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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와서 뭘 어쩔 수 있으랴
이규진(편고재 주인)
떠나간 여인은 아름답다. 아니 멋이 있다고 해야 옳을 것이다. 부부가 금술이 좋아 백년해로를 하는 것은 존경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평생을 지지고 볶는 삶속에 무슨 멋이 있고 풍류가 있을 것인가. 오죽하면 동서고금의 많은 시인들이 부부를 노래한 시는 적어도 떠나간 여인에 대한 그리움을 토로한 시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떠나간 여인에 대한 안타까운 그리움. 그 것 자체가 멋이요 풍류는 아니겠는가. 도자기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다. 말 못할 사정 때문에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도자기들은 왜 그리도 안타깝게 그리운 것일까.
내게도 화금청자접시편이 한 점 있었다. 내가 유일하게 구입해 갖고 있었던 화금청자라서 오래도록 기억에서 지워지지를 않는 모양이다. 구입하기는 인사동에서였는데 후일 답십리 상인에게서 누군가에게 빼앗겼다고 투덜거리는 소리를 들은 바 있는데 가만히 전후사정을 살펴보니 바로 내가 구입했던 바로 그 화금청자접시편을 두고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화금청자접시편은 내게도 오래 머물지는 못했다. 가깝게 지내는 조박사에게 자랑삼아 보여 준 적이 있었는데 그 것이 화근이 되어 결국은 빼앗기고 만 것이다. 추사와 청자를 좋아해 좋은 물건도 더러 갖고 있는 조박사가 왜 도편까지 관심을 갖게 되었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나보다도 더 아끼고 사랑할 것만 같이 적극적으로 구애를 하는 데야 별 도리가 없었던 것이다.
청자 중에서도 사실 화금청자는 귀한 것이다. 화금청자에 대해 전에는 상감을 하듯 새겨 넣은 것이라고 알려졌던 적이 있었다. 그러니까 완성된 청자의 무늬 선을 따라 예리한 도구로 홈을 파서 흠집을 내고 여기에 금니(金泥)를 메워 장식하는 기법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여러 가지 실험을 통해 완성된 청자의 유면 위에 기름 성분의 매질과 금분을 혼합해 붓으로 장식 후 700~850도 정도의 저온에서 소성 금분을 유면위에 고정시키는 방법으로 밝혀지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것은 저온에서 다시 한 번 소성하는 방법이다. 이는 유상채 기법으로 중국에서는 이를 이용해 삼채니 오채니 화려한 자기를 많이 만들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전혀 없던 유일한 방법이어서 관심을 끌 수밖에 없는 것이다.
현재 화금청자로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청자상감원숭이문금채편병과 화금청자모란당초무늬대접이 널리 알려져 있다. 편병은 1933년 봄 개성 고려 왕궁지인 만월대 근처에서 인삼건조장을 개축 공사하던 중 구연부와 동체 일부가 파손된 채 발견된 것이다. 화금청자와 관련된 자료로는 고려사에 조인규가 원세조에게 화금자기를 바쳤다는 기록과 충렬왕 23년(1297) 원 성종에게 금화옹기를 바쳤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이러한 기록과 실물의 모양이나 문양 등으로 미루어 보아 화금청자는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 경 만들어진 것이 아닌가 추측 된다
자, 그러면 화금청자접시편을 살펴보자. 화금청자접시편은 안팎으로 비색의 유약이 곱게 입혀져 있는 가운데 굽은 유약을 훑어내고 안굽에 규석받침을 하고 있다. 굽 쪽으로 선 사이에 연주문을 두고 있으며 입술 가까이에는 뇌문을 돌리고 몸체에는 국화문을 두고 있다. 안쪽으로는 바깥쪽보다도 문양이 조금 더 복잡한데 중앙 원 안에는 무언가 문양이 있었던 듯 싶은데 훼손되어 알 수가 없다. 중앙의 원을 돌아가며 여의두문과 우점문이 있으며 우점문 사이에는 학을 배치하고 있다. 그리고 꺽여 올라간 입술에는 아래위로 선을 돌리고 그 사이에 갈대와 오리의 모습이 선명하다. 이로보아 1/3정도밖에 안 남아 있는 도편이지만 상당히 고급으로 만든 14세기 전반의 청자접시임을 알 수 있다.
문제는 화금이다. 화금청자접시편에서 화금은 어디에 사용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문제다. 결론부터 이야기 하면 화금은 주로 선을 따라 입혀져 있다. 바깥쪽을 보면 굽 주변의 우점문을 두룬 선과 입술 가까이 뇌문을 감싼 선에서 화금이 보인다. 우점문 주변의 것이 미미한 흔적만 보이는데 반해 뇌문을 감싸고 있는 선에서도 자세히 보지 않으면 흔적을 발견하기가 쉽지 않다. 가장 선명히 보이는 것은 안쪽의 꺽여 올라간 입술 부위의 맨 위에 위치한 선이다. 여기서는 선명하게 입힌 화금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자세히 보면 여의두문에도 화금은 칠해진 듯 보이나 이 또한 자세히 살펴보지 않으면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이처럼 이제는 많이 지워져 아쉬움을 남기지만 흑백상감의 무늬에 화금마져 그대로 살아 있을 때를 상상해 보면 얼마나 화려해 보였을까 짐작이 가고도 남는 일이다.
앞서도 이야기 한 바와 같이 떠나간 여인은 아름답다. 내 품을 떠난 도편 또한 그리울 수밖에 없다. 나로서는 아마도 유일하게 갖고 있던 화금청자이기 때문에 아쉬움은 더 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어쩌랴. 나보다도 더 사랑하겠다는 조박사 손에서 오래도록 잘 보존되기만을 바랄 뿐 이제 와서 뭘 어쩔 수 있으랴. 글을 쓰기 위해 잠시 빌려와 며칠 내 손에 머무는 동안만이라도 사랑하는 수밖에 별 도리가 있으랴. 참고 삼아 이야기를 덧붙인다면 도자기 전문학자로 널리 알려진 모교수의 견해로는 이 화금청자접시편은 14세기초에 만든 것으로 만월대에서 출토된 것이 아닐까 추정된다고 했다는 전언이다. 만월대 이야기는 아마도 이곳에서 출토된 청자상감원숭이문금채편병을 염두에 둔 지적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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