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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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 50년"콱 뒈져라. 먹고 싶어 죽겠다. 에라 죽으면 편하지. 너하고는 죽은 인연이야. 너 죽어볼래. 죽어도 못다하는 사랑아.서양 사람들은 위의 모든 죽음의 말들에 죽음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구체적인 죽음의 형태를 표현한다. 그런데 우리는 죽음이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 죽음의 의미를 갖는 행동 관념을 다 운용하고 있다. 다시 말해 죽음을 죽음 이상도 이하도 아닌 죽음 그 자체로서 생(生)의 반대되는 현상으로 삶으로부터 이잘화시켜 놓는다. 즉 죽음은 삶의 적이며, 공포이며, 부정이며, 파괴인 것이다. 그러나 죽음은 삶의 일부분이며 문지방 하나 사이를 왔다갔다하는 늘 함께하는 친구이며 언제나 삶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는 계기이며 매일 죽어가는 것을 인식하는 죽음이며 생노병사(生老病死) 중의 하나로서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듯이 자연순회의 그것처럼 밥 먹듯이 죽음과도 같이 사는 것이다. 우리의 전통적 생사(生死)의 관념은 생(生)과 사(死)의 유기적 관계 속에 인식되어지는 것이다.... 통ㆍ피ㆍ살은 '통일을 위한 피의 살풀이'의 줄인 말이다. 귀국 후 첫 작품으로 '통ㆍ막ㆍ살'을 했던 것이우리 민족의 간절한 염원인 통일에 대한 한 민족인으로서의 몸부림이었다면, 피의 살풀이는 민족 본능에 충동하여 통일을 막으려는 외세와 공포의 핵 공해에 대처하려는 투쟁의 일환으로 죽어있는 통일에 민주의 '곡(哭)'을 바치는 행위이다." (본문 118~119쪽, '통ㆍ피ㆍ살(TongㆍPiㆍSal) 때 : 1987년 8월 3일, 곳 : 바탕골 소극장' 중에서) 이 책에는 1959년부터 2007년까지 전위예술가 무세중의 평생 예술작업이 담겨있다.무세중은 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이며 이처럼 한 전위예술가의 50년동안의 전위예술행위가 한 권의 책으로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나오기는 국내에서 처음이다.무세중의 전위예술은 저자의 20대 시절부터 시대에 대한 회의와 대안을 향한 끊임없는 사고의 결과들이다. 따라서 ‘충돌50년’이라는 의미는 저자가 한평생을 바쳐 현실과 역사와 끊임없이 대면하고 저항하고 대안을 찾아 부단히 행위를 해 온 고독하고 힘겨운 예술작업의 과정들을 함축하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한국전위예술을 실제적인 공연과 이를 뒷받침하는 저자의 예술적 자세, 공연의 목적과 행위의 이론적 근거들이 일일이 제시되고 있어 전위예술에 대한 실제와 이론을 한 눈에 볼 수 있도록 했다. 또 공연을 한 연도와 날짜 출연자와 더불어 사진들을 함께 수록해 명실공히 한국 전위예술 초기부터 현재까지의 노예술가의 평생예술업적을 기록하고 있다.특히 전위예술은 서구적 예술행위로 인식되어 왔으나 무세중은 이 책에서 전위예술의 전위성이야말로 우리민족 특유의 민족성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무세중은 이 근거로 우리의 탈춤이나 고대 및 중근대사에서 민중들의 행동방식이나 놀이 등 그리고 민중들이 역사속에서 어떤 방식으로 자신들의 공동체를 유지하고 지켜나가는지를 고찰함으로써 한국 전위예술술의 이론적 근거들을 제시하고 있다.무세중은 독일 체류 기간 동안인 1977년부터 1989년 동안의 전위예술 행위를 통해 한국 전위예술의 실험을 무수히 시도하고 유럽에 한국의 탈춤이 갖는 전위성과 한국전통예술과 서구적 행위예술의 접목을 무수히 시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저자의 전위예술의 기본 맥은 전통과 현대이다. 즉 한국의 전통적 미학이 어떻게 하면 세계적 미학과 결합하여 보편적 미학의 세계로 다가가느냐가 저자가 탐색하고 있는 전위예술의 본질이다.이 책에서 저자가 강조하는 것은 민족성이다. 즉 한국인이라는 하나의 민족이 갖는 특징적 요소들이 무세중 전위예술의 근거들이 되며, 저자는 민족성을 민중들의 삶에서 찾고 있다. 민중들은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자신들의 공동체를 지켜나가기 위해 낙관적 자세와 역경이 닥칠수록 뭉치는 끈질긴 생명력에서 찾고 있다. 이것은 한국사의 고대 중근대의 민중들의 삶의 방식과 형태들 그리고 면면히 이어져 오고 있는 민중의 생활 속 예술행위들에서 찾고 있다.'무세중의 전위예술 충돌50년'은 전위예술이라는 이름만 난무하는 한국의 전위예술에 이론적 근거와 한국적 전위예술의 무한한 가능성을 제시한 역사적인 전위예술서라고 할 수 있다. 무세중 (지은이) 무세중(巫世衆)의 본명은 김세중(金世中)이다. 상식 밖으로 ‘무(巫)’라는 성으로 바꾼 이유는 김(金)씨 문중의 자손이기 이전에 ‘하느님의 자손(天孫)’임을 알리기 위해서였다. 사람이 하늘과 땅을 연결하는 중간 역할을 해야 함을 깨닫고, 민족의 근원과 얼이 깃들어 있는 예술의 시원을 찾아 젊은 시절부터 전국 방방곡곡 8천 리를 걸어서 순례하며 연구하고, 깨달음을 작품 속에 진일보하여 승화시키려 했던 전위 예술가이자 굿 예술가이다. 중앙대 대학원에서 국문학과 연극학 석사를 마치고 독일, 일본, 미국, 캐나다 등지에서 활동해 왔으며 50년간 500여 편의 퍼포먼스를 벌였는데 주로 통일과 아리랑을 주제로 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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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 한국전쟁과 아리랑(中)전쟁과 같은 극단적 위기의 순간은 인간 본성의 밑바닥과 고귀함을 치열하게 발현하는 상황이다. 정치적으로는 갖가지 선언문과 격문으로 표출되지만, 민간 차원에서는 함성과 노래로 나타난다. 곧 35년 간의 압박에서 갑작스럽게 맞은 해방공간과 그 3년 후에 맞은 한국전쟁기가 그것이니, 시민들은 아리랑으로 그 격정을 표출하였다. 오랜 세월 불러오는 아리랑은 저항성과 대동성과 상생정신이 담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다. 한국전쟁 중인 1951년 뉴욕에서 발행한 한국 안내서 ‘THE KOREANS AND THEIR CULTURE’에는 아리랑을 "··· one of the most famous of all Korean songs"라고 표현하고 있다. 아리랑은 이미 한국을 상징하는 노래로 알고 있었다. 이는 다음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예술통신’ 1946년 7월 25일 자 ‘아리랑 곡이 미국에 대유행’에는 이런 내용이 있다. "근착(近着) 미국 신문의 보도에 의하면 목하 미국의 경음악계엔 난데없이 ‘아리랑’이라는 애틋한 동양정서의 신곡이 급작스럽게 유행하고 있는데, 거리나 사교실에서 이 노래의 다정다한한 멜로디는 모든 사람의 귀를 기울이게 하고 너도 나도 창화(唱和)하는 지경이라고 한다. 더욱이 미국에서 유명한 흑인재즈밴드 B.C.B의 뉴욕 연주엔 이 노래가 가장 인기를 차지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이 ‘아리랑’은 말할 것도 없이 우리의 ‘아리랑’이 틀림이 없는데 바다 건너 몇 만 리 미국 본토엔 그동안 조선 38선 이남에 주둔하였다가 제대 귀국한 병사들이 돌아와서 부르기 시작한 것이 오늘날 조미(朝美)문화 교류의 선봉을 차지하게 된 터이라 한다.” 이런 배경에서 한국전에 참전하는 미군들은 일부이지만 아리랑을 알고 오게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에 집입 하기 전 일본 오키나와(沖縄県)기지서 교육을 받는 과정에서도 아리랑 익히게 되었다. 일부 간부에게 한정된 과정이기는 하지만 포로 관리에서 중국군과 북한군을 구부하기 위해 아리랑을 부르게 하여 부르지 못하거나 서툴게 부르면 중국군으로 분류하기 위해서다. 또한 일반 병사들은 참전 중 통역 등 한국군에 의해 알게 되거나 위문공연 등의 기회를 통해 알게 된다. 한국전쟁기 미 제3사단 15 연대 정찰소대 통역병이었던 전 경안서점 주인 김시한 사장은 KBS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회고하였다. "미군들과 함께 생활하다 보니 서로 친해졌다. 언어소통도 어느 정도 해결되니 자연히 서로 대화가 쉬워졌다. 한 친구는 나에게 군에 오기 전 무얼 했느냐고 물어서 티쳐(Teacher)라고 했더니 무엇을 가르쳤냐고 물어서 '여러 가지를 가르쳤다, 특히 음악을 많이 가르쳤다'라고 했더니 한국노래를 배우고 싶다고 했다. 우리 애국가를 가르쳐 봤더니 어렵다고 해서 아리랑을 불렀더니 아주 흥미를 가지고 따라 부르더니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부르며 미군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아리랑만 부르면 흥겨워했다. 그리스 군인도 우리와 같이 근무한 일이 있었는데, 이들도 아리랑을 쉽게 배우고 흥겹게 불렀다." 이런 실상이 반영된 것이 영화 '전송가'(Battle Hymn)의 내용이다. 1957년 개봉된 이 영화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배우 록 허드슨이 주연하여 한국전쟁 당시 전쟁 고아의 아버지로 불리던 미 공군 조종사 딘 헤스(Dean E. Hess) 대령의 6.25 참전 실화를 다룬 것이다. 고아들이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인상 깊게 인식한 결과로 아리랑을 주제가로 한 것이다. 한국전쟁 중 아리랑 사연으로 더 구체적인 실례가 있다. 1951년 1월 12일자 ‘조선일보’의 기사 '아리랑은 좋은 것, 효과 백퍼센트이다. 아리랑을 전쟁기간 중 심리전의 일환으로 활용된 사례인데, 국군에게는 향수를 달래는 노래로, 인민군에게는 귀순을 유도하는 선무용으로 쓰였던 것이다. 전쟁 중에 활용 된 것이니 소리로 만들어진 총탄이나 마찬 가지이다. 그래서 기사에는 '음탄(音彈)'말이 나온다. 민족의 비극과 함께했던 아리랑의 슬픈 운명이 보인다. "중부전선 854고지 대적방송(對敵放送)의 음탄(音彈)은 아리랑. 우리나 님은요 날 그려 울고 전쟁판 요내들 임 그려 운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울며 넘네 "실황 대적방송으로 7169부대에 귀순병들만 하루 평균 40명이나 된다. 귀순병은 대개 40대가 많았다. 적병들은 "아리랑 타령에 마음이 뒤숭숭하다고 했다.” (사)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은 이 기사에 대해 "죽음을 목전에 둔 전쟁터에서 이런 가슴 시린 아리랑은 필시 적의 가슴을 향해 날아가는 총탄의 기능을 했음직하다”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은 북한 측에도 적용된 듯하다. 중국이 1953년 발행한 ‘항미원조 전쟁 군가집’에 실린 중국군 군가 중 '빨지산아리랑'이 있어 확인된다. 이 군가는 밀양아리랑 곡조에 이러한 가사로 되어있다. "백두산봉우리에 공화국깃발 날리고 제주도한라산에 유격대깃발 올렸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전쟁으로 지치고 아픈 마음을 달래 주는 한편에서는 무기가 된 것이니 아픈 아리랑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의 아픔을 새삼 절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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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한국전쟁과 아리랑(上)한국전쟁 3년 1개월 2일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위 38°선 전역, 소련의 지령과 중국의 지원으로 북한군이 전면 남침하였다. 약 5년간의 체제에서 두 개의 정부가 수립되었다. 냉전 속의 이 체제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후자는 수립이 되자마자 군사력을 확충하며 소련과는 ‘조소군사비밀협정’을, 중국공산당과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전쟁을 준비했다. 이에 따라 중국 공산군에 있던 조선인 2만5천명이 북한군에 인도됨으로서, 13만명이 전선에 배치되었다. 우월한 전세를 갖춘 북한은 통일을 내세워 선전포고(宣戰布告)도 없이 남침을 했다. 이렇게 전 38선상에 남침함으로서 촉발된 전쟁은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점령하였다. 이에 UN 결의에 따라 국제사회가 개입하게 되었고, 미7사단 주력부대가 인천상륙작전을 감행하여 성공함으로서 서울을 수복하고 이어 9일만에 평양을 점령하여 전세를 역전시켰다. 그러나 중공군의 참전으로 전세는 다시 교착상태에 머물게 되었다. 이 때부터 UN군 등에서 제한전쟁으로 휴전이 제기 되기에 이르렀다. 이 전쟁으로 한민족은 너무나 큰 손실을 보았다. 정신적 피해는 제처 두고라도 인적 물적 손실은 물론, 많은 이산가족 발생 같은 고통은 치유가 불가능할 정도였다. 이 때문에 분단은 더욱 고착화되기에 이르렀다. 우선 인적 손실은 어느 전쟁보다 컸는데, 국군은 140여만 명, 북한은 약 329만 명, 유엔군은 약 15만 명의 손실을 보았다. 결국 남북은 무려 520만 명의 희생을 낸 것이다. 전쟁 피해, 희생은 이뿐만이 아니다. UN 참전군들의 희생도 크다. 참전국은 미국 영국 캐나다 터키 호주 필리핀 태국 네덜란드 콜롬비아 그리스 뉴질랜드 에티오피아 벨기에 프랑스 남아공 룩셈부르크 16개국이 유엔군으로서 약 190만 명의 전투병을 파병했으며, 인도,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 이탈리아가 야전병원, 병원선 등의 의료지원을 통해 참전했다. 이들의 인명 희생도 막중했다. 또한 많은 포로들의 발생도 그 처리로 갈등을 겪었다. 한민족이 남북군과 중공군에 동족임에도 편입되었고, 16개국 UN군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포로 교환 문제는 휴전회담 기간 내내 난항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북한군 포로 중에는 강제로 징집되어 많은 투항병이 발생하였고, 한국군 포로가 재 강제 징집 되어 북한군이 된 경우도 있었다. 또한 중공군 포로 중에는 송환을 거부하는 자도 있었다. 이런 상황으로 UN '포로교환문제소위원회'와 '국제적십자조사위원회'는 곤경에 처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세 가지 문제로 급진전하게 되었다. 하나는 북한 지역에 전염병의 발발한 사실이고, 둘은 1952년 12월 유엔총회에서 120일간 설득하여 체코·폴란드·스웨덴·스위스 4개국으로 자유의사에 따라 선택하게 하자는 합의를 하였다. 마지막은 1953년 3월 소련의 스탈린의 사망이었다. 이런 경과로 휴전은 급진하였다. 드디어 1951년 7월 미국의 릿지웨이 유엔군 사령관과 북한 김일성과 평더화이 중공군사령관이 개성에서 회담이 시작되어, 군사분계선 설정, 세부사항 일괄타결, 전쟁포로 문제 합의와 협정 체결이 된 것이다. 2년 만인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협정을 맺어 전쟁은 중지되었다. 북한과 중공군 대(對) UN군 측의 미국이 대표하여 협정에 서명함으로서 휴전이 되었다. 3년 1개월 2일의 전쟁은 휴전 체제로 들어 간 것이다. 이로서 포로교환 등의 여진이 남았지만, UN군은 해체되어 참전 군인들은 각국으로 귀국하였다. 남북한은 전선에서 군인들과 무기를 철수하였다. 그리고 전쟁 복구에 들어갔다. 처참한 동족상잔 한국전쟁은 귀국 참전 군인들에 의해 전 세계에 전파되었다. 그 결과로 ‘한국은 전쟁의 나라’, ‘한국은 고아의 나라’, ‘한국은 아리랑의 나라’ 같은 인상비평적(印象批評的) 표현들이 회자되기에 이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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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인 숙원법안 '국악진흥법안' 국회통과국악인 숙원 법안 '국악진흥법안'이 국회통과 되었습니다. 본인이 제안하고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국회의원이 2020년 9월 2일에 발의한 ‘국악문화진흥법 제정안’ 노력과 2022년 9월28일 동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한국음악) 김세종 책임 교수 의견으로 개진한 '국악문화산업진흥법안' 및 '국악진흥법안'이 국회 공청회를 통해 계속 추진되어오다, 2023년 3월29일 오늘 오후 1시 국회 문화체육관광 위에서 '국악진흥법'으로 대안 통과 후, 93일 만에 모두의 염원이 하나 되는 '대한민국 국악진흥법'이 통과 되었습니다. 대한민국에 만들어진 첫 국악 관련 법안이며 이제 국악은 더욱 보존・계승 발전되는 계기로 당당한 세계 속의 한류 콘텐츠로 발전하는 단초를 마련하여 법적 지원 시스템 체계 마련을 통한 대중성 있는 콘텐츠 개발을 확대하고 전통예술 복원 및 재현 노력으로 현대와의 융합 변주를 하면서 더 차별화된 콘텐츠를 만들 수 있는 게기를 만든 것입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고 그 새로움은 전통의 뿌리에 있으며 그 뿌리에서 정체성과 문화적 차별화가 있다는 것을 다시금 확인하는 오늘입니다. 磨斧爲針(마부위침), 도끼를 갈아 바늘을 만드는 노력으로 함께한 '국악진흥법' 2004년 제17대 국회 발의 후, 20여년 노력이 헛되지 않게 노력한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의원님에게 많은 응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2004년 고흥길 국화의원 ‘전통문화진흥법안’을 발의 후, 2007년 강혜숙 국회의원, 2009년 김을동 국회의원, 2013년 강동원 국회의원, 2017년 김두관 의원에 이어 본인의 제안으로 다시 불을 지피면서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국회의원이 이뤄낸 성과는 우리 대한민국 국악 역사에 새로운 미래를 설계하는 큰 주춧돌로 대한민국 문화경쟁력을 확대하는 소통의 언어로 발전할 것을 믿습니다. 길고 먼 세월을 함께한 우리 모두의 바람으로 탄생한 '국악진흥법'을 위해 여러 현장에서 목소리를 함께하신 청학동 김봉곤 훈장과 김명곤 전 장관, 전국 한국국악협회 회원, 그리고 여러 목소리를 담아 함께한 국악인 여러분! 오늘의 '국악진흥법' 통과의 큰 성과는 국악의 여러 갈림길을 하나의 길로 모으는 힘으로 새로운 국악의 역사를 만들어 갈 거라 확신하며 세계가 열광하고 있는 K-한류의 마지막은 대한민국 국악으로 기억될 것입니다. 그동안 열과 성으로 20여 년간 법안 제정 노력을 해주신 모든 국회의원 여러분의 노고에 국악인 모두의 감사 말씀을 전하며 특히 많은 시간과 노력으로 마지막까지 노력해주신 더불어민주당 임오경 국회의원께 큰 고마움을 전합니다. 이제, '국악진흥법' 제정을 계기로 국악인 모두 잰걸음과 밭은걸음을 넘어 불걸음으로 여러 산재한 국악인들의 불통을 소통으로, 화합으로, 발전하는 국악의 미래를 보고 싶습니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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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에도 '동두천아리랑'이 있다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장 나는 교직 생활 중 12년을 왕십리 근처 세군데 학교에서 보냈다. 그리고 장학사로는 성동광진교육지원청에서 또 2년 근무했다. 그러한 인연이었을까.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게 되었다. 지난주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개최한 양주에 영주귀국하신 사할린 동포와 함께한 아리랑학교 및 위문공연에 이어 25일 개최된 제2회 동두천아리랑제 무대에 서게 되었다. 왕십리아리랑보존회(회장 이혜솔)의 초청으로 구한말 재야학자 매천 황현이 남긴 매천야록의 '아리랑을 사랑한 명성후'라는 부분을 재현하는 상황에서 고종황제 역활을 맡게 되었다. 난생 처음 곤룡포를 입고 임금님이 되어 황후와 함께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게 되었다. (오늘 서울 도성 밖 동쪽 십리에 유람을 나선 임금이 되어 명성황후와 함께 무대에서 백성들과 함께 아리랑을 불렀다. 잠시 가문의 영광을 누렸다.) 이러한 아리랑 인연은 올해 3월까지 사할린한국교육원장으로 재직하면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에서 기증한 공연용 한복들을 받아 사할린아리랑무용단에 전달해 드리면서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아리랑연합회 주관으로 매년 개최되고 있는 사할린아리랑제, 사할린 방문과 관련하여 사할린아리랑추진단 기미양 단장과의 인연도 있다. 이러한 인연으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요청으로 동두천아리랑제 무대에 섰다. 특히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레파토리 '사할린아리랑'을 가까이서 감상할 수 있었다. 오늘 발표되는 동두천아리랑은 동두천아리랑보존회가 8년 전부터 발굴하여 복원한 아리랑이다. 북한강 수계를 따라서 전래되고 있는 토속민요 '이담어러리'이다. 동두천아리랑보존회(회장 유은서)가 주관하는 동두천아리랑제는 시의 전폭적인 지원 하에 지역 다양한 쟝르의 국악인 단체와 타 지역 아리랑보존회의 공연들이 어우러져 성황리에 진행되었다. 농악대의 길놀이와 지신밟기로 시작한 무대는 동두천아리랑보존회와 함께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안성아리랑보존회 및 여러 단체의 다채로운 공연과 노동요 합창, 창작무용, 변검과 인형극, 가요 등이 잘 어우러져 시간가는 줄 몰랐다. 한수이북 경기지역 아리랑을 대표하는 아리랑축제로 발전 및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동두천아리랑제에서 발표한 동두천아리랑 사설에는 지역성과 역사성이 녹아있다. 주제가 확실한 축제였다고 본다. 또한 지역 공동체 간의 협력이 두드러진 '공동체의 노래'로 우뚝 서리라고 본다. 성황리에 축제를 마치고 동두천을 대변하는 대표음식 1호 부대찌개로 저녁식사 뒷풀이를 하면서 지난 1월에 사할린 에트노스 아동예술학교에 전달한 이담농악의 '태극상모' 이야기를 꺼냈다 동두천 공연 관계자 분들이 동두천 이담농악단 김경수 단장과 사할린한국교육원장이던 나와의 인연을 상기하였다. 스쳐간 인연 조차도 시간을 이리 저리 돌다가 언젠가 손을 잡는 느낌이 들었다. 돌아오는 길에 많은 생각이 지나갔다. 모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앞으로 아리랑축제에 참여하여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알리는 일에 기여했으면 한다. 그리고 이산의 노래! 사할린아리랑의 슬픈 혼백의 역할도 해내고 싶다. 슬픈 틈새의 섬! 눈물의 섬! 사할린에서 3년을 살아온 인연은 결코 가볍지 않다. 코로나 사태로 한국과의 문화교류가 끊겨지자 나는 비전문가로서 사할린에서 동포들에게 탈춤과 아리랑, 소고춤을 배워주고 무대에서 발표까지 수행했다. 작년에는 KBS한민족방송 체험수기에서 최고 대상을 받은 사할린한국교육원생 김경순 여사(73세)의 시 '눈물의 섬, 사할린'을 노가바(노래가사 바꿔 부르기) 하여 음반까지 만들어서 배포했다. 김여사가 '칠곡산' 선율에 가사를 입혀서 불러 달라는 요청을 받고 한국에서 작업을 해서 사할린에 가서 보내 드렸다. 나의 목소리로 부른 노래가 녹음이 된 것이다. 평소 수업시간에 노래를 부르면서 한국어 교육을 하는 편이라서 부탁을 하신 것이다. 한민족의 디아스포라 역사를 표현한 사할린아리랑의 보급을 통해 동포애를 나누고 싶다. 퇴직후 나에게 역할이 주어진다면 남은 시간까지 최선을 다하고 싶다. 평생 국가에서 받은 혜택을 다시 돌려드리고 싶다. 우선 아리랑의 역사와 맞물린 가사들도 이해하고 명료하게 가슴에 담아야겠다. 민중들이 입었던 무명 바지 저고리 한복부터 준비해야겠다. 코로나로 인해 사할린에서 동포애를 충분히 나누고 오지 못한 나의 새로운 임무와 과제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귀한 참여의 기회를 내주신 여러 관계자 분들께 감사 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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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산아리랑제 확장성 확인, 제9회 경산아리랑제2007년부터 이어 온 경산아리랑제, 지난 24일 오후 1시부터 7시까지 남매지 공원 특설무대에서 진행되어 시민의 큰 환호를 받았다. 특히 메인 행사인 ‘fail in love 경산 & 아리랑’에 반응이 컸는데, 구성이 다채로운데다, 출연자들의 기량이 높았다. 특히 경산아리랑보존회의 ‘나무하는 소리’와 ‘지게목발 소리’가 작품성이 매우 높았다. 방아타령 "에헤루야 방아야/에헤루야 방아로다 어절사콩콩 찧는 방아/언제나 다 찧고 마실갈꼬 (후렴) 이 방아야 독도구방아야/저 방아야 나무도구방아 나무절구 주걱소리/알각달각 장단치면 시어머니 잔소리방아/며느리는 눈치방아로다" 맷돌질 소리 "맷돌아 돌아라 빨리빨리 돌아라 얼른얼른 해놓고서 얼른얼른 해놓고서 다른일도 해야되지 다른일도 해야되지 고달프고 힘겹지만 고달프고 힘겹지만 어서 두부를 만들자 어서두부를 만들자 돌아돌아 맷돌아 어서빨리 돌아라 빨리돌아 맷―돌아 빨리빨리 돌아라 맷돌아 맷돌아 빨리돌아 이 콩을 돌아서 동생을 줘 맷돌 맷돌 맷돌아 어서빨리 돌아라 맷돌아 맷돌아 빨리돌아 이콩을 돌아서 시누이줘 맷돌 맷돌 맷돌아 빨리빨리 돌아라" 지난해 자인 숲에서 개최된 제8회 경산아리랑제는 경연대회와 본 공연의 장소가 각기 달라 혼선을 빗기도 했는데, 이번에 남매지 공연으로 장소를 옮겨 주제 공연으로 유도하는 집중력이 높았다. 장소를 옮기면서 청중의 눈과 귀를 무대로 향하는 효과를 얻은 것이다. 오후 1시에 시작된 제7회 경산아리랑가창대회’는 예선에 통과 된 15팀 중 영상 심사 결과 6팀이 결선에 올라 현장에서 경연을 벌였다. 참가자가 적은 편이었지만 전국의 국악인들에게 경산아리랑을 알리는 효과는 거두었다고 본다. 이어진 '전국학생 겨레노래 아리랑 부르기 대회’도 예선은 영상심사인데 ,3명 이상이 참가하는 팀만이 출전할 수 있다. 예선에서 선정된 최종 6팀(서울, 경기, 대구, 경북 등)이 무대에서 경연을 벌였다. 학생 대상은 첫 시행인데다 3명 이상의 팀제로 참가 자격을 두어 참가자가 그리 많지는 않았다. 내년에는 홍보에 더 힘써야 할 듯하다. 대상에는 '사할린아리랑'을 부른 사할린 4세 학생들팀이 수상을 했다. 세 번째 행사가 흥미로웠다. ‘경산 &아리랑 박사 이벤트’로 아리랑과 경산아리랑의 이해를 넓히려는 의도로 처음 마련된 행사인데, 전국에서 첫 시행이었다. 문제 범위를 행사장에 비치된 홍보물 내용을 퀴즈화 한 것으로 아리랑의 위상(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지정 등), 경산아리랑의 이해(언제부터 불렸는가, 축제는 몇 회인가?), 경산시의 이해(시화, 시조 등 상징 문제), 경산 지역 축제(경산대추축제, 단오제, 갓바위축제 등) 15항을 제시 채점자 순위로 선정했다. 시민 참여형의 신선한 소재로 타 지역에서도 벤치마킹 할 것으로 예상된다. 이외 다양한 이벤트들이 나름의 의미를 갖고 동시 진행 되었다. 앞으로 고정된 장소, 고정된 날로 특정되면 독립 주제 축제로의 입지가 확립될 것으로 확인 되었다. 사라져 가는 영남에서 전래되는 방아타령, 맷돌질소리,나물노래, 나무하러가는소리, 지게목발소리, 댕기노래, 물레소리, 어부사,밭매는소리, 상여소리, 화전노래, 지점소리, 칭칭이소리를 한자리에서 전통의 실생활이 생생하게 재현되는 퍼포먼스와 함께 들을 수 있었다. 영남인의 심성이 담긴 영남 전래민요를 배치하고, 경산아리랑을 셔플댄스에 담아 조선팝으로 특화 시킨 기획의도가 제대로 관객들의 가슴에 전달되었다. 인사말에서 배경숙 대표는 "매년 6월 24일 하루는 남매지 공원 ‘경산아리랑의 잔치날’로 확정되어 경산만의 축제를 펼치게 되기를 희망합니다.”라고 하였다. 김연갑 이사장은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와 함께 한 축사에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에 기여한 경산아리랑은 8회까지는 배경숙 이사장의 열정으로 이뤄진 것이라면, 이제 남매지 공원에 자리 잡은 내년 10회부터는 경산 시민들이 주체적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마지막 휘날레를 경산아리랑을 조선팝(K-Pop) 장르로 확산 시킨 기획 의도는 대성공이라고 본다. 지난해 러시아 동포들에게도 크게 환영을 받은 장르이다. 소리를 기본으로 춤과 연기력까지 더해진 무대는 10분 짜리 뮤직컬을 보는 것 같았다. 이러한 성공적 공연의 첫번째는 보존회 회원들의 기량이 남다르게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20여 년 보존회 결성 이후부터 가족처럼 모두 함께 해온 성과라고 본다. 휘날레가 끝나자 관객들이 박수를 치며 앵콜을 외쳤다. 아리랑 후렴을 따라 부르면서 흥얼거리면서 아쉬워했다. 경산아리랑 가사와 로고가 박힌 부채와 수건을 받아서 펴보면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고 하면서 어깨를 들썩들썩거리면서 돌아갔다..... 경산아리랑 "남매지 얽힌 전설 오누이 눈물인가 남성현 높은 고개 보슬비가 흩날리네 남천강 푸른 물결 말없이 흘러가고 나그네 잠긴 설움 옛 추억도 떠-가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가네" 경산아리랑이 내내 입속에 맴돈다. 한편 경산의 명물 '남매지'는 경상북도 경산 시내에 자리한 저수지이다. 남매지라는 이름에 얽힌 슬픈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는데 조선시대 때 부모를 잃은 가난한 오누이가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의 빚을 갚기 위해 오빠가 한양으로 떠난 사이 여동생은 심보 고약한 빚쟁이의 첩이 되고 말았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한 여동생이 저수지에 몸을 던졌고, 이 소식을 들은 오빠도 함께 자결하면서 이들 오누이가 목숨을 잃은 저수지 이름이 '남매지'가 되었다고 한다. 비극적인 전설과 달리 지금의 남매지는 경산 시민들이 즐겨 찾는 휴식처이자 도심 야경 명소로 사랑받는 데이트 코스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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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운 사할린 동포와 함께 아리랑한마당이병일/전 사할린한국교육원 원장 (현 석관중학교장) 사할린한국교육원 임기를 마치고 돌아온지 4개월이 다 되어간다. 지금은 서울의 중학교에서 일하고 있지만, 나는 현지 사할린 동포들과 여전히 아침마다 여러 SNS에서 인사를 나눈다. 시시각각 소식들은 점심시간이나 오후 퇴근길에서 열어 보고 러시아어로 번역해서 하트를 보낸다. 지난 11일 주말 아침 사할린 동포들을 만나러 길을 나섰다.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의 초청으로 달려가는 것이다. 사할린에서 귀국하고 처음으로 사할린 동포들을 만난다는 설레임을 안고 영주귀국동포들이 사시는 경기도 양주 율정마을에 도착했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가 주관하는 "사할린동포와 함께하는, 찾아가는 아리랑 학교"가 열린 것이다. 서울에서 양주까지 2시간 이상 운전을 하면서, 지난 3년 간 임기를 마친 사할린한국교육원 시간이 주마등같이 지나갔다. 그 중 많은 추억들 중 '사할린아리랑'은 기미양 대표님의 인연으로 이어진다. 3년 전 7월 중순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님과 아리랑연합회 김연갑 이사장님을 처음 만났다. 사할린 비자 갱신차 일시 귀국했다가 제4회사할린아리랑축제 행사를 준비하는 문제로 종로에서 만난 것이다. 현재는 전쟁으로 잠시 중단 된 상태이지만 2016년부터 매년 아리랑연합회는 사할린주한인협회와 공동주최로 사할린에서 크고 작은 행사와 공연을 수 차례 지속적으로 주관해 오고 있는 아리랑공동체이다. 국내외 55개 아리랑전승단체와 연구단체로 구성된 순수 시민운동단체이다. 그후 일시 귀국 때마다 국악신문사에서 보내주는 한복과 태극선 부채, 태극상모(이담농악), 아리랑음반,국악음반 등을 사할린 한민족예술동포단체에 전달했고, 아리랑학회에서 주관하는 아리랑학교 프로그램에 수강하기도 했고, 돌아가서 사할린한국교육원에서 아리랑 특강과 새해 첫날 우리말방송에서 아리랑의 역사를 소개하기도 했다. 기미양 대표와는 아리랑 관련 자료와 행사 소식을 이메일을 통해 주고 받고, 화상통화로 10월에 내린 사할린 첫눈 소식을 건내 주어서 국악신문 포토뉴스에 나오기도 했다. 특히 유즈노사할린스크 주에서 지어준 '아리랑누각'과 '아리랑공원' 건립 소식을 보내기도 했다. 그러나 아직까지 여러 국제적 사정으로 매년 사할린아리랑축제 및 아리랑 예술공연 단체가 준비하는 사할린 방문은 무산되었다. 나는 사할린에서 탈춤과 소고춤, 사할린아리랑, 밀양아리랑, 어부놀이 등 민속춤과 아리랑배우기 등을 통해 사할린 동포 및 현지인과 교류를 하였다. 특히 2022년 3월 KBS한민족방송 '보고싶은 얼굴 그리운 목소리 50년' 행사에 사할린 동포들 50명과 함께 특별초청 되어 동포들을 만나기도 했다. 이후 2022년 KBS방송 한민족수기공모전 수상자 인터뷰, 한민족방송에 두 차례 출연해서 사할린 동포 소식을 전하기도 했다. 특히 KBS한민족수기공모전 참가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한글교육에 힘썼다. 미디어 매체를 통해 사할린 동포의 존재와 이산의 역사를 국민들에게 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파트 주차장에 도착하니 지나가시는 어르신들의 러시아어 대화가 들려서 참으로 신기하고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자꾸 말 걸고 싶은 기분이랄까. 문경에서 도착한 대형버스에서 앰프와 악기, 다듬이, 박스 등이 리어카에 실려서 공연장으로 이동 중이었다. 사할린 어른들도 함께 손수 나르시고 계셨다. 떡과 수박 등 다과회까지 준비를 해오셨다. 공연 식전 행사에서 인사할 기회가 주어졌다. 사할린 한인문화센터에서 행사가 있게 되면, 1세대 어르신들께 큰절을 드리던 습관이 있어서 양주 율정마을 동포 1세대분들께 바닥에 엎드려서 큰절을 올렸다. 이어 "아직도 3년간 살다 온 사할린 기억이 생생해서 자다가도 생각나면 벌떡 일어나 글을 쓰며 추억한다. 그리고 영주귀국 신청 전에 부모가 사망하시면 영주귀국 신청을 할 수 없다는 안타까운 2세대 어르신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미어진다"고 말씀을 드리면서 잠시 가슴이 울컥해져서 머리 속이 먹먹해졌다. 코로나 팬데믹 동안 닫혀진 대강당 문이 오늘 3년만에 처음 열게 된 것이다. 한쪽 면은 대형 사이즈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비치는 공간이라서 점점 더워지기 시작했다. 날씨가 무덥지는 않았지만, 에어컨이 설치되지 않은 관계로 관람객이 늘어나고 공연이 이어지면서 다소 습기가 올라가는 느낌이 있었다. 심한 정도는 아니지만 사할린에서 살다오신 어르신들께는 부담이 되는 기온이라는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사할린에서 체질이 형성된 분들이라 한국의 무더운 여름은 견디기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늘 이맘때는 사할린에 돌아가서 그리운 가족들과 함께 시원한 여름을 보내고 9월 말 즈음 다시 한국으로 돌아오시고 했는데....이제는 전쟁으로 가지 못하고 3년간이나 한국에서 뜨거운 여름을 보내고 계신다.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원회(회장:이만유)가 준비한 공연 프로그램은 모두 아리랑판이다. 율정마을 어르신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의 '사할린아리랑' 합창으로 첫 막을 열었다. 이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회장과 회원들의 '왕십리아리랑', 동두천아리랑보존회의 '동두천아리랑'이 불려졌다. 2부는 문경에서 오신 40여 명의 아도위 회원들이 준비했다. 아도위합창단과 아도위연주단이 밀양아리랑, 진도아리랑, 정선아리랑, 홀로아리랑 등 다양한 아리랑을 연곡으로 불러 주시고, 문경새재아리랑을 가르쳐 주셨다. 그리고 하모니카 연주단이 트롯트를 선사했다. 동포들이 무대에 나와서 우리 전통 춤사위와 러시아 민속 춤사위로 춤을 추기 시작해서 신명을 높여 주었다. 트롯트에서 빠른 비엔나 왈츠, 불루스 등을 망라한 춤판이 이루어졌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신 분들은 노래보다 춤을 더 즐긴다. 우리가 노래방을 좋아하는만큼 그들은 춤을 즐기는 민족이다. 휘날레 춤판에는 많은 어른들이 춤을 추시고 기뻐하셨다. 코로나가 때문에 너무나 오랜만에 모여서 추어보는 춤이라고 하시면서....이러한 자연스런 파티 풍경은 사할린에서 근무하는 동안 너무나 낯익은 어울림이어서 참으로 오랜만에 그리운 사할린 추억으로 빠져드는 시간이었다. 문경시민들은 동포 분들께 드릴 정성이 담긴 선물도 듬뿍 가져 오셨다. 문경시장이 보낸 아리랑 책자, 문경특산물 오미자 와인, 오미자김 등을 뒷풀이에서 풀어 놓기도 하셨다. 직접 만든 생강조청을 준비하신 문은자 여사님의 정성이 대단하다. 기미양 대표님은 사할린아리랑축제추진단장으로서 '아리랑'을 매개로 현지 사할린 동포와 전국 여러 지역의 사할린 영주귀국동포들을 지속적으로 만나고 계신다. 영주귀국 사할린동포 분들의 성함과 얼굴, 모스크바에서부터 사할린에 사는 친인척 관계에서 겹사돈 관계까지 거의 알고 계신다. 그동안 사할린 원로 교육자 고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안간, 인천 등 에 사시는 많은 사할린 사람들을 만나서 강제동원과 가족사에 대한 기록을 해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과정에서 기대표님과 공노원 선생의 안내로 2017년 사할린 이산의 역사가 다큐로 방영되고,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KBS한민족체험수기 공모전 참가를 널리 알려오고 계신다. 사할린 동포들의 디아스포라의 아픔이 공중파와 출판을 통해 소개되는 성과를 내고 있다. 매년 대상 수상작은 사할린 동포들의 이산의 고통이 담긴 가족사이다. 작년 대상 역시 사할린한국교육원 한글학교 수강생 김경순(77세) 어른이 수상했다. 2019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일간 개최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사할린아리랑무용단과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대상과 금상을 받았다. 현재 사할린아리랑앙상블(단장:박영자), 오늘 만난 양주 율정마을 사할린 동포로 이루어진 사할린아리랑보존회 합창단이 수상한 것이다. 당시 하바롭스크아리랑보존회 게나김 단장도 초청되어 무대에서 '카레이스키아리랑'을 부녀가 같이 불러서 주목을 받았다. 우리는 흩어진 한민족을 하나로 만들어주는 아리랑을 매개로 활발한 개방과 교류를 기다리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코로나 판데믹의 여파과 전쟁으로 인한 문화적 교류의 중단으로 인한 고통은 계속되고 있다. 이러한 시기에 아리랑을 매개로 문경시민들과 사할린이 연결된 오늘 이 시간은 새로운 시작의 의욕을 신선하게 일으키는 날이다. 순수 시민운동단체로서 문경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의 활동이 놀랍다. 이만유 회장의 특강에서 정선아리랑.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처럼 온 국민이 문경새재아리랑을 부르게 될 것이라는 진정성이 가슴에서 느껴졌다. 먼 길을 와 주신 아리랑도시문경시민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동두천아리랑보존회, 한편 이혜솔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장님은 병원 입원 중에도 양주까지 오셔서 공연이 끝나고 바로 병원으로 재입원하셨다. 사할린아리랑을 널리 알리고 있는 사할린아리랑보존회 및 율정마을 어르신들, 오늘 사할린과 문경의 만남을 순조롭게 이어주신 국악신문사 기미양 대표, 그리고 자리를 빛내주신 전국사할린동포연합회 권경석 회장님과 부회장님의 동행 등, 애쓰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 이런 귀한 다음 만남의 시간을 기다리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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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꾼 이동안, 나의 스승 이동안운학 이동안 선생. 한 때 전국을 떠돌며 온갖 기예로 명성을 떨친 재인이다. 선생은 1906년 경기도 화성군 향남면 송곡리에서 재인청의 세습광대 후예인 이재학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이동안 명인은 재인청의 예맥을 이어 내린 세기의 광대로 김인호의 제자다. 명창 이동백과 근대무용의 아버지 한성준의 증언에 따르면 김인호는 구한말 순종과 함께 대청마루에서 놀았던 광대 중의 광대였던 인물이다. 이동안 선생의 집안은 세습광대의 집안으로 할아버지(이화실)는 단가와 피리의 명인이었고, 작은할아버지(이창실)도 줄타기의 명수였다. 이런 광대의 가문으로 맥을 이어온 이동안 선생의 집안이었지만, 선생의 아버지인 이재학은 이동안 선생에게 어렸을 때부터 사물(꽹과리, 북, 징, 장고)이나 젓대(대금), 피리를 잡게 하는 대신 서당에 보내 글공부를 시켰다. 하지만 선생은 집에서는 글방 간다고 나와서 글공부는 안하고 이 동네 저 동네 인근 마을에까지 남사당 패거리들의 굿판을 따라다니며 구경하는데 정신을 빼앗겼다. 급기야 선생은 글방에 간다고 집에서 메고 온 책보를 뒷산 소나무에 걸어놓고 김석철 광대를 따라나섰다. 결국 선생은 남사당패를 따라 황해도 황주땅까지 간다. 14세 소년 이동안은 그렇게 끼를 주체할 수가 없어 방랑의 길을 시작했다. 선생이 남사당패에 들어 간 지 일 년쯤 되었을 때, 어느 날 황해 장터에 아버지 이재학이 나타났다. 아버지에게 이끌려 화성 집으로 돌아온 선생은 두 살 위인 최연화라는 처녀와 결혼을 한다. 그때 선생의 나이가 14세였는데 신부보다는 소리와 어름타고 땅재주 넘는 모습만이 눈 앞에 어른거려 결혼 4년 만에 집을 다시 뛰쳐 나온다. 선생은 무작정 서울로 올라가 방황 끝에 광무대에 취직 이곳에서 재인청의 춤 선생인 . 김인호선생으로부터 팔박기본무.태평무.진쇠춤.엇중몰이신칼대신무등 30여 종 춤을 배웠다. 발탈로 국가무형문화재 기예능 인정을 받은 선생에게는 춤을 배우는 제자들이 그리 몰려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춤으로 문화재 지정을 받지 못한 것이 가장 한스런 일이다. 발탈의 맥이 끊기지 않기 위해 받은 것이지만. ”(이동안) 나는 이런 상황에서 끝까지 재인청 춤의 정수인 태평무를 전수받았다. 이동안 선생은 정주미에게 ‘태평무 이수증’을 수여하고 재인청 본류의 장단이 담긴 ‘태평무’음악을 연주녹음하여 재인청 '이동안류 태평무’의 본류를 지키도록 전수를 해주셨다. "나는 춤꾼이다. 우리 춤에도 이른바 여러 유파가 있어서 굳이 유파 속에 나를 넣는다면 ‘재인청’이라는 유파의 춤꾼이다. 그런데 재인청은 한국무용사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파가 아니다. 다시 말하면 재인청은 하나의 유파인데 유파가 아니라는 얘기다."(정주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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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3회 장보고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를 맞이하며저 나이 30대에 국악의 불모지인 내 고향 완도에 국악 꽃이 활짝 필수 있다는 일념으로 2000년 5월 제1회 장보고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를 시작했습니다, 당시 2000년도는 국악경연대회가 전국에 그리 많지 않아서 많은 국악인들이 참가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국악의 불모지 완도에 국악을 보급하고 완도의 관광명소를 국악인들께 더 알리고자 하는 일념으로 시작했는데 어느덧 23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한반도 남쪽 하늘 끝에 있는 내 고향 완도는 경연대회 개최하기에는 지리적으로 너무 열악하지만 그래도 23년이란 오랜 세월을 경연대회와 함께했던 시간들이 개인적으로 감회가 새롭습니다. 우리 국악을 사랑하는 국악인들의 많은 관심이 함께 모아져서 가능했습니다. 이제는 내 나이도 있고 해서 이제 그만해야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지만, 젊은 혈기로 내 고향 완도에 우리 전통예술을 보급 전승하겠다며 어렵게 시작했던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 당장 힘이 들어도 내 자신의 조그만한 사명감에 새 해가 밝아오면 다시 시작하게 됩니다. 그리고 타 시군에서 국악경연대회를 개최하시는 선생님들 정말 존경합니다. 어느 곳 하나 오염되지 않는 건강의 섬, 내 고향 완도는 신라시대 동아시아 바다를 평정한 자랑스런 해상왕 장보고대사의 고향입니다. 해상왕 장보고대사는 신라시대 바다를 장악하여 당나라와 신라 그리고 일본과의 해상 무역을 주도하였으며 중앙정부의 세력이 지방까지 미치지 못하자 남해안에는 해적이 자주 출몰하였고. 장보고는 완도에 해상 무역기지인 청해진을 설치하고 해적 소탕과 함께 해상무역의 기틀을 마련하였습니다. 가볼만한 관광 명소로는 장보고유적지, 주도섬, 정도리 구계등, 보길도 윤선도유적지, 항일운동 성지 소완도, 청산도 서편제 촬영지, 명사십리해수욕장, 드라마 해신 촬영셋트장, 완도타워 등 눈에 보이는 곳곳이 역사유적지이고 관광명소이며, 건강의 섬 청정해역 완도 바다에서 자란 해산물은 어느 바다 해산물보다 곱빼기로 맛이 있습니다. 올해 경연대회 일정은 여름방학 기간인 8월 12일~13일에 개최합니다. 경연대회 기간에 제자들과 완도에 오셔서 경연대회 참가도 하시고 대회 장소와 가까운 장보고유적지 등 관광명소를 둘러보시면 더 멋진 추억을 남기실 수 있을거라 확신합니다. 2023년 장보고국악대전 참가자 중 수상자는 제가 제작하는 아이넷방송 명무와 풍경 프로그램에 출연시켜 수상자들의 우수한 예술세계를 전 국민께 알리는데 최선을 다 하겠습니다. 국악예술의 불모지 '건강의 섬, 완도'에서 열리는 제23회 장보고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에 국악인 여려분의 많은 관심과 참여 부탁드립니다. 감사합니다. 완도에서 장보고국악대전 전국경연대회장 박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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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민요, “유파별 보유자 인정해야 합니다!”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전승자 대표단 공동대표/김영임ㆍ김장순(경기민요 전승교육사) 저희는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전승자들입니다. 근 한 세기동안 대한민국의 대를 이어 전승되던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의 맥이 끊길 위기에 놓이게 되어 민요를 사랑하는 많은 전승자들과 국민들의 많은 슬픔과 분노, 그리고 한숨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습니다. 문화재 관리국은 1975년 경기민요를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면서 소리속이 다르다는 점을 중시해 계보를 인정하였으며, 초대 경기민요 보유자로 묵계월(이경옥), 이은주(이윤란), 안비취(안복식) 세 분이 12잡가 4곡씩을 나누어 각각 보유자로 인정하였습니다.(묵계월: 적벽가 선유가 출인가 방물가), (이은주: 집장가 평양가 형장가 달거리), (안비취: 유산가 제비가 소춘향가 십장가) 문화재청은 2021~2023년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보유자 인정 조사를 실시하여 최종 후보 김혜란(안비취 유파) 이호연(안비취 유파) 김장순(이은주 유파) 김영임(묵계월 유파)의 4명중 김장순(이은주 유파)와 김영임(묵계월 유파)을 제외시키고 2023년 5월 12일 국가무형문화재 제57호 '경기민요' 보유자로 김혜란(안비취 유파)과 이호연(안비취 유파), 안비취 유파만 인정 예고하였습니다. 인정예고 기간에 아무런 문제나 이의 제기 없이 경과되어 문화재위원회에서 지정심의가 의결된다면 경기민요는 이춘희(안비취 유파), 김혜란(안비취 유파), 이호연(안비취 유파) 3명의 국가문화재 보유자가 안비취 유파로 천하통일 되고 묵계월 유파와 이은주 유파는 국가무형문화재로서의 지위를 상실하고 사실상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됩니다. 이 사안은 수천여 명의 경기민요 전승자와 수만 여명의 일반 전승자의 운명이 달리기도 한 사안입니다. 경기민요 전승자들은 몇 십년만에 찾아온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가 보유자 탄생을 자축하고 기뻐해야 할 터인데 잘못된 문화재청의 무형문화재 정책과 무형문화재 위원회의 결정에 아연실색하고 망연자실합니다. 두 후보가 인정 예고 된 안비취 유파 또한 자축은 고사하고 함께 동고동락해 온 경기민요 식구들이 힘들어 하는 모습에 안절부절 하고, 탈락한 묵계월/이은주 유파의 전승교육사들은 돌아가신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지 못한 죄책감으로 침통하고, 전승교육을 받던 이수자, 전수생들은 졸지에 가문을 잃고 고아가 되었다고 대성통곡하는 소리로 초상집이나 다름없습니다. 또한 윤석열 대통령께서 2023년 5월 27일 부처님 오신날 조계사 축사에서 '정부도 전통 문화유산 보존 전승에 최선을 다할 것' 이라고 발언하셨습니다. 이는 윤석열 정부에서도 유, 무형 문화재의 중요성을 깊이 인지하고 있다는 증명입니다. 끝으로, 우리의 귀중한 무형문화재인 국가무형문화재 경기민요 중 묵계월류, 이은주류의 두 전형이 보존, 전승될 수 있도록 도와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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