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8 (수)
용인시 처인구 양지면 남곡리에는 ‘은이(隱里) 성지’가 있다. 천주교회의 첫 사제인 김대건 신부가 사목한 본당이며 순교 후 유체의 이장 경로이기도 하다. ‘은이’라는 지명은 ‘숨어 있는 동네’라는 뜻으로 천주교 박해 시기 숨어 살던 신자들의 교우촌이었다. 여기에는 ‘삼덕(三德)의 길’이라는 고갯길이 있다. 세 개의 덕(德)있는 고개라는 뜻으로, 하나는 신덕(信德)고개 ‘별미 고개’, 둘은 망덕(望德)고개 ‘해실이 고개’, 셋은 애덕(愛德)고개 ‘거문정 고개’길을 말한다. 오늘에도 인적이 드믄 산길이 포함되어 있는데, ‘120 나무계단 길’과 김대건 신부의 유체 이장 때 호랑이도 물러나 길을 열어주었다는 ‘기적의 길’로 불리는 곳도 있다.
그런데 첫 신덕고개인 ‘별미 고개’에는 뜻밖에도 ‘아리랑’비(碑)가 세워져 있다. 이는 천주교 초기에 아리랑이 신앙공동체에서 불렸음을 추정하게 하는 것이다. 공동체 결속과 포교를 위해 민중의 노래를 불렀다고 본다. 이 비에 새겨진 가사가 당시의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지만, 그만한 유래를 담보했기에 노래비로 새겨졌다고 보게 된다. 김진용 작사의 전체 8절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리랑
주님을 버리고 가시는 님은/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후렴구)
천진암 강악회 진리탐구/반만년 어둠속에 동이 트네
청천 하늘에 잔별도많고/천주교 이백년 박해도 많다
심한박해 모진고충 이겨내고/참된신앙 물려주신 순교자여
금자로 발길재는 천사를 보라/격려하며 순교의길 가신님이여
희광이칼 여덟번째 목숨바치고/천당영복 면류관을 쓰신님이여
순교유해 쌓고쌓여 주춧돌되고/순교선혈 흘러흘러 밑거름됐네
한알의 밀알이 이백년썩어/오백만의 열매가 주님찬미해
제1절에서는 상하 계층 없이 사방팔방의 모두가 알고 있는 아리랑의 대표사설을 통해 곡조를 제시했다. 2절은 광주 퇴촌의 천진암(天眞菴)에서의 강학회(1771년 자산 정약전 3형제와 만천 이승훈 등의 천주교리 연구모임) 사실을 말하여 천주교 역사를 제시했다. 3절은 1791년 신해박해로부터 네 차례의 박해를 통해 천주교의 수난사를 나타냈고, 4, 5절은 성스런 순교사를, 6~8절은 신앙 승리의 역사를 찬양했다. 이 가사 천체를 보면 3절과 8절에 ‘이백년’이 있어 1984년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기념으로 작사하여 노래비로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200주년을 기념하여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방한했고, 천주교 신약성서 자체 번역본을 발행하였으니, 이 아리랑 작사도 그만큼 의미를 두어 비로 세운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천주교 역사와 아리랑은 어떻게 만났을까? 현재 밝혀진 아리랑 자료로는 1823년(道光3년) 청석거사(靑石居士) 필사본 ‘佛說明堂아리랑’이란 기록물에서 1839년 천주교 기해박해 전후에 불렸으리라는 추정이 가능하다. 이 문헌자료는 민간신앙에서 수용한 일종의 무경(巫經)으로 "제석천황 관제멸 대범천황 오액명/아라리 사라리 아리사리 아리랑” 같은 사설에서 알 수 있듯이 수명과 복록을 기원하며 아리랑 후렴을 사용하였다.
이 시기 아리랑의 보편성을 이용하여 무경의 보급을 용이하게 할 방편으로 수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천주교 교인들도 우리의 전통 시가인 가사체(歌辭體)를 수용하여 ‘천주가사’(天主歌辭)를 지어 교리를 전파했듯 민요 아리랑의 형식도 수용했을 것은 분명하다. 천주교인들이 사찰인 천진암을 거점으로 한 역사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전통문화를 수용하여 교리전파에 활용하는 것은 포교의 한 방식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을 고려할 때 초기 교회사 자료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그 가능성이 확인되기도 했다.
1967년 8월 27일자 ‘가톨릭시보’에는 ‘만천유고(蔓川遺稿)’라는 필사본 문집 발굴에 관해 보도가 있었다. 김양선 목사의 수집으로 현재 숭실대학교 기독교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최초의 천주교 세례자 베드로 이승훈(李承薰, 1756~1801)이 지은 것으로 밝혀졌다. 알려진 바대로 이승훈은 1784년 2월에 북경에서 예수회 신부 그라몽(L. DE. Grammont)으로부터 세례를 받고 돌아와 활동하다 1801년 신해박해 때 순교한 인물이다.
이 책에는 천주가사와 기타 잡기(雜記)가 있고, 중간에 이벽·정약전·이가환 등 초기 천주교 인물들이 남긴 글들이 있고, 이어서 ‘만천시고(蔓川詩藁)’에서 한시 70수가 수록되었다. 바로 이 시고 중 ‘農夫詞’란 작품에 ‘아로롱 아로롱 어히야’라는 기록이 있어 주목하게 된다. 7언절구 한시 변형체로 내용상 1790년 평택현감 시절에 쓴 것으로 보인다. 논농사와 관련한 내용에다 ""경술년이농청서농기고작”(庚戌年里農請書農旗故作)이란 주(註)가 있어 알 수 있다. ‘농부사’ 일절을 인용한다.
神農后稷이 始耕稼하니
自有生民爲大本이라
鐘鼓울려라 鐘鼓울려라
簿言招我 諸同伴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蔓川詩藁)
(신농후직이 처음 밭을 갈고 김을 매니
민생을 그 근본으로 삼았네
징과 북을 울여라 징과 북을 울여라
잠깐 말하노니 우리의 모든 짝을 부르세
아로롱 아로롱 어히야)
‘啞魯聾 啞魯聾 於戱也’ 표현은 ‘아로롱 아로롱 어히야’로 아리랑 후렴의 한 형태가 분명하다. 이 시기 아리랑은 ‘아로롱’, ‘아라렁’, ‘아라성’ 등 다양한 음가(音價)로 표기가 되었으니 ‘아로롱’도 그 이칭(異稱)의 하나이다. 그리고 ‘於戱也’(어희야)는 1896년 미국 선교사 H. B. 헐버트가 기록한 ‘KOREAN VOCAL MUSIC'에 "아라렁 어얼싸 배띄어라”라고 한 후렴 ’어얼싸‘인 것이다. 이렇게 하여 천주교 초기 인물 이승훈이 아리랑을 수용한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는 초기 천주교 신앙공동체에서도 아리랑이 포교를 위해 향유되었고, 이러한 맥락에서 200주년 기념으로 새로운 아리랑이 창작되어 비로 세워지게 되었음도 확인할 수 있는 것이다.
정조년간에 북경으로부터 들어온 서학(西學)은 단순한 학문으로 연구되다가 점차 뛰어난 진리를 깨달음에 이르러 하나의 실천학으로 받아들여졌다. 마침내 드디어 그리스도 신앙으로 귀의(歸依)해 가게 하였다. 이 때 민중의 노래 아리랑도 향유되었다. 어떤 공동체에게도 아리랑은 결속력을 유지시키는 기능을 획득하게 하는 노래의 힘을 가지고 있기에. 누구나 만날 수밖에 없는 노래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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