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09 (목)
고서 수집의 모델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고서 수집의 목적과 주제, 수집 범위가 정해졌다면 이제부터 본격적인 수집에 들어가도 좋다. 고서의 문헌적 자료적 미적 가치를 파악하는 안목은 고서 수집에서 가장 기본적이고 중요한 요소임에 틀림없다. 고서에 관한 아무런 지식도 없으면서 곧바로 수집부터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이러한 안목을 키우기 위해서는 많은 책을 직접 접해 보고 부지런히 연구해야 한다. 가장 좋은 방법은 고서를 직접 사고 파는 것일 수 있다. 수집가는 구입하기만 하지만, 자료를 구입해서 이를 다시 필요로 하는 수집가에게 팔아넘기는 일을 하는 고서점 주인이야말로 가장 현실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는 사람일 것이다.
오랜 세월 고서점을 운영한 고서점 주인의 안목이 가장 좋아야겠지만, 실은 그렇지만도 않다. 이것은 순전히 개인의 역량과 노력에 따르는 문제다. 안목을 넓힌다는 점에서는 수집가가 고서점 주인보다 훨씬 더 좋은 조건을 갖추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서점 주인은 자신이 취급하는 자료만 접하게 되지만, 수집가는 여러 서점과 수집처를 드나들며 많은 자료와 정보를 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튼 고서를 수집하기에 앞서, 어떠한 식으로든 고서를 평가할 수 있는 나름대로 안목을 갖추어야 한다. 이를 위해 수집가는 오랜 세월 발품을 팔기도 하고, 때로는 별 가치 없는 고서를 고가로 구입하는 시행착오를 겪기도 한다.
한 이십 년 전 일이다. K씨는 개화기 이후 근대 자료에 탁월한 안목을 갖고 있었다. 그는 신문·잡지와 문학 관련 자료에 조예가 깊어 이 방면에 대한 저서를 여러 권 내기도 했다. 그런 그가 하루는 퇴계(退溪)의 간찰 복사본을 가지고 와서 한번 봐 달라고 했다. 이름난 한학자(漢學者)인 L교수가 소장하고 있는 자료인데 자신의 다른 자료와 교환할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나 복사본은 한 눈에도 가짜 글씨가 분명했다. 나의 설명에 K씨는 몹시 상심한 눈치였다. 그래서 내가, 아직 물건을 교환한 것도 아닌데 그냥 없었던 일로 하면 되지 않으냐고 했더니, 이미 구두로 결정한 일이라고 했다. 그는 L교수의 소장품이라면 그 명성으로 미루어 진품이 틀림없을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며칠 후에 K씨는 문제의 간찰을 들고 나를 다시 찾아왔다. 역시 가짜 글씨였다. 이처럼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필사본이나 간찰·문서 등을 감식하거나 판별해야 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런 류의 자료들도 고서의 한 분야로 감식하는 안목을 익혀야 한다.
일이십 년 이상의 수집 경력을 갖고 있는 사람도 생전 처음 접하는 고서가 수두룩하고, 또 그때마다 고서 앞에서 당황해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러나 그리 걱정할 문제만은 아니다. 단순히 취미로 고서를 수집하는 것이라면, 마음에 드는 고서를 수집하는 일은 별로 어렵지 않다. 단, 취미로 고서를 수집하려 한다면 귀중본이나 유일본에 대한 지나친 욕심은 금물이다. 귀중본 같은 고가의 자료를 욕심낸다면 이는 이미 취미생활이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취미로 고서를 수집하다 보면 귀중본 몇 권, 명인의 필적 몇 점쯤은 아주 헐값에 만나는 행운이 찾아올 수도 있다. 만약 귀중본에 대한 욕심이 있다면 차라리 그런 행운을 기다리는 것이 진정 취미라고 부를 수 있는 수집 태도다.
투자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는 사람도 있다. 투자가 목적이라면 더더욱 고서에 대한 안목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고서를 감식하는 눈이 없으면서 고서에 투자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맞지 않다. 고서가 투자 대상으로 적합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투자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는 것이 증권이나 부동산에 투자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는 사실을 일깨워 주려는 것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귀중한 고서를 얻었다고 해도 그것을 판매하는 데는 또 다른 지식과 기술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수십 년 경력의 고서점 주인에게도 쉽지 않은 일인데, 수집가가 그것을 터득한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연구 목적으로 고서를 수집하는 경우에는 별 문제가 없다. 설령 처음에는 고서에 관한 지식이 부족하다 하더라도 그것을 연구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레 그 분야에 대해서만큼은 전문가가 되게 마련이다. 또 자신의 연구 분야에 한해서만 수집이 이루어지기 때문에 경제적인 부분에서도 큰 문제가 없을 터이다.
박물관이나 자료실을 설립할 목적으로 수집하는 것이라면 이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다른 목적에 비해 더 오랜 시간과 투자가 요구됨은 물론 일정 수준 이상의 질적 가치를 유지해야 하기 때문이다. 또한 박물관 설립의 목적에 걸맞은 유물을 갖추어야 하며, 개관 이후 지속적인 전시와 연구 주제를 생각하고 자료 수집을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고서를 수집하는 데는 제법 많은 돈이 들어간다. 물론 그 비용은 수집 목적과 주제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분명한 것은 아무리 취미로 고서를 수집한다고 하더라도 만만치 않은 돈이 들어간다는 사실이다. 그러나 고서에 대한 안목과 열정이 있다면 어느 정도 부담을 줄일 수 있다. 술 담배를 끊는다든가, 골프와 여행을 줄인다든가, 그 밖의 다른 여가생활을 고서 수집과 바꿀 의지가 있는 사람이라면 한번 해 볼 만하다. 그렇지 않고 남들 하는 것을 다 따라 하면서 취미로 고서를 수집하는 것은 경제적인 면에서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또 일정 수준 이상의 고서를 수집하는 데는 최소한의 시간이 필요하다. 한 분야에서 웬만한 수준의 컬렉션을 갖추는 데 소요되는 시간은 상황에 따라 차이가 있겠지만, 적어도 오 년에서 십 년 정도는 걸린다. 물론 한 분야의 자료를 수집하는 데 평생을 바치는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다. 일정 수준의 컬렉션을 갖추는 데 걸리는 시간 역시 수집 대상의 주제와 수집가의 안목, 경제력 등에 따라 많은 차이를 보인다.
국·공립 기관에서는 먼저 예산을 세우고 그 범위 안에서 자료를 수집한다. 자료를 수집하는 기간은 고작 일 년 남짓인데, 이렇게 운영되는 박물관은 애당초 많은 문제점을 안을 수밖에 없다. 하지만 처음에는 그렇게 시작했어도 지속적으로 자료 구입에 관심을 갖고 수집한다면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 결국은 누가 계획을 수립하고 추진하느냐에 달린 것이다.
공공기관 중에서는 기증을 받아 박물관 설립을 구상하는 곳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생각은 지극히 관료적인 발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자료 수집에 한계가 있기 때문에 만족할 만한 결과를 기대할 순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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