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상세페이지

도자의 여로(9)
분청백상감호문편

특집부
기사입력 2021.09.17 07:30

SNS 공유하기

fa tw gp
  • ba
  • ka ks url

    그 흥분, 그 감격, 그 희열

     

                    이규진(편고재 주인)


    합천 하면 해인사가 떠오른다. 해인사가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오를 만큼 유명하다 보니 많은 사람들에게는 합천의 해인사가 아니라 해인사의 합천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다르다. 합천하면 내게는 해인사가 아니라 가회면 외사리가 먼저 떠오른다. 그 곳에 대한 추억과 그 추억을 상기시키는 도편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어느 해 여름이든가 나는 이 외사리를 찾았던 적이 있었다. 서울에서 고속버스를 이용 진주까지 간 후 시외버스를 이용 삼가면 면소재지를 찾은 후 여기서 다시 택시를 대절해 찾은 가회면 외사리는 찻길에서도 한참을 벗어난 외진 산골이었다. 마을은 몇 채의 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운데 대나무가 우거진 뒤편의 가파른 언덕을 오르면 밭이 있고 여기가 분청사기 요지가 있는 곳이었다. 후일 외사리 1호 요지로 명명된 이곳에서는 삼가(三加)명 도편이 수집되는 등 공납용 도자기를 굽든 중요한 도요지다. 그러나 그런 사실들보다도 나를 더 흥분시킨 것은 이곳에서 뜻하지 않게 호랑이 무늬가 백상감 된 분청편을 만난 적이 있기 때문이었다.


    밭은 2단으로 되어 있고 그 경계를 이룬 밭둑 자갈더미 속에서 도편은 주로 보였다. 삼가명도 보이고 다른 종류의 분청도 눈에 뜨이는 가운데 도편을 하나 주워들고 보니 이 무슨 기적인가. 비록 무늬는 몸체와 뒷다리만 보였지만 백상감 된 얼룩무늬 호랑이가 분명하지 않은가. 인근을 더 살펴보고 싶었지만 귀경할 시간을 감안해 마냥 지체만 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 대절했던 택시를 다시 부르려 핸드폰을 열었으나 난시청 지역으로 불통이 아닌가. 큰일이다 싶었는데 그래도 다행히 산모퉁이를 돌아 큰길 쪽으로 나오자 통화가 되어 무리 없이 귀가를 할 수 있었다.

     

    006.JPG
    [국악신문] 분청백상감호문편(합천 가회면 외사리) 가로 14 세로 12 Cm (편고재 소장)

     

    문제는 그 후 부터였다. 외사리 그 곳 어딘가에는 나머지 호랑이 도편이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생각이 귀경 후에도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래 몇 달 후 시간을 내 그 멀고도 먼 외사리를 다시 찾았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했던가. 그 두 번째 답사에서 나는 기적처럼 호랑이 앞다리를 만날 수 있었다. 그러니까 몸체와 네 다리가 온전한 호랑이 도편이 완성된 것이다. 하지만 그 후에도 외사리는 내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던 것이 그 곳 어딘가에는 또 머리가 남아 있을 것만 같은 아쉬움 때문이었다. 머리만 맞추면 그야말로 완벽한 호랑이 한 마리가 될 수 있으니 이 얼마나 가슴 뛰는 바램이요 설레임인가. 하지만 자주 일어나면 기적이 될 수 없는 일, 나는 유혹을 이기지 못해 훗날 다시 한 번 더 외사리를 찾아본 일이 있지만 호랑이 머리를 찾는 일은 끝내 이루지 못할 무지개빛 꿈에 불과한 것이었다.


    뜨거운 태양이 작열하던 그 무덥던 여름날 외사리에서 만났던 분청백상감호문편을 나는 지금도 소중히 보관하고 있다. 비록 머리 없는 호랑이일망정 적지 않은 도편 컬렉션 중에서도 아끼고 아끼는 것 중의 하나인 것이다. 그 것은 이 도편을 만났을 때의 추억도 추억이지만 호랑이무늬가 주는 희귀성 때문이다. 현재 호랑이무늬가 들어간 도자기는 일본 민예관 소장의 19세기 백자동화호문호와 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소장의 17세기 철화백자호문호가 널리 알려져 있다. 그 외에도 조선조 후기 청화백자에서 더러 보이지만 조선 초기 그 것도 분청에 호랑이무늬가 있다는 것은 금시초문이다. 따라서 귀하고 소중하기 마련으로는 이만한 도편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호랑이는 사실 산중의 왕이다. 포식자로서 먹이사슬의 맨 위에 위치하는 무서운 동물인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호랑이 하면 왠지 모르게 친숙한 느낌이 든다. 그 것은 호랑이와 관련된 유물과 그림과 설화들을 자주 접할 수 있었던 데서 연유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호랑이는 88올림픽 때는 호돌이라는 이름으로 마스코트로 사용되기도 했으며 건국신화에도 곰과 더불어 등장한다. 그런가 하면 <동국세시기>에는 민가의 벽에 닭이나 호랑이의 그림을 붙여 재앙과 역병을 물리치고자 한다는 기록도 보인다. 벽사의 의미로도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백두산 일대와 중국의 소흥안령, 소련의 극동지방, 연해주의 흑룡강 계곡 등에 분포하고 있는 시베리아 호랑이는 날로 그 개체수가 줄고 있어 지금은 국제보호동물중의 하나로 보호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1918년 강원도 춘성군 가리산에서 1922년 경북 경주시 대덕산에서 수컷 한 마리씩을 잡은 것을 비롯해 1946년 평안북도 초산에서 잡은 것을 마지막으로 그 후 소식이 없어 멸종된 것으로 보여 진다. 조선조만 해도 '인왕산 호랑이'라고 해 궁궐까지 넘나들 정도로 흔했던 호랑이가 어쩌다 우리 곁을 완전히 떠난 것일까. 이제는 민화 등의 그림이나 옛이야기들을 통해서나마 만날 수 있는 호랑이를 옛 도자기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정말이지 신나고 즐거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분청백상감호문편은 호랑이 무늬가 있는 가운데 부분이 약간 부풀어 오른 것으로 보아 기형은 장군이나 편호의 조각이 아닌가 추측된다. 그렇다고 하면 장군이나 편호에 술이나 음료를 담아 사용시 삿된 것을 물리치고자 하는 벽사의 의미로 호랑이 무늬를 넣었던 것일까. 알 수 없는 일이지만 분청백상감호문편을 보고 있노라면 뜨겁던 여름날 외사리에서 느꼈던 그 흥분 그 감격 그 희열이 지금도 온몸으로 생생하게 전해져 오고는 한다. 



    경연대회

    경연대회

    backward top hom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