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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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 본고장 자부심, 중고제 복원 계승해야 한다충남 서천군이 지난 3월 28일 서천군청 상황실에서 명창 이동백·김창룡 자료 종합조사 및 선양사업 기본구상 용역 착수보고회를 개최했다. 중고제는 경기도와 충청도를 지역적 기반으로 하는 판소리의 한 갈래로, 중고제 소리꾼인 이동백·김창룡 선생이 근대 오명창에 포함된다.이날 보고회는 김기웅 군수를 비롯한 군의원, 자문위원인 목원대 최혜진 교수 등 11명이 참석해 용역계획과 세부내용에 대한 토의를 진행했다. 특히 착수 보고에서는 명창 이동백·김창룡 선생의 중고제에 대한 철저한 기초조사,선양사업 방향의 중요성, 선양사업의 파급력 제고,관광사업과의 연계 등 다양하고 의미 있는 의견들이 오갔다. 이번 용역은 서천군에서 태어난 이동백·김창룡 선생의 역사적 가치 발굴 및 관련 유적조사, 두 명창 생전의 음원, 연구서, 언론 기사, 사진, 유품 등을 종합조사하고 두 명창 및 중고제 선양사업 발굴 및 활용 방안을 연구하게 된다. 군은 이번 용역을 통해 중고제 기초조사에 그치지 않고 서천군의 중고제에 대한 위치 확보와 서천군의 대표 문화 브랜드로 키우기 위한 사업을 발굴도 추진할 계획이다. 김문(金門)소리를 받은 명창 이동백(李東伯, 1866~1950)은 한말~일제강점기에 ‘새타령’의 독보적 존재로서 판소리 절정기, 그리고 쇠퇴기를 모두 경험했던 판소리 중고제의 산 증인이다. 서천에는 조선 고종황제의 사랑을 받은 판소리 명창 이동백(李東伯) 선생과 김창룡 선생이 태어나신 곳이다. 1866년 2월 3일 충청남도 서천군 종천면 도만리에 태어나셔서 1949년 6월 6일 83세에 별세하셨다. 조선 말기 고종황제의 사랑을 받은 판소리 5명창 중의 한 사람. 본명은 종기(鍾琦), 아명은 동백(東白)이다. "마지막 내 소원(所願)"판소리”의 근본 정신을 모르고 음탕한 노래로 알고 부르며, 또 그런 것을 듣기 좋아하는 것이 기가 막히고, 또 하나는 소리하는 사람을 아직 소리가 무엇인지 알지 못하며 천대하는 것이 일생동안 내 가슴에 사무친 기막힌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암만 생활문제가 급하여도 우리의 권위도 세워서 요리집에는 가지 않고 회관에 와서 듣도록 하려고 합니다. 그리고, 좀 더 서로 연구하고 개량하야 새로운 작(作)도 하고 발표도 하려고합니다." -1937년 3월 이동백이 72세 대 대담한 내용 중에서- 이동백 선생이 남긴 마지막 소원이다. 8세 때 서당에 들어가 한문을 공부하였고, 13세 때에는 김정근(金正根)문하에 들어가 판소리를 공부하고 다시 김세종(金世宗)에게 5년간 공부하였다. 20세 전후에 도만리 호리산의 용구(龍口)에서 2년간 독공(獨工)하였고, 다시 진주 이곡사(里谷寺)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하였다. 절에서 나오자 창원부사의 부름을 받고 '새타령'을 불러 이름을 떨쳤다. 36세 이후 경상남도 창원에서 사는 동안 명창으로 차츰 알려지게 되었다. 46세 때 서울로 올라와 김창환(金昌煥)·송만갑(宋萬甲)과 함께 원각사(圓覺社)에서 창극을 공연하였고, 원각사가 해산된 뒤 연흥사(延興社)·광무대(光武臺) 등에서 송만갑과 함께 창극과 판소리를 공연하였다. 1933년 송만갑·정정렬(丁貞烈) 등과 함께 조선성악연구회를 조직하여 판소리교육에 힘쓰는 한편, 창극정립에도 노력을 경주하였다. 1939년 부민관에서 은퇴공연을 하자, 열화와 같은 요청으로 두달 동안이나 전국과 만주, 연해주일대까지 순회공연을 계속하였다. 그는 김세종에게 짜임새 있게 판소리를 배웠고, 성량이 풍부하고 풍채가 당당하여 거인적인 명창으로 이름이 높았다. 고종은 그를 특히 사랑하여 통정대부(通政大夫)의 직계를 내렸고, 어전에서 소리를 하게 하였다. '심청가'와 '적벽가'를 잘 불렀고, 특히 '새타령'을 잘 하였는데, 그의 '새타령'은 이날치(李捺致)·박유전(朴裕全)이후 첫손을 꼽고 있다. 제자는 많지 않으나 강장원(姜章沅)이 그의 소리 일부를 이어받았다. 그의 소리를 담은 음반이 수십종 남아 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새타령'과 '흥보가' 중 '제비 후리려 나가는 대목', '심청가' 중 '범피중류(泛彼中流)' 대목이 걸작으로 꼽히고 있다. 중고제 발굴 복원 연구 충청사람들 관심 속 시작해야 한다. 중고제는 충청도 사람들의 슬픔과 기쁨 등을 모두 간직하고 있는 충청도민의 심성이 녹아있는 민족문화이다. 최근 학계에 의하면 판소리의 본향은 수운 교통·상업 발달한 충청 서해안과 삽교천, 금강유역이 확실하다고 한다. "판소리 역사와 연구사, 역대 명창들의 사제 관계를 최초로 기술한 정노식 '조선창극사' (1940년 1월 15일 조선일보사)에 따르면, 전기 8명창과 근대 5명창에 이르기까지 충청·경기·전라 북부 출신으로, 중고제 판소리 명창이 다수에 이른다. 판소리 대가닥인 중고제, 동·서편제 등은 판소리 대명창들의 사제 관계 속에서 형성됐다. 전기 8명창의 사제 관계 속에서 중고제가 전승됐다면, 후기 8명창의 사제 관계 속에서 동·서편제가 형성됐다고 보는 것이 판소리 연구자들의 일반적인 통설이다."(2016년 3월 24일 충남문화재단은 ‘중고제 맥 잇기 학술세미나) 한편 서천에서는 매년 '국창 이동백. 김창룡선생 판소리 서천 전국국악 경연대회'를 개최하고 있다. 올해로 11년을 맞이하고 있다. 올해에는 서천군 선양사업에 힘입어 대상에는 천만원의 상금이 수여될 예장이다. 그리고 전국에서 참가하시는 경연자와 가족들에게 모두 점심을 대접할 예정이다. 전국 국악인들의 많은 동참을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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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살 남원 청년이 전범 용의자로 전락,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남방의 포로감시원, 5년의 기록'은 그가 살아생전 남겼던 고난과 역경이 새겨진 5년이란 세월을 기록한 일기다. 가족과 생계를 위해 태평양 전쟁에 참전한 20살의 남원 청년이 전범 용의자로 전락한 내용이 담긴 책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를 통해 우리는 70년전 동아시아 역사와 세계 열강 속에서 개인이 당해야 했던 수난을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다. 사회 구성원 한 개인의 삶을 통해 역사를 살펴 볼 수 있는 살아있는 새로운 역사를 쓰는 역사라고 본다. 1923년 최영우란 남자가 전라북도 남원 서도리에서 태어났다. 전주공업전수학교를 졸업한 그는 1942년 스무 살 청년 때 포로감시원으로 태평양 전쟁에 참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여러 수용소에서 일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일본이 항복하면서 전범 용의자로 현지 형무소에서 복역하다 5년 후 귀국, 2002년 세상을 떠났다. '1923년생 조선인 최영우(출판 효형출판)'은 소설 혼불의 배경지인 남원 수동마을에서 태어난 최영우가 태평양 전쟁에 일본군 포로 감시원으로 참전 후 남긴 육필원고를 손자 최양현이 재구성한 책이다. 이 책은 태평양 전쟁 발발 이후 일본의 패망과 연합국의 승전 처리기인 1947년까지 5년간 20살 남원 출신 최영우가 남긴 육필 원고다. 10여 년 동안은 그의 손자 최양현씨가 직접 탐사하고 새롭게 발굴해 재구성했다. 차남으로 태어난 최영우는 큰 형과 동생 대신 포로 감시원 채용에 응시해 전쟁 참전을 결심하고 두 달간 훈련을 받은 후 인도네시아 '남방'의 자바섬에 배치됐다. 2년 만기 근무에 봉급을 받는 정식 군무원이었지만 현실은 일본군 이등병보다 못한 최말단 대우를 받았다.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전세가 반전되면서 최영우를 비롯한 포로감시원들은 쫓기는 신세로 전락하고 1945년 일본 패망으로 일본군 소속 전범 용의자로 전락했다. 연합군 포로 학대 혐의를 받은 다수의 젊은 조선인 청년들 조선인 출신 포로감시원 148명이 B·C급 전범이 되고. 유죄 판결을 받은 이는 무려 129명, 이중 23명은 사형판결을 받아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1947년 3월 연합군 감옥에서 그는 석방됐다. 5년 전 3천여 명이 함께 출발했는데 130여 명만 겨우 귀환선을 탔다. 그러나 어수선한 해방정국에서 귀국을 포기하고 일본에 남아 경계인을 선택한 사람까지 그들의 삶 역시 어수선했다. ‘관리번호 132번 최영우’가 남원 서도역에 도착해 서성일 때 당숙모와 마주쳤지만 피골이 상접한 그를 알아보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 종전 후 전범 용의자가 된 최영우는 싱가포르 창이 형무소, 자카르타 치피낭 형무소에서 복역한 뒤 1947년 9월 히로시마를 거쳐 한국으로 귀국, 생전에 틈틈이 포로감시원 시절을 기록으로 남겼다. 저자 최양현은 "책을 읽는 독자들이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어느 무명인 청년의 솔직한 내면을 들여다보고 함께 공감할 수 있길 바란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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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버지니아에서 한국전통춤을 펼치는 정수경입니다미국 버지니아에 살고 있는 김묘선 선생님 제자 정수경입니다. 현재 저는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전수자이고, 버지니아주 페어펙스 카운티 소속 선생님으로 센터빌 고등학교와 첸틀리 고등학교에서 한국학과 수업에서 한국무용과 모듬북 사물놀이를 지도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21일 웨스트우드 컨트리클럽에서 DAV (Democratic Asian Americans of Virginia) 주최한 아태계 문화예술의 달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우리 전통문화를 선보였습니다. 이 행사에는 Fairfax 정치인, Congressman/Woman, 상원, 하원 의원님들이 참석 하셔서 '아시안태평양 문화유산 축제'를 축하하는 행사였습니다. 한국에서 오신 전경숙 회장, 임소정 시의원, 문일용님 등도 참석하서서 자리를 빛내주셨습니다. 중국의 사자춤을 시작으로 첫 막을 열었습니다. 한국팀 대표로 초대를 받은 '디딤새한국전통예술원' 원장의 '김묘선류 화선무곡' 한국전통 춤과 고등학생 단원들의 모듬북 연주로 참석한 이들의 시선을 사로 잡았습니다. 특히 모듬북 연주는 참석한 모든 사람들이 한참 동안 기립박수를 치면서 "원더플"을 외쳐주셨습니다. 미국에서도 한류 열풍이 이제는 최고조라고 봅니다. 코로나 이후 더욱 비대면 행사가 영상으로 제작되어 유튜브를 통해 제작되고 알려지게 되면서 아이티 강국 한국의 위상을 실감하게 됩니다. 방탄소년단의 인기는 미국은 물론 유럽을 접수하면서 한국의 문화가 친숙하게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공연에 츨연한 디딤새한국전통예술원 청소년 단원들 모두 주최측으로부터 감사장을 받았습니다 첸틀리하이스쿨 한국어과 교교사 고은영 선생님과 , 사물놀이와 부채춤은 교사로 정수경 디딤새한국전통예술원 대표가 지도하고 있습니다. 수강 학생들이 이번 학기부터 배우기 시작한 '사물놀이', '부채춤',' K-pop댄스' 공연을 하였습니다. 특히 부채춤은 지난 4월 헌든 하이스쿨 인터내셔널 데이에서 공연에서 1등을 한적이 있습니다. 저는 이번 공연에서 축하무로 이매방류 기원무를 선보였습니다. 디딤새 단원들의 12발 상모 주한결, 버나돌리기 정지훈, 얀드류김, 사자춤 이상혁, 김하은 마지막으로 모둠북을 연주하여 참석하신 많은 분들의 박수 갈채를 받았습니다. 이날 함께 참석하신 ,체틀리하이스쿨 교장선생님. 학교 관계자, 문일용 (전 퍼펙스카우니 교육위원)등 학부모님들 많은 분들이 참석하여 축하해 주셨습니다. 이번에 처음으로 사물놀이와 부채춤을 배우기 시작한 첸틀리 하이스쿨 학생들의 즐거워 하는 모습을 보니 앞으로도 더 알차고 재미있게 한국문화예술을 지도하는 책임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아직 악기나 의상등의 소품이 부족하지만 하나하나 채워가며 학생들을 위해 노력할 것입니다. 더불어 주변에서도 많은 관심이 후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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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전통과 현대를 잇는 무용가 채상묵의 춤 인생인간적인 무용가, 채상묵을 만나다전통춤의 전승자로, 한국 춤의 창작자로 반세기가 넘는 채상묵의 춤 인생을 한 권의 책에 담았다 한국 남성 춤계에서 확고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무용가 채상묵이 올해로 춤 인생 52년을 맞는다. 2009년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공연된 〈채상묵 춤 50년의 향〉은 그가 걸어온 춤 여정 반세기를 주제로 한 창작 무용극이었다. 총 8편의 연작시가 ‘춤’ 하나에 일생을 걸어온 예인의 뜨거운 예술혼과 거기에 담긴 정수를 짧은 공연 시간 안에 표현해내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는 당대 가장 뛰어난 남성 춤꾼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춤에 대한 열정으로 아버지의 반대를 이겨냈던 어린 시절부터, 더 새롭고 다양한 배움을 얻고자 다른 스승의 문하로 들어가면서 홀로 감내해내야 했던 고통에 이르기까지……. 각종 무용시상식에서 상을 받고 누구나 인정할 만한 예인으로 평가받기까지는 많은 노력과 인내의 시간이 따랐다. 그는 이매방류의 ‘승무’와 ‘살풀이’를 제대로 출 줄 아는 몇 안 되는 무용가인 동시에, 새로운 춤 세계를 개척하는 창작자이기도 했다. 주로 자신의 삶 이야기를 작품에 투영시키는 것이 채상묵 창작품의 특징인데, 인간적인 면모가 한껏 발휘된 그의 작품을 보노라면 특별히 화려한 효과가 없더라도 그 안에 담긴 진심이 그대로 느껴진다. 작은 체구에서부터 뿜어져 나오는 강인함, 한순간에 관객을 집중시키는 춤 연기성, 손끝까지 섬세하고 정교한 춤 모양새, 소도구를 가장 효과적으로 이용할 줄 아는 창작 춤꾼, 자신의 삶과 인간적인 면을 작품에 투영시키는 힘. 모두 무용가 채상묵을 지칭하는 말이다. 이 책은 그가 공연해왔던 작품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해가며, 채상묵의 삶과 춤꾼으로서 살아온 인생을 진솔하게 담았다. 특히 지루한 나열식 구성을 피하고 저자 이지은과 무용가 채상묵이 오랜 시간 인터뷰한 내용을 마치 현장을 직접 보는 듯한 대담식 구성으로 정리함으로써, 독자들이 그를 더욱 가깝게 느끼고 우리 춤에 흥미를 불러일으킬 수 있도록 하였다. 8년에 걸친 긴 준비기간을 거치며 채상묵의 춤 인생 조각들이 한층 더 단단하게 모여들었다. ‘오늘의 한국무용은 유구한 전통에 뿌리를 두고 철저히 고증된 그 바탕에서 새로운 형식으로 태어나되 우리의 정서가 보여져야 한다.’라는 그의 말처럼 이 책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채상묵의 춤과 우리 시대 한국 춤의 발전상을 알고 관심을 가질 수 있길 기대한다. 이순을 넘어선 나이는 그에게 있어 더 이상 걸림돌이 되지 못한다. 채상묵의 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한국춤의 맥을 잇는다'시리즈의 첫 번째 인물 『아름다운 반세기, 무용가 채상묵』은 저자 이지은이 한국 무용의 전승자이자 창작자로서 우리 춤의 근대사와 맥락을 같이 하는 무용가 채상묵과 오랜 시간 인터뷰를 하며 그의 춤 인생을 구술채록하여 엮었다. 무용가 채상묵의 50년 춤 여정을 대담형식으로 자연스레 풀어감으로써 독자들이 쉽게 이해하고 친근하게 다가갈 수 있게 했다. 평생을 춤 하나만 바라보며 살아온 그가 직접 들려주는 진솔한 삶이야기와 더불어, 각 장마다 해당 공연 사진과 작품 설명, 관련 비평을 함께 실어 책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남성 무용의 불모지를 개척하며, 전통춤의 계승뿐만 아니라 춤에 대한 강한 창작욕으로 불타오르는 한 무용가의 춤 사랑을 만나 볼 수 있을 것이다. 채상묵 선생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90 현대춤 작가전]에서 그가 발표한 작품 하나가 생각났다. 〈마른 풀꽃의 소리〉라는 작품이다. 그 안에서 말하는 것은 마치 한 편의 시처럼도 들리고 채상묵 선생의 인생철학처럼도 들리는 이야기였다. 세상에 시련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고난을 겪지 않는 인생은 또 어디 있으랴. 그러나 진정 예인의 삶이란 이 시련과 고난, 그리고 끊임없는 담금질이 멈추지 않을 것이라는 것에는 이견이 없으리라. 나는 이렇듯 예인 채상묵이 춤과 함께 들려주는 이 ‘마른 풀꽃의 소리’가 아름다운 향기가 되어 마음에 와 닿는 것 같았다. --- p.114채상묵: 시간이 흐를수록 어렵게만 느껴져 왔던 전통춤의 사위마다 뼈를 깎는 고뇌를 담아 나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그런 마음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과거와 어우러지며 미래를 향한 자리매김을 하는 셈이지요. 개인적으로 그 공연은 다시 한 번 예술혼에 정열을 쏟을 수 있는 성숙의 계기가 되어주었던 것 같아요.--- p.223 저자 이지은은 프리랜서 작가로 활동 중인 그는 특히 우리의 전통문화와 관련한 공연작품들을 다수 작업해 왔다. 대표적 작품으로는 국립국악원 국가브랜드공연 〈소리극 황진이〉와 경기도립무용단의 창작무용극 〈태권무무달하〉, 〈황진이〉, 〈도미부인〉 등이 있으며, 서울시립무용단의 창작무용극 〈연리근〉, 〈채상묵 춤 50년의 향〉, 〈누가 아름다운 학의 눈물을 보았는가〉 등의 무용대본을 집필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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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번째 부안 전국농악경연대회를 마치고매었구나~ 매었구나~ 어허허~ 하아~~ 1987년 7월에 있었던 부안농악 두레굿 재연행사에 쓰였던 문구입니다. 신명을 내기 위해 장구를 매고 마음을 매어 무아지경의 놀이판에서 "어허허~ 하아~”하며 탄성을 표출했듯 우리네 농악은 생각만 해도 어깨 들썩이게 하는 강렬한 힘이 있습니다. 바야흐로 한류의 세계화로 'K-팝'은 물론 우리 전통문화가 새로이 주목받고 있습니다. 한국인들이 왜 이리 신명과 끼가 많으며 춤과 노래를 잘하는가? 바로 민중예술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농악'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농악무의 신명성과 즉흥성이 입증하고 있습니다. 한민족 농악과 굿문화를 풍성하게 간직한 부안에서, 부안농악으로 그 찬란한 역사를 이어가고자 합니다. 허균이 꿈꾸던 이상 사회의 터전이며, 실학자 반계 유형원과 변산의 도적을 교화한 박지원 등 사람이 사람을 위하는 마음이 늘 꿈꾸어 왔던 부안에서, 고은 이동원 선생 추모 제 11회 전국농악경연대회를 지난 5월 6일 성황리에 잘 마무리 하였습니다. 함께 해주시고 오늘의 농악이 있기까지 자리를 빛내주시고 있는 전국 농악보존회와 농악인 여러분 모두에게 감사함을 표합니다. 부안은 호남우도농악의 본거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부안에는 보안 우동리 김바우, 김대근, 줄포의 박남식, 백산의 김경천, 부안읍의 이동원, 부안농악 상쇠 나금추 등의 명인들이 활동한 근거지입니다. 이 분들은 전국에서 내노라하는 농악인들과 교류하며 부안 농악의 초석을 다지고 융성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습니다. 1987년 12월 31일 전라북도에서 최초로 '부안농악'이 전북무형문화재 제7호로 지정되어 그 우수성을 만천하에 인정 받았습니다. 이후 세계 유네스코는 농악을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하였습니다. 앞으로 선생님들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많은 분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동체적 신명으로 다양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각고의 노력을 다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23년 5월 15일 전라북도 무형문화재 제7-1호 부안농악보존회장 김기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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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명인명무전’ 110회를 맞았다 (박동국)박동국/동국예술기획 대표 올해 ‘한국의 명인명무전이’ 110회를 맞는다. 17일 18일 2일간 오후 7시 30분에 국립국악원 예약당에서 막을 올린다.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전통예술인의 전통춤과 소리의 계보를 이어왔고, 수많은 관객들과 만났다. 지난 1990년 11월 첫 무대를 연 ‘한국의 명인명무전’이라는 이름으로 국립국악원 무대에서 판을 열었다. 당시만 해도 그 흔한 전통예술 공연무대의 하나, 그저 고만고만한 전통무대의 하나로 일반관객은 물론 전통예술인들에게도 관심을 받지 못했던 이 무대가 어느덧 34년 동안 110회에 이르렀다. ‘우리 전통의 원형보존과 전승’이라는 전통가치를 표방하며 우리춤의 뿌리를 지켜오는 가운데 춤과 소리의 절대적 예술성을 추구, 무대 위에 승화시켜 온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이제 하나의 전통예술무대 브랜드로 굳혀져 왔다. 한국 전통무대 현대적 계보의 축, ‘한국의 명인명무전’ ‘한국의 명인명무전’ 110회를 이어오는 동안 조선 시대의 마지막 무동인 명무 故 김천홍 선생을 비롯하여 한 시대의 전통예술을 대표하는 판소리 명창 故 박동진 선생, 명무 故 김계화 선생, 일인창무극 故 공옥진 선생, 명무 故 이매방 선생, 배뱅이굿 故 이은관 선생, 여창가곡 故 김월하 선생, 가야금병창 故 박귀희 선생 등, 우리 전통예술의 전설적인 별들이 바로 이 무대 위에서 명멸해 갔다. 무형문화재 보유자와 제자들이 34년 역사의 깃발을 세우고 민속문화의 위상을 보여주었다. 한때 문화재청 산하기관에서 주관한 '인간문화재 대전', '무형문화재 대전'라는 무대는 지금은 전승주체들의 대(代)가 희박해져 가는 실정에서 세우기가 쉽지 않는 편이다. 이러한 가운데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명실공히 전통예술의 대통을 이어가는 무대로 널리 알려졌다. 전통무대 신예와 중견, 원로가 함께 명맥을 이어온 무대 150여 개 종목 국내외 공연장 70여 지역 종횡무진 연인원 3,000명 연희자 출연진 대기록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발표 무대가 넉넉하지 않은 전통예술인들의 활동무대를 넓혀왔다. 신예와 중견 그리고 원로 예술인이 한 무대에서 과거와 현재, 내일의 꾸준한 맥을 잇는 전통무대의 모델이 되어왔다. 그동안 3,000여 명의 원로와 중견, 신인들이 이 무대 위에서 예술혼을 불살랐으며 150여 개 종목의 전통춤과 소리가 관객들에게 깊은 울림을 던져주며 우리 춤사위와 소리의 향연을 펼쳐왔다. 서울을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를 비롯해 해외(일본, 중국, 몽골, 미국, 하와이) 무대에서도 우리 민족문화예술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꾸준하게 알려 오고 있다. 공연의 역사 속에 함께 했던 예술인들만 연인원 3,000여 명에 달하며 공연장만 해도 국내외 70여 개 극장에 이르고 있다. 동국예술기획 창립 34주년, 110회 '영상+춤+뮤직' 콜라보레이션 동국예술기획 창립 34주년 기념하는 제110회 ‘한국의 명인명무전’ 무대는 보다 더 이색적인 콜라보레이션 공연을 선사한다. 이번 ‘한국의 명인명무전’은 동국예술기획 창립 34주년 기념 제110회의 각별한 의미를 더해 이색적인 콜라보 형태의 축시낭송과 영상, 춤이 음악으로 변주되는 입체적인 춤사위로 관객들과 만난다. '이매방류 살풀이춤' 인간문화재 정명숙(1935년생)선생, '애기무' 인간문화재 김광숙(1944년생)선생, '강선영류 태평무' 인간문화재 고선아 선생, '호남산조무' 인간문화재 이길주 선생, '정대석제 거문고 산조'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 역임 정대석 선생, '쌍사자무' 남예종 석좌교수 최창주 선생, '박병천류 진도북춤' 김진옥 선생, '이매방류 승무' 전승교육사 김묘선 선생, '살풀이춤' 단국대학교 교수 김지원 선생, '김평호류남도 소고춤' 김평호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 등 원로와 중견 무용가 70여 명이 출연한다. '이매방류 살풀이춤' 무대에서는 명고 김청만(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보유자)선생이 라이브 음악반주를 하여 이 행사의 대미를 장식한다. 한편, 특별한 날의 의미를 담아서 전국시낭송대회 13관왕 수상한 김숙희의 축시 낭송으로 시작된다. 전무후무한 ‘한국의 명인명무전’ 34년 기록 국악의 새로운 지평을 연다 동국예술기획은 2000년 제3회 광주비엔날레 개막식 연출기획과 조흥은행 창립 99주년, 일본 오사카 민단 50주년, 광주MBC창사 30주년, KBC광주방송 창사 개국 판소리 다섯마당 기획연출, SBS사극 서동요 음악 연출 등을 기획해 왔다, 특히 1999년 광주에서 한국 최초로 광주전남 '남도전통예술인추모제'로, 국창 송홍록· 박유전· 임방울· 김창조등 국내 명인명무 117명 위패봉안과 더불어 씻김굿과 판소리, 구례향제줄풍류, 창작국악실내악, 사물놀이, 한국무용, 인문학 콘서트 시와 노래가 춤을 만나 향기를 배접하다, 등을 연출기획을 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국악인 개인별로 추모제 행사가 있어 왔지만 국악계 사상 처음으로, 대규모의 합동추모제가 열린 것은 처음이기도 했다. 20세기를 마감하는 이 시점에서 우리나라 국악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운 남도출신 국악인들을 총체적으로 정리해 볼 필요성을 느껴 오랜 시간 행사를 준비했다. 동국예술기획은 '홀로아리랑' 처럼 전통예술의 맥을 찾는 작업을 추구해 온 민간 기획사로는 전무후무한 기록으로 자타공인 일등으로 매진해왔다고 자부한다. 1990년 이후 지금까지 정부 기관이나 자치단체의 지원 없이 제110회 ‘한국의 명인명무전’과 제50회 ‘한국의 소리와 몸짓’ 공연을 수행해 왔다. 이러한 공적을 인정받아 2014년 3월 국회헌정기념관에서 제2회 대한민국 기록문화대상 리더십 수상과 2015년 9월 세종문화회관 세종홀에서 대한민국을 빛낸 한국인물대상과 2017년 12월 8일 대통령 표창장을 수상하며, 2018년 5월 1일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전문위원으로도 위촉되어 활동했다. 다가오는 17일 전통문화예술을 전수하시는 명인명무을 모시고 무형문화유산의 정수리를 향해 '민족의 춤'으로 승화한 무대가 신명과 감성을 관객들에게 선사할 것이다. 박동국(예술경영학 명예박사)이 예술총감독을 맡고 해설을 한다. 구성기획을 맡은 정지희의 영상으로 진행된다. 5월 17일(수) 첫째날(명인명무전) 1. 축시나송 / 김숙희 (전국시낭송 대회 13관왕) 2. 호남산조춤 / 조용주 (호남산조춤 이수자) 3. 초립동 / 박야림 (대전 살풀이춤 이수자) 4. 살풀이춤 / 김지원 (단국대학교 문화예술대학원 교수) 5. 김계화류교방굿거리춤 / 강혜숙 (호남살풀이춤 이수자) 6. 진쇠춤 / 박소정 (박소정 무용단 예술감독) 7. 김란류쌍수건춤 / 최은정 (목원대학교 교수) 8. 김평호류남도소고춤 / 김평호 (대전시립무용단 예술감독)외 6명 5월 18일(목) 둘째날 전무후무(前無後舞) 1. 강선영류 태평무 / 고선아 (인간문화재) 2. 예기무 / 김광숙 (인간문화재) 3. 호남산조춤 / 이길주 (인간문화재)외 10명 4. 정대석제 거문고산조 / 정대석 (서울대학교 국악과 교수역임) 장고/김청만 (인간문화재) 5. 최창주류 쌍사자춤 / 최창주 (남예종 석좌교수)외 4명 6. 이매방류 승무 / 김묘선 (승무 전승교육사)외 5명 7. 이매방류살풀이춤 / 정명숙 (인간문화재), 장고/ 김청만(인간문화재) 8. 박병천류진도북춤 / 김진옥 (정민류 교방춤보존회 회장)외 6명 반주 장고/김청만(국가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고법 보유자) 피리.징 /한세현, 대금/ 원완철, 아재 / 배련, 거문고/이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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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소당(養素堂) 표지판을 보고서수용(한국고문헌연구소장) 도대체 누가 왜 이런 안내문을 써서 종가 사랑채 앞에다 표지판을 세웠을까?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니 그 주체는 경상북도일 것이고 안동시에 있는 문화재이니 안동시도 그 당사자일 것이다. 이 집의 주인인 종손과 동성마을에 사는 일족들도 ‘읽어보지 않아서 몰랐다’는 정도로는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고 본다. 갑작스럽게 이런 민망한 이야기를 꺼낸 것은, 안동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지닌 종가 중의 한 곳인 안동 김씨 대종택인 ‘양소당(養素堂)’의 안내 표지판에 단순한 오자(誤字) 수준이 아닌 몇 가지의 ‘중대한 오류’를 범하고 있어서다. 물론 글을 쓸 때는 아무리 노력을 하더라도 잘못이 있을 수는 있다.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는 속언까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금석문에 버금가는 지정문화재 안내판은 그 경우가 다르다. 권위에 따른 파급효과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담긴 내용은 물론 글자 한 자까지도 신중을 기해야 하고, 그런 과정을 거쳤더라도 잘못이 발견되면 즉시 이를 시정해야 한다. 먼저 현재 종택 앞에 서 있는 안내판의 내용을 그대로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영문 생략). 安東金氏宗宅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25호) 김씨 종택은 조선 전기 때 문신이었던 양소당(養素堂) 김영수(金永銖, 1446∼1502)의 종갓집이다. 이 집이 위치한 소산리는 김영수의 할아버지인 김삼근(金三近, 1390-1465)이 15세기경에 입향한 이래 안동 김씨 집성촌이 되었다. 김영수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 김영수의 아들은 평양부 서윤을 지낸 김번(金璠, 1479∼1544)이고 고손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예조판서 김상헌(金尙憲, 1570∼1652)으로, 이후 김영수의 후손들은 조선 후기 최대의 문벌로 성장하였다. 안동 김씨 종택은 ‘ㅁ’자형의 기와집으로 남서향이다. 대문은 없으며 사랑채와 중문간채, 안채로 구성되어 있다. 안채 오른쪽 뒤편에는 사당이 있다. 안채는 대청을 중심으로 양옆에 각각 안방과 건넌방이 있고, 왼쪽의 안방 앞에는 툇마루를 두었다. 사랑채는 왼쪽에 방을 두었고, 오른쪽은 대청으로 개방하였다. 사랑채와 대청 사이에는 들문을 달아 필요할 때 공간을 넓힐 수 있게 하였다.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 보고 놀란다’고 필자 또한 『안동의 문화재』 라는 책을 몇 차례 간행한 터라 안내판의 잘못된 내용을 본 뒤 돌아와 얼른 책을 펼쳐보았다. 1996년 간(刊), 미흡한 내용이었지만 현행 안내판의 오류는 범하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했다. 더욱 안도한 것은, 문화재 안내란에 김삼근(金三近)-김계권(金係權)과 그 아랫대인 학조(學祖, 出家), 영전(永銓, 司憲府 監察), 영균(永勻, 進士), 영추(永錘, 水原府使), 영수(永銖, 司憲府 掌令) 오형제, 그리고 영(瑛)과 번(璠), 순(珣) 삼형제까지 간략하나마 계보(系譜)를 표로 만들어 소개했기 때문이다. 물론 김계권의 동생인 보백당(寶白堂) 김계행(金係行)도 빠뜨리지 않았다. 보백당은 안동 김씨 가문의 최초 문과 급제자이다. 문제는 그 다음에 터졌다. 필자 역시 "이 건물은 성종 때의 명신 양소당 김영수 공의 종가댁이다.”라고 소개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안동 김씨 대종중 사무총장의 자문을 받은 뒤 그저 ‘모골(毛骨)이 송연(悚然)’해졌다. 안내판을 포함한 그간의 소개문에서 아무 생각 없이 ‘양소당 김영수’라고 썼기 때문이다. ‘양소당(養素堂)’은 김영수의 12대손으로 삼당 김영과 창균 김기보로 이어지는 소산 안동 김씨 대종가의 종통을 이은 인물인 동야(東埜) 김양진(金養根, 1734-1799)이 특별히 종갓집의 당호(堂號)로 그렇게 지은 것인데 말이다. 가장 큰 잘못 만을 우선 잡아서 안내판의 첫 문장을 다시 쓴다면, "이 집은 안동 김씨 대종택으로, 시조의 11세인 장령공 김영수가 처음으로 지었다. 그의 12세손 동야 김양근에 이르러서 당호(堂號)를 ‘양소당(養素堂)’이라 명명하였다.” 정도가 될 것이다. 시급히 수정해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다소 장황하게 예전에 펴냈던 책 내용까지 들춰낸 것은, 안내판에서 안동 김씨 종가를 소개하면서 김영수의 삼형제 가운데 둘째인 김번(金璠) 만을 들어서 ‘최대의 문벌’로 성장했던 그의 후대를 이 종가가 잇고 있다고 표현해 계보상의 중대한 잘못을 범했기 때문이다. 심하게 이야기하면 이는 ‘환부역조(換父易祖)’다. 의당 장남인 삼당공(三塘公) 김영(金瑛, 1475∼1528)을 소개한 뒤 특히 현달(顯達)했던 둘째 서윤공(庶尹公) 김번(金璠)과 그 직계 후손들로 이어갔어야 했다. 이쯤에서 정리한다면, 안동 김씨 종가는 삼당공이지 서윤공의 종가가 아니기 때문이다. ‘청백(淸白)으로 전가(傳家)한’ 안동 김씨 가문에서 서윤공(庶尹公) 김번(金璠)과 그 후손들이 차지하는 비중은 지대하다. 김번은 중종8년(1513)에 35세로 문과에 급제해 전적, 경기도사, 이조정랑, 평양서윤, 시강원 문학 등 직을 지낸 뒤 66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내직에서는 탁월한 경륜(經綸)을, 외직에서는 목민관(牧民官)으로서의 전범(典範)을 보이는 등 그 명성이 자자했다. 그 후손들 가운데 문과 급제자 162분, 생원 168분, 진사 236분, 16분의 정승, 55분의 판서, 8분의 대제학, 3분의 왕비를 배출했으니 말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종가는 특별한 경우(養子)가 아니라면 맏집으로 내려오는 것이 상례다. 그렇다면 김영(金瑛)이란 분은 도대체 어떠했기에 이처럼 종가 안내문에서 완전히 빠졌고, 그 후손들 또한 전혀 소개되지 않았을까? 삼당공 김영은 김영수의 장자(長子)로서 학덕은 물론 관료로서의 업적까지 두루 갖춘 분이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후손들은 반가(班家)의 전통을 수립해 안동 소산(素山) 본향(本鄕)을 지금까지 잘 지켜왔다는 사실이다. 그는 21세에 생원과 진사시에 동시에 합격한 뒤 병인년 별시(연산군12, 1506) 때 32세로 문과에 급제했다. 4살 적은 서윤공보다 7년 전에 이룬 대과 급제였다. 그 뒤 수찬, 정언, 교리, 김제군수, 장령, 동부승지, 강원도 관찰사를 두루 지냈다. 삼당이 급제한 문과는 연산군 당시에 치러진 마지막 대과였는데, 동방(同榜)으로는 김안로(金安老, 壯元)가 있다. 삼당은 무오사화(戊午史禍)를 당한 분들의 억울한 죄를 회복시켜 줄 것을 상소하는 등 바른 일에 앞장섰던 강직한 선비요 관료로 살다가 54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이처럼 삼당공과 그 아우인 서윤공은 모두 문과에 급제해 삼당공은 청풍계(淸楓溪), 서윤공은 장의동(莊義洞)으로 나누어 살다가 후일 삼당공은 직계 자손에게 이 터를 물려준 뒤 이곳을 떠나 안동 본향으로 귀거래(歸去來)했다. 삼당공의 후손 가운데 저명한 이로는, 손자에 창균(蒼筠) 김기보(金基報, 1531∼1588)가 있는데, 그는 청송(聽松) 성수침(成守琛)과 퇴계(退溪)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벽오(碧梧) 이문량(李文樑, 1498~1581)의 사위로 학문과 행검으로 알려졌다. 또한 조선 후기의 인물로 동야(東埜) 김양근(金養根)이 있는데 30세에 문과에 급제해 형조참의를 지내는 등 조야(朝野)에 널리 드러났다. 이렇기 때문에 결코 본향을 지킨 맏집이 종가 안내에서 누락될 하등의 이유가 없는 것이다. 더구나 삼당공의 후손들이 살고 있는 소산(素山)을 중심으로 한 안동에는 서윤공 직계 후손들이 단 한 집도 세거(世居)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은 ‘억울한 형님에다 답답한 후손들’이라는 생각을 하게 만들었다. 다음으로 지적할 부분은, 앞의 사안에 비하면 다소간은 사소한 것이다. 그러나 알만한 이들조차 잘못 쓰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이를 바로잡을까 해서다. 안내판의 내용 중 ‘고손은 병자호란 때 끝까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던 예조판서 김상헌’ 부분이다. ‘고손’은 ‘고손(高孫)’이라고 쓴 것일 터. 서윤공 김번의 고손이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고손’은 ‘현손(玄孫)’이라고 쓰는 것이 바른 표기다. 경우에 따라서는, 고조(高祖)와 상대적인 고손(高孫)으로 쓸 수 있으니 잘못이 아니라고 여길지 모른다. 그런데 이는 단순히 사랑방에서 들은 것만으로 잘못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상당한 근거가 있다. 예를 들어 보이겠다. 『명재유고』 번역본의 주(註)에 보면, ‘문숙공(文肅公)’을 설명하면서, "시조 윤신달의 고손(高孫)인 윤관(尹瓘)으로, 문숙은 그의 시호이다.”라 했다. 또한 『조선왕조실록』 번역본 주석에서도 또한 "서영보(徐榮輔)가 서종태(徐宗泰)의 고손(高孫)이므로 이런 말을 한 것이다.”라 했다. 권위 있는 서책에조차 고손이라고 쓰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는 잘못이다. 아래 글을 읽어볼 필요가 있다. 『지봉유설(芝峯類說)』 권7 「문자부(文字部)」에 나오는 내용이다. "무릇 고조(高祖)라는 것은 고대(高大, 높고 큼)에서, 현손(玄孫)은 현원(玄遠, 아득하고 멈)에서 의미를 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조(高祖)는 있어도 고손(高孫)은 없고, 현손(玄孫)은 있지만 현조(玄祖)는 없다. 그래서 지금 현조(玄祖)니 고손(高孫)이니 하는 것은 모두 잘못된 것이다.(凡稱高祖者는 取其高大之義요 玄孫者는 取其玄遠之義라 故語曰有高祖 而無高孫이요 有玄孫 而無玄祖니 今謂玄祖高孫者는 誤矣라)” 첨언한다면, "김영수는 어려서부터 무예가 출중하였고, 음서로 벼슬에 나가 의금부 도사, 사헌부 장령, 영천군수 등을 지냈다.”란 부분에서 음서(蔭敍)를 주석으로 처리해 안내문 하단에 작은 글씨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에 공을 세웠거나 높은 벼슬을 한 양반의 자손을 과거시험 없이 관리로 채용하는 제도’라는 설명을 곁들이고 있다. 오늘날의 별정직 공무원과 같은 것이나 오해의 소지가 없지 않다. 영천군수는 영천군수(榮川郡守)인지 영천군수(永川郡守)인지 분명하지 않다. 장령공 김영수는 영천군수(永川郡守)를 지냈다. 한자로 병기(倂記)했으면 좋았을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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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인청 춤꾼 이동안한국무용가 정주미 춤꾼이 스승 이동안 명인에 대한 에피소드와 함께 재인청 춤에 대한 자신의 진솔한 여정을 에세이집으로 출간하여 화제다. 이동안 명인은 재인청의 예맥을 이어 내린 세기의 광대로 김인호의 제자다. 명창 이동백과 근대무용의 아버지 한성준의 증언에 따르면 김인호는 구한말 순종과 함께 대청마루에서 놀았던 광대 중의 광대였던 인물이다. 저자 정주미 춤꾼은 스승 이동안과의 만남과 사사, 그리고 스승의 사후로 이어지는 관계 가치를 진솔하면서도 질곡한 문장으로 소개한다. 스승과 제자라는 사이에서만 가능할 수 있는 소통의 과정을 여느 무용평론가의 문장과는 현저히 다른 편안하면서도 역사적인 통찰의 눈을 보여준다. 저자는 프롤로그에서 "나는 춤꾼이다. 우리 춤에도 이른바 여러 유파가 있어서 굳이 유파 속에 나를 넣는다면 ‘재인청’이라는 유파의 춤꾼이다. 그런데 재인청은 한국무용사의 입장에서는 결코 유파가 아니다. 정리하면, 재인청은 하나의 유파인데 유파가 아니라는 얘기다. 이 모순적 진술을 해명하기 위해” 자신의 시각을 에세이 형식으로 이야기한다. 이 책은 저자가 현실에서 만난 날줄의 스승 이동안은 낯선 언어와의 만남이라 규정한다. 그 낯선 언어들이 해독되는 지점이 바로 역사 속에서 만난 씨줄의 스승 이동안이 날줄과 교차하는 지점이다. 여기에 이르러서야 일정한 어법이 있었음을 이해하고 드디어 스승의 정체를 파악하는 구조를 선택하고 있다는 점에서 쉽게 읽히는 한 편의 인물론이자 무용사라 할 것이다. 저자는 스승의 정체를 파악함과 동시에 자신의 정체성과 앞으로의 지향에 선명성을 획득하고 있다. 에필로그의 마지막 문단은 이를 잘 보여준다. "너무도 감사한 일이다. 내가 이 책을 쓰기 위해 쏟은 시간이 이동안 선생께서 이 땅에 쏟은 시간에 대한 보답이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선생의 삶이 ‘내가 왜 재인청 춤을 추어야 하는지’에 대한 답변이기를 소망한다. 그리하여 이 책이 스승 이동안 춤꾼을 향한 제자의 헌사(獻辭)일 수 있기를 간절히 소망하는 것이다.” 정주미 -재인청춤전승보존회회장 -재인청 이동안태평무 전승자 -국가무형문화재 제 27호 '승무' 이수자 -경남무형문화재 제 21호 '진주교방굿거리춤' 이수자 -개천예술제국악경연대회 대상 -한민족예술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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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유산 한국의 서원’, 소수서원 박물관 안내문, 소홀하다.필자는 몇 해 전부터 여러 번 ‘괴헌고택(槐軒古宅) 기증유물 전시’를 관람한 바 있다. 올봄에 또 안내를 맡게 되어 다시 찾았다. 소수서원 본 전시실의 주요 전시물이 복제 또는 모조품으로 대체 전시되고 있는 것에 비해 이곳 기증유물 전시관은 그래도 그 대부분이 진품이라서 보기에 좋았다. 필자는 순흥(順興)이 고향임에도 소수박물관에서는 단 한 번도 국보 제111호인 안향 초상이나 보물 제717호인 주세붕 초상 진품을 배관(拜觀)한 적이 없다. 나만 그런가 싶어, 1938년생으로 순흥향교 전교(典校)까지 역임한 유림 지도자인 가친에게 여쭈어도 본 적이 없으시단다. 영주문화원장을 지낸 계부(季父) 또한 그러했다. 그렇다면 도대체 누구에게 보여주기 위한 국보요 보물이란 말인가? 이처럼 소수박물관 전시실에는 조잡한 형태로 복제된 안향과 주세붕의 초상화가 조명을 받은 채 전시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한 현실이다. 괴헌고택은 조선 정조 때 벼슬을 한 괴헌(槐軒) 김영(金瑩:1765∼1840)이 정조3년(1779)에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집인데, 1985년에 경상북도 민속자료 제65호로 지정된 영주 지역의 대표적 반가(班家)이다. 초입에서 맞닥뜨리게 되는 통영대갓과 고색창연한 당시 관복 그리고 주인공 김영의 문과급제 교지는 여러 번 보아도 물리지 않는 명품들이다. 선비상에 가지런하게 펼쳐진 절첩본(折帖本) 형태의 가승(家乘) 또한 놓칠 수 없는 보완품(寶玩品)다. ‘가승’이란 족보의 한 형태로 혈통적 근원과 그 내력을 직계조상을 중심으로 밝힌 책 또는 문건이다. 펼쳐진 가승은 잔글씨로 쓰였을 뿐만 아니라 아주 간략한 정보만 담고 있어서 집안의 내력을 살피기에는 아쉬움이 없지 않았다. 그런 생각을 하던 중 그 옆으로 연안(延安) 김씨(金氏) 1세(世)부터 현재 26세(世)까지 도식화해 컬러 출력물로 큼직하게 걸려 있는 것이 보였다. 고맙게도 그곳에는 주인공들의 생몰년은 물론 누구의 몇째 아들, 자(字), 호(號), 과거(過擧) 이력, 역임한 주요 관직, 배위(配位)의 관향(貫鄕)까지 망라(網羅)해 두었다. 이 가문의 중심인물인 김경집(金慶集)과 김영(金瑩) 부자로 시선이 옮겨갔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몇째 아들이라고 쓴 부분이 ‘제이자(弟二子)’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가. ‘제이자(第二子)’가 바른 표기다. 문제는 그 한 곳만 잘못된 것이 아니다. 10여 곳 모두 그렇게 표기되어 있었다. 문제다 싶어서 좀 더 자세히 읽어보았다. 짐작대로 김경집(金慶集)의 자(字)는 ‘형중(亨中)’이 아닌 ‘향중(享仲)’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는 ‘통정대부(痛政大夫)’로 괴헌의 8대조인 10세 김복흥(金復興)의 배위인 ‘함양(咸陽) 박씨(朴氏)’는 ‘성양(成陽) 박씨(朴氏)’로 잘못 표기하고 있었다. 한두 군데라야 어쩌다 있을 수 있는 잘못이라고 이해라도 할 터인데, 이쯤에 이르면 할 말을 잃게 된다. 몇 년 동안 이대로 전시되고 있는 현실 앞에 더 꼼꼼하게 읽는 일은 이제 필자의 소임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만두었다. 이곳은 진작 ‘선비의 고장’이란 자긍에 더해 근자에는 소수서원이 유네스코로 측부터 ‘세계유산 한국의 서원’으로까지 등재되어 이제는 명실상부한 우리나라의 명소로 자리 잡은 곳이다. 더욱이 안향과 주세붕 그리고 퇴계의 얼이 서린 소수서원은 선비촌과 선비수련원 그리고 선비 세상으로 이어지는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이에 누가 되지 않는 박물관 운영과 전시물과 대한 전문적이고도 정확한 안내가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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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공동체 현실문제에 대한 민속학의 반응저자들을 대표하여, 이진교 (실천민속학회장) 국립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는 2020년 9월부터 ‘지역 공동체 현실문제에 대한 민속학적 대응과 전문인력 양성’을 주제로 4단계 BK21사업을 수행 중이다. 민속학 연구에서 지역 공동체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지역 공동체는 다양한 형태의 민속이나 전통문화가 생성․전승된 공간이며, 민속학 연구의 뿌리를 두고 있는 터전과도 다름없다. 따라서 민속학의 성립부터 발전단계는 지역 공동체에 대한 이해의 지평을 확대하는 과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민속학에서 지역 공동체는 늘 중요한 문제였다. 하지만, 그동안의 민속학은 주로 과거에 초점을 맞추어 민속이나 전통문화에 관한 연구를 진행한 경향이 강했다. 그렇기 때문에 고령화나 인구감소를 비롯한 지역 공동체가 직면한 현실문제에 대해서는 적절히 대응하지 못한 한계 역시 학계 내에서 지적되어 왔다. 결과적으로 주민들이 겪는 매일매일의 일상이나 그것이 실천되는 시공간으로서의 지역 공동체에 관한 민속학적 연구는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로 남게 되었다. 따라서, 지역 공동체 현실문제에 대한 천착은 그동안 민속학 연구의 틈새를 보완하며, 주민의 삶과 문화를 총체적으로 이해하는 데에 기여할 것이라 기대된다. 제1부는 지역 공동체의 재인식과 문제설정을 다룬다. 「인류세와 지방소멸 시대, 공동체문화의 가능성」은 인류세와 지방소멸이 결국은 동일한 문제 영역에서 발생한 문제라고 보며, 그것에 대한 근본적인 원인을 현대 자본주의가 낳은 병폐와 관련짓고 있다. 나아가 인류세와 자본세로부터 그 피난처로서 새로운 가치실천 양식의 가능성을 공동체 문화를 통해 탐색한다. 「귀농인의 지역사회 적응과 사회적 자본」은 농촌 지역 ‘귀농인’의 지역사회 적응 문제를 살피고 있다. 지역의 귀농인 담론에서 그들은 소멸 위기에 처한 지방의 대안적 존재로 기대되지만, 한편으로는 토착 주민과 차별화된 존재로 위치 지어진다. 이 글은 귀농인의 지역사회 적응이 결코 귀농인 개인의 노력만으로 해결될 수 없으며, ‘귀농인-마을(지역)사회-지자체(정부)’등의 상호적응과 관련된 문제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지역 공동체의 형성은 그들의 상호작용 과정과 결과임을 환기하고 있다. 「동해안 지역의 기후변화와 어촌의 현실」은 기후변화가 바다 생태계 그리고 어민들의 어로 활동을 비롯한 생활세계에 미친 영향을 파악하고, 기후위기라는 거대한 흐름 속에 놓인 어촌의 현실을 살피고 있다. 기후변화의 국면 속에서 영덕 지역에는 수온 양극화, 해저 생태계의 변화, 폭풍해일의 심화 등의 현상이 뚜렷하게 감지된다. 이 연구에서는 생태계 변화에 따른 주민의 인식과 대응을 심층적으로 살피는 한편, 이러한 혼란을 야기한 인류세에 대한 경고의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다. 제2부는 지역 공동체의 문화적 전통과 변환을 다룬다. 「한말 지역 공동체 구성원의 역할 형평성 전통」은 한말韓末 지역 공동체 공동의 목표 달성을 위한 모금의 사례를 통해, 그 구성원들 사이의 형평성 적용 방식과 유형을 밝히고 있다. 이 글에서 제시한 형평성의 개념은 지역 공동체 운영의 핵심원리로, 현대사회에서도 그 적용 가능성이 높은 개념으로 주목된다. 「해안 지역 민간신앙의 용신龍神과 자연 이해」는 일반적으로 수신水神으로 알려진 해안 지역 용신의 위상을 재조명한다. 용신은 풍어를 가져다주는 유일한 신이 아니며, 오히려 그것이 담당하는 특수한 기능은 수사자水死者의 관장이다. 인간은 용신을 일방적인 숭배와 기원의 대상보다는 자유롭게 소통하고 요구할 수 있는 인간과 가까운 존재로 여긴다. 이 연구는 해안 지역의 신 개념은 물론 삶과 문화를 이해함에 있어서 자연에 대한 인지모델 같은 자연 이해의 새로운 관점이 필요함을 제기한다. 「한국 무속 ‘표시 체험’대한 연구」는 한국 무속의 종교 체험 중 ‘표시 체험’에 주목한다. ‘표시 체험’은 내림굿 이후 무당의 무업 실천과 직결된 것으로, 무당들은 이를 소명으로 받아들인다. 이 글에서는 ‘표시 체험’의 사례들을 분류하고 해석의 측면에 접근한다. ‘표시 체험’은 무당의 운명적인 사제로서의 체험이자 한국 무속의 소통 방식의 하나이다. 또한, 무당과 손님 사이에서 중요한 소통 촉매로서의 의미와 역할을 해명하고 있다. 「한국전쟁 이후 옹기공방에서 여성의 역할 변화」는 그동안 옹기 생산문화 연구에서 소외되었던 여성의 존재와 역할에 주목한다. 과거 옹기생산문화에서는 남성의 역할만이 조명·강조되었지만, 이 연구에서 주목한 것은 옹기장인 가족 특히 여성의 참여와 역할이다. 이를 통해 전통공예 분야는 생산이나 기술적인 측면만이 아니라 장인의 생활문화를 아울러 이해해야 하며, 그와 관련된 생산문화의 다양한 측면을 고찰할 필요가 있음을 제안하고 있다. 제3부는 지역 문화의 활용 가능성과 전망을 다룬다. 「밀양농악의 전승과 의의」는 1970년대 초에 만들어진 현대의 농악으로서, 고을농악이 갖는 탈공동체성과 뛰어난 치배에 의존한 전승의 실상을 잘 보여준다. 이 글에서는 밀양농악이 현대의 민속 가운데 하나인 고을농악의 창출과 전승양상을 살필 수 있는 적절한 사례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고 있다. 「‘80년대’저항 문화와 민속의 지역사회 귀환」은 영양댐 건설 계획에 따라 수몰될 위기에 처한 지역과 마을 공동체를 지킨다는 의미로 기획․실행된 장파천 문화제의 민속학적 의미를 다룬다. 이 글에서는 현대 한국사회에서 복잡다단한 민속의 재구성 과정을 밝힘과 동시에, 지역사회나 농촌에서 민속이 지닌 대안문화로서의 가능성을 탐색하고 있다. 「고향영화Heimatfilm에 대한 독일 Tübingen대학 민속학연구소의 연구 배경과 방법」은 고향에 대한 독일민속학자들의 인식적 특징, 대중매체 대한 연구 경향, 고향영화 장르의 유형 분류와 연구 방법을 제시, 분석하고 있다. 이 연구에서 고향은 실재의 공간이기보다는 고향을 떠난 혹은 도시에 사는 사람의 상상의 공간이며, 고향영화란 이들의 상상을 확인시켜주는 기능을 수행한다고 보았다. 나아가 ‘민속’의 상품화’중 레트로 현상의 발생 배경 그리고 민속학의 연구 가능성을 제시하고 있다. 「20세기 후반 문경도자기의 기종과 정체성 변화」는 식기류를 주로 생산했던 문경지역의 사기장들이 20세기 후반부터 점차 새로운 기종을 만들게 된 사회문화적 배경과 과정을 해명하고 있다. 특히 사기장의 경험담을 중심으로 전통기술의 보존과 ‘만들어진’전통 상품이라는 두 요소가 어떻게 공존하면서 다면적인 정체성을 형성했는지 분석한다. 이 글은 다양한 환경 변화가 전통기술 보유자들에게 미친 영향과 그로 인한 정체성 변화를 당사자들 시각에서의 이해 가능성을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발간을 위해 옥고를 제공해준 필진께 감사의 말씀을 드린다. 또한, 4단계 BK21사업을 통해 이 책의 출판비와 더불어 안동대 민속학과 대학원생들이 경제적 어려움 없이 공부할 수 있도록 장학금을 지원해 준 한국연구재단에도 특별한 감사를 표하고 싶다. 성가신 출판 작업을 수행해 준 홍종화 사장님을 비롯한 민속원 관계자분들, 원고의 수합과 정리에 힘써준 이중구 박사와 서별 박사과정생에게도 고마움을 전한다. 이 책을 통해 지역 공동체의 위기 진단과 대안 마련에 민속학이 조금이나마 기여하길 바라본다. 글쓴이 소개(집필순) 이영배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민속학연구소장을 맡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공동체문화 실천의 역사적 원천과 그 재생의 특이성」("한국학연구", 2019), 「공동체문화 연구의 민속적 패러다임 정립을 위한 기획」("인문학연구", 2019), 「공동체문화 실천의 동인과 대안의 전망」("인문학연구", 2020) 등이 있다. 이진교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현재 대학원 민속학과 4단계 BK21 교육연구팀장이다. 지역 공동체 현실문제에 관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마을사회의 위기와 의례적 대응」, 「지역사회의 연대와 저항」 등의 연구논문과, "문화권력과 버내큘러"(공저), "현대화와 민속문화"(공저) 등의 저서가 있다. 이중구 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 BK21교육연구팀에서 학술연구대우교수로 재직중이며, 주로 마을사회와 어촌문화에 대해 연구하고 있다. 주요 논문으로는 「인접 마을 간의 관계성 변화」, 「어촌사회의 공공개발 수용과 환경 변화」, 「분단의 현실과 접경지역의 어민사회:고성군 현내면 대진리의 사례」 등이 있다. 배영동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농경문화, 음식문화, 지역문화를 연구하고 있다. 논문으로는 「궁중 내농작과 농가 내농작의 의미와 기능」, 「산업화에 따른 마을공동체 민속의 변화와 탈맥락화」, 「고조리서 "음식졀조飮食節造" 저술의 배경 문화 탐색」 등이 있고, 저서로는 "농경생활의 문화읽기", "민속지식의 인문학"(공동) 등이 있다. 이용범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한국민속종교와 관련 의례문화에 관심을 갖고 있다. 대표 논저로 Korean Popular Beliefs(공저), "도시마을의 민속문화"(공저), 「한국 전통 죽음의례의 변화:유교 상장례와 무속의 죽음의례를 중심으로」 등이 있다. 정은정 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 박사과정을 수료 후, 현재 무속 공동체와, 지역의 협동조합에 관심을 갖고 연구 중이다. 대표 논문에는 「한국 무속 종교 체험에 대한 연구-‘표시 체험’을 중심으로-」가 있다. 이한승 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 BK21교육연구팀에서 학술연구대우교수로 재직중이며, 공동체 문화와 무형유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표 논저에는 "옹기를 만드는 사람들", 「1970년대 광명단 옹기에 대한 논란과 그 문화적 파장」 등이 있다. 한양명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민속예술과 축제, 놀이에 대해 공부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는 "물과 불의 축제:선유․낙화놀이의 전통과 하회 선유줄불놀이", "용과 여성, 달의 축제:영덕의 동제와 대동놀이", 「민속예술을 통해 본 신명풀이의 존재양상과 성격」, 「솟대놀음의 변화와 놀음의 미학」 등이 있다. 이상현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며, 주요 논저에는 「독일 민속학개론서의 일상문화와 민속학연구소의 일상문화」, 「민속학의 공동체적 마을 인식의 특징과 문제점」, "世界遺産時代の民俗學" 등이 있다. 서 별 안동대학교 대학원 민속학과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장인들이 조직한 공동체의 문화와 무형유산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다. 대표 논저에는 「20세기 후반 문경도자기의 기종과 정체성 변화」, 「문화정책과 장인조직으로 본 문경지역 도자기의 정체성 변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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