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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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7국악신문 편집위원 구성 국악신문 특집부 신문사 기자들의 기본 업무는 기획, 취재, 편집, 고정 코너 집필 등이다. 그리고 이를 지원 또는 자문하는 팀이 고문이나 각종 위원회이다. 이는 상임이 대부분이나 비상임일 경우도 있다. 「국악신문」의 고문과 편집(자문)위원은 비상임으로 운영되었다. 이 기구의 존치는 「국악신문」의 운영상을 보여주는 단서이기도 하다. 즉, 광고 수주, 특집기획안(案) 제공, 취재 협조, 고정란(연재 코너) 집필진 확보, 교정 및 교열 지원 등에 직 간접적인 관여를 하기 때문이다. 이의 구성은 전문성을 전제로 하지만 대대는 사주의 인적 네트워크에 의지한 것이다. 「국악신문」의 고문과 편집자문위원단 구성은 창간부터 있었겠지만 명시적으로 지면에 표기한 것은 제37호(1996년 4월 2일자)부터이다. 이 때부터 제호 밑에 발행 일자와 호수를 기입하고 그 밑에 판권란을 두는 편집 형태가 이뤄졌다. 이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發行編輯人 金浩奎 인쇄인 김영재 사진 정범태 고문 고정패널 편집위원 이명준 오형록 채치성 우실하 변영호 그림 삽화 남소유” 이상과 같이 고문과 편집위원과 삽화 담당을 표시하였다. 이 판권란은 다음 호인 38호에서는 우실하가 편집국장으로, 직위가 바뀌게 된다. 이로부터 운연과 편집 체제면에서 안정성을 확보한 것이다. 창간 후 2년만이다. 고문 정범태에 대해서는 3회, 편집국장 우실하에 대해서는 1회에 걸쳐 이미 언급하였다. 이번호에는 가장 오래 동안 판권란에 표기 된 채치성 위원을 중심으로 살피기로 한다. 이들은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일부는 전문성을 활용하기 위해 위촉한 이들이 있으나 대개는 발행인 김호규의 주변 인물들로 주요 취재 대상이거나 고정 필자들이다. 전문성 활용을 위해 위촉한 이는 사진가 정범태 고문과 삽화를 담당한 남소유 화백, 그리고 편집국장 우실하이다. 이 중 남소유 화백은 소위 ‘인사동문화’를 형성하고 있는 유명 화가 중 한 분이다. 특히 현장 누드 크로키로 명성을 갖고 있기도 하다. 이명준 위원은 지난 해 김호규 사장의 1주기 추모행사 ‘씻김’에 참여하기도 한 오랜 지우이다. 변영호 역시 지우로 제42호부터 잠시 편집인 직위로 활동하기도 했다. 오형록은 이력이나 활동상이 미상이다. 채치성은 제98호(2000년 10월 25일자) 까지 편집(자문)위원으로 활동했다. 채치성(蔡致誠, 1953년생)은 당시 KBS라디오 국악 담당 프로듀서로 국악계의 위치에서 「국악신문」에게도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다. 본보 제43호 제1라디오 ‘흥겨운 한마당 소개’에 따르면 1980년 서울대 음대 졸업 후 서울 미림중학교 음악교사로 활동하다. 1981년 KBS 공채 9기로 입사, 제1FM ‘흥겨운 한마당’ 담당 PD로 재직했다. 그리고 1997년 사직하고 프리랜서 PD와 MC로 활동했다. 비록 50분 정도의 주간 프로그램이지만 KBS의 전국 대상으로 권위와 인기를 갖고 있었다. 이후 국악FM 방송 개국으로 편성팀장, 본부장, 그리고 2013년 국악방송 사장 취임으로 영향력을 발휘했다. 국악방송 사장 취임은 그간의 경험을 통해 ‘국악의 대중화·세계화’라는 화두에 기여하는 계기였다. 단순히 ‘관 주도’로만 전통한류의 세계화를 밀고 가는 것에 한계를 인정하고 다양한 자원, 새로운 생각들을 더해 전통문화 콘텐츠로 승부를 걸 수도 있는 계기였다. 취임을 즈음한 그의 발언에서 이에 대한 의욕을 확인할 수 있다. 물론 이런 자리 때문만은 아니었다. ‘꽃분네야’ 등 국악가요 작곡과 음반 출시, 지휘자, 대한민국 작곡가상, 제15회 대한민국국악제 연출, 제37회 전국민속예술제 총연출 등의 활동이 돋보였기 때문이다. 이 과정에서 본보는 ‘흥겨운 한마당’ 소개 기사, ‘채치성 편성팀장을 찾아서’ 같은 탐방 기사를 통해 권위를 확대시켰다. 현재는 유튜부 채널 ‘채치성의 국악가요TV’(GugakgayoTV)를 운영하고 있다. 채치성 편집위원은 국악신문 운영에 영향력을 준 대표적인 국악이론가이며 언론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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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6정범태론 3회에 걸친 국악신문 편집고문 및 풍류방 운영자, 사진작가, 국악인 전문 사진가로서의 정범태를 조명했다. 이번에는 인간으로서의 ‘정범태론’을 정리하고자 한다. 이 ‘정범태론’은 언론인이며 문화인류학자인 박정진교수가 1998년 ‘발가벗고 춤추는 기자’(화담출판)에 수록한 글이다. 세계일보 문화부장 재직시 정범태 선생과 함께 한 인연으로 한 인간의 인물론을 쓴 것이다. 1996년 세계일보 사진기자를 끝으로 퇴직한 시점에서 일본 대판 상선전문학교를 다니다 해방이 되어 귀국한 이야기로부터 전개되었다. # "4.19때 총 맞고 5.16때 감방가고 40여년 기자생활에 무일푼~” # "인간 정범태 이야기는 한 편의 장중한 드라마이다. 한 마디로 그는 ‘살아있는 신문사이면서 기자사’이다. 평범한 한 인간이 제국주의와 전쟁과 가난과 혁명의 과정이라는 역사의 질곡과 부침을 거치면서 ‘수난자’가 되고, 때로는 ‘도피자’가 되고, 때로는 ‘작은 영웅’이 되지 않을 수 없었던 이야기이다.” # "그의 인생은 정직하고 근면했고 솔직했다. 아마도 그가 사진을 배우지 않았다면 6.25때 남원에서 요정을 출입하면서 인연을 맺었던 광대의 길로 들어섰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내 뱉는 촌철살인 하는 재담이나 풍자, 익살, 촌평은 듣는 이로 하여금 어지럼증을 느끼게 한다.” ‘정범태론’의 일부를 제시했다. 필자가 묵계월선생 제자 남은혜 명창의 음반 작업을 하던 2009년 식사자리에 함께했던 경험이 있다. 그 때도 작은 카메라로 좌중을 자연스럽게 스케치하고 설렁탕이 나오자 여지없이 촌평을 날리는 것을 들었다. "이 집(인사동 이문설렁탕)은 말야 1대 주인장이 토렴하는 맛이 없어 아쉽지만 그래도 국물의 담백함에 뒤 따르는 육향은 그대로야. 최고야! 이 맛 때문에 여길 오지”, 예리했다. 80 노구(老軀)임에도 목소리도 힘이 있었다. 지난 회에서도 언급했지만 이 글에서도 "6.25때 남원 백사령부 문관 사진가 시절 요리집 드나들던 경험”이 되풀이하여 나온다. 이 경험은 파르티잔과의 전투 참상을 통해 민족의식에 눈뜨게 했고, 리얼리즘 사진작가의 40년을 가게 했다. 또한 틈틈이 만난 남원 일대의 당골 굿판에서 얻은 소리길로 어느 자리에서나 단가나 육자배기로 좌중을 꼼작 못하게 하는 ‘아마추어 명창’이게 하여 평생을 ‘풍류쟁이’로 살게 한 원천이었다. 이를 예사로 볼 수 없다. 한국 민중, 민족문화의 핵심인 당골(巫)에서 한국의 혼을 발견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한 인간에게 육화 된 특정 경험은 평생의 자산이 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국악신문 제39호(1996년 5월 7일자) ‘정범태 96사진기자상 선정’ 기사(허현숙 기자)에는 40년을 회고하는 인터뷰가 실렸다. 정년 후의 삶에 대한 이야기가 주로 ‘풍류방’ 운영에 대한 기대도 담겨있다. 박정진 교수의 글이 이 기사의 연장선상에서 이뤄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글의 마지막은 정선생의 지론을 제시했다. 하나는 "삶은 즐거운 것이다”. 둘은 "죽음을 두려워 하지 않으면 도인이다”. 셋은 "섹스도 생활이다”. 그리고 이렇게 끝을 맺었다. 친지-"이제 그만 일 그만 두고 쉬지” 정선생-"내가 뭔 일, 좀 놀았지” 친지-"아니, 놀다니?” 정선생-"사진통 들고 놀았을 뿐이지” 풍류인답다. 이로부터 23년간 더 논 후, 2019년 9월 18일자 한 신문의 궂긴소식은 선생의 마지막을 이렇게 알렸다. 생을 마친 15일, 3일 후이다. "고인의 뜻에 따라 주검은 가톨릭성모병원에 기증했으며, ‘외부에 알리지 말고, 빈소도 만들지 말라’는 유지를 받들어 모든 장례 절차가 끝난 뒤 지인들에게 알려 드립니다."(2019년 9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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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5정범태가 밝힌 사진 설명 정범태 선생이 남긴 국악계 에피소드는 끝이 없다. 지난 회에 이어서 이번에도 귀한 에피소드를 소개하기로 한다. 다음은 만정 김소희 선생의 등장에 대한 것으로 12세 때의 일이다. 승주군 낙안면 송만갑 선생 댁에서 소리 공부를 하고 있었다. # "순천에 협률사가 들어왔다. 당시 협률사에는 정정렬, 이화중선, 박록주 등이 있었는데 순천에서 노래로 낙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그때 이화중선이 송만갑 선생에게 인사를 왔다. 이때 송만갑 얼굴에는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는 듯 회색이 만면했다. 그래서 이화중선이 궁금해서 무슨 말이라고 붙이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요즘 좋은 일이 있다. 보물이 하나 들어왔어’ 송만갑이 입을 열었다. ‘선생님 무슨 좋은 일인데요?’ 이화중선이 선생의 앞에 가서 조바심을 냈다. 송만갑은 말을 할 듯 말 듯 하더니 입을 다물었다. 이화중선은 선생이 그러면 그럴수록 궁금증이 더했다. 이튿날 이화중선이 다 선생에게 물었다. ‘보여주면 달라고 하지 마라.’라고 했고, 이화중선은 ‘절대로 달라고 하지 않을게요.’라고 했다. 선생이 옆방에 대고 누군가를 불렀다. 그러자 모깃소리로 예라고 답하며 나왔다. 볼이 발그레한 소녀였다. ‘아가 단가를 하나 해 봐라’ 아가가 단가를 뽑았다. 이화중선을 몇 소절을 지나지 않아 타고남 목이란 것을 알았다. 이화중선이 말했다. ‘선생님 아까 그 약속 못 지킬라요. 내가 데리고 갈라요. 저 주세요.’ 이렇게 하여 이화중선이 데리고 서울로 와 지도를 하게 된 애기가 바로 김송희였다.” 이렇게 이화중선의 눈으로 명창의 재목으로 선발된 김소희는 정정렬의 문하를 거쳐 한갑득, 한애순, 박동실 명인 명창을 거쳐 판소리를 취입하여 명창으로 섰다. 목이 좋은 제자를 두는 것이 얼마나 뜻있는 일인가를 알게 하는 에피소드이다. 김소희는 스승들의 소리 중에서 장점만을 자기 것으로 삼아 독특한 소리를 만들어 냈다. 이로써 그의 이런 특징을 ‘섞어제’라고도 하고 ‘만정제’라고도 한다. 제자로는 안숙선, 신영희, 박윤초, 박계향, 성창순, 오정혜 등이 있다. 다음은 일제강점기 동기(童伎)가 머리를 올리는 이야기다.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평양기생 영산홍의 사연이 있는데, 1930년 조흥은행 평양지점 민 두취(전무)가 영산홍의 머리 올린 값을 하기 위해 은행 지점을 냈다는 얘기다. 정 선생은 일반적인 머리 올리는 값을 간단히 정리하였다. #"일제 때 동기의 머리를 올리는 사람은 대개 큰 부호나 토호, 유지, 조정의 친일파 대감, 도, 평의원 정도는 되어야 머리를 올린다. 동기는 권번에서 머리를 올려 줄 동기를 찾아야 한다. 서방을 얻으면 한 재산을 받는데 이때 그동안 빚진 것을 갚기도 한다. 동기는 서방을 정하고 요리집에 나가는 것이다.” 오늘날에는 이런 경우가 있을 수 없지만 1930년대까지만 해도 동기가 머리를 올리는 것은 다 이런 경우였으니 기생의 운명이었던 것이다. 1930, 40년대 동기가 있어 많은 에피소드를 낳은 요정은 남원의 명문장, 진주의 봉황각, 목포의 청수장, 나주의 영산관, 진주의 서울관이 알려진 곳이고 서울의 명월관, 국일관, 식도원, 천양각을 꼽았다. 1930년대 초 진주 촉석루에서 명창들이 사진을 찍었다. 이 사진은 장소와 시기 정도만 알려졌을 뿐 그 면면을 밝히지 못하고 전해졌다. 1930년대 진주는 한 집 건너 기생집이 많아 명창들이 모여들었다는 얘기의 배경으로, 또한 어떤 유명한 명창이 이 사진 중에 들어 있을 것이란 정도로만 설명되는 사진이었다. 그런데 정범태 선생이 바로 이 사진의 중요 면면들을 밝혀냈다. 조상선(창극), 송만갑(명창), 한성준(고수), 김창룡(명창), 이동백(명창), 오태석(가야금), 정정렬(명창) 등이 함께 찍었다. 이 사진 설명은 1998년 지상을 통해 알렸는데, 정 선생이 이 사진을 소장했던 명창으로부터 확인한 것이다. 이 렇게 정확하게 밝힌 것은 전공을 살린 업적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국악인들과의 교류가 있었기에 가능한 성과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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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4정범태가 남긴 국악계 에피소드 1970년대만 해도 판소리와 초기 명창들의 더늠이나 사승관계나 공력 정도에 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책은 1940년에 발간된 정노식(鄭魯湜, 1891~1965)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와 1966년 발간된 박헌봉의 「창악대강」(昌樂大綱) 정도이다. 이런 정황에서 70년대 명인명창들의 선대와의 관계 등을 살필 수 있는 자료는 거의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는 순전히 발품으로 남도지역을 다니며 ‘째비’와 ‘비갑이’의 관계를 확인하지 않고서는 얽키고 설킨 관계를 알기는 쉽지 않다. 이 시기 이 부분에 대해 구체적인 정보를 갖고 있는 이는 정범태 선생이 유일했다. 당사자 중에도 밝은 이가 있긴 하지만 이 들도 자신과 관련된 동호간 주변 정황은 알아도 전반적인 관계는 알 수가 없었다. 이런 정황에서 정선생은 남도 무업 집안의 정보는 값진 것이었다. 그래서 이 시기 정 선생 남긴 에피소드는 다른 곳에서는 얻기 어려운 정보이다. 국악신문에 연재된 일련의 기사도 그래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정선생이 자주 한 말이 있다. 필자도 10여년전 인사동 ‘이문설렁탕’집에서 설렁탕을 함께하며 들은 말인데, "뭐니뭐니 해도 당골네는 동혼간여야 족보가 있는 것이고, 화류계에서는 예능보다 이팔청춘이 무기고, 화류계 출입 한량은 남의 돈으로 대접받는 이가 진짜 한량이다”라는 말이다. 이런 말은 실제 만나보고 겪어보아 체험적으로 느끼지 않으면 할 수 없는 말이다. 이제 제시하는 에피소드는 실속 있는 것들이다. # "갑(甲)이 아닌데도 갑인 척하는 것을 비가비라고 한다. 비가비라고 해서 모두 세습당골만 못하다고 할 수는 없다. 뛰어난 이들이 있다. 대표적인 예로 권삼득 명창을 들 수 있다. 또한 해방 후 남원의 한량으로 불린 박춘광 역시 비가비다. 북으로 기능보유자가 된 김명환(金命煥)도 비기비다. 구례 출신 김무규(金茂圭)도 선비광대로 비가비였다.” ‘권삼득 제비가 설렁제’라는 말이 있듯이 권삼득제·덜렁제·권마성제라고 특화하여 말 할 정도로 독특한 더늠을 가진 명창 권삼득이 비가비란 점은 의외이다. 대단히 특출난 인물임을 알게 하는데, 당골 출신이 아니어도 좋은 선생과 공력으로도 명창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런 점을 정 선생은 강조하여 여염한 소리꾼들을 격려하였다. # "명창의 길을 택한 광대는 소리공부를 마친 후 우선 소리를 평가 받기 위해서 부호의 회갑잔치나 고희잔치에 이름 난 명창을 따라 놀음청에서 선을 보이게 된다. 여기서 잘 한다고 평가를 받으면 다음 기회에 그 사람을 천거하게 된다. 이렇게 되어 관헌에 알리고 아전들이 알면 관가에 일이 있을 때는 수시로 초대된다. 이것을 광대들은 ‘놀음 난다’고 한다. 놀음청에서 제아무리 소리를 잘하는 광대라도 소리를 듣는 순간에는 아무개 명창 칭호를 듣지만 놀음이 끝나면 ‘하게나’ 또는 ‘하소나’ 등의 반말을 듣게 된다. 이 꼴이 못 마땅한 광대는 놀음청에 서지 않고 포장굿이라도 창극단을 만들어 지방 순회를 하면서 여러 사람들의 환호 속에서 인기를 독차지하며 살아가는 길을 택한다. 창극단의 박후성 같은 인물이 대표적이다.” 구한말에서 일제초기 소리꾼들의 두 가지 길, 천시 받기 보다는 힘들어도 대중을 상대로 한 광대를 선택하는 이유를 말 했다. 다음은 2, 30년대 권번 동기(童妓)의 데뷔 과정을 보여준다. 30년대를 기준으로 한다면 명월관(明月館), 국일관(國一館), 식도원(食道園) 등이 대표적인 요리집으로 대개 이름 있는 권번의 동기가 첫 무대로 서는 곳이다. 소리를 통과한 동기에게 남은 주문과 합격 요건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다. # "자 이번에 손을 한번 벌려 보아라(춤을 춰 보란 말이다). 그러면 눈치 빠른 고인(악사)들은 춤 반주로 들어간다. 그 때 살풀이 한 자락쯤 추어 보이면 좌중에선 알아본다. 춤을 잘 추게 되면 좌중에선 종합 품평을 하는 소리가 이곳저곳에서 쏟아진다. 얼굴 잘 생겨서 한합이요, 소리 잘해서 이합이요, 춤까지 곁들이니 삼합이 맞아 떨어지는 군아. 기대 해 볼만 한 재목이군아.” 다음은 굿판의 상황, 경기굿과 남도굿의 악기 편성의 차이를 알려 준다. # "전라도 무악에 아쟁이 끼어든 이유는 바로 가장 슬픈 계면조를 잘 끄집어 낼 수 있는 까닭이고 경기 무악은 담백하여 징을 많이 쓰질 않는다. 전라도는 징, 장구 등 타악기만 있으면 되지만 -여기에 구음이 보태지면 흥이 나고 넌실(발림, 춤)이 제대로 풀린다.-경기는 징과 장고로는 굿이 안된다. 최소한 피리, 젖대, 해금 등의 관악기와 장고는 갖추어야 한다. 서울의 새남굿(시킴굿) 중 자진함이 나오는데 그 음악은 새미클라식에 속하는 고급스런 것이다. 전라도 한량들은 굿판에 끼어들어 징이나 장구로 굿바라지를 할 수 있으나 경기도는 그것이 불가능하다.” 굿음악은 전문가가 아니고는 구분이 쉽지 않는 분야이다. 70년대 이만큼의 차이를 밝힌 것은 직접 굿판을 함께하지 않고서는 대비시킬 수 없을 것이었다. 오늘의 관점으로도 이 정도의 에피소드는 별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당시로서는 20여년 간이나 굿판을 체험한 정 선생이 아니었으면 불가능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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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3국악신문 특집부 최초의 국악 평론가 정범태 정범태 선생을 우리나라 최초의 국악평론가라고 하면 의아해 할 이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70년대 활동한 원로 국악인들은 이 말에 동의할 것이다. 그는 이미 70년대 우리가 꺼내지 못할 말을 대놓고 했던 인물이다. 바로 "권번은 음악천재들이 다니는 줄리아드 음대이고, 당골은 대대로 예능인을 배출하는 예능 패밀리다”라는 말을 당연시했던 인물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많은 이들이 이 말에 동의하지만 당시로서는 이를 자신있게 전거를 들어 입증 해낼 사람은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귀명창이며 국악역사를 꿰는 이론가라는 사실을 적어도 명무 한영숙선생이나 가야금 명인 성금연선생이나 또한 명창 박귀희 선생은 인정했던 것이다. 이 분들은 정선생이 국악 공연장에 나오면 "운동 나왔어요?‘라고 인사를 하는 처지였다. 이 말은 춘향가 어사출도 대목에서 낌새를 채고 먼저 도망가는 눈치 빠른 인물인데, 명인들 사이에서는 국악전반을 훤히 알고 있는 이를 말하기도 한다. 이렇듯 정선생의 평론가적 능력을 아는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정선생의 야사적(野史的) 국악계 입문 동기는 이렇다. 1951년부터 지리산 파르티잔 토벌작전에 기록사진을 찍는 문관으로 근무를 하게 되었다. 종군기자처럼 전투현장을 따라다니며 전과(戰果)를 사진으로 기록하는 임무였다. 이 때 경찰 지리산 전투사령부가 남원경찰서 자리에 있었고, 육군 백선엽사령부는 남원농업학교 자리에 있었다. 이 두 곳의 파르티쟌 토벌작전 현장에 때마다 오가야 했다. 그래서 일이 없는 날이면 군경 간부들이나 지역 유지들과 어울려 요정출입을 자주 하게 되었다. 당시 남원 지역에는 남선관, 부산관, 김천관, 춘향각, 방림원 등이 이름난 요정인데 여기에는 전국의 내노라는 명인 명창들이 어려운 전쟁통 말기를 의탁하고 있었다. 이곳에서는 소리의 고장답게 풍악이 넘쳐나고 있었다. 정선생은 총각인데다 전쟁통이지만 영관급 군인과 총경급 경찰이나 알만한 지역 유지들과 함께 출입하여 대우를 받는 인물이 되었다. 이 중에 정선생이 자주 출입하는 곳이 요리와 풍류로 이름이 난 남선관(南鮮館)이었다. 남원읍에 있으며 입구에는 큰 소나무가 있고, 전형적인 한옥형태인 ‘ㅁ’자 기와집이었다. 그런데 정선생이 말로는 풍류가 마음에 들어 간다고는 하지만, 기실은 이곳 기생인 성향순이란 여인 때문이었다. 전하기로는 미색은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그런대로 단가를 비롯한 소리는 정선생을 유혹할만 했다고 한다. 이 여인이 정선생의 첫사랑으로 다가왔다. 정선생으로서나 성향순으로서나 며칠에 한번씩 기관총 소리와 대포의 포연에 놀라는 상황에서 언제 어떤 일로 생을 마감할지 모른다는 막연한 상황에서 서로에게 필요했고, 그럴만한 청춘의 시절이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전쟁통에서도 사랑은 꽃 피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서서히 몸과 마음을 가까이 해가고 있던 어느날, 연인이 정선생에게 매달려야 하는 일이 발생했다. 바로 오빠가 ‘빨갱이’에게 부역했다는 죄로 구속이 되었다는 것이다. 오빠를 구해달라는 하소연을 해 온것이다. 당시 남원지역에서 이런 혐의로 구속되는 사례는 흔한 일이었다. "밤엔 공산당, 낮엔 자유당”이란 말 대로 양쪽에서 공격하는는 처지였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사랑을 피워가는 첫사랑의 가족인지라 이런 처지는 피부에 닿은 일이 되었다. 정선생은 여러 방도를 찾았다. 군경 간부를 통해 사정을 했다. 일이 발생한지 10여일이 지나서야 오빠에 대한 정보가 잡혔다. 다행히 족청계열에서 파악하기로는 누명을 쓴 것이란 것이다. 결국 다리를 놓아 조경위라는 상훈부 경찰의 도움으로 자신이 보증을 서는 것으로 석방을 시켰다. 이 일로 정선생은 여인의 집에 초대를 받아 깊은 환대를 받았다. 순창군 순창읍 인계면 섬진강 상류에 자리잡은 70여호 되는 마을에서 살만큼 사는 집으로 보였다. 그런데 방에 들어서니 가야금이 세워져 있고 징 장고 북이 놓여있었다. 이름난 당골집안이었던 것이다. 후에 알게 된 것이지만 근동에서는 외삼촌 등과 함께 삼재비 음악으로 소문이 난 집안이었다. 여인은 이를 굳이 내색하지 않았으나 정선생은 속으로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이미 이 일대 당골네가 음악적으로 뛰어나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에 계보나 조직을 깊이 있게 이해할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었다. 이 날 출소한 오빠도 만나고 음식도 후하게 대접을 받았다. 이 일이 있고나서 둘 사이는 더 가까워졌다. 곧바로 소위 ‘기생살림’을 차리게 되었다. 관례대로라면 금은으로 된 장신구는 물론 집안 가구며 살림살이를 해 주어야 하는데, 전쟁통에 객지살이 문관이 그렇게 할 처지가 못 되었다. 이런 사정으로 정선생은 명분상으로는 국악인을 애인으로 둔 당골집안 동간이 되었다. 이렇게 하여 민족음악이 태동하는 국악 속에 살게 된 것이다. 이 덕에 정선생은 누구 못지 않는 당골네들의 변(은어)에 능통했고, 춤 음악을 알게 되고, 동작과 행위에 리듬과 절도와 멋이 스며야 제대로 된 풍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로부터 국악인들의 모습을 사진기로 찍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쉴 틈만 나면 전북 일대의 굿판이며 소리판이며 춤판을 물어물어 찾아 다녔다. 그래서 누구 보다 먼저 박초월 명창 모친이 유명한 ‘봉안지무’임을 알게 되었고, 지무의 무가가 판소리요, 무악이 민속악의 본향임은 물론, 이를 잘하는 세습무는 동간이라야만 뛰어난 패밀리가 된다는 사실도 깨우쳤다. 그러다보니 "팔도 동간(同間) 따지고 보면 안 걸리는 사람이 없다”는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그 계보는 세습당골로 연결되는 구조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파악했다. 동간이란 말은 같은 세습무 사이라는 말이고, 이에 대비되는 말이 비가비(非甲)로 갑(세습무)이 아니면서 갑인 체 하는 것을 말한다. 그런데 이 동간의 세계를 그때나 지금이나 이해하기가 쉽지가 않다. 이를 정선생은 아주 쉽고, 구체적으로 피력한 바 있다. 정선생의 구술에 기반하여 문화인류학자 박정진 교수가 엮은 전기 「발가벗고 춤추는 기자」(화당, 1998)에 한 대목이 그것인데,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동간은 혼인을 할 때 여자 집에 청혼이 들어오면 남편 될 사람이 무얼하고 있는가를 묻는다. 남편이 소리광대면 청혼 말이 오가고 거의 혼사를 정할 무렵에는 바느질과 음식을 잘 가르친다. 한편 남편이 될 사람이 무업에 종사하면 필연코 아내가 될 사람은 굿음악(굿 바라지)를 해야 하기 때문에 굿(어정) 학습을 가르친다. 특히 남편이 될 남자가 큰아들인 경우는 대다수가 시어머니가 하는 무업을 물려받기 때문에, 부인이 될 여자의 친정에서는 일년 후 혼사를 하기로 결정하면 친정 어머니나 혹은 일가 친척의 숙모나 친척 중에서 굿을 잘하는 사람이 심혈을 기울여 어정학습을 가르친다." "새며느리를 들인 신랑집은 식구들이 다 모여서 새아기의 어정학습을 방안놀음에 붙여 들이면서 오디션을 본다. 여기서 시아주버니는 피리를 불고, 시동생이 젓대를 불고, 시당숙이나 친척 중에 장고를 치며 시어머니가 징을 친다. 가족놀음을 통해 새아기의 어정학습을 평가한다. 열두거리 굿 중에 가장 친정에서 자신있게 하던 대목을 한 두 거리를 해보라고 시켜 본다. 첫째 청(목소리의 키)을 듣는다. 상청이냐, 중청이냐, 하청이냐를 판별한 후 대개 중청으로 굿을 시작한다. 둘째 발림을 본다. 굿을 하면서 지전든 신칼을 흔들면서 가벼운 춤을 추는 것을 발림(제스처)이라고 한다. 가족들이 모여 새 식구의 굿을 듣고 덕담을 나누며 칭찬을 한 후-청 좋고 발림 좋고 태도 좋고 나무랄데가 없네. 다음 어정 때는 바로 어정판에 서게-라고 합격을 시킨다.” 정선생은 이미 70년대 우리나라 국악계의 계보를 정확하고, 구체적으로 파악한 인물이다. 그래서 우리는 정선생을 우리나라 제1호 국악평론가라고 하는 것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하게 된다. 그래서 정선생이 국악신문에 연재하며 기록한 명인 명창들의 혈연적이고 정서적 접근한 계보와 에피소드는 소중한 '국악의 역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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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2세계적 사진가 정범태 지난 회 ‘편집고문 사진작가 정범태(鄭範泰)’는 국악신문의 편집진용이 갖춰지는 상황과 그 기여 인물의 한 분으로서 정범태 고문을 언급하였다. 그런데 한 독자로부터 "고문으로서도 기억될 분이지만 사진작가로서의 정선생은 세계적인 분이시다. 사진작가 정범태 선생에 대해 너무 소홀한 듯하다”라는 아쉬움을 전해왔다. 이에 국악신문과 인연을 맺는 1990년대 이전의 초기 ‘세계적인 사진가 정범태’와 현장 에피소드를 통해 선생의 생애를 조명하기로 한다. 작품으로서의 사진이 있다면, 기록으로서의 사진도 있다. 때론 기록으로서의 사진이 사실의 힘을 발휘할 때는 작품으로서의 사진보다 더 강한 여운을 준다. 초기 작가 정선생의 기록 사진을 두고 하는 평가다. 사진작가 40년 7개월, 1928년 출생에 1956년 사진가로 출발, 조선일보, 한국일보, 세계일보 등에서 보도사진을 찍었으니, 2000년 73세까지 현역으로 활동 한 것이다. 그리고 어록도 작품만큼이나 많이 남겨 회자되고 있다. "리얼리티야말로 사진의 본질이다" "독자 마음을 움직이는 사진이 좋은 사진이다" "순간, 순간이 변하기 때문에 처음 느꼈던 생생함을 독자에게 바로 전해야한다" "화면에 인간이 없으면 생명력이 없다는 사진이다" "셔터를 누를 힘이 있는 한 정년이란 있을 수 없다" "사진이(글로 된) 기사와 중복되면 절대 안 된다. 편집자들은 '유족들이 오열하고 있다'는 기사를 실으면서 오열하는 유족 사진을 실으려 한다. 하지만 이것은 중복이다. 사진은 자체가 기사이므로 독립성이 있어야한다. 나는 이것을 갖고 40년 동안 싸워왔다." "나는 스스로 '사진작가'라고 칭해 본 적이 없다. '사진작가'라는 말을 들으면 왠지 부끄러운 생각부터 든다. 사진은 암실에 앉아 만들거나 조작하는 것이 아니라 발로 뛰며 하는 것이라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상의 지론을 증명이라고 하듯 국내외 유명 콘테스트에서 수상하고, 그에 따른 일화를 남겼다. 1961년 <아사히신문> 주최 국제사진전에서 10대 걸작으로 선정되고, 세계사진연감에 수록되는 것을 시작으로 많은 국제적인 상을 받고, 정년 후에도 두 번이나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내가 걸어오고 기록한 일들이 격동의 한국현대사와 분리해서 생각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일제 치하에서 유년기를 보냈고 해방과 함께 6ㆍ25를 맞았으며 지리산 밑자락에서 빨치산을 토벌하는 현장을 문관으로서 카메라에 기록했다.” 1955년 조선일보 입사 전의 활동을 보여준다. 이런 출발선이었기에 사실주의 사진의 진정성을 육화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내면의 이미지를 형성하고, 이를 다시 기억으로 떠올려 눈으로 확인할 수 있는 형태로 표현된 사진, 이는 ‘스키마(Schema)’이다. 직관적이고 반성적 지능을 수반하는 이 강렬한 스키마가 리얼리즘 사진가 정범태를 형성시킨 것이다. 이에 의해 누구보다 치열한 역사 현장 사진가의 길을 걷는다. 곧 필화사건(筆禍事件)으로 362일간 징역을 산다. 1962년 4월 16일자 한국일보 3면 톱 기사는 ‘쫒겨난 관광'이란 제목의 사진이 수록된다. 이 때문에 계엄 고등군법회에서 재판을 받는다. 소위 ‘강화도 전등사 보도 사건’이다. 5.16군사정변으로 탄생한 박정희 정권은 폭력배도 철저히 단속하여 사회정화를 완수했다고 자랑한 터다. 그런데 "폭력배 난동에 상춘객 불편"이란 기사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하자 군사정부의 실적을 훼손하여 북한에 이롭게 하였다며 연행한 것이다. 어처구니 없는 군사정변 직후의 상황이 빗은 사건이다. # "피고는 강화도 현지 사건이 설사 그렇다고 하더라도 인근 파출소나 헌병대에 알려서 사건을 무마함이 옳은 줄로 아는데 기자라는 신분의 영웅심리가 작용해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고무, 찬양하였으므로 징역 3년을 구형한다." 1962년 5월 10일 경기지부 계엄 고등군법회의 첫 공판, 판사의 선고문 일부이다. (전 내무부 장관)김치열 변호사가 무죄 주장을 펼쳤지만 군 검찰은 정범태 기자에게 징역 3년을 구형했다. 이 사건으로 정선생은 365일간의 투옥 후 1963년 4월 16일 형 집행정지로 석방이 되었다. # "치기 어렸던 시절, 해외 사진 콘테스트에서 수상을 하며 내 사진에 대한 평가가 통했다고 자부했던 때가 있었고 '독침'이라 불리며 특종의 순간을 쫓기도 했다.” 정년후 노년의 한 인터뷰에서 초기 유명세를 회고한 대목이다. 이제 다음 5장의 사진을 통해 초기의 기록 사진과 활동상의 일면을 정리하기로 한다. [사진1]은 한국일보 재직시 ‘쫒겨난 관광’으로 필화를 입은 사진이다. [사진2]는 정선생이 1963년 4월 16일 형 집행정지로 서대문형무소에서 석방되어 나오는 순간 웃는 모습을 한국일보 최정민 기자가 찍었다. [사진3] 은 남대문 시장 좌판의 ‘열쇄장수’이다. 1958년 일본 아사히신문 국제사진전과 미국 US카메라 콘테스트 입상, 1959년 영국 런던타임즈 국제사진전에서 여러 작품으로 수상한 이후, 일본 아사히신문 국제살롱에서 수상한 작품이다. [사진 4] ‘결정적 순간’이란 작품이다. '사진가 정범태'를 세계에 알리게 된 사진이다. 1961년 경기고등군법재판소 공판장, 5.16군사 정권의 통치로 인해 누군가의 비위를 거슬렸다는 이유로, 또는 근거 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했다는 혐의로, 때로는 먹고 살기 힘들다는 푸념을 했다는 이유로 무고한 시민들이 군법 재판에 회부되곤 했었다. 이런 정황을 보여준 사진이다. 많은 에피소드를 담고 있는 만큼 세계적으로 알려진 사진이다. 선생이 박힌 정황이다."창문으로 한 줄기 햇살이 들어오고 판사가 막 판결문을 낭독하려는 긴장된 순간, 어디선가 자박자박 발자국 소리가 나더니 두세 살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방청석에서 걸어 나온다. 아기의 손을 놓친 방청석의 또 다른 여자는 어찌할 줄 모르는데 아이는 고개를 숙이고 있는 여인의 손을 꼭 잡고는 판사석을 바라다 본다. '우리 엄마를 살려주세요…' 말은 없었지만 간절히 호소하는 듯한 이 장면을 라이카 3F를 꺼내 찍었다. 잠시 적막이 흐르고 판사는 여인에게 무죄를 선고한다. 그러자 아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방청석으로 돌아갔다. '결정적 순간'이 찍힌 순간이었다.” 일본 평범사에서 발행한 ‘세계사진연감’에 수록 되어 시계적으로 인정받은 사진이다. [사진5]는 선생 스스로가 내놓을 수 있는 사진으로 꼽은 ‘파월장병 환송식의 모정’이다. 1965년 조선일보사에서 사진부장 시절의 작품으로 동대문운동장 파월장병 환송식 장면이다. 선생 스스로의 설명이 매우 애틋하다. "베트남을 향하며 등에 태극기를 꽂은 꽃다운 젊은이들이 가장 소중한 가족과 이별하는 마지막 시간을 보내고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온 어머니의 모습, 비닐 가방을 손에 든 촌로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아들을 바라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터질 것 같지만 애써 꾹 참고 있는 어머니. 그런 어머니를 보며 자식은 손수건으로 땀을 닦는 척하며 슬쩍 눈물을 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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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1편집고문 사진작가 정범태(鄭範泰) 편집진용의 확립은 신문사 사세의 안정과 방향성의 확정을 보여준다. 지난 회에서 살폈듯이 편집국장 직제를 두고 지면 혁신을 하는 등의 변화는 40호 발행을 전후로부터 이뤄졌다고 하였다. 이를 입증하는 하나의 아이템(Item)이 제40호부터 역대 국악인들의 활동상을 담은 <명인> 연재이다. 제100호 까지 연재하고, 이어 <정범태의 사진으로 보는 명인명창 이야기>로 개재한 장기 기획물이다. 이의 집필은 편집고문 정범태(1928~2019) 사진작가이다. 선생은 1928년 평북 선천군에서 태어났다. 일본 오사카 쇼센 전문학교를 중퇴했다. 중국 톈진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5년 해방이 되어 귀국해 당시 외삼촌이 쓰던 일제 카메라 ‘웰미’를 만진 것이 사진에 입문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 때문에 한국전쟁 중 사진담당 군속으로 근무하며 전장을 누비게 되었다. 1956년에는 본격적인 사진작가로서 활동하기 위해 조선일보 사진기자로 입사하여 한국일보, 세계일보의 사진기자로 69세인 1997년까지 40여년간 현장을 기록했다. "셔터를 누를 힘이 있는 한 정년이란 있을 수 없다"와 "사진은 자체가 기사이므로 독립성이 있어야한다.”는 지론을 견지하며 작업했다. 이 지론과 열정은 1960년대 4.19와 5.16 등 격동기 서민 삶에 대한 테마와 기록성을 바탕으로 한 리얼리즘사진의 대표적인 작품을 남겼고, 1962년 4월에는 한국일보 필화사건으로 경기고등군법회의에서 2년형을 받아 복역하기도 했다. 작품 중 대표작으로는 ‘생과 사’, ‘열쇠장수’, ‘말과 마부’, ‘고물상과 노인’, ‘결정적 순간’ 등이다. 또한 1958년 미국 ‘US카메라’, 일본 ‘아사히카메라’, 영국 ‘런던타임스’, 스웨덴 ‘포토’ 그리고 1959년 11월 프랑스에서 개최된 제3회 파리비엔날레에서 입상하였다. 1962년에는 일본 세계사진년감, 1993년과 1995년 한국기자상, 96년에는 한국사진기자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한국의 명창명인전’(문예원), ‘한국의 명무’(한국일보사), ‘춤과 그 사람’(전10권, 열화당),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 사람’(이규원 공저, 현암사), ‘한국명인·명창전’(문예원), ‘명인·명창’(깊은샘) 등이 있으며, 사진집으로 ‘정범태 사진집 1950-2000’(눈빛)이 있다. 이 중에 민속춤은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초점을 맞춘 작가이다. 선생이 춤에 대해 빠지게 된 것은 지리산 빨치산토벌대에 종군하면서라고 전해진다. 예향 남원에 자리 잡고 종군하다가 우리 춤의 정신에 빠져든 것이다. 선생은 실존적 상황 앞에 놓인 하층민의 삶을 주로 기록했다. 허무나 비애가 아닌 건강한 활기와 의지의 분위기를 포착하였다. 인간 내면의 마음을 암시적으로 드러내고자 했는데, 곧 한국 리얼리즘 사진의 역사를 쓴 것이다. 기록과 예술성을 동시에 추구하는 사진에는 언제나 진한 휴머니즘이 바탕을 이루고 있다. 이상과 같은 활동에 대한 평가를 받아 2005년 화관문화훈장을 서훈했다. 국악과 민속춤과의 인연은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우리나라 1세대 명창명인들과 교류하며 국악을 접하고 1990년대 들어 국악계 대표 인물들의 생애와 활동을 전신사진을 곁들여 정리하기 시작했다. 바로 국악신문 표3면을 장식하는 것으로 부터다. 또한 "음악·춤·소리·인물 자료들은 우리 문화를 아끼는 슬기로운 이들에게 값있는 양식이 될” 것이라며 자료를 공유하는 ‘풍류방’을 신문사를 통해 운영하기도 하였다. 이 연재는 2001년 '韓國의 名唱名人傳'에 재수록 되었다. 이 책은 중고제 명창 김창용을 시작으로 서도소리 유지숙 명창까지 "원형에 가까운 분들” 85명을 수록했다. ‘머리말’에서 이들에 대해 다음과 같이 ‘보석들’이라며 경의를 표하였다. "오랜 세월 슬픔과 기쁨을 한 몸에 보듬은 채 우리 것을 향한 열정과 사랑으로 메마른 이 땅의 한을 풀고 흥을 심어 이를 지키며 갈고 닦아온 움직이는 보석들이다.” 이 같이 국악인들을 존경과 따뜻함으로 기록한 정범태 선생은 1996년부터 10여년간 고문과 집필자로서 함께했다. 이는 우리 국악의 위상 정립은 물론 국악신문의 방향설정에 절대적인 기여를 하였다. 역시 국악신문 역사에서 잊을 수 없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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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20편집국장 우실하 기업이든 언론사든 운영체계의 확립은 내적 조직의 강화와 외적 사세의 확장으로 시작된다. 모두 '선택과 집중'이라는 전략 수립 결과로, 전자는 적정 능력에 따른 직제의 수립이고, 후자는 모기업을 지원하는 자회사의 운영이다. 「국악신문」의 운영체계 수립은 창간 2주년을 전후한 제40호 발간 이후로부터다. 편집국 진용이 갖춰지고 전국에 지사를 설립한 시기가 바로 이 때부터이기 때문이다. 내부적으로 직제의 수립은 기자는 물론 전문가에 의한 고문과 자문위원 진용을 갖춘 것은 객관적인 위상을 확립한 것임을 알린 결과이다. 외적으로는 배달 업무와 지역 뉴스 확충을 위한 전국 주요 지역의 지사 설립이다. 전국 11개 지사인데, 춘천 평택 여천 마산 진주 남원 대전 김제 정읍 군산 인천지사이다. 모두 국악 거점 지역으로 지역소식 확보와 신문 배달업무에 긴요한 지역 안배인 것이다. 또한 부대사업으로 운영 자금 확보를 위한 ‘공연기회 대행’ 사업의 개설이 있었다. 대관업무, 홍보, 공연표 예매, 프로그램 전단 제작 등을 대행하는 업무이다. 제51호 판권을 보면 "고문 정범태, 발행 겸 편집인 김호구, 편집 이자균 김정아, 사진, 임준섭 정수미, 편집 자문위원 변영호 채치성 오용록 이명준 우실하”로 확인된다. 이 체제는 당시로서는 어느 주간 신문사 편집진 못지않은 진용이다. 특히 고문 정범태선생은 국악예술인 사진작가로서 당대 최고의 위치였고, 자문위원들 역시 당시 현장과 이론을 갖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이들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정리할 기회를 갖게 될 것이다. 다만 이번 회에서는 국악신문 편집국장을 역임한 우실하 위원에 대해 언급하고자 한다. 초기 편집위원으로 활동한 우실하 위원은 이후 편집국장과 필자로 큰 역할을 했다. 당시 연세대학교 사회학과 박사 과정이었다. 현재는 한국항공대 교수로 ‘3수 분화의 세계관’(2012년), ‘동북공정 너머 요하문명론’(2007년), ‘전통문화의 구성원리’(1998년), ‘전통음악의구조와원리: 삼태극의 춤’(2004년)을 발간한 전통문화 학자이다. 2000년대 초에는 "요하(遼河)문명이 발견된 이후 중국은 자국 문명의 기원을 완전히 새로 쓰는 작업을 착실히 진행하고 있습니다. 중국의 의도대로 상고사 재편이 마무리되면 고조선 이후 한국사는 자동적으로 중국사의 한 갈래로 전락할 수 있습니다."라는 중국의 동북공정 상황을 전해 충격을 주기도 한 요하문명과 홍산문화 전문가 이다. 현재 동북아문화 전공교수로 또한 화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현재 ‘한글, 우주를 품다!’ 전시회 개최(본보 2월 3일자 참조) 중인 한글창제 원리를 풀이한 회화 작품으로 기법과 주제에서 화제를 낳고 있기도 하다. 우실하 위원은 본보 40호~60호 전후 편집국장 재직시 지면을 개혁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기존의 현상적인 기사 중심에서 대부분을 외부 전문 필자의 심층기획 기사로 확충하여 질을 향상시켰다. 지면 구성에서도 사진과 표제 포인트를 대형화 하여 가독성을 높였다. 또한 자신이 직접 집필을 맡아 국악 전문지로서의 정체성 강화에 기여하기도 했다. 이중 연재물 두 편은 많은 독자들로부터 호평을 받았는데, 본보 제49호 1997년 2월 28일자 ‘음악문화 다시 읽기’라는 코너 '우실하의 우리문화를 읽는 정당한 인식틀'이다. ‘다시 읽기’와 ‘정당한 인식틀’이란 키워드에서 짐작되듯이 전통음악 이해에 개혁을 촉구한 글이다. 2수 분화인 음양론과 3수 분화인 삼재론이 4,5세기 완전한 이론으로 자리 잡는데, 이는 2천년 전부터 자리 잡아 온 우리(東夷族) 사유체계이고, 이로부터 중국과 일본과 다른 우리 음악 특징이 발현 되었다는 주장이다. 그 특징이 농현의 발달, 3분박 중심, 정간보 3등분 율명 기입, 시조 고악보 기입 특징 등이라고 했다. 이는 분명히 3국시대 이후 문헌 중심의 음악사 체계와는 다른 ‘인식틀’을 넘어선 이론이다. 앞의 연재에 이은 것이 ‘음양 오행 삼재론으로 본 풍물’이다. 강릉풍물, 전라우도 이리풍물, 경북 금륭농악 등의 농기와 복색과 집번 등을 이론적으로 풀이하였다. 이 연재물은 2004년 저서 ‘전통음악의구조와 원리: 삼태극의 춤’에 수용되기도 했다. 이후 우리 전통문화의 근본 이론을 제시하는 다양한 집필이 이루어졌다. 이런 내용은 당연히 국악신문의 방향성, 즉 ‘민속음악 중심의 국악 위상 정립’이라는 창간 이념에 크게 기여하였다. 우실하 위원은 국악신문 26년사에 기억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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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9국악신문 특집부 「국악신문」의 박헌봉 선생 회고록 ‘國樂運動 半生記’는 제98호부터 6회에 걸쳐 수록했다. 원래는 「신동아(新東亞)」 1966년 7월호부터 9회에 걸쳐 발표한 글이다. 결국 작고하기 11년 전에 쓴 것이니 이후 10여년의 생애는 진술하지 못한 것이 된다. 본 회에서는 10여년의 생애 중 중요한 업적 중심으로 정리하고자 한다. 이를 통해 박헌봉 선생의 민속악 발전에 기여한 실상이 제시 될 것이다. #해방 직후 혼란기 국악을 재건한 업적은 무엇보다 앞서 평가되어야 한다. 다음은 전 한국불교민속학회 황윤식(1934~2020)회장의 이에 대한 평가이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민속음악계는 조선시대에는 유교적 신분사상에 의하여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였고,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는 민족혼이 강하게 배어있다고 하여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8․15 광복을 맞이한 우리 민족은 해방의 환희를 민속음악을 통하여 한껏 분출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민속음악은 천시의 대상도 아니고 탄압의 대상도 아닌, 우리 민족의 전통적인 정서를 담고 있는 훌륭한 문화유산으로 재평가 되어야 한다는 여론이 확산되어 갔다. 이 과정에서 기산 박헌봉 선생을 중심으로 국악건설운동본부, 국악학교 기성회 등이 조직되었고, 이를 통해 국악의 새로운 발전을 추구하려는 문화운동이 전개되어 갔다.” #1960년 3월 5일 국악예술학교가 개교했다. 이는 첫 손에 꼽히는 업적이다. 민속음악 교육뿐만 아니라 민속악 위상 정립에 결정적인 기여를 했기 때문이다. 이후 학교는 세 번에 걸쳐 개명을 하게 되는데,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국립전통예술중·고등학교로 바뀌며 발전해왔다. 지금은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 이후 규모를 갖춘 학교로 발전시킨 박귀희 선생만을 기억하지만 아무것도 없던 초창기부터 국악을 정상의 궤도에 올려놓고, 학교의 체계를 정립한 박헌봉 선생의 업적 역시 중요한 것이다. 물론 혼자만으로 이룬 것은 아니다. 향사 박귀희 선생, 만정 김소희 선생이 학교 설립에 많은 힘을 보탰고, 지영희, 성금연, 한영숙선생 등 많은 국악인들이 뜻을 모았다. 전국에 흩어져 있던 국악의 명인들을 제도적인 교육기관에서 수용하면서 효과적인 교육이 가능하였다. 또한 전국에 흩어져 있던 민족예술인을 정규 교육기관에 수용하게 되면서 이들에게 민족예술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게했다. 이와 같은 과정은 국악교육의 정상화를 기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을 뿐 아니라 국악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확산시킴으로써 국악발전의 한 이정표를 마련한 것이라 평가할 수 있겠다. 이들을 규합하여 함께한 지도력은 당시 선생의 열과 성에 동의한 결과이다. 국악계의 회고 중에는 "국악예술학교를 중심으로 국악인들을 규합하지 못했더라면 민속악은 아악계에 눌려 제대로 된 평가와 대우를 받지 못했을 것이다. 거칠게 말하자면 문화재 지정은 고사하고 존재마저 유야무야해졌을 것이 분명하다. 그러한 상황을 떠올리면 지금도 아찔한 생각이 든다.”라는 발언이 있게 된 배경이다. 또한 이에 더하여 사단법인(社團法人) 대한국악원(大韓國樂院)을 설립하여 후에 현 한국국악협회(韓國國樂協會)로의 발전을 견인했음으로 기성국악인(旣成國樂人)의 단합과 국악계 혁신(革新)에 디딤돌을 놓은 일은 주목되는 업적이다. 생님이 품었던 국악에 대한 열정과 애정은 소중히 전승되어야 한다. #선생의 두 번째 업적은 민속악계 국악인들에 대한 국가적 예우를 제도화 한 사실이다. 즉, 당시 문화재관리국의 기예능보유자 지정에 앞장섰다는 점이다. 사실 60년대 이전의 민속악계 국악인들은 탁월한 예술적 재능이 있다 해도 교육수준이 극히 낮다는 이유로 예능에 대해 이론적 투쟁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전무했다. 그러니 오늘날 소위 인간문화재(국가중요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의 지위를 누리고 예술성을 인정받을 수 있게 된 것과, 오늘날과 같은 국악의 진흥을 가져오게 된 것은 선생의 공로이다. 1964년 6월에 인형극 꼭두각시놀음을 조사했고, 이를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3호 ‘꼭두각시놀음’으로 지정하였다. 1964년에는 판소리 ‘춘향가’를 조사하고 12월에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 ‘춘향가’로 지정하였다. 1965년에는 ‘진주농악’을 조사하고 1966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하였다. 1966년에는 ‘진주검무’를 조사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2호로 지정하였다. 1965년에는 진주 농악을 조사하고 이듬해 중요무형문화재 제11호로 지정하였다. 1966년에는 ‘거문고산조’를 조사하고 1967년 중요무형문화재 제16호 ‘거문고산조’로 지정하였다. 이상과 같은 초기 민속음악의 제도적 관심과 지원을 이끌어 낸 것은 선생 자신이 문화재위원으로 위촉 받은 상황이어서 가능했고, 반대파나 다른 분과 위원들을 설득할 수 있었던 것도 국악에 대한 이론과 설득력 때문이다. #세 번째는 1966년 이론서 ‘창악대강(唱樂大綱)’의 대작 저술 실적이다. 이는 이선유(李善有, 1873~1949)와 유성준(劉成俊, 1873~1944) 같은 경남 지역의 판소리 명창들과의 교유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선유 판소리 동편제 명창으로 1933년에 ‘오가전집(五歌全集)’을 펴낸 판소리 이론가인데 창악뿐 아니라 국악 관련 이론을 배웠다. 유성준은 경남 하동에서 박귀희 등에게 판소리를 지도하기도 한 명창이다. 역시 이분으로부터도 창악을 배웠다. 1934년에 사재를 털어 ‘진주음률연구회’를 조직하여 회장직을 역임한 전후의 일이다. ‘창악대강’은 판소리와 단가에 대한 이론적 기반을 서술하였고, 정확하면서도 방대한 주석을 단 것이 특징이다. 첫 째는 ‘창악의 개념’을 제시했다. "唱樂은 우리 겨레의 民俗音樂”이라고 선언하면서 우리 민족의 사상과 감정이 담겨 있는 것이 본디 창악의 참모습"이라고 정의하였다. 그리고 창악의 범주로 단가, 판소리, 창극을 주요하게 다루었다. 다음은 ‘창악의 기원과 유래’를 제시했다. 판소리 광대의 기원과 유래, 전승에 대하여 상세하게 논증하였다. 광대의 유래에 대해서는 무속과 연관시켜 고찰하였고, 창악의 초기 모습을 굿판과 잡희에서 찾아내어 이를 민족음악의 출발로 보았다. 이 책을 통해 선생의 국악관과 연구자의 자세를 확인할 수가 있다. #네 번째는 경남의 대표 지역축제 ‘개천예술제’의 창안이다. 이 축제는 1949년 정부 수립 1주년을 기리고 예술문화의 발전을 위해 시작되었다. 당시 행사는 10월 3일 개천절부터 6일간의 일정으로 진행되었고, 이러한 전통은 현재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1964년부터 1968년까지 대통령이 참석하는 예술제로 규모가 커졌는데, 1974년부터는 예술의 대중화라는 명분을 내세워 행사의 변화를 꾀하였다. 1981년 제31회 대회 때에는 개천예술재단이 설립되었으며, 1983년에는 경상남도 종합예술제로 지정되었다. 2000년에는 진주문화예술재단이 설립되면서, 이후 개천예술제는 전통문화예술과 지역문화 발전에 많은 기여를 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바로 이 행사를 선생의 제안으로 시작되었다는 사실은 주목해야 한다. 1949년 전후는 대한국악원의 원장으로 재임하고 있던 때였다. 문교부 예술위원회의 음악위원으로 국악뿐 아니라 전통예술 문화 조사를 준비하던 때이기도 하다. 이런 배경에서 고향에 축제를 제안한 것으로 해방후 출현한 최초의 축제를 선생이 창안한 것이다. 선생은 「국악대관」(國樂大觀)의 저술에 힘쓰시다가 1977년 5월 8일 세상을 떴다. 선생의 빛나는 공적은 국민훈장 동백장(冬栢章)과 금관문화훈장(金冠文化勳章)으로 국가가 인정하였다. 이상에서 간추린 선생의 업적은 더 많은 연구로 더해 질 것이다. 「국악신문」 기사를 통해 보면 200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야 선생을 기리는 사업이 추진되기 시작했다. 늦었지만 다행한 일이다. 2013년에는 산청군에 ‘기산국악당’이 건립되었다. ‘사단법인 기산국악제전위원회’가 본격적으로 현창 사업을 맡게 되면서, ‘기산국악제전 및 전국국악경연대회’ 등 선생을 추모하고 정신을 잇는 여러 행사를 추진할 수 있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뜻 깊은 창악이 탄생하였다. ‘산청아리랑’이다. 박범훈 작곡에 홍윤식 작사로 산청군이 낳은 명사들과 명소, 지리산의 아름다움과 지역의 특색들을 세마치장단의 경쾌함으로 묘사했다. ‘산청아리랑’은 선생이 다시 산청으로 돌아와 다시금 고향을 품은 듯한 푸근한 느낌마저 주기도 한다. 현재 산청군에서 개최하고 있는 각종 행사에서 이 지역 문화를 대표하는 노래로 불리고 있다. 이상에서 4회에 걸쳐 박헌봉 선생의 회고록 '國樂運動 半生記'를 살폈다. 이를 통해 박헌봉 선생이 국악의 가치를 정립하고 그 바탕에 민속음악이 있다는 소중한 논지를 정립하는데 기여한 거의 유일한 인물임을 확인했다. 이에 대해 국악신문이 일반 독자들에게 확산 시키는데 기여하기 위해 선생의 회고기를 재수록 한 것이다. 이는 곧 「국악신문」의 ‘국악의 위상정립 사업’의 일환이었던 것이다. *선생이 집필하고 출간을 보지 못한 ‘국악대관’과 ‘국악사’는 선생이 말년에 혼신을 기울인 것으로 상당한 가치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원고가 발굴되기를 고대한다. 이에 국악신문은 지속적인 관심을 갖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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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신문이 걸어 온 길 18국악신문 특집부 박헌봉 선생의 <國樂運動 半生記>는 해방전후 국악의 위상 정립을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가를 보여주는 거의 유일한 자전적인 글이다. 이를 「국악신문」은 제98호 2000년 10월 25일자부터 재수록 하였다. 취지는 당연히 국악의 중심이 민속악에 있다는 사실을 독자들과 공유하기 위해서였다. 이번 제6회는 ‘초대 내각마저 국악을 외면’하여 설득하고 이해시켜 지원하게 하는 상황을 회고한 대목이다. 국악학교설립기성회는 이승만 초대 내각에 큰 기대를 걸었다. 그래서 요리집 청향각(淸香閣)에서 주요 각료들을 초청하여 국악감상회를 개최했다. 우선은 각료들이 국악을 이해하여야 한다는 생각에서였다. 이범석 국무총리 이하 9장관 3처장을 대상으로 선생이 국악의 가치를 설하고, 이어 김소희와 박귀희 명창을 통해 국악학교설립기성회의 난관을 호소했다. 공연은 판소리, 민요, 기악곡, 춤 등 전 분야를 통해 국악의 분야를 보여주었다. 각료들은 나름 심취한 모습으로 박수갈채를 보냈다. 더불어 일부 각료는 자진하여 지원을 하겠다는 언약도 하였다. 그러나 선생은 전례로 보아 이 언약을 액면 그대로 믿지는 않았다. 결과는 예상대로였다. 언약한 각료를 개별 방문하여 도움을 청하려고 연락해도 정무가 바쁘다는 답변만이 올 뿐이었다. 다만 총무처장 전규홍, 동아일보 사장 최두선, 채신부 장관 후보 장기영씨는 격려와 후원금을 지원해 주었다. 이 후원금은 유용하게 쓰게 되었다. 1949년 7월 경, 부민관(府民館) 개관기념 공연으로 ‘향토민요대전(鄕土民謠大典)’을 준비할 수 있었다. 해방후 전국 대상 지역민요를 무대화 한 것은 처음 있는 일로 규모도 컸고, 의미도 있어 꼭 치러야 할 무대였다. 이 기념공연에는 신익희, 윤보선, 이기붕 등 주요 인사들이 참관을 하여 성공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 결과로 정부에서 2백 3십여만환의 보조금을 받게 되었다. 물론 큰 돈은 아니지만 국가 지원금이라서 인건비를 제하고는 예산을 비축하기로 하였다. 1950년 봄, 시민위안 공연을 준비했다. 시민위안이라는 명분은 실내보다는 야외여야 했고, 창경원이라면 성공을 거둘 수 있다는 판단을 했다. 문제는 이승만 대통령이 창경원 등의 궁궐을 보호하라는 엄명이 있어 이를 관리하는 구황실재산관리국이 이를 용납할 리가 없다는 소문이나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서울시장 이기붕을 만나 요청했다. 예상대로 이기붕은 이승만 대통령의 허가를 받아내었다. 당연히 구황실재산관리국 이병주 국장은 대통령의 용단을 따르겠다며 허가와 관련한 협조를 하겠다고 했다. 장소문제가 해결됨으로 6개 국악단체를 동원하여 재담 같은 프로그램을 배치하는 등 시민위안을 목표로 구성했다. 공연료는 창경원 입장료 80원에 20원을 더하여 받는 것으로 낙착(落着)을 보았다. 대회는 대성공이었다. 돈암동과 원남동이 막힐 정도라 기마대가 출동하여 공포탄을 쏘며 관리할 정도였다. 당시 여론은 해방후 최대인파 집결이라고 보도했고, 창경원 관객도 최고였다고 하였다. 시민위안대회의 성공 여세는 이어져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했다. 이를 대학생 국악행사로 방향을 정했다. 당시 선생의 장남 예종(당시 연세대학교 경제학과 3년)을 통해 전국 대학생 대상 학생국악동연회(學生國樂同演會/회장 연세대생 박노우)를 조직, 450여명의 회원을 확보한 상태였다. 이 공연 역시 국악보급을 위해서는 대학생들의 관심을 끌어야 한다는 당면과제로 관심 속에 준비되었다. 학생 중에는 호기심으로 회원이 된 이들도 많았지만, 의외로 천부적인 재능이 있는 학생들이 있었기에 고무되어 준비에 박차를 가했다. 행사는 7월 3일, 그러나 8일을 남기고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당연히 행사는 무산되었다. 이 전쟁은 모든 분야의 발전을 가로막았으니 국악에도 지대한 지장을 주었음은 물론이었다. 특히 대학에서의 국악 운동은 싹을 틔우지도 못한 것이다. 제7회는 ‘자유당 때 大統領에게도 呼訴’라는 제하로 한국 전쟁 후의 상황을 증언하였다. 폐허에서 국악의 씨를 다시 틔우려면 당연히 재정이 절실했다. 그래서 대통령에게 직접 호소할 기회를 갖고자 했다. 최규남 문교부장관에게 가능하도록 다리를 놓아 달라고 협의하였다. 그러나 소식이 없었다. 다시 내무부장관 이익홍을 찾아가 국악을 살릴 길을 열어달라고 통사정을 했다. 통보가 왔다. 그런데 단 30분만 시간이 된다는 것이었다. 다급히 대학생 중에서 기량있는 학생을 선발하고 명인 명창을 꾸려 경무대로 갔다. 가설로 꾸민 무대 옆에는 대통령 내외가 앉았고, 그 옆에 두 장관이 양수거지(兩手据地)로 서있었다. 친히 방문자를 악수로 치하해 주어 안심한 분위기에서 공연을 하였다. 대통령도 진지한 분위기로 함께하는 것에 고무되어 공연은 예정보다 20분을 더하여 끝났다. 대통령 내외의 미소를 본 박헌봉 선생은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각하 자고로 예와 악이 무너지면 나라가 망한다고 했는데 지금 우리 현실이 바로 예괴악붕(禮壞樂崩)입니다. 각하께서 지금 칭찬하신 명창과 명인들이 연습할 장소가 없어 방황하고 있읍니다.” 이에 두 장관이 뒤에서 옷자락을 당기며 말렸다. 그래도 선생은 기회를 놓칠 수 없어 말을 이었다. 그러자 당황한 최장관이 말을 가로 막았다. "각하 대학생들과 국악인들에게도 매년 일정액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분명한 거짓 보고이지만 선생은 두 장관의 체면을 위해 꾹 참았다. 다행히 대통령이 두 장관에게 양악만큼 국악에도 지원을 하라고 지시하여 결국 소득은 거둔 것이다. 이렇게 경무대를 방문하여 호소했건만 돌아오는 것은 예산 부족이라는 답변이었다. 결국 선생은 화병으로 병석에 들게 되었다. 병명은 황달(黃疸)이었다. 그러나 적수공권(赤手空拳)에 치료비 문제로 입원은 못하고 여관방에서 견뎌야 했다. 무교동의 락천여관인데, 주인장은 의원까지 불러 치료해 주었다. 물론 여관비와 치료비도 모두 외상이었다. 다행히 와병 7개월만에 차도가 있어 일어나게 되었다. 선생은 50을 넘긴 나이에 홀로 눈물 짖는 신세로 서글픔을 삼킬 수밖에 없었다. 1958년 2월, 사경(死境)을 헤치고 나서 다시 뛰었다. 김은호, 문영희, 이병각, 박귀희선생과 함께 장교구락부(張橋俱樂部)를 구성하고 학교설립 후원금을 모집하는 일에 매진했다. 유수한 재벌들과 사회 동호(同好)를 찾아가 호소했다. 다행히 삼성의 이병철씨만 500만환을 기부했다. 이 500만환으로는 학교설립은 불가했다. 1959년 초, 이재학 국회부의장을 필두로 이병철과 자유당 중진들을 운니동 박귀희 선생 댁으로 초청하여 저녁을 함께하는 자리를 마련했다. 선생은 산궁수진(山窮水盡), 이 자리가 최후의 기회라고 생각하고 선언(宣言)하였다. 선생의 떨리는 손에는 원고뭉치가 들려있었다. "각종 경축 행사나 외국 귀빈이 올 때면 국악을 소개하기 위해 무진 애를 써왔습니다. 장고와 가야금을 둘러메고 고생을 하면서도 언젠가는 사람들이 국악의 진가를 알게 될 날이 오겠거니 했습니다. 그러나 당대의 고관대작인 여러분조차도 이처럼 국악을 무시하고 홀대하는 것을 보면 지난날 우리들의 노고가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할 것 같습니다. 나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 4천장에 달하는 원고를 모두 불 살라버리고 심산유곡의 절을 찾아 여생을 마칠 생각입니다.”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한참 만에 이 부의장이 다른 장관들은 정무에 바쁜 탓이고, 문교부와 재정부에서 각 1천만환을 준비한다니 기다려 달라고 했다. 이 말이 끝나자 이병철씨가 받았다. "정부에서 그만한 돈을 기부한다면 나도 작년의 두 배를 기부하지요.”라고 밝혔다. 예상 외의 결과다. 총 3천 5백만환이 약속 된 것이다. 그러나 정부 지원 약속은 실현되지 않았다. 대신 이하단, 이용주, 방일영씨 등이 참가하여 관훈동에 학교 부지를 사고 설립 인가를 받게 되어 출발을 하게 된 것이다. 마지막 9회는 국악예술학교 설립 과정을 진술한 부분으로 마지막 회의이다. 1960년 3월 5일 국악예술학교가 개교되었다. 학생은 27명이고 교사는 22명이었다. 선생은 "나는 이날을 영원히 잊지 못한다. 5천년 한국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가 그 문을 연 날이기 때문이다. 초대 교장으로 취임한 나는 그날 목이 메어 취임사를 제대로 읽을 수 없었고, 자리를 같이 했던 국악인들도 모두 뜨거운 감루(感淚)를 흘리고 말았다.”라고 회고했다. 이는 선생뿐만 아니라 당연히 우리 국악사에서 기념할 만한 일대 경사인 것이다. 학교가 설립되었으나 시국은 격동에 휘말렸다. 개교 15일 만에 4.19가 일어났고, 8월에는 민주당 정권이 들어서 모든 기관장들이 바뀌었다. 그럼에도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바로 ‘아세아재단’의 후원을 받는 전국 민요조사이다. 유기룡, 지영희, 김광식, 이태극, 정병욱 등이 함께한 조사로 전국 산간벽지에서 조사되었다. 70세를 넘긴 이들을 대상으로 희귀한 민요 300여곡을 채록하였다. 이와 병행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할만한 민속음악을 조사하여 나갔다. 1964년 4월 서울시의 협조로 관훈동에서 전 조선신궁(朝鮮神宮) 사무실인 남산으로 교사를 옮겼다. 위치나 규모에서 개선되었다. 학생수도 270여명, 20여종의 악기 300여개를 보관할 수 있게 되었다. 교과 과정도 국어 영어 수학 같은 일반과목도 하고, 창작, 농악, 무용, 시종 등 과목도 늘였다. 또한 구미 각국의 국제 대회 등에도 출전시켜 예능을 향상시켰다. 이상과 같은 선생의 공적은 문교부 표창과 서울시 문화상 등을 수상하였다. 공적을 인정한 것이다. 반생의 회고록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끝난다. "아직도 우리나라 국악의 길이 험준하기만 하니 국악의 참다운 민족음악의 자리에 서는 날까지 헤쳐 나갈 각오이다.” 국악조직창설 및 관련활동, 국악예술학교 교육 및 산하 기관 창설, 「창악대강」 편찬 등 저술활동, 민요채집 및 무형문화재 조사 연구 등에서 박헌봉 선생의 업적은 길이 빛난다. 그 업적을 「국악신문」은 36년만에 다시 게재하여 국악사 정립과 참 국악인의 생애를 조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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