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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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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77)

단성사, 經營難의 旋風 아래 스러진 一生

  • 특집부
  • 등록 2023.03.10 07:30
  • 조회수 7,925

김종욱

 

소화 5년경에 이르러 단성사의 흥행주 고 박승필씨는 개인적 사업으로 인해서 경제적 파탄을 가져왔다고 하지만 그러나 그가 과거에 남긴 예원에 있어서의 업적은 결코 과소평가할 것이 못된다. 즉 전회에서 말한 바와 같이 그는 김도산일행을 비롯하여 ‘취성좌(聚星座)’, ‘연극사(硏劇舍)’ ''신무대(新舞臺) 등을 스스로 조직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단지 연극에만 치중하지 않았고 한 걸음 나아가서 영화제작에까지 능동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천하기에 분망(奔忙)하였다.


고 나운규(羅雲奎)군의 제작 영화가 십중팔구는 이 단성사의 기획과 진행 아래서 실천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고 박승필 씨의 후일에 남겨놓은 공적을 우리는 다시금 감사하여 마지않는 바이다.


‘아리랑’, ‘벙어리 삼룡이’ 등 고 나운규군의 걸작을 얼마든지 들 수 있는 반면에 그로 하여금 그렇게 만든 말하자면 배후의 힘인 박승필씨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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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벙어리 삼룡이(1964년) 포스터

 

그러나 한번 넘어가기 시작한 나무는 아무러한 힘을 다해도 붙드는 재주가 없었다. 이리하여 단성사는 소화 5년에 이르러 새로운 주인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니 그가 곧 지금까지 내려온 박정현(朴晶鉉)씨였다.


물론 단성사가 박정현씨에게로 넘어오게 된 내용에는 첫째 박승필씨가 작고(作故)를 한 절대적 사실이 원인하였고 다음은 전 주인 박승필씨가 일조(一朝)에 없어지자 남은 관원 전부부터 추천을 받아서 새로이 준비하여논 주인의 자리로 올라서게 되었던 것이다.


만일 박승필씨가 그때까지 생존하였었다 할 것 같으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대 난국에 처하였였다 할 것 같으면 아무리 경제적으로 대 난국에 처하였었다 할지라도 그 기세 그 포부를 가지고 결코 그냥 퇴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흘러간 무대 ‘단성사’ 만이 아는 일이거니 이곳에 중언부언(重言復言) 이야기해서 무엇 하랴.


박승필씨로부터 박정현씨에게로 넘어오자 단성사는 관원 스물 세 사람으로 새로운 경영을 시작하게 되었던 것이니 즉 이들 중의 중요간부의 이름을 열거(列擧)하면 대표에 박정현, 서무(庶務)와 선전(宣傳)에 이구영(李龜永), 악장(樂長)에 서룡운(徐龍雲), 해설 주임에 김덕경(金悳經) 등 제씨를 비롯하여 최병룡(崔炳龍), 서상필(徐相弼), 이병조(李丙祚), 류희성(柳熙成) 등 제씨였다.


이러한 조직과 형태를 가지고 단성사의 스물 셋이나 되는 종업원들은 소화 10년까지 그야말로 한번도 월급다운 월급을 타보지 못하고 오로지 경성의 무대 ‘단성사’를 위해서 헌신적 노력을 거듭하여왔던 것이다.

 

그러자 소화 10년 5월 10일에 단성사는 신축(新築)이 되었던 것이니, 그때부터 집세도 매월 천원씩으로 올라가게 됐고 흥행도 매우 성적이 좋아서 명치좌나 혹은 약초극장에게 떨어지지 않았다. 조선 영화 상설관으로서 처음으로 낮 흥행을 시험한 곳도 이 단성사 무대였고 또한 처음으로 하루 3회씩의 흥행을 시험한 곳도 이곳 단성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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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벙어리 삼룡이(1964년) 한 장면

 

그러나 단성사도 운(運)이 진(盡)하였던지 소화 12년(1937년)에 이르러 박정현 씨 하나만 남겨놓고 이하 스물 두 사람은 일제히 탈퇴를 하고 말았던 것이니 거기에 대한 자세한 내막(內幕)은 이곳에 쓰기를 피하거니와 오늘에 다닥친 결과를 직면(直面)할 때 박정현씨의 개인적 사정이 너무나 그로하여금 과중(過重)한 부담을 지게 하였던 것이 새삼스럽게 느껴지는 것이다.


소화 12년(1937년) 관원 전부가 탈퇴할 때 마지막으로 봉절(封切)한 영화는 "잃어버린 지평선(地平線)”이었다. 그 후부터 과연 ‘단성사’는 잃어버린 지평선으로 오로지 전락(顚落)의 걸음을 떼어놓기에 분주하였던 것이다.


관주 전촌(田村)씨의 미망인(未亡人)으로부터 집을 내놓아달라는 독촉을 받은 것은 올 정월이고 그리고 명치좌 주인 석교(石橋)씨에게로 3만 9천원에 넘어간 것이 바로 올 2월경이라 하니 과연 여기에 이르기까지의 파란중첩(波瀾重疊)한 ‘단성사’의 일대기를 그 누가 눈물 없이 그릴 수 있으랴? 말할 수 있으랴? 오늘의 대륙극장의 새로운 간판을 바라보는 이 그 누가 흘러간 이름 ‘단성사’를 생각지 않을까 보냐. =< 朝鮮日報 >1939년 7월 19, 20, 21, 22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