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
도자의 여로(141)<br>분청상감대호편작지만 문양이 이채로워 이규진(편고재 주인) 명품 청자를 생산했던 강진과 부안이 쇠퇴한 원인으로는 여러 가지를 들 수 있다. 그 중에는 고려 말의 혼란한 정국이라든가 극심해진 왜구의 노략질 등도 거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강진과 부안의 청자가 쇠퇴하면서 그 곳에서 종사했던 도공들이 전국으로 흩어져 조선의 새로운 창업의 기운과 더불어 지방 곳곳에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분청이라는 사실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런 분청은 그 종류가 여러 가지가 있지만 고려 청자의 여운이 그나마 짙게 남아 있는 것은 아무래도 분청상감이 아닐까 생각된다. 분청상감대호편은 입술 부위에서 어깨를 지나 몸체로 이어지는 부분이 일부 남아 있는 도편이다. 입술은 밖으로 말아 부친 형태이며 목 아래에는 백상감의 연주문을 돌리고 있는데 원 안에는 흑상감으로 점을 찍고 있다. 연주문 아래에는 2단으로 나누어 위에는 연판문을 아래에는 여의두문을 배치하고 있다. 하지만 연판문은 일반적으로 보이는 것들과는 격을 달리하고 있어 주목된다. 즉 백상감으로 선을 돌리고 흑상감으로 액센트를 준 후 그 안에 다시 백상감으로 선을 긋고 그 안에 여의두문 비슷한 것과 연주문을 배치하고 있어 특이한 모양의 연판문 문양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아래쪽은 잘려나가 현재로서는 알 수 없지만 위에 나타난 양식으로 보아 상당히 고급스러우면서도 화려한 문양을 장식하고 있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분청상감대호편의 유색은 녹청색이 짙은데 특히 안쪽을 보면 청자 색감의 여운이 짙게 느껴진다. 수비는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아 소성 중 공기가 부풀어 올라 솟아 오른 부분이 보이며 잘려나간 옆 부분을 살펴보아도 태토가 벌어진 흔적이 보인다. 이러한 현상들은 기술의 미숙인지 부족인지 알 수 없지만 상감의 문양만은 상당히 고급스러운 것이어서 이러한 언바런스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어리둥절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분청의 매력이 청자처럼 깔끔하고 정교한 멋 보다는 텁텁하고 수더분한 아름다움에 매력이 있는 것이라고 하면 이처럼 제작과정의 소홀함 같은 것은 대범하게 넘겨보아야 할 분청만의 몫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분청상감대호편의 메모 기록을 보니 1919년 인사동에서 구입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 완형으로 나왔다 파손된 것이 아니라 원래 불량품인 가마터 출토품이 분명한데 그 곳은 어디였을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광주 충효동 분청사기 가마터이지만 알 수는 없는 일이다. 시중에 떠도는 도편들을 구입할 때마다 그 출토지에 대한 관심을 갖고 꼼꼼이 체크를 해보는 편이지만 소기의 성과를 거두는 일은 극히 드물다. 도편의 출토지가 왜 자료로서 중요한지 인식하고 있는 경우가 비교적 적기 때문이다. 하지만 고려청자의 발생 시기를 두고 논란이 있는 것을 감안할 때 이를 밝혀 줄 수 있는 도편이라도 한 점 있다면 이 얼마나 귀중한 자료이겠는가. 도편이라고 해서 절대 소홀히 다룰 물건이 아닌 것이다. 따라서 이런저런 아쉬움은 있지만 그래도 분청상감대호편은 비록 남은 것은 작지만 문양이 이채로워 나름의 의미와 가치는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9)<br>원주어리랑, 산은 멀고 골은 깊어어리랑 어리랑 어러리요 어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산도나 멀고요 골은 깊은데 누구를 보려고 나 여기 왔나. 감상 문양지에 작품을 할 경우는 바탕의 문양을 살려가며 글자를 포치한다. 글씨가 주가 되고 문양은 배경이 되기 때문에 배경은 옅어서 이미지만을 드러내야 한다. 도드라지거나 진한 그림은 부적합하다. 산수가 그려진 풍경에 소가 내를 건너는 그림 위에, 노랫말에서 ‘산은 멀고 골은 깊어’를 뽑아 돋보이게 썼다. 두메산골로 시집온 여인의 적막감을 표현하고, 오른쪽 아래에 사각의 유인(‘일어나 빛을 발하라’)을 찍어 전체 화면의 균형을 잡았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
이무성 화백의 춤새(87)<br> 정인삼 명인의 '신칼대신무' 춤사위신칼대신무 신칼대신무는 무속장단과 巫具를 활용한 재인의 춤으로, 장단과 움직임의 법도 있는 만남을 잘 보여주는 춤이다. 구한말 화성재인청에서 가르친 50여 가지의 전통춤 가운데 현재 승무살풀이, 신칼대신무, 진쇠춤(한량무) 등이 전수되고 있다. 정인삼 선생은 신칼대신무와 진쇠춤의 명맥을 잇는 춤꾼이다. 계보를 살피면 용인을 본거지로 활동한 예인 김인호 선생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에 화성재인청 최고책임자인 대방(大房)의 직을 맡았던 당대 최고의 명인이었다. 김인호 선생은 이동안 선생에게 30여 가지 전통춤과 장단을 전수했으며 이동안 선생은 제자 정인삼 선생에게 경기도 전통무용 신칼대신무와 진쇠춤을 가르쳤다. 정인삼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56호 '경기고깔소고춤'(2015년 지정)보유자다. 화성재인청 춤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용인 출신 명인 김인호 선생에 대한 재조명과 함께 김인호-이동안-정인삼으로 이어지는 한국 전통춤의 본류와 용인무형문화예술의 원형을 재발견하고 보존·발전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의미를 두고 있다. 김인호 선생은 이동안 선생에게 30여 가지 전통춤과 장단을 전수한 스승이며, 화성재인청 대방의 직을 이은 이동안 선생은 제자 정인삼 선생에게 직접 경기도 전통무용 신칼대신무와 진쇠춤을 가르쳤다. 정인삼 선생은 지난 1974년부터 한국민속촌 농악단장을 맡아 국내외 관광객들에게 최고 기량과 신명을 선보이는 전통 판굿을 공연하고 있다. 또 호남지방 소고춤을 집대성해 정인삼류의 소고춤을 완성했다. 1974년 10월 3일 경기도 용인 한국민속촌이 개관하면서 민속촌농악단장으로 유명한 정인삼은 조선 후기 예능인 기구인 화성재인청 출신 이동안 선생과 그의 제자 정경파 선생으로부터 춤을 전수받았다. 화성재인청은 구한말 8도 재인청을 총괄하는 조직이었다. 임금이 계시는 곳에서 큰 행사가 있거나, 외국 사신이 올 때 놀이 주관을 화성재인청에서 했다. 화성재인청은 구한말 경기권 내 예인 관할 기관으로 악기 연구와 춤 등을 가르친 예술교육기관으로서의 역할을 했다. 이때 용인을 본거지로 활동한 예인 김인호 선생은 구한말에서 일제 강점기에 이르는 시기에 화성재인청 최고책임자인 대방직을 맡았던 최고의 명인이었다. 정인삼 약력 1999년 사단법인 한국농악보존협회 창립 (사)한국농악보존협회 이사장 한국민속촌 농악단 석좌 박금슬 춤 보존회 '금슬회' 회장
-
무세중과 전위예술(10) <BR>극단 '민족' 발기 취지문(1971년)이 땅에 신파 내지 신극이란 이름으로 서구 근대극의 물결이 발을 들여는 것이 일제의 상륙과 같이 힘 부끄러움의 첫 발자욱이었다. 그동안 숱한 민족적 수난들을 겪어오면서 연극 예술은 그때 그때의 정세와 숨박꼭질하며 어렵게 명매 해 왔던 것이다. 그러나 그 명맥속에 담아야 할 의지들이 정직하지 못하였고 그 지표마저 불투명하였음 전통극에 대한 의식적인 외면과 몰이해, 그리고 전문화될 수 없는 연극취향의 무분별한 상황속에서 방황 음을 보아왔다. 그 하나는 소위 신파라하여 대중의 비위를 긁어주거나 마무려버렸던 흥행적 연극과 다른 하나는 연어 인의 입맛과 말초감각에 기생하여 안일한 작업으로 경주하여온 귀족적 연극들이 바로 그렇다. 그런점에서 극단 '민족」은 다시금 이와 같은 경위와 과정을 반복할 수는 없을뿐 아니라 응당 있어야 제시의 어려운 역을 자청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민증이 바라고 요구하는 절실한 생활과 그 구체적당 에 접근하여 보다 진취적이고 적극적인 방법으로 항상 역사의 눈금이어야겠다는 점에서 우리의 작업은 활의 무대이며 사회비판의 광장으로서의 매개체가 되어야겠다는 것이다. 이제 연극은 종합예술의 안일성에서 탈피하여 행동예술, 참여예술, 메디아예술의 본질적인 전진으로 같은 방향과 입장을 밝히면서 극단 민족」은 출발을 기하고저 한다. 첫째, 본 극단은 보다 큰 차원에서 민족극 수립을 목표로 하는 바 바야흐로 닥친 시대적 자각과 사명 위하여 전통문화의 유산인 우리 전통극을 젊은 세대에 이어주고 점진적으로 민속극의 무대화에 총력한 둘째, 민속극 전수로 수련된 연기와 함께 우리 민속극에 내포된 모든 탁월한 연극예술적 부분(때이 즘 : 연출, 연기, 창법, 무대, 화술, 의상, 가면, 조명 등)을 재현 모든 창작극과 번역극에 접목하며 세째, 되도록 창작극(번역극도 포함)은 사회 문제극(쏘시알 풀레이)과 음악무용극(뮤지칼 드리 격을 띠는 것으로서 서사적인 극형식을 취하여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관객과 같이 호흡, 비판하고 넷째, 모든 번역극도 되도록 번안극으로 편하여 우리의 몸짓과 율동과 생활감정에 맞도록 할 것이며 다섯째, 이상과 같은 방향을 재검토하기 위하여 본 극단은 민족극연구회라는 연구체를 두어 이 방 둔 연구가나 관심있는 사람들을 초빙, 수시로 쎄미나를 열어 충분한 연구를 거듭하고 사전에 제작을 토리도 심의 검토하며 또한 사회 각계 각층과의 대화의 광장을 만들어서 극단 주체의 기획진과 제작진 자료를 제시 상호 밀접한 관계를 갖도록 한다. 이제 닥칠 통일의 문턱에서 우리는 연극이라는 참된 메디아를 통하여 우리의 염원, 의지 그리고 방 우는 민족예술의 시련대가 되 1971년 2월 김세중
-
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41)<br>잔인한 적군의 시신까지 거든 바다의 오래된 신앙왜덕산(倭德山)의 비밀 피아를 나누지 않고 위령 바다사람들 심성 깃들어 왜군에도 그러해야 했던 섬과 바다의 민속 관념은 인류의 박애 정신 아닐까 교착상태 빠진 한·일 문제 풀어내는 데 도움이 될 수도 "명량 전투가 끝난 뒤 임준영은 이틀 동안 작전 해역을 수색했다. 나는 임준영에게 전선 2척과 어선 5척, 그리고 군사 50명을 맡겼다. 임준영은 이틀 후 군사를 인솔하고 암태도로 돌아와 보고했다. 임준영은 떠다니는 적의 시체 2000여 구를 건져서 묻었다. 연안 갯벌 쪽으로 다가오는 시체만을 정리했고 원양으로 떠내려가는 시체는 수습하지 못했다." 김훈의 소설 중 일부다.난중일기를 기초로 쓴 이 소설에는 많은 수사자(水死者)가 등장한다. 해전(海戰)이니 응당 물에 빠져 죽은 이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이다. 눈을 뜨고 읽기가 난처할 만큼 섬뜩하고 잔인한 묘사가 이어진다. 전쟁 노획에 수급(首級)이 가장 중요하다. 아군과 적군의 목들이 잘리고 소금에 절여져 진상된다. 베어 얻은 수급을 다 감당하지 못하여서인지 코와 귀만을 잘라 전과를 계산하기도 한다. 이를 일본으로 우송하여 만든 것이 교토 호코지(方廣寺) 귀무덤(耳塚, 미미츠카)이다. 코도 함께 베었으므로 비총(鼻塚)이라고도 한다.관련한 내용은 2019년 7월 18일자 본 지면에 자세하게 소개해두었으니 참고 가능하다. 소설의 여기저기 수사자들을 거두어 묻는 장면들이 등장한다. 이것이 김훈의 상상력일까? 아니면 실제 있었던 일일까? 아마도 김훈은 진도 왜덕산의 존재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가 라는 책을 쓸 때, 나는 진도 관련 자료들을 한 보따리 마련하여 그에게 준 일이 있다. 이후 연통한 바가 없어 그의 글에 도움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소설이든 수상록이든 일정한 사실을 바탕삼아 쓴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소설 에 나오는 수많은 수사자와 그 주검의 처리방식들도 이와 다르지 않다. 궁금증이 생긴다. 왜덕산은 왜군에게 덕을 베풀었기에 붙여진 이름이라고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당시 진도 사람들은 무엇 때문에 적군이었던 왜군을 수습하여 매장해주었던 것일까? 설마 왜군을 특별하게 대우하기라도 했던 것일까?왜덕산과 교토 코무덤 평화제진도문화원 박주언 원장에 의하면 현재 진도군 군내면 왜덕산의 지명은 범덕산, 왜덕산, 왜덕전, 와덕산, 외덕산, 덕산 등이다. 한두 달 후 출판될 보고서에서 다루어질 예정이므로 보다 자세한 내용이 궁금하신 분들은 진도문화원으로 연락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김정호 전 진도문화원장, 김희태 전라남도 문화재전문위원을 비롯해 나도 이 보고에 한 꼭지를 맡아 참여한다. 내가 맡은 분야는 수사나 익사에 대한 민속 관념 혹은 의례에 관한 것이다. 박주언 원장이 현재까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6~70여 기의 묘지가 왜덕이라는 이름과 관련되어 있다. 물론 창녕조씨 선산과 혼재되어 있어서 무명연고의 묘지만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주목할 것은 와음을 감안한다 해도 족보의 주소가 한자 왜(倭)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기와를 구웠던 지역이기에 와덕산(瓦德山)이 와전되었다는 주장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다수의 묘지 주소를 무엇 때문에 왜덕(倭德)이라고 표기했는지 설명하기는 어렵다. 이 사실이 알려진 것은 박주언씨가 2004년 이라는 잡지에 기고하면서부터다. 2006년 일본인들이 왜덕산을 방문하기 시작하면서 더욱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명랑해전에서 왜군을 지휘한 구루시마 미치후사(來島道總) 현창 사업회 임원과 수도대 학생들이 그들이다. 왜덕산에 묻힌 이들이 자기 선조들이라고 생각해서다. 이후 박주언씨를 중심으로 진도에서 평화제라는 축제가 진행되었고 교토 코무덤 앞에서 같은 이름의 혼령제가 열리고 있다.왜덕산을 바라보는 시선에 대하여코무덤은 무엇인가? 임진왜란의 원흉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조선 민남녀의 코와 귀를 베어가 모아둔 곳이다. 당초에는 귀무덤이라고 했다가 여러 학자의 연구에 따라 코무덤이라는 수식을 부가했다. 귀보다는 코가 더 섬뜩해 귀무덤이라는 이름을 썼다는 전언이다. 당시 왜군은 조선의 민중들을 죽이고 코를 베어 갔다. 왜군 장수들은 코를 소금에 절여 일본으로 보내고 히데요시는 코영수증을 써주었다. 일설에는 이 무덤에만도 조선인 12만 6000명의 코가 묻혀있다 한다.교토뿐만이 아니라 몇 군데 코무덤을 더 찾았다는 얘기도 있다. 그런데 말이다. 이토록 잔인했던 적군 왜병들의 시신을 거두어 진도의 동쪽 해안에 고이 묻어 주었다는 설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 혹시 어떤 사람들이 지어낸 얘기는 아닐까? 그렇지 않다. 족보의 묘지 주소가 왜덕인 이유를 상고해볼 이유가 여기에 있다. 왜덕산 사람들 곧 진도사람들은 멀리 교토의 코무덤까지 찾아가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이들이 제정신이 아니어서 그런 것일까? 간헐적이기는 하지만 일본인들이 진도의 왜덕산을 방문하기도 한다. 코로나 여파로 잠시 중단되기는 했지만 해마다 9월에 진행하는 이 행사는 명량의 바다에서 연행했던 평화제의 확장이기도 하다.박주언씨가 오랫동안 연행해온 진도평화제라는 축제는 지금은 없어져 명량해전축제로 탈바꿈해버렸지만 원혼을 달랜다는 의미만큼은 여전하다. 적군의 시신들을 거두고 매장해준 왜덕산 사람들을 떠올려본다. 여기에는 피아를 굳이 나누지 않고 위령한다는 바다 사람들의 심성이 깃들어 있다. 왜군이어서가 아니고, 왜군이어도 그러해야 했던 섬과 바다의 매우 오래된 신앙이자 민속 관념 말이다. 민속학자들은 물속의 원혼이 해코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자기방어의례로 해석하곤 하는데 꼭 그렇지만은 않다. 나는 이를 인류가 지닌 박애 정신으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해왔다. 교착상태에 빠진 한일간의 문제를 풀어내는 데 일조할 수 있는 사례라는 점도 부기해둔다. 쿄토의 코무덤과 진도의 왜덕산을 바라보는 시선과 해법이 더욱 긴요한 시기를 맞이하고 있다.수사자(水死者)에 대한 바다 사람들의 생각물에서 죽은 것을 정상적인 죽음으로 다루지 않는 것이 우리네 전통이다. 우리뿐만이 아니다. 적어도 음양관을 철학의 기저로 두는 문화권에서는 보편적인 정서이고 감성이다. 나는 이를 졸고, 에서 집중적으로 다루었고, 이를 다시 졸저, (민속원, 2018)에서 풀어 썼다. 비혼 청춘 남녀의 동반 수사(水死) 사건을 사례로 그들에 대한 '혼건짐 씻김굿'과 '망자혼사굿'을 통해 뭍과 물의 대칭성, 남과 여의 대칭성, 나아가 자연과 인류의 대칭성 등을 톺아보고자 했던 글이다. 정상적이지 않은 죽음을 정상적인 죽음으로 바꾸는 방식, 물에 빠져 죽은 이를 대하는 초혼제(招魂祭), 수륙재(水陸齋), 위안제(慰安祭), 여제(癘祭) 등이 그 사례다. 세월호 사건에 대해 온 국민이 분노했던 이유도 이 죽음이 결코 정상적이지 않다는 심리가 배경에 있었기 때문이다. 어찌 그것이 수사자에게만 해당되며 혹은 개별적이거나 집단 간의 일에만 국한되겠는가? 전쟁의 참혹한 풍경 속에서도 한 가닥 피어오르는 싹이라고나 할까. 진도의 왜덕산을 보다 슬기롭게 바라볼 필요는, 그간의 수사자에 대한 민속적 관념이나 신앙의 태도를 훨씬 뛰어넘는 것이다. 교토의 코무덤 위령제를 매개로 한국의 변방 진도의 왜덕산이 인구에 널리 회자되기를 소망한다. 전후좌우 갈등과 이념과 심지어 전쟁을 뛰어넘는 우리의 마음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할 수 있기를 바랄 뿐이다.
-
도자의 여로(140)<br>분청조화문대발편'무도회의 추억' 속 여주인공처럼 이규진(편고재 주인) 선운사 골째기로 선운사 동백꽃을 보러 갔더니 동백꽃은 아직 일러 피지 않했고 막걸릿집 여자의 육자백이 가락에 작년 것만 상기도 남았습디다 그것도 목이 쉬어 남았습디다 미당 서정주 시인의 절창 시편 중의 하나인 <선운사 동구> 전문이다. 선운사는 전라북도 고창에 있는 동백꽃으로 유명한 절 이름이다. 이곳에서 멀지 않은 곳에 서시인의 고향인 질마재가 있어 연관성이 주목되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늘은 이 자리에서 서시인의 시세계나 그의 행적을 논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선운사를 가려면 서북류하여 줄포만으로 흐르는 인천강을 우측으로 끼고 가다 이를 버리고 좌측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곳의 인천강은 일명 풍천이라고도 하는 곳으로 강물과 바닷물이 교차해 맛이 좋기로 전국에서 제일 유명한 저 풍천장어의 고향이기도 하다. 따라서 이 일대는 풍천장어를 파는 음식점들이 줄을 서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좌측의 선운사 가는 길을 버리고 반대편 우측으로 다리를 건너 들어가면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용산리 연기마을이 된다. 이곳에서 주목되는 것은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로 알려진 가마터가 있어 전라북도 최초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는 점일 것이다. 용산리 분청사기 가마터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지기 전만해도 전혀 알려져 있지 않던 곳이다. 연기 저수지 제방공사 중 가마 일부가 파손되면서 유구가 드러나 원광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지표조사와 시굴조사가 이루어졌고 그 후 호남문화재연구원에 의해 발굴조사가 진행되었다. 이에 따라 가마 4기가 발견되었는데 한 기는 많은 부분이 유실되었으나 3기는 양호한 상태로 많은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15세기 후반 분청사기의 특징을 대표하는 유물들로 특히 조화기법으로 제작된 모란과 물고기 문양의 병 편병 대호 접시 등에서 특징을 보이고 있다. 또한 흑유와 백자도 출토되고 있어 조선 전기의 분청사기와 흑유 및 백자와의 관련성도 주목받고 있는 곳이기도 하다. 분청조화문대발편은 안팎에 귀얄로 분장을 하고 있고 그 위에 조화로 문양을 넣고 있다. 굽도 입술도 남아 있지 않은 이 도편을 항아리 같은 것으로 보지 않고 대발로 보는 것은 안팎으로 귀얄과 조화문이 들어 있는데다 손잡이가 달려 있기 때문이다. 국립전주박물관에서 발행한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 도록을 보면 손잡이가 달린 도편이 한 점 보이는데 분청사기 물고기무늬 큰 사발이라는 명칭이 붙어 있어 분청조화문대발편의 기종을 증명하는데 일조를 하고 있다. 그렇다고 하면 손잡이 까지 달린 이 대발은 온전했더라면 얼마나 큰 기형이었을까. 일반적인 사발이라고 보기 보다는 자박이 같은 큰 기물의 일종이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것은 아닐까. 선운사도 서정주의 질마재도 또한 같은 고창군 관내의 용계리 청자나 분청사기 가마터 모두 내게는 세월의 저편 너머 추억이 얽힌 그리운 이름들이다. 고창 용산리 분청사기 가마터 또한 두어 번의 발걸음이 있었던 곳이고 보면 추억의 앨범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곳임은 말할 필요도 없는 일이다. 하지만 나이 들어 옛 애인들과의 그리운 추억을 찾아 나섰던 영화 <무도회의 수첩> 속 여주인공처럼 나 또한 다시 추억의 책장을 들척이며 선운사로 서정주의 질마재로 용계리로 용산리로 내 발걸음을 재촉해 볼 날이 있을 것인지. 그런저런 생각들을 하다 보면 분청조화문대발편의 조화문이나 귀얄자국이나 손잡이 하나하나에도 세심한 마음으로 자주 눈길이 가 머무는 것을 어쩔 수가 없다.
-
(33)<br>주요한의 기록, 그 진실은?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에는 대부분의 필자들이 ‘친일파 지식인’이란 규정하에 이병도 백낙준 서정주 윤치영”을 나열하고, 이어 "국학의 대가 최남선, 서지학자 황의돈, 안창호와 함께 상해에서 일했던 주요한 등이 안창호 작사설을 주장”했다고 하였다. 이 중에 주요한朱耀翰)은 ‘安島山全書’라는 방대한 저술에서 ‘애국가’ 항목을 두고 세 번에 걸쳐 작사자에 대해 거론한 인물이다. 그런민큼 누구보다도 주요한의 작사자에 대한 인식이 중요하게 된다. 이를 짚어 보기로 한다. 안창호의 생애를 다룬 대표적인 전기(傳記)는 이광수의 ‘도산안창호’와 주요한의 ‘安島山傳記’이다. 전자는 안창호를 "도덕주의자의 거울”로, 후자는 "민주적 지도자의 전형”으로 그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뿐만 아니라 이 두 자료는 애국가 작사자 문제에서도 평가를 받는다. 이 두 저자는 안창호가 임시정부 조직 초기부터 이광수가 귀국하는 1921년 2월 사이 내무총장 겸 국무총리 대리직으로 함께 활동한 이들이다. ‘도산안창호’는 "작사자 문제 발화”로, ‘안도산전서’는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저술로 말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후자 즉, 주요한(朱耀翰 1900~1979)의 ‘安島山全書’의 평가 "작사자 문제 유지, 확산”의 평가는 논의의 여지가 있다. 왜냐하면 주요한은 외견상으로는 몰라도 내심은 애국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보지 않았음을 읽을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그 이유를 주요한의 발언을 순차화 하여 밝혀 보기로 한다. 애국가 작사자에 대한 주요한의 첫 발언은 네 가지 점에서 주목을 하게 된다. 하나는 작사자 문제가 발발한 후 첫 번째의 반응이란 점이다. 미국의 한 백과사전 출판사가 애국가 작사자의 연혁을 문의해 온 바, 공보처가 작사자를 안창호라고 통보하려 한다는 기사(서울신문)를 낸 것이 1955년 4월 4일 자이다. 그리고 주요한이 이에 대한 반론을 제기한 것이 4월 19일이기 때문이다. 둘은 안창호설에 대한 반론으로 대표적이란 점이다. 당시나 지금이나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윤치호를 작사자라고 반증하는 것임으로 쉽지 않은 처지이기 때문이다. 셋은 안창호의 최측근 중 한 명이란 점이다. 임시정부 시기와 흥사단 활동에서 이광수와 주요한은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함께 했던 인물인데, 한 사람은 작사자로, 또 한 사람은 이에 반론을 제기했다는 점에서다. 넷은 주요한은 애국가 작사자를 판단할 전문소양의 소유자라는 사실이다.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장 시절 ‘적십자의 노래’ 등을 작사하고 ‘불놀이’를 발표한 시인이란 점이다. 주요한의 첫 발언은 이렇다.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 자 ‘애국가 작사자는 누구?’라는 기고문에서 매우 강한 어조로 안창호 작사설을 부인한 것이다. "안도산이 지었다고 하는 것은 세간에 널리 유포되고 있는 설이지만은 솔직히 말하자면 그것은 일종의 신화적인 설이다. 도산이 작사자라고 하는 직접적인 증명을 가진 사람을 필자는 아직 만나지 못하였다. 또한 도산 자신의 입으로 그러한 말을 하는 것도 들어 본 적이 없다.” ‘신화적인 설’이란 표현은 곧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주장은 듣도보지도 못했다.”는 강경한 부인이다. 이 결과는 가장 가까이에서 살며 안창호가 직접 "내가 작사했다”라는 말을 한 바도 없다고도 했다. 이는 "내가 작사하지도 않았다고 하는 말도 듣지 못했다”라는 억지를 배척한다. 특히 안창호가 직접 자신이 작사자라는 말을 하는 것도 들어보지 못했다는 말까지 하였다. 이는 이후 1963년 발간한 ‘안도산전서’에서도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로 기술하여 이를 견지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런 의지적 표현은 주요한의 깊은 내심에서 나온 확신임으로 쉽게 변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발언은 국사편찬위원회가 애국가 작사자조사위원회를 조직하여 활동하던 시기에 발표한 글에서다. 1955년 12월 조사위원회 일원으로서, 자신이 주관한 월간잡지 ‘새벽’에 발표한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란 글이다. 여기서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는 대목의 행간을 읽어보기로 한다. "文敎部에서 愛國歌作詞者調査委員會를 委囑하여 그 사무를 추진할 때에 筆者도 위원의 한 사람으로 참여했었다.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 調査途中에 딴 所得이 있기로 여기 披瀝하고자 하는 바이다.(중략) 그때 開城에 있는 韓英書院에서 찍어 내서 몰래 사용한 것이라고 전해진다. 거기는 약 2백餘篇의 唱歌가 수집되어 있는데, 推算年代로 보아서 물론 秘密出版이다. 이 唱歌集 속에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 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로 되어 있다. 曲調는 두 가지가 같다고 하였고, 曲譜를 보면 스코틀랜드 民謠 올드랭사인(Auld Lang Syne)의 그것이었다. 그 밖에 韓末에 유행되던 여러 가지 노래가 수집되어 있는데 그중에서 筆者는 ‘靑年學友會歌’라는 것을 발견했다.(중략) 다음에 유명한 ‘去國歌’도 이 두 책에 揭載되어 있다. 이 歌詞는 春園선생이 저술한 ‘島山安昌浩’에 收錄되었으나 그 歌詞의 行數가 節을 따라 맞지 않는 점이 있어 一部 漏落된 것으로 추측되었는데 敍上의 兩 唱歌集에 收錄된 것으로서 완전한 歌詞가 발견되었다고 생각한다.”(월간 <새벽>, <去國歌와 靑年學友會歌>, 1955, 12) 다소 길게 인용한 글은 주요한이 ‘도산안창호’의 내용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그 대비로 ‘한영서원 발행 창가집’도 조사자로서 살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첫 번째 발언 "신화적인 설”이라는 단언은 적어도 이광수의 ‘도산안창호’ 기록을 분명하게 부정한 것이 된다. 이런 맥락에서 이 두 번째 발언의 "그 委員會의 결론에 대해서 여기 言及하려는 것이 아니고~”라고 한 소이를 알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작사자조사위원회에서 적어도 안창호가 작사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이 밝혀졌음을 굳이 언급할 필요는 없다고 한 것에 다름이 아니다. 또한 한영서원에서 발행한 창가집의 "제1章은 愛國歌(동해물과 백두산이)로 되어있고, 제2章 역시 愛國歌(성자신손 오백년은)”라고 구분하여 인용한 대목에서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한영서원의 창가집에는 두 애국가의 작사자로 윤치호라고 밝혀져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를 알 수 있게 하는 것은 작사자조사위원회가 결론을 윤치호로 내리게 한 근거 중 하나라는 것과 1916년 ‘경무부 보고 애국창가집 사건’ 기록에 ‘윤치호 舊作 애국가’라고 하였다는 사실에서다.(이후 1920년대 김종만 소장(所藏) 노래책에 애국가 작사자로 ‘윤선생 치호’로 표기되고, 가장 방대한 자료집인 1931년 한석원이 펴낸 ‘세계명작가곡집 무궁화’에 애국가 작사자를 ‘윤치호 작사’ 밝힌 사실에서 재확인이 된다.) 이를 주요한은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결과적으로 주요한은 이 두 번째 발언의 행간에 "안창호는 작사자가 아니다”를 담은 것이다. 만일 작사자조사위원회의 결론이나 자신의 견해가 안창호가 작사자라는 확신을 하고 있었다면 굳이 이상과 같은 표현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대신에 "그 委員會의 결론에 작사자는 안창호라고 했는데~”라고 했어야 마땅한 것이다. 결국 두 번째 발언에서도 주요한은 내심으로는 입장 변화가 없었다는 것을 확인했다. 이번에는 주요한의 저술 ‘安島山全書’에서 별도의 ‘愛國歌’라는 소항목을 두어 안창호 작사설을 확대, 재생산한 두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먼저 살피는 것은 상해 임시정부 시절의 에피소드이다. 이의 진앙지는 이광수의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이다. 즉, "원래 이 노래의 시방 부르는 가사는 도산의 작이거니와 이 노래가 널리 불려서 국가를 대신하게 되매 도산은 그것을 자기의 작이라고 하지 아니하였다. "애국가는 선생이 지으셨다는데’하고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부인도 아니 하였다"”이다. 주목하는 것은 여기에서는 단순히 "대답이 없었다”인데 주요한은 다음과 같이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부연하였다. "항간에서는 도산이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으나, 상해시대에 –이 노래는 선생님이 지으셨지요?-라고 도산에게 물으면 –웃고 대답이 없었다-는 것이다.” 이 에피소드의 시점과 장소는 주요한이 임시정부 ’독립신문‘ 편집 등으로 안창호와 이광수와 함께한 상황이다. 그러므로 이 내용의 여부를 알 수 있는 사정이다. 이런 점에서 주요한의 부연은 의미심장한 것이다. 즉, "웃고 대답이 없었다”라고 하여 소위 ‘소이부답(笑而不答)’이란 에피소드로 만들었다. 이 사자성어는 굳이 말로 알려주지 않고 웃음으로 대신한다는 뜻이나 일반적으로는 직접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하는 모습이나 대응할 가치가 없는 질문에 예의상 대처하는 태도를 말하기도 한다. 이에 적용하면 결국 안창호가 지었다고 믿는 이가 많지만, 정작 안창호에게 작사했느냐고 물으면 "대답하기 곤란하여 회피했다”인 것이다. 이 사정을 적극적으로 해석하면 "내가 안창호와 함께 있었지만 들은 바가 없는 얘기이다.”라는 뜻을 피력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니 실상은 안창호 스스로가 작사자가 아니라고 말한 것과 같지 않느냐라고 한 것이기도 하다. 다음은 애국가를 대성학교 개교 후 안창호가 작사하고, 이를 윤치호가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확산시켰다. 다소 감동적인 이야기다.(이를 장리욱은 1983년 발행한 <偉大한 韓國人 安昌浩>(중앙서관, 118~119쪽)에서 그대로 인용하여 확산시켜다.) 그러나 전후 맥락을 살핀다면 흔한 말로 ‘카더라 통신’ 수준인데, 에피소드의 시점 등을 눈여겨 읽지 않으면 그렇다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이야기의 시점은 대성학교 개교 이후라는 점과 오늘날에는 쓰지 않는 ‘대리교장’ 같은 용어의 이해이다. 대성학교의 개교 시점은 1908년 9월이고, 대리교장 또는 대변교장은 저명 인사를 내세워 학생모집 효과를 얻기 위한 방편이고, 개교 후에는 윤치호가 서울에 거주하기 때문에 평양의 안창호가 교장직의 대리를 맡아 쓰게 된 말이다. "대성학교 대리교장으로 있던 도산이 하루는 서울에서 내려온 교장 윤치호를 보고 ‘성자신손 오백년은’으로 시작하는 애국가에서 -이 가사가 적당하지 아니하므로 고쳐서 부름이 좋겠으니, 교장께서 새로이 한 절을 지어 보시라-고 청했다. 이에 윤 교장은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 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 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 놓았던 것을 꺼내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로 시작되는 애국가 첫 절이었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되었다고 칭찬하였고 도산은 -그러면 이것을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합시다-라고 하여 그 뒤부터 대성학교에서 새 가사로 부르게 되고 나중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이해를 위해 다음과 같이 재구성하였다. 장소는 평양 대성학교 안창호 대리교장 사무실, 때는 1908년 9월 대성학교 개교 이후 어느 날, 등장인물은 서울에서 온 교장 윤치호와 평양의 대리교장 안창호, 개요는 안창호가 지어 두었던 "동해물과 백두산이~”하는 애국가를 서랍에서 꺼내 보이자 윤치호는 이를 좋다고 하자 안창호가 이를 윤치호가 지었다고 양보하여 발표하자고 하며 확산시켰다. 여기에 굳이 작품 이름을 추론한다면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 정도일 것이다. 매우 드라마틱하다. 안창호가 "윤 교장이 지은 것”으로 발표하여 명의(名義)를 넘겨주었다니 오늘이나 당시나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이 상황은 설정될 수 없는 것이어서 재미는 있으나 사실은 아니다. 결정적으로는 현 애국가가 ‘찬미가 14장’이란 이름으로 출판된 것이 1908년 6월인데도, 두 달이나 지난 뒤에 개교한 대성학교에서 가사를 두고 잘되었다고 하며 안창호가 작사한 것을 윤치호의 작사로 하여 발표하기로 하였다니 그렇다. 이런 이유로 주요한의 첫 발언에서 ‘신화적인 설’이라고 했다고 보는데, 이 극의 배경을 살피면 이 또한 그럴 수밖에 없음을 이해할 것이다. 우선 작사자 문제의 발화점인 ‘도산 안창호’의 본질적 문제이다. 뒤에서 상술하겠지만 이 책 여러 곳의 탈맥락적인 안창호 작사 언급 대목은 편집과정에서 원 저자인 이광수의 의도와는 다르게 박현환(‘도산 안창호’의 저자가 이광수가 아닌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이다. 박현환은 안창호가 귀국하자 1922년 7월 귀국하여 이광수 주변에서 흥사단 활동을 도운 인물이고 해방 직후부터 한국전쟁 복구 시기까지 국내 흥산단 업무를 관장한 인물이다.) 같은 인물이 가필한 결과라는 것이 문제다. 대표적인 대목이 ‘상해시대편’의 "물으면 도산은 대답이 없었다”는 탈맥락적인 부분이다. 이에 따른 결론은 "전기소설에 근거한 안창호설은 원천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된다. 두 번째 문제는 이 극의 대본이 ‘전문(傳聞)을 다시 전문’한 것이라는 사실이다. 주요한은 위의 인용문 앞에 이렇게 전재하여 알 수가 있다. "이에 대하여 안태국의 사위인 홍재형(洪在衡)이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하면 다음과 같다.” "장인에게 전해 들은 대로 기억하는 바”에 의한 기술이라고 했다. 첫 발언자는 안태국, 이를 전한 이는 홍재형, 이를 듣고 주요한이 기록을 하였다. 첫 발화자 안태국(安泰國, 1877~1920)은 평양에서 나고 자란 인물로 대한제국시대 잠시 하급관리를 지냈다. 그리고 독립협회 평양지부에서 이강, 차리석, 최광옥, 이갑 등과 함께 활동하며 안창호와 연을 맺었다. 한일합방 후에는 계몽운동에 투신한 인물이다. 1911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징역 5년형을 선고받고 1916년에 만기 출감하였다. 3.1민족운동 이후에는 평양을 떠나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 내무총장 비서관직을 맡았다. 그리고 1920년 3월 병사했다. 이를 감안(勘案)한다면 이미 1920년 이전에 작사자에 대한 논란이 있었다는 것이고, 이 시기 이전에 사위 홍재형한테 전했다는 것이 된다. 그런데 1940년 상해 흥사단 원동지부 위원 정도로만 알려진 홍재형이 어떻게 장인에게 듣고 다시 이를 주요한에게 전했는지는 의문이다. 특히 1920년 이전 왜 이런 사실이 안태국만이 알고 있었느냐도 의문이다. 이런 점에서 ‘전언에 전언’을 통해 펼쳐진 대성학교를 무대로 한 ‘실패한 작사자 조작극’은 제목 그대로 인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용, 살피려는 것은 임정시절 가사 일부를 수정하였다는 대목이다. 1955년 국사편찬위원회가 발행한 ‘애국가작사자조사자료’ 11쪽에서 최남선이 언급한 부분이다. "만약 안창호가 문의를 하였다면 그 직위로 보면 주요한이 아닌 이광수에게 하였을 것”이라고 지적한 바가 있다. 주요한의 나이가 당시 20세라는 점에서 문제를 제기한 것은 타당하다고 본다. 역시 ‘안도산전서’의 ‘애국가’ 항목(93~97쪽)에서 4절의 일부를 수정했다는 것과 2, 3절에 대한 언급 대목을 살피기로 한다. "1919년부터 상해에서 ‘임군을 섬기며’ 대신에 ‘충성을 다하여’로 고쳐 부르기 시작했는데, 이것은 분명히 도산이 고친 것이었다. 둘째 절의 ‘남산 위의 저 소나무’라든지, 셋째 절 ‘가을하늘 공활한데’와 같은 웅장한 구상은 도산의 머리가 아니고서는 나올 수 없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주요한, ‘안도산전서’, 1971년, 93~97쪽) 앞의 문장은 ‘찬미가 제14장’의 4절 중 ‘임군을 섬기며’를 현재의 ‘애국가’와 같이 ‘충성을 다하여’로 고친 것은 안창호라고 하였다. 이는 1919년 12월 1일 발행된 신한청년당 기관지 ‘新韓靑年’ 창간호 속 표지에 수록한 ‘애국가’ 4절에 ‘충성을 다하여’로 나오는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임시정부 시기 수정된 것으로 볼 때 가능성이 높다. 이는 주요한이 작사자에 대한 유일한 단정적 표현에서 그렇게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다음 문장의 해석 문제는 주요한의 표현대로 추정 정도일 뿐인 것이다. 이상에서 작사자 문제를 확산시킨 ‘안도산전서’의 세 대목을 그 발화점인 전기소설 ‘도산 안창호’와 대비하여 살폈다. 이를 두 가지 관점에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도산 안창호’의 원천적 문제 제기이다. 이 책은 이광수가 쓴 원고에다 당시 ‘편집 겸 발행인 도산안창호선생기념사업회’ 대표 박현환(나정 박현환(蘿井 朴賢煥)은 1892년 평안북도 철산(鐵山) 출신으로 평안북도 정주 오산 학교의 이광수의 후배이면서 제자로 일본 유학 후 오산 학교 교사로 일했다. 3. 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하여 안창호, 이광수, 주요한 등과 흥사단 원동 단우로 ‘신한청년’과 ‘독립신문’ 편집 업무를 함께 하였다. 해방 직후에 흥사단 국내 위원부 재건에 앞장섰고, 흥사단의 해외 조직과 국내 조직 재건에 기여한 인물이다.) 이 ‘태극기와 애국가’ 항목을 삭제하고, 대신에 곳곳에서 덧붙여 가필(加筆)을 하였다. 그 결과 감동적인 기술과 표현으로 독자들에게 사실로 오해하게 하였다. 소설가적 성향을 발휘한 것인데, 박현환은 이광수를 따른 작가로 1920년대 초반 톨스토이 소설 부활을 ‘해당화’라는 제명으로 번역하여 출간한 바 있다. 또한 해방 후에는 흥사단의 국내 재건을 도맡은 인물이다. 이로서 이광수에게 전기소설 집필을 의뢰하고, 이의 편집과 출판을 주관한 인물이다. 그 결과 탈맥락적이고 산발적으로 작사자가 안창호라고 왜곡시켰다. 사실(fact)이 아니라 감동으로 가짜 역사를 만들어 낸 것이다. 다음은 경향신문 1955년 4월 19일자의 첫 발언, 1955년 12월호 월간 ‘새벽’ 기고문, 그리고 1971년 주요한이 편찬한 ‘안도산전서’ 에서 제시한 애국가 안창호 작사설의 평가이다. 정리하면 주요한은 첫 발언 ‘신화적인 설’을 번복한 적이 없다는 사실이다. ‘안도산전서’는 흥사단의 입장을 고려하여 부정하지는 않고, 인용하는 방식으로 단순 서술을 한 것 뿐이다. 이를 이해하지 못하면 주요한이 안창호설을 지지한 것으로 오독 할 수가 있다. 이는 위에서 살핀 바대로 주요한은 첫 발언 이후 이를 부인하거나 번복한 바가 없다. 결론적으로 주요한은 안창호가 작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으며 단지 일부 사설을 수정한 바가 있음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
이무성 화백의 춤새(86)<br> 김병섭 명인의 '설장고' 춤사위설장고 장구잽이가 혼자서 장구를 메고 노는 놀이를 설장고라고 하고, 장구잽이 2명이 노는 놀이는 쌍장고(雙杖鼓)이고, 세 사람의 경우는 삼장고(三杖鼓)라고 하며, 여러 명이 노는 경우에 장고놀이라고 한다. 설장고에서 많이 연주되는 장단은 덩덕궁이·다드라기(호두락가락)·구정놀이·굿거리이다. 본래 상쇠와 둘이서 놀이판 가운데 나와 서로의 가락을 주고받으며 놀던 것이었으나, 전라북도 정읍의 유명한 장구잽이 김홍집(金弘集)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이 혼자 하는 형태가 되었다고 한다. 근래에는 무용수들에 의하여 장구춤으로 안무되기도 한다.설장구는 전라도 우도농악권 지역에서 크게 발달하였으며, 김병섭은 이를 바탕으로 개인 설장구를 만들어 현재까지 설장구 유파 중에서 가장 활발하게 전해지고 있다.김병섭 선생은 장고 하나로 한국농악판에서 최고의 기량을 인정받았던 명인이다. 김병섭(金炳燮)1921~1987년1921년 정읍시 북면 출생1930년 김학순에게 장구 사사1935년 싱카포르 함락 기년 축제 참가1937년 징용으로 아오지 탄광으로 징용1956년 전국농악경연대회 개인상 수상1964년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 개인상 수상1975년 한양대, 서울예고, 선화예고 출강1986년 서울국립극장 명무전 출연 1987년 9월 11일 향년 75세 별세
-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88)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얼씨구 노다노다 가세 아지까리 동백아 네 열지마라 누구를 괴자고 네 열렸나 열라는 콩팥은 왜 아니 열고 아사리 동백은 왜 여는가 감상 동백은 생강나무의 강원도 사투리다. 김유정 소설 ‘동백꽃’에서의 ‘동백’이 그렇고, 강원도 아리랑과 정선 아리랑에 등장하는 ‘동백’도 선운사 ‘동백’과는 다른 생강나무를 말한다. 생강나무는 3~4월에 노란 꽃을 피우며 상처를 내면 생강냄새가 나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주까리의 씨앗은 한약명으로 피마자(蓖麻子)이다. 모두 열매를 이용해 기름을 짠다. 기름을 짜서 머리에 발라 치장한들 예쁘게 봐줄 대상이 없으니 아주까리 동백은 결국 무용지물인 셈이다. 아주까리 동백보다 양식으로 쓸 콩팥이 훨씬 절실한데 쓸 데 없는 아주까리 동백만 열리니 볼이 메일 밖에. 그러나 바라는 대로 되지 않는 게 세상의 이치가 아니던가. *(누구를) 괴자고 : (누구를) 사랑하자고 *아지까리, 아사리: ‘아주까리’가 소리가 흐르면서 음이 변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
무세중과 전위예술(9) <BR>김세중의 한국민속가면무극 춤사위 발표회1969년)멍석 위에서 민속극에 뜻을 둔 이래 가장 절실했던 것은 둔한 몸을 가지고 직접 춤을 익혀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들 생활의 분신의 하나인 전통 민속극과 좀처럼 사귀어지지 않았던 불행스런 이유가 내편에 있음은 내자신이 그 앞에 자칫 생소한 손님으로 때로는 우리극 자체가 엉뚱하고 별난 것으로 밖에 보이지 않게 했던 흥분한 나의 눈에 기인되었기 때문이다. 춤이 꼭 그렇게 만들어져야 했던 사회적 여건 시대상을 비롯한 절실한 생활의식들을 담고있는 우리 무소(舞 素) 속에는 우리의 모든 역사의 분자들이 집약되어 있기도 한 것이다. 대다수 서민들의 생활감정을 밑바탕으로 가장 빨리 흡수하고 가장 빨리 내어 뱉으면서도 자기것을 익혀 만들 어간 몸짓이 바로 디딤과 벌림의 '덧뵈기춤'이라고 본다. 몸 마디마디의 멋(神)을 감고 또는 모으고 또는 꺾고 매쳐서 베긴것을 풀어 내거나 뿌리면서 중심을 잃은 듯한 춤짓들이 여유있게 디뎌가며 벌려나가는 것이 그 특징이 아닌가. 몇 평 안되는 마당에서 좁은 논두렁길 언덕바지에서. 꼬불꼬불 산길 따라 논뚝따라 애환과 갈등들을 질라서 보릿대춤으로 달래며 짓이겨가면서 숨차게 염원했던 우리 조상들의 흔적이 그 속에 엉켜있는 것이다. 춤을 익혀주신 네 분의 연로한 스승들을 한자리에 모시고 그분들의 숙련된 춤사위와 서투른 자신의 모습을 보 여드리며 지극히 지루하나마 조잡히 깨여져가는 어설픈 현대화에 탈춤의 정직한 자료로서 내놓은 것이다.(김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