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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60

특집부
기사입력 2021.10.28 1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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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흙의 소리

     


    이 동 희

     

    아악雅樂 <1>

    세종 15(1433) 11일 정조正朝에 임금이 근정전에 나아갔고 이에 회례연會禮宴을 의식에 따라 베풀었다.

    이날, 설날 아침 문무백관이 모여 임금에게 배례한 뒤에 베풀어진 연회는 아주 특별하였다. 아악雅樂이 처음으로 연주되었기 때문이다. 박연이 주도하여 개혁하고 새로 완성한 문묘제례악을 이날 처음으로 사용하게 한 것이다.

    아악은 좁은 뜻으로는 문묘제례악을 가리키고 넓은 뜻으로는 궁중 밖의 민속악에 대하여 궁중 안의 의식에 쓰던 당악 향악 아악 등을 총칭하는 음악이다. 정아正雅한 음악이란 뜻이다. 중국 주나라 때부터 궁중의 제사 음악으로 발전하여 변개變改를 거듭하다가 송나라 대성부大晟府에서 대성아악大晟雅樂 대성악으로 편곡 반포함으로써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고려 예종 11년에 송나라 휘종徽宗이 대성아악과 여기에 쓰일 등가登歌 헌가軒架에 딸린 아악기 일습과 아악에 수반되는 문무文舞 무무武舞 등 일무佾舞에 쓰이는 약36벌과 이러한 의식에 쓰이는 의관衣冠 무의舞衣 악복樂服 의물儀物 등을 모두 갖추어 보냄으로써 이땅의 아악의 역사기 시작되었다. 이로부터 대성아악은 원구圓丘 사직社稷 태묘太廟 선농先農 선잠先蠶 문선왕묘文宣王廟 등의 제사와 그 밖에 궁중의 연향宴享에 광범위하게 쓰이게 되었다.

    약은 피리이며 적은 꿩의 깃을 묶어 무악에서 손에 쥐는 물건이고 간은 창이고 과는 방패인데 각종 악을 행할 때 문무는 약적을 무무는 간척을 잡게 하여 배열을 편성한다.

    문성왕은 누구인가. 앞에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는데 공자孔子를 그렇게 부른다. 나라 현종玄宗이 내린 시호諡號이다. 과 성의 위상을 생각해 본다. 의 의미를 생각해 본다. 문묘文廟는 공자를 모신 사당을 말하며 성묘聖廟 근궁芹宮이라고도 한다. 미나리 궁()이라는 것은 무슨 뜻일까.

    좌우간 고려 말에는 악공을 명나라에 유학 보내고 악기를 들여와 명나라의 아악을 종묘 문묘 조회朝會 등에 쓰게 하였고 공양왕 때는 아악서雅樂署를 설치하여 종묘의 악가樂歌를 가르치고 이를 관장하게 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아악을 그대로 계승하였지만 세종 때에 와서 크게 정리되었다. 대개혁을 하여 새 출발을 한 것이다.

    한국 아악은 중국에서 유래한 의례음악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세종에 의하여 창제된 것이었다. 근자에(2010) 출간된 아악 혁명과 문화 영웅 세종(한홍섭)에서 한국 아악이 세종에 의하여 신악新樂으로 창제되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와 함께 문화적 자주국이라는 꿈을 이루고자 했던 세종식 문화대혁명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종은 기존의 중국 아악 대신 한국의 새로운 아악으로 국가의례를 거행하고자 했으며 그로 인해 완성된 신악이 우리 조선 아악이었던 것이다. 중국의 아악이 아니고 우리의 아악을 사용하여 국가의례를 거행한 것이다.

    세종은 박연으로 하여금 궁중 아악을 정비하게 하면서 악장樂章 악보樂譜 악기樂器를 일일이 흠정欽定하였고 모든 음악의 기틀이 되는 대대적 사업을 벌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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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악신문]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60

     

    흠정은 왕이 친히 제도나 법률 등을 제정하는 일을 말한다.

    악리樂理학자 박연은 12율관律管과 편경을 독창적인 방법으로 제조하였고 아악을 고려나 송나라의 대성악을 뛰어넘어 주나라 것에 가까운 아악으로 재정립 복원하여 음악의 새 기틀을 확립하였다. 새로운 토대 위에 음악 이론 환경 제도를 개혁하고 새 뿌리를 내리게 하고 꽃을 피운 것이다.

    제악制樂의 임무를 전관專管하게 된 박연은 악기를 제작하고 조회 제사 등의 아악보雅樂譜를 발간함으로써 아악이 공식 의례음악으로 자리를 굳히게 하였던 것이다. 조선 건국 초 혼란이 안정되어 문물의 정비에 힘을 기울이는 가운데 아악을 독자적으로 복원하여 그 용도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었던 것이고 아악의 융성은 극에 달하였던 것이다. 그 중심에 박연이 있었던 것이다. 줄기찬 상언과 악기의 제조 불굴의 의지는 개혁의 견인차가 되었다.

    신악이 완성된 후 그 첫 의례는 새 역사의 시작이었다. 하나의 혁명적 사건이었다.

    중국의 아악이 아닌 우리의 독자적인 아악을 사용하려는 자주적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중국의 한문이 있음에도 우리의 말 글인 훈민정음을 창제하였고 중국의 음악을 기보記譜하는 악보가 널리 사용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고유의 음악을 기보할 수 있도록 따로 동아시아 최초의 유량악보有量樂譜인 정간보井間譜를 창제하였듯이 우리 문화의 자주적 혁명이었던 것이다.

    "그래 바로 이것이야!”

    박연은 세종 임금의 쾌재를 누구보다 먼저 공감하며 속으로 춤을 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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