일)는 사할린으로 강제동원 되었다. 태평양전쟁이 막바지로 몰리자, 지옥섬이라는 악명 높은 군함도로 다시 한번 강제징용 된 이중징용 가족이다. 당시 종전후 천신만고 끝에 사할린으로 돌아온 아버지는 "하시마 탄광으로 들어가는 건 보지만 나오는 사람은 못 봤다. 3100여 명 중에서 들어온 사람은 얼마 안된 것 같다. 한 10명 될까 말까."라고 증언했다고 아들은 전한다. 202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