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4 (화)
9월 20일, 소리꾼 이자람의 판소리 ‘노인과 바다’가 영등포아트홀 무대에 올랐다. 영등포아트홀 기획공연 '시리즈Q'의 ‘주제극장’ 일환으로 진행된 판소리 ‘노인과 바다’는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 소설을 바탕으로 '사천가', '억척가', '이방인의 노래', '추물/살인' 등의 작품이다.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는 판소리 창작자이자 소리꾼인 이자람이 직접 작창한, 2019년 11월 두산아트센터 초연 이래 국내외 다양한 무대에서 관객들을 만난 작품이다.
‘추물/살인’으로 동아연극상 신인연출상을 수상한 박지혜가 연출하고, 무대미술가 여신동이 시노그래퍼로 참여했으며, 이자람의 목소리와 고수 이준형의 소리북 장단으로 2시간의 무대가 풍성하게 채워졌다.
어니스트 헤밍웨이의 소설 ‘노인과 바다’를 책으로 읽으며 느꼈던 감정은, ‘이건 책이 아니라 영화가 아닌가?’였다. 분명 글을 읽고 있는데 눈앞에는 노인, 그리고 노인과 사투를 벌이는 청새치 두 생명체의 긴장감 있는 모습이 고스란히 펼쳐졌다. 당대 최고의 문학이라고도 일컬어지는 이 대작을 판소리로 들려줄 때, 과연 눈 앞에 펼쳐지던 영화 같은 장면을 또 경험할 수 있을 것인지가, 이번 공연을 앞둔 나의 가장 큰 궁금증이었다.
오래도록 많은 무대에서 작창이나 소리를 통해 다양한 무대를 만들어 온 이자람은 희곡이나 근현대 소설을 판소리의 다양한 소재와 형식으로 개발하는 작업을 꾸준히 선보이고 있다. 오랜 시간 그의 다양한 행보에 관심이 있던 터라 오래도록 사랑받고 있는 작품 ‘노인과 바다’의 무대가 더욱 기대될 수밖에 없었다. 작년 10월 관람했던 국립창극단의 ‘나무, 물고기, 달’ 공연에서는 이자람이 음악감독을 맡아 대중적인 무대화와 창극단원들이 주축이 된 신선한 무대를 만들어 보였다. 이번 무대 ‘노인과 바다’는 ‘나무, 물고기, 달’과 다르게 많은 대사나 화려한 무대 연출이 아닌 이자람의 소리로만 무대를 채워 나가기에 어떻게 흥미를 끌어낼지, 어떤 흡입력을 보여줄지에 초점을 맞추고 관람하였다.
외국 고전 소설을 한국에서 무대화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문화가 다른 탓에 공감대를 얻기 어렵고, 그렇기에 그런 부분을 관객들에게 쉽게 설명하는 동시에 감동과 이해를 동시에 주기란 어렵다. 이자람은 우리나라와 정반대의 문화를 가지고 있는 멕시코를 배경으로 한 이 고전, ‘노인과 바다’를 그만의 특출난 상상력과 유쾌함, 관객과 편안하게 소통하며 무대를 장악하는 능력, 능수능란한 재간으로 재해석해 만들어 냈다. 노인이 회를 썰어 먹는 장면에서는 "회는 간장에 와사비를 풀어 먹어야 하는데 그곳엔 와사비가 없다”고 유쾌하게 너스레를 떨며 문화적 차이를 좁혀 나가고자 했고, 관객들에게 편안하게 말을 건네며 자진모리장단과 추임새를 가르쳐 주는 등 관객들이 극에 편하게 참여할 수 있게끔 유도했다. 덕분에 관객들은 무대를 보고 관람하는 데에만 그치지 않고 탄성을 내뱉거나 자유롭게 추임새를 하고, 박수치고 웃기도 하며 편안하게 공연을 즐길 수 있었다.
‘작창’은 새로운 이야기에 판소리를 싣는 작업이다. 판소리가 지닌 특성과 문법을 이해한 후, 이를 활용하여 해체하거나 조합하고, 장단을 선택하며 소리를 구성한다. 가사를 잘 전달하기 위해 음고나 운율을 살리고, 가사의 내용에 맞게 소리의 어법이나 특성을 활용해야 한다. 작창 작업은 다양한 음악적 지식 외에도 수많은 관점과 해석을 고려해야 하며, 작창가의 역량에 따라 작품이 천차만별이 될 수밖에 없다. 이자람은 우리나라 대표 작창가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다양한 작품에서 작창을 해 왔기에 그 명성은 명실상부 누구나 인정하는 바일 수 있지만, ‘노인과 바다’ 작품을 통해 그의 오랜 공력이 더욱 돋보였다.
가장 먼저 눈에 띄었던 건 그의 독창적인 아니리와 다양한 몸짓이었다. ‘아니리’란 판소리에서 음률이나 장단에 의하지 않고 일상적 어조의 말로 하는 부분을 가리킨다. 일상적 어투로 이루어져 있기에 작품을 바라보는 객관적 시선을 유지하는 부분으로, 판소리에서의 아니리는 소리만큼이나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이자람은 특히 동화책을 읽어주듯 편안하게 대사를 전하는 능력이 탁월하여, 그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집중하여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또 바지를 움켜잡고 올려 입는 흉내를 내거나 부채를 상대방의 손인 양 잡고 팔씨름하는 모습, 청새치와 힘겨루기를 하는 등의 다양한 몸짓은 유쾌함과 집중력을 끌어내는 무대 장악력이 특히 돋보였다.
음악적인 부분에서의 작창도 훌륭했다. 관객들에게 자진모리장단을 가르쳐 준 후 ‘역시 산티아고-’ 의 가사를 반복해서 부르는 노래에서는 정박, 엇박을 자유롭게 넘나들며 말 그대로 장단을 가지고 노는 유쾌함을 선보였고, 사람들이 속닥속닥 수군대는 장면은 고음의 속소리로 노래하여 장면과 잘 어우러지게끔 만들어 냈다. 또 청새치를 잡는 장면은 5박인 엇모리장단을 활용하여 긴장감과 몰입감을 최대치로 표현하였다. 그렇게 장면에 맞는 장단과 소리의 톤, 강약과 다이나믹이 한데 어우러지며 매끄럽게 변화하는 가운데 극은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무엇보다 이 무대는 소리꾼 이자람이 나타내고자 하는 주제가 명확하게 드러났다. 청새치와 긴 힘겨루기를 하며 포기하고 싶은 그 순간, 노인은 멍하니 앉아 주변을 둘러보며 말한다. ‘나는 어부다. 나는 지금 바다 위에 있다.’ 그는 힘들고 주저앉고 싶은 순간, 본인이 있는 공간과 자기 자신을 자각하며 정체성을 드러낸다. 지금, 이 자리에서 그가 해야 할 일을 깨닫는다. 바다 위에 있는 어부가 할 일은, 물고기를 잡는 것. 그는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청새치와 싸워 결국 이겨낸다. 이자람은 ‘지금 이곳에서 내가 할 일’에 노인을 대입하여 이야기했다. ‘버티고 또 기다린다.’ ‘나는 왜 판소리를 할까?’ ‘기다리는 것은 결국 나타날까?’ 등의 대사는 이자람이 오랜 세월 소리꾼으로 살아오며 고민했던 물음이 직간접적으로 드러났다.
그는 우리가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노인과 본인을 빗대어 말해주었다. 인생을 살아가며 마주하는 어려움과 고민, 힘든 마음이 올 때도, 우리는 묵묵히 우리에게 주어진 일을 하며 이 삶을 계속해서 즐겁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이다.
관객들의 환호성과 벅찬 감동은 무대가 끝나고도 지속되었다. 이야기의 흐름에 맞추어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무대의 빛과 조명, 이자람의 강인하고 단단한 소리, 소리와 가장 조화로운 합을 보여준 이준형의 장단, 노인과 청새치, 그리고 상어와의 사투를 통해 조명해 보는 삶에 대한 의지와 주제 의식까지. 과연 책을 읽었을 때처럼 눈앞에 푸른 바다가 펼쳐질 것인가 궁금했던 나는, 책과는 또 다른 색다른 영화 한 편을 경험한 느낌을 받았으며, 전통성과 창의성, 현대성이 가미된 창작 판소리 ‘노인과 바다’를 통해 앞으로 나아갈 창작 판소리의 발전, 이자람의 행보가 더욱 기대되었다.
존재하는 그 자리에서, 나만의 정체성으로 묵묵히 지금 할 일을 해내는 것. 바로 노인과 소리꾼 이자람처럼.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끊임없이 집중해야 할 가장 중요한 삶의 목적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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