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19 (일)
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세 번째 인터뷰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전 사할린국립대학 한국학과 박승의 (1941년 생)교수를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박승의 교수는 한국어교육에 힘쓰고. 사할린 한인 연구에 진작해서 많은 논문을 발표했다. 최근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가 담긴 3대에 걸친 가족사가 자서전으로 출판되어서 관심을 받고 있다. 며칠을 밤새어서 들어도 끝나지 않는 살아있는 역사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박승의 교수의 사할린 디아스포라 이야기는 다음 2편에서 정리하기로 한다. 이번 1편에서는 사할린 한국어 교육 활동을 중심으로 질문을 하고자 한다.
기미양-안녕하세요. 사할린에서 2010년 파주로 영주귀국하신지 올해가 11년이 되시네요.이번에 국외동포 체험수기공모전에 '사할린에 팔려간 이쁜고모'로 첫번째 KBS한민족상 수상하신 것을 축하합니다. 재외동포뉴스와 연합뉴스 및 국악신문 등 사할린 새고려신문에 주요 뉴스로 나갔습니다. 수상소감 부탁드립니다.
박승의-안녕하세요? 심사위원님들께 저의 소박한 글을 높이 평가해 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사할린 한인 1세대는 혼자 또는 가족과 사할린에 강제동원, 강제이주하여 열악한 노동환경에서 목숨을 담보하고 가족의 생계를 위해 탄광과 산판에서 모진 일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들은 건강의 악화와 자녀의 양육 및 교육 문제로 한국으로 돌아오지 못한 채 모국귀환의 한을 품고 살았습니다. 영주귀국 사할린 한인의 지원 대상자들은 영주귀국을 선택하느냐, 사할린에 잔류하느냐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1945년 8월 15일 이후 출생한 사할린 한인은 영주귀국 지원대상에 제외되기 때문에 또다시 형제자매와 자손들과 헤어져 살아야 합니다. 이산의 이산은 세대를 거치면서 반복됩니다. 기존 기록에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역사적 측면에서 주로 남자들이 강제동원에 주목했습니다. 그러나 수만명의 여성들이 남편을 찾아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가라후토(사할린)로 가서 모진 고통을 이겨낸 사실을 묘사한 글은 전혀 없습니다. 작은 글이나마 여성들의 공적을 공평하게 평가하고 싶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잊어서는 안되는 뼈아픈 역사를 자손들에게 남겨주고 싶었습니다. 러시아에 살지만 뿌리를 잊지말자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습니다. 나아가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의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일단 이 수상 소식이 여러 신문을 통해 알려지면서 다시 한번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 역사가 주목을 받고 이슈화 되었습니다. 다시 한번 KBS방송사에 감사를 드립니다.
Q:박승의 교수님은 사할린2세로서 1945년 이전에 태어나셔서 사할린1세의 자격으로 한국에 영구귀국했습니다. 언제 어떻게 부모님은 고향을 떠나서 사할린에 강제동원 되었는지요? 처음에 어느 지역으로 배치되었나요?
A; 밀양 박씨 아버지 고향은 전라북도 무주군 안성면 공진리입니다. 1939년 결혼 후 한달 반만에 강제모집으로 가라후토에 가게 됐습니다. 그 당시 오찌아이 (현 돌린스크) 산판에 배치됐습니다. 이후에 어머니는 충청남도 금산에서 태어나셨고 임신 상태에서 배를 타고 일본을 경유해서 가라후토에 오셨습니다. 1945년에 해방되셨으나 그리운 조국에 돌아오지 못하시고 끝끝내 타국의 땅에 파묻혔습니다. 한국에 와서 조상의 뿌리를 찾기 위해 고향에는 2번 방문했습니다. 자세한 가족사는 최근 출판한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에 정리하여 놓았습니다.
Q:보내주신 '박승의 나는 누구입니까'(저자: 박승의)는 잘 읽었습니다. 사할린 한인의 역사가 한 편의 영화를 보는 것처럼 단숨에 읽었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메세지는 ’조선인 박승의‘, 다까하라 가쯔요시, 보꾸 다까하라 유리 알렉산드로비치, ’대한민국 박승의’라는 이름으로 살아야만 했다는 부분입니다. 구체적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A; 일제강점기 당시 저는 사할린으로 강제징용 당한 아버지와 어머니 사이에서 일본국적을 지닌 조선인으로 출생을 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해방이 되었지만 가라후토에 억류된 조선인으로 아버지의 고향에 돌아올 수 없었습니다. 무국적 조선인으로 살다 소련 국적을 받게 되고. 다시 러시아 국적을 받게 되고 러시아 이름을 갖게 됐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이 세상에서 78년을 살면서 6번이나 국적을 바꾸게 되었습니다. 그것도 자의가 아닌 타의로........일제시대에 태어나서 3년동안 일본 국민으로, 1945년 해방 후 무국적자로, 1958년에 북한 공민으로, 1970년대 소련 국적자로, 1990년 소련 붕괴 후 러시아 연방 국민으로, 그리고 2010년에 대한민국 국민으로 삶을 이어 가고 있습니다.
어린 나이에는 일본 아이들과 놀면서 일본말과 더불어 일제 사상을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고, 1948년 조선학교 1학년에 입학하면서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 받았으며, 2009년부터 대한민국 자본주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제도가 바뀌면서 이름도 변해야 했습니다. 다카하라 가쯔요시에서 박승의로, 박승의에서 박유라로. 의사소통도 세 민족의 언어로 하였습니다. 일본어, 러시아어, 그리고 한국어로. 그래서 나 스스로"나는 누구냐?”란 질문에 답할 때 머리가 터질 지경으로 혼란스럽습니다. 그러나 타 지방에서 살면서 우리 민족의식과 정체성을 잃지 않기 위해 우리 부모들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사할린 영주귀국자들은 대다수 결혼도 같은 동포끼리 했으며 현재 러시아에 남아있는 자녀들도 러시아인과 결혼한 사람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또한 우리들은 강한 학구열을 가지고 대부분 대학을 졸업한 고학력자이기도 합니다. 평생 러시아 사람들과 어울려 살면서 한국 음식을 고집해 먹는가 하면 다른 민족들에게 한국요리 조리법도 가르쳐 주었습니다.
Q: 지난 신문방송에서 ”한글을 알아야 한민족 정신을 지킨다" ‘사할린 한국어 운동가 박승의’ 라는 짧은 다큐를 보았습니다. 사할린에서 한국어 교육을 위해 어떤 일을 하셨나요?
A;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은 서로 동질감을 느껴 힘을 나누면서 하나로 뭉칩니다. 이러한 면에서 한국문화와 한국어를 다음 세대들에게 가르친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조국이 아닌 해외에 살며 한민족 정신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합니다. 또한 세계화 추세에 맞추어 세계 한민족 네트워크를 형성하기 위해서도 지속적인 협력이 필요합니다. 실천에 옮기기 위해서 서로 힘이 되어주고 한민족의 인식을 더욱 강화시켜야 하므로 이 측면에서 한국어 교육 및 민족교육은 가장 우선되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한국이 세계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많이 발전하며 잘 사는 것이 국외 동포들에게는 무한한 힘이 되고 자부심을 갖게하는것임은두말할나위없습니다.저도 1988서울올림픽 이후 사할린에서 '한국 붐'이 일어 났을 때 한국어 교육 사업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1989년에 여러 학원에서 한국어를 가르쳤으며유즈노사할린스크시 한인협회설립 초기부터 회원으로 활동하였습니다. 그 후 1992년에 6개월간 서울 연세대 어학당을 마치고 사할린대학교 한영과에 취직하여 전임 교수로 거의 20년 동안 자라나는 4세대의 교육과 교양에 모든 정성과 힘을 바쳤습니다.
Q: 27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는 사할린한국어교사협의회는 어떤 단체인가요?
A; 1992년에 사할린주 한국어 교사 협의회가 자발적으로 조직되었으며 이 협의회(회장으로 이옥자, 공노원, 김순희, 박승의, 코르네예바 이브)에서 한국어 지도에 필요한 교재 구입과 공급 그리고 한국어교사 연수회를 주관하고 일반 학교 학생들의 한국어 경시 대회를 매년 조직 진행하였습니다. 그리고 한인단체와 연합하여 대한민국 교육부에 건의하여 사할린에 교육원을 설립하도록 힘썼습니다. 한국어 교육 활성화를 교사협회는 사할린한국교육원과도 밀접히 사업하고 있으며, 한국교육원은 한국측에서, 협회는 러시아측에서 사할린에서 추진하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국어교육을 위해 사할린 동포사회는 어떤 일을 해오고 있나요?
A; 사할린 한인 사회의 언어 문제는 역사적 여건에 의해서 이루어진 언어의 간섭과 접촉이라는 면에서도 매우 특이합니다. 일제때 사용하던 일본어가 한국어와 러시아 어 사이에 끼어들어 있습니다. 한인1세는 모국어인 한국어, 생활어였던 일본어, 그리고 러시아어를 구사합니다. 이들의 한국어 읽기 쓰기 능력은 떨어지며, 러시아어도 정확한 구사는 어려운 듯합니다. 한인 2세 가운데 1935년 이전 출생자는 부모에게서 배우고 들은 한국어를 구사하며, 학창 시절을 일본어로 보냈고, 러시아어를 정식으로 교육받기 시작한 세대입니다. 이들 가운데 대략 1941년 이후 출생자는 공식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한 세대입니다. 가정에서 한국어와 일본어를 쓰기도 하였고 투철한 민족 의식을 갖지 않거나 할머니 할아버지와 생활하지 않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하지 못합니다. 조선학교가 있었던 1946년부터 1964년 사이에 교육을 받은 사람은 한국어를 잘합니다. 그러나 1964년부터 25년 간 한국어 공백 기간에 청소년기를 보낸 30, 40대들은 한국어를 잘 구사할 수가 없지만, 능숙해진 사람이 많이 들고 있는 추세입니다. 한인 3세는 공식적인 언어생활을 러시아어로 하여 모든 생활이나 사고 방식이 러시아인과 같습니다. 한국어를 잘 쓰지 않는 부모 밑에서 자란 이들은 당연히 한국어를 할 수 없습니다. 이들을 위한 한국어 교육은 외국인(러시아 인)에게 하는 한국어 교육으로 하여야 할 것입니다.
Q: 사할린에 강제동원으로 끌려온 경북 의성 출신이고, 당시 지식인으로 활동했던 춘계 '류시욱' 선생님이 남기신 한글 일기문을 러시아어로 번역하셨는데, 어떤 작품인가요?
A; 나는 춘계 류시욱의 '산중 반월기 (山中半月記)'를 여러번 읽고 러시아어로 번역했습니다.춘계 류시욱은 1920년 5월 14일 경상북도 의성군 단밀면 속암동 고실촌 류성룡 선생 집안에서 13대 장손으로 태어났습니다. 류시욱은 젊은 시절에 문예 창작과 사상활동을 벌이다가 서대문형무소와 사상범 교화보호소에서 옥중 생활을 경험했습니다. 당시 사상범으로 출옥한 조선인들에게 강요된 징병을 피하기 위해 류시욱은 가라후토(현 사할린)로의 동원을 택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처자를 고향에 남겨두고 산업보국대원으로 찍혀 마을 사람 20여명과 함께 사할린으로 끌려가게 되어 가라후토 나이부치 탄광에 도착한 때가 1941년 2월이었습니다. 1945년 8월 15일에 해방을 맞았으나 귀국하지 못했습니다. 조선학교의 교사로 류춘계 선생은 돌린스크 구역에서와 돌린스크시에서 교원생활을 하였습니다. 그는 학교에서 "조선어 문법” 및 "조선 문학”을 가르치셨습니다. 조선학교 폐교 후 '세월은 흘러가고 과거의 꿈은 사나운 폭풍에 갈가리 찢겨 쓸쓸한 유폐의 암흑' 속에서 류시욱의 시절은 무의미하게 지나갔습니다. 희망도 기대도 없이 그는 인생의 반 이상을 이국 땅의 노동자로 살다가 1962년에 노동 현장에서 눈을 감았습니다. 춘계 류시욱이 1957년 9월 1일부터 15일까지 15일간 사할린 "크라스노고르스크 임산 사업소 직속인 임동화(林東樺) 브리가다가 새풀치러 가는 곳에 식모(食母, 밥을 해주는 사람)로 따라가 쓴 일기다”(저자의 자서에서). 저자가 1957년 9월의 보름을 지낸 사할린 크라스노고로스크의 산속은 외부와 100리 고립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의 숨소리와 단절된 허술한 풍막은 고향과 수천 리 떨어진 사할린 섬에서 무국적자로 살아가고 있는 자신의 갇힌 삶과 닮아 있었습니다. 목적 없는 삶 속에서 하루살이하는 매일 매일의 끝없는 외로움 때문에 그는 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동료들이 새풀을 치러 나간 후 혼자가 되면 구멍 뚫린 천막 앞으로 나와 소통에 대한 소원을 페이지마다 채워 나갔습니다. 자신의 감정을 토의하며 일제의 강압과 이데올로기의 장벽으로 생이별하게 된 가족과 이른바 내적 대화를 나누는 공간이 되었던 그 일기장을 펼칠 때마다 고향의 ‘한오리 신작로’가 뻗어 나왔을 것입니다. 그는 정직하게 사할린으로 끌려가 소련 체제에 갇혀버린 평범한 조선인들이 수없이 우물거렸을 속생각을 털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일기는 개인적 회고를 넘어 자신이 동원되었을 시기를 전후한 시대와 인물들에 대해 날카롭고도 풍부한 정보들을 제공해 주는 가치있는 사료가 되었습니다.
Q: 춘계 선생 외 사할린의 한인문학 소개 부탁드립니다.
A; 사할린 한인의 문학은 CIS 한인들의 문학과 같이 상당히 오래되고 견고한 전통을 자랑하지는 못합니다. 이는 러시아에서의 거주 기간이 겨우 70년이이고, 오래되지 않은 것으로도, 그리고 사할린의 초기 한인 이주민들이 일본 당국에 의해 남한의 시골에서 사할린으로 동원되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다는 사실로도 설명됩니다. 이것은 특히 전후 첫 시기에 사할린에서의 지식인 집단 형성에서도 나타남을 의미합니다.'사할린의 한인 작가'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이 그리 많지 않습니다. 김증손과 아나톨리 김이 사할린에 거주하며 사할린에 대한 글을 썼던 작가들이지만, 그들은 중앙아시아에서 이주해 온 사람들(고려인)이었고, 그들의 작품은 CIS의 모든 한인 디아스포라를 표현하는 것이었습니다. 사할린 한인들 중에서 우리는 장윤기와 허로만의 작품을 알고 있으며, 사할린의 문학 전통에 중요한 영향을 주어 사할린 한인 디아스포라에서 유명한 일부 다른 저자들(양 세르게이)을 알고 있습니다.
Q: 사할린 한인으로서, 교육자로서, 사할린한국문화원과 교육부에 요청을 하고 싶은 것은?
A; 사할린의 한국어 교육은 사할린 한인 1세의 영주귀국으로 인한 한인동포수의 감소, 한국어교사 부족 및 고령화 현상 등으로 점차 악화되는 추세입니다. 말을 잊어버리면 다음에는 고유의 문화를 잊게되고 결국에 가서는 민족의 정체성을 잃어버리게 됩니다. 사할린 한국교육원에서는 한인동포 청소년들이 한국어를 배울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매년 한국어 교사를 대상으로 교원 연수를 한국에서 받을 수 있도록 하고 있으며, 중고등학생과 대학생들의 모국연수 기회도 제공하고 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에게 한국연수 기회를 더 많이 제공할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영사관, 교육원, 한인단체 등이 중심이 되어 한민족 전통문화를 동포들과 현지 러시아인들에게 소개하고 있습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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