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한악계 별들 28: 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원장현 명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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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8: 소쇄원 광풍각의 죽림풍류 원장현 명인

  • 특집부
  • 등록 2021.04.02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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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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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원장현, 원장현류 대금산조보존회

 

한국의 대금! 참으로 신묘한 악기다. 사람이 만든 악기인데 소리는 사람의 소리가 아니다. 순도 백프로의 자연의 소리요 천상의 소리다. 어디 이뿐이랴. 서너 뼘 남짓의 죽관에서 빚어지는 소리결은 또 얼마나 부드럽고 따듯한가. 파란 하늘 밑의 하얀 목화송이보다 부드럽고, 아지랑이 꽃피우는 봄날의 햇살보다 다스한 게 대금의 음색이요 천성이다. 


대금은 결코 예사로운 악기가 아니다. 혈통부터가 남다르다. 속세의 인연만이 아닌 신의 계보와 핏줄이 닿아 있다. 신라시대 만파식적萬波息笛의 전설이 이를 증언하고 있다.


신문왕神文王 때 동해바다에 섬이 하나 생겨나고 그 섬 위에 대나무가 하나 자라났는데, 낮에는 갈라져서 둘이 되고 밤에는 합해져서 하나가 되었다. 기이하게 생각한 왕이 그 대나무를 베어 오게 해서 악기를 만들었다. 그러자 소리가 어찌나 영험한지, 이 악기를 불면 질병이 퇴치되고 적병이 물러갔다. 모든 어려움과 근심걱정들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그래서 이름을 거센 파도도 종식된다는 뜻의 만파식적이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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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원장현, 원장현류 대금산조보존회

 

전후좌우의 맥락을 살피면, 이처럼 대금의 혈통은 신의 세계, 전설의 세계와 맞닿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천의무봉의 대금 소리는 아무리 생각해 봐도 세속의 소리가 아닌 천상의 소리에 분명할 만큼 영묘하고 초월적이었기 때문에, 아마도 이 같은 신비스런 사화史話가 생겨났을 것이다.


그러고 보면 대금 음악의 실체를 드러낼 수 있는 사람은 입신入神의 경지에 들 수 있는 능력자여야 할 것이다. 그러지 못한 연주자가 섣불리 대금을 입에 대봤자 한낱 세속의 감칠맛에만 맴돌 뿐, 젓대 소리 본연의 속멋이나 비경秘境을 담아낼 도리가 없음에 분명타고 하겠다.

 

조선조 말 대금의 달인 정약대丁若大의 일화는 지금도 깊게 울리는 여운이 있다. 그는 일 년 열두 달 눈만 뜨면 인왕산에 올라가 대금을 불었다. 7분 정도의 밑도드리한 곡만을 되풀이해 불며, 한 번씩 불 때마다 왕모래 한 톨씩을 신고 간 나막신에 넣었다. 해가 서산을 넘고 하산할 때는 나막신에 모래가 가득 쌓였다고 한다. 이쯤 되면 기량과 물리가 일시에 확 트이며 저절로 접신의 경계를 넘나들게 될 것이다. 이것이 곧 그가 후세에 이름을 길게 남기게 된 필유곡절必有曲折이다.

 

여기 당대의 젓대 명인, 동려東呂 원장현元長賢의 경우는 어떨까. 우선 그의 음악을 접하면 행운유수行雲流水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구름 가듯 물 흐르듯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기교며 악상이 익을 대로 익어서, 틀과 형식은 뒤로 숨고 미풍에 나부끼는 비단결처럼 악상의 시심詩心만이 심금을 퉁기며 물 흐르듯 흘러간다. 결코 노력만으로 될 일이 아니다. 뛰어난 재주만으로 될 일도 아니다.

 

원장현의 음악은 누구보다도 씨앗이 튼실하고 토양이 비옥하다. 선친은 젓대의 명인이었고, 숙부나 고모도 거문고와 가야고의 대가들이었다. 젓대를 잡기 전부터 이미 동려의 혈관 속에는 탁월한 음악적 소인素因이 싹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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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원장현, 원장현류 대금산조보존회 

 

어디 그뿐이랴. 동려의 고향이 어데던가. 죽림문화의 산실 담양이 아니던가. 조석으로 밀려드는 삽상한 대바람 소리는 천계天界의 음향을 일깨우며 동려의 감성을 살찌웠을 것이고, 소쇄원瀟灑園 광풍각을 스쳐가는 일진청풍은 말 그대로 제월광풍霽月光風의 풍류 기질을 배태시켰을 것이다.


바로 이 같은 환경이 동려 원장현 음악의 알파요 오메가라고 나는 믿는다. 그러니 후천적으로 음악에 뜻을 두고 열심히 기교를 익혀 무대에 서는 여느 음악인들의 음악과는 어딘가 맛이 다르고 멋과 운치가 다름을 느끼게 된다.


원장현의 대금가락은 영락없이 고향마을 대바람 소리의 분신일시 분명타고 하겠다. 바람결에 따라 대숲의 음향도 달라지듯, 취법과 감정에 따라서 동려의 가락도 천변만화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어떤 때는 옹달샘물처럼 해맑다가도, 어떤 때는 가을 하늘을 비상하는 외기러기처럼 애상적이기도 하고, 또 어느 때는 소쇄원 제월당 풍류객들의 풍류판처럼 격조 있는 풍취를 뽐내기도 한다. 한마디로 그의 음악은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옷을 입고 무애無碍의 춤을 추며 풍진세상을 주유하는 풍월주風月主의 선풍仙風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만리귀선 운외적萬里歸仙 雲外笛이라, 구름 밖 신선이 젓대 불며 돌아오듯, 동려 원장현 명인이 도포자락 휘날리며 남산 자락에 현신하니, 뭇사람이 기대하는 음악계의 경사가 아닐런가!

 

 원장현, 원장현류 대금산조보존회.jpg

[국악신문] 원장현, 원장현류 대금산조보존회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