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30 (목)

이윤선의 남도 문화 기행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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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 문화 기행 (7)

국악기와 공명(共鳴) (상)

  • 특집부
  • 등록 2021.09.06 07:43
  • 조회수 19,550

                                              이윤선(문화재전문위원)

 

벽오동 심은 뜻은

 

"오동은 천년을 늙어도 항상 제 가락을 지니고

매화는 일생을 추위에 떨어도 향기를 팔지 않아

달은 천 번을 이지러져도 본디 모습 남아 있고

버드나무 백번을 꺾여도 새 가지가 돋아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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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거문고

 

삼척동자라도 외고 다닐만한 우리 한시의 정수다. 조선 중기 신흠(1566~1628)<상촌선생집>에 나온다. 비유대로 선비의 지조와 충정을 강조했다. 권력에 아부하지 않는 대쪽 같은 성정의 문맥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황은 이 시를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한다. 그래서였을까. 예로부터 딸을 낳으면 오동나무를 심고 아들을 낳으면 잣나무를 심으라 했다. 딸을 시집보낼 때 오동나무로 가구를 만들어 혼수를 장만하고 잣나무는 관을 짜는 데 사용했다던가. 지조와 정조 따위의 관념 혹은 이데올로기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속담이나 시의 행간에 당대인들의 욕망이 빼곡하게 들어있기 때문이다. 오동 중의 오동은 벽오동(碧梧桐, 푸른 오동나무)이다. 아니나 다를까, 많은 시인 묵객들이 벽오동을 소재 삼아 풍월을 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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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가야금 (사진=국립국악관현악단)

 

"벽오동 심은 뜻은 봉황을 보려트니

내 심은 탓인지 기다려도 아니 오고

밤중에 일편명월만 빈 가지에 걸렸어라."


작자 미상의 시로 김도향이 이 시를 인용한 가요를 불러 유명해지기도 했다. 벽오동의 그리움에 대한 정조는 생각 이상으로 광범위하다.


"그대의 집은 부안에 있고

나의 집은 서울에 있어

그리움 사무쳐도 서로 못 보고

오동나무에 비 뿌릴 젠 애가 끊겨라."


'계량을 그리워하며'라는 유희경의 시다. 여기서의 계랑은 물론 전북 부안의 매창(이향금)을 말한다. 매창과 유희경의 정열적인 사랑, 허균과 나누었던 십여 년간의 정신적인 사랑은 아직까지도 고금을 횡단하는 전설로 남아 있다. 여기 등장하는 오동나무들은 못다한 사랑, 그리움, 기다림의 정조를 대변한다. 도대체 무엇이 오동나무에 대한 이 지극한 감성들을 촉발했던 것일까. 전설은 다시 전설을 낳는다. 매창이 38세의 나이로 죽을 때 거문고와 함께 묻혔기 때문이다. 그녀에게 안겨 천년의 깊은 잠에 든 거문고 벽오동은 아직도 청정한 성음을 가지고 있을까.


성음(聲音품은 나무를 찾아서


나무는 성음을 품는다성음은 목구멍에서 나오는 소리만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국어사전에서는 사람의 음성으로 하는 음악이라 풀이해두었다종류에 따라서는 창가민요가요가곡 따위로 구분하고 연주 형태에 따라서 독창중창합창제창으로 구분한다목소리나 음성을 넘어 음악 전반을 지시하는 용어임을 알 수 있다우리는 흔히 판소리 등의 성악을 감상할 때 성음이 좋니 나쁘니 한다절대음감으로의 톤이나 키만을 말하는 것일까여기서의 성음은 그 단계를 넘어선다높고 낮음맑고 탁함깊고 얕음슬프고 기쁨화나고 차분함 등을 넘어소리에 투영한 휴머니즘의 융숭 깊음과 그 지극함을 따지기 때문이다절대 음가가 아니라 상대적인 가치 음가(音價)라고나 할까성음이라는 기표에 함의된 미학의 세계가 매우 광범위하다악기의 성음을 따져 묻기 전에 나무의 성음을 먼저 말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광주시 지정 무형문화재 이복수(1953~본래 이름은 이준수다장인의 주장은 단호하다우리 악기를 만드는 제일차적인 일은 좋은 나무를 고르는 일이다좋은 나무는 어떻게 고르는가산이나 들에 들어서면 토양과 산세의 지형을 보고 바람과 구름의 흐름을 듣는다동남쪽 비탈에서 자라는 나무와 서북쪽 비탈에서 자라는 나무는 성질이 다르다계곡에서 자라는 나무와 산 정상에서 자라는 나무가 확연하게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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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풍류가야금용 오동나무 판재를 건조시키는 모습

  

우거진 숲과 메마른 들판에서 자라는 나무가 또한 다르다. 눈에 보이는 풍경만이 풍경이 아니요, 귀에 들리는 바람만이 바람이 아니다. 햇볕이 잘 든다고 해서 능사가 아니다. 음지라고 해서 꼭 나쁜 것만도 아니다. 나무가 좋은 성음을 품는 것은 천지자연의 조화와 균형을 온몸으로 받아들였을 경우다. 오동나무가 선호되는 것은 다른 나무에 비해 성장의 균형과 가치 음가의 만족도가 높기 때문이다. 돌밭에서 자라는 이른바 석산오동(石山梧桐)이 선호되는 것도 재질의 장력이 견고해서만은 아니다. 벼락 맞은 오동나무에 대한 환상 또한 마찬가지다. 그 나무에 스며든 햇빛과 달빛과 별빛들, 수많은 가뭄과 장마를 반복하며 단련되었을 그 호흡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 나무를 잘라보면 안다. 나이테와 수분의 함량과 옹이와 가지들의 향방이 그것을 말해준다. 손으로 만져보면 안다. 수십 년 혹은 수백 년 배어든 성음들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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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12현의 가야금과 6현의 거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