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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2)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4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만유 오랜 세월 우리의 삶과 함께했던 장승은 지명이나 속담, 수수께끼, 전설, 설화는 물론이고, 문화재, 문학작품 속에서도 남아 있다. 장승과 관련된 지명으로 장승배기, 장승거리, 장승방, 장승리, 장생포, 미륵리, 법수리, 법수배기, 벅수재 같은 지명은 예전에 장승이 서 있던 곳이기에 붙은 이름이고 우리 지역에도 옛 영남대로변에 있는 공평동 ‘장승백이’라는 마을이 있으며, 장승 관련 지명은 전국에 771개소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장승과 관련된 속담으로는, 그날그날 날삯을 받고 일을 할 때는 시간만 보내려고 장승처럼 서 있고 도급(돗내기)에는 정신없이 일하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로‘날 일에 장승이고 도급 일에는 귀신이다.’, 주되는 목적과는 상관없는 일에 지나친 관심을 가짐을 비꼬아서 하는 말로 ‘벅수 이빨을 세면 벅수가 된다.’, 억지로 자신의 어떤 이익이나 이권을 위해 터무니없는 소리를 하면 ‘장승 입에다 밀가루 발라 놓고 국숫값 내라고 한다.’거나 ‘장승 얼굴에다 분가루 발라 놓고 분 값 내라고 한다.’하고, 멋모르고 함부로 나대는 사람을 비꼬는 말로 ‘개가 장승 무서운 줄 알면 오줌 눌까?’, 키가 멋없이 큰 사람을 두고 ‘구 척 장승 같다.’라고 놀리는 말도 있다. 또 어떤 일을 하다가 제대로 마무리도 짓지 않고 대책도 없이 그만두면 ‘벅수같이 자빠진다’고 나무라기도 하고, 멍청하게 서 있는 사람을 ‘벅수같이 멍하니 서 있다’, 남의 일에 지나치게 간섭하면 ‘치마를 뒤집어 입고 벅수를 넘든가 뱅뱅이를 돌든가 무슨 상관이냐?’ 하는 등 많은 속담이 있다. 그리고 수수께끼로는 ‘밤낮으로 눈뜨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는 것이 무엇이냐"’, ‘입이 크되 말 못 하는 것이 무엇이냐?’ 등이 있다. 장승에 관한 설화로는 장승을 치죄(治罪)하여 도둑을 잡은 ‘명관치장승설화(名官治長丞說話)’가 있고, 판소리 ‘변강쇠전’이 있고, 문화재로는 통도사의 ‘국장생석표’가 보물 제74호와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장승은 ‘충무시 문화동 벅수(제7호)’, ‘통영 삼덕리 벅수(제9호)’, ‘나주 불회사 석장승(제11호)’, ‘남원 실상사 석장승(제15호)’, ‘부안 서문안 장승(제18호)’과‘동문안 장승(제19호)’, ‘남원 서천리 석장승(제20호)’, ‘순창 충신리 장승(제101호)’, ‘순창 남계리 장승(제102호)’ 등이 있다. 1970년까지 조사된 장승 유적지로는 200여 개소 있었다. 장승은 또 힘없는 민초들이 곤경에 처했을 때마다 무엇이든 이루어 주는 해결사였다. 남성 성기를 상징하는 장승에게 빌면 아이를 잉태시켜 주고, 반대로 어쩌다 부정한 아이를 가졌을 때는 장승의 코나 눈을 갉아서 감초와 섞어 삶아 먹으면 낙태한다는 비방약이 되는 양면성을 가지기도 하며 풍년, 풍어, 건강 등 소원성취를 해 주는 포용력을 지니고 있다. 경남 함양군 마천을 지리적 배경으로 한 판소리, ‘변강쇠전’이 있다. 일명 ‘가루지기타령’이라고도 하는데 판소리 열두 마당의 하나이다. 함양군청 자료에 의하면, 평안도 월경촌(月景村)에 계집 하나가 살고 있었는데 얼굴은 춘이월 반쯤 핀 복숭아꽃이었다. 옥빈(玉鬢)에 보조개, 초생(初生)에 지는 달빛이 눈썹 사이에 어리었다. 앵두처럼 고운 입술은 당채(唐彩) 주홍필로 찍은 듯하고 버드나무같이 가는 허리는 봄바람에 하늘하늘, 찡그리며 웃는 것과 말하며 걷는 것이 서시(西施)와 포사(褒姒)라도 따를 재간이 없었다. 그러나 사주에 청상살이 겹겹이 쌓인 까닭에 상부(喪夫)를 한 것이 징글징글하게 많아 팔자가 센 여자였다. 열다섯에 얻은 서방은 첫날밤 잠자리에서 급상한(急傷寒)에 죽었고 열여섯 살에 얻은 서방은 당창병(매독)에 죽었다. 열일곱과 열여덟에 얻은 남편은 용천병과 벼락으로 각각 죽었다. 열아홉, 스무 살에 얻은 서방도 급살로 죽었다. 뿐만 아니었다. 간부, 애부, 새흘유기, 입 한번 맞춘 놈, 젖 한번 만진 놈, 눈 흘레한 놈, 손 만져본 놈, 그리고 심지어는 옹녀의 치마귀 상처자락 얼른 대한 놈까지 모두 죽었다. 이렇게 하여 수천 명씩 남자들이 옹녀 때문에 죽자, 삼십 리 안팎에 상투 올린 사내는 고사하고 열다섯 넘은 총각도 다 쓸어버리고 없어 계집이 밭을 갈고 처녀가 집을 지으니 황해도, 평안도 양 도민이 공론하기를 이년을 그냥 두었다간 남자 놈은 한 명도 없는 여인국이 될 터이니 쫓아내자고 의논하였다. 그리하여 양 도민이 합세하여 그녀를 서도에서 쫓아내었다. 옹녀는 남쪽으로 가다가 청석관에서 홀아비 변강쇠와 만났다. 그들은 서로 만나 말 몇 마디에 뜻이 맞아 바위 위에 올라가서 대사(大事)를 치렀는데 대낮에 연놈이 벌거벗고 익숙한 장난질을 하고 있었다. 타고난 양골(陽骨)인 강쇠놈이 옹녀의 두 다리를 번쩍 들고 옥문관을 들여다보며 노래를 읊었다. "이상하게도 생겼다. 맹랑히도 생겼다. 늙은 중의 입일는지 털은 돋고 이빨은 없구나. 소나기를 맞았는지 언덕지게 패이었다. 콩밭 농사지었는데 듬북꽃이 비치었구나. 도끼날을 맞았는지 금 바르게 터져 있네, 생수처 온답(溫畓)인지 물이 항상 고이었다. 무슨 말을 할려고 옴질옴질하는 건지 만경창파 조개인지 혀를 빼어 물었으며 곶감을 먹었는지 곶감씨가 장 물렸고 만첩산중 으름인지 스스로 잘도 벌어졌네 연계탕을 먹었는지 닭의 벼슬이 비치었고 파명당을 하였는지 더운 김이 절로 난다. 제 무엇이 즐거운지 반쯤 웃고 있구나. 곶감 있고 연계 있고 조개 있어 제사상은 걱정 없다” 옹녀가 반소(半笑)하고 갚음을 하느라고 변강쇠의 기물을 어루만지며 한 가닥 곡조를 빼어 읊었다.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전배사령(前培伺令) 서렸는지 쌍걸랑을 늦게 차고 군노(軍奴)런가 복떠기를 붉게 쓰고 냇물가의 물방인지 떨구덩 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철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는지 맑은 코가 웬일인가, 성정(性情)도 혹독하여 화가 나면 눈물 난다. 어린아이 병일는지 젖은 어찌 괴였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장이궁이 그저 있다. 뒷 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구나. 소년인사 알밤인지 두 쪽 한데 붙어있다. 물방아 절구대며 쇠고삐걸랑 등물 세간살이 걱정 없네” 두 남녀는 서로 뜻이 맞아 부부로 인연을 맺고 각처를 떠돌며 옹녀는 애를 써서 들병장수 막장사를 할 때 변강쇠는 낫부림 넉장기, 갑사꼬리 여사하기, 미골 지패 퇴기질, 호흥호백 쌍육치기, 장군 멍군 장기 두기, 맞춰 먹기 돈치기와 불러먹기 주먹질 고패 떼기 윷놀이와 안집 뒷집 고누두기, 의복 전당 술 먹기와 남의 싸움 가로막기, 강새암 계집치기, 밤낮으로 싸움질을 일삼았다. 이에 옹녀는 변강쇠를 달래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신하고 동반살이 하다가는 돈 모으기는 고사하고 남의 손에 죽을 테니 깊은 산에 들어가 사람이 없는 곳에서 산전이나 파서 먹고 땔나무나 베어 때면 노름도 못 할 터요, 강짜도 않을 테니 산중으로 들어갑세” 그리하여 그들이 들어간 산이 지리산이다. 변강쇠는 이곳으로 이사 온 후로는 낮이면 잠만 자고 밤이면 배만 타니 여인이 애끓게 하소연하다 나무라도 해 오라 했다. 변강쇠는 하는 수 없이 아내의 청에 따라 지게를 지고 담뱃대를 물고 나무를 하러 산으로 갔다. 게으른 강쇠가 산에서 낮잠을 한참 자고 일어났을 땐 하늘에 별이 총총하였고 이슬이 내리었다. "요새 해가 왜 그리 짧은가, 빈 지게 지고 가면 계집년이 방정 떨리.” 사면을 둘러보니 마천가는 길에 장승이 하나 서 있거늘 강쇠가 반겨 "벌목 정정 애 아니 쓰고 좋은 나무 거기 있다. 일모도궁(日暮途窮) 불로소득 좋을시고” 지게를 찾아지고 장승 선 곳 급히 가니 장승이 화를 내어 눈을 딱 부릅뜨니 강쇠가 호령하며 "네 이놈, 누구 앞에 색기하여 눈망울을 부릅뜨냐, 삼남 설축 변강쇠를 이름도 못 들었느냐? 과거 마천 파시평과 사당놀음 씨름판에 이내 솜씨 사람 칠 때 후취덜미 가리딴죽 열두권법 범강장달 허네라도 다들 앞에 떨어지니 수족 없는 네깐 놈이 생심이나 바랄쏘” 달려들어 불끈 안고 엇두름 쑥 빼내어 지게 위에 짊어지고 우댓군 소리하며 제집으로 돌아와서 문 안에 들어서며 호기를 장히 편다. "집안사람 거기 있나? 장작나무 하여 왔네” 뜰 가운데 턱 부리고 방문 열고 들어가니 강쇠 계집 반기느라 손목 잡고 어깨 주무르며, "어찌하여 그리 저물었나. 평생 처음 나무하러 가서 오죽이나 애썼겠는가, 시장한 데 밥이나 자시오” 방안에 불 켜놓고 밥상 차려 드린 후에 장작나무 구경차 불 켜 들고 나와 보니 어떠한 큰 사람이 뜰 가운데 누었는데 조관(朝官)을 지냈는지 사모품대 갖춰 입고 방울눈에 주먹코 채수염이 점잖았다. 여인이 뒤로 팍 주저앉으며, "애고, 이게 웬일인가 나무를 하러 간다더니 장승을 빼어 왔네 그려, 나무가 아무리 귀해도 장승을 빼어 땐단 말을 언문책 잔주에도 없는 말, 만일 패어 땐다면 목신동통 조왕동증 목숨 보존 못 할 테니 어서 지고 가서 제 자리에 세우고 왼발 굴러 진언치고 달음질로 돌아오소” "가장이 하는 일을 보고만 있을 것이지 계집이 요망하게 그것이 웬 소린고. 나무 깎은 장승 인형을 패어 땐들 무슨 관계있나. 망할 말 다시는 하지 말라.” 강쇠는 밥상을 물린 후에 도끼로 장승을 패서 군불을 놓고 유정부처 홀딱 벗고 사랑가를 불러가며 개폐문(開閉門) 절판례(絶版禮)를 멋지게 하였다. 이때 장생목신 무죄하게 강쇠 만나 도끼 아래 조각나고 부엌 속에 탄 재가 오죽이나 원통할 것인가. 의지할 곳 없이 중천에 떠서 울렴. 나 혼자 다녀서는 이놈 원수 못 갚겠다. 대방전에 찾아가서 이 원정 하소연하오리다. 노들 선창목에 대방장승 찾아가서 문안을 한 연후에 원정을 아뢰니 대방 크게 놀라 "이 변이 큰 변이라.” 하고는 "지리산중 변강쇠가 함양 동관 빼어다가 작파(作破) 화장하였으니 이놈 죄를 물어 벌하고자 하니 금월 초사흘 삼경에 노들선창으로 일제 취회하여 함양 동관 조상하고 변강쇠놈 죽일 꾀를 각출하여 주옵소서.” 하고 팔도 장승에게 통문을 냈다. 귀신의 조화라 오죽 빨리 전했겠는가. 조선의 장승 하나도 빠짐없이 기약한 밤에 다 모여 새남터 배게 서서 시흥 읍내까지 빽빽하였다. "통문사를 보았으면 모든 뜻을 알 터이니 변강쇠 지은 죄를 어떻게 다스릴꼬?”"교수형에 처합시다”"불로 태워 죽입시다.” 등의 의견이 있었으나 "그놈을 쉬이 죽여서는 설치가 못될 터이니 고생을 실컷 시킨 후에 죽이되 열아흐레 동안 장승 화장한 죄인 줄을 저도 알고 남도 알아 쾌히 징계될 터이니 우리 식구대로 병 하나씩 가지고서 강쇠의 정수리에서 발톱까지 오장육부 내외 없이 벽에 도배하듯 겹겹이 발랐으면 그 수가 좋을 듯하오” 대방이 그 말 듣고 크게 기뻐하며 "장히 좋소, 그대로 시행하되 머리에서 발 끝까지 전라 경상 차지하고 오장육부 내장일랑 경기 충청 차지하며 팔만사천 털구멍도 빈틈없이 병을 단단히 잘 발라라” 이렇게 하여 변강쇠는 조선에 있는 모든 장승이 가지고 온 수백 가지의 병에 드러눕게 되었다. 이 병을 고치기 위해 봉사를 데려와 점을 치고 명의를 데리고 오지만 치료가 불가하였다. 결국, 변강쇠는 죽고 말았다. 옹녀는 강쇠의 초상을 치러주는 이가 있다면 그와 함께 살고자 하였다. 먼저 중이었다. 그러나 변강쇠의 시체를 만지자마자 그만 죽고 말았다. 초라니 풍각쟁이 마종 떱뜩이들도 옹녀의 새 남편이 되기 위해 변강쇠를 초상 치르려고 했지만 모두 죽고 말았다. 이상으로 대단원의 막이 내려지지만, 변강쇠전은 겉으로 보면 남녀 간의 색정을 적나라하게 그린 외설적인 작품으로 보이나 그 속을 들여다보면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다는 것을 알게 된다. 공동체를 지키고자 했던 하층민들의 비극적 생활상과 종교관, 내세관 등과 결부되어 있으며 전설로서의 이 변강쇠전은 무분별한 성문화를 응징하기 위한 이야기로서 오늘날 문란해진 성 문화에 하나의 경고가 될 수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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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3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이만유 장승은 우리가 집단으로 삶을 영위했던 전통마을의 대표적인 공동체 신앙물로써 마을 또는 절 입구나 길가에 세워 둔 사람 머리 모양을 조각한 기둥으로 돌로 만든 석장승과 나무로 만든 목장승 등이 있다. 장승의 유래와 기원을 살펴보면 고대의 남근숭배에서 나온 것, 고려 시대 재화를 빌려주고 그 이자를 받아 불교 행사나 사찰 보수, 그리고 병자나 빈민을 구제하는 데 쓰기 위해 사찰에서 설치한 금융기관이었던 장생고(長生庫)에 속하는 사전(寺田)의 표지(標識)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이 있다. 그리고 목장승은 부족국가 시대의 솟대(소도-蘇塗)에서, 석장승은 선돌[입석-立石]에서, 돌무더기로 만든 제당(祭堂)의 하나인 누석단(累石壇)에서 비롯되었다는 둥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확실한 기원은 알 수 없다. 장승의 명칭도 여러 가지인데, 조선 시대에는 한자로 후(堠), 장생(長栍), 장승(長丞, 張丞, 長承) 등으로 썼고, 지방에 따라 장승, 장성, 벅수, 법수, 당산할아버지, 수살목 등의 이름을 가졌다. 장승의 기능은 크게 세 가지로 구분된다. 지역과 지역의 경계표 구실과 길가에 장승을 세워 동서남북 어느 방향으로 몇 리가 떨어졌고 이웃 고을 이름이 무엇인가를 기록해 두어 길을 안내하는 안내판 및 이정표 구실도 했으며, 민간신앙의 한 형태로 마을의 수호신 역할과 개인의 소원성취(득남, 풍년, 풍어, 건강)를 기원하기도 했는데 수호신으로 세운 장승에는 이정(里程) 표시는 없으며 ‘천하대장군’ 등의 표시도 없다. 그뿐만 아니라 장승을 서낭당, 산신당, 솟대와 동등한 신물(神物)로 인정하며 동제(洞祭)의 주신 또는 하위 신으로서 신앙의 대상이며 액운이 들었을 때나 질병이 전염되었을 때는 장승에게 빌거나 제사를 지내 화를 피하고자 하였다. 장승은 보통 남녀로 쌍을 이루며 생김새는 인면형(人面形), 귀면형(鬼面形), 미륵형(彌勒形), 남근형(男根形), 문무관형(文武官形) 등으로 나뉜다. 인면형의 경우 남장승은 머리에 관(冠)을 쓰고 눈을 부릅뜨고 덧니와 수염을 단 형상이며, 더러는 몸체가 붉게 채색되기도 한다. 반면 여장승은 관이 없고 얼굴에 연지와 곤지를 찍고 몸체를 청색으로 칠하기도 한다. 귀면형은 왕방울 눈과 주먹코에 송곳니를 드러내고 있다. 미륵형은 불상(佛像)과는 달리 꾸밈이 없이 수수하며 자비스럽고 친밀감이 있다. 이 밖에도 석비형, 입석형, 석적형 등이 있다. 장승의 모양은 장소에 따라 채색, 형상, 크기 등이 다르나 모양이 괴엄(魁嚴)한 점만은 일치한다. 얼굴을 아주 무섭고 험악하게 만든 이유는 염병, 마마 등 병귀나 액귀(厄鬼)를 쫓아내기 위함이다. 그리고 장승의 명문(銘文)으로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이 주류지만, ‘동방청제장군(東方靑帝將軍), 서방백제장군(西方白帝將軍), 남방적제장군(南方赤帝將軍), 북방흑제장군(北方黑帝將軍)’ 등의 방위 신장류, 불교의 영향을 받은 호법선신(護法善神), 방생정계(放生定界), 금귀(禁鬼), 수소대장(受昭大將) 등의 호법 신장류, 풍수도참과 결부된 진서장군(鎭西將軍),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등의 비보(裨補) 장승류, 두창(痘瘡) 장승류 등이 있다. 근래에 와서는 장승 본연의 기능도 변하였고 명문도 다양화되었다. 마을 이름이나 안내판 또는 전시물, 장식물, 통일을 기원하는 상징물과 신앙체로서 시국 장승을 깎아 세웠고 명문은 ‘민족통일 대장군’, ‘백두대장군, 한라여장군’ 등이 있으며 지리산 노고단과 문경새재, 계룡산 등지에 ‘민족통일 대장군, 평화통일 여장군’을 세웠다. 이는 전통적인 형식으로 우리라는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하고 마을과 국가의 단결을 꾀하는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예부터 전해지는 장승과 관련된 재미있는 이야기가 많다. 그중 ‘장승이 마련해 준 삼백 냥’이라는 이야기는 박문수 어사 행장기 중 하나로 전해지는 작가 미상의 이야기인데, 암행어사 박문수가 거지 모양새를 하고 여기저기 팔도를 돌아다니던 때였다. 하루는 날이 저물어서 주막에 들었는데, 봉놋방에 들어가 보니 웬 거지가 큰대자로 퍼지르고 누워 있었다. 사람이 들어와도 본체만체하고, 밥상이 들어와도 그대로 누워 있었다. 이튿날 아침 거지가 "보아하니 댁도 거지고 나도 거진데, 이럴 게 아니라 우리 같이 다니면서 빌어먹는 게 어떻겠소?” 하고 말을 거니 박문수도 영락없는 거지꼴이라 그런 말을 할 만도 하다고 생각하고, 짐짓 "좋소, 그럽시다”하고는 그날부터 둘이 이곳저곳을 같이 다니게 되었다. 어느 날 한 마을 큰 기와집으로 썩 들어선 거지가 다짜고짜 한다는 말이 "지금 이 댁 식구 세 사람 목숨이 위태롭게 됐으니 두말 말고, 지금 당장 마당에 멍석 깔고 머리를 풀고 곡을 하시오. 안 그러면 세 사람이 죽소”라고 하였다. 여인은 사람이 죽는다고 하니 엉겁결에 시키는 대로 했다. 그때 이 집 남편은 아들 둘을 데리고 뒷산에 올랐다가 갑자기 소나기가 퍼붓자, 비를 피하기 위해 큰 바위 밑으로 들어갔다. 그때 저 아래서 "아이고! 아이고!” 하는 곡소리가 들려왔다. "아이코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나 보다. 어서 내려가자.” 급한 마음에 부리나케 내려오는데 뒤에서 큰 바위가 쿵 하고 무너져 내렸다. 간발의 차이로 위험을 모면하고 내려온 남편은 전후 사정을 듣고 거지에게 절을 열두 번도 더 하면서 "우리 세 사람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무엇으로 보답하면 좋겠소? 내 재산을 다 달라고 해도 내놓으리다” "아, 정 그러면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돈 백 냥을 받았다. 받아서는 대뜸 박문수를 주는 게 아닌가. "이거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테니.” 박문수가 가만히 보니 이 거지가 예사 사람이 아니었다. 시키는 대로 돈 백 냥을 받아서 속주머니에 잘 넣어 두었다. 며칠 후 어떤 마을로 가게 됐다. 그 동네 큰 기와집에서 온 식구가 울고불고 난리가 났다. 거지는 망설임 없이 박문수를 데리고 그 집으로 쑥 들어갔다. "이 댁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리 슬피 우시오?” 하니 "우리 집에 7대 독자 귀한 아들이 지금 병이 들어 다 죽어갑니다” "어디 내가 한 번 봅시다.” 그러더니 병 든 아이가 누워 있는 곳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곧장 사랑채로 들어가선 주인에게 말했다. "아이 손목에 실을 매어서 그 끄트머리를 가져오시오.” 미덥지 않았으나 주인은 아이 손목에다 실을 매어 가지고 왔다. 거지가 실 끄트머리를 한 번 만져보더니 "뭐 별것도 아니구나. 저기 바람벽에서 흙을 한 줌 떼어 오시오” 하더니 동글동글하게 환약 세 개를 지었다. 주인이 환약을 받아 아이한테 먹이니 다 죽어가던 아이가 금방 말짱해졌다. 주인이 그만 감복해서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7대 독자 귀한 아들 목숨을 살려 주셨으니 내 재산을 다 달란 대로 드리리다.” "아, 그런 건 필요 없고 돈 백 냥만 주구려.” 이렇게 해서 또 백 냥을 받아서는 다시 박문수를 주었다. "잘 간수해 두오. 앞으로 쓸데가 있을 거요.” 다시 길을 가다가 보니 큰 산 밑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있었다. 웬 행세깨나 하는 집에서 상을 당해 장사를 지내는 것 같았다. 기웃기웃 구경하고 다니더니 마침 하관을 끝내고 봉분을 짓는 데 가서는 "에이, 거 송장도 없는 무덤에다 무슨 짓을 하나?”하고 마구 소리를 질렀다. 일하던 사람들이 들어보니 기가 막혔다. "네 이놈! 그게 무슨 방정맞은 소리냐? 그래, 이 무덤 속에 송장이 있으면 어떡할 테냐?” "아, 그럼 내 목을 베시오. 그렇지만 내 말이 맞으면 돈 백 냥을 내놓으시오.” 일꾼들이 달려들어 무덤을 파헤쳐 보니 참 귀신이 곡할 노릇으로 과연 송장 든 관이 없었다. "내가 그걸 찾아 주려고 온 사람이오. 염려 말고 북쪽으로 석 자 세 치 떨어진 곳을 파보시오.” 그곳을 파 보니 아닌 게 아니라 거기에 관이 턱 묻혀 있었다. "여기가 명당은 천하명당인데 도둑혈이라서 그렇소. 지금 묻혀 있는 곳에 무덤을 쓰면 복 받을 거요.” 이렇게 해서 무사히 장사를 지내고 나니 상주들이 고맙다고 절을 열두 번도 더 했다. "묫자리를 이렇게 잘 보아주셨으니 우리 재산을 달란 대로 다 내놓겠습니다.” "아, 그런 건 필요 없으니, 약속대로 돈 백 냥만 주구려.” 그래서 또 돈 백 냥을 받았다. 그리곤 역시 박문수를 주었다. "이것도 잘 간수해 두오. 반드시 쓸데가 있을 거요.” 어느 날 첩첩산중이라 한참을 가도 사람 사는 마을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거지가 "자, 이제 우리는 여기서 그만 이별해야 하겠소” "아, 이 산중에서 헤어지면 나는 어떡하란 말이오?” "염려 말고 이 길로 쭉 올라가시오. 가다가 보면 사람을 만나게 될 거요.” 그러고는 거지는 연기같이 사라졌다. 꼬불꼬불한 고갯길을 한참 동안 올라가니 고갯마루에 장승 하나가 딱 버티고 서 있었다. 그 앞에서 웬 처녀가 물을 한 그릇 떠다 놓고 빌고 있었다. "장승님! 장승님!, 영험하신 장승님!. 우리 아버지 구원 백일 정성도 오늘이 마지막입니다. 꼭 제 아버지를 살려주십시오. 비나이다! 비나이다!” 하며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 처녀에게 박문수가 "무슨 일로 이렇게 빌고 있소?” 하고 물으니, 처녀가 울면서 말했다. "우리 아버지가 관청에서 일하는 심부름꾼인데, 심부름 중에 나랏돈 삼백 냥을 잃어버렸습니다. 내일까지 돈 삼백 냥을 관청에 갖다 바치지 않으면 아버지 목을 벤다는데 돈을 구할 길이 없어 여기서 백일 정성을 들이는 중입니다” 하였다. 박문수 어사는 거지가 마련해 준 돈, 삼백 냥이 떠올랐다. 반드시 쓸데가 있으리라 하더니 이를 두고 한 말이로구나 생각했다. 돈 삼백 냥을 꺼내어 처녀한테 건네줬다. "자, 아무 염려 말고 이것으로 아버지 목숨을 구하시오” 이렇게 해서 억울한 목숨을 구하게 됐다. 그런데 그 처녀가 빌던 장승이 비록 나무로 만든 것이지마는 박문수 어사가 가만히 바라보니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이었다. 아까까지 같이 다니던 그 거지 얼굴을 쏙 빼다 박은 게 아닌가! 이렇듯 장승은 무서운 모습을 하고 있지만, 선하고 정 많은 우리의 이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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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2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지역 서낭당(성황당) 중에서 역사가 오래되고, 일정 규모의 당집에 서낭신을 모시며, 서낭신(성황신) 또한 영험하다 하여 전국에서 무속인들은 물론 일반인들도 많이 찾아오는 서낭당으로 세 곳을 꼽는다면, 문경읍에 있는 ‘문경새재성황당’과 마성면‘돌고개성황당’, 산양면 ‘현리서낭당’이다. 이곳에는 애달프고 재미있는 전설을 품고 있거나 인간의 능력을 초과하는 수많은 이적(異蹟)과 신비한 이야기들이 전해오고 있다. 문경시 마성면 신현리 진남교반(鎭南橋畔)과 고모산성(姑母山城)이 있는 곳에 영남대로 상 가장 험난한 구간 중의 하나인 토끼비리(관갑천串岬遷, 토천兎遷)와 석현성(石峴城)을 지나면, 우리나라 서낭당 고갯길 중 가장 아름답다고 알려진 ‘돌고개성황당’이 있다. 이곳은 영남과 한양 간의 중요한 통로로서 200여 년 전 과거 길에 오른 어느 선비가 이곳 주막촌에서 떡을 팔아 살아가는 조그마한 초가집 주막에서 하룻저녁을 유숙하게 되었다. 그 집에는 아버지와 젊고 아름다운 딸이 살고 있었다. 운명인 듯 선비와 딸은 한눈에 서로 반해 백년가약을 맺기로 굳게 약속하게 되었으며 선비는 헤어지기 아쉬워 바쁜 과거 길이지만, 사흘을 더 머물다 가게 되었다. 마지막 날 밤에 꿈속에서 수염이 허연 산신령이 나타나 글귀가 적힌 종이 한 장을 주어 그 글을 몇 번 읽고 난 뒤 잠에서 깨어났는데 생시인 듯 선명하게 그 내용을 기억할 수 있었다. 선비는 "참으로 기이하구나” 하며 서둘러 길을 떠나면서 처녀의 손을 잡고 " 내 꼭 장원급제한 후 다시 돌아오리다”하고는 한양으로 떠났는데 과장(科場)에 도착하고 보니 꿈속에서 산신령이 주어서 보았든 그 글귀가 과거시험 시제(詩題)로 나왔고 선비는 당연히 쉽게 글을 지어 대과에 장원급제하게 되었다. 이렇게 장원급제한 선비는 처녀와의 약속을 까마득하게 잊고 출세를 위해 명문 재상가의 사위가 되었고, 삼 년이 지나도 선비가 오지 않자, 돌고개 주막집 처녀는 참다못해 선비를 원망하며 목을 매어 자결한 후 원귀(怨鬼)가 되었고, 때로는 큰 구렁이로 변하여 이곳을 지나는 행인들을 해코지하였다. 10여 년 후 그 선비가 경상감사가 되어 부임하면서 이 고개를 넘다가 옛 생각이나 처녀를 수소문해 보고 난 뒤 그간의 사연을 듣고 크게 후회하며, 사당을 지어 제사를 지내 주었더니 이후 원한이 풀려 재앙이 없어지고 평화로운 주막거리가 되었다. 그 후부터 지금까지 마을 사람들이 이 처녀의 원혼을 위로하기 위해 매년 정월 보름에 제사를 지내고 있고 이 성황당에 빌면 과거급제도 하고 먼 길도 무사히 다녀올 수 있으며 소원성취도 할 수 있다 하여 기원의 장소가 되었다. ‘문경새재성황당’은 병자호란 때 주화론(主和論)을 편 최명길(崔鳴吉, 1586~1647)과 새재성황신과의 인연으로 얽힌 전설 ‘나라를 구한 문경새재 성황신’이란 제명으로 이미 기고한 글이 있어 줄거리만 간단히 이야기하면, 최명길이 소싯적에 안동부사로 있는 외숙을 찾아가게 되었다. 문경새재를 지날 때 소복한 여인으로 변신한 성황신을 만나 동행하게 되었다. ‘어느 보부상이 바친 비단 치마저고리를 안동 모 좌수가 자기 딸에게 주려고 가져갔는데 그 옷을 찾고 죗값으로 그의 딸을 죽이려 안동에 간다.’라고 말하고는 사라졌다. 안동에 도착한 최명길은 좌수의 집을 찾아가니 곡성이 들리고 딸이 갑자기 죽었다는 것이다. 청년 최명길이 좌수의 딸 옆에 있는 성황신을 만나 "문경새재에서 만난 것도 큰 인연인데 나를 보아 살려주십시오” 해서 딸을 구해주었다. 한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인사차 성황신을 찾았더니 "당신은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것이다. 멀지 않아 국난이 있을 것이니 그때 싸우지 말고 화친(和親)해야 함을 명심하라” 하였다. 뒷날 병자호란 때 최명길은 화의를 주장해 전란의 피해를 줄이고 나라를 구하게 되었으며 성황신의 말대로 큰 인물 영의정이 되었다. 그 후 문경새재 성황신이 영험하다 소문이 나서 지금까지도 전국에 많은 사람이 횡액(橫厄)을 쫓기 위해 기도하러 오고 있으며 무속인들의 내림굿 명소로 유명한 곳이 되었다. 산양면 ‘현리 서낭당’은 후삼국시대 후백제 왕 견훤과 고려 태조 왕건이 전투를 했다는 근암산성(近巖山城)이 있는 현리 뒤편 근암산 정상에 있다. 특이하게도 현리 마을에서는 두 곳에 서낭신을 모시고 있는데 마을 안에 있는 ‘구봉당’이라는 신당이 하나 더 있다. 재미있는 것은 현리 서낭신이 남자 신인데 구봉당 서낭신은 여자 신으로 현리 서낭신의 첫째 부인이며, 더 놀라운 것은 둘째 부인까지 금천(錦川) 넘어 멀리 산북면 대상리 ‘한두리당(수푸당)’에 두고 있다는 것이다. 산 위에 있는 현리 서낭신과 안 서낭인 첫 번째 부인과의 만남은 마을 안 구봉당에 가마를 타고 내려왔다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그래서 예전에 현리마을에서는 정월 보름날 밤이 되면 근암산에 있는 서낭신을 마을 사람들이 가마로 모셔 오셨다. 서낭신을 상징하는 철마를 태운 가마를 구봉당 앞에 내려놓고 그 안에 있는 철마와 함께 구봉당에서 하룻밤을 지내도록 하였다가 다음날 모시고 갈 때는 혼례잔치를 거행하였다고 한다. 둘째 부인과의 만남은 마을 사람들이 가가호호 내놓은 볏짚으로 1km가 넘는 긴 새끼줄을 꼬아 근암산 정상에 있는 서낭당에서부터 산북 대상 한두리당까지 연결하여 철마에 서낭신을 태워 보냈다고 한다. 철마 목에 달린 방울의 소리가 달랑달랑 울리면 그곳 마을주민들은 서낭신이 이제 둘째 부인을 만나러 오신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전설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예전에는 근암산 정상 서낭당에는 철마 서너 필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없고, 최근까지 구봉당에 어른 손가락 두 개 정도 크기인 철마 두 필이 남아있었다고 하나 그것마저 지금은 없어졌다. 그리고 서낭신 태운 가마와 철마는 민속신앙에서 나타나는 신승물(神乘物)로 보면 될 것이다. 그 외 현리 서낭당의 유래담과 영험담을 필자가 직접 현지에서 조사 정리한 것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제사를 지낼 때 기름종지불을 당주집에서 떡시루 위에 올려서 당집까지 약 2km 이동하였는데 지금까지 수 대에 걸쳐 한 번도 중간에서 불이 꺼진 적이 없었고 이동 중에는 바람이 불다가도 잠잠해진다고 하였으며, 기름종지불은 당집에 두고 오는 전통이 있는데 그 종지불을 꺼지지 않게 집으로 가지고 와서 안방에 모신 후 합방하면 생남(生男) 한다는 풍습이 있다. - 근래에도 서낭신이 영험하다 하며 대입, 취직 등 소원을 기원하는 사람들이 찾아오는 기도처가 되고 있으며 서낭당 동북쪽 50m 밑에 정화수용 우물이 있고 그 우물물을 떠 놓아야 소원을 성취할 수 있는데 아무리 찾아도 우물이 눈에 띄지 않거나 다른 곳의 물을 사용하면 소원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한다. 다시 말해 우물이 눈에 띄면 서낭신이 대면을 허락하는 것이고 허락하지 않으면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다고 한다. - 제사용 음식은 당주집을 떠난 이후 절대로 땅에 놓으면 안 되고 쉼 없이 가야 한다. - 서낭당 근처에 묘를 쓰고 난 뒤 호랑이가 나타났다. - 서낭제를 올리기 위해 걸립하여 모은 돈으로 노름을 한 사람이 그날 물에 빠져 죽었다. - 당주가 제수용 떡을 하러 가다가 생쥐를 밟아 죽게 했는데 동제를 지낸 후 크게 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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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옛길에서 보는 서낭당과 장승 1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옛길을 걷다 보면 마을 어귀나 고개 위에 서낭당이 있고 장승이 서 있다. 문경에도 신현리 돌고개와 문경새재 옛길을 비롯해 마을마다 토지와 마을의 수호신을 모신 서낭당이 있다. 요즈음 장승을 찾아보기 어렵지만, 문경시 공평동 ‘장성백이’ 라는 지명을 가진 마을 입구와 영순면 금림리, 산양면 진정리 등 일부에서만 볼 수 있다. 서낭당은 대개 마을 입구에 있어 마을에 들어오는 액(厄)이나 질병, 재해, 호환(虎患) 등을 막아주고 풍년을 기원하는 곳이며. 동제(洞祭) 혹은 마을굿, 당제, 당신제 등의 이름으로 마을마다 미리 정해져 있는 날에 주기적으로 제사나 굿을 여는데 그 주된 기원 역시 제액초복(除厄招福, 액을 막고 복을 부름)을 비는 민간신앙의 일종이다. 서낭당은 신성한 곳이며, 서낭당 앞에서는 부정한 행동이나 말을 조심하고 삼가야 한다. 특히 서낭당의 신목(神木)에 해를 가하거나 쌓인 돌이나 돌탑을 훼손시키면 재앙을 받는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는 경건한 마음을 가지며 돌 세 개를 얹고, 세 번 절하고, 침을 세 번 뱉는 행위를 하면 재수가 좋고 원하는 것을 이룬다는 속설이 있으며 돌탑이 완성되면 돌을 정성스럽게 쌓은 사람들의 소원도 다 이뤄진다고 믿는다. 그리고 신목이 오래되어 수명을 다해 고사했는데도 베어내지 못하는 것은 나무를 베는 사람이 큰 병이 들거나 급사한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기 때문이다. 서낭당의 형태는 크게 다섯 가지로 구분한다. 첫째 서낭나무와 잡석을 난적(亂積)한 누석단(累石壇)이 함께 있는 것, 둘째는 누석단만 있는 것, 셋째는 서낭나무만 있는 것, 넷째는 서낭나무와 당집이 함께 있는 것, 다섯째는 입석만 있는 것이다. 또 서낭나무에는 때 묻은 저고리, 동정, 백지(창호지), 모발, 기혈(器血-그릇에 담은 피), 엽전이나 재물, 베 조각, 5색 비단 조각, 짚신, 짚으로 만든 방망이 등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각각의 물건들에는 기원의 의미가 있다. 몇 가지 예를 들면 환자가 입던 저고리 동정을 거는 것은 서낭신이 병을 거두어 가라는 뜻이었고, 백지를 거는 것은 행운과 초복의 기원이며, 베 조각은 아이의 장수를 비는 것이며, 엽전이나 재물을 바치는 것은 재리(財利)를 많이 획득하기 위해서며, 치마를 걸어 놓는 것은 분가할 때 나쁜 귀신이 못 따라오게 하기 위함이며, 오색 천을 다는 것은 서낭신께 드리는 예단이다. 성황당(城隍堂)은 서낭당의 본딧말이라고 하나 일부 학자들은 성황당과 서낭당은 같은 말이지만 엄격히 구분하자면 성황당은 동네 뒷산에서 마을을 굽어 내려다보고 있는 위치에 있고 한 칸짜리 당집으로 지어져 신위(神位)가 모셔져 있는 것이며, 서낭당은 동네 어귀에 돌무더기, 나무 등으로 모시고 오색천이나 짚으로 꼬아 만든 새끼줄을 감고 있는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성황은 마을을 보호하고 지키는 군주(君主)의 위치이고 서낭은 마을 어귀에서 적(敵)이 들어오지 못하도록 지키는 병사의 위치라고 한다. 지방에 따라 서낭당, 성황당(城隍堂), 할미당(전라남도), 천왕당(경상북도), 국사당(國師堂-평안도) 등으로 불린다. 장승은 마을 입구나 길가에 세웠는데 조선 태종 14년에 10리마다 소후(小堠)를 30리마다 대후 (大堠)를 설치하여 1식(一息)으로 삼으라는 지시를 하였으며, 나무를 심거나 돌무더기를 쌓도록 하였고 장승도 그 일종으로 나그네에게 이정표 역할을 하는 한편 나쁜 귀신이 마을로 들어오는 것을 막는 수호신 역할도 했다. 나무나 돌을 깎아 만들었으며 치켜 올라간 눈, 큼지막한 주먹코, 귀밑까지 찢어진 입은 해학적이면서도 무서운 느낌을 준다. 이런 무서운 얼굴에는 악귀나 병마가 접근하지 못하게 하려는 소박한 뜻이 담겨 있다. 장승은 주로 남녀 한 쌍으로 세워졌는데 대다수가 남자 장승엔 천하대장군(天下大將軍), 여자 장승엔 지하여장군(地下女將軍)이라고 새겨져 있다. 서낭당의 유래를 살펴보면, 우리나라에 서낭 신앙이 전래한 것은 고려 문종 때로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둔 것이 서낭의 시초라고 한다. 고려 고종은 침입한 몽고군을 물리치게 된 것이 서낭신의 도움 때문이라 하여 서낭신에게 신호(神號)를 가봉(加封)하였던 일도 있었고, 국난이나 가뭄이 있을 때 서낭제를 거행하여 국태민안(國泰民安)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서낭당이 생긴 유래는 경계를 표시하기 위해서 또는 석전(石戰)에 대비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는 설이 있으나 민간에서의 서낭은 종교적 의미가 가장 크며, 서낭 신앙에는 내세관이 없는 것이 하나의 특징이다. 일설에는 서낭당은 중국의 성황(城隍)에서 유래하였다고 하나 분명치 않으며 옛 중국 주나라 강태공의 부인과 얽힌 서낭당 유래 전설이 남아 있다. 강태공은 주(周)나라 초기의 정치가이자 공신. 무왕을 도와 은나라를 멸망시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제(齊)나라 시조가 되었다. 관직에 나아가지 않았을 때 매일 같이 낚시만 하고 다니는 강태공이 집안일은 돌보지 않아 살기가 힘든 아내가 항시 불평이 가득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강태공의 부인이 멍석에 널어놓은 피가 소낙비로 다 떠내려가는데도 강태공은 이를 덮을 생각도 하지 않고 방에서 책만 읽고 있었다. 이에 격분한 아내가 장래를 기약할 수 없다고 판단, 강태공을 버리고 집을 나가고 말았다. 강태공이 천하를 주유하는 중에 인재를 찾아 떠돌던 주나라 문왕을 만났고 언행이 남다른 그가 범상치 않음을 알아보고 재상으로 등용하였다. 재상이 된 강태공이 금의환향 돌아오는 길에 들에서 피를 뜯던 한 여인이 강태공을 찾아와 나의 잘못을 용서해 달라면 머리를 조아리고 있었다. 그 여인이 바로 강태공을 버리고 떠난 아내였다. 강태공은 자기를 버리고 떠난 아내에게 물을 한 바가지 떠 오게 한 후 물을 땅에 부어 버리면서 하는 말이 "어디를 가지 말고 오늘 해가 지기 전에 다시 이 바가지에 물이 가득하도록 담으면 너와 같이 살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너의 원을 들어줄 수 없다” 하니, 여인이 "여보 우린 그때 가난해서 피죽으로 연명하고 살았는데 당신과 내가 먹어야 할 양식이 다 떠내려가는데도 그냥 책만 읽고 있었던 당신도 잘한 것이 없으니 이해하고 용서해 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사정하였으나 강태공은 끝내 들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강태공의 아내는 어떻게 하든 바가지에 물을 채워 함께 살아 보려고 흐르는 눈물과 침을 바가지에 담기 시작했고, 지나는 사람들에게도 도움을 청했으나, 끝내 강태공이 원하는 만큼은 채워지지 않았고 무심한 듯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 버리고 여인은 그만 지쳐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말았다. 강태공은 죽은 옛 아내를 뒤로하고 길을 떠났고, 죽은 여인의 시신을 치워 줄 사람이 아무도 없자 지나는 길손들이 하나둘 돌을 던져 그의 시신을 덮어 주게 되었고, 그렇게 쌓인 돌무더기가 서낭당의 기원이 되었다고 한다. 그 뒤 사람들은 한을 품고 죽은 강태공의 아내가 침과 눈물로도 못다 채운 바가지에 침을 뱉어 주어 죽어서라도 그 한을 풀도록 하겠다며 지금도 서낭당을 지나는 길손들은 서낭당에 돌 셋을 던져 탑을 쌓아 주고 침을 세 번 뱉고 가는 풍습을 남기게 된 것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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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6‧25 전쟁 영웅 박동진 중사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몇 년 전 문경시 관내 초등학생 50명을 대상으로 자라나는 청소년들에게 ‘올바른 가치관 확립과 나라 사랑 정신’을 일깨우기 위한 ‘충효교실’을 문경문화원이 운영할 때 4일간 일정의 전담 강사로 위촉받아 추진한 적이 있었다. 교육 주제는 충효 중에서 효(孝)는 차기 교육으로 미루고 ‘충(忠)’으로만 해서 오래전부터 문경에 세거한 큰 문중의 조상 중 역사적으로 존경받는 충신과 문경을 빛낸 호국 인물이신 엄흥도, 이강년, 박열, 김용배, 박동진, 5분을 선정 그분들의 업적과 위대한 생애를 기려보고자 하였다. 본고는 5분 중 20세 꽃다운 젊은 나이에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산화하신 ‘6‧25 전쟁영웅 박동진 중사’에 대해 조명해 보고자 한다. 당시 박동진 중사에 대한 행적을 알기 위해 노력했으나 출생지 문경에서는 상세한 내용을 구할 수 없어 국가보훈처에서 2016년 ‘이달의 6‧25 전쟁 호국영웅’으로 선정되어 낸 홍보 자료를 참고하였다. 위기에 처한 6․25전쟁의 판세를 바꾼 1950년 9월 15일에 실행되었던 국제연합(UN)군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의 지휘 아래 추진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한 배경에는 인천항 입구에 위치한 덕적도, 영흥도 탈환에 목숨을 바친 박동진(1930.1월 28일∼1950.8.20.) 해군 일등병조의 활약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첩보대의 지상명령"인천상륙작전의 교두보를 확보하라!”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는 1930년 1월 28일, 경북 문경(유곡동 한절골)에서 태어나 1949년 1월, 해군 신병 12기로 입대하였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곧바로 전장에 투입되었다. 그해 8월, 북한군은 연안 가까이에 있는 일부 도서를 점령하고 무고한 일반 주민을 학살했고, 또한 아군 함정의 동정을 감시하는 거점으로 이곳을 활용하고 있었다. 이를 그대로 두면 해군의 동향이나 작전 상황이 그대로 노출되는 것은 물론, 당시 유엔군이 시도하려던 인천상륙작전 역시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950년 8월 해군은 정보 수집과 교두보 확보를 위해 함정의 승조원으로 구성된 육전대(陸戰隊)를 편성했고, 덕적도와 영흥도 탈환 작전을 전개하였다. 육전대는 해군에 소속되어 작전을 돕고, 필요할 시 육전에 종사하는 군대로서 지금의 해병대였다. 이때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는 해군 1함대에서 차출, 육전대 1소대 1분대장으로 참전하였고, 8월 18일에 덕적도를 향해 떠났다. 아군의 함포 지원을 받으며 덕적도에 성공적으로 착륙하여 산악고지를 도주하던 북한군을 격파하고 덕적도를 점령했다. 그리고 8월 20일, 영흥도로 진입, 북한군에게 맹공격을 퍼부으며 국군 포로 4명을 구출했다. 북한군은 이미 덕적도를 빼앗긴 상황에서 격렬하게 저항했지만, 영흥도 자체가 인천상륙작전을 위해 꼭 필요한 거점이었던 만큼,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를 비롯한 육전대는 끝까지 적을 몰아세웠다. 추격 중 적의 은신처를 발견한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는 부하들의 전진을 우선 정지시킨 후, 수류탄을 빼내 들고 엄호받으며 단독으로 돌진했다. 첫 번째 수류탄을 성공적으로 투척하고, 두 번째 수류탄을 던지려던 순간, 안타깝게도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의 가슴에 적의 탄환이 관통하였다. 분대장이던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가 총탄에 맞아 쓰러지자, 이삼재 부분대장이 이를 대신해 또다시 수류탄을 들고 돌진했고, 적의 집중사격으로 그마저 전사하자 전 분대원들은 일제히 적진으로 돌격했다. 이들의 공격으로 해군은 영흥도를 완전히 탈환했고, 덕적도와 영흥도의 탈환은 9월 15일에 전개된 인천상륙작전에 결정적인 전공을 올리게 되었다. 박동진이 적의 공격으로 인해 쓰러지면서 무장이 부족했던 동료들을 위해 "내 총 가져가라!” 소리치며 자신의 기관총을 던져준 후 숨을 거두었다고 하였다. 정부는 피로서 조국을 지킨 박동진 해군 일등병조에게 1계급 특진과 함께 충무무공훈장을 추서하였다. 그리고 조국을 위해 산화한 우리 문경 출신 전쟁영웅 고(故) 박동진 중사의 희생정신을 계승하기 위해 그의 이름을 명명한 해군 유도탄고속함 15함인 ‘박동진함 해군부대’를 창설하고 2014년 4월 1일 취역하여 영해를 수호하고 있다. 이날 문경시(시장 고윤환)는 해군 박동진함 부대와 자매결연식 개최하였다. 그리고 2017년 3월 24일에는 영웅께서 태어나신 고향 마을, 경상북도 문경시 유곡동 292번지에 위국헌신(爲國獻身)의 표상을 영원히 기리기 위해‘6․25전쟁영웅 박동진 중사 기념비’를 세우고 제막식을 거행했다. 우리 고장, 문경을 빛내고 민족의 비극 6·25 전쟁을 승리로 이끈 우리의 자랑스럽고 위대한 문경인,‘ 6․25전쟁영웅 박동진 중사’가 없었다면, 지금 우리도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못할 것이다. 위기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는 자신의 목숨을 바쳐 작전을 성공시킨 숭고한 희생과 애국정신을 영원히 잊지 말고 기억해야 하겠다.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고 - 인천상륙작전의 숨은 영웅 박동진 중사를 추모하며 - 피 끓는 나이 약관, 스무 살에 장렬히 산화하신 6·25전쟁 호국영웅 님이시여! 그날, 산천도 울고 하늘도 울었습니다 그러나 님이 있어 오늘, 이 땅이 있고 여기 우리가 있습니다 백척간두에 선 대한민국 그 운명이 걸린 "인천상륙작전 교두보를 확보하라”라는 첩보대의 지상명령 이미 북한군이 점령한 덕적도와 영흥도를 탈환해야 하는 막강한 임무를 부여받은 님은 불타는 용기와 애국심으로 작전을 수행하셨으니 장하도다 그 이름 특수 상륙부대, 해군 육전대 1소대 1분대장 박동진 중사 1950년 8월 18일 덕적도를 점령하고 이어 8월 20일 새벽 영흥도 탈환 작전에 돌입 치열한 전투를 수행하시다 마지막 발악하는 잔당을 맞아 부하들을 안전한 곳에 두고 단독으로 적진을 향해 뛰어나가 첫 번째 수류탄에 이어 두 번째 수류탄을 투척한 순간 애석하게도 적의 탄환이 가슴을 관통 장렬히 산화하시니 아! 슬프도다 님이시여! 님의 불타는 가슴에서 애국의 붉은 피 솟구치던 그날, 고향 주흘산도 울고 영강도 울었습니다 님이시여!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 전투 승전의 북소리 지금도 높이 울리고 충무무공훈장에 빛나는 자랑스러운 문경의 아들 대한민국의 건아여! 6·25전쟁 영웅이시여! 이제 고이 잠드소서 비록 사진 한 장 남기지 못했지만 님의 이름을 단 유도탄 고속함 ‘박동진함’이 바다를 지키고 있고 그날의 그 용맹스러운 충의는 대한민국이 있는 한 님은 자랑스러운 우리의 영웅으로 모두의 가슴 속에 영원히 살아있습니다 님이시여! 고이 잠드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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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문경새재 책바위 전설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문경새재 ‘책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오는 전설이 하나 있다. 조령 아랫마을에 사는 큰 부자가 부족한 것 하나 없이 잘 살고 지냈으나 오직 슬하에 자녀가 없는 것이 한이었다. 하늘이 부귀영화를 주었으나 한 사람에게 모든 걸 다 주지는 않는 것인가? 부잣집 주인은 나이를 점점 먹어가니 이제는 재산도 부귀도 싫고 오직 대를 이를 아들 하나 두기를 소원하였다. 아들을 얻기 위해 마음을 굳게 먹고 제물을 풍성하게 준비하고 목욕재계 후 마을 뒤 신당을 찾아가 매일 천지신명과 산신에게 지극정성으로 기도하였더니 그렇게도 소원했던 아들을 점지해 주어 득남하게 되었다. 그런데 기쁨도 잠시,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지 못하고 몸이 허약하여 사람 구실을 못 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다시 신당을 찾아가 아들을 낳게 해주신 것은 감사하오나 이냥 주시려면 튼튼한 아이를 주시지 이를 어쩌면 좋겠습니까? 하며 울며 기도하였다. 기도를 시작한 지 100일이 되는 날, 큰 호랑이를 타고 지팡이를 짚은 백발의 도인이 나타나 말씀하시길 "너의 집 돌담이 아이의 기를 눌러 기를 펴지 못해서 그러하니 그 돌들을 아이와 함께 조령 고갯마루 못 미친 곳에 책을 펼쳐 놓은 듯한 모양을 한 ‘책바위’가 있으니 그 뒤에 돌들을 옮겨 쌓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후 아들과 아버지가 3년간 부지런히 돌을 날랐더니 약했던 아이가 뼈대가 굵어지고 근육이 튼튼해져 남자다운 모습을 되찾게 되었다. 점점 자라면서 기골이 장대한 헌헌장부(軒軒丈夫)가 된 아이는 열심히 공부하여 과거시험에서 장원급제까지 하여 나라에 필요한 훌륭한 인재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로 이 ‘책바위’에 기도하면 과거급제는 물론, 대를 이를 아들을 두지 못한 사람들이 아들을 얻게 되고, 뭐든 빌면 소원성취를 할 수 있다는 소문이 퍼져, 영남 선비들이 한양으로 과거 보러 갈 때는 반드시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문경새재를 넘었고 또한 이곳을 들러 기도하였다고 한다. 이런 소문이 널리 퍼지자 선비뿐만 아니라 보부상들이 일확천금을 바라며 기원하는 곳이 되었고 일반 백성들도 무병장수와 부귀영화를 이루길 바라며 찾아와 비는 곳이 되었다. 그 후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근래에 이르기까지 전국으로 소문이 퍼져 ‘대학수학능력시험’을 비롯한 취업 등 각종 시험을 앞둔 사람이나 가족들이 찾아와 기도하는 곳으로 유명해졌다.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기도하는 곳이 두 곳 있는데 그 하나가 팔공산에는 있는‘갓바위’이고, 또 하나는 문경새재에는 ‘책바위’가 전국적 유명 기도처가 되었다. 요즈음 세태를 반영한 유머 중에 ‘딸 둘에 아들 하나면 금메달’, ‘딸만 둘이면 은메달’, ‘딸 하나 아들 하나면 동메달’, ‘아들만 둘이면 목매달’이라는데 필자는 딸이 없이 아들만 둘 뿐이라 지인들과 이야기를 나눌 때 농담 삼아 하는 말이 "내 한평생 살아오면서 큰 부자가 되지 못한 것도,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한 것도 후회하지 않지만, 오직 딸 하나 없는 것이 크게 후회된다.”라고 말하기도 했는데 진작 ‘책바위’에 가서 "딸 하나 점지해 주소서” 하고 기도나 할 걸 그랬나 봅니다. 이즈음 이런저런 스트레스를 받고 살아가는 현대인들이 잠시 시간을 내어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고 상서로운 조짐이 있는 문경(聞慶)에 오시는 것만으로도 좋은 기운을 받겠지만, 여기에 더해서 산자수명한 600년 된 옛길 명승지 ‘문경새재’의 백 년 노송에서 내뿜는 피톤치드와 청량한 기운을 받고, 거기에 더해 ‘책바위’에 기도드리면 이중 삼중의 좋은 기운과 축복을 받아 몸과 마음이 건강하고 힐링할 수 있을 것이다. 모두 문경으로 오시라! 건강하고 행복한 내일을 위해... 책바위 / 이만유 정성으로 기도하면 모든 소원 이루는 곳 과거길 선비들도 수험생 어머님도 오늘은 두 손 비비며 다람쥐도 기도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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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촬영장에서 보고 듣는 재미있는 궁궐 이야기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한국의 아름다운 길 100선’에 뽑힌 길, ‘대한민국 명승 제32호’로 지정된 길, ‘한국인이 꼭 가봐야 할 국내 관광지 100선’ 투표에서 당당히 1위로 선정된 ‘문경새재’ 옛길에는 유명한 ‘문경새재 오픈세트장’이 있다. 사극 전용 촬영장으로써 미국 할리우드에 있는 유니버설 스튜디오와 맞먹는 규모로 세계 4대 촬영장 중의 하나이다. 문경에 오시면 개성에 가지 않고도 송악산을 구경할 수 있고, 서울에 가지 않고도 경복궁을 구경할 수 있다. 무슨 말인가 하면 촬영장 뒤에 서기가 서린 조령산의 봉우리들이 개성에 있는 고려궁궐 만월대를 품고 있는 송악산을 닮았다고 하고 궁궐로 들어서면 광화문, 근정문, 사정전, 강녕전, 교태전 등 서울에 있는 경복궁을 그대로 옮긴 듯 웅장한 전각들이 즐비하다. 자∼ 그럼,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 궁궐로 떠나볼까요. ◇ ‘강녕전’에서 궁녀 이야기 이곳은 왕의 침전입니다. 조선의 궁궐에는 궁녀가 500여 명 있었습니다. 궁녀가 되려면 첫째 조건이 숫처녀라야 되는데 10세 정도의 ‘생각시’가 선발되면 숫처녀 감별을 받습니다. "혹시 옛날 숫처녀 검사법을 아시는 분 계십니까?” "---” "앵무새의 뜨거운 피 한 방울을 팔뚝에 떨어트려 이슬처럼 맺혀지면 숫처녀, 주르르 미끄러져 내리면 숫처녀가 아님, 너는 집에 가!” 하였답니다. 판별법이 비과학적이고 황당하지만, 그때는 그랬답니다. 이렇게 첫 관문을 통과하면 다음은 환관이 횃불로 입을 지지는 흉내를 냅니다. 이것은 하나의 의식으로 궁궐 내에서 입조심, 말조심하라는 것과 궁궐 밖에서 가져온 나쁜 기운과 사악한 모든 것들을 태워 없애는 의미가 담겨있습니다. 이렇게 한 후 본격적인 궁녀수업을 받는데 한글, 소학, 궁중 법도, 삼강행실도 등을 배우게 되며 교육 중에 실수로 방귀를 뀌면 부모에게 알려 벌칙으로 음식을 해와 상전을 대접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왕의 여인이 되기 위해 특별한 훈련도 받았는데, 오늘 오신 분들은 모두 성인이기 몇 가지 소개하면, 걸을 때 발뒤꿈치를 들고 다니기, 앉은 자세로 방바닥에 걸레질하기, 연시 혀로 껍질 벗기기, 무릎으로 팥알 집어 올리기 등이 있었다고 합니다. 요상한 걸 다 가르치지요. 이유는 묻지 말고 각자 짐작하세요. 강녕전에는 매일 8명의 지밀나인이 왕의 침실을 지키며 시중을 드는데 국가공무원 대우에 3교대제로 12시간 근무하고 24시간 쉬는 체제로 근무조건이 상당이 좋을 뿐만 아니라 왕을 지근에서 모시게 되니 성은을 입어 팔자를 고칠 기회도 있는 측근 궁녀들입니다. 그래서 사고 방지를 위해 못난이나 나이 지긋한 궁녀를 두었다고도 합니다. 그리고 왕이 길한 날을 받아 여인을 품을 때 옆방에서 지켜보고 있다가 밤늦게까지 잠을 자지 않으시면 "상감마마! 인제 그만 옥체를 보전하소서” 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 조선시대 왕의 스태미나 음식 이렇게 여인들 속에 묻혀 지내는 조선시대의 왕들이 즐겨 드셨던 정력 음식은 무엇이 있었을까요? 몇 가지 소개해 볼까요. 첫째, 민물 뱀장어에 마늘을 넣고 고아 먹으면 엄청난 힘을 발휘한다고 하고요. 둘째, 돼지 코나 귀로 만든 수프를 먹었는데 아마도 요즘 돼지 껍질에 많다는 콜라젠이 몸에 좋다고 하듯이 그때 이미 효능을 알았든 모양입니다. 셋째, 개미를 볶아 먹었는데 아연 성분이 정력에 좋다는 것을 현대의학에서도 인정하는데 아연이 많이 들어있고 또 개미는 자기 몸무게보다 400배의 무거운 물체를 끌고 다니는 힘이 있기 때문이랍니다. 정력 음식 중의 으뜸은 ‘참새죽’인데 뼈를 발라낸 참새 3마리에 생강 조금과 찹쌀 반 종발을 넣고 끓인 것입니다. 이 죽을 드신 날 밤, 왕을 모신 궁녀는 혼절하거나 며칠간은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내일부터 참새 잡으러 가지 마세요. 하하” ◇ 조선시대 신데렐라 최무수리 무수리는 궁중에서 청소 등 막일을 하는 여종인데 원래 몽골어로 ‘소녀’라는 뜻입니다. 우리나라 맞벌이의 원조가 무수리라고 하는데 무수리는 유부녀라도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인기리에 방영되었던 MBC 사극드라마 ‘동이’는 조선시대의 신데렐라라고 할 수 있는 최무수리 이야기를 드라마 한 것이며 천민 출신 ‘숙빈최씨’의 어린 시절 이름입니다. 궁궐 안 깊은 밤, 남몰래 최무수리는 전에 모셨던 폐비 인현왕후의 생일을 맞아 조촐한 생일상을 준비했습니다. 장희빈의 모함에 빠져 궁을 떠난 인현왕후의 인자했던 모습을 그리면서 생일상 앞에 앉아 흐느껴 울었습니다. 바로 그때 이런저런 생각에 잠을 이루지 못하던 숙종이 산책을 하다가, 이 밤중에, 궁궐에서 웬 여인의 울음소리가 들리다니, 어인 일인가? 기이하게 여기면서 그를 찾아 그 연유가 무엇이냐 물으니 최무수리는 죄인 폐비를 위해 생일상을 차리고 울고 있었으니 이제 죽은 목숨이구나 생각하였으나 거짓을 아뢸 수 없어 사실대로 여쭈니 숙종은 정겹고 인자하던 인현왕후가 불현듯 떠올랐고 장희빈에게 현혹되어 인현왕후를 폐비시킨 잘못을 느껴서인지 의외로 "기특하구나” 하며 촛불에 비친 아름다운 여인 최무수리에게 "고운 마음을 가졌구나! 내 오늘 밤 너와 함께 술을 한 잔 마시고 싶구나.” 하며 상상도 할 수 없었든 왕과의 하룻밤을 보내는 성은을 입게 되고 숙종의 총애를 받게 되었습니다. 후에 영조가 될 연잉군을 낳고 내명부의 가장 높은 정1품 빈(嬪)에까지 이르렀는데 그가 바로 숙빈최씨, 조선 19대 임금인 숙종(肅宗)의 후궁이자 21대 임금 영조(英祖)의 생모인 것입니다. ◇ 왕후의 침전 교태전에서 "여기 아름다운 여성분들 많으신데 혹시 전생에 교태전 주인 없나요?” 그러나 전생에 교태전 주인 아니라고 안타까워 마세요. 결코, 만백성의 어머니인 교태전 주인이 행복한 것은 아닙니다. 대왕세종 드라마 나오는 것을 보면 세종의 어머니(태종의 비) 원경왕후는 비극의 주인공입니다. 여인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있으면서 정쟁에 휘말려 친정아버지가 죽고 남동생 민무질, 민무구 역시 사사(賜死) 당하는 것을 보고도 막지 못한 불운을 겪었고 자식들이 왕이 되는 과정에서 첫째인 양녕이 왕세자 자리 있었으나 셋째인 충령이 왕이 되는 과정을 겪으면서 이루 말할 수 없는 마음고생을 하고 가슴에 대못을 박아도 100개도 더 박은 아픔으로 생을 살다가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였습니다. 세종대왕의 비인 소헌왕후 역시 친정아버지 영의정 심온이 정쟁에 휘말려 죽는 것을 막지 못했고 본인도 그때 폐비 직전까지 갔었던 고충을 당했습니다. 여기 오신 여러분은 비록 큰 부자가 되지 못하고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했지만, 예쁜 아들딸 낳아 가족이 오손도손 살고 있고, 주말이면 이렇게 문화관광 도시 문경을 찾아 여행도 하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는 것이, 어쩌면 왕비가 되어 감옥과도 같은 이 좁은 공간인 교태전에서 기거하고 기껏해야 아미산 후원에서나 거니는 왕비보다 지금 몇 배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좋겠습니다. 박수-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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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5) 삼국통일의 태동지(胎動地), 당교(唐橋)이만유/전 문경문화원 향토사연구위원 ‘삼국 시대’ 신라는 고구려, 백제에 비해 땅도 작고 세력이 약한 나라였다. 그러나 신라는 꾸준히 힘을 길러 두 나라와 대등할 정도로 국력을 키웠으며 제24대 진흥왕(眞興王) 때는 강대국이 되었다. 제29대 태종무열왕 김춘추는 왕이 되기 전 백제를 멸망시키기 위해 고구려 보장왕을 찾아가 군사 지원을 요청했으나 신라에 빼앗긴 옛 고구려 땅 계립령(하늘재)을 포함한 죽령 서북쪽 땅을 내놓으라는 조건을 걸자 이를 거부하자 옥에 가두었다. 구금 중에 죽음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김유신의 도움으로 간신히 탈출한 김춘추는 후에 신라 제29대 왕이 되었으나 태종무열왕 2년(655년) 고구려, 백제, 말갈 연합군의 침공으로 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당나라 황제를 설득 '나당 연합군'을 결성하게 되어 당의 소정방과 신라의 김유신이 협공하여 660년에 백제를 멸망시켜 삼국통일의 기초를 마련하였고 그의 아들 문무왕이 668년에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이로써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루었나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원래 ‘나당연합’을 할 때 당나라는 ‘백제의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을 신라에 주기로 했는데, 이 약속을 완전히 무시하고 백제가 멸망하자 사비성에 ‘웅진도독부’를,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는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자기들이 다스리려 했다. 그뿐만 아니라 당나라는 신라를 속국 또는 나라로 인정하지 않고,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라 하고,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이라고 불렀다. 결과적으로 백제, 고구려는 물론이고 신라마저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그래서 김춘추(603~661년) 아들 문무왕은 동맹 관계를 배반한 당나라와 끝까지 싸워 삼국통일을 이루기 위한 항쟁을 시작한 것이 ‘나당전쟁’이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들과 힘을 합쳐 먼저 백제의 옛 땅을 되찾고, 설인귀가 이끄는 대군을 맞아 매소성 전투와 기벌포 싸움에서 승리하여 당나라군을 완전히 물리쳤다. 결국, 신라는 676년, 7년간의 전쟁 끝에 고구려의 옛 영토까지 다 차지하지 못한 반쪽짜리 통일이었지만, ‘임진강에서 함경남도 덕원(德源)을 연결하는 선 이남의 땅’을 차지하며 삼국통일을 이루었으며 그 후 대동강까지 영토를 확장하였다. 이제 삼국통일의 태동지(胎動地), 당교(唐橋)에 얽힌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자. 당교는 군사 및 교통 요충지로서 경북 문경시 모전동과 상주시 함창읍 윤직리의 경계인 모전천에는 있었다는 나무로 만든 다리로서 신라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 소정방과 당의 군사들을 죽여서 이 다리 밑과 주변에 묻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라 전한다. 조선 시대까지 실제로 길이 10m 정도의 나무로 된 다리가 있었으며, 이곳을 ‘당교(唐橋)’ 혹은 ‘뙤다리’라고도 불렀다고 한다. 마을 주민들의 증언에 의하면 1990년대까지 이 자리에 변형된 모습의 다리를 수시로 이용하였는데 국도 3호선 도로 확장 포장으로 흔적도 남지 않고 그 자리에 모전천 물이 흐르는 콘크리트 터널이 되어있다.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에 ‘신라고전(新羅古傳)’에 전하길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를 토벌하고 또 신라마저 치려고 머물고 있었다. 이때 유신은 그 음모를 미리 알고 당나라 군사를초대하여 짐독(鴆毒)을 먹여 모두 죽이고 구덩이에 묻었다. 지금 상주(尙州)의 경계에 당교(唐橋)가 있으니, 이것이 그들을 묻은 곳이다.”라는 기록이 있다. 또, 고려 중기의 문신 이규보의 문집인 ‘동국이상국집(東國李相國集)’에서 소정방이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였지만, 불행하게도 신라에서 사망한 것으로 기록하였고 중국 당나라 왕조의 정사(正史)인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서는 ‘소정방이 건봉(乾封) 2년(667)에 죽었는데, 나이가 76세였다.’라는 기록이 있다. 다만, 죽은 장소는 명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송대(宋代)의 진사(陳思)가 편찬한‘보각총편(寶刻叢編)’에‘당좌무위대장군형국공비(唐左武衛大將軍邢國公碑)’가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소정방은 건봉(乾封) 2년(667)에 당의 서북 변경 지역에서 노환으로 사망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렇듯 소정방의 죽음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이 난무, 오리무중, 수수께끼이지만 중국의 역사서는 당나라 대국의 장군이며 대총관이 치열한 전투 중에 전사한 것이 아니라 술에 취해 허무하게 비명횡사하는 것이 부끄럽고 불명예스러운 역사이기에 숨기려고 상세한 기록 없이 그저 ‘소정방이 죽었다.’라고만 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중국에는 소정방의 무덤도 없다. 그리고 일연이 ‘임술년(壬戌年, 662)에 신라가 소정방과 군사들을 죽였다면 그 후일인 무진(戊辰, 668)에 어찌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할 수 있었겠는가?’라고 하며 당교의 소정방 피살사건을 신뢰하기 어렵다고 하였으나 일연이 의심한 문제는 논외로 하고 ‘신라 고전’에서 전하는 내용을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서도 똑같이 기술하였고, 당교가 함창현의 북쪽 6리에 있다고 장소까지 명시하고 있으니 이를 정사로 믿을 수밖에 없다. 우리 문경 시민은 김유신 장군이 당나라의 이이제이(以夷制夷)전략에 속지 않고 야욕을 품은 소정방과 당군을 문경 땅에서 멸(滅)한 역사적 기록을 믿고 삼국통일의 성업(聖業)을 이룩함에 대해 자랑스럽게 생각하며 미래에 대한 교훈으로 삼고자 1990년 7월 3번 국도 옆 당교가 있었던 자리에 당교사적비(唐橋史蹟碑)를 건립하였다. 지금은 문경시청 전정(前庭)으로 이설(移設)하여 많은 사람이 볼 수 있게 민원실 앞에 세워두고 문경이 호국의 성지(聖地)임을 알게 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 역사적 사실을 전설이나 단순히 먼 옛날 역사 속 한 사건으로만 볼 것이 아니라 김유신 장군이 비밀첩보를 입수하여 극비작전을 은밀히 추진, 간계를 품은 ‘나당 연합군 대총관 소정방’과 수하 군사들을 죽임으로 당나라의 침략 예봉(銳鋒)을 꺾어 전의(戰意)를 상실하게 하고 결과적으로 이 사건이 초석이 되어 ‘나당전쟁’에서 승리하고 삼국통일의 위업을 이룬 것에 역사적인 가치를 두어야 한다. 만약 문경 당교에서 김유신 장군이 소방정을 죽이지 못하고 그가 살아서 그의 의도대로 신라를 공격하였다면 삼국통일의 실현도 지금의 대한민국도 존재하지 못한다는 것에 방점을 찍는다면 그 의의는 대단히 큰 것이며 역사를 바꾼 중요한 전투이다. 그러므로 당교는 삼국통일의 태동지(胎動地)라 하는 것에 대해 이의(異意)가 없을 것이다. 1,300여 년 전 이 당교에서 일어난 역사적 사실이 문경의 지명에도 영향을 미쳤다. 당교(唐橋)는 순수한 우리말로는 ‘되다리’인데 경음화 현상으로 ‘뙤다리’가 되었고 ‘때다리, 띄다리, 띠다리’라고도 했는데 이는 중국인을 낮잡아 부르는 말로 되놈, 뙤놈, 때놈, 떼놈, 뛔놈 등과 같이 ‘당(唐)’이 ‘때’가 되고 ‘교(橋)’는 그대로 ‘다리’로 ‘때다리’가 되었다. 그리고 문경시청과 그 인근이 모전동(茅田洞)인데 이 모전(茅田)은 당나라 군사가 밭에 묻혀 있다는 의미인 ‘띠밭’, ‘띄밭’의 한자 의역(義譯)이다. 그리고 앞의 기술대로 김유신 장군이 소정방의 간계를 미리 알아차리고 당나라 군사를 초대하여 잔치를 열고 대접하는 척하며 술에다 짐독(鴆毒)을 넣은 짐주(鴆酒)를 먹여 소정방과 당군을 죽였다고 하였는데, 이 짐독은 짐새의 깃에 있는 맹렬한 독이다. 짐새는 실제로 생존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중국 남방 광둥(廣東)에 사는 독이 있는 새라고 하며 몸은 붉은빛을 띤 흑색, 부리는 검붉은색, 눈은 검은색인데 온몸에 독기가 있어 배설물이나 깃이 잠긴 음식물을 먹으면 즉사한다고 전해 온다. 고서의 기록에 보면 짐새는 독사를 잡아먹고 살기 때문에 강한 독을 가지고 있으며, 천년 묵은 독사가 새(鳥)로 변했다는 말도 있다. 그 독이 너무 맹렬해서 짐새가 날아갈 때 그림자만 비쳐도 그 음식물이나 물그릇에 독이 스며들어 사람이 먹거나 마시면 바로 죽는다고 하는 맹독을 가진 새다. 글을 맺으면서 결과적으로 자주통일이 아니고 외세(당나라)의 힘을빌려삼국을 통일한 것에 대한 대가(代價)로 지금의 만주 일대의 고구려 땅이 대부분 중국의 영토로 넘어가게 되었다는 사실이 아쉬운 일이지만 어찌할 것인가? 역사는 그렇게 흘러갔는데... 만약 고구려가 삼국을 통일하였다면 저 넓은 대륙이 우리 땅이 되었을 텐데 하는 꿈을 꿔 본다. 태조 왕건은 자기 힘으로 후삼국을 통일하였듯이 앞으로 있을 남북통일도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하는 대한민국 우리의 힘으로 통일이 이루어지기를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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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 문경새재 주막 이야기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옛날 길 떠난 나그네가 머물다 가는 주막은 술과 밥을 파는 주점이고 식당이면서 여관을 겸한 복합 휴게소라 할 수 있다. 주막은 외딴곳에 한두 집이 있기도 하지만, 나그네가 많이 다니는 길목에는 여럿이 모여 주막거리나 주막촌을 형성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 문경지역에서도 유곡역 주막촌, 문경새재와 돌고개 주막거리 등이 있었으며 한양에서 과거시험이 있는 시기에는 성시(成巿)를 이루었고 특히 술청에는 팔도 사람들이 모여 북새통이 되기도 하였다. 주막은 임진왜란 후 조령원(鳥嶺院)·동화원(桐華院) 등 관설(官設) 원(院)의 기능이 쇠퇴하고 참(站)마다 참점(站店)을 설치하여 여행자에게 숙식을 제공하였는데 조선 후기(19세기)에는 영남대로 등 큰길에는 10∼20리 간격으로 사설 주막이 많이 생겼다. 주막에는 나그네의 눈에 쉽게 띄도록 현대의 광고판 같은 주막 고유의 표시로 ‘酒(주)’ 자를 문짝 등 잘 보이는 곳에다 써 붙이거나 처마 끝에 등을 달기도 하였고 술을 거르는 데 쓰는 도구로서 싸리나 대오리로 만든 둥글고 긴 통 모양인 ‘용수’를 장대에 달아 지붕 위로 높이 올려 두기도 하였다. 주막은 쉼터의 역할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정보를 교류하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특히 주막에서 제일 큰 방인 ‘봉놋방’에는 입담 좋은 사람들이 밤이 깊도록 팔도 이곳저곳에서 일어난 사건이나 소식을 전해주는 이야기꽃이 피는 곳이었다. 주막에서는 술이나 밥은 돈을 받지만 잠은 공짜로 잘 수 있었는데 침구는 제공하지 않았다. 특실이라 할 수 있는 작은 방은 지체 높은 양반 손님이 차지하고 봉놋방에는 일반 백성들이 잠을 자는데 먼저 들어 온 사람이 좋은 아랫목 자리를 차지하고 그다음 들어온 사람들은 비어 있는 공간을 찾아 몸을 뉘었는데 때에 따라서는 남녀노소 구분 없이 한방에서 잠을 자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복 없는 년은 봉놋방에 가서 자도 고자 옆에 눕는다’라는 재미있는 속담이 생기기도 하였다. 가끔 눈웃음치는 주모가 큰 엉덩이를 흔들면서 요염한 모습으로 과객을 호리는‘색주가’처럼 변질한 주막도 있었다고 하며 주막 주변에는 나그네를 상대하는 ‘들병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또 ‘내외주점(안방술집)’이라 해서 여염집 아낙네가 살길이 막연하여 차린 술집으로 문을 사이에 두고 술꾼에게 순배(巡杯)로 술을 파는 술집이 생기기도 하였다. 특별한 예로 민정을 살피는 관리들이 묵기도 하였는데 이긍익(李肯翊) 지은 ‘연려실기술’에 정승 맹사성(孟思誠)이 고향 온양에서 상경하다가 용인의 주막에서 하룻밤을 지내면서 시골 선비와 ‘공 당 놀이’를 한 이야기가 있기도 하였다. "무슨 일로 서울 가는공?”, "과거 보러 간당.”, "그럼 내가 급제시켜 줄공?” "실없는 소리 말당.” 한 후 헤어지고 며칠 뒤 맹사성이 과장(科場)에서 그 시골 선비 곁에 슬며시 다가가 "어떤공?”하니 그가 정승인지 알아보고 얼굴빛이 하얗게 되어 "죽어지이당.”했다는 이야기다. 조선팔도 고갯길의 대명사인 문경새재 제 1관문과 제 2관문 사이 교귀정 못미처에도 나그네들에게 술과 밥을 팔고 잠자리를 제공하던 옛 주막터에 주막이 한 채 들어서 있다. 조선 시대 풍속화가 혜원 신윤복과 단원 김홍도가 그린 ‘주막’이란 그림을 모델로 설계하여 1983년 11월 ‘조국순례 자연보도사업’의 일환으로 복원하였다고 한다. 주막에서 외상술도 먹었는데 글을 모르는 주모가 외상장부 대신 부엌 벽이나 기둥에다가 자기만 알 수 있는 그 사람의 생김새와 옷차림 그리고 외상 내용을 칼로 그어 표시해 두었다. 지금이야 신용카드를 사용하지만, 한때는 단골 술집에서 현금이 없으면 손가락으로 긋는 시늉을 하거나 "그어두세요” 하는데, 이 ‘긋는다’가 바로 옛날 주모에게서 비롯된 것이란다. 문경새재 주막은 삶의 애환과 체취가 오롯이 남아 있는 곳으로, 한 가난한 선비와 마음씨 고운 주모의 인간미 넘치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조금 늦은 나이에도 청운의 꿈을 이루기 위해 준비했던 과거시험에 낙방(落榜)하고 실의와 지친 몸을 이끌고 귀향하는 선비가 험한 문경새재를 넘게 되었다. 노잣돈도 다 떨어진 상황에서 며칠을 굶다시피 해 몹시 배가 고팠다. 배에서는 연신 꼬르륵꼬르륵 소리가 나고 허기가 져 쓰러질 형편에 처했다. 마침 주막에는 장작불 위 가마솥에 국밥이 끓고 있었다. 바람결에 묻혀오는 구수한 국밥과 달콤한 막걸리 냄새에 견딜 수 없는 허기를 느꼈다. 그러나 수중엔 무일푼, 양반 체면에 구걸할 수도 없어 망설이면서 몇 차례 그 옆을 왔다 갔다 하다가 한번 사정이나 해봐야지 하면서 주모에게 다가갔다. 그런데 빈손으로 가기도 뭣해서 주막 앞에 깨어진 사기그릇을 하나 주워 엽전처럼 동그랗게 다듬어서 그걸 들고 갔다. "주모! 내 어디 어디 사는 누구인데 지금 노잣돈도 다 떨어지고 배가 몹시 고프니 이 ‘사금파리’를 어음이라 생각하고 외상 국밥 한 그릇만 주시오. 내 선비로서 명예와 자존심을 걸고 다음에 꼭 갚으리다. 부탁하오” 하니, 초라하나 의젓한 선비를 본 주모는 안타까운 마음에 선뜻 "예, 드리지요. 어서 이리로 앉으십시오.”하고는 큰 그릇에 따뜻한 국밥과 막걸리 한 사발을 내어 주었다. 선비는 게 눈 감추듯 음식을 먹고는 "주모! 고맙소! 내 다음에 이 길을 다시 올 때 꼭 들리도록 하겠소” 하고 가는 길을 재촉했다. 그리곤 1년 후 한양에 갈 일이 생겨 문경새재를 넘으면서 그 주모를 찾았다. 그를 알 듯 모를 듯 그러나 반가이 맞아주는 주모의 손을 잡고 "내 그때 태어난 이후 이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밥과 술을 먹었소. 주모 참 고마웠소”하고는 그때 음식값의 몇 배를 주고 떠났다고 한다. 그때 그 동그란 ‘사금파리 어음’이 발굴되어 옛정을 듬뿍 담고 ‘옛길박물관’에 전시되어 문경을 찾아오신 관광객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했다. 새재 주막/ 이만유 나그네 천근 발걸음 잠시 덜고 가는 곳 낙방 선비 깊은 시름 한숨 삭이고 가는 곳 문경새재 주막에는 장작불 가마솥이 펄펄 끓는다 정 많고 인심 좋고 마음 넉넉한 주모는 노자 떨어진 과객에게 사금파리 어음으로 국밥 한 그릇 내주고 주막 기둥에 줄 그으며 외상술도 주었다 해 질 녘 피는 연기 그림같이 아름답고 절절 끓는 봉놋방 난봉꾼 이야기에 하하 호호 팔도 웃음 밤늦도록 피어난다 문경새재 고갯길 아무리 높다 해도 어젯밤 꿈자리에 언뜻 본 임 그리며 발걸음도 가벼이 바람인 듯 넘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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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3) 아픈 역사의 흔적, 상처 난 소나무이만유/전 문경시문화관광해설사회 회장 일제강점기 막바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여 국제정세가 혼란한 시절, 다국적 사람들이 전쟁을 피해 안전한 곳으로 배를 타고 떠났는데 망망대해 바다 한가운데에서 폭풍을 만나 좌초의 위기에 처했다. 배가 일부 파손되고 물이 차오르는 긴박한 순간에 선장이 결연히 사람들에게 외쳤다. "이대로 가면 배가 침몰하여 모두가 죽는다. 배 무게를 줄이기 위해 세 사람만 내리면 나머지는 살 수가 있다”라고 말했다. 이대로 모두 죽느냐 아니면 세 사람만 죽느냐? 절체절명의 순간, 서로 눈치만 보며 침묵의 시간이 흐르는데 그때 홀연히 영국인 한 사람이 일어나 "대영제국 만세!”를 외치고 바다로 몸을 날렸다. 다시 정적이 흐르는데 미국인이 노신사(老紳士)가 일어나 "미합중국(美合衆國) 만세!”를 외치고 풍덩 바다로 몸을 날렸다. 다시 침묵의 시간, 그때 한국인 한 젊은이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일어나 "대한 독립 만세!”를 크게 외쳤다. 그러고는 옆에 있던 일본인을 번쩍 들어 바다로 집어 던졌다. 글 서두에 왜?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이런 유머를 썼는가 하면 문경새재에는 ‘아픈 역사의 흔적, 상처 난 소나무’가 있기 때문이다. 일본에 대한 나쁜 감정과 원한이 컸다. 필자가 문화관광해설사로 활동할 때 이 ‘상처 난 소나무’ 앞에 서서 하는 첫 번째 이야기이기도 하다. 일본이 역사 이래 우리에게 못할 짓을 너무 많이 했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겠지만 일본에는 1592년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7년 전쟁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왜군이 전리품을 확인하기 위해 조선인들의 수급(首級) 대신 베어갔던 코를 묻은 ‘코무덤’이 있다. 이수광의 ‘지봉유설(芝峯類說)’이나 남원의 의병장으로 이름을 떨쳤던 조경남의 ‘난중잡록(亂中雜錄)’에도 코무덤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으며 후에 ‘코무덤(鼻塚)’이 섬뜩하다고 하여 ‘귀무덤(耳塚)’으로 바뀌었지만, 일본 교토시 히가시야마구에 있는 귀무덤에 묻힌 조선인의 피해자 수가 12만 6,000여 명에 이르러고 그 외 지역에 있는 것까지 합하면 18만 명이 넘는 사람의 코와 귀가 묻혀 있다는 것이다. 전과(戰果)를 높이기 위해군인뿐만 아니라 아이, 부녀자 등 민간인까지 그것도 살아 있는사람의 코까지 베어 보냈다고 하며 임진왜란이 끝나고 난 뒤 조선 땅에는 코 없는 사람이 많았다고 하는 이야기도 전해 온다. 벤 코를 일본에까지 보내는 도중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소금이나 식초에 담아 갔다고 하니 할 말을 잊었다. 그리고 이 참혹한 일이 두려움이 되어 아이들이 위험한 행동을 하려 할 때나 위험에 노출될 때 ‘에비!’‘이비’‘이비야’라고 겁주는 소리를 하는 것도 바로 이비(耳鼻)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 ‘이비야’는 이비(耳鼻)’에 호격조사 ‘-야’가 붙어서 도망가라 피하라는 의미로 쓰였다고 하니 얼마나 공포심이 컸던 것인가를 짐작할 수 있다. 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조선 침략으로 왜군은 10∼40만여 명(일본과 한국, 학자에 따라 다르게 추정)의 조선인을 피로인(被擄人)으로 끌고 가 부족한 노동력을 메우기 위해 노예로 삼았다. 이때 조선의 도공도 함께 납치해 갔고, 끌려간 조선인 일부는 포르투갈 등 국제 노예시장에, 헐값에 팔려나가는 노예 매매까지 했다고 한다. 그 당시 ‘사람은 귀가 둘이나 코는 하나다. 조선인의 코를 베어 머리를 대신하라. 병사 한 사람이 한 되의 코를 벤 후에야 조선인을 노예로 삼을 포로를 잡을 수 있는 자격을 허락한다.’ 그래서 넘겨준 코 숫자가 적힌 ‘코영수증’을 받았다고 한다. 이렇게 되니 일본 군사들은 혈안이 되어 무참한 일을 서슴없이 저지르게 되었다. 그리고 일제(日帝)에 나라를 빼앗긴 1910년부터 해방된 1945년까지의 일제강점기 동안 숱한 만행이 있었지만, 아시아태평양전쟁 시 일본군 위안소로 끌려가 성노예 생활을 강요당한 12세에서 40세까지의 여성이 20만여 명에 이르렀고, 강제 징용당한 조선인이 146만여 명에 달한다니 울분을 금할 수 없다. 이렇듯 사람에게 준 피해가 막심하고 가슴 아픈 일인 대다가 아름다운 금수강산을 훼손하고 한민족(韓民族)의 혼이 깃든 소나무에까지 아픔을 준 일제의 만행을 고발하는 일제 수탈 흔적 ‘문경새재 상처 난 소나무’가 끈질긴 생명력으로 80여 년의 세월이 흐린 지금까지도 한민족의 기상처럼 푸르고 싱싱하게 살아 있다. 일제는 태평양전쟁 당시 전쟁물자인 송탄유(松炭油)를 확보하기 위해 조선인을 동원해 소나무에 V자 모양의 상처를 내어 송진을 채취하는 일을 강요했다. 일제강점기에 후쿠오카에서 아소 탄광을 운영하며 조선인을 징용하여 강제 노동을 시켜 많은 재산을 모은 일본 아소(麻生) 가문의 ‘아소상점’이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 위탁을 받아 진행한 것으로 전해진다. 채취된 송진은 전쟁을 수행하며 전함 등에 방수용 자재로 사용하고, 송진에는 알파피넨 같은 휘발성 물질이 들어 있는데 연료가 바닥이 나자 송진을 수증기로 증류하여 만든 중성유(송유-松油)를 휘발유, 경유에 섞어 자동차나 비행기의 연료로 사용하였다고 한다. 소나무 송진 채취는 조선총독부 통계 연보를 보면 1933년부터 1943년까지 총 9,539t의 송진을 수탈했다고 하며, 1943년 한 해에만 채취한 송진의 양이 4,074t인데 이는 50년생 소나무 92만 그루에서 채취해야 하는 양이라고 한다. 산림청 국립산림과학원은 ‘송진 채취 피해 소나무 전국 분포도’를 제작하고 송진 채취 피해 소나무를 ‘산림문화자산’으로 등록을 추진, 송진 채취 피해목의 역사적 가치를 기록문화로 남길 예정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 ‘상처 난 소나무’ 앞에서 이런 치욕스러운 역사를 반추하며우리 국민이 가져야 할 교훈은 민족적 수난과 고통을 당하지 않으려면 유비무환의 자세와 부국강병,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의 번영을 위해 다 함께 힘을 모아야 하겠다.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는 없다’라는 말을 명심하되 지난날의 잔인무도하고 부끄럽고 아픈 흔적을 이제는 지우고 대한민국 국격이 높아진 만큼 통 큰마음으로 미래를 향해 정의롭고 인간다운 멋지고 아름다운 흔적을 남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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