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가을은 오곡의 결실만이 아니라 문화예술의 열매를 수확하는 계절이기도 하다. 그만큼 요즘 우리 주변에는 찬연한 문화예술 활동이 즐비하고, 기라성 같은 예술인들이 물결을 이룬다. 양적인 수치로만 치면 우리 삶은 한층 가며롭고 윤택해야 마땅할 터다. 하지만 현실은 여전히 추수가 끝난 들판처럼 공허하기 일쑤다. 결실의 나락에도 쭉정이가 있듯이 문화예술계에도 아마 무지갯빛 거품이 충일해 있기 때문일 게다.
사람人이 재주를 앞세워 억지로 하는 행위爲는 필경 가짜[人+爲+僞]의 거품에 빠지기 십상이다. 발효되고 체화된 제 얘기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교언巧言이나 영색令色치고 진짜배기가 드물다는 말이 그래서 작금에도 유효한지 모를 일이다.
제14회 방일영국악상 심사위원들은 우선 예술계에 가득한 거품을 걷어내고 튼실한 알곡을 찾아보려 애썼다. 특히 재승박덕형의 표피적인 화려함보다 진정한 장인 정신을 지향하는 예인藝人을 거르는 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 같은 안목의 조망경에 들어선 몇몇 후보들을 대상으로 설왕설래의 숙고 끝에 흔쾌히 결정된 수상자가 곧 오정숙吳貞淑 판소리 명창이다.
각고의 노력 없이 명창의 반열에 설 수 없음은 많이 들어온 상식이다. 오 명창 역시 예외가 아니다. 열네 살 때 동초東超 김연수金演洙 명창의 문하에 들어간 이후 오직 한 우물을 파는 데만 정진했다. 이 말 속에는 두 가지 의미가 배어 있다. 하나는 자기 소신의 고집과 앙기로 남다른 장인 정신이 두드러졌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동초제 판소리의 맥을 이으며 이를 확실하게 정착시켰다는 판소리계의 공적이다.
여기 동초제 판소리란 김연수 명창이 정리한 판소리의 한 판형을 의미한다. 새로운 소리제의 계발이라기보다는 기존 여러 명창들의 좋은 더늠의 대목들을 취사선택하여 모범답안 같은 판소리 한바탕의 정형定型을 이뤄 놓은 것이 ‘동초제東超制’다. 굳이 비유하자면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가 중구난방의 판소리 사설을 집대성해서 정리했다면, 동초 김연수는 명창들마다 형형색색이던 소리제를 일정한 틀 속으로 형식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동초제 판소리는 판소리 특유의 즉흥성은 크게 제약되지만, 익히기나 전승하기에는 많는 장점이 있다.
아무튼 오정숙 명창은 이 같은 동초제 판소리의 정통正統을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이를 한층 갈고 닦으며 널리 정착시키는 데 크게 공헌했다. 특히 오 명창은 1972년, 8시간에 걸친 동초제 춘향가의 완창을 시작으로 매년 한바탕씩, 현존 다섯 마당의 판소리를 모두 완창하여 당시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50, 60년대만 해도 판소리 완창은 거의 들어보기 힘들었다. 모두 토막 소리공연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박동진 명창에 이어서 여류로는 처음으로 오 명창이 판소리 완창의 관심과 진미를 선구적으로 일깨웠던 것이다. 바로 이 같은 사실에서도 우리는 오 명창의 소리에 대한 남다른 집념과 끈질긴 프로 기질을 읽을 수 있다.
스승 동초 선생을 닮아서인지 오정숙 명창은 제자들을 엄격하게 교육시키기로도 정평이 나 있다. 그래서 그의 문하에는 소리 한번 다잡아 해보겠다는 제자들이 유난히 많이 모여든다. 제자를 일단 받으면 우선 사람이 되고 소리꾼이 될 수 있도록 인정사정없이 몰아간다. 그래서 일단 그의 엄격한 훈도를 거치고 나면, 적어도 될성부른 떡잎 정도는 되기 마련이다.
재주를 조금 인정받으면 세상이 자기 중심으로 돌아가는 줄 착각하는 위인들도 많다. 그 같은 경우는 재주가 아까울 정도로 진정한 경지에 들지도 못한 채 중도폐기되기 일쑤다. 그래서 참다운 예술의 밑바탕에는 수기修己와 인격人格이라는 사람의 문제가 깔려 있어야 한다. 이 같은 관점에서 보아도 오늘의 수상자인 오정숙 명창은 바른 소리예술의 길과, 바른 사람의 길을 걸어왔음에 틀림없다고 하겠다.
동초 김연수 명창의 탄신 백주년을 맞아 스승을 그토록 극진히 모시고 흠모해 오던 제자가, 그분의 탄신 백 주년에 동초제 판소리 정립의 공로로 상을 받게 되니 분명 수상의 의미가 배가되는 느낌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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