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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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 가락으로 승화시킨 서른 살 망부의 한, 안비취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로 지정된 경기민요에는 12잡가가 있다. ①유산가(遊山歌) ②적벽가(赤壁歌) ③제비가(燕子歌) ④소춘향가(小春香歌) ⑤집장가(執杖歌. 집장 사령) ⑥형장가(刑杖歌) ⑦평양가(平孃歌) ⑧선유가(船遊歌) ⑨ 출인가(出引歌) ⑩십장가(十杖歌) ⑪방물가(房物歌) ⑫달거리(月齢歌)가 그것이다. 이들 12잡가의 음악의 특징은 4분의 6박자인 도드리 장단이 대부분이며, 형식은 약간 불투명한 유절(마루) 형식으로 서민들의 애환을 담은 직설적 표현이 많다. 서울ㆍ경기도를 중심으로 충청 북부와 강원 일부 지역까지 애창돼 중부 지방 민요로도 불린다.12잡가는 세 사람의 인간문화재로 나뉘어 지정ㆍ보호받고 있다. 이중 안비취(安翡翠, 1926년 3월 21일생) 씨가 유산가ㆍ제비가ㆍ소춘향가ㆍ십장가를, 묵계월 씨가 적벽가ㆍ출인가ㆍ선유가ㆍ방물가를 부르며, 이은주 씨는 집장가ㆍ평양가ㆍ형장가ㆍ달거리로 지정돼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다.매년 설날이나 추석 등 경축 무대에 ‘안비취와 그 제자들’로 소개되며, 기골 장대한 체구가 대중을 압도해 버리는 안비취 여사.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는 바로 옆의 이춘희(李春羲, 89년 준문화재 지정), 김혜란(본명은 숙근, 전수자), 이호연(본명 연화, 전수자) 씨 등도 TV 화면을 통해 낯익은 얼굴들이다."4남1녀의 외동딸로 태어났지요. 위로 언니가 일찍 죽자 명이 길라는 뜻에서 ‘복식(福植)’이란 남자 이름으로 지었답니다. ‘비취’란 예명은 12잡가를 떼 주신 최정식(崔貞植)선생이 제가 16세 때 방송에 첫 출연하게 되자 지어 주신 겁니다. 흔히 비취 반지로 알고 있지만 중국 문헌 속에 나오는 새 이름이라고 들었어요.”서울 종로구 효자동 대궐 가까운 곳에서 나고 자란 안씨는 순흥 안씨 보성군파로 당시 부친은 효자동에서 제일 큰 잡화상을 운영했다. 부잣집에다 절에 가 빌어서 난 딸로 애시당초 부족함이나 어려움 같은 건 남의 일이었다고 한다.손으로 태엽 감으며 아버지가 듣던 ‘빅타’ 유성기가 좋아 보여 늘 곁에서 참견했다는 것. 이 때 들은 ‘기막힌 소리’들이 이화중선(李花中仙), 김소희(金素姬), 백운선, 장학선 명창 들의 애절한 판소리. 소학교에 들어갔으나 머리는 좋았는데 공부는 못했다고 솔직히 털어놓는다. ‘버들은 실이 되고 꾀꼬리는 북이 되어······.’ 등 소리 가사는 듣기만 해도 줄줄 외워 댔지만 특히 산수는 보기만 해도 지긋지긋했다고 한다.안씨의 ‘팔자’는 열 세 살 때의 대담한 가출로 판가름난다. 세 살 위의 이웃집 민향심(閔香心)과 무단 가출, 하규일(河圭一) 씨가 운영하던 정악 교습소에 들어갔다. 그 때 하씨는 이왕직 아악부에 나가면서 별도 교습소를 차려 놓고 후진들을 양성하고 있었다. 여기서 안씨는 궁중정재(춤)와 4검무, 연하대무, 무산향 등을 익히고 이병성 씨한테 가곡을 정식으로 전수받았다. 뒤늦게 안 어머니의 지원으로 2년 뒤에는 한성준(韓成俊) 씨를 만나 민속춤(승무)을, 최정식(崔貞植) 씨한테는 경기12잡가를 배우기에 이른다. 이래서 가무에 능한 오늘의 안비취로 일가를 이루게 된 것이다.최정식 씨는 ‘금강산타령’, ‘풍등가’ 등을 작사ㆍ작곡한 장구 명인으로 그의 문하에서 세 명의 인간문화재가 배출됐다. 하규일 씨는 일제 때 조선 권번을 움직인 당대 가무의 대가였다."정악에서 민속악 쪽으로 나오니 창법이 달랐습니다. 특히 상성(고음)이 가곡보다 힘들어 적응하기가 힘들었지요.” 안비취 씨는 정악만을 끝까지 지켜 내지 못한 것을 지금도 아쉬워하고 있다."어려서부터 시집은 정말 가기 싫었고 소리만 하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세상사 뜻대로만 됩니까. 19세에 강기준(姜基準) 씨를 만나 결혼했지만 그 분은 내 나이 서른에 딸만 둘 남겨 놓고 훌쩍 떠나 버렸지요.”시집살이하는 동안 ‘여편네가 살림은 안 하고 소리질만 해 댄다’ 하여 가정 불화가 잦았다. 안씨는 그 때나 지금이나 예술 없이는 못 살겠다는 황소고집이었다고 한다. 남편을 잃은 천추의 한은 춤사위와 소리 가락으로 승화 됐고 결혼식에 참석조차 않은 친정 아버지 가슴을 녹이기 위해 열심히 살았다고 자부한다.6ㆍ25 때 부산 피난지에서의 공연과 1959년(34세) 박귀희(朴貴姬)ㆍ임춘앵ㆍ복혜숙(영화 배우)ㆍ최용자(무용가)ㆍ임유앵(임춘앵 언니) 씨와의 일본 순회 공연이 잊혀지지 않는단다. 일본 첫 공연은 최상덕(연출가), 박진(연출가), 이서구(李瑞求) 씨를 중심으로 ‘대춘향가’를 선보여 교포들을 울렸다. 자유당 말기에는 박초월(木初月), 김소희(金素姬), 박귀희 씨와 함께 당시 오재경(吳在璟) 공보처장관을 설득, 오늘의 국악협회를 인가 받아 창립하는 등 국악 발전에도 앞장섰다. 한때는 골프에 심취, 명동 사보이호텔 건너편에 실내 연습장을 만들기도 했으나 첫 사업은 보기좋게 실패했다.서울 중구 남산동의 안비취 후계양성소에는 대학을 나온 장학생들도 적지 않다. 50명이 넘는 제자 중 최영숙(35)ㆍ이금미(30, 본명 생길, 국립국악원)ㆍ전숙희(44) 씨는 전수자로 등록됐고, 남궁랑(35)ㆍ이유라(34)ㆍ전영희(39) 씨 등은 장학생.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 했던가. 준문화재로 지정(1989년)된 이춘희(서울 출생) 씨도 중학 시절 하라는 공부는 안 하고 민요만 부른다며 체육 선생한테 매맞은 소리 솜씨다. 이창배 민요학원에서 배우다 1971년 안씨를 만나 본격 학습에 들어간 뒤 1975년 안씨가 인간문화재로 지정되면서 수석 전수생으로 등록됐다. 한때는 김부해 음악학원에서 배운 숨은 솜씨로 가수 황금심 씨 노래를 구분 못 하게 잘했으며 최근에는 롯데월드에서 민요 부르기 강좌(매주 화요일)를 맡고 있다. 안비취 선생은 경기민요에 놀이가 끼지 않음을 아쉽게 생각한다. 판소리에는 고수와의 대화(아니리)가 있고, 굿에는 리듬ㆍ의상ㆍ소리ㆍ재담까지 포함된 바라지가 신바람을 내 주는데 12잡가는 단조로움의 연속을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알고 있는 이지산 스님(재미)이 귀국하면 제자 김혜란 씨에게 바라지 가락을 배우게 해 경기민요와 굿장단의 만남도 시도해 볼 계획이다. 중대, 추계예술대, 서울예전에 나가 강의하면서도 이런 변신 가능성을 여러 번 토의해 보았다고 한다. "한생애 예인의 길을 걷느라 여자로서 잃은 것도 많지만 후회는 없습니다. 쌍계사(雙磎寺) 국사암과 서울 근교 절을 자주 찾으며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를 생각합니다. 인생이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건지······. 경기민요에 담긴 내용들도 부의 허망함과 헛된 욕심을 나무라는 내용이 많지요.” • 안비취 경기민요 계보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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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를 읽다’(1)‘이춘희를 읽다’는 인간문화재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자전적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를 요약, 소개하는 글이다. 경기민요 명창의 고난과 영예의 역정을 통해 동시대 국악인들에게 참 명인의 지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함께하기 위해서다. 3회에 걸쳐 전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이춘희를 읽다’(1) 1. 소리에 눈뜨고, 소리 길에 들다 경기소리 명창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발간되었다. 영어로는 "The Life and Art of Lee Chun Hee, Master of Gyeonggi Folk Songs”이라고 하여 ’경기민요 명인 이춘희의 삶과 예술’이라고 풀어 표현했다. 기존의 서사체 전기(傳記)의 틀을 벗어나 현재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오늘에 이른 지난 길을 정리하고, 다시 가야할 길을 열어 보이는 생생한 보고서이다. 이런 성격은 서명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전해 준다. 선생의 호(號) ‘旦聲’(아침의 소리)의 의미를 문장화 한 것인데, 아직도 새날의 아침을 기다려 맞으며 해야 할 일을 위해 준비하는 부지런하고 성실함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책머리 발간사는 단 1쪽으로 간명하다. 네 토막의 글 중 세 번째 토막이 직접적인 발행 목적으로 읽힌다. "어떻게 하면 제자들에게 소리를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목숨과도 같은 여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스승으로서 경기민요인으로서 잘 살아야하겠다는 책임감과 생각들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제자, 둘째는 여식(서정화)에게, 그리고 관객(펜)들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했다. 이렇게 책임을 스스로 내세운 것은 어느 정도는 할만큼 했음을 드러낸 자신감이며 권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춘희’를 읽는 무게감을 갖게 해 준다. 곧 "나처럼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나처럼 노력해라. 그러면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다.”라는 단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두 분의 평가를 발간사에서 제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실, 생전에 자전적 구술서를 낸 다는 것 자체가 자신감의 표현 아닌가. 우리가 부러워해야 하는 명인의 자부심이다. 우선 서연호(고려대)교수가 성음에 대해 "어떤 고음에도 잡티가 전혀 없는 잘 훈련된 목과 탁월한 성량, 음처리에 빈틈이 없는 완결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고음과 성량은 천성이지만 ‘완결성’과 ‘잘 훈련된’ 것에 방점을 두었다. 소리하는 누구나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음은 김해숙(前 국립국악원) 원장의 진술이다. "경기민요에 어눌하던 나의 귀를 확 트이게 한 경험을 하게 하였는데, 경기민요를 그토록 고졸하고 품격있게 느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부럽기 짝이 없는 찬사다. 그런데 이 같은 평가와 찬사는 결코 과장되거나 이 분들만의 취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이 오래전에 한 축사에서 규정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춘희 명창의 소리 세계는 확실히 남다른 특장이 있다. 경기민요 특유의 신명을 끌어내면서도 진득한 무게감을 더해 준다. 낙이불류(樂而不流)의 품도를 느끼게 한다. 결코 숙련된 기교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따라서 단성(旦聲) 이춘희 명창의 노래는 경기민요의 격을 한층 높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 인품으로 균형을 이룬 진솔한 음악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증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대가의 이만한 평가와 찬사는 이 책의 페이지를 빨리 넘기게 해 준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은 어린 시절 소리 인연과 입문 과정을 담았다. 출생지가 서울 본토박이 한남동 부군당(府君堂) 근처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 매년 정월 초하루 날의 마을굿을 보며 자랐다. 무당집에서 당집까지의 행렬에 끼어 악기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으며 한살 한살 자랐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의 ‘사발가’를 가슴으로 들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들은 ‘사발가’의 굿거리장단이 ‘소리병’의 씨앗이 되어 각인되었다. "어린 춘희가 만난 것은 노래였다. 노래에 대한 끼를 발견하고 난 이후에 노래와 함께 찾아오는 밝은 기운과 생동감은 어린 춘희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하였다. 그 사건의 시작은 한남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음악시간에 부른 ‘봄 아가씨’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라디오를 소리선생으로 삼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동요와 민요와 대중가요는 청각이 예민한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특히 장안의 화제였던 일일연속극 ‘장희빈’의 주제가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민요조 구성진 창법의 황금심을 동경했다. 대중적인 노래의 매력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18세가 되던 1968년, 김부해(金富海,1918~1988)가 운영하는 가요학원을 찾았다.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악보를 받아 피아노 반주에 의한 반복 연습을 하는 과정이다. 희망을 갖고 2년을 다녔다. 선생에게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김부해 작곡의 ‘백령도 처녀’라는 곡을 가수 최숙자가 취입하게 되었는데, 이 때 코러스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갑지 않았다. 자신에게 만족감 같은 것이 없었다. 가요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마음에서 떠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문득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대중가요가 아니라 민요라는 것을 깨닫고 민요학원을 찾게” 된 것이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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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굴은 薄色, 소리는 絶色 -귀명창의 연인 李花中仙일제시대의 판소리는 그 명맥을 꾸준히 이어가기는 하였으나 이전 황금기의 수준에는 이르지 못했다. 이 시대의 판소리는 5명창으로 알려진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이 중심인물로 활동하였고, 이들의 뒤를 이어 이화중선. 임방울. 박녹주. 김여란. 김연수 등이 명창으로 활약하였다. 후에 이화중선의 소개로 송만갑을 만나 국창의 위치에까지 올랐던 김소희는 이화중선의 심청가 한 대목을 듣고는 온통 혼을 빼앗겼다고 고백할정도로 당시 이화중선의 인기는 하늘을 찌를 지경이었다. 이화중선은 명창 박녹주와 달리 그녀의 탄생과 죽음 대목이 아직 베일에 싸여있다. 고향만 해도 부산 동래, 전남 보성 벌교, 전남 남원 등 설이 분분한 것이 그것이다. 하지만 부산 동래설이 가장 유력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화중선 1898년 부산 동래에서 출생했으며 어렸을 때 이름은 李鳳鶴이었으며 아주 빈한한 가정에서 자라났다. 그의 아버지가 전설의 새인 봉황과 학처럼 오래 살라고 그런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1999년 「영남음악사연구」란 논문집을 펴 낸 향토음악사 연구가 손태룡씨는 "이화중선은 다섯살때 동래에서 전남 보성군 벌교면으로 이사갔고, 전남 남원군 수지면 호곡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 , 평범한 시골 아낙으로서의 삶을 보내던 중 명창 송만갑이 이끄는 협률사 공연에 반해 시집을 뛰쳐나와 소리꾼이 됐다”고 주장했는데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된다.1918년, 송만갑의 협률사가 들어와 흠실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다. 남녀노소할 것 없이 처음으로 보게 되는 협률사의 국창과 여류 명창들을 구경하려고 구름같이 모여들었다. 화중선도 그 틈에 끼어서 구경을 하였는데, 난생 처음으로 들어보는 판소리와 창극 춘향전에 넋을 잃을 정도였다. 그날 밤 화중선은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상하게도 어쩐지 자신의 길은 촌부생활이 아닌 것만 같이 생각되었다. 3일간 계속된 협률사 공연을 하루도 빠지지 않고 구경하는 동안에 마음의 동요는 더하였다. 그곳에서 받은 감동과 충격으로 인하여 그동안 자신도 알지 못했던 화중선의 소리에 대한 열정을 일깨웠으며, 자기도 판소리를 배워서 여류명창으로 입신양명해 보려는 생각이 불같이 일어난 것이다. 화중선은 밤마다 번민에 사로잡혀 미칠 것만 같은 심사를 어찌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화중선은 남편도 가문도 체면도 저버리고 한밤중에 아무도 모르게 집을 빠져 나오고 말았던 것이다.화중선은 덮어놓고 남원으로 달려왔으나 판소리를 어느 곳에서 누구에게 어떻게 배울 것인지 목표도 방향도 알 수 없었다. 남원거리를 방황하다가 어느 노파의 안내로 들어 간 것이 무당집이었다. 화중선은 그 집에 있으면서 무당이 가르쳐 주는 소리를 배우기 시작하였는데 무당은 화중선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어느 주색가에게 몸을 팔도록 끈덕지게 졸라대어 할 수없이 그 집을 나오게 된다. 그 당시 남원에 거주한 장득주(장재백의 조카)는 명창은 못되어도, 본래 명창의 문하에서 이수하였던 만큼 조격이 높고 남원에서는 일류라는 평판이있었다. 화중선은 소문을 듣고 장득주가 사는 집으로 찾아가 소리를 배우고 싶다고 간청하였으나 하인들이 문전박대를 하고 들여보내 주질 않았다. 어떻게 하든 소리를 배우고 싶었던 화중선은 장득주의 동생이 아직 총각이며 술독에 빠져 지내느라 장가를 들지 못한다는 얘기를 듣고, 장득주의 동생과 혼인하는 것이 장득주에게서 소리를 배울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고는 장득주의 동생 장혁주와 맞선을 보고 결국 혼인을 했다. 장득주는 자신이 소리를 할 때마다 화중선이 문밖에서 한창동안 기웃거리다 들어가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또 부엌에서 몰래 숨죽이며 소리하는 모습도 보았다. 장득주는 동생의 아내가 소리에 관심이 있다는 것과 함께 그녀의 타고난 재능을 알아차렸다. 음악성이 높고 배우려고 하는 열정이 남다른 것을 높이 샀으며, 장차 명창이 될 큰 재목감이라는 것을 알고는 정성을 다하여 열심히 가르쳤다. 화중선은 장득주에게서 소리를 배운지 몇년만에 <춘향가>,<심청가>,<흥보가> 세 마당을 완전히 습득했다. 그 후 화중선은 장혁주와 이혼하고 어느 부자 모씨의 첩으로 들어가게 되는데, 거기서 5백석의 재산을 얻게 된다. 더이상 물질에 어려움이 없게 된 화중선은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선 더 큰 세상으로 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고 또다시 남편과 가정을 버리기로 결심한다. 그리하여 그녀는 서울로 올라와 朝鮮券番에 妓籍을 두고 공부를 하는 한편, 명창 송만갑이 이끄는 창극단인 협률사에 들어가게 되었다. 화중선의 소리를 들은 송만갑은 무릎을 치며 감탄했다. 소리란 본래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명창의 길에 들어설 수 있는 법인데, 화중선은 스무살이 넘어서야 소리를 배웠어도 그렇듯 곱고 맑은 소리를 낼 수 있다는 사실이 참으로 놀랍기도 하고, 억지로 꾸며내지 않아도 감정이 그대로 살아있는 소리가 나는 것으로 보아 분명 타고난 소리꾼이 틀림다는 것을 알아챈 까닭이었다. 화중선의 얼굴은 박색이었으나 그 성음만은 월등하게 아름답고 샘물 솟듯이 막힌 데가 없었다. 소리를 조작하지 않고 나오는대로, 부르는대로 하여도 규범에 틀림없이 유창하게 잘 불렀다. 그러한 그녀의 청아하고 감정이 어린 목소리는 듣는 사람들의 애간장을 녹이기에 충분했다. 화중선의 이같은 타고난 소리는 다른 명창들이 도저히 따를 수 없는 그녀만의 특징이었다.1923년 조선물산장려회가 주최한 「전국판소리대회」가 열렸다. 그녀도 서울에 올라와 그런 큰 무대에 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 당시 판소리의 여왕이라고 불리던 배설향도 참가해서 긴장은 더욱 커졌다. 하지만 아버지를 그리는 심청의 마음을 애끊는 가락으로 불러 명창대회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일등으로 뽑힌 화중선은 당시 '소리의 왕'이라고 불리던 박기홍으로부터 '화중선'이란 예명을 받게 되었는데 다음과 같은 유명한 일화가 전해진다."배설향이 여왕이라면 이봉학은 가히 꽃중의 선녀로세. 내 자네를 위해 이름을 하나 지어주겠네. '꽃중의 선녀'라는 뜻으로 '화중선'이라 함은 어떨까? 지금부터 이봉학이란 이름 대신에 '이화중선'이란 이름을 사용하려무나" 이때부터 이봉학이란 이름을 버리고 이화중선이라는 예명으로 불리워지게 된 것이다.명창이 되어서 서울의 창극 무대에 서기 위해 세 번씩이나 가정과 남편을 버리고 온갖 고생을 다했던 화중선은 그 보답으로 송만갑의 협률사에서 활동하면서 폭발적인 인기를 누렸다. 화중선이 잠을 설치며 꿈꿔왔던 명창의 길로 드디어 들어선 것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무대 위의 박수갈채를 받는 화중선은 인기와는 반대로 외롭고 쓸쓸한 자신의 삶을 고민하여 살았다고 전해진다.1935년 장안사, 연흥사와 같은 창극 전문 극장이 일제의 치밀한 감시와 탄압, 그리고 활동사진의 보급으로 인한 경영난이 겹쳐 큰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 그래서 당연 창극 활동이 부진하게 되었다. 협률사에서 더 이상 소리를 못할 걸 안 화중선은 정식 남편으로 알려진 林完元이 이끄는 대동가극단에 들어가 판소리와 창극을 계속했다. 대동가극단에는 강남중, 임방울 등의 명창과 박초선, 박초홍 등이 가담해 판소리 창극의 토막극, 남도민요, 줄타기 등을 펼치며 지방을 돌아다니며 공연했다.1943년에는 일본의 한 레코드 회사에서 임방울과 이화중선의 레코드를 취입하게 되었는데, 이를 계기로 대동가극단의 단원 모두를 초청해서 일본 순회공연을 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초청이 아니라 위문단이란 이름의 반강제적인 공연이었으며 출연료도 주지 않고 여비와 숙식비 정도로만 지불하려는 일제의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 당시 일제는 전쟁을 지원하기 위해 일반 시민들이건 예술인이건 적당한 명목을 만들어 마구 부려 먹고 있었다. 대동가극단 단원들은 억울함을 속으로 삼키면서도 어쩔 수 없이 공연을 떠나게 되었다.이화중선은 전국 각지와 일본 등지를 여행하며 맑고 청아한 애원성으로 듣는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하지만, 한없이 밀려드는 고독감과 잔병치레로 몸과 마음이 극도로 허약해져가기만 했으며, 정처없이 떠도는 유랑 극단 생활에 그만 지쳐버리고 말았다. 화중선은 본래 약한 체질인데다가 너무 무리하여 유랑 극단 생활을 하다보니 자연 이름 모를 병에 걸려 건강상태가 최악의 상태로 나빠졌다. 화중선은 자신의 건강이 회복되기 어려운 것을 알고는 큰 슬픔에 잠겨있었다. 동료 명창들이 힘들어 하는 화중선을 위로하기도 했지만, 이미 깊은 병마와 싸워 지쳐버린 화중선에게 별로 큰 용기를 주질 못했다. 화중선의 입에선 죽음이라는 말이 자주 나오기 시작했다.그러던 어느 날 규슈에서 세도 나이카이를 항해 중이던 여객선에 가극단 일행은 지친 몸으로 올랐다. 화중선은 항해중인 배의 갑판에 올라 검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엔가 화중선의 몸이 힘없이 나풀거리며 바다에 떨어졌다. 그렇게 억새풀같이 한 많은 화중선의 예술 인생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던 것이다. 시신은 사가현 앞바다에서 인양 됐는데 사인은 밝혀지지 않았다. 그 때 화중선의 나이 46세였다. 참으로 극적인 소리인생을 살았던 화중선은 20여년간의 예술혼을 불태워 국악사의 전설적인 여류 명창으로 남겨지게 되었다.이화중선의 삶은 가끔 아편을 즐겼고, 혈육을 남기지 않고 이승을 떴다는 측면에서 박녹주의 삶과 비슷했다. 하지만 소리의 질감은 박녹주와 확연히 달랐다. 박녹주는 동편제 판소리의 정통을 따랐지만 이화중선은 판소리를 대중적 차원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녀의 소리는 일반인들한테는 듣기에 더없이 좋았다. 자연 레코드회사들이 그녀를 붙잡는데 혈안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화중선은 당대 여류명창 중에서 가장 많은 205장의 유성음반을 남겼다. 한때 달성권번 측에서 대구로 내려와 후학 지도를 권했지만 그녀는 소리하는 사람은 공연만 하면 되는 것이지 지도는 하지 않는 것이라며 전국순회공연에 청춘을 바쳤다. 그녀의 친동생 李中仙(1901∼32)도 명창이었다. 중선은 언니의 유명세에 가려 명창임에도 대중적 인기를 별로 얻지 못했다. 언니가 ‘추월만정 ’ ‘사랑가’(‘춘향가’의 한 대목) 등으로 사람들의 얼을 빼앗을 때, 중선은 흥타령과 육자배기 가락으로 서민들의 한을 달래주었다. 먹고살기가 너무도 힘겨웠던 일제시대를 살아야했던 조선의 민중들에게 이들 자매는 큰 위안이며, 힘이 되어주기도 하였을 것이다. 남보다 늦은 20세가 되어서야 소리의 인생을 시작한 화중선이었지만, 타계하던 그날까지 귀명창들의 연인으로 존재하면서 김초향과 더불어 여류 창악계의 쌍벽으로 화려한 명성을 남기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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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가에 실려 온 70년, 영원한 소리꾼, 묵계월백이숙제 착한 이와 도척 같은 몹쓸 놈도 죽어지면 허사로다.역려건곤에(逆旅乾坤) 부생이 약몽(若夢)하니 즐거움도 얼만고병촉야유(秉燭夜遊)하며 독서담론 자락하니 한가하기 측량없다 ······.일생이 이러하니 상산사호(商山四皓) 죽림칠현 한가롭다.이만하면 적송자(赤松子) 안기생(安期生)을 부러하랴범려(范蠡)의 오호주(五湖舟)와 장자방(張子房)의 사병벽곡(謝病辟穀)소광의 산천금(散千金)과 도연명의 귀거래는 모두 다 작은 일이 아니로다 ······. 깊은 밤, 은근한 석유 등잔 불빛이 창호지 문틈으로 새어 나온다. 한동네 또래 할머니들 대여섯이 둘러앉아 ‘이 집’ 며느리가 읊는 알듯말듯한 소리를 내 신세와 견줘 가며 듣고 있다. ‘소리’하는 며느리가 지칠까 봐 이따금씩 ‘그려!’ 하며 추임새로 부추긴다. 할머니 무릎에 앉아 뭐가 뭔지도 모르며 골똘히 듣고 있던 손자 녀석은 어느새 잠들어 버렸다. 이 때 구슬픈 듯하면서도 청아한 목소리로 읊어 대던 ‘며느리의 소리’가 바로 ‘삼설기’다. ‘홍길동전’, ‘사씨남정기’ 같은 얘기책에 청을 넣어 구성지게 읽었다. 아무나 할 수 있을 것 같으면서도 함부로 흉내낼 수 없는 게 책 읽고 편지 읽는 투의 바로 그 ‘목청’이었다.삼설기는 수많은 경기잡가 중에서도 엄연히 ‘족보 있는 소리’다. 잡가에 능한 소리꾼이 많건만 묵계월(墨挂月ㆍ72, 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씨의 삼설기는 단연 독보적이며 발군이다. 그래서 묵씨는 ‘묵계월의 삼설기가 기막히다’는 칭송을 들을 때마다 16세 적 수양모(이정숙) 집 사랑방까지 찾아와 그 소리를 가르쳐 준 이문원(李文元) 선생을 잊지 못한다.인간문화재 묵계월 씨는 또래 소리꾼 이은주, 안비취 씨와 함께 꽤나 알려진 이름이다. 설이나 정월 대보름, 추석 등 민족 고유 명절 때면 TV를 통해 ‘묵계월과 그 문하생들’을 어렵잖게 만날 수 있다. 늘 깨끗한 한복에 쪽머리나 찌고 만단 시름없이 소리만 하고 살 것 같은 묵씨에게도 인생의 우여곡절은 깊다. 그가 살아 온 ‘한 생애’는 묵씨 자신의 것이라기 보다는 동시대를 살아 온 동료, 선ㆍ후배 국악인들과도 연관지어 가볍게 지나칠 내용들이 아니다. 바로 국악 1세대들의 현장 육성이기 때문이다.묵씨는 서울에서 나고(중구 광희동 2가 357번지) 자란 순 서울 토박이다. 아버지(이윤기)는 언제 돌아가셨는지 기억도 없고, 열 한 살 때 만난 양어머니(이정숙)에 의해 한 소녀의 운명은 반전해 버리고 만다."그 집에 살던 양언니 이름이 묵계홍이었어요. 소리는 별로였지만 얼굴이 예뻤습니다. 계월이라 지으면 팔자가 좋아질 것이라며 그 집 성을 따 묵계월이라 부르게 된 겁니다.”그 때가 열 두 살 적. 본명 이경옥(李瓊玉)을 버리고 예명 묵계월이라 써온 지 60년이 넘었다. 웬일인지 이씨 집안에는 남자가 귀해 족보조차 제대로 챙기지 못했다며 아쉬워한다. 수양어머니는 소리 선생 이광식(李光植) 씨를 불러 개인 학습을 시켰다. 1년여 동안 여창 지름, 남창 지름, 시조, 가사 등 기초를 익혔지만 뛰어난 소리는 아니었다고 회상한다.양모 손에 이끌려 조선 권번에 입적한 것이 13세. 여기서 주수봉(朱壽鳳) 씨를 만나 경기12잡가를 속속들이 배우게 된다. 이 때 조선 권번에는 70~80명의 예기들로 붐볐고 하규일(河圭一) 씨가 가곡을 가르치고 있었다. 기악, 무용부도 있었지만 묵씨는 오직 경기잡가에만 몰두했다. 권번 학습이 끝나면서(14세) 과장에도 더러 나가고 사랑놀음에 자주 불렸다. 자그마한 몸매에서 터져 나오는 다부진 소리에 사랑어른들은 매료됐고 가는 곳마다 ‘묵계월뿐’이었다고 한 시절의 풍류를 떠올린다. "기왕에 소리해 먹고살 팔자라면 이골나게 배워야 되겠더군요. 독선생(김윤태)을 모셔다 붙임새를 새로 보태고 최정식(崔貞植) 선생을 찾아가서는 자청해서 경기민요를 배웠습니다. 무슨 짓이든 해야 먹고사는 세상, 확실한 ‘자기 일’이 있어야 된다는 생각입니다.”18세에 ‘화초머리’ 얹은 채 인력거를 타고 명월관, 국일관, 천향각을 주름 잡던 일, 쌀 한 가마니에 7원씩 할 때 놀음채를 25원씩이나 받던 전성기 얘기 등은 행간에 접어 넣자고 한다. 해방(25세), 6ㆍ25 등 민족의 격동기를 살면서도 묵씨는 목청을 지켜 내기 위해 개인 놀음청에도 응했고, 또 그것이 먹고사는 유일한 방편이었다. 부산 피란 시절에도 그랬고 수복 후 서울에 다시와서도 남편과 자식을 위해 목소리만은 생명처럼 아껴야 했다.이래서 묵씨는 상ㆍ중ㆍ하청을 자유자재로 구사한다. 특히 중ㆍ상청 부분에서 꺾어 올려치는 끝막음 소리는 그의 제자들만이 이어받아 낼 수 있는 일품의 경기민요다.임정란(林貞蘭ㆍ50, 준문화재)ㆍ고주랑(高柱琅ㆍ46)ㆍ임수연(34)ㆍ조경희(趙慶姬ㆍ33)ㆍ김운경(32)ㆍ정경숙(30) 씨 등이 이수생으로 대중들 앞에 나서는 문하생들이며, 박순금(38)ㆍ최근용(32)ㆍ김진희(28)ㆍ최근순ㆍ최보물(32)ㆍ김덕례(29)ㆍ이명희(25) 등은 전수생.서울 중구 무학동 5번지 중부소방서 건물 앞 ‘경기12잡가 묵계월 전수소’에는 문선진(37), 배미숙(28) 씨 등 교습생만도 30명이 넘어 묵씨의 경기민요 맥은 탄탄하다. 다만 소리좀 할 만하면 결혼과 함께 작파해 버려 들인 공력이 아까울 때가 많다고 늘 아쉬워한다. 풋고추 절임김치 문어 전복 곁들여황소주 꿀 타 향단이 들려 오리정으로 나간다 ······.이제 가면 언제 요료 오만 한을 일러 주오.명년 춘색 돌아를 오면 꽃 피거든 돌아를 볼까 ······.곤히 든 잠 행여나 깨울세라등도 대고 배도 대며 쩔래쩔래 흔들면서일어나오 일어나오 겨우 든 잠깨어나서 눈떠 보니 내 낭군일세······. 경기민요 중 출인가(出引歌)의 소절들. 경기잡가는 ①유산가, ②적벽가, ③제비가(연자가), ④소춘향가, ⑤집장가(집장 사령), ⑥형장가, ⑦평양가, ⑧선유가, ⑨출인가, ⑩십장가, ⑪방물가, ⑫달거리(월령가) 등 크게 12가지로 나뉘어져 있다.이 중 묵계월 씨는 적벽가ㆍ출인가ㆍ선유가ㆍ방물가로 인간문화재 지정을 받았고(1975년 7월 12일), 이은주(李銀珠) 씨는 집장가ㆍ평양가ㆍ형장가ㆍ달거리로, 나머지는 안비취 씨 몫으로 구분돼 있다. 1971년 묵계월, 이은주, 안비취, 김옥심, 이소향 씨 등이 만든 민요연구회는 이들 경기민요꾼의 권익을 증진시키며 사회적 예우도 격상시켰다."배운 게 소리였고 살기 위해 잡가를 불렀지요. 누가 인간문화재 같은 거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그러다 보니 미국도 구경하고 일본에도 다녀왔습니다. 인생사라는 게 꼭 잘돼야 되겠대서 잘되는 것만은 아닌 것 같아요.”이제는 여자 나이 70이 넘다 보니(1920년 10월 19일생) 별 생각이 다 든다고 했다. 아차 하면 한 달이고 문득 깨어 보면 한 해가 가 버리고······. 곱던 얼굴 생각하며 젊은 제자들이 찾아들면 한 사람에게라도 더 전수시키려 사정하며 가르친다. 22세에 결혼하여 1남2녀를 두고 지금은 손자, 손녀, 외손자, 외손녀를 둔 할머니지만 시름에 겨워 홀로 뒤척이는 밤도 적지 않다고 한다. 한 많은 이 세상 야속한 님아정을 두고 몸만 가니 눈물이 나네······.청춘에 짓밟힌 애끊는 사랑눈물을 흘리며 어디로 가나아무렴 그렇지 그렇구 말구한오백년 사자는데 웬 성화요. 묵계월 씨는 임과의 사랑, 인생무상이 듬뿍 담겨져 있는 강원도 민요도 즐겨 부른다고 했다. 애틋하면서도 홀로 서려는 기개가 확실한 애곡(哀曲)이어서 더욱 그렇다고 한다. • 묵계월 경기12잡가 계보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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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 이춘희 [인터뷰]/글:조혜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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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병천, 가ㆍ무ㆍ악에 능한 씻김굿의 예능보유자피는 못 속인다. 진도 무당 박병천(朴秉千ㆍ58, 진도씻김굿 기능 보유자) 씨는 자신이 무업에 종사하게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이 일이 천하다고 여겨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어디서나 자신있게 나선다. 오히려 몸 속에서 우러나는 천부적인 몸통발림, 재기(才技), 목청을 놔두고 무얼 하겠느냐는 되물음이다. "진도 입대조(入代祖)가 9대라니까 적어도 우리 가문은 250년 이상을 무업에 종사한 거여.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빌어 준 덕택에 숱한 사람들이 마음놓고 좋은 곳으로 갔을 거구먼.” 어려서부터 어정(굿)판을 좇아 다니며 몸에 익힌 박씨의 남도 풍물 가락은 귀신까지 감복시켜 버리고 만다. 특히 가(歌), 무(舞), 악(樂), 의식(儀式)은 물론 농악에까지 능해 가히 이 분야의 독보적 존재다. 박병천과 무악. 삼현육각(징ㆍ장구ㆍ대금ㆍ북ㆍ쌍피리ㆍ아쟁)으로 뒷바라지하는 씻김굿의 무악은 당연히 징이 발군이다. 잔잔한 파도같이 밀려오는 삼현육각의 소용돌이가 갑자기 멈춰버리고 대금과 쌍피리의 구성진 죽관음이 한 맺힌 망자의 넋을 위무할 즈음 난데없는 박병천의 징이 오장육부를 훑어 내며 마무리지어 버린다. 그의 징 소리는 일반 사물놀이의 징 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듣는 이의 마음가짐과 한의 두께에 따라 계면(界面, 슬프고 애원적인 것) 섞인 탄식음일 수 있고 우렁차고 씩씩한 미래성일 수도 있다. 박씨의 무악은 1985년 베를린음악제에 출전, 6개국 32개 지역을 순회하며 음악 선진국들을 놀라게 했고 LA올림픽 개막 축제 공연, 니카라과 세계민속음악제 등을 통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원초적 감성에 호소하는 무악의 기본음은 동서양은 물론, 유ㆍ무식, 종교까지를 뛰어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무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의 외국 유학보다도 힘든 당시 목포 유학(목포중, 6년제)을 마치고 한때는 딴 직업을 찾으려 했지만 무슨 일을 해도 되는 게 없었단다. 스무 살 때 어머니 김소심(金小心, 무가의 대가였음) 임종을 지켜보며 받은 충격이 오늘로 이어진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혼수 상태에서 잠깐 정신이 돌아오면 "아가, 오늘이 음력 며칠이제······. 내 건너 안서방네 성주굿 해 줘야 할 텐디······.” 순간 박씨는 자귀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충격을 느꼈단다. 한평생을 ‘무당’ 이라 천대받으면서도 죽은 사람 좋은 곳으로 가 달라고 빌어 온 무업이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음을 번개스치듯 깨달았다는 것이다. "어머니, 지가 한번 대신 해볼까요?.” 이 말에 김소심 씨는 벌떡 일어나 "배울테면 똑바로 배워야 한다. 어정판에 돈 조금 내놓는 건 가난해서 그런 게야······. 돈 적다고 슬슬 하다가는 신장이 노하는 법이야.” 이후 박씨는 굿판에 가 돈타령한 적 없고 돈 벌어 써 본 일도 없다. 일곱 살 때부터 부락 농악칠 때 무동을 서 인기를 독차지했고 국민학교 때는 학예회 콩쿠르에 나가 ‘끼’를 보여 줬다. 고교 시절 밴드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불며 ‘요것이 바로 혈통 세습’임을 스스로 느꼈다는 것이다. 쉽게 손만 떼면 곡이 절로 나왔다고. "한때는 내가 전라도 ‘번개’였지. 무당이라고 업신여기는 놈은 무조건 한방부터 내질러 버렸으니까. 도대체 남 잘되고 좋은 곳으로 가라 빌어 주는 게 뭐 잘못된 거냐는 생각이었지······.” 그의 주먹 솜씨는 전남에서 알아줬고 알 만한 사람은 대세 불리하면 박씨 이름을 팔고 다닐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가락 마디엔 징채, 북채, 장구채를 쥐어 생긴 상수리만한 굳은 살들이 돋아 있다. 진도 무당은 박(朴)ㆍ함(咸)ㆍ노(魯)ㆍ채(蔡)ㆍ최(崔)ㆍ이(李)ㆍ김(金)의 칠성(七姓)받이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전통 세습무는 밀양 박씨가 뚜렷한 단일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박씨 조부(대금 명인)가 타계했을 당시 (일제 때) "비록 천한 사람이 죽었지만 진도군장(珍島郡葬)으로 모셔졌다.”면서 세습무 집안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진도 신청(神廳) 계보는 박씨 가문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ㆍ고ㆍ대학은 물론 대학원 강의까지 나가며 국문ㆍ민속학 교수들과 난상 토론을 전개하고 진도만가(挽歌), 북춤, 강강수월래, 다시래기(초상집에서 상주를 위로하는 놀이), 씻김굿 등을 다듬고 정리해 이 분야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다. 1971년 전국민속경연대회 국무총리상(남도 들노래팀), 1972년 국무총리상(강강수월래), 1973년 대통령상(강강수월래), 1974년 문교부 장관상(진도만가), 1975년 거문도뱃노래 발표, 1976년 진도다시래기 발표 등 민속학에 끼친 공헌도 만만치 않다. 그 자신 인간문화재 72호(1980년 지정, 진도씻김굿 기능 보유자)로 남도굿과 가락을 통해 17명의 중앙ㆍ지방 문화재 지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박씨는 자신한다. 문명교(서양 종교 등 무를 업신여기는 종교를 그는 ‘문명교’라 불렀다.)를 믿는 집안에서도 객적은 일이 있으면 무(巫)가 혹세무민이 아님을 현장에서 보여 주겠다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박씨는 쓸데없는 피해 의식, 열패감 등으로 조상을 속이려는 재인 후손들을 경멸한다. 우리 민속악의 고향이며 연원인 무악을 잘 보존하고 되살려 맥을 되찾아야 할 책임이 오히려 뒤따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 민족의 원형을 담고 있는 무굿이 시절 인연을 잘못 만나 한동안 밀렸지만, 이제는 우리 것을 바로 보고 찾으려는 안목이 생겨 운세가 달라지고 있다고 내다본다. 다섯 바탕 판소리 장단 외에 ‘선부리’ 가락까지 들어간 무악은 서양 음악에만 심취된 사람들도 녹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씨는 지금 재인 가문의 단명과 손(孫) 귀함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300년 가까운 가문의 세습무가 자신의 대에 와 끊어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9가지 종류(한 가지만 9시간씩 걸려 81시간 소요)의 씻김굿을 제대로 전수받기도 힘들 뿐더러 아들 환영(桓永)은 국립국악원 대금 주자로 있어 더욱 걱정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박병천 문화재전수소’에 제자들은 많다. 그러나 그의 징 솜씨뿐만 아니라 북, 장구, 무무(巫舞) 등을 배우려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씻김굿 한 바탕을 제대로 전수받으려는 후학이 없다. 박병천 문화재전수소를 통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지만 정작 씻김굿 한 바탕을 제대로 배우려는 후학은 드물다. "저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훌륭한 조상을 가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불던 대금에서 피가 떨어지며 운명하셨다고 들었어요. 어정판 시나위 속에 징채를 잡다가 여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 박병천 세습 무가 계보도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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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MBC] (다큐)씻김굿을 세계에 알린 사람, 진도 씻김굿 명인 박병천예향의 고장, 진도 민속예술의 고장, 진도 씻김굿을 세계에 알린 사람, 진도씻김굿 명인 박병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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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詩評 . 詩로 우려낸 문경, 그 상큼한 맛과 향. 이만유 시집 ‘문희(聞喜)의 노래’권갑하(시인) 문희(聞喜)! 그 아름다운 이름 문희는 문경(聞慶)의 다른 이름이다. 기쁜 소식을 듣고 경사스러운 일이 생긴다는 ‘문희경서(聞喜慶瑞)’에서 비롯된 지명이다. 지난날 과거 길에 오르는 선비들은 모두 문경을 거쳐 한양으로 향했다. 추풍령을 넘으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지고 죽령을 넘으면 죽 미끄러진다고 했으니 어느 간 큰 선비가 다른 길을 택할 수 있었겠는가. 문경은 이처럼 경사의 기운이 넘치는 땅이다. 뿐만 아니라 지리산까지 내달리는 백두대간의 양지바른 남쪽 자락에 위치하여 어느 한 곳 명당 아닌 곳이 없다. 그래서인지 인구가 감소하는 다른 지방과 달리 문경은 오늘날에도 인구가 늘고 있다고 하니 그 또한 ‘문희’란 이름 덕분이 아닌가 생각해보게 된다. 경북 북서부에 위치한 문경지역 사람들은 다소 무뚝뚝하고 퉁명스러워 보이지만 속정이 깊어 시간이 흐를수록 잘 익은 술처럼 인간관계에 향기를 드리운다. 한 번 정이 들면 잘 헤어지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만큼 믿음을 중시하고 또 유교문화의 영향으로 전통과 뿌리의식이 강하다. 이러한 문화는 어쩌면 변화에 무딜 수도 있는데 문경 사람들은 그렇지가 않다. 영남과 기호지방의 첨예한 경계지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새로운 문화의 수용 적응력이 높고 소통과 교류를 중시한다. 경계에서 꽃이 핀다고 했는데, 이런 지역적 특성이야말로 문경이 독자적으로 구축해온 문화 형성의 동력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이만유 시인은 이러한 지역의 정서와 문화, 정체성을 누구보다도 잘 육화하고 있는 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시인으로 활동하면서 일찍부터 지역문화를 가꾸는 일에 남다른 관심을 가져오고 있는 분인데, 지금도 문경아리랑과 구곡원림 보존 활동에 특별한 애정을 쏟고 있다. 문경새재는 근대 아리랑의 발원지이다. 구한말 선교사 헐버트 박사가 1896년 서양 오선지 악보로 채록해 세계에 소개한 최초의 아리랑 대표 사설이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인데, 이는 문경새재 지방의 소리가 경복궁 중건 시기에 전국으로 퍼져 근대 아리랑으로 탈화된 역사를 갖고 있다. 그로부터 30여 년 지난 1920년대에 등장한 진도아리랑 등 지역 아리랑 가사에 ‘문경새재’가 나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역사 때문이다. 구곡원림은 조선 선비들의 정신세계와 자연관이 녹아 있는 문화유산인데, 문경에는 가은 완장의 선유구곡 등 9개나 있어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구곡원림을 보유하고 있는 고장이다. 산이 높은 만큼 골이 깊어 독자적인 문화 형성과 학문하기가 좋고 또 그 어느 지역보다 산세가 수려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만유 시인은 이러한 문경의 아리랑과 구곡원림 문화의 가치를 일찍부터 인식하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와 문경구곡원림보존회 회장 등을 맡아 열정적인 활동을 펼쳐오고 있다. 한국문인협회 문경지부회장도 역임했으니 지역 문화에 대한 시인의 각별한 애정이 얼마나 큰 지를 읽을 수 있다. 시인은 어디를 가든 카메라를 늘 들고 다니는데, 바로 이러한 기록하는 자세와 애정이 오늘의 이러한 성과를 낳게 한 에너지가 아닌가 생각된다. 이러한 시인께서 문경을 소재로 한 첫 시집을 출간한다. 보통 한 권의 시집에는 70~100편 정도의 작품이 실리는데, 이 ‘문희의 노래’ 시집에는 그 배 이상의 작품이 수록되었다. 이 시집 한 권이면 문경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 정도로 방대한 소재를 담고 있다. 그런 만큼 편의상 빙산의 일각을 조망하듯 몇 개의 테마를 중심으로 시인의 시 세계를 살펴보기로 한다. 시로 우려낸 문경, 그 짙은 문향(文香) 문경은 고개 아래 고을이다. 영남과 기호지방을 잇는, 홍귀달 선생의 말을 빌리면 ‘영남의 목구멍’과 같은 곳이다. 그래서 문경지역에는 일찍부터 하늘재, 새재, 벌재, 이우리재(이화령), 버리미기재 등의 고갯길이 개척되었다. 그 중에서 역사적으로 가장 먼저 개척된 고갯길이 바로 서기 156년에 열린 하늘재(계립령)다. 고갯길은 문화 교류의 통로이기도 하지만 외침의 길목이기도 해 하늘재는 삼국 쟁패기엔 군사 요충지로 격전의 장이었다. 곳곳에 성과 관문이 전해오는 이유다. 하지만 싸움은 한 순간, 고갯길의 진정한 의미는 ‘인생 고개’가 상징하듯 돌아보고 성찰하는 삶의 공간이란 점이다. 일찍이 김종직은 "높고 험한 계립령은/ 예부터 남북을 갈랐네/ 북쪽 사람은 호화로움을 다투는데/ 남쪽 사람은 살과 피를 빨리네/ 소달구지는 험한 산길을 가는데/ 일터엔 장정들이 없구나…”(‘가흥참에서’)라며 하늘재에 올라 백성들의 참상에 가슴 아파하며 붓의 날을 세웠다. 이만유 시인도 하늘재에 올라 역사를 돌아보고 삶을 성찰한다. "고려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 안동으로 몽진 간 길/ 경순왕이 태조 왕건에게 신라를 바치러 간 길/ 망국의 한을 품은 마의태자가 피눈물을 흘리며 지나간 길”(‘하늘재1’)처럼 욕망과 슬픔이 교차하는 역사의 고갯길에서 성찰의 의미를 되새긴다. 하늘재는 조선 초 문경새재가 새로 개척될 때까지 낙동강과 남한강을 잇는 고려시대 영남과 개성을 잇는 주로였다. 그로 인해 곳곳에 불교 유적이 전해오는데, 대표적인 것이 미륵사지 유적과 마을 이름이다. 신기하게도 문경 쪽 관음리에서 하늘재를 넘으면 수안보 미륵리다. 이를 근거로 시인은 하늘재가 ‘관음’의 현세에서 미래의 ‘미륵’세계로 넘어가는 "구원의 길”임을 제시하며 "선업(善業)을 쌓”(‘하늘재1’)자고 노래한다. 문경새재 소재의 시편은 별도의 부로 나눴을 정도로 많고 다채롭다. ‘상처 난 소나무’ 등에서는 새재의 역사를, 「문경새재에 들면」 등의 시편에서는 새재의 아름다움을 노래하고 있다. "문경새재에 들면/ 계곡의 맑은 물이 바이올린이 되고/ 산새가 소프라노로 노래 부른다/ 나무들이 정겨운 친구가 되고/ 사시사철 피는 꽃이 입맞춤해 준다/ 굽이마다 긴긴 세월 지켜본 바위가/ 옛이야기 들려주고/ 나뭇잎이 툭 툭 장난치듯 어깨를 치고/ 바람이 귓속말로 속삭인다”(‘문경새재에 들면’)는 시편은 공감각을 자극하는 환상의 시편이다. "모처럼 문경새재/ 푸른 세상 속에 홀로 있으니/ 예가 선경이다 싶네// 인간 세상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으니/ 이를 우야면 좋노”(‘우야면 좋노’)에서는 선경과 같은 새재 이미지를 극대화하고 있다. 이화령을 문경새재라 부르는 외지인들이 많다. 1925년 낸 신작로인 이화령은 백두대간 상 문경새재 아래에 위치한 고개다. 길에도 생명이 있어 문경의 고갯길은 하늘재→새재→이화령→이화령터널→중부내륙고속도로로 부침을 거듭하고 있는데, 2022년이면 수서-문경 간 고속철 시대가 새로 열릴 전망이다. 이화령터널이 생기면서 6.25 때 낙동강 전선 사수에 결정적 역할을 했던 이화령도 이젠 옛길이 되었는데, 시인은 "옛길 이우릿재엘 가면/ 흔들리는 완행버스 안에/ 가슴 설레는 꿈을 안고 오가던/ 낯익은 문경사람들이 타고 있다/ 정겨운 웃음소리 들린다”(‘이화령’)고 힘들게 이화령을 넘든 지난날을 회상한다. 문경새재 목전에는 고갯길 못지않은 험한 길이 적지 않다. 대표적인 곳이 ‘토끼비리’라 불리는 토천(兎遷)이다. 짚신 발자국에 닳아 반질반질 빛나는 영남대로의 역사적 흔적을 보여주는 몇 안 되는 명소다. 이곳은 산태극수태극의 군사 요충지로 삼국시대 축성된 고모산성이 전해오고 임진란의 아픈 역사도 서려 있다. "돌아올 수 없는 시간의 배를 타고/ 푸르렀던 아름다운 시절과/ 폭풍우 치든 날의 두려운 시간을 지나/ 이제 가을비에 촉촉이 젖은 옛길에 누워/ 긴 역사의 수레바퀴 위에서/ 한 생애 찰나의 삶일지라도 감사하며/ 바람과 함께했던 그 날들/ 그리움 가득 안고 떠나련다./ 영원한 시간 속으로”(‘토끼리비 낙엽’) 역사적 사유와 서정적인 진술이 아름다운 이 시는 영원한 시간 속으로 스러지는 낙엽을 통해 삶과 인생이 드리우는 내면의 길을 사유한다. 문경은 아리랑의 고장이다. 아리랑은 삶의 가락이요, 길 위의 노래다. 사람들은 문경새재를 넘으며 삶의 고비 고비, 힘든 인생살이를 떠올렸다. 그 승화된 울먹임이 아리랑이다. 문경시는 새재에서 생성된 아라리가 한양으로 올라가 근대아리랑으로 탈화된 역사를 2013년 광화문 광장에서 재현했다. 시인은 "아리랑의 성지 문경새재/ 경복궁 중수 때 베인 문경새재 물박달나무가/ 문경의 아라리가 아리랑이”(‘서울 간 문경새재아리랑’) 된 연원을 밝히고 있다. 또한 시인은 "마을 뒷산 마루금이/ 초가집 반달 지붕이// 조령천 물소리가/ 문경새재 열두 고개가// 어울려/ 가락이 되”었다며 "모두 다/ 저 고개 넘어/ 꿈을 찾는/ 희망가”로 아리랑의 의미를 새기고 있다. 골골마다 등을 밝힌 문경의 고갯길은 인재를 낳아 키우고 구곡원림을 조성해 학문과 문화를 일구는 젖줄이 되었다. 문경의 구곡원림은 선유구곡을 비롯해 석문구곡, 화지구곡, 쌍룡구곡 등 이름만 들어도 문향이 느껴지고 가슴이 서늘해지는 명소들이다. 최근에는 관산구곡이 추가로 밝혀졌고 문화인들이 중심이 되어 아름다운 영강에 구곡을 새롭게 설정했다. 구곡원림의 의미가 현대인들에겐 많이 약화되었다 해도 그 미래적 가치가 적지 않다는 점에서 문경 문화인들의 이러한 구곡원림 보존 및 조성 활동은 소중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신선이 노닌다”는 가은의 선유구곡은 도암 이재(1678~1746), 손재 남한조(1744~1809) 선생이 학문을 닦았던 곳이다. 경관이 수려해 피서지로도 인기가 높다. 시인은 신선이 노닌다는 선유구곡에 와서 계곡물에 떠내려가는 낙엽을 응시한다. "연초록 봄날의 희망/ 푸르렀던 여름날의 열정이/ 물살에 흘러간다// 세상의 아픈 것들/ 여기 선유 맑은 물에 띄워 보내리”(「선유구곡 낙엽」) 인생에 대한 사유가 계곡의 맑은 물 만큼이나 명징하게 느껴진다. 선유구곡의 제4곡인 세심대(洗心臺)에서는 "노을처럼 타는 단풍/마지막은 모두 붉다”(‘세심대’)는 명구를 뽑았고, 석문정에서는 "맑은 물 반짝반짝/ 물고기 은빛 비늘 춤추듯 흐”르는 석문구곡의 정경에 취하게 한다. 문경엔 유서 깊은 사찰이 많다. 삼국유사 <사불산조>에 소개 된 대승사 사불암의 역사는 이를 잘 말해준다. 오늘의 현대 불교는 청담, 성철의 봉암사결사에서 시작되었으니 문경의 불교문화는 그 뿌리가 깊고 위상도 높다. "옹재기를 가지고 온 사람은 옹재기만큼/ 독을 가지고 온 사람은 독만큼/ 딱 그만큼만 받는다/ 비움이 크면 채움도 크고/ 기울어지지 않게 반듯이 놓으면/ 그릇만큼 빗물이 고인다”(‘홍하문(紅霞門)을 들어가며’) 김룡사엔 ‘일주문’이 아닌 ‘홍하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다. "붉은 노을은 푸른 바다를 꿰뚫는다(紅霞穿碧海)”에서 딴 이름인데, 용맹 정진해 얻는 깨달음을 의미한다. 시인은 홍하문에 들며 "빈 그릇이라야 깨달음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는다. 가은 봉암사 경내를 지나 조금 올라가면 금강산 만폭동보다 깨끗하고 아름답다는 백운대가 나온다. 큰 바위 면에는 마애보살상이 양각돼 있다. "너럭바위 목탁 두드리며/ 은은히 불경을 외”며 "오늘도 푸른 솔향 속에/ 세상을 씻고 있다”(‘봉암사 마애보살상’) 이곳엔 최치원이 썼다는 ‘白雲臺’, ‘夜遊岩’ 글씨가 바위에 새겨져 전해오는데, 시인은 "세상살이 소태맛이거든” "계곡에 흐르는 물소리 거문고 가락 되고/ 쏟아지는 폭포는 풍악 소리 되”는 "양산동천 야유암으로 오”(‘양산동천 야유암’)라고 한다. "밤에 노닐기 좋은 바위”란 뜻의 야유암이니 달밤에 그곳에 들면 신선이 따로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문경은 도자기, 서민들의 그릇을 구워낸 민요(民窯)의 고장이다. 그런 저력으로 막사발 ‘이도다완’을 재현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무엇보다 9대 째 이어지는 조선백자 가문은 도자기 고장으로서의 자부심을 갖게 한다. 천년을 이어 온 꺼지지 않는 불 흙에 영(靈)을 넣고 혼(魂)을 사른다 망댕이가마 살창구멍 속에 정점을 향해 유혹의 불길이 일고 도수리구멍 불꽃이 수많은 나비처럼 날 때 더 붉을 수 없어 하얗게 날을 세우면 천기를 받고 넋이 스며 흙은 생명을 얻는다 무심 속눈썹 내리깔고 다소곳이 앉은 고졸함 조선여인의 동그란 어깨 위에 소박한 미풍이 인다 이윽고 흰옷 입은 혼령이 훠얼 훨 춤을 춘다 ‘백자’ 전문 「백자」는 소박한 흙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도자 예술을 시적으로 형상화하고 있다. 4연이 치밀한 구성을 보여주는데, 구체적이고 적확한 묘사로 선명한 이미지를 얻고 있다. 특히 "도수리구멍 불꽃이 수많은 나비처럼 날 때/ 더 붉을 수 없어 하얗게 날을 세우면/ 천기를 받고 넋이 스며/ 흙은 생명을 얻는다”는 구절은 마치 신의 손놀림을 보는 듯 수사가 경이롭다. 또 "무심, 속눈썹 내리깔고/ 다소곳이 앉은 고졸함/ 조선여인의 동그란 어깨 위에/ 소박한 미풍이 인다”며 구워낸 백자를 조선 여인의 이미지로 그려내고 있는데, "소박한 미풍이 인다”에서 정서가 고조된다. "이윽고 흰옷 입은 혼령이/ 훠얼 훨 춤을 춘다”는 마지막 구절은 마침내 탄생한 백자의 영원한 생명력을 동적으로 묘사한 이 시의 백미가 아닐 수 없다. 이도다완으로 불리는 조선의 막사발 정호다완은 문경 찻사발의 정점에 놓이는 도자기이다. 투박함에 고고한 자연미가 매력적이다. "아기 볼 비파 색에/ 비껴 스친 손자국// 우물진 깊은 바닥/ 굽에 내린 아침이슬// 매화꽃/ 점점이 피워/ 천년 세월/ 빛나네”(‘정호다완’) 시인은 정호다완의 아름다움을 ‘아기 볼’, ‘손자국’, ‘매화꽃’ 등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특히 다완의 살결을 ’아기 볼‘에 비유한 것은 정호다완의 도자 미학을 한 단계에 높이고 있다. 1980년대 초까지만 해도 문경은 대표적인 탄광지대였다. "뒷골목에 강아지가 만 원짜리를 물고 다”(‘가은역’)닐 정도로 돈이 끓던 곳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석탄박물관에서나 그 자취를 볼 수 있을 정도다. "기적소리 멈춘 녹슨 철길 위에/ 코스모스가 다시 손짓해도/ 역사의 깨진 유리창 넘어 찾아온 바람이/ 막장의 죽음을 실은 누렇게 바랜 신문지 한 조각을/ 눕혔다 일으켰다 할 뿐 자물쇠 잠긴 대합실에는/ 오후의 적막이 낮잠을 자고 있”(‘가은역’)는 모습이 오늘의 탄광지대 풍경이다. 시인은 진폐증을 앓는 남자의 이미지를 통해 화석화되는 또 다른 세계를 상상한다. "가은선 폐선로 위에/ 한 남자가 멍하니 앉아있다/ 힘겹게 숨 쉬는 그의 폐에는/ 삼억 년 전 고생대 석탄기 양치류가 자라고/ 삼엽충이 바스락거리며 기어 다니고 있다/ 일억 오천만 년 전 중생대 쥐라기 공룡이 밟고 지나고/ 익룡이 날개를 퍼덕이다 부리로 쪼면 각혈을 한다/ 고통은 뱀처럼 꿈틀댄다”(‘화석(化石)’)는 진술에서, 폐가 점점 굳어가는 이 폐질환은 지옥 같은 탄광 산업이 남긴 아픔을 상징한다. 문경은 특산물의 명성이 높다. 그 대표적인 것이 오미자와 사과다. 오미자는 전국 생산량의 40% 이상을 생산, 유통한다. 매년 9월이면 축제가 열리는데, "찬란한 빛 머금은/ 영롱한 태양이슬 빨간 사랑의 묘약/ 백두대간 중심 붉게 물들이면/ 사람들은 블랙홀에 빨려들 듯/ 오미(五味)에 빠진다/ 붉은색 마술에 걸린다”(‘문경오미자’) 시인의 표현대로 "붉은 색 마술”에 "천주산 높이 새들 날고/ 금천에 물고기 흥겨워 뛴다.” 다섯 가지 맛의 오묘함만큼이나 문경에 매력을 더하는 특산물이다. 시월의 과수원에는 함박웃음, 터질 듯한 가슴들이 붉은 하트 하나씩 품고 가지마다 ‘문경사과2’ 위 작품은 맛이 일품인 문경사과를 시각화한 작품이다. 시인은 "이 땅에 어울려 사는 사람들의/ 수많은 그리움과 설렘과 소망이/ 숱한 시련의 날들을 이겨내고/ 저리도 붉은 사랑을 주렁주렁 매달았”(‘문경사과2’)다고 노래한다. "문경사과 빨갛게 익으면/ 집 나온 관광객들 감홍의 달콤함에/ 빨간 양광, 진한 향기 부사의 매혹에/ 3번 국도로, 중부내륙고속도로/ 달리고 달려”(「문경사과 빨갛게 익으면」)온다는 진술도 과장이 아니다. 특히 문경 감홍사과의 맛은 한번 맛본 사람은 반드시 다시 찾을 정도로 그 맛이 기가 막히다. "시월 초가을 미풍에 눈부신 은혜로움/ 반야용선 다다른 곳, 천상인 듯 황홀하고/ 뭇 생명 노래 부르는 축복의 땅/ 월방산에 가보세요”(‘월방산에 가보세요’) "청대 권상일 선생께서 장 보러 오신 곳/ 위정척사(衛正斥邪)의 영남만인소 집결지/ 문경에서 처음 만세운동이 시도된 곳/ 삼천 명의 조합원을 둔 산양금융조합이 있던 곳/ 전국에서 알아주는 큰 우시장이 서던 곳/ 전국 장사씨름대회가 열렸던 곳”(‘산양장’) 이렇듯 시인의 문경 예찬은 끝이 없다. 작품으로 다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눈길 아니 주는 곳이 없고 마음 가 닿지 않는 것이 없을 정도다. 어느 한 편도 가볍게 넘길 작품이 없을 정도로 시인의 사랑이 배어 있고 혼이 담겨 있다. 그래서 시인은 "내일이면 늦어요/ 나비들 폴폴, 벌들이 웅웅대는/ 천상의 세계// 꽃 지기 전에/ 얼렁 가보”(‘월방산에 가보세요’)라고 나들이를 청한다. "나와 봐요, 어서요/ 벚꽃이 지기 전에// 나와 봐요, 빨리요/ 이 봄이 가기 전에”(‘나와 봐요, 어서요’) 얼마나 문경의 아름다운 순간을 놓치고 싶지 않았으면 이토록 간절한 독촉일까. 그렇다. 계절의, 자연의 아름다움이 한 순간이듯 우리네 인생도 다르지 않다. 그러니 시인의 이 간절한 호소는 ‘인생의 이 순간’을 ‘문경이라는 아름다운 공간’에서 마음껏 누리라는 의미로 확장된다. 방안에만 있지 말고 밖으로 나와 대자연과 어우러지라는 시적 화술이다. 세상의 중심은 나, 우주의 중심 문경! 지금까지 이만유 시인의 문경을 노래한 첫 시집 ‘문희(聞喜)의 노래’를 감상해 보았다. 한 두 편도 아닌 백여 편에 이르는 방대한 시편들을 통해 시인의 뿌리 깊은 시심과 문경에 대한 뜨거운 사랑을 확인할 수 있었다. 어지간한 감성으로는 우려내기 어려운 소재들이 시인의 붓 끝에 마구 춤을 추며 다양한 빛깔과 향기로 꽃을 피우고 또 스러졌다. 시집에서 보여주는 이만유 시인의 시적 특징을 몇 가지로 요약해 보면, 첫째 시인의 시심이 남달리 뜨겁다는 점이다. 시심은 불씨와 같아 뜨겁지 않으면 사물에 대한 관심과 애정이 깊어질 수 없다. 시에 감탄사나 "~이여”와 같은 영탄조가 자주 나타나는 것도 아마 이 때문일 것이다. 둘째는 남다른 정신문화의식을 들 수 있다. 이 또한 뜨거운 시심에서 분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그것이 문화로 모아진다는 점에 의미가 크다. 구곡원림에 관심을 갖고 문경아리랑의 저변 확대에 애를 쓰는 것 또한 이러한 의식의 표출이라 할 수 있다. 지역문화콘텐츠 개발에 관심을 늦추지 않는 자세도 이와 연결된다 할 것이다. 셋째는 틀에 갇히지 않는 유연한 사고와 자세를 견지하고 있음이다. 이는 자유시를 쓰면서 우리 민족의 정형시인 시조를 창작하고 있음에서 그 일면을 읽을 수 있다. 이 또한 관습화된 고정된 틀을 거부하고 경계를 넘나드는, 마침내 경계에서 꽃을 피우고자 하는 자유 의식의 발로라 할 것이다. 지금은 지방화시대, 글로컬리즘(Glocalism)의 시대다. ‘지역 중심의 세계화’가 중요한 시대가 되었다. 지역 문인들의 문학 활동이 중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지역의 특수한 고유성에 객관적 보편성을 더할 때 진정한 의미의 명작이 탄생할 수 있다는 이야기다. 그런 점에서 이만유 시인의 지역 문화운동에 기반을 둔 문경을 소재로 한 다양한 창작 활동은 예사롭지 않은 족적으로 기록될 것이다. 거듭 시집 출간을 축하드리며, 건필을 기원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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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평생을 춤과 함께 산 타고난 춤꾼, 강선영"도리깨질을 아십니까. 긴 자루를 뒤로 돌려 일단 멈췄다가 채에 힘을 주어 마음껏 내리쳐야 합니다. 처음 배울 적엔 건들거리는 도리깨 채에 자기 뒤통수를 얻어맞지만 익숙해지고 나면 그렇게 재미있고 힘이 날 수가 없어요.” 중요무형문화재 제92호 태평무 기능 보유자(1988년 12월 지정)이며 1990년 2월에는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 회장으로 선출된 강선영(姜善泳ㆍ67) 씨는 충남 천안군 수신면 한선 이씨 가문으로 시집 가 견뎌 냈던 시집살이 얘기부터 털어놓는다.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 장님 3년의 고춧가루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는 아니었지만, 엄하고 조신해야 했던 3~4년의 기간이 평생 몸가짐을 흐트리지 않게 지켜 주었다고 한다. 거창해 보이는 예총회장 자리도 잠시 맡아 있는 행정직일 뿐 그는 역시 뛰어난 춤꾼이었다."왕십리 당굿(경기 무악)에서 유래한 태평무 장단은 진쇠 가락으로 10박에서 36박자까지 들어갑니다. 춤을 추다 중간에서 한 박자만 삐끗해도 다시 따라잡기가 힘들어요. 그래서 태평무는 음악을 제대로 알아야 추고 생음악을 훨씬 선호하게 됩니다.”이럴 때마다 강씨는 ‘좋았던 스승’ 한성준(韓成俊) 선생 생각이 간절하다고 했다. 승무, 살풀이, 태평무, 학춤(신선무), 한량무, 장군춤 등 온갖 전통 민속춤에 통달했던 한씨(충남 홍성 출신)는 당대 최고 명고수로 한 시절 민속악계를 주름잡았던 인물이다.그 중에서도 태평무는 한씨의 창작무로 생전에 가장 아꼈던 춤이다. 옛 왕조 시절 왕비가 추었을 것으로 생각하며 만들어 낸 춤이 바로 태평무이다. 요염하면서도 우아하고 풀고 맺음이 분명하여 보는 이의 심사에 따라 감응의 폭은 다양해진다. 조선조 궁중 의상(부분적 변형 시도)으로 때로는 근엄하기까지 하여 태평무에 맛들여 놓으면 딴 춤은 싱겁게 여겨진다는 강씨의 말이다. 경기도 안성군 양성면 명목리가 고향인 강씨는 전통 예술과는 무관한 가문(진주 강씨)에서 태어났다(1925년 3월 30일생). 관가 벼슬을 하던 조부(敬秀)는 당대 한성준, 이동백(李東佰), 정정렬(丁貞烈) 명인들과 사랑채에 어울려 음풍농월하던 사이였다고. 다만 작은아버지(炳華)가 토월회 등 연극 단체를 조직, 전국을 유랑 생활하다 할아버지한테 매 맞고 아버지(炳學)는 계집애(강씨)를 신식 교육시킨다고 볼기까지 맞았다고 한다.이런 가문에서 자란 강씨가 춤을 추겠다고 나서니 집안은 발칵 뒤집혔다. 결국 진노한 할아버지가 모녀를 내쫓아 버려 오히려 ‘춤꾼 인생’은 자유롭게 되었다고 회고한다."소학교 적 선생님의 말씀 한마디가 평생 진로를 결정해 버렸습니다. 학교에서 꾸민 ‘구식 어머니, 신식 어머니’ 연극에 출연하며 노래는 한 달 연습해도 안 되는데, 무용은 보기만해도 척척이었어요.”지금 생각해도 어디서 ‘끼’를 받았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구경 나온 어머니께 "선영이는 무용을 가르치는 게 좋겠어요.”라는 선생님의 한마디가 오늘날의 예총 회장까지 만들어 놓았다. 평택으로 쫓겨나온 어머니는 전세방에 하숙생을 치며 안성 고등보통학교에 다니던 강씨를 서울의 한성준 씨한테 보내 전통춤을 가르쳤다. 이 때가 열 세 살이었다.서울 경운동에 있던 음악무용연구소에서 이강선(선배), 장홍심(張紅心), 한영숙(韓英淑, 한성준 씨 손녀, 승무 인간문화재, 1989년 작고) 씨와 함께 배웠다. 특히 이강선 씨의 춤은 선녀인지 나비인지 구분 못 할 정도였다고 지금까지도 찬탄한다.20세까지 7년간을 배우면서 15세 때 이미 일본 공연에 나섰고 서울 부민 관(현 서울시 의사당)에서 첫무대까지 가졌다. 17세엔 동양극장에서 공연된 ‘삼국지’ 안무를 처음 맡아 주변의 시샘도 받아야 했다고.신불출(申不出) 씨 등과 전국 공연을 다니며 8도는 물론, 일본ㆍ만주 지역 까지 좁다 하고 뛰어다녔다. 강씨의 이러한 역마살은 일제 정신대를 피해 천안 형부 집에 피신 갔다 시집 가면서 잠재워진다. 절구에 겉보리 찧으면서도 춤을 잊지 못해 몸부림쳐야 했고 물두멍에 물을 져 나르면서도 어찌하면 춤을 다시 추느냐가 일구월심이었다고 한다."6ㆍ25를 대전ㆍ부산 등지에서 겪다가 9ㆍ28 수복 후 서울에 와 무조건 무용 학원을 차렸습니다. 시어머니의 졸도, 남편의 구타 등 고비도 많았지만 ‘옳다는 일’에의 ‘강씨 고집’도 막을 순 없었지요.”김보애(金寶愛), 이현자(李賢子) 씨가 무용을 배우기 시작한 게 이 무렵. 지금까지 ‘강선영 무용연구소’를 통해 배출된 후학들은 많지만 그의 제자들에 대한 선별안은 매우 까다롭다. 결혼 후 춤을 작파해 버릴 사람한테는 아예 가르치지를 않는다. 그래서 그의 제자들인 이현자ㆍ이명자(李明子)ㆍ김근희(金槿姬) 씨 등 이수자, 채상묵(蔡相默)ㆍ심가영(沈佳英)ㆍ가희(佳姬) 형제 등의 수제자, 양성옥ㆍ김나영 씨 등 장학 이수자와 일반 이수자인 고선자ㆍ최윤정ㆍ김경희ㆍ이춘자 씨 등의 각오는 대단하다. 1960년 4월 프랑스 등 유럽 일주 공연 이래 강선영 무용단이 가진 해외 공연은 수십 회가 넘는다. 아시아 지역은 물론 북ㆍ남미, 중동, 동구권, 아프리카 지역까지 그의 춤 구경을 못 한 나라가 드물 정도. 일본 오사카(1963년), 도쿄(1966년) 등에 무용 연구소 분교를 개설하며 순수 민간 외교 차원에서 기여한 공로도 적지 않다. 강씨의 이런 행적은 서울시문화상(1965년), 제12회 아시아무용제 작품상(초혼, 1965년), 국민훈장 목련장(1973년), 대한민국문화예술상 연예부문(1976년) 수상으로 요약된다."처녀 적 별명이 ‘모르쇠’였습니다. 남의 얘길 묻거나 시비 걸릴 얘기에 대해선 무조건 모른다고 대답한대서 붙여진 이름이지요. 예술에 대한 이해가 다양한 만큼 말도 많은 곳이 예술계입니다.”무용 연구생 시절 어느 치대생과의 손 한 번 잡아 보지 못한 애틋한 사랑 이야기 등은 지금도 아쉽다면서 홍조를 띤다. 까치발로 딛는 태평무 춤사위가 마치 스페인 전통 무용과도 흡사해 그들도 열광하더라는 강회장은 "아직도 국내에선 태평무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며 아쉬워했다.• 강선영 태평무 계보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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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식 호흡으로 뽑아 내는 신비의 공명(共鳴), 이생강아직도 ‘생강 피리’를 못 잊어 하며 만지작거리는 사람들이 있다. 6ㆍ25를 전후해 시골 저잣거리나 고향 역 앞 행상한테 산 피리지만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그 소리와 품질은 흉내낼 수 없다는 찬사뿐이다. 그 당시 피리 파는 중년 남자 옆에서 벙거지를 눌러쓴 채 피리를 구성지게 불어 대는 ‘피리 부는 소년’이 있었다. 의심 많은 사람들은 10세 안팎의 소년이 부는 피리 소리를 듣고 나서야 꼬깃꼬깃한 쌈짓돈을 내놨다. 그때 피리 불던 소년이 바로 오늘날의 젓대(대금) 명인 이생강(李生剛ㆍ54, 1937년 3월 16일생) 씨다. 뒷짐지고 먼산 바라보던 중년 남자는 그의 아버지(壽德)로 역시 피리만 잡으면 흐드러지게 불었다고 한다."영락없는 비렁뱅이 행색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도 부끄러운 생각이 전혀 없습니다. 재일 교포의 아들로 한국말이 서투르다 하여 괜히 얻어맞는 것보다는 나았고 피리 자루 들쳐 메고 전국 산천 곳곳을 누비던 그 시절이 너무 좋았기 때문입니다.”신라 임금 신문왕(681~691) 때의 ‘만파식적’에 뿌리를 대고 있는 우리의 민속 관악기 대금. 예로부터 ‘대금’보다 ‘젓대’로 널리 불리고 있다.이 시대 최고의 젓대 주자 이생강 명인은 피리 행상으로부터 국악계에 발을 디뎠다. 해방 직후 우리말이 서투르다 하여 동네 애들한테 뭇매를 맞은 건 그가 동경의 아사쿠사(淺草) 출생이었기 때문이다. 경남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출생의 아버지는 3대 독자로 13세 때 일본으로 건너가 그곳에서 교포 딸인 어머니 김위선(金渭先) 씨를 만나 이씨를 낳았다. 생강씨 조부(경주 이씨)는 사헌부 감찰을 지냈으며 선대에는 신의 점지를 받아 뭇사람의 맺힌 한도 풀어 주었다고 한다.그 피가 섞인 이씨의 젓대에 대한 천부적 감각은 5세 때인 1942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아사쿠사 옆집 어른이 척팔(尺八, 사쿠하치ㆍ일본식 퉁소)을 부는 것을 얼른 빼앗아 손바닥으로 흉내내면서부터 비롯된다. 아홉 살에 해방을 맞은 이씨는 아버지를 따라 귀국하여 부산 보수동에 정착했다. 수많은 우여곡절 끝에 알거지가 된 이씨 부자는 ‘생강표’ 피리를 만들어 전국을 유랑하게 된다. 이씨의 파란 많은 ‘젓대 인생’은 참으로 우연찮게 맺어졌다. 1952년 여름, 전주 풍남동 전주역 앞에서 당대 젓대 명인 한주환(韓周煥, 1904~1963) 씨를 만나면서 본격 학습에 들어간다. 한명인은 피리를 팔며 멋지게 불어제끼는 이씨 부자의 가락에 반해 발길을 멈춰 섰던 것이다. 한명인은 전남 화순 능주 태생으로 젓대 산조의 초기 명인이었던 박종기(朴鐘基, 1879~1939)의 맥을 잇고 있는 대가였다. 박명인은 전남 진도인으로 무악 피리의 귀재였다. 진도 씻김굿 기능 보유자(인간문화재 72호)인 박병천(朴秉千)의 종조부가 된다. 이러한 연유로 ‘이생강제 젓대’는 박종기―한주환의 정통 맥을 잇고 있으며 이씨의 뒤는 아들 광훈(廣訓, 25, 중앙대 국악과 2년) 씨가 군말 없이 승계하고 있다.젓대는 예로부터 오랫동안 쓸 수 있는 황죽(黃竹)을 최고로 쳐 왔으나 최근에는 쌍골죽(雙骨竹)을 주로 사용하는 65cm 안팎의 죽관악기다. 대통좌상의 취공과 밑의 청공에 갈대 속에 있는 엷은 막을 붙여 진동으로 소리를 낸다. 주법으로는 저취(底吹, 부드러움), 평취(平吹, 곧고 굳음), 역취(力吹, 가장 높은음)의 세 가지가 있으며 산조는 무속적인 살풀이춤 반주서 사용돼 온 시나위의 즉흥 합주곡 형식에 속한다.젓대 산조로는 박종기(한주환ㆍ이생강)제와 강백천(姜白川, 1898~1982)제, 한범수(韓範洙, 1911~1980)제로 대별된다. 특히 이생강은 진양조ㆍ중모리ㆍ중중모리ㆍ자진모리의 4악장으로 구성되며, 사용되는 조격은 우(羽)ㆍ평(平)ㆍ계면조(界面調)가 고루 섞여 시나위 더늠 젓대산조에 비해 밝은 선율이 많다. 이씨의 젓대는 59년 경기 무악의 달인 지영희(池瑛熙, 피리 명인, 작고) 씨를 만나 피리 솜씨까지 붙어 금상첨화가 됐다. 한때는 임춘앵 여성 국극단 악사(1958~1959년)로 오진석(피리), 방태진(새납) 씨와 함께 전국 순회 공연을 다니며 약관 명인으로 날렸다.이씨는 5세 때부터 배운 젓대 솜씨여서 나이는 어렸지만 나이든 제자들을 많이 가르쳤다. 60년 5월 처음으로 유럽 순회 공연을 나가 파리 공연장에서는 ‘수십만 마리의 벌들이 꿀 따 오는 소리’라는 등의 극찬을 받기도 했다. 당시 공연에는 강선영(姜善泳), 임승남, 김문숙(무용가 조택원 씨 부인) 씨 등이 약관의 이씨와 함께 갔다.이씨는 20년 전부터 종로 쪽을 떠나지 않으며 전통국악연구소(서울 종로구 와룡동 태일빌딩 402호)에서 후학들을 가르치고 있다. 연구생만도 50명이 넘으며 전국 유명 상을 끊임없이 수상해 오고 있다.김경애(金京愛, 대구, 김경애 국악원장, 1986년 전주대사습 기악부 장원, 1989년 신라문화제 대통령상), 박환영(朴桓永, 국립국악원 젓대 주자, 1987년 동아국악콩쿠르 대상), 이용구(李鎔九, 1990년 전주대사습 일반부 장원) 씨와 김종선(金鐘善, 워커힐 국악 연주), 이형표(李炯杓, 방송 출연), 김현임(金賢任, 1989년 전주대사습 학생부 장원), 김현재(金玄載, 국악예고 3년) 양 등 손꼽을 만한 전수자들이 수두룩하다.아들 광훈 씨와 함께 조카 병금(炳金, 국립국악원) 씨도 젓대를 불어 든든하며 형 정화(正華) 씨는 현재까지도 일품 젓대를 만들어 내고 있다. 동생 성진(成鎭, 리틀앤젤스 농악부) 씨는 통영오광대놀이의 장재봉(張在鳳, 작고) 씨한테 습득한 타악 장단으로 꽹과리, 장구, 북 등 타악기에는 무불통지다. ‘토마스 박’으로 유명하며 세계 순회 공연도 많이 다녔다.생강 씨는 중앙대와 국악예고에 나가 연구생을 가르치며 이씨를 거쳐간 제자들만도 4백여 명이 넘는다. 한주환제는 단전에서 복식 호흡으로 뽑아내는 특이한 주법이 ‘짐’ 넣는 방법부터 타제와는 확연히 구분된다.이씨는 호주를 제외하고 4대주 70여 나라를 순회하며 한국의 명금 젓대를 불었다. 종래의 18분(박종기), 32분(한주환) 젓대 연주를 이씨가 90분으로 완성시켰고 레코드까지 내놓았다. 국위 선양 공로로 1973년에는 국민훈장을 받는 등 상패와 상장이 쌓여 있지만 이명인의 바람은 국악계의 올바른 평가와 예우가 바로잡히는 것이라고 했다. 아들 광훈 씨도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젓대를 학습시켜 ‘3대 명인 가문’을 이뤄 놓겠다고 다짐을 보였다."인연은 기이하다는 생각입니다. 제가 박종기 선생제를 잇고 있는데 그 어른의 증손자인 환영 군이 저한테 학습한 뒤 다시 맥을 이어 주고 있습니다.”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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