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6 (월)

[공연리뷰] 창극으로 만나는 천상의 소리, ‘장문희의 아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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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리뷰

[공연리뷰] 창극으로 만나는 천상의 소리, ‘장문희의 아리아’

‘최북의 그리움을 그리다’ 고품격 창극
장문희, 프리 마돈나 면모
2021년에 탄생한 아리아로 가슴에 남을 듯

  • 김한나
  • 등록 2021.07.27 22:18
  • 조회수 1,8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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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설아 역에 장문희(7월 17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공연, 판소리 심청가 전북도무형문화재 보유자)

 

그녀의 소리에 바람이 멈추고 파도가 잠잠해진다. 화려한 고음, 천상의 소리다. 지난 17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에서 열린 창극, ‘최북의 그리움을 그리다에서 고품격 음색과 기량으로 탄탄하고 깊은 성음을 갖춘 장문희 명창이 관객의 혼을 앗아갔다. 이날 장 명창은 섬세한 연기와 범접할 수 없는 소리로 프리 마돈나의 면모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이번 창극은 실존 인물인 화가 최북과 박필현의 난을 모티브로 가상 인물이 혼재된 이야기다. 풍성한 관현악에 실력파 소리꾼들과 한 폭의 그림으로 수를 놓는 무용수들이 함께했다. 무대는 과거와 현재, 회상과 환상 장면을 한 차원 높은 영상기술을 접목하여 판타지적 무대 미학을 연출했다.

 

최북은 시대와 타협하지 않은 자로 그림을 그리기 싫으면 절대 그리지 않았다. 괴팍하고 사나운 성격으로 자신의 한쪽 눈을 찔러 애꾸가 되었는데, 사랑하는 여인 설야를 만나면서 예술적 세계관을 완성해 나가는 스토리다.

 

음악은 남도민요 흥타령의 슬프고 애절한 계면조를 큰 줄기로 삼았다. 여기에 우조와 평조 등 다양한 선법을 선보여 대중적으로 편안하게 들을 수 있도록 편곡되었고, 수성가락도 함께 했다. 이 날 수성가락 장면에서는 관객의 추임새로 무대와 객석이 하나 되기도 했다.

 

흥타령 중에 꿈이로다는 초장에 설야 역을 맡은 장문희 명창의 아리아로 시작한다. 전체 11장의 구성 중에 1장과 에필로그에서도 만날 수 있고, 갈수록 배가 되는 감동을 선사한다. 흥타령을 포함하여 이날 장 명창이 선보인 아리아는 절창 중의 절창이다. 창극의 큰 흐름을 따라 장 명창이 부른 주옥같은 아리아 중에 흥타령최북과 설야의 이중창을 소개한다.

 

먼저 서곡이 연주된다. 서막에 연주되는 이 곡은 창극 전체의 아리아와 밀접한 곡이 되기도 한다. 크게는 3악장으로 나눠 볼 수 있다. 시작은 밝고 신비롭다. 두 번째는 느려지고 잔잔하며 마지막은 더 빨라진 템포다. 밝고 몽환적인 화려한 선율로 단숨에 관객을 끌어당기더니 이내 잔잔하며 느린 장단으로 바뀐다. 밝음은 유지되면서 평온하지만 갈수록 아련하고 슬픔이 묻어난다. 이때는 몇 가지 악기로 구성되어 현악기 위에 소금과 생황 등 반짝이는 윤슬처럼 유유히 흘러간다. 후반으로 가면서 템포는 빨라지고 타악기의 두드림은 무대의 바늘구멍만 한 틈까지 채워간다. 처음보다 더 웅장하고 화려한데 가슴을 아리게 하는 슬픔과 애절함도 배가 되어 다음에 전개될 무대에 온전히 집중하게 만든다.

 

무대에는 호생관(노년의 최북)이 등장하고 신비롭고 몽환적인 곡이 연주된다. 물안개가 살포시 피어오르듯 잔잔하게 흐르는 선율이다. 눈 위에서 손으로 그림을 그리고, 설야의 흥타령이 들려오자 소리를 붙잡으려는 듯 쫓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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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설아 역에 장문희(7월 17일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연지홀 공연, 판소리 심청가 전북도무형문화재 보유자)

 


프롤로그  

 

흥타령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꿈이로다

너도나도 꿈 속이요, 이것저것 다 꿈이로다

(간주)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랴는 꿈, 꿈을 꾸어서 무엇하리

 

설야는 등장하지 않고 관객이 귀로만 듣는 소리다. 장 명창의 소리. 아득하고 아련하여 진한 여운을 남긴다. 단단한 힘 속에 맑고 고운 음색. 38년 농익은 소리, 오직 소리 인생만 걸어 온 깊고도 짙은 비교 불가 성음이다.

 

온전한 감동을 주는 것은 듣는 자가 부르는 자의 몸과 표정에서는 나오는 숨은 감정과 표현들까지 발견할 때 감동의 무게는 커진다. 그래서 소리 하는 사람은 최고의 소리와 감동을 전하기 위해 잘 부르는 것 하나에만 의존하지는 않는다. 잘 부르는 기술 하나만으로는 부족하다. 판소리만이 아니라 대중가요나 어떤 장르의 노래를 하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일 것이다. 물론 음악을 듣는 것만으로 심취되고, 몰랐던 곡을 듣게 되므로 음악과 친해지기도 한다. 듣는 것으로 감동도 받지만 소리꾼의 몸짓과 표정까지 본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이다. 이날 장 명창은 무대 뒤에서 오로지 목소리만으로 경외심을 불러일으켰다.

 

운명적 만남을 주제로 1장이 열리고 설야가 등장한다.

 

(1)흥타령

꿈이로다 꿈이로다 모두가 꿈이로다

너도나도 꿈 속이요, 이것저것 다 꿈이로다

(간주)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깨인 꿈도 꿈이로다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라는 꿈, 꿈을 꾸어서 무엇하리

갈가부다 갈가부다 임따라서 갈가부다

 

초장의 슬픔은 진계면까지 가지 않고, 절제되어 여운을 남긴다. 반면 1장은 슬픔이 한층 더 짙어졌다. 애절하고 절절해 전신의 근육은 소리를 향해 수축되고 가슴에는 애끓는 파장이 흐르게 된다.

간주 후에 꿈에 죽어 가는 인생 부질없다 깨랴는 꿈에서 초장과 1장은 차이가 있다. 초장에는 깨랴는 꿈이 음정을 낮게 불러 평온하게 흘러간다. 1장에서는 고음으로 질러 한스러움이 절정에 이르고 관객의 가슴을 후려친다. ‘깨랴는 꿈의 차이점은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부터 음의 높낮이와 힘의 세기에서 다르게 나타난다. 작은 부분 하나하나 장 명창의 섬세한 기량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앞서 들었어도 새롭다.

 

1장은 부모를 잃은 슬픔으로 목숨을 버리려는 설야를 최북이 구하면서 만남이 시작되었다. 2장부터는 여러 인물이 등장한다. 슬프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는 감초 역할을 하는 조연들의 코믹하고 재미있는 장면과 함께 지루할 틈이 없이 흘러간다. 설야의 가족은 아버지가 역모에 가담되어 집안끼리 혼인을 약속했던 정혼자 아비의 밀고로 목숨을 잃었다. 최북은 여러 시도 끝에 결국 설야의 마음을 얻게 되고 둘은 추노꾼의 추적을 받으며 도망자 신세로 살아간다.

 

10장에서는 부안 채석강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으로 시작한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최북과 강을 바라보고 있는 설야의 장면이다. 그리고 이중창이 펼쳐진다.

 

꿈속의 세상-설야와 최북의 이중창

설야-이렇게 그림을 보고 있으면 내가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가

분홍 복사꽃 잎 휘날리는 길을 당신과 함께 걷죠

최북-새하얀 미소 지으며 날아오른 원앙 한 쌍

화선지에 그려 넣으며 당신과 함께 길 위에 있네

두 사람-그곳이 꿈이라면 영원히 깨지 말고 그곳이 그림이면 이대로 영원하리(반복)

 

따뜻하고 평화로운듯하지만 두 사람의 처한 현실은 안개처럼 사라 질 것 같아 애틋함이 동시에 묻어나는 곡이다. ‘영원히 깨지 말고 이대로 영원하리는 마치 다가올 미래가 그렇지 못함을 암시하기에 그들의 소망은 애상적으로 느껴진다. 서로 주고받으며 화음으로 이어져 화려하고 풍성하게 전달된다. 이 곡은 판소리 창법을 조금 덜고 부른다. 판소리 창법을 절제하여 대중들이 전통 판소리를 좀 더 편안하게 들을 수 있게 작창된 듯하다.

 

붙잡고 싶은 꿈, 버려야 할 꿈, 함께 하고 싶은 꿈, 그림으로 그려지면 떠난 자를 그림으로 만날 수 있는 또 하나의 꿈 등. 꿈은 이번 창극에서 중요한 제재로 작용한다.

 

꿈이 영원하길 바랐지만 설야는 그림 속으로 들어가 최북이 그린 그리움이 된다. 창극은 끝났다. 이제 그리움은 관객들의 몫이다. "그곳이 그림이면 이대로 영원하리!” 최북과 설야의 절창, 2021년에 탄생한 아리아로 가슴에 남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