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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38) ‘2005’의 아리랑정선의 아라리 기층(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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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38)
‘2005’의 아리랑<12>
정선의 아라리 기층(2)

기찬숙/아리랑학회 연구이사

  • 편집부
  • 등록 2021.05.23 19:46
  • 조회수 30,955

정선의 아라리 기층을 논의하는 지난 회에서는 정선과 그 이웃 지역이 동일한 자연적 조건이었음을 전제했다. , 오늘의 전형성이 형성되기까지는 아리 시대’, ‘아라리 시대’, ‘아리랑 시대를 거쳐 왔고, 메나리토리 노래가 형성되어 확산될 여건은 백두대간을 중심으로 한 산악지대 계곡이라는 공통 조건이라고 하였다. 이 때문에 메나리토리 노래의 출처를 특정할 수 없음으로 발생()라는 용어 보다는 전승 중심지전승 주변지라는 용어가 적절하다고 하였다. 그리고 그 중심지는 기층성의 특수성을 파악하여 중심지를 추정할 수 있는데, 이에 따른다면 정선지역이 전승 중심지이고 영원 평창 태백 강릉 지역이 전승 주변지역이 된다고 하였다. 그런데 정선지역이 전승 중심지라고 추정한 근거인 기층성의 특수성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 회에서는 이를 논의하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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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정선아리랑의 전설이 수록된 1977년 정선아리랑제 리플랫. 기미양 소장

 

'정선아라리' 또는 '정선아리랑'의 전형성(典型性) 형성은 정선지역에서 정선아리랑이란 종목명을 일반화 한 시기인 1970년을 전후한 시기이다. 정선인들이 선율과 사설의 다양성과 평등성을 반영한 기록물 출판활동 및 제도적 전승책을 마련한 시기가 이 때이기 때문이다. 기록물은 1968년 사설집 旌善아리랑발행, 1972년 음반(신진레코드사)발매, 1978년 군지(郡誌)를 발행하고,  1976 정선아리랑제를 개최하여 확산시켰다. 또한 주산 비봉산 중턱에 <정선아리랑비()>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제도적 전승체계를 확립하는데, 1971정선아리랑이란 종목명으로 도지정 문화재 강원도무형문화재 제1호로 지정하였다.

 

이런 기록과 전승 실천에서는 역사성을 반영했고, 전형성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확인되는 정선아리랑의 전형성은 다음 몇 가지로 규정할 수 있다. 하나는 음조가 메나리조이다. 둘은 여음구(후렴구)를 먼저 부른다. 셋은 대표사설을 "눈이 올라나~”로 부른다. 일반적으로 독창이다. 마지막은 소리판에서 간헐적으로 엮음아리랑을 이어 부른다. 이는 오늘의 정선아리랑 형태인 것이다.

 

이런 전형성 확립 현상은 동시대 정선과 다른 주변 지역과는 다른 정황이다. 이는 다른 지역에는 없는 역사성을 기재로 하고 있다. , 고려말 이성계에 의해 역성혁명이 있게 되자 일부 선비들이 출절을 지키기 위해 관직을 버리고 정선 거칠현동으로 들어와 은거하게 되었다. 이들은 시운을 한탄하며 쓰라린 회포를 달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는 정선인들이 불러오던 곡조에 자신들의 신세를 표현한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라는 내용의 노래다. 이를 계기로 널리 불리게 된 것이 오늘의 정선아리랑 역사라는 주장이다. 바로 이런 역사가 서려있기에 정선의 아리랑이란 뜻이 담긴 정선아리랑이란 이름으로 전승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상의 역사성을 반영한 전설은 다음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시기는 500여년 전 고려말, 관직을 지낸 7인이, 정선군 남면 거칠현동으로 와 은거, 이들이 고려왕조를 회고하는 노래를 지어 불렀다. 그 노래가 정선아리랑의 역사(시원)를 이뤘다는 것이다. 이런 옛 지명인 도원(桃源)’1291(고려 충렬왕 17)정해지고, 다시 현재의 지명 정선(旌善)’1353(고려 공민왕2) 형성된 시기임으로 고려왕조와는 각별함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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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갑, '아리랑 시원설 연구' 명상출판, 2006.

 

이에 대한 역사성은 1980년대 초 정선 유지(有志) <전태화 정선의원장 면담조사 자료등을 바탕으로 한 관련 기사나 2006년 발행된 김연갑의 아리랑 시원설 연구에서 다각적으로 논의되었다이런 논의에서 곡명을 정선아리랑으로 쓰게 된 기제가 역사성임을 밝히기도 하였다이제 위에서 제시한 기록을 통해 구체적으로 적시하면 다음과 같다.

 

# "정선아리랑이 이 고장에서 처음 불리어지기 시작한 것은 지금으로부터 5백여년전인 이조초기라 전한다. 당시 고려왕조를 섬기고 벼슬하던 선비들 중에 불사이군으로 충성을 다집하며 송도에서 은신하다가 정선(지금의 남면 거칠현동)으로 은거지를 옮기어 일생동안 산나물을 뜯어먹고 살면서 지난날에 모시던 임금님을 사모하고 충절을 맹서하며 입지 시절의 회상과 가족과 고향의 그리움에 젖어 고난을 격어야 하는 심정을 읊었다.”

 

사설집 旌善아리랑由來편의 일부이다. 고려왕조의 충절을 지킨 7인이 정선에 은거하여 살며 부른 것에서 유래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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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정선아리랑의 전설이 수록된 1968년 '정선아리랑' 사설집. (사진=기미양 소장본)

  

# "그 때 선비들이 비통한 심정을 한시로 지어 율창으로 부르던 것을 이 지방의 선비들이 풀이하여 감정을 살려 부른 것이 지금의 정선아리랑의 가락이다.”

 

1977년 개최된 제2회 정선아리랑제 행사자료에서 인용한 정선아리랑의 유래중 일부이다. 소위 정선아리랑의 고려유신 한시 율창설의 진술이기도 하다.

 

# "(눈이 올라나) 노래는~ (중략) 송도에는 험악한 먹구름이 모여드는 시운을 한탄하고 쓰라린 회포를 달래며 부른 노래이고 대사는 이러한 어려운 때가 아니라면 자기들이 모든 것을 등지고 쓸쓸한 이 산중에서 울부짖으며 살아가지 않을 것이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정선아리랑의 가락이 구슬프고 구성진 곡조를 지닌 것은 이런 한탄과 시름을 읊조리게 된 연유에서 불러지게 된 것이다.”

 

정선아리랑비 후면 기록의 일부이다. "눈이 올라나 비가 올라나/ 만수산 검은구름이 다 몰려온다를 정선아리랑의 시원(始原)’을 이루는 사설이라고 하였다. 은거 7인 중 채미헌 전오륜(採薇軒 全五倫)은 정선 전씨의 중시조로 1373(공민왕 22) 과거에 급제하여 우상시(右常侍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한 고관이다. 현재 남면 거칠현에는 신도비가 세워져 있다. 그러니 이들이 개성에 있는 고려의 진산 만수산에 검은 구름이 몰려오는 시국의 암울함을 한탄할만하다. 곧 고려왕조 500년의 멸망을 노래한 것이라는 전설의 서사를 증명하는 것이다.

 

이러한 정선아리랑의 역사성은 전설의 사실 여부를 떠나 정선인들은 물론 인근 지역인들도 수긍할만한 것으로서 아리랑의 시원이 정선에 있음을 공감하게 했을 것이다. 이 시기는 적어도 조선왕조말 1809杜門洞實記를 발행하여 이들을 충절 인물로 재평가하면서 부터라고 본다. 이상을 감안하여 정리한다면 정선아리랑의 전형성이 구축되는 시기는 경복궁 중수 이후 외지에서 들어 온 여음구가 정선아리랑의 후렴으로 함께 불리는 시기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