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속알 있는 글은 못될망정 어줍잖은 글줄은 가끔 써본 처지였는데도 막상 만당 선생에 관한 글을 써보려 하니 도무지 어떤 측면을 어떻게 언급해야 할지 엄두가 나지 않는다. 말할 나위 없이 종지만 한 식견으로 물동이만 한 그분을 거론하기에는 그분의 인품과 학문 세계가 너무도 크고 높기 때문이다.
확실히 이혜구 박사는 큰 학자요. 높은 선비다. 우선 학문적 세계로 눈길을 돌려 보면 한국음악학계 구석구석까지 그분의 학덕이 스며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미 반세기 전인 1948년에 한국국악학회를 창립하여 전통음악의 학문적 묘포를 마련했는가 하면, 1959년에는 한국 최초로 서울대학교 음악대학에 국악과를 창설하여 국악 중흥의 기틀을 마련했다. 말이 쉬워 학회 창설이요 학과 개창이지, 당시 주객전도적 서구 문화 중심의 시대 상황 속에서, 누구도 거들떠보지 않으며 멸시와 비아냥을 보내던 국악계를 위해 학회를 설립하고 학과를 개설하여 이끌어 왔다는 것은 여간한 선각적인 소신이요 용단이 아니다.
만당 선생의 올바른 역사 인식과 학문적 공적의 크기는 이 두 가지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대변되고 실증되고 상징되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따라서 그분이 난해한 《악학궤범》을 번역해 내고, 심혈을 기울인 논문집들을 끊임없이 발간해 왔으며, 수시로 훌륭한 글들을 해외 학계나 음악사전 등에 영문으로 발표해 온 사실 등 구체적인 학문적 결실들을 구구히 소개하는 것은 오히려 지엽말단의 사족에 불과할지도 모를 일이다. 굳이 세세한 실적들을 열거할 필요도 없이 만당 선생은 누구나가 승복하는 대석학이요 한국음악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개척해 낸 학계의 태두다.
그런데 우리가 여기서 이혜구 박사의 학문 세계를 운위하는 입장이라면 반드시 유념해야 할 사실이 따로 있음을 알아야 한다. 외형적으로 나타나는 그분의 학문적 성과가 아닌 내면의 학문적 정신을 짚어 보는 사려 깊은 통찰력이 곧 그것이다. 한마디로 평생을 한결같이 궁행해 오고 있는 그분의 호학 기질과 철두철미한 학자적 양심을 공감해 보는 일이 바로 그것이다.
구순을 바라보는 연세에도 만당 선생은 학문적 정진을 늦추지 않는다. 주먹만 한 자루 달린 돋보기로 자료를 독파해 가며 꾸준히 논문을 써내는가 하면, 기회 있을 때마다 후학들을 모아 놓고 미진한 분야에 대한 특강을 마다않는다. 쥐꼬리만 한 지식으로 세상을 재단하려는 허세가 팽만한 세태 속에서, 귀납과 연역의 논리체계를 바탕으로 철두철미하게 한국음악학을 정립해 가는 그분의 학문 세계는 재삼 경외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터다.
만당 선생의 진정한 학문적 크기는 바로 이 같은 호학 정신의 학자적 자세에 있는 것이다. 만당 선생을 만인이 우러러 마지않는 것은 비단 그분의 학문적 업적에서만이 아니다. 한 발 더 진실에 가까운 이유라면 오히려 그분의 높고 맑은 인품에서일 것이다. 우리 주변에 지식이 많은 석학들은 많다. 그러나 고매한 인격까지 겸비한 참다운 스승은 흔치 않다. 흔치 않은 정도가 아니라 요즘 같은 세태 속에서는 눈을 씻고 보아야 있을까 말까 하다.
이혜구 박사는 우리가 등불을 밝히며 힘겹게 찾아낼 수 있는 우리 시대의 드문 인격자요, 청빈한 학자 중의 한 분이다. 한마디로 학문과 덕성을 겸비한 높은 선비요 사부다. 만당 선생이 어떠어떠한 점에서 높은 인격자요 청학 같은 선비인지를 나는 필설로 예시할 수 없다. 오직 마음과 오관으로 분명히 그렇게 느낄 뿐이다.
그분을 뵈올 때마다 엄습해 오는 무형의 덕기德氣는 딱히 논리적 근거를 구체적으로 생각해 볼 겨를도 없이 우리를 압도해 버린다. 그것은 마치 난초의 향기를 표현할 수 없으되 청순하고 그윽한 분위기에 속절없이 매료되고, 봄볕의 따사로움을 설명할 수는 없되 대지에 가득한 훈기에 만물이 화육되는 경우와 다르지 않다고 하겠다.
옛글에 일창이삼탄壹倡而三歎 해도 은은한 여운이 있고 대갱불화大羹不和 해도 은근한 맛이 있다고 했는데, 바로 만당 선생의 학문과 일상 생활에서 우러나는 인격의 향취도 이와 같아서 후학들에 대한 감화력은 더없이 은은하고 온화하며 가없이 막중하다. 이혜구 박사에 대한 이 같은 언설은 결코 추호의 과장도 없는 진솔한 느낌의 일단이다. 비록 나만이 아니라 만당 선생을 아는 분들은 너나없이 그분의 학문적 업적과 인품을 칭송한다.
이 같은 중론을 뒷받침이라도 하듯 몇 년 전 그분은 서울대학교 동창회에서 주는 더없이 영광스러운 상을 받기도 했다. 제1회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이 곧 그것이다. 10만여 명의 서울대 졸업생 중에는 그야말로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즐비하다. 권부에 군림하는 사람, 재계를 주름잡는 사람, 문화예술계를 이끌어 가는 사람, 해외에서 국위를 선양하는 사람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석학과 재사들이 줄을 잇는다.
바로 이들 고명하고 현란한 이름 중에서 서울대 총동창회는 만당 선생을 엄지의 인물로 간택하여 ‘자랑스러운 서울대인상’ 제1회 수상자로 시상했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 하나만으로도 선생의 학문적 위상과 인격의 수위는 충분히 설명되고도 남는 일이기에 그분에 대한 더 이상의 부연은 오히려 부질없는 짓임에 틀림없다.
일찍이 지악至樂은 무성無聲이고 대음大音은 희성希聲이라고 선현들은 일러 왔다. 진실로 지극한 음악은 청각적인 현실음의 저편에 존재한다는 뜻이다. 여기 외형적으로 확인되는 만당 선생의 학문적 업적만 해도 범상함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러나 그분이 진실로 이 시대의 큰 학자요 높은 선비이자 우리 모두의 사표師表인 이유는 그 같은 외관적이며 일상적인 공업에 있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 같은 즉물적인 지평을 뛰어넘는 고답적인 차원의 청징하고도 고매한 학자적인 정신과 선비적인 기풍에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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