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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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운의 '국악개론', 개정증보판학계와 현장에서 쌓은 풍부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나온 국악이론 지침서이다. 필수 입문서로 자리잡은 '국악개론'의 개정증보판이다. 이번 개정 증보판에서는 그동안 국악계의 변화를 수용하여 일부 용어와 표기를 수정하였으며, 최근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이론과 사료, 이미지 등을 보강하였다. 이 책은 ‘이론·악기·장르·간추린 국악사’의 4가지 장으로 구성된다. 텍스트 중심의 기존 교재와 차별화를 두고 내용적 균형감을 위해 다양한 악기, 악보, 연주 모습, 사료(고(古)악보, 유물, 풍속화 등) 이미지를 올 컬러로 수록하였으며, 깔끔한 디자인을 통해 가독성을 높였다. 핵심 키워드를 통해 한눈에 개념 파악이 가능하도록 구성하였고 ‘정간보에 사용되는 여러 가지 부호’, ‘옛 기보법’ 등 부록을 수록하여 이해도를 높였다. 크게 4가지 장으로 구성된다. ‘제1편 전통음악의 이론’에서는 분류체계를 설명한다. 국악을 궁중음악, 문인음악, 민속음악, 예술음악, 종교음악, 창작국악으로 분류하여 국악을 처음 접하는 학습자의 구조화를 돕는다. 또한 초·중등교사 국악연수에서 악조론과 기보론을 10년 간 강의해 온 저자의 경험을 바탕으로 기본에 충실하게 구성하여, 국악 지침서로써도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다. ‘ 제2편 국악기’에서는 분류별 다양한 악기를 수록, 설명과 텍스트 중심에서 탈피해 악기, 연주 모습 등 이미지를 올 컬러로 생생하게 담아냈다. ‘제3편 전통음악의 갈래’에서는 특정 장르에 치우치지 않고 이론과 사회·문화 사이를 균형감 있게 서술했다. 또한 저명한 ‘현장형 학자’로서 저자가 채집·채보한 향토음악을 바탕으로, 민요의 토리를 비롯하여, 저자가 연구해 온 논문의 집약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세부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이 책은 국악과뿐만 아니라 서양음악 전공의 대학생과 사범대학 및 교육대학의 국악이론 교재로 활용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제4편 간추린 국악사’ 역시 교양과목의 교재로 활용될 것에 대비하여 다양한 악보와 사료를 풍부하게 실었다. 부록으로 수록한 기보법과 고악보 역시 지도용으로 유용하도록 올 컬러로 수록하였다. 국립국악고등학교(거문고 전공)와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이론 전공)를 졸업하고 한양대학교 대학원 국악학과에서 음악석사(이론 전공)를,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고전 시가 전공)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충청남도 서산 서령고등학교 음악교사, KBS-FM 프로듀서를 거쳐, 강릉대학교 음악과 교수, 한국학중앙연구원(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교수·정보센터소장·대학원장, 한양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교수를 역임하였고 (재)국악방송 사장에 이어 현재 국립국악원 재직 중이다. 한국음악협회 감사, 한국민요학회 회장, (사)한국국악학회 기획이사·상임이사·부이사장·편집위원장·이사장을 역임하였으며, 한국음악사학회·한국시가학회·한국시조학회 회원이다. 문화재청·서울특별시·인천광역시·경기도 문화재 위원을 역임하였고, 현재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이북5도 문화재위원으로 활동 중이다. 제57·58·60회 한국민속 예술축제 추진위원장을 역임하였다. 평화방송 〈흥겨운 우리 가락〉, 강릉MBC 〈일요명곡산책〉, KBS-FM 〈흥겨운 한마당〉·〈국악의향기〉, KTV 〈우리 가락 우리 춤〉, GBF 국악방송 〈국악박물관〉·〈풍류산책〉·〈국악산책〉의 진행자로 활동하였다. 그간의 활동으로 제3회 관재국악상(2008), 제13회 난계악학대상(2009), 옥관문화훈장(2018), 녹조근정훈장(2019)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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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날은 4월 27일, "임금과 민중이 함께 부른 노래, 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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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날은 12월1일, "서도소리 문화재 지정 보고서 제출 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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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날은 1월 21일(양력), "아악이 처음 연재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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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사] 제1회울릉도전국영창대회, "울릉도아리랑의 전형성" 획득‘경창대회’와 전형성 전세계 41개 아리랑전승단체의 존재는 지남 12월 5일 강원도 정선에 건립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비’ 기단에 명문화 됨으로써 확인이 된다. 그동안 이 아리랑 전승단체는 명예롭게도 자발적 결성체이다. 이는 명예로운 것이다. (사)울릉도아리랑보존회는 명예로운 울릉도아리랑의 자발적 전승단체이다. 비로소 울릉도아리랑은 제도적 전승 활로를 맞게 된 것이다. 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이번 제1회 울릉도아리랑 경창대회 개최이다. 경창대회는 내적으로는 전승 활성화를 꾀하는 것이고, 외부적으로는 타지 국악인들에게 존재를 알려 전국으로의 확산 계기를 마련하기 위한 것이기 때문이다. 제1회인 만큼 다른 지역 아리랑경창대회 같지는 않을 것이다. 문제는 경비 등의 어려움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며 개최하는 용기가 박수를 받을 만한 것이니, 이 행사를 통해 보존회 회원들 간의 결속을 확인하고 해결능력을 점검하는 것으로 성과를 생각한다면 이 역시 박수를 받을 만한 것이다. 이제 비로소 울릉도아리랑은 문화재보호법에서 규정한 전형성을 입증받게 되었다. 울릉도아리랑이 독특한 지역성과 다양성을 입증하는 아리랑으로 평가를 받기 바란다. 첫 경창대회를 진심으로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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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악신문 선정 국악계 10대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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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년 국악계 10대 뉴스 1차 선정, 29題2022년 국악계의 이슈, 성과, 변화상을 볼 수 있는 국악신문 선정 ‘국악계 10대 뉴스’ 1차 26제가 선정되었다. 2차 선정위와 원로자문단의 최종 심의를 거쳐 ‘10대 뉴스’ 선정, 29일 발표한다. 21일까지 각 기관 단체 홍보팀을 통해 40여제를 응모 받아 22일 1차 선정에서 24제를 아래와 같이 선정했다. 제1차 28제 선정 뉴스(응모 順) 1 조선일보, 조순자 가곡 가사 보유자 방일영국악상 수상 2 국공립 국악단체 수장 임명(선정) 난맥상ㅡ국립극장장(미정), 국립국악원장(낭설), 국악 방송(비전공자 임명 논란), (사)국악협회장(교체 미완) 3 국립국악원, 송년 공연 성공 이룬 ‘임인진연’ 4 안숙선 가야금병창에서 판소리 ‘춘향가’ 보유자로 재지정 5 2013년 시작된 아리랑 주제 ‘서울아리랑페스티벌’ 행사 폐기 및 총감독 별세 6 문화계 별 이어령, 김지하 선생 별세 7 정선군과 40개 지역 아리랑 전승단체 참여, 아리랑 등재 10주년 기념,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비 건립 8 문화재청, 국가 종목지정 전승공동체 맞춤형 지원 제도화 발표(아리랑, 제다, 씨름, 해녀, 김치담그기, 제염, 온돌문화, 장 담그기, 전통어로방식-어살, 활쏘기, 인삼재배와 약용문 화, 막걸리 빚기, 떡 만들기, 갯벌어로) 9 국립극장, 해외 초청 공연 호평 받은 ‘트로이의 연인’ 10 유튜브 아리랑 3600곡 탑재 ‘정창관의 아리랑’ 기념공연 11 문화재청, 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 시행령 개정 1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 원칙’ 선포 13 전국노래자랑 진행자 송해, 재담꾼 김법국(김뻑국)(1937년생/김진환)선생, ‘선소리산타령’ 최창남 (1935년생), 황용주(1937년생) 예능보유자 별세 14 문화재청, 2022년 대한민국 탈춤-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목록 등재 15 국립무형유산원, ‘명인 오마주-이은주, 김석출, 박봉술 편’ 공연, 16 문화재청, 창덕궁 후원에서 만나는 궁중 음악과 춤, ‘창덕궁 풍류’ 공연 17 문화체육관광부, '대한민국 문화도시' 지정(서울을 제외한 광역시권(인천, 대전, 부산, 대구, 광주), 경기권, 충청권, 강원권, 경상권, 전라권, 제주권 등 7개권역으로 구분-문화를 통한 지역의 지속 가능한 발전, 문화를 통한 지역사회 문제 해결, 지역주민 문화 향유 확대, 지역 문화 기반 조성 및 역량 강화 등을 달성 목표) 18 국립무형유산원, 인간문화재 10인‘, 전통예능의 품격’ 공연 19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밀양 분원’ 건립 확정 20 문화재청, 60년 만에 정책방향 대전환, ‘문화재’에서 ‘유산(Heritage)’ 개념 사용 21 문화재청, 600년전 세종대왕 ‘관현맹인(管絃盲人)’제도 재현 공연(관현맹인전통예술단), 경복궁 집경당 22 문화재청, 문화유산 가치보존을 위한 ‘한국원칙’ 선포(국제 사례 호주 ‘버라 헌장(Burra Charter)’, 영국 ‘역사적 환경의 지속가능한 관리를 위한 보존 원칙, 정책과 지침’, 캐나다‘캐나다의 역사적 장소 보존을 위한 표준과 지침’, 중국 ‘중국 문물고적 보호준칙’) 23 공연문화예술 6개 관계기관(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국립국악원, 국립극단, 국립아시 아문화전당, 국립중앙극장, 한국문화예술위원회),‘공연문화예술자료 수집․보존과 공동서 비스 활성화를 위한 업무협약’ 체결 24 문화체육관광부, ‘공연전통예술분야 경연대회 장관상장 지원기준 발표’(예비평가 최소 3년 이상 지속한 전국 규모 대회로, 상장심사위원회의 심사를 통해 선정함) 25 전통공연예술진흥재단, 60년 ‘한국민속예술제’ 기록의 산물, 민속예술 디지털 아카이브 ‘민속곳간’ 공개 26 국립무형유산원, ‘2022 대한민국 무형유산대전’-자연과 사람을 잇는 무형유산 13개 공연. 27 국립무형유산원, ‘이수자뎐’-무형문화재 이수자 이예랑, 박천경, 백진희, 공민선, 원진주 정수인, 김재민, 방지원, 성슬기 28 국악방송, 송년특집-22년 대통령상 수상자를 만나다 29 문체부, 예산이 2022년도 7조3968억에서 2023년 6조7408억원으로 9% 가까이 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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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달 8일 김진옥, 정명자, 박경랑, 3인3색 명무전길라잡이 강신구 / 전통예술평론가 박경랑선생은 어디서든 준비된 곳이라면 멋을 알고 휘어 감는 관능미를 지닌 무용가라 할 수 있다 어릴 적 4세부터 경남 고성에서 외증조 김창후로부터 대를 이어 영남춤의 맥을 올곧이 이어 가고 있다. 부산, 진주시절은 춤 선생 김수악, 김진홍, 동래 권번(捲番)의 마지막 기녀인 강옥남으로 부터 엄격한 규율과 강한 성품으로 무용 수업을 받아 오늘날 든든한 교방청춤 전승자로 지켜 온 분이다. 교방청춤, 교방소반춤, 교방승화무(敎坊僧花舞), 교방검화무(敎坊劍花舞), 교방건무(敎坊巾舞) 등, 문화재 지정종목에 가려 묻히고 사라져 가는 선현들이 추어 온 교방가무연 춤가락이 발현되지 못한 점을 못내 아쉬워한다. 박경랑은 50여년을 전통춤과 함께 살아 온 2세대 중심 춤꾼으로 깊숙이 자리매김한 본능적인 끼가 확연히 자리 잡힌 풀뿌리 춤꾼이다. 명인의 등용문인 전주대사습 무용부 장원, 서울전통공연예술대회 대통령상, 김수악류 진주교방굿거리 1기 이수자로서 영남 교방청춤하면 바로 박경랑을 전무후무한 독보적으로 떠올릴 만하다. 반듯한 춤 태와 완성도 높은 내공으로 무대 적응을 철저하게 표현해 냄으로서 자신만의 작품을 극대화 시키는 곰삭은 멋과 한을 표현해 낸다. 이로 하여 원형을 재현하는 신명난 춤 세계를 구현 하므로서 진한 감동과 여운을 남기는 춤꾼이다. 문둥춤을 보노라면 공옥진여사의 짠한 마음은 누구나 같은 마음 일찐데.... 김진옥선생은 열정과 진취적인 무용지도자로 단아한 전통미를 갖춘 춤꾼이다. 일찍이 스페인 무용의 1세대인 주리선생으로부터 인체의 기초를 다진 다부진 몸매로 우리 춤 몰두를 위해 마산 출신 김해랑, 최현, 정민에 이은 2세대 명맥을 이어 온 성실하고 폭 넓은 활발한 춤꾼이다. 우리 춤이 시대에 가려진 7,80년대, 이매방과 정민이 우정이 두터운 사이였던 시기, 무용가 양정화는 두 분의 선생을 가까이 모시면서 일본 오사카를 오가며 묻혀져 가는 전통의 맥을 계승하고자 힘든 시기를 겪은 무용계에 깊이 점철된 무용가 분이셨다. 김진옥은 1.5세대인 양정화, 정재만에 이어, 이 시기를 놓치면 안 되겠다는 신념과 열정으로 정민류의 교방무, 교방타고무, 교방검무 등의 기법을 오롯이 이어 가는 역정에 사로잡힌 춤꾼이다. 김진옥은 정민류교방춤보존회을 발족, 전승에 혼신을 바쳐 오늘에 이르러 수많은 제자 양성과 다양한 수상 경험을 이루는 지도자로서의 면모를 갖춘 괄목할 현실 전통무용가로 자리를 잡았다. 박병천의 진도북춤, 벽사 춤에 대한 열의와 방송매체와 여러 대학에서 교육과목으로 몫을 다지면서 전국 규모의 전수활동으로 우리 춤 본연의 역할을 담담히 수행하고 있다. 멋과 흥을 품어 내며 풍류색색의 가락은 휘엉청 감아내는 치마폭에 여실히 자아냄을 찾아 볼 뜻있는 춤판이다. 방방곡곡 춤꾼이어라... 정명자선생은 5세부터 쉼 없이 춤 공력에 전념으로 살아 온 한마디로 팔방 춤색이 역력한 매력 있고 다부진 춤꾼이다. 1983년 정명숙 명무 문하에 입문, 1985년 전사습 명인, 황재기 명인, 김숙자 명무에 이어, 1980년대 후반, 차례로 이동안, 박병천, 김진걸, 이매방, 김수악, 권명화 명무에게 전통춤 사사에 빠짐없이 수학한 이수자로 검증된 무용가이다. 제1회 발표회가 1986년 바탕골소극장에서의 인연과 문예회관(현, 아르코)에서 제2회 개인공연, 42회에 걸친 제작발표회, 전통을 바탕으로 한, 익히고 삭힌 민족의 혼을 담은 대형 무용극, 뮤지컬"이육사, 이순신의 바다, 의병장 곽재우, 문무대왕, 선덕여왕, 북소리, 농자천하지대본, 화랑의 혼”, 여성국극 "혜경궁 홍씨, 햇님 달님, 황진이” 창작화 작업에 초청되는 등, 역사적 인물을 중심으로 위대한 업적을 다룬 시대적 표상 작품을 올린 바 있다. 미래 지향적인 춤꾼 정명자선생은 새롭고도 역량 있는 작업으로 오는 12월 대한민국 국제뮤지컬페스티발 초청작으로 ‘김유신장군’에 몰입 중에 있다. 이는 내재된 무한한 작품세계를 구현하고자 하는 예술가로서 묵혀 둔 본능적인 감각이 발현하는 소신 있고 범상치 않은 작업을 마땅히 해낼 분이라 본다. 소리와 악기에도 소질이 많은 정명자선생의 또 다른 멀티 콘서트도 기대해 볼만한대 언제가 될지 궁금하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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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북여성 인물사] 국악발전의 어머니 박귀희국악발전에 모든 것 희사 2011년 11월 3일 인구 11만의 경북 칠곡에 우리나라 국악인들이 총출동하다시피 다 모여들었다. 2011 향사香史 박귀희朴貴姬(1921.2.6~1993.7.14) 명창 기념공연 「국모」에 출연하기 위해 선생의 후배, 제자, 국립전통예술학교 재학생, 동국대 관현악단 등이 천리길을 마다 하지않고 내려온 것이다. 20세기 국악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국악의 어머니를 기리는데 두 마음은 없었다. 국악계의 은인을 위해서, 국립전통예술고등학교를 설립한 창설자를 위해서, 바쁜 시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모두들 기꺼이 내려온 것이다. 향사 박귀희는 어떠한 남자들도 해내지 못했던 문화예술계의 크고 다양한 일들을 앞장서서 추진하고, 양악에 밀리는 국악의 발전을 위하여 또 소외된 여성국악의 활성화를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아낌없이 기부한 여장부다. 가히 국악 발전의 어머니 역할을 다한 국모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다. 적통이 아닌 서얼 출신에 무당의 딸이라는 굴레를 벗어나 국악학교 설립이라는 소망을 세웠고, 그 원을 현실화하기 위해서 가진 모든 것을 희사한 참인간이다. 박귀희는 한국의 혼이 담긴 국악을 사랑하고 키운 우리나라 국악사의 빛나는 스승이다. 여성이지만 국악인으로서의 민족음악의 발전에 물심양면으로 기여한 전무후무한 경북여성이다. 일제강점기를 지나 해방공간과 6·25를 지나오면서도 민족정신을 되살릴 새로운 시작은 국악뿐이라는 것을 박귀희 명창은 이미 알았던 것일까? 박귀희 명창은 이화중선의 소리를 들으면서 넋을 잃었고, 그 가락을 잡으려고 소리판에 들어섰다. 단 한번도 후회해 본 적이 없는 선택이었고, 한 사람의 뛰어난 선택이 우리 국악계를 받쳐주는 든든한 버팀목으로 자라났다. 우리 문화를 말살시키려고 안달이 났던 일제강점기를 벗어나 해방이 되어도 국악인들에 대한 냉대와 멸시는 적지 않았다. 설상가상 신탁통치로 미군정이 시작되면서 양악은 선풍적으로 확산되었고 국악은 고개조차 들 수 없을 정도로 위축되었다. 그야말로 굴러들어온 양악이 우리 민족과 함께 반만년을 흘러 온 국악의 뿌리를 송두리째 뽑아낼 듯 확산되어도 국악인들은 어쩔 도리가 없어서 그저 속만 태울 뿐이었다. 당시 국악인들은 해방 나흘만인 1945년 8월 19 일에 대동단결하여, 민속음악을 올바른 위치로 끌어올리기 위해 국악이라는 단어를 최초로 사용했다. 해방을 맞이하여 국악인들은 희망에 부풀어 국악중흥운동을 펼쳤으나 냉대받고 외면당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수도경찰청장을 역임한 창랑 장택상은 달랐다. 장택상은 박귀희의 친아버지 장병관과 한 집안으로 국악에 대한 조예가 상당했을 뿐만 아니라, 국악인들을 물심양면으로 후원해준 것으로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 교장 기산 박헌봉은 『국악운동 반생기國樂運動 半生記』에 적고 있다. 여러 해 외국생활을 했던 장택상은 구수한 된장찌개나 깍두기만큼 맛있는 음식은 먹어보지 못했고, 우리 국악같이 흥겨운 음악은 들어보지 못했다면서 국악을 사랑했다. 창랑의 도움으로 박귀희는 국악 발전기금을 마련하기 위한 감상회를 열었다. 이때 박귀희, 김소희 명창의 판소리는 대단한 인기를 끌었다. 하루 저녁 감 상회를 계기로 국악학교 설립기성회가 조직되었고, 본격적인 학교설립 사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초대 내각도 외면하고, 6·25도 터지면서 지지부진하게 시간만 흘러갔다 국립전통예술학교를 세우다 국립전통예술학교 초대이사장 박귀희는 1955년 김소희와 함께 서울 돈암동 적산 가옥 7백평을 불하받아 한국민속예술학원을 설립했다. 무용과 기악, 창 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한국민속예술학원이 사립 국악예술학교의 전신이다. 3 년동안 약 380명의 학생이 모여들자 국악예술을 전문으로 하는 학교를 세워 보자고 의기투합했다. 삼성그룹 창업주 이병철, 전남방직 김용주 회장, 삼양 사 김연수, 경성방직 김용완 사장, 조선일보 방일영 회장, 윤병호 서울은행장, 코오롱그룹 이원만 회장 등 각계 인사들의 협조를 얻어 건평 5백평 규모의 신축 관훈동으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 1960년 3월 5일에 서울 종로구 관훈동에서 개교한 사립 국악예술학교는 5천 년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악예술학교로 그 중요성을 지닌다. 1964년 4월 15일 윤태일 당시 서울시장의 호의로 서울 장안을 내려다보는 남산으로 이전하였 다. 일제강점기 조선신궁 사무실로 쓰던 낡은 건물이었지만 위치나 규모가 한결 나았고, 주변 민원의 소지도 줄었다. 그해 7월 국악예술학교 부설 학생국 악관현악단을 창설하였다. 1968년에는 돈화문 앞으로 옮겼다가 1970년 9월 30일 서울 석관동으로 교사를 이전하였다. 1984년 12월 17일에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로 교명을 변경하였다. 1992년 10월 29일에는 석관동에서 서울시 금천구 시흥3동 산 24-17번 지로 교사를 이전하였으며, 2002년 3월 2일에는 서울특별시교육청지정 자율 학교가 되었다. 전통예술학교는 박범훈, 김성녀, 김영임, 오정해 등 걸출한 졸 업생들을 배출한데다 국악교육 발전에 기여한 공로 등을 인정받아 2008년 3 월 1일 사립에서 국립으로 전환되었다. 국악예술학교가 1970년에 서울 석관동으로 이사한 후 박귀희는 운동장이 없 는게 마음에 걸려 1989년 서울 운니동에 있던 자신 소유의 운당여관을 국악예 술고등학교 이전 비용으로 내놓았다. 석관동 교사 판매 대금 20억원에다 박귀 희 명창이 살던 사저 운당여관 그리고 명창의 대전 과수원까지 판 전 재산 38 억원으로 전통국악예술학교는 1992년 금천구 시흥2동의 넓은 땅으로 이주하 게 된 것이다. 전통예술학교가 넓은 교사로 옮긴 것은 더없이 축하할 일이나 서울의 전통 숙박시설 명소로 사랑받던 운당여관이 헐린 것은 너무 아쉬운 일 이다. 박귀희 명창의 고택이 된 운당은 척박하던 1950년대에서부터 1980년대까지 한국 문화예술인들의 보금자리이자 국수전이 열리던 바둑 대국장이었다. 운 당이 박귀희 명창의 소유가 된 것은 1951년이다. 원래는 조선 순조 때 궁중 내 관이 왕으로부터 목재를 하사받아 지은 양반 가옥이었다. 여기에 구한말 세 도가였던 한상억이 한옥을 사들여 1958년부터 구름집을 뜻하는 운당雲堂으 로 이름지었다. 서울 경기지방 정통 사대부 가옥을 보여주는 운당은 종로의 명소로 알려져있고, 박귀희는 이 집을 여관으로 개조하여 사용했다. 운당여 관은 문화예술인들의 놀이터이자, 한국가옥의 곡선미를 그대로 지니고 있었 다. 1989년 자금난에 시달리던 국악예술학교에 기증된 후 헐렸던 운당여관은 1994년 경기도 남양주군 조안면 서울종합촬영소 내에 복원되었다. 국모 박귀희 명창이 기산 박헌봉 등과 함께 민족정신을 보듬고 민족음악을 보존하기 위해 뿌린 씨앗은 이제 개교 반세기를 넘어 반만년 민족정서를 싣고 있는 우리 음악을 보존하고 발전시키기 위한 첫 국악교육기관으로서 뚜렷한 자리매김을 하고 있다. 국립전통예술고에서는 향사 박귀희의 예술관이 실천되고 있다. 박귀희는 예 술을 공부하려면 먼저 인성을 닦고 예능을 공부해야하며, 예술인은 기예 뿐 아니라 학식도 겸비해야한다고 강조하였고 몸소 실천하였다. 박귀희 명창의 국악살리기는 완전히 자유의지로 시작되었고, 어떠한 어려움에도 쓰러지지 않는 불굴의 정신으로 전혀 새로운 경지를 개척하였다. 국악에 는 없던 가야금 병창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창조해낸 자유의지의 발로이자 전 인미답의 신개척지를 찾아나선 것이다. 소리로 풀어내야 할 출생스토리 박귀희 명창은 경북 칠곡군 가산면 하판동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장영심으로 친아버지는 장병관, 인동 장씨 집안이다. 장병관은 기골이 장대하고 말도 잘하며 돈도 많았다고 한다. 알아주던 대농이었던 칠곡 갑부 장병관이 경영하던 술 도가는 6·25때 폭격으로 불타 없어졌다. 장병관은 아들을 얻지 못하자 아랫 마을 속칭 탑고개에 살던 큰 무당 박금영(박귀희의 친어머니)과 동거했다. 장병관은 박금영이 딸을 낳자 호적에도 올리지 않고, 딸로도 인정하지 않았다. 무당으로 사는 삶의 지난함을 알고 있는 박금영은 처음에는 어린 박귀희 즉 장영심을 자신의 딸이라고 인정하지 않았고, 장병관은 혼인 외 딸이라고 해서 외면하는 바람에 박귀희는 인동 장씨 호적에 오르지 못하였다. 이후 친모 박금영이 오씨 성을 가진 사람과 재혼하자 오씨 호적에 오계화라고 올렸으나 박귀희는 나와 아무런 관련 없는 오씨 성을 따를 수 없다면서 어머니 성을 따랐다. 상당히 앞서서 주체적인 생각을 보인 셈이다. 이후 장영심 즉 오계화는 국악에 입문하면서 지은 귀희라는 예명에 어머니 박씨 성을 붙여서 박귀희가 되었다. 한국 국악계의 대들보 역할을 한 명창 박귀희의 이름 세 글자에 출생에 서린 애환과 신분 차별의 굴레 그리고 어떤 역경에도 굴하지 않는 한 사람의 뛰어난 인간승리의 의지가 서려있다. 가야금 병창 인간문화재 박귀희는 가야금과 무관하지 않은 배경을 안고 태어났다. 박귀희는 능력있는 아버지를 두었으나, 축복받는 출생은 아니었다. 정상적인 부모 슬하에서 태어난 것이 아니라 혼외 자식이라는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태어난 박귀희의 인생 고민과 고뇌는 일찍 싹텄을 것이며, 그것이 깊은 예술적인 공명으로 승화되는 통과의례를 거친다. 어찌보면 박귀희와 국악과의 인연은 운명적으로 조우하게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예닐곱살쯤 철이 들만하자 어머니는 박귀희를 대구 봉산동 외가로 보냈다. 대구공립보통학교 3학년 때 무성영화를 처음 접하였다. 이때부터 예술세계에 대한 동경의 씨앗이 뿌려졌는지도 모르겠다. 향토음악사를 정리한 손태룡은 박귀희가 대구에서 달성권번과 대구공립보통학교를 거치면서 유년기를 보냈다고 말하고 있다. 1931년 11세때 대구극장에서 열렸던 조선성악연구회 공연을 보면서 예술적 자질이 움트기 시작했다. 박귀희는 권번 담을 넘어 들려오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들은 것을 따라하다가 손재광 앞에서 단가를 부르게 되었다. 손재광은 그래 쓰겄다. 너 소리 배워라고 한마디를 던졌다. 될성부른 나무, 떡잎부터 알아본 셈이다. 손재광이 어린 박귀희에게서 소질을 캐냈다면, 첫 스승은 박지홍이다. 박지홍으로부터 판소리와 「화초사거리」 등을 사사받았다. 박지홍은 나주 출신으로 명창 박기홍과 종형제간이었다. 이화중선의 소리에 홀린 듯 빠져들다 박귀희가 데뷔를 한 것은 보통학교 졸업을 앞둔 14세 때 달성권번 손광 재에게 판소리를 배우다가 이화중선을 만나게 되면서부터이다. 이화중선 (1898~1943)은 김초향과 더불어 그 시절 여류 창악계의 쌍벽이었다. 열일곱살 때 남원시 수지면 호곡리 홈실 박씨 문중으로 출가하였으나 협률사 공연을 보 고 홀리듯 집을 나가 장득주에게 판소리를 배운 이화중선은 천부적인 목소리와 재질을 지닌 여류명창으로 인기가 높았다. 이화중선은 대동가극단을 이끌고 지방 순회공연에 이어서 일본 순회공연을 다녔는데. 1943년 재일동포 위문 공연 도중 별세하였다. 이화중선의 대동가극단이 대구극장에서 공연을 하게 되었는데 손광재가 박 귀희를 이화중선에게 소개시켰다. 박귀희의 소리를 들어본 이화중선은 바로 입단을 허락하였다. 박귀희가 대동가극단에 입단한 것은 1934년이었다. 대구극장에서 「소상팔경가」로 공식적인 데뷔 무대를 가졌다. 대동가극단과 일년여 생활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은 쌓았지만 오태석의 가야금 병창을 듣고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생겼다. 토막 판소리에 만족하지 말고 명창이 되려면 제대로 소리를 배워야한다고 결심하고 대구로 내려온 박 귀희는 한국 소리계의 대부들을 찾아서 가르침을 받았다. 박지홍에게 「춘향 가」와「화초사거리」,「보렴」,「편락」을 배웠다. 15세이던 1935년에는 강태홍에게 가야금과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고, 승무, 박전무, 검무, 살풀이 등을 김남수에게 일년간 배웠다. 16세 되던 1936년 여름에는 대구 화원 용연사에서 박기홍의 의발衣鉢을 받은 조학진에게 백일 공부를 하면서 「춘향가」와 「적벽가」를 배웠다. 백일공부는 불가에서 백일기도를 드리듯이 암자나 절에 스승을 모시고 들어가 성음의 경지를 터득하는 것을 말한다. 국악인들은 이렇게 절에 들어가서 소리공부 하는 것을 흔히 도야陶冶라고 하고 소리공부는 절에서 수도하는 스님들과 똑 같이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세 차례 식사하는 시간을 제외하고는 밤 11시에 잠드는 시간까지 마치 좌선하듯이 소리공부를 하는 것을 말한다. 박귀희 명인의 가장 큰 특징은 국악에는 없던 가야금 병창의 중요무형문화재가 됐다는 사실이다. 한때 불이익 가야금 병창 광범위한 사랑받아 지금은 없어졌지만 한동안 우리나라에서 가야금 병창대회에 나가면 불이익을 받는다는 소문이 자자했다. 가야금을 뜯으면서 노래를 하는 새로운 연주 방식인 가야금 병창에 대해서 기존 국악계가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것이다. 물론 최 근에는 이런 일들이 사라져서 추억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고 있을 뿐이지만, 한 동안은 가야금 병창은 금지된 예술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가야금 병창은 대중의 가슴 속에 파고 들었다. 창을 하며 가야금을 뜯는 병창은 마치 서양 아티스트들이 기타를 치며 노래하는 것처럼 대중속으로 스며들었다. 박귀희의 열정과 헌신으로 이제 가야금 병창은 국악계의 대표적인 장르 가운데 하나로 자리잡았다. 18세에는 전남 담양에서 박동실 선생을 모시고 두 번째 백일공부에 들어가 「흥보가」,「심청가」를 배웠다. 박동실과 공부를 마친 다음해인 1939년 19 세 때는 유성준을 모시고 경북 하동군 쌍계사에서 세 번째 백일공부를 하면서 「수궁가」한바탕을 배웠다.3) 공부를 마친 박귀희는 대동가극단으로 다시 들 어가려 했으나 대동가극단이 일본 공연을 떠난 터라 종합예술단체인 한양창 극단에 입단하였다. 이때가 17세인 1937년이었다. 스승인 오태석과의 만남은 한양창극단에 입단하면서 시작되었고, 공부 장소는 봉익동 대각사 근처 익선 동이었다. 매일 새벽 4시에 일어나 3년을 가야금 병창을 공부하였다. 오태석은 목청이 좋고, 판소리 한바탕을 가야금 병창으로 노래할만큼 독보적인 존재였다 이후 박귀희는 한양창극단을 거쳐 임방울, 박초월 등과 함께 1943년 동일창 극단을 재창단하여 동일창극단 단장을 맡았다. 동일창극단은 창작창극 「일목장군」 등을 공연하였다. 창작창극은 신파조에 창을 혼합한 형식으로 아직 창극다운 창극을 접해보지 못했던 시민들은 새로운 형식의 창극에 큰 관심을 보였다. 동일창극단의 성공작인 「일목장군」에서 박귀희는 남자주인공을, 박초월은 여자주인공을 맡았다. 미모에 연기력까지 뛰어났던 박귀희가 남자 역으로 분장한 선화공주는 대히트를 쳤다. 창극에서 여자가 남자역으로 출연한 것은 박귀희가 시초이다. 동일창극단은 서울 공연이 끝나면 계속 지방 각 도시를 순회공연하였으나 광복되던 1945년 부산에서 해산되었다. 박귀희는 가야금 병창 무형문화재였지만 여창남역 배우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30대에 국악학교 설립의 뜻을 품다 1945년에는 여성국극단의 효시인 여성국악동호회를 창설하고 상무이사로 피임되어 활동하였다. 창립공연으로 「옥중화」 이후 1949년 2월에 공연된 햇님과 달님의 성공으로 여성국극이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아마도 단 하나의 작품으로 단 1년만에 전국을 뒤흔들어놓고 뚜렷한 대중예술장르로 자리를 굳힌 사례는 세계사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보기 드물다. 적어도 1950년대는 여성 국극 시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여성국극의 대유행으로 종래의 창극단들은 거의 사라졌다. 여성국극단이 초기의 음악극으로서 공연적인 성취보다 남녀간의 사랑 등을 확대하며 인기를 좇아 변질되자 박귀희는 여성국극을 더 이상 바라지 않게 된다. 여성국극단은 1960년을 전후로 쇠퇴기로 접어들었다. 5·16 이후 민족적 민주주의가 전면에 부상하면서, 기존 국립극단 국립오페라단 국립무용단 외에 국립국극단을 더 두게 되었다. 박귀희는 국립국극단 창 단을 앞두고 자격있는 국극인을 양성하는 국극요원양성소 개설을 거론할 정도로 국극단 창단에 음양으로 기여를 하였다. 국립국극단은 1973년부터 국립 창극단으로 바뀌는데, 이때 박귀희는 단장(1980~1982)을 맡았다. 1960년대 들어 문화의 소용돌이가 거세지자 박귀희는 일본 교포 위문공연 으로 돌파구를 찾기도 했다. 일본에서 고생하며 살던 교포들에게 우리 음악은 고국에 대한 그리움과 한을 풀어내기에 안성마춤이었고 이런 심리적인 현 상을 박귀희는 잘 알아차렸다. 1961년 일본 거류민단장 박수정의 제의에 따라 동경에 무악원을 세웠다. 강사는 박귀희를 비롯하여 민요에 안비취, 가야금에 문경옥, 장고춤에 강문자, 민속무용에 이춘자 등 5명이었고 박귀희는 운영 대 표 겸 판소리를 가르쳤다. 동경 무악원은 무려 17년간이나 운영된 뒤 1979년에 문을 닫았다. 공연은 일본뿐만 아니라 미국, 서독, 베네수엘라 등 세계 각 국으로 확대시켰다. 국내에서도 가야금 병창활동을 62회나 펼쳤다. 전통예술에 대한 국가 인지도가 높아지면서 박귀희는 제23호 가야금 병창 문화재로 지정받았다. 1968년의 일이다. 어릴때부터 명민하고, 매사에 적극적으로 임했던 박귀희는 시대 변화에 대 한 이해도 빨라 민족음악의 새 장을 여는 흐름에 항상 같이하고 있다. 1972년 신상옥 감독이 제작한 영화 「효녀 심청」에 박귀희는 영화음악으로 참여하 여 「심청가」일부 대목을 불렀다. 향년 72세를 일기로 타계 할 때까지, 호남세가 주류인 국악계에서 드물게 영남맥을 이어내었다. 평생 소리를 하면서 번 돈을 국악계의 앞날을 위해 선뜻 내놓았던 박귀희는 서울국악예술고등학교에서 교육과 민요수집 작곡 악보화에도 힘을 기울였다. 예는 도이다 박귀희의 소리는 1950년대에 취입한 유성기 음반부터 1993년 작고 직전에 녹음한 콤팩트 디스크까지 다양하게 남아있다. 박귀희의 자서전 『순풍에 돛 달아라 갈길 바빠 돌아간다』에 따르면 60년대말부터 민요 채집을 구상했고, 이를 국악예술학교 교장이던 박헌봉에게 알렸다. 두 사람이 먼저 뜻을 맞추고, 아시아문화재단에서 지원을 받아 전국 각지에서 모은 전승민요를 문화재관리 국에 기증하였고, 박귀희는 1979년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을 출판하게 되 었다. 50여곡이 실린 『향사 가야금병창곡집』은 지금까지도 가야금 병창을 배우는 이들에게 유용한 교본이다. 종전까지 입으로 전하여 주고 마음으로 가르친다는 구전심수口傳心授 방식에서 벗어나서 누구라도 쉽게 읽을 수 있고 혼자서도 마음만 먹으면 따라할 수 있는 교본으로 만든 것이다. 흔히 민요가 수들이 부르는 「꽃타령」,「뽕따러 가세」,「옹헤야」 등은 박귀희에 의해 만들어져 불려지고 있다. 예藝에 산다는것은 험난하다. 예를 도道로 닦기에는 더 힘이 든다. 그런 예 도의 길을 박귀희는 걸어왔고 역사 속에 살아남았다. 소리꾼으로서는 동편제 의 법통을 이어받은 유성준의 제자로서 동편제에 속한다 할 수 있으며, 가야 금 병창으로는 고종 때 가야금 명인인 박팔괘의 정통 가야금 병창의 맥을 이 어온 오태석의 제자로서 법통을 이어받았다. 또한 판소리와 창극 그리고 여성국극 발전에도 큰 자취를 남긴 박귀희 명창은 평생을 국악살리기에 투신했 다. 물질적으로나 심적으로나 인간적으로 최선을 다했다. 향사 박귀희 추모기념사업회 공동대표인 김덕수는 사람이 개인의 안위가 아니라 다수의 발전을 위해 평생을 걸 수 있다는 것을 선생님을 통해 확인했다. 나는 박귀희 선생님을 통해 전통을 어떻게 후대에 전승시킬 수 있는지 그 방법과 가능성을 보고 배웠다고 밝히고 있다. 박귀희 명인의 고향인 경북 칠곡군은 2021년 향사 박귀희 명창 뮤지컬(연희 창극)을 제작·발표하고, 전국가야금병창대회도 열 계획이다. 장기적으로는 칠곡군에서 호국평화공원과 연계하여 향사 박귀희 명창 기념관을 건립하여 국립전통예술고 유품전시관으로부터 유품을 확보하여 전시할 계획이다. 평생을 국악발전에만 쏟은 국모 박귀희가 있었기에 우리 국악은 체계를 잡고 많은 발전을 이룩했다. 국악을 통해 우리 문화의 초석을 다진 향사 박귀희의 숭고한 예술정신은 날이 갈수록 그 향기가 더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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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춘희를 읽다’(1)‘이춘희를 읽다’는 인간문화재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자전적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를 요약, 소개하는 글이다. 경기민요 명창의 고난과 영예의 역정을 통해 동시대 국악인들에게 참 명인의 지위가 어떻게 형성되는가를 함께하기 위해서다. 3회에 걸쳐 전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이춘희를 읽다’(1) 1. 소리에 눈뜨고, 소리 길에 들다 경기소리 명창 이춘희(李春羲) 선생의 구술로 엮은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발간되었다. 영어로는 "The Life and Art of Lee Chun Hee, Master of Gyeonggi Folk Songs”이라고 하여 ’경기민요 명인 이춘희의 삶과 예술’이라고 풀어 표현했다. 기존의 서사체 전기(傳記)의 틀을 벗어나 현재의 활동상을 중심으로 오늘에 이른 지난 길을 정리하고, 다시 가야할 길을 열어 보이는 생생한 보고서이다. 이런 성격은 서명 ‘경기소리 길 위에 서서 아침을 기다린다’가 전해 준다. 선생의 호(號) ‘旦聲’(아침의 소리)의 의미를 문장화 한 것인데, 아직도 새날의 아침을 기다려 맞으며 해야 할 일을 위해 준비하는 부지런하고 성실함을 전해주기 때문이다. 책머리 발간사는 단 1쪽으로 간명하다. 네 토막의 글 중 세 번째 토막이 직접적인 발행 목적으로 읽힌다. "어떻게 하면 제자들에게 소리를 쉽게 전달할 수 있을까? 목숨과도 같은 여식에게 부끄럽지 않은 엄마가 될 수 있을까? 스승으로서 경기민요인으로서 잘 살아야하겠다는 책임감과 생각들이 오늘의 나를 만든 것은 아닌지 생각해 봅니다.” 첫째는 제자, 둘째는 여식(서정화)에게, 그리고 관객(펜)들에 대한 책임감을 강조했다. 이렇게 책임을 스스로 내세운 것은 어느 정도는 할만큼 했음을 드러낸 자신감이며 권위를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춘희’를 읽는 무게감을 갖게 해 준다. 곧 "나처럼 명창이 되기 위해서는 나처럼 노력해라. 그러면 누구 앞에서도 부끄럽지 않다.”라는 단언이기 때문이다. 이는 두 분의 평가를 발간사에서 제시한 것에서 알 수 있다. 사실, 생전에 자전적 구술서를 낸 다는 것 자체가 자신감의 표현 아닌가. 우리가 부러워해야 하는 명인의 자부심이다. 우선 서연호(고려대)교수가 성음에 대해 "어떤 고음에도 잡티가 전혀 없는 잘 훈련된 목과 탁월한 성량, 음처리에 빈틈이 없는 완결성을 지녔다.”고 평가했다. 고음과 성량은 천성이지만 ‘완결성’과 ‘잘 훈련된’ 것에 방점을 두었다. 소리하는 누구나 부러워하지 않을 수 없는 대목이다. 다음은 김해숙(前 국립국악원) 원장의 진술이다. "경기민요에 어눌하던 나의 귀를 확 트이게 한 경험을 하게 하였는데, 경기민요를 그토록 고졸하고 품격있게 느껴 보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부럽기 짝이 없는 찬사다. 그런데 이 같은 평가와 찬사는 결코 과장되거나 이 분들만의 취향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이미 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이 오래전에 한 축사에서 규정을 한 바 있기 때문이다. "이춘희 명창의 소리 세계는 확실히 남다른 특장이 있다. 경기민요 특유의 신명을 끌어내면서도 진득한 무게감을 더해 준다. 낙이불류(樂而不流)의 품도를 느끼게 한다. 결코 숙련된 기교에서만 오는 게 아니다. 따라서 단성(旦聲) 이춘희 명창의 노래는 경기민요의 격을 한층 높이는 지렛대 역할을 하고 있음은 물론, 인품으로 균형을 이룬 진솔한 음악의 세계가 어떤 것인지를 명료하게 증언해 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세 대가의 이만한 평가와 찬사는 이 책의 페이지를 빨리 넘기게 해 준다. 이 책은 다섯 장으로 구성되었다. 제1장은 어린 시절 소리 인연과 입문 과정을 담았다. 출생지가 서울 본토박이 한남동 부군당(府君堂) 근처였다. 그래서 어린 시절, 매년 정월 초하루 날의 마을굿을 보며 자랐다. 무당집에서 당집까지의 행렬에 끼어 악기소리와 노래 소리를 들으며 한살 한살 자랐다. 그러던 어느날 어머니의 ‘사발가’를 가슴으로 들었다. 어머니의 품에 안겨 들은 ‘사발가’의 굿거리장단이 ‘소리병’의 씨앗이 되어 각인되었다. "어린 춘희가 만난 것은 노래였다. 노래에 대한 끼를 발견하고 난 이후에 노래와 함께 찾아오는 밝은 기운과 생동감은 어린 춘희를 일으켜 세우기에 충분하였다. 그 사건의 시작은 한남초등학교에 입학하여 음악시간에 부른 ‘봄 아가씨’이다.” 이 경험으로 자신이 노래를 좋아한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 라디오를 소리선생으로 삼게 되었다. 라디오에서 나오는 동요와 민요와 대중가요는 청각이 예민한 소녀의 마음을 흔들어댔다. 특히 장안의 화제였던 일일연속극 ‘장희빈’의 주제가는 꾀꼬리 같은 목소리와 민요조 구성진 창법의 황금심을 동경했다. 대중적인 노래의 매력에 심취하게 된 것이다. 18세가 되던 1968년, 김부해(金富海,1918~1988)가 운영하는 가요학원을 찾았다. 가수의 꿈을 키우기 위해 악보를 받아 피아노 반주에 의한 반복 연습을 하는 과정이다. 희망을 갖고 2년을 다녔다. 선생에게도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던 어느날 김부해 작곡의 ‘백령도 처녀’라는 곡을 가수 최숙자가 취입하게 되었는데, 이 때 코러스로 참여하게 되었다. 그런데 결과는 달갑지 않았다. 자신에게 만족감 같은 것이 없었다. 가요에 대한 기대감이 점점 마음에서 떠나고 있었다. 이를 계기로 새로운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문득 내가 부르고 싶은 노래는 대중가요가 아니라 민요라는 것을 깨닫고 민요학원을 찾게” 된 것이다.(三目 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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