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7 (금)

[국악신문] 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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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 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85)

화랑세기와 고려도경에 나타난 공희(供犧)물

  • 특집부
  • 등록 2023.03.13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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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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돛단여(왼쪽)과 임수도(오른쪽), 뒤쪽이 위도다. (사진=이윤선)

 

서종원은 그의 글 "위도 띠뱃놀이에 등장하는 띠배의 역사성과 본연의 기능에 관한 고찰"(무형유산 제8호, 2020)에서 괄목할 만한 정보를 추적한 바 있다. 띠배를 띄워 보내는 것과 인당수의 인신공희를 역사적 자료를 통해 분석했기 때문이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여러 문헌에는 항해자들의 신앙을 엿볼 수 있는 내용이 적지 않다. 항해 도중에 특정 해역에 도착하면 신앙물(의례 도구)을 바다에 빠뜨리거나, 무사 항해를 위해 암초 등에 불상을 올려놓고 간략하게 경을 읽었다는 내용을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가 있다. 유독 물살이 센 곳이나 해상사고가 빈번하게 발생한 지점에 도착하면 항해자들은 특별한 의례를 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와 관련된 내용을 『화랑세기(花郞世記)』와 서긍(徐兢)의 『고려도경(高麗圖經)』을 인용하여 설명한다. <그때 풍랑을 만났는데 뱃사람이 여자를 바다에 빠뜨리면 된다고 생각하였다. 공이 막으며 "인명은 지극히 중한 데 어찌 함부로 죽이겠는가?"하였다. 그때 양도 또한 선화로서 같이 배를 타고 있었는데 다투어 말하기를 "형은 여자를 중하게 여기기 때문에 주공을 중하게 여기지 않습니까? 만약 위험하면 장차 어떻게 하시겠습니까?"하였다. 공이 침착하게 말하기를 "위험하면 함께 위험하고 안전하면 함께 안전하여야 한다. 어찌 사람을 죽여 삶을 꾀하겠는가?"하였다. 말을 마치자 바람이 고요하여졌다. 사람들은 해신이 공의 말을 듣고 노여움을 풀었다고 생각하였다>. <신시 후에 합굴에 당도하여 정박하였다. 그 산은 그리 높거나 크지 않고 주민도 역시 많았다. 산등성이에 용사(龍祠)가 있는데 뱃사람들이 오고 가고 할 때 반드시 제사를 드리는데 바닷물이 이곳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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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도 치도리앞 개펄에서 발굴된 문인석 (사진=이윤선)

 

순조로운 항해를 희구하는 뜻으로 어전(御前)에서 내린 풍사용왕첩(風師龍王捷)과 지풍위(止風位) 등이 적힌 부적 13부(符)를 바다에 던졌다는 내용도 곁들여진다. 여기서의 위(位)를 위패나 나무 조각 등으로 해석할 수 있다. 이들 기록과 설화들을 견주어 살펴보면 인당수에 대한 사람들의 관념을 엿볼 수 있다. 내가 주목했던 것은 거타지와 작제건 설화를 비롯한 심청전의 인당수 이야기가 포획하고 있는 동아지중해로서의 물길과 거센 파도, 그 안에 담은 희망과 소망의 투사다. 고대로부터의 연안항로와 사단항로 중 유독 물길이 험한 곳들이 있었고 이 장소를 매개 삼은 사고체계나 대응방안들이 실제 의례는 물론 문화적으로 재해석되어 각종 모티프로 기능해왔다는 점에서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