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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7)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섬을 이르는 우스개 중 하나, '서 있다'고 해서 '섬'이라 한다. 농담으로 하는 말일까? 제주도 비양도에 흥미로운 설화가 있다. 임신한 해녀가 흘러 내려오는 섬에 올라가 오줌을 누었는데 한림 앞바다에 서게 되었다. 아마도 이 섬에 올라 소변을 보던 해녀 아니었으면 우주 어느 한 별까지 흘러가버렸을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찌 하늘에 날아오른다는 뉘앙스의 비양(飛揚)이라 이름을 지었을까. 그래서인지 북쪽 해안의 파식대에 발달한 호니토를 애기 업은 돌, 부아석(負兒石)이라 한다. 호니토(hornito)는 용암이 공중에 튀어 올랐다가 다시 떨어지면서 굳어버린 바위덩어리다. 2004년 천년기념물 제439호로 지정되었다. 우리나라에서 유일하다는 염습지 펄랑못 중앙에 정초 개의 날 제의를 하는 술일당(戌日堂)이 있는 이유도 이런 설화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비양도 뿐일까. 이 이야기는 광범위하게 퍼져있다. 물에 떠내려가다가 "저기 섬이 떠내려가네"라고 소리쳐서 멈춰 선 것이 섬이라는 것이다. 소리치는 주인공은 주로 소녀, 임신한 여자나 출산과 관련된다. 비양도의 해녀가 오줌을 누는 것도 마찬가지다. 생명의 시작, 출산 행위와 결부 짓는 것은 이 설화를 통해 섬이 가지는 땅의 탄생 아니 어쩌면 우주의 탄생, 모든 생명의 기원을 말하려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삼십삼천 도솔천일까 삼천삼백의 섬 우리나라에 섬이 몇 개나 있을까? 무엇을 섬이라 하는가에 따라 개수는 달라질 수 있다. 도(島)는 관념상 큰 섬을 말하고 아주 작은 섬들은 서(嶼)라 한다. 크고 작은 온갖 섬이라는 뜻의 도서(島嶼)라는 말이 그래서 나왔다. 새(鳥)가 앉아 쉬는 산(山)이라는 합성어로 해석한다. 조수 간만의 차에 따라 나타났다가 없어지기도 하는 암초나 '여'를 섬으로 볼 것인가도 흥미롭다. 우리나라 최남단 '이어도', 마라도로부터 149Km 떨어진 수중 암초인데 2003년 6월에 이어도종합해양 과학기지가 설치되었다. 수심 50미터를 기준으로 약 2㎢인 작은 암초지만 전략적으로는 말할 수 없이 중요한 지점이다. 이어도라는 이름은 남도 사람들의 설화와 제주도의 민요에서 왔다. 정부 기관의 통계에서도 섬의 개수가 통일되어 있는 것 같지는 않다. 여를 섬에 포섭한다면 밀물(滿潮)에는 몇 개 썰물(干潮)에는 몇 개 등으로 구분하여 셈하는 것도 필요해 보인다. 세계에서 가장 우수하다는 개펄을 포함해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우리 해역이 가지는 특성 중 하나다. 우리나라에서 섬이 가장 많은 행정구역은 신안군이다. 자료에 따라 800여개에서 천 개 혹은 더 이상의 개수로 표현한다. 하지만 1004개를 통설처럼 얘기한다. 일명 '천사의 섬'이라는 슬로건을 내세우면서 정한 숫자다. 그래서는 아니지만 나는 우리나라 섬의 개수를 삼천삼백 개라고 부른다. 한국해양수산개발원이 발표한 섬의 개수가 유인도 472개, 무인도 2,876개로 3,348개라는 점을 참조하면 그 이유를 알 수 있을 것이다. 오지랖 넓게도 인문학자의 시선은 바로 삼천삼백이라는 숫자가 표상하는 불교관념, 아니 동양 고전의 관념과 철학에 닿는다. 불교의 우주론에 삼십삼천의 중심 도리천이 있고 도리천의 정상에 수미산이 있다. 해녀가 오줌을 누지 않고 가만 놔뒀더라면 한림의 앞바다 비양도는 어쩌면 삼십삼천 도솔천까지 흘렀을지도 모른다. 해맥론(海脈論), 교역과 전쟁, 갈등과 화합의 징검다리 우리는 오랫동안 북방으로부터의 정치, 외교, 역사, 문화의 이입과 습합을 모토삼아 왔다. 그 근간에 광활한 만주와 대륙, 산과 산맥을 중심에 두는 이론이 있다. 정맥이니 정간이니 하는 이론들, 산을 중심에 두는 풍수적 관념들, 오악삼해(五嶽三海)에 왕이 제사하는 의례들에 이르기까지 그 생각의 깊이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깊다. 우리의 역사를 관통해 온 이 관념들은 히말라야나 북방의 광활한 산맥으로부터 백두산 금강산을 거쳐 지리산 등으로 이어져 국토의 실핏줄까지 씨줄날줄로 횡단한다. 이 생각들은 고대로부터의 신화와 관념과 철학에 깊이 스며들어 우리의 내외면을 포괄하는 심리적 지형을 형성해왔다. 하지만 멀리는 대해양시대 가깝게는 근대 제국주의의 팽창과 2차 대전, 크고 작은 전쟁과 교섭 속에서 해양의 중요성이 부각되어왔다. 그래서다. 해류와 조류 특히 중국과 한반도의 매개공간인 황해를 거꾸로 보는 해맥론(海脈論)이 중요하다. 산맥의 맥(脈)이 사실은 혈맥이나 수로를 말하는 것이기에 우리말로 표현하면 '물길론'이다. 그간의 내륙적 사관을 뒤집어보는 방식이다. 산맥을 뒤집어엎는 것이 아니라 음양의 균형을 회복하는 것이다. 여기에 적도 상간, 지구 자전의 영향을 받아 회전하는 흑조(黑潮, 쿠로시오 해류)가 있고 이 해류가 갈래를 치는 지류들이 있다. 특히 우리에게는 조수간만의 차가 심한 개펄의 특성이 있기에 조류의 해맥론이 중요하다. 나는 이를 토대로 낙동강, 영산강에서 압록강, 두만강에 이르는 강항(江港)문명을 설명하곤 한다. 섬이 해맥의 주요 지점들을 형성한다. 바다를 통한 국가간 협력이나 상존하는 섬 분쟁 등도 포함한다. 지금 우리나라는 지도가 바뀔 만큼 섬을 매개로 하는 혹은 섬을 중심으로 삼는 공간 관념의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연안의 모든 섬들을 연결해버리겠다는 다리도 그런 풍경 중 하나다. 향후 이어질 교량까지 포함하여 선을 그은다면 우리의 지도는 획기적으로 바뀐다. 다리의 안쪽은 일종의 호수가 되는 셈이다. 더부살이하던 교군(僑郡) 혹은 교현(僑縣)에서 오히려 중심이 되는 교군(橋郡)으로 섬의 역할이 바뀌고 있다. 남도지역 특성이던 부잔교(浮棧橋)가 비행기의 Air birdge로 바뀌지 않았던가. 곧 설립될 국립섬진흥원도 이런 흐름들을 반영하는 결정이었을 것이다. 역사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교량(橋梁) 말이다. 땔나무꾼이 어찌 노파심을 말할 수 있겠는가만 바라건대 공간 혁명에 준하는 아니 통념을 통째로 뒤집어 국가개조에 나서는 동아시아적 비전과 포부들을 펼쳐주시기 바란다. 물론 거기에는 우리나라 성장동력의 견인차, 섬사람들의 디테일이 있다. 20여년 가까이 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의 작은섬 프로젝트에 참여해오면서 생각해둔 것이 있다. 북한의 섬들을 모두 조사정리하고 위화도에서 회군 아니 회향하는 것 말이다. 시절이 어찌 흐를지 알 수 없지만 이런 생각의 근저에는 새로운 국가의 개조, 희망의 나라를 건국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꿈이 있다. 오늘 남도인문학팁은 졸시 '섬'으로 대신한다. 섬 - 이 윤 선 거슬러 오르는 게 어디 연어뿐이랴 조금 무시 지나고 사릿발 물살 억세도 칼날 같은 바람 모가지 아래 비늘 세우고 갱물 거스른 섬들 웅성이며 오르네 곰할머니 동굴에서 쑥마늘 드시던 때였을까 애기 업은 어떤 처녀 소스라치며 외쳤지 저기 섬이 떠내려가네! 저기 섬이 떠내려가네! 외던 소리에 심약한 섬들 그 자리 서버렸는데 달 정기 받으시온 어떤 섬들 외쳤지. 우리 어찌 서있기만 할 것인가 우리 어찌 흐르기만 할 것인가 만년 천년 물 한 가운데 있었어도 흐르는 바람 탓한 적 없고 역류하는 간만(干滿)의 물 원망한 적 없네 대저 갱물은 들고 나는 것이어니 거슬러 오르는 게 어디 연어뿐이랴 남녘 겨울바람 백설 되어 쏟아져 내린 갱번 옷깃 세운 물비늘 길베 삼아 가르며 새떼 같은 섬들 갱물 거슬러 오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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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6)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헤일 수 없이 수많은 밤을 내 가슴 도려내는 아픔에 겨워 얼마나 울었던가 동백 아가씨 그리움에 지쳐서 울다 지쳐서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 저 유명한 이미자의 '동백아가씨'다. 이미자는 1964년 이 노래를 불러 일약 국민가수로 등극하게 된다. 역사상 처음으로 100만장이 넘는 음반을 판매한다. 한산도(한종명) 작사, 백영호 작곡, 하지만 왜색풍이라는 이유로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이게 된다. '꽃잎은 빨갛게 멍이 들었소'라는 가사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붉은색만 보면 경기를 일으키던 시대였기 때문일까. 하지만 전문 연구자들에 의하면 왜색이나 빨갱이라는 배경 보다는 박정희정권의 '한일국교정상화'를 정당화시키기 위한 고육책이었다고 한다. 한일수교 반대, 저자세 외교논란을 미연에 차단했다고나 할까. 이 노래는 우여곡절을 거쳐 1987년 6월 항쟁 이후 해금된다. 왜색의 혐의를 입었던 것은 트로트 자체에 대한 이율배반이랄까, 뽕짝은 무조건 요나누키 음계이고 일본의 것이라고 폄하했던 시대적 풍조가 한몫을 했다. 민요 등 전통음악의 쇠잔, 트로트와 가요의 병존, 급속한 산업화, 농촌인구의 와해 등 상황들이 얽히고설킨 시대이기도 했다. 이즈음 트렌드이기도 한 트로트 열풍을 보면 일종의 격세지감을 느낀다. 트로트에 대한 시선 자체가 염세나 비관, 저급이나 신파의 정조를 뛰어 넘은지 오래다. 동박새가 꿀물 날라다주어야 비로소 피는 꽃 '동백아가씨'는 남해안 혹은 섬지역을 중심으로 상징화되어 있는 동백꽃을 아가씨에 대입한 것이다. 하지만 동백에 대한 전통적 시선은 비관과 좌절, 애수와 연민 보다는 오히려 고결과 숭고, 절개와 지조 같은 이미지가 강하다. 민화(民畵)나 묵화(墨畫) 특히 화조도(花鳥圖)의 소재 중 하나였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김춘수가 그랬다. 이름을 불러주어 비로소 꽃이 되었다고. 아무리 아름다운 대상일지라도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는 지극한 고백 아닌가. 한걸음 나아가 동백은 새가 날라다주어야 비로소 피는 꽃이다. 그래서 조매화(鳥媒花)다. 북한에서는 '새나름꽃'이라 한다. 새에 의해 꽃가루가 매개되는 꽃이라는 뜻이다. 동백꽃의 꿀을 빨아먹는 동박새가 꽃가루 옮겨주는 기능을 한다. 동박새는 동백꽃의 꿀을 먹고 살고 동백꽃은 동박새가 꿀을 옮겨주어야 수정을 한다. 그래서 '동백새'라고도 한다. 동박새는 한국, 일본 등지를 중심으로 아시아 전역에 분포하는 텃새이다. 섬이나 연안 등지 동백숲에서 살기에 울릉도나 제주도, 서남해 섬지역에서 볼 수 있다. 몸의 길이는 11cm정도, 등은 연한 녹색인데 날개와 꽁지는 녹갈색이다. 배는 흰색이고 눈 가장자리가 은색의 흰고리 모양이다. 동백꽃의 꿀을 좋아하여 식물성 꿀과 열매를 먹는다. 또 에벌레나 거미, 곤충류 등의 동물성 먹이를 먹고 산다. 악어와 악어새의 관계가 공생관계가 아니라는 사실이 밝혀지기는 했지만 동백꽃과 동박새의 관계는 명실상부한 공생이다. 옆구리에 붉은색을 띠고 있는 동박새를 김치자국이라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애수와 비련에서 휴머니즘과 고결까지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 어느 나라에 포악한 왕이 살았다. 자식이 없어 자리를 물려줄 수 없었기에 동생의 두 아들이 왕위를 물려받게 되었다. 욕심 많은 왕은 그것이 싫어서 조카들을 죽일 궁리를 하였다. 동생이 이를 알고 아들들을 멀리 피신시켰지만 이내 들켜버리고 말았다. 왕은 동생에게 두 아들을 죽이라고 명령을 했으나 차마 그럴 수 없어 스스로 자결을 하고 말았다. 동생은 죽어 동백나무가 되었고 아이들은 동박새가 되었다. 동박새가 동백나무에 둥지를 틀고 동백꿀을 따먹으면서 사는 내력이다. 울릉도나 대청도 등지 섬에는 육지로 나간 남편이 돌아오지 않자 섬의 아내가 죽어 꽃이 되었다는 설화들이 전해온다. 설백의 배경에 마치 핏덩이처럼 새빨갛게 핀 동백이 사람들의 심성을 그렇게 움직였을 것이다. 섬지역에 깃든 수많은 사람들의 애환이 이런 이야기로 창조되었을 터인데 기왕이면 좀 더 아름다운 이야기로 만들면 좋지 않을까 싶다. 동백을 한편에서는 산다화(山茶花, 산의 차꽃)라고도 하는데 이는 아기동백꽃(춘백)이다. 동백꽃차의 애용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니 그 역사가 꽤 깊은 모양이다. 겨울에 피면 동백(冬柏), 봄에 피면 춘백(春栢)이라 하니 바람 속에 피면 풍백(風柏)이요, 눈 속에 피면 설백(雪柏), 마음속에 피면 심백(沈柏)이랄까. 어쩌면 심중의 꽃 심백(心柏)일지도 모르겠다. 실제로 남도지역 특히 섬지역에서 긴요하게 쓰인다. 신랑 신부가 처음 만나 마주하는 교배례의 경우, 신부집에서 마당에 초례청을 세우고 갖가지 장식을 한다. 대개 꽃병에 송죽(松竹)이나 사철나무를 꼽는데 남도지역에서는 동백꽃을 사용한다. 굳은 절개의 의미로 해석한다. 사철 푸르다는 것 외에, 시들지도 않고 꼭지 채 떨어져 내리는 낙화의 이미지도 한몫 했을 것이다.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고 많은 열매를 달기 때문에 다산의 상징으로 삼기도 한다. 동백나무 가지로 여자의 엉덩이를 치면 남아를 잉태할 수 있다는 등 임신을 돕는다는 속설이 그래서 나왔다. 이런 심미안은 그림으로도 나타난다. 묵화(墨畫)가 사군자를 그리는 것이라면 민화(民畵)는 초충(草蟲, 풀과 벌레)을 그린다. 민화라고 사군자의 소재를 그리지 않겠는가만 고고하고 절절한 기풍보다 더 인간적이고 따뜻한 감성을 강조했다고나 할까. 그 중 매화, 수선화 등과 함께 즐겨 그렸던 것이 동백꽃이다. 문자 그대로 겨울(冬)에 피는 꽃이기에 정절이나 고결의 의미를 내포한다. 뜻으로 보면 사군자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조와 절개를 입에 올리기도 민망한 시대를 살고 있어서일까. 동백아가씨와 동백꽃 그림을 넘어 해안마다 지천인 동백숲이 그립다. 동백꽃 모가지 채 뚝뚝 떨어져 내리는, 마침내 바뀔 계절 기다리며 다음 졸시 한편으로 대신한다. 섬동백(島冬柏) 이윤선 너 어쩌자고 꽃술 하나 시들지도 않은 채 송이송이 꼭지 채 떨어지느냐 순백의 한겨울 무슨 곡절 그리 깊어 홑꽃잎마다 검붉은 멍들 우그린 채로 왕의 명을 받을 수 없어 스스로 자결하고선 동생은 동백나무 되고 그 아들들 동박새 되었다지. 육지나간 남편 무슨 일로 늦게 돌아와 동백으로 변한 아내 찾는 동박새 되었다지. 비로소 이름 불러주어야 꽃이 된다 하더라만 동박새 꿀물 날라주어야 피는 동백꽃만 하겠느냐 겨울마다 계절마다 순백의 풍경으로 스며들어 세상 모든 가슴앓이 감아 안는 설백(雪柏)만 하겠느냐 계절 가면 간단없던 북풍한설 지나고 세월 가면 생채기 난 나이테도 아물어지는데 당산 남쪽 조산숲으로 서고 갯골 동편 우실로 서서 바람 눈비 맞서고 물결마저 헤쳐 왔는데 너 어쩌자고 홑잎 하나 시들지도 않은 채 야속하단 한 마디 없이 댕강댕강 떨어지느냐 사철 푸른 잎가지 가없는 백설 풍경으로 두고 붉은 입술 붉은 심장 그저 초연히 떨어지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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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5)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고래 꿈을 꾸었다. 고래 뱃속으로 들어갔던 것 같은데, 집채만한 그 안에 또 하나의 마을이 있었다. 신년 벽두의 어떤 기다림이 있었던 것일까? 휴식이 필요하다는 무언의 경고였을까? 기억을 뒤져 옛 칼럼을 찾았다. 2017년 이 지면을 통해 고래 고기를 먹지 않는 흑산도 사리 사람 박유석씨 집안의 고래 이야기를 썼더라. 작년에는 한 종교 월간지에 고래의 신화세계를 다루기도 했다. 그랬구나. 고래에 대한 지극한 생각들은 왜 내 언저리를 떠나지 않고 맴돌았던 것일까. 깊디깊은 고래 뱃속, 넓디넓은 고래 등에 대한 무슨 함의라도 있었던 것일까? "어떤 사람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가 고래에게 잡아먹혔다. 뱃속을 들어가 보니 먼저 들어온 사람들이 도박판을 벌이고 있었다. 곁에서는 옹기장수가 옹기지게를 세워두고 도박구경을 하며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도박을 하던 사람이 옹기 짐을 잘못 쳐서 박살이 났다. 옹기 파편에 찔린 고래가 날뛰다가 죽고 말았다. 고래 뱃속에 있던 사람들이 옹기파편으로 고래의 배를 째고 탈출하였다." 손진태가 조선 각지의 민담을 모은 '조선민담집'(1930)의 한 내용이다. 이보다 앞선 기록이 이익(1681~1763)의 '성호사설' 제6권 만물문(萬物門)이다. '한 어부가 고래 뱃속으로 삼켜졌고, 그 속에서 칼로 창자를 그어 고래가 토해내는 덕분에 살아나왔으며 이후로 머리가 벗겨져 다시는 털이 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탄주어(呑舟魚)' 즉 배를 삼킨 물고기라는 별칭이 그래서 나왔다. 큰 인물을 비유할 때 '탄주지어(呑舟之魚)라 한다. 배를 삼킨 물고기, 고래에 대한 전언(傳言) "울진 둔산진에 사는 한 백성이 배를 타고 바다에 나가 전복을 작살로 찔러 잡다가 고래를 만나 배와 함께 고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고래 배속에 들어가 보니 작살을 휘두를 만큼 넓었으므로 온 힘을 다해 사방을 찌르자 고래가 고통을 참지 못하고 그를 토해냈다. 그가 밖으로 나와 보니 온몸은 흰 소처럼 흐물흐물해졌고 수염과 머리털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런데도 그는 구십이 넘도록 살다가 죽었으니, 천명이 다하지 않았기에 고래 배 속에 들어가서도 살아날 수 있었던 것이다." 성대중(1732~1809)이 쓴 '청성잡기(靑城雜記)'에 나오는 내용이다. 성대중은 서얼가문 출신으로 박지원, 박제가, 남공철 등과 교유했던 인물이다. 100여 편의 국내외 야담을 모아놓은 책이다. 취언, 질언, 성언 세 부분으로 나뉜다. 이병도가 소장하고 있던 것을 1964년 잡지 '도서' 제6호에 김화진이 전문을 소개하였고, <을유문화사>에서 간행하였다. 살이 흐물흐물해지고 수염과 머리털이 하나도 없었다는 대목이 흥미롭다. 다시 태어났다는 비유일까? 마치 갓 태어난 아이를 설명하는 듯하다. 고래 뱃속에서 살아 돌아온 이야기는 궁극적으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하려고 한 것일까? 고래가 생명을 구해준 이야기를 연전에 소개했으나 그 일부를 다시 옮겨둔다. 흑산도 사리에 살았던 박유석씨 얘기다. 한번은 혼자 물고기를 잡으러 먼 바다에 나갔다가 풍랑을 만나게 되었다. 배가 망가져 표류하게 되었다. 그 때 고래 한 마리가 다가와 박유석씨 배를 등에 태우고 왔다. 박씨를 해안에 안전하게 내려준 고래는 유유히 풍랑 속으로 되돌아갔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지게 된 것이다. 그 이후부터일 것이다. 박씨 집안은 고래 고기를 먹지 않는다. 생명의 은인인 고래를 고기로 먹을 수 없어서였으리라. 이 어둠이 내게로 와서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요나의 고기 속에/ 나를 가둔다./ 새 아침 낯선 눈부신 땅에/ 나를 배앝으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나의 눈을 가리운다. /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곳을/ 더 멀리 보게 하려고 / 들리지 않던 소리를/ 더 멀리 듣게 하려고/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더 깊고 부드러운 품안으로/ 나를 안아준다./ 이 품속에서 나의 말은/ 더 달콤한 숨소리로 변하고/ 나의 사랑은 더 두근거리는/ 허파가 된다./ 이 어둠이 내게 와서/ 밝음으론 밝음으론 볼 수 없던/ 나의 눈을 비로소 뜨게 한다!/ 마치 까아만 비로도 방석 안에서/ 차갑게 반짝이는 이국의 보석처럼/ 마치 고요한 바닷 진흙 속에서/ 아름답게 빛나는 진주처럼..... 김현승의 시 '이 어둠이 내게 와서' 전문이다. 재론의 필요가 없는 성경 요나의 물고기(요나 2:10)와 부활을 노래한 시다. 시인의 죽음 체험이 반영되어 있다. 요나의 상징적인 죽음과 고래의 의미들을 적절하게 읊었다. 고래는 이미 문학적으로나 설화적으로, 사회적으로 일종의 은유가 되어 있다. 포경수술을 고래잡이에 빗대는 이유는 따로 설명할 필요조차 없다. 실제로 고래 경(鯨)자에는 고래의 수컷, 들다, 쳐들다 등의 의미가 있다. 그래서 여름만 되면 고래고래 고함을 질러대며 송창식의 고래사냥을 불렀던 것일까? 베트남의 고래 제사 사례와 페로어의 잔인한 고래 사냥 사례도 연전 언급해두었으니 참고 바란다. 우리도 울주 반구대 암각화가 있고 동해를 경해(鯨海) 즉 고래의 바다로 부르던 시절이 있었다. 나라마다 민족마다 또 문화권마다 내면화된 고래들이 있다. 신화와 문학으로 고래를 노래한지 오래다. 저마다의 가슴 속에 고래 한 마리씩 키우고 있는 셈이다. 새해 벽두에 고래 꿈을 꾸었던 것은 성경의 요나를 염두에 두고 재생하는 고래를 톺아보기 위한 것이었을까. 고래에 투사된 이름은 모든 문명권을 횡단하여 추출하더라도 '재생'의 의미들을 포획할 뿐이다. 여러 가지 신화와 의례들, 종교적 상관물을 관통하는 고래의 속성이 재생과 부활의 은유라는 뜻이다. 코로나로 인한 곤핍과 경제적 궁핍이 가중된 시절을 가로지르며 그래도 희망을 잃지 않고 꿈꾸는 것은 이 어둠이 내게로 와서 건네는 한 마디 주문인 것일까. "지금껏 보이지 않던 곳을 더 멀리 보게 하려고/ 들리지 않던 소리를 더 멀리 듣게 하려고" 고래의 섬 흑산도 고래 하면 누구나 장생포를 떠올린다. 울주 반구대가 있고 고래축제까지 하고 있으니 그럴만도 하다. 나주사람 백호 임제도 <풍악록(楓岳錄)>에서 "큰 새처럼 생긴 몸집이 새까맣고 물을 뿜어대며 눈발 같고 소 울음소리를 내는" 고래를 언급했다. 강원도 간성을 여행하며 남긴 기록이다. 동해 외에 남도에서 고래가 거론되는 지역은 어디일까? 대표적인 곳이 흑산도다. 사람을 살린 고래 이야기 때문만이 아니다. 다시 인용해 둔다. 1900년도 초기 흑산도는 참고래, 대왕고래, 귀신고래, 혹등고래 등 대형 고래들을 포획하는 기지였다. 이주빈이 쓴 학위논문을 보면 일제가 설치한 대흑산도 포경근거지에서 1926년부터 1944년까지 한반도 근해 1/4이 넘는 27.4%의 고래를 포획했다. 주강현의 논의를 빌어 독도의 강치 멸종사와 흑산도 고래 집단 학살사건을 동일한 의미로 독해하고 있다. 관련 근거들이 많다. 고래공원이 조성되어 있는 흑산도 예리 뒷산은 지금도 곤삐라산(金比羅, 비를 오게 하고 항해의 안전을 수호하는 신)이라 부르는데, 이곳에 신사를 세우고 도리이(鳥居)의 좌우 양 기둥을 고래턱뼈로 세우기도 했다. 흑산도를 다시 고래의 섬으로 부르게 하자는 이주빈씨의 제안은 단지 마을역사 추적이나 마을 가꾸기의 차원을 넘어서는 얘기다. 지금의 황폐해진 어로환경과 해양환경을 뒤집어보는 성찰의 제안이다. 환경을 생태나 경제로 읽는 눈이 필요한 것처럼 풍경을 문화로 읽는 눈이 필요한 시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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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4)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이라~, 자라~, 어이~' 일종의 소모는 소리다. 관련 음영민요는 주로 한강 이북지역에서 채록된 것이 많아 남도지역 농요의 전통을 짐작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명령어에 운율을 넣는 경우는 공통적인 듯하다. '이라~'는 오른쪽으로 '자라~'는 왼쪽으로 돌라는 뜻이고 '어~'는 서라는 뜻이다. 스무 살 되기 전부터 소 쟁기질을 하고 써레질을 해 본 탓인지, 나에게 소는 더없이 친숙하다. 전답이 없던 늙으신 아버지는 순전히 괭이로 서마지기 아홉 배미 산전답을 일구셨다. 한 이랑 쟁기질을 하면 막걸리 한잔을 해야 할 정도다. 산전 옹타리 치고는 사래가 너무 길고 논둑은 어른 키를 훌쩍 넘을 정도로 비탈졌다. 모내기를 하기 위해서는 언 땅이 풀리기 전에 초벌갈이를 한다. 초벌에 갈아둔 이랑을 양옆으로 갈라치기하며 쟁기질하는 것이 두벌갈이다. 이렇게 이랑과 고랑을 반복해서 갈라치기하여 일곱 번을 갈아야 비로소 논둑을 붙일 수 있다. 일곱 번 갈이 논둑 붙이는 법이라고나 할까. 그제야 논에 물을 대고 써레질을 하며 몽근 흙들이 골라지면 모내기를 한다. 이런 환경 때문일 것이다. 내 카카오톡 이름이 '깔비고 소띠기고'다. 가입할 때부터였으니 근 10여년 써왔다. '소꼴을 베고 소에게 풀을 뜯긴다'는 우리 고향 말이다. 소를 뜯기는 일은 사실 나라의 모든 소년들이 행했던 통과의례 같은 것이기도 했다. 산과 들에 나가 소가 풀을 뜯어 먹도록 시키고 꼴망에 풀을 베어야 한다. 외양간에서는 '쇠죽(粥)'을 끓인다. 회갑을 넘긴 이들 중 상당수는 소 풀 뜯기는 일과 꼴 베는 일을 경험했을 것이다. 1960년 이전까지만 해도 우리 인구의 절대 다수가 농업에 종사했기 때문이다. 농사에 절대적으로 필요했던 소 키우기가 그 중심에 있고 그 안에는 마치 관례처럼 씨압소 즉 배냇소 시스템이 가동되었다. '깔비고 소띠끼고', '씨압소'의 전통 "씨압 갖다 키워서 새끼 낳먼 쉬앙치 받기도 허고, 아니먼은 어린 쉬앙치를 가져다 한 2년 정도 키워서 고놈을 팔아갖고 주인하고 절반썩 돈으로 나누기도 허고 그래. 돈으로 나눈 것보고 '바넷소'라고 그러고..." 이기갑 교수 등(「새로 발굴한 방언13」, 한국방언학회, 2014)이 정리한 '씨압소' 용례다. '씨압소'의 표준말은 '배냇소'이다. 국어사전에서는 남의 소를 송아지 때 가져다가 길러서, 다 자라거나 새끼를 낳으면 원래 주인과 그 이득을 나누어 가지기로 하고 기르는 소라고 풀이해두었다. 제주에서는 '벵작쉐' 혹은 '멤쉐'라고 한다. 유사한 형태로 '반작소'가 있지만 배냇소와는 좀 다르다. 경남에서는 '배내이세' 혹은 '배내기소'라 하고, 경북에서는 '배미기', 또 일부지역에서는 '어울이소'라고도 한다. 진도에서는 '어시소', 영암에서는 '도짓소' 보성에서는 '배냇소' 곡성에서는 '씨압소/갈라먹기' 등으로 부른다. 남도지역에서는 '씨압소'가 보편적으로 통용되기에 나는 이를 준거 삼는 편이다. 송아지를 주고 어미소를 받거나 어떤 지역에서는 기른 사람이 어미소를 갖고 새끼를 낳아 주는 경우도 있다. 아기가 처음 태어났을 때 입히는 옷을 '배냇저고리'라 한데서 알 수 있듯이 '갓난 새끼'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 '씨'는 의심의 여지없이 '종자'를 뜻하는 말이다. '압'의 출처는 약간 불분명한데, 이기갑 교수는 '아비'의 '압'에서 왔다고 풀이한다. '종자소를 줄 수 있는 부모 소'라는 뜻이다. 남도지역에 전하는 말 중에 씨아부지, 씨아부니, 씨압씨, 씨애비, 씨엄씨, 씨어매, 씨아자씨(시동생) 혹은 씨아잡씨, 씨숙(媤叔), 씨아재 등이 '압' 즉 부모라는 시댁(媤宅)을 넘어 '종자' 즉 '씨'와 연결된다. 씨압소의 전통은 우리나라를 관통하는 보편적인 전통이었다. 흰소의 해에 생각하는 십우도(十牛圖), 소는 누가 키우나 열네 살이 되면 씨압소를 부릴 수 있게 된다. 지금으로 치면 중학교 입학생부터 그 자격이 주어지는 셈이다. 무상으로 분배받은 송아지가 생후 6개월이 되면 '목매기' 즉 목에 고삐걸이를 한다. 이후 뿔이 나오고 생후 1년여 후에 코뚜레를 뚫어 채운다. 생후 13달 정도 되면 새끼를 밴다. 임신 기간이 280일로 사람과 거의 같으므로 생후 2년이면 새끼를 분만하게 된다. 통상 이 새끼를 씨압소 받은 소년이 갖고 어미소를 씨압소 준 이에게 갚는 구조로 되어 있다. 따라서 소년이 16세가 되면 자기의 소를 갖게 되는 것이고, 혼인할 수 있는 자격이랄까 성년으로의 도약을 시작할 수 있게 된다. 지금은 청년창업자금 정도로 퇴화되었지만 절대인구가 농업에 종사할 시기만 해도 통과의례와도 같은 중요한 일이었다. 나랏일을 맡아하는 이들은 이 점 눈여겨 두었다가 '배냇소 정책'을 펴도 좋을 듯하다. 물론 장성하여 가정을 이룬 이들에게도 씨압소 시스템은 가동되었지만 성년에 진입하는 아이들에게 무상 분배되는 이 맥락을 주목할 일이다. 그러하니 소년들이 어찌 허투루 소풀을 뜯기며 소꼴을 베겠는가. 오만 정성을 다 들여 일종의 씨드머니를 키우고 가꾸지 않았겠는가. 2021년 올해를 신축년 흰소의 해라 한다. 사방에서 흰소에 의미를 부여하고 원대한 비전들을 얘기한다. 흰소에 의지해 팬데믹에서 탈출하자는 소망들일 텐데 현실은 암담하기만 하다. '신축년 남편 찾듯, 무진년 팥방아 찧듯', 비교적 잘 알려진 속담의 재현이랄까. 1661년 신축년 그해에도 이랬던 모양이다. 천재지변과 재난, 흉년이 겹쳐 가족들은 뿔뿔이 흩어지고 부부도 떨어져 서로 찾아다녔다는 데서 유래한 속담 아닌가. 기후위기와 역병의 창궐, 언택트와 비대면 활동들의 데자뷰 같다. 3~4년 주기로 이 환란이 반복될 것이라는 경고도 있다. 최재천 교수는 주문한다. 일시에 처방하여 환란을 끝내는 백신은 없다. 주기적으로 반복되거나 혹은 더 강한 역병 팬데믹에 대한 행동백신으로 나가야 한다. 어떤 행동으로 백신을 삼아야 할까. 언택트 비대면이 기본이다. 향후 모든 정책은 이 기조로 수립되어야 한다. 그래서다. 흰소는 누가 공짜로 데려다주지 않는다. 십우도를 우리 같은 땔나무꾼들이 풀이하자면, 그저 묵묵하게 '깔비고 소띠끼'는 일일 것이다. 그래야 검은소가 흰소 되지 않겠는가. 코로나 팬데믹이 우리에게 주는 경고이자 주문이다. 씨압소와 선불교의 십우도(十牛圖) 십우도를 인간이 깨달아 가는 과정으로 풀이하고 심우도(尋牛圖)라 얘기하니, 숭고한 영성을 어찌 우리 촌부들이 이해하겠는가만, 이를 씨압소에 기대 생각해보고 싶다. 열네 살의 소년이 씨압소를 받아 열여섯에 새끼를 낳게 하여 씨압을 갚고 장성하여 가정을 이루는 과정, 소 키우는 일에 그만큼 의미를 부여하고 싶다는 뜻이다. 1. 심우(尋牛), 동자승이 검은소를 찾는다. 2. 견적(見跡), 동자승이 검은소의 발자국을 발견하고 그것을 따라간다. 3. 견우(見牛), 검은소의 뒷모습이나 소의 꼬리를 발견한다. 4. 득우(得牛), 검은소를 붙잡아서 고삐를 건다. 5. 목우(牧牛), 소에 코뚜레를 뚫어 길들이며 끌고 가는데 검은소가 머리부터 흰색으로 변해간다. 6. 기우귀가(騎牛歸家), 흰소에 올라탄 동자승이 피리를 불며 집으로 돌아온다. 7. 망우재인(忘牛在人), 흰소도 없고 동자승만 앉아있다. 8. 인우구망(人牛俱忘), 흰소도 동자승도 없다. 9. 반본환원(返本還源), 강물은 고요히 흐르고 꽃이 절로 핀다. 10. 입전수수(入廛垂手), 세속의 저잣거리로 들어가 중생에게 손을 드리운다. 십우도의 지극한 과정을 보니 알겠다. 역병 창궐의 해일지언정 그저 묵묵하게 '깔비고 소띠끼'는 것이 정녕 행동백신을 실천하는 길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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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3)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참요(讖謠) 파랑새 동학의 노래라 불리는 '파랑새요' 같은 조 같은 가락 달라진 노랫말 시대적 맥락 속 숨은 뜻 들어 있어 세상 모든 소리 들어 아는 '관음조' 천리 밖 소리 들어 길흉화복 꿰뚫어 봉건사회 뿌리째 뒤흔든 동학운동 다시금 파랑해 노래를 흘얼거린다 사찰에 극락보전을 지었다. 벽화를 그려야 할 차례였다. 마침 한 노인이 찾아왔다. "내가 이 법당의 벽화를 그리겠다. 그 대신 49일간 절대로 이 법당을 들여다봐서는 안 된다." 주지스님이 수락은 하였지만 보지 말라 하니 궁금증이 일었다. 마지막 날이 되었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주지가 창호지에 구멍을 뚫어 살짝 들여다봤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그림 그린다던 노인은 온데 간 데 없고 파랑새 한 마리가 붓을 입에 물고 벽화를 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주지스님이 법당문을 열고 들어가자 깜짝 놀란 파랑새가 붓을 입에 문 채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강진 무위사에 내려오는 전설이다. 그림을 그리던 파랑새가 날아가 버렸으니 화룡점정(畵龍點睛), 점안식을 못한 셈이랄까. 그래서 지금도 무위사 극락보전 관음보살의 눈동자가 없다고 한다. 사찰의 파랑새 설화는 전북 부안 내소사의 대웅보전 설화나 낙산사 및 홍련암 등이 유명하다. 의상대사가 한 곳에 참배를 하다가 푸른 새를 만났다. 갑자기 새가 석굴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상하게 생각한 의상이 그곳에서 7일 동안 기도를 하였다. 비로소 바다에 붉은 빛의 연꽃이 솟아올랐다. 관음보살의 현현(顯現)이었다. 지금의 낙산사 혹은 홍련암이 생긴 내력이다. 내소사에는 호랑이가 사찰을 짓고 파랑새가 단청(丹靑)을 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온다.새야 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남녀노소 모르는 이 없이 잘 알려진 우리 민요다. 대개 '파랑새노래'라고 한다. 항간에서는 여기서의 파랑새를 1894년 아산만에 상륙했던 청나라 군대로 해석하기도 한다. 청나라이니 파란색이라는 뜻으로 이해한 듯하다. 녹두밭은 동학당이고 청포장수는 서민대중이며 녹두꽃은 전봉준을 가리킨다고 해석한다. 전봉준의 어릴 때 이름이 녹두였다니 녹두꽃을 녹두장군에 비유한 것은 재론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나머지 풀이들은 견강부회적 말맞추기일 가능성이 높다. 대개 한자말을 우리식으로 풀어쓸 때 이런 잘못을 많이 범한다. 청나라는 푸를 청(靑)이 아니라 맑을 청(淸)을 썼다. 발음의 유사성을 고려하더라도 청나라군사에 비유하는 것에는 동의하기 어렵다. 이 노래는 이렇게도 불린다. "새야새야 녹두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간다" '파랑새'의 자리에 '녹두새'가 배치되었다. 이 노래로 보면 녹두새(파랑새)는 전봉준을 가리킨다. 정 반대의 해석인 셈이다. 같은 곡조 같은 리듬인데 여러 가지 노랫말들을 바꿔 불렀다. 역사적으로 오래된 노래여서일까? 당대 민중들의 수요와 욕망들이 달라서였을까? 그래서다. 동학의 노래라고도 불리는 '파랑새요'를 상고할 때 고려해야 할 것들이 있다. 단순한 댓구로 가져다 쓴 용어와 시대적 맥락 속에서 인용하는 배경, 행간의 숨은 뜻들이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파랑새와 관음조(觀音鳥)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이해 내 콩 밭에 머물렀던가 파랑새야 파랑새야 내 콩 밭의 파랑새야......" 필사본에 나오는 '청조가' 즉 파란새 노래다. 가사를 보면 동학의 '파랑새노래'와 거의 같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파랑새가 그렇고 콩밭이 그렇다. 여기서의 파랑새는 사다함의 연인 미실이다. 정민 교수는 이 노래가 위작의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자체의 위작 가능성이 분분하니 크게 강조할 수는 없지만, 만약 그것이 아니라면 파랑새노래의 연원은 신라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게 된다. 설화적 맥락은 곳곳에서 발견된다. 황해북도 고달굴 전설에 관음조(觀音鳥)가 나온다. 여기서의 관음조가 곧 파랑새다. 낙산사와 홍련암이 우리나라 관음의 최대 도량이라는 점에서 연관성을 엿볼 수 있다. 아버지가 천부관음을 조성하고 얻은 아이가 자장이라는 이야기와 경덕왕 때 천수관음에게 빌어서 눈먼 아이가 눈을 뜨게 되었다는 이야기가 6세기 무렵이니 어쩌면 '파랑새 노래'의 역사는 더 거슬러 오를지도 모른다. 설화적 내력으로만 본다면 강진 무위사나 부안 내소사 등도 관음도량이다. 관음(觀音)은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의 준말이다. 문자 그대로 풀이하면 세상의 모든 소리를 들어 알 수 있는 보살이다. 청진기를 대지 않고도 천리 바깥의 소리 들어 사람의 길흉화복을 꿰뚫어본다. 그래서일 것이다. 이런 역사적 배경 속에 생겨난 당대 민중들의 조바심이 직조해낸 것이 동학의 파랑새 노래 아닐까? 김익두가 펴낸 〈전북의 민요〉에는 또 다른 노랫말이 소개되어 있다. "새야새야 무당새야 미륵산에 앉지 마라 샛바람이 부는 것이 눈동자를 가릴러라." 무위사에서 점안식을 하지 못하고 날아 가버린 파랑새가 저잣거리에 들어 무당새가 되었던 모양이다. 식자들이 지어 좀 어렵긴 하지만 이들 모두를 참요(讖謠)라 한다. 여기서의 무당새, 미륵산, 눈동자는 전봉준, 녹두꽃, 동학으로 소급되며 곤핍한 이승을 구원할 관음으로 환원된다. 좌절된 혁명, 실패한 전쟁이었을까. 봉건사회를 뿌리 채 흔들었던 그 정신이 유효하다면 어쩌면 동학은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인지도 모르겠다. 오늘은 파랑새 노래를 흥얼거려봐야겠다. 오월의 참요(讖謠)흔히 5.18 광주민주화운동의 뿌리를 동학농민혁명에서 찾는 이들이 많다. 1894년 갑오농민혁명이 봉건사회에서 근세사회로 넘어가는 절절한 전쟁이었다면 5.18 또한 부조리한 군부의 압제와 질곡으로부터 민주사회로 넘어가는 치열한 혁명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시기 불린 노래들을 에둘러 참요(讖謠)로 해석할 수 있다. 풀어 말하면 미래의 일에 대한 주술적 예언을 주제삼은 노래다. 시대적 상황이나 정치적 징후 따위를 암시하는 노랫말들로 구성된다. 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을 암시한 나 조선의 건국을 암시한 , 동학혁명기의 등이 대표적일 것이다. 5.18 기간에 불린 수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5.18 광주민주화운동자료총서 제42권을 참고한다. 김선출 진술서에는 투사의 노래, 우리의 소원, 우리들은 정의파다 등의 노래가 불렸다. 최병진 수사조서에는 정의가, 투사의 노래, 봉선화, 우리의 소원은 통일, 흔들리지 않게, 내게 강 같은 평화, 새 나라의 어린이, 그 때 그 사람 등이 이른바 노가바(노래 가사 바꾸어 부르기)로 불렸다. 이외 시위와 투쟁 현장에서 불린 많은 노래들이 있었다. 항쟁이 끝나고 김종률이 지은 '임을 위한 행진곡'에서 정태춘의 '5.18(잊지 않기 위하여)'까지 또 수많은 노래들이 만들어지고 불렸다. 다시 파랑새를 생각한다. 갑오년 농민들은 왜 파랑새 노래를 지어 불렀을까. 단지 전봉준에 대한 애틋한 마음과 염려였을까. 처형에 대한 애절한 반응이었을까. 적어도 이 노래를 참요의 범주에 넣고 해석하려 한다면 그것은 신라로 거슬러 오르는 관세음보살과 고려의 건국, 조선의 건국을 암시했던 민요들에 가 닿을 수 있어야 한다. 보다 적극적인 해석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제기하는 질문이다. 우리는 시방 5.18의 노래를 어떻게 소비하거나 재구성하고 있는 것인지. 구시대를 비판하고 새 세상을 준비했던 그 노래, 참요 말이다. 다시 어떤 노래를 불러야할 것인지 녹두장군 파랑새 노래에 비춰 길을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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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2)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몸으로 체화되고 맘으로 발원된 몸짓과 소리들이 소박한 타악기들에 얹혀 시공을 가른다. 땅의 조건과 하늘의 이치를 목으로 풀어낸 소리를 정가(正歌)라 했지만, 오로지 장구 하나 혹은 징 하나로 풀어내는 이 소리야말로 천지를 왕래하는 아정한 소리임에 틀림없다. 아정(雅正)이란 무엇인가? 기품이 높고 바르다는 뜻이다. 정가에 비해 속가(俗歌) 그 중에서도 천한 계급이 담당하던 씻김굿의 소리를 어찌 기품이 높고 바르다 할 수 있는가? 그렇지 않다. 악(樂)의 격조는 계급의 대물림이나 신분의 귀천으로 상속되는 것이 아니다. 귀천의 이데올로기가 가리고 있던 행간을 들추면 비로소 보인다. 어떤 선율이 흉금을 털어내며 어떤 리듬이 격조를 재구성하는지. 나는 본 지면을 통해 "송가인의 엄마는 왜 무당이 되었나", "송가인 신드롬", "남도 트로트" 등 개인사를 넘어선 노래 기반의 사회현상을 여러 차례 주목해온 바 있다. 근자에 당골 송순단 선생이 음반작업을 한다기에 몇 줄 보태면서 이렇게 썼다. "송순단의 굿소리를 수리성이나 천구성을 넘어 귀성(鬼聲) 곧 신에 이르는 소리라 하는 것은 그녀의 영육에 베어든 삶의 서사를 두고 나온 말이다." 아름다운 동행, 운명의 굿판 숙명의 소리 기억을 되살려 정보 몇 오라기를 소환한다. 송순단의 소리는 진도 지산면지역 무당이었던 친정어머니 여금순으로 거슬러 오르며 나주출신 외할아버지로 거듭해 올라간다. 열다섯에 시작한 식모살이를 시작으로, 어머니, 오빠, 동생, 아이, 아버지 등 연이은 가족들의 죽음으로부터 그녀가 상속받은 것은 지상의 어떤 묘사로도 표현할 수 없는 암울한 것이었다. 외눈봉사 아버지와 가난한 집, 이 땅에 대대로 전승되어 온 심청의 현현이라고나 할까. 절절한 가족사를 넘어 지역의 역사에 깃든 그녀의 서사가 대하를 이룬다. 죽음을 딛고 일어나 오보살의 법제를 받고, 진도씻김굿 준보유자였던 이완순의 율격을 받았다. 남도씻김굿의 대표 연행자로 현장을 누비며 남도 전통의 소리 법제와 부채(負債)를 또한 한 몸에 받았다. 운명이었을까. 그 아스라하던 시절을 다 보내고 이제야 비로소 작은 음악 하나를 기록했다. 장구 하나 허리에 대고 온갖 역신들을 마주하는 담대함의 소리다. 징 하나 엷게 울려 지상의 혼령들을 일깨우는 소리다. 가곡과도 같고 남도전통의 '흥그래'와도 같은 선율이 고이 잠든 영성을 일깨운다. 차원을 넘어서는 공명의 소리요 죽은 자와 산자들이 더불어 가는 동행의 소리다. 웅장한 오케스트라보다 더 깊은 귀성(鬼聲)으로 백만군사 이끄는 북소리보다 더 넓은 몸짓으로 맞서는 담대함의 소리다. 이제 외동딸 송가인이 국민가수로 등극해 이 땅 힘들고 어려운 사람들과 동행하고 있다. 나는 연이어 이렇게 썼다. 지극한 가슴 열고 어깨 겯고 가는 송순단의 소릿길, 이 소리 닿는 심연의 저 끝에, 우리 모두에게 이를 축복 있으리니. 만조상해원경(萬祖上解寃經) 만조상해원경, 본 이름은 옥추경(玉樞經) 또는 옥추보경이다. 독경할 때 읽는 경문 중에서 으뜸으로 친다. 1831년 묘향산 보현사에서 간행한 것이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이외 출간본들이 몇 권 있고 그 뿌리는 중국 도교까지 이어진다. 영화 '사도'의 OST로 인용된 후 사람들의 관심이 많아졌다. 압도적인 시퀀스, 정신병에 걸렸던 사도세자는 미친 듯 외는 옥추경을 배경삼아 칼을 휘두른다. 임오화변을 기록한 대천록에 의하면 사도세자가 무작정 죽인 중관, 내인, 노속들이 100여명에 이른다. 뒤주에 갇혀 죽게 된 원인이다. 옥추경의 본래 기능은 귀신을 쫓아내는 것이다. 몸에 달라붙은 귀신을 쫓아내는 굿거리인데 사도세자는 이마저도 억제하지 못하고 폭발하고 말았던 것이다. 송순단의 만조상해원경은 이렇게 시작한다. "선망조상 후망조상 부모좌우조상 혼령님과 다생사자 다생남녀 형제숙백 숙질남매 원근친척 무주고혼 금일영가 저 혼신은 혼이라도 오셨으면 만반진수 흠향하고 일배주로 감응하시고 살다 남으신 명과 복록은 자손궁에 전하시고~" 근자의 진도씻김굿에서는 연행되지 않는 장르이지만 송순단의 굿에서는 인용된다. 무경 연행은 친정어머니 여금순의 굿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뭇 사람들은 만조상해원경 자체의 의미를 높게 치지만 송순단의 경우, 영육으로 체화되고 발원된 장단과 선율의 의미가 더 크다. 흰쥐의 해, 잔뜩 계획을 세우고 포부를 가졌던 한 해가 기울어간다. 반백년을 더 살고도 항상 세모에 들면 후회가 남는다. 후회 중 가장 큰 일은 원통한 일을 당하는 것이다. 집값의 폭등과 경제난으로 자영업자들의 원성이 하늘을 찌른다. 여기에 코로나19까지 겹쳤으니 고대사회라면 왕살해가 일어날 상황이다. 하지만 원통한 마음 푸는 해원(解寃)뒤에는 상생(相生)이 달라붙는다. 해원상생, 맥락 없고 명분 없는 노래라면 희망고문이겠지만 적어도 핍진(乏盡)한 개인사를 극복해낸 송순단의 노래 아닌가. 화려한 반주음악도 수려한 무대도 없다. 그저 장구 하나 혹은 징 하나 들고, 천만군사 호령하는 담대함을 율격에 담을 뿐이다. 바라건대 이 소리가 해원일 수 있기를 바란다. 희망도 포부도 다 잃어버린 경자년 세모(歲暮), 타악기 하나 들고 외는 송순단에 그저 기대는 마음 처연하다. 가장 낮은 땅 이곳으로 해원이여 오라. 가진자 못가진자 우호(友好)하는 상생으로 오라. '안당'에서 '종천맥이'까지 안당굿: 조상이나 성주 등 가신에게 굿의 시작을 아뢰는 신고식이다. 큰방이나 대청마루에서 연행한다. 굿하는 날이 조왕(부엌의 신)과 관련 있는 날이면, 조왕반이라는 굿으로 시작하기도 한다. 징을 가볍게 두드리며 굿하는 장소와 의뢰자의 정보 등을 노래한다. 신들과의 교감을 상상하며 눈을 지그시 감으면 송순단 특유의 아정(雅正)한 성음들이 지상과 천상의 심연에 기우는 풍경을 접할 수 있다. 손님굿: 진도지역에서는 손굿이라고도 하고 마실이굿이라고도 한다. 천연두와 홍역 등 마치 손님처럼 임하는 질병들을 퇴치하는 굿이다. 손님으로 대별된 신격들을 받아들이고 모시고 보내드리는 절차로 구성되어 있다. 송순단의 손님굿은 스승이기도 했던 고 이완순의 법제를 상속 받은 것이다. 스승 특유의 탁성과 송순단의 성음이 교합되어 절묘한 복선율이 탄생되었다. 장고 하나 들고 오로지 선율에 의지해 역신들을 맞이하는 자태가 장엄하다. 희설: 불교 색채를 가장 강하게 담은 무가다. 선율의 행로에 빼곡한 것들은 웅장한 천상의 계곡을 처연하게 걸어가는 한 영혼의 그림자임이 틀림없다. 안당굿처럼 당골 홀로 징을 가볍게 두드리며 연행하기에 그 심연을 가늠하기조차 어렵다. 진도지역에서는 당골에 따라 회심곡을 부르거나 저승육갑을 푸는 노래를 하는데, 송순단의 희설은 전자의 이완순 법제를 이은 것이다. 극락에 이르는 동안 거쳐야 하는 여러 가지 관문을 따라가다 보면 비로소 삶과 죽음을 관조하는 스스로를 발견하게 된다. 종천: 종천맥이 혹은 중천이라고도 한다. 문밖으로 나가 사자맥이, 대신맥이 무가를 부르며 망자의 옷가지 등을 태운다. 타오르는 연기는 지상에서 천상에 이르고, 불꽃을 타고 오르는 징소리와 무가의 선율은 극락이며 천당일 안식의 공간에 가 닿는다. 배송하는 것이 어디 한 사람의 영혼뿐이겠는가. 이승과 저승을 오로지 선율 하나로 횡단하는 송순단의 동행이 오히려 아름다울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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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01)1832년 개신교 선교사 귀츨라프의 극동아시아 여정 "공충감사 홍희근이 장계에서 이르기를, 6월 25일 어느 나라 배인지 이상한 모양의 삼범죽선 1척이 홍주(洪州)의 고대도(古代島) 뒷 바다에 와서 정박하였는데, 영길리국의 배라고 말하기 때문에 지방관인 홍주목사 이민회와 수군 우후 김형수로 하여금 달려가서 문정(問情)하게 하였더니, 말이 통하지 않아 서자(書字)로 문답하였는데, 국명국은 영길리국 또는 대영국(大英國)이라고 부르고(중략), 조선까지는 수로로 7만리인데 법란치, 아사라, 여송을 지나고 지리아 등의 나라를 넘어서야 비로소 도착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순조실록 32권 7월 21일 기사 내용이다. 개신교의 최초 선교사라는 귀츨라프 일행이 지금의 충청남도 보령시 오천면 삽시도에 속하는 고대도 뒤편 바다에 정박했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1832년이니 개신교 선교사들이 본격적으로 들어오는 1884년에서 1885년보다 50여년이 빠른 시기다. 본래의 장계가 그러하듯이 배는 어떻게 생겼고, 싣고 있는 물건은 무엇이며 누가 타고 있는지 등 상세하게 조사한 정보들을 나열하고 있다. 총 67인이 타고 있었으며 총 35자루, 창 24자루, 대화포 8좌 등 무력을 갖춘 상선이었다. 귀츨라프 일행은 왜 이 시기에 충남의 작은 섬(들)에 도착하였던 것일까? 이른바 대항해시대로 불리는 격동의 시기, 네덜란드, 영국, 독일 등 유럽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동양을 침탈하던 때이다. 무역을 빌미삼고 통상을 요구하며 때로는 전쟁을 일으켰고, 기독교 전파와 식민지 확장이라는 양날의 칼을 들고 동양세계 전반을 압박해왔다. 귀츨라프 일행도 선교여행 혹은 무역이라는 명분을 목적으로 한 무리들이었다. 그가 타고 있던 배의 이름은 로드 애머스트호(Lord Amherst)다. 칼 귀츨라프(Karl Friedrich August Gutzlaff, 1803~1851)는 독일(프러시아) 출신으로 네덜란드 선교회 파송 선교사다. 첫 번째 여행은 1831년 6월 3일부터 12월 13일까지 6개월여 기간이다. 목적지는 천진(텐진)이었고 출발지인 마카오로 귀환한다. 이때 만주 타타르지역을 방문한다. 타타르를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달단족이라 한다. 민족이 분화한 후 우리나라에도 대거 유입되어 유랑민으로 활동하다가 정착한 바 있다. 두 번째 여행은 1832년 2월 26일부터 9월 4일까지다. 마카오를 출발해 산동반도에 갔다가 귀환하는 여정 중 우리나라에 도착한다. 7월 26일 군관 텡노라는 사람과 서기관 양씨의 안내로 애머스트호에서 내려 어떤 섬에 상륙했다가 8월 11일 떠났지만 처음 도착은 7월 17일이므로 약 3주간에 걸친 체류라 할 수 있다. 세 번째 여정은 아편 운반선 실프(Sylph)호에 승선해 1832년 10월 20일부터 1833년 4월 29일 다시 마카오로 귀환한다. 중국 동부 연안을 거쳐 요동(랴오둥)까지 갔다가 주산군도(쩌우산)를 거친 행로다. 귀츨라프의 서해안 여정과 도착지 논란 귀츨라프 일행이 도착했다는 곳은 어디일까? 순조실록에서 고대도 뒤편 바다라고 명시해두었기 때문에 정박지를 의심할 여지는 적다. 영국 동인도회사와 한시적 용선 계약을 맺은 애머스트호가 507톤의 상업용 범선이었다는 점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얕은 항구나 섬의 내안으로 깊이 들어갈 수는 없다는 뜻이다. 순조실록에서 적시한 고대도 뒤편은 장고도 앞쪽이기도 하다. 하지만 당시 감독 관리가 있었던 곳은 인근의 원산도다. 관아가 지금의 원산도 관가마을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수군 우후 등이 나가서 조사하고 또 이런저런 교류를 한 곳이 어디인가에 대해서는 논란이 생기게 되었다. 1832년 2월 26일 마카오에서 출발한 귀츨라프 일행이 중국의 여러 섬들을 거쳐 조선에 도착한 곳은 조니진 지금의 몽금포 앞바다다. 귀츨라프는 이를 몽금도(대도) 근처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후 남하하여 외연도 근처에 도착하고 녹도를 거쳐 볼모도에 도착한다. 볼모도는 삽시도에 속하는데 지금은 무인도가 되었다. 7월 17일 조선에 도착한 귀츨라프 일행이 처음 만난 것은 어부들이다. 이들에게 책과 단추 농어 등을 선물하고 조선의 국왕에게 올릴 통상청원서를 작성하기도 한다. 이후 천수만 내륙 창리까지 방문하여 전도 책자를 전달한다. 비록 한문으로 된 것이긴 하지만 이것이 우리나라에 전해진 개신교 최초의 성경이라고들 한다. 흥미로운 것은 귀츨라프의 일기에 나타나는 여러 섬들 중 실제로 사람들을 만나거나 전도했던 섬이 어디일까를 두고 논란이 많다는 점이다. 천수만 내륙까지 방문했다는 점으로 보면 어느 한 섬만을 특정하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 하는 생각이 드는데 말이다. 귀츨라프 관련 논문들이 수십 개가 넘고 고대도설, 원산도설을 주장하는 단행본들이 여러 개 나올 정도로 논란이 되었던 것은 비록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나라 최초의 개신교 선교사이고 또 최초의 한문성경이 전해졌다는 점에서 그 의미를 찾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세 번째의 여정에 사용되었던 배가 아편 운반선이라는 점, 이후 중국의 아편전쟁에 통역을 맡거나 식민지 관리를 역임하는 등 깊이 관여하였다는 점을 아울러 살피지 않으면 귀츨라프의 조선 최초 선교사라는 본질적인 맥락을 보지 못할 수 있다. 어느 한 섬을 특정하는 데 열을 올려 논쟁하는 것만큼 귀츨라프 행적의 과오를 함께 살피는 지혜가 필요한 때이다. 츨라프 도착지는 고대도일까 원산도일까 논자들이 문제 삼는 부분은 조선 관리들로부터 조사도 받고 전도도 했을 지역이 어딘가에 있다. 혹자는 고대도라고 하고 혹자는 원산도라고 한다. 고대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귀츨라프의 일기 기록에 도착지를 강갱(Gan-Keang)이라고 한데서 근거를 찾는다. 귀츨라프의 표기방식 중, 예컨대 오키나와 나하항을 기록하며 나파갱(Na-Pa-Keang)이라고 한다는 점 등을 들어 고대도 안항이 도착지라는 주장이다. 여기서의 갱(Keang)은 강을 말한다. 남도지역에서 바다를 갱번이라고 하는 점, 갯골 물길을 개옹(개펄의 웅덩이라는 의미)이라고 하는 점 등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원산도설을 주장하는 이들은 당시 수군과 관리들이 주둔하였던 원산도로 데려와 조사도 하고 체류하였을 것이라고 한다. 정조실록 등에 나타나는 '충청 우후로 하여금 원산도에서 선박을 점검하게 하다' 등의 기록을 근거로 내세운다. 실제로 서해 연안의 해상 고속도로였을 물길로 보면 원산도 앞바다가 사통팔달의 요지였고 원산도 선소에서 조운선이나 기타 선박들의 점검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감독 관리의 장소인 것은 분명해 보인다. 임시 조운창의 기능을 했던 사창이 있어 세곡의 관리도 이루어진 곳이다. 또한 원산도도 강경이라는 마을이 있어 귀츨라프의 기록 강갱과 발음상 유사한 측면도 있다. 하지만 관리 주둔지가 원산도의 남서쪽 마을인데 비해 강경마을은 반대편이기 때문에 관리감독의 맥락으로 주장하는 입장에서 마을이름을 덧붙이는 것은 설득력이 부족해 보인다. 맥락상으로 보면 애머스트호가 정박했다는 고대도 뒤편 바다가 장고도 앞바다와 같다는 점에서 장고도일 가능성도 열어둘 필요가 있다. 실마리는 강갱이라는 귀츨라프의 표기일테데, 남도지역의 '갱번'이나 '개옹'의 호명처럼 바다의 갯고랑이나 포구라는 보통명사로 볼 수 있지는 않을까? 강갱이란 말을 좀 더 폭넓게 찾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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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100)장생포는 지금의 여수 선소를 포함한 포구 이름이다. '곡(曲)' 혹은 '가(歌)' 등의 '노래'를 뜻하는 말이기도 하다. 장생포는 어떤 포구였으며 어떤 노래였을까? "시중 유탁(柳濯)이 전라도에 출진함에 위엄과 은혜가 겸비하여 군사들이 장군을 존경하고 두려워했다. 왜구가 순천부 장생포에 이르자 유탁 장군이 구원하러 감에 왜구들이 바라볼 뿐이었다. 장군이 곧바로 붙잡았다가 놓아주니 군사들이 매우 기뻐하며 이 노래를 지었다." '고려사악지'(1454년)의 기록, 이 노래가 <장생포>다. '전라도에 출진함'은 전라도 아닌 곳에서의 출진 예컨대 '합포(지금의 마산 합포구)만호'였을 때를 추정하게 하는데, 이에 대해서는 김준옥 교수 등이 밝혀두었다. 유탁장군이 '합포만호'였던 충혜왕 때는 왜구 침입이 없었고 '전라양광도 도순문사'였던 충정왕 때와 전라도 만호로 임명된 공민왕 때 즉, 장생포 전투는 유탁 장군이 전라도 만호로 있던 공민왕 원년(1352)이라는 것이다. 1344년(충혜왕) 원나라로부터 '합포만호'로 임명되었고 1352년(공민왕 원년)에 전라만호가 되었다. 한편 다른 기록도 있다. "장성포(長省浦), 부의 60리에 있으니 고려 때 왜인이 침입해서 여기에 이르자, 유탁이 군사를 거느리고 나가 치니 적들이 쳐다만 보다가 그대로 군사를 이끌고 돌아갔다. 이에 군사들이 크게 기뻐하며 노래를 지었다"『신증동국여지승람』(1481년)의 기록이다. "부의 동쪽 60리에 있다"는 기록이 핵심 정보다. 선학들이 밝혀둔 장생포의 위치를 추적해본다. 순천부 동쪽 60리 포구, 장생포의 위치 문헌에서 언급한 (순천)부 동쪽 60리 전후한 지역의 포구들은 만흥포(萬興浦), 기질을포(其叱乙浦), 탄잠포(呑潛浦), 성창포(城倉浦), 조음포(助音浦) 등이다. 용문포(龍門浦)는 부의 동쪽 55리, 며포(㫆浦)는 부의 동쪽 61리에 있다. 조선왕조실록 등을 보면 장생포가 몇 군데 등장하고 있지만 가장 유력한 정보는 전후맥락을 고려한 위치와 거리 정보다. 이런 점에서 유탁 장군의 이전 거처였던 합포만호를 포함, 울산 남구 장생포 등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다수의 문헌자료들을 검토한 선학들의 견해는 지금의 여수반도 내 포구에 집중된다. 좀 더 거슬러 올라가 통일신라시대의 포구 검토가 도움이 된다. 변남주 교수가 발품을 팔아 전국의 포구를 조사했다(고석규 외, '장보고시대의 포구조사' 참고). 옛 기록에서 위치를 비정할 때 방위 호명은 해로(물길)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방위상 남동쪽이라도 물길에 따라 동쪽으로 이해할 수 있다. 지리서에 여수지역 포구를 모두 순천부의 동쪽으로 표기한 이유다. 용문포(龍門浦)는 『읍지』에도 부의 동쪽 55리로 나와 있는데 용인포, 용개라고 불렸으며 현재 '고돌산포'에 해당한다. 수군만호가 배치되어 있던 곳이다. 다음은 『읍지』나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부의 동쪽 60리라 한 곳이다. 만흥포(萬興浦)는 만흥개라고도 하는데 만흥동 만성리 해수욕장 부근이다. 탄잠포(呑潛浦)는 화양면 장수리 자매마을로 추정하고 있다. 조음포(助音浦)는 종화동의 종포, 종개, 쫑개로 추정하고 있다. 기질을포(其叱乙浦)는 모사포로 추정한다. 성창포(城倉浦)는 현재 어느 지역인지 분명하지 않다. 이중에서 장성포를 당연히 주목할 수밖에 없다. 순천부(팔마비)에서 여수 선소(장생포 내안)까지 동남향 직선거리를 재보니 27.46Km다. 60리는 관례적 환산법으로 계산하면 24km, 도량형법에 따르면 25.2Km에 해당한다. 약간 차이는 있지만 지리서의 설명과 부합한다. 『한국지명총람』15(전남편Ⅲ)에 의하면, "장생포는 장성포, 장성개와 같다. 쌍봉명 안산리, 소호리, 선원리, 학룡리, 시전리, 웅천리에 걸쳐있다. 고려 30대 충정왕 2년(1530년 표기는 1350년의 오기) 5월에 왜구가 병선 66척을 이끌고 침입하여 노략질 하는 것을, 전라 양광도 도수문사 유탁 장군이 정병을 거느리고 쫓아가서 왜적의 배 한척을 무찌르고 왜적 13명을 죽이니, 그들이 놀라 달아나서 다시는 침범하지 못하였으므로 유장군이 스스로 장생포 노래를 지어 부르고, 군사들이 기뻐하여 동동곡(動動曲)을 불렀으므로 더욱 이름났다." 장생포(長栍浦)라는 이름은 벅수(남해안 지역에서 장승을 부르는 말)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다. 왜 여수에 벅수가 많은지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따로 다룬다. <장생포>는 북소리와 관련된 노래이자 연희(演戱) 여수시 쌍봉면 시전리 텃골 동쪽에 있는 골짜기를 '둥둥골'이라 한다. 둥둥골 뒤편이 고락산(鼓樂山)이다. 한국향토문화대전에 의하면 북소리에서 따서 붙여진 이름으로 추정된다. 최인선 교수에 의하면, 고락산성은 중간에 본성이 있고 산의 정상부(해발 335m)에 보루를 갖추고 있는 백제산성이다. 테뫼식 산성으로 산 자체가 성이었다는 뜻이다. 한편 여수 진남관 북쪽은 종고산(鐘鼓山)이다. 한산대첩 때 산이 스스로 울어 충무공 이순신이 붙인 이름이라고 전한다. 나라에 변고가 있을 때마다 웅웅웅 소리를 낸다 한다. 이 또한 북소리 울려 진군하는 진남(鎭南) 혹은 승전고(勝戰鼓)와 관련지어 해석하는 것이니 <장생포>를 북과 연결 지어 상상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고락산성(鼓樂山城)에 왜 북 고(鼓)자를 붙였는가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다. <장생포>의 발생이 유탁 장군과 그 군사들의 승전가였다는 점을 참고하면 자연스럽게 북(鼓)과 관련된 것임을 이해할 만하다. 괘락산(掛樂山)이라고도 하는데 테뫼식 즉, 산 정상부를 중심으로 성벽을 둘러 발권식 산성, 시루성, 머리띠식 산성이라고 부른다는 점 참고하면 고락산성의 의미를 더욱 이해할 수 있다. 산 자체가 큰 북의 형상일 것이기 때문이다. 여수 장생포를 배경으로 고려말엽에 지어져 대중 사이에 유포된 노래가 <장생포>라고 주장하는 배경 중 하나이기도 하다. 특히 백제 때의 산성이기에 연원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는 측면에서 호명의 의미가 크다. 왜구를 물리치고 불렀다는 장생포 노래, 그와 관련하여 불려지거나 춤으로 추었다는 장소를 현재의 여수 장성마을로 비정한 것은 이런 전거들을 바탕으로 한 주장이다. 장생포라는 노래에 대하여 <장생포>는 고려 후기 유탁(柳濯, 1311~1371)장군이 장생포에 침입한 왜구를 물리치고 불렀던 노래다. 가사는 전하지 않는다. 김준옥 교수가 장생포곡, 장생포의 창작자, 창작연대, 창작지 등을 분석한바 있다. 장생포 전투는 유탁이 전라도 만호로 있던 공민왕 원년(1352)에 일어났으며 노래 <장생포>는 당시 유행하던 민요를 유탁장군과 군사들이 전승의 기쁨을 만끽하며 함께 불렀던 대중가요라고 했다. 동의한다. 민요가 작자 없이 구전 전승되는 것이고 상황에 따라 일명 '노가바(노래가사 바꾸어 부르기)'를 하는 것이므로 당시의 승전 내용을 기왕의 민요 리듬이나 선율 예컨대 오늘날로 말하면 산아지타령 등에 맞춰 노래하고 연행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옛 문헌에 나오는 장생포, 장생포가, 장생포곡, 장룡성포, 장생곡, 특히 장생포 등곡은 장생포 외 다른 곡이라는 뜻일 수도 있으니, 모두 노래 이름이 달리 표현된 것일 뿐 넓은 범주에서는 같은 곡이다. 사실 노래만이 아닌 콘텍스트로서의 '장생포'다. <장생포>와 고려가요 <동동>의 상관에 대해서는 따로 설명하는 시간을 갖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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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수년 전 본 지면을 통해 초분을 다룬 바 있다. 최길성이 보고한 전북 위도의 증골장(蒸骨葬) 사례를 다시 주목한다. 초분에서 뼈를 추려가지고 집으로 와서 시루에 넣고 찌면서 당골이 굿을 한다. 발목 묶인 제물(祭物) 수탉이 울면 영혼이 돌아왔다고 생각하고 굿을 중지한다. 비로소 시루에서 뼈를 꺼내어 깨끗이 한다. 최덕원은 시커먼 뼈라도 시루에 넣고 찌면 새하얗게 고운 모습으로 변한다고 말한다. 임산부일 때는 반드시 초분을 한다고 증언한다. 빈(殯)이라는 초분의 장례법 모두가 지난 칼럼에서 언급했던 독장 즉, 항아리 등에 넣어 돌로 묻어두는 아이들의 주검처리 형태와 연관된다. 왜 뼈를 찌거나 닦아내어 다시 매장하는 것인가? 초분으로 대표되는 이차장례에는 살보다 뼈를 중시하는 어떤 관념 즉 영혼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런 생각은 주검 자체를 자궁의 메타포인 동굴에 넣는 행위로부터 비롯된다. 육신과 영혼을 분리하고 썩어 없어지는 살보다는 오랫동안 그 생명력을 유지하는 뼈에 거듭남과 재생 등의 관념을 부여했다는 뜻이다. 초분장을 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이러한 스토리텔링 또한 죽음의 극복이나 치유의 한 측면을 다룬다. 뼈와 살의 분리, 인간의 몸에서 영혼을 증류해내는 방식 언제부터인지는 모르겠지만 고대로부터 장례식을 인간의 몸으로부터 영혼을 증류해내는 기술로 독해하기 시작하였다. 이창익은 그의 연구 「죽음의 연습으로서의 의례」에서, 장례식은 부패하는 신체로부터 영혼을 구제하기 위한 일련의 세밀한 절차들로 구성된다고 주장한다. 단일한 장례식이 몸의 장례식과 영혼의 장례식 혹은 살의 장례식과 뼈의 장례식으로 이중화되는 사례들이 예시된다. 내가 『산자와 죽은 자를 위한 축제』(민속원)에서, 장례를 두 개의 단위 즉 주검의 처리와 영혼의 처리로 나누어 분석했던 것도 이런 일환이다. 예컨대 살의 장례식을 일차장례식으로, 뼈의 장례식을 이차 장례식으로 치부하는 것이다. 일차장에서는 영혼이 깃든 뼈를 살로부터 구분해내는 작업을 하고 이차장에서는 영혼의 귀천 혹은 재생의 염원 등을 담은 서사극 축제, 특히 씻김굿의 영돈마리를 통해 증류주(음복주)를 만든다는 것이 내 책의 요지다. 망자가 더 오래도록 살아 있기를 바라는 마음 혹은 어떤 형태로든 재생을 염원하는 표현이 바로 망자의 주검을 다루는 방법과 절차에 강하게 반영되어 있다. 프레이저가 보고한 『황금가지』의 다양한 사례들은 우리들에게 방대한 영감을 선사해준다. 캄보디아의 외딴 밀림 속 신비스러운 '불의 왕'과 '물의 왕이 있다. 죽은 사람을 매장하는 이 나라의 일반적인 관례와는 달리 이 신비스러운 두 왕은 화장(火葬)을 한다. 손톱과 이빨, 뼈 같은 것은 부적으로 경건하게 보관한다. 시체를 장작더미에 태우는 동안 죽은 주술사의 인척들은 왕이라는 싫은 직책에 오르게 될까봐 숲으로 달아나 숨는다. 사람들이 가서 그들을 찾는데, 은신처를 제일 먼저 들키는 사람이 다음 차례로 왕이 된다. 1891년 2월 한 프랑스인 장교가 이 외경스러운 왕을 만나지 않았다면 마치 우리가 단군신화를 설화로 대하듯 서구는 물론 인류사에 하나의 우화로 남았을 법한 이야기다. 우리에게도 유사한 장속이 있다. 사람이 죽으면 세 개의 복주머니를 준비한다. 한 주머니에는 손톱을 다른 주머니에는 발톱을, 또 다른 주머니에는 머리칼을 담는다. 육신은 죽었어도 손톱발톱 그리고 머리칼은 일정 시간 자라기 때문이다. 무슨 뜻일까? 손톱발톱이 피부의 하나이긴 하지만, 죽어서도 죽지 아니하는 뼈에 대한 관념의 대신이라고 나는 풀이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승려들이 다비식을 마치고 획득하는 사리(부처나 성자의 유골)도 뼈의 상징이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 아니겠는가. 뼈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지극한 관념 뼈에 대한 이 지극한 관념은 어디서 온 것일까? 썩는 살과 오랫동안 보존되는 뼈에 대한 분리 관념 말이다. 이 생각들이 좀 더 확장되면서 육신과 영혼의 분리 혹은 영혼의 구제나 재생, 부활을 따지는 종교의 발전으로 이어졌다고 생각한다. 일차장으로서의 육신을 탈각하고 이차장으로서의 영혼을 좀 더 오래 혹은 영원히 존재하게 하는 장법으로 발전된 셈이다. 이차장으로서의 초분장이 살과 뼈의 장례를 분리하는 대표적인 장례법이다. 내가 현지 조사한 자료를 포함해 여러 선학들이 보고한 자료들에도 초분장에 대한 현지인들의 구술은 대동소이하다. 자연적으로 육체의 살을 없애고 뼈를 좋은 곳(선산 등)으로 모시려고 초분을 한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뼈에 영혼이 담겨 있다는 영혼관이라고 할 수 있다. 어느 시기인지는 모르겠지만 주검 자체를 동굴에 넣거나 혹은 고인돌이라는 인공굴에 넣었다가 점차 육탈 후 뼈만 추려서 매장하는 장례법으로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지난 칼럼에서 고인돌과 옹관을 인조굴로 해석하고, 독(瓮)이라는 용어 자체가 도가지, 도가니 등의 용례로 알 수 있듯이 돌(독)과 관련 있음을 주장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물론 고인돌 아래 매장 혹은 풍장(風葬)되었을 주검이 살과 뼈를 분리하는 방식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고고학자들의 현답을 좀 더 추적해봐야겠다. 진도군 덕병리 장승제에서 소의 턱뼈를 바치는 이유 뼈에 대한 관념은 인간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고분에서 발굴되는 동물의 뼈들을 고고학자들은 어떻게 해석하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프레이저의 보고는 중요한 시사점들을 제공해준다. 예컨대 돼지 형태의 곡물정령은 추수 때와 파종기에 각각 등장한다. 코울란트의 노이아우츠에서는 그 해에 처음으로 보리씨를 뿌릴 때, 농장주의 아내가 돼지 등뼈와 꼬리를 삶아서 밭에서 씨 뿌리는 일꾼에게 가져온다. 일꾼들은 꼬리를 잘라서 밭에다 꽃아 놓는다. 곡식 이삭이 그 꼬리만큼 길게 자란다고 믿기 때문이다. 파종기에 미혼 남자를 밭에서 잔인하게 살인하는 사례들도 있는데 이런 경우 돼지의 형상으로 그는 파종기에 땅에 묻히며, 추수 때 무르익은 곡식 속에서 다시 태어난다. 내가 공부한 바로는 미혼 남자보다는 주로 처녀가 이런 시작이나 증식, 생산의 기제로 죽임을 당하는 경우가 많다. 돼지뼈를 재생과 생산 및 풍요를 기원하는 즉,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나는 영혼력으로 관념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프레이저의 이 이론들을 유감주술(혹은 모방주술)과 접촉주술이라고 한다. 비슷한 것이 비슷한 효과를 내며 그것과 접촉하면 비슷한 기능을 한다는 뜻이다. 진도군 군내면 덕병리의 당산제(거리제로 호명한다)에서는 두 기의 석장승에 해마다 소 턱뼈를 바친다. 인근의 군내면 세등마을 당산제에서도 소턱뼈를 바친다. 벌교읍 대포리 당제에서는 도깨비고사라고 해서 끄렁치에 소뼈(한 마리라고 여기는 분량)를 담아 개펄에 헌식한다. 분화된 생각들이긴 하지만 모두 뼈에 대한 지극한 관념들을 뿌리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의문이다. 화장(火葬)이 보편화된 현재, 이것이 영혼관에 대한 치열한 논의를 거친 풍속인지 인류사의 한 지점에 내 질문을 던져둔다. 죽음관과 영혼관은 곧 삶의 태도에서 비롯되며 또한 삶에 반영되기 때문이다. 늦가을 문턱 가로수 아래 나는 그저 무심한 아파트숲을 응시할 뿐이다. 죽음의 극복이나 치유의 측면들을 고려하지 않는 저급한 관념들이 진중한 논의도 없이 우리들의 도시를 배회하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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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98)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고인돌은 '굄돌'을 놓아 만든 무덤이라는 뜻이다. 굄돌 위에 대형의 판석을 덮었으니 사실은 '덮은돌' 혹은 '누운돌'이라는 이름이 정확할지 모른다. 세운 돌을 '선돌', 한자말로 '입석(立石)'이라 한다. 세운 돌과 대칭관계를 이룬다고 봤을 때 서있는 돌과 대칭되는 개념은 '누운돌' 혹은 '덮은돌'이다. 중국에서는 석붕(石棚), 유럽 등지에서는 돌멘(Dolmen) 등으로 호명한다. 석붕의 붕(棚)이 시렁이나 선반 같은 것을 말하므로 '돌선반'이나 '윗덮개' 즉 '덮은 돌'에 의미를 둔 것으로 보인다. 'Dolmen'의 'men'이 돌이라는 뜻이고 'dol'이 탁석(卓石)이라는 뜻이니 테이블 모양의 돌 즉 이것도 위의 덮은 돌에 의미를 둔 호명 방식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위에 덮은 판석보다 밑에 고인 굄돌에 의미를 부여하는 '고인돌'이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한자말 지석묘(支石墓)의 지(支)가 지탱하다 버티다 괴다 등의 뜻이 있으므로 이 또한 굄돌의 의미를 강조했음을 알 수 있다. 고인돌의 분포가 세계적이라고는 하지만 그 거석들과는 다르게 왜 우리는 덮개돌보다 굄돌에 의미를 더 두었을까. 덮은돌과 고인돌, 한반도를 왜 고인돌의 나라라고 부를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을 보니 고인돌을 한반도 특유의 묘제를 지칭하는 용어라고 풀이해두었다. 그런데 고인돌의 분포지역은 북유럽으로부터 시작하여 서유럽의 영국으로, 프랑스, 스위스와 이베리아반도를 거쳐 지중해의 북쪽 연안지방, 중동, 인도, 동남아시아 등지와 중국의 복건성, 절강성, 산동반도, 요동반도, 길림성 남부를 거쳐 한반도 전역, 일본의 규슈 지방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다. 거의 세계적이다. 그 중에서도 한반도에 집중적으로 분포해있기 때문에 유네스코에서도 세계유산으로 지정하지 않았겠는가. 고인돌은 일반적으로 하천유역의 대지와 낮은 구릉에 많이 축조되었다. 넓은 평야지대보다는 산과 구릉이 가까운 약간 높은 평지와 해안지대 등지에 많다. 시기적으로 보면 청동기시대에 성행하여 초기철기시대까지 존속한 거석문화 무덤양식이다. 대개 유력자의 무덤이라고 해석한다. 여기서 문제제기 하나, 고인돌을 세계적인 거석문화의 하나로 보는 견해에는 이견이 없으나 피라미드나 오벨리스크 등 이집트나 아프리카 대륙의 각종 석조물 또는 영국의 스톤헨지, 프랑스 카르낙의 열석(列石) 등을 한 그룹에 넣어 해석하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다. 광의의 맥락에서는 예컨대 누운돌이나 덮은돌의 개념이라면 돌멘(Dolmen)의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협의의 맥락 즉 '굄돌'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점에서는 격이 다르지 않을까? 무덤의 구조로 봐도 한반도의 고인돌이 가장 확실하고 수량도 가장 많다고 한다. 고인돌은 함경북도의 일부 지방을 제외한 한반도 전 지역에 골고루 분포하고 있다. 특히 고창, 화순 등 남부지역에 유달리 많이 분포하고 있다는 점이 흥미롭다. 많이 없어지거나 훼손되었다지만 아직도 15,000개에서 20,000여개가 남아있어 심지어 한반도를 고인돌의 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 중 대부분이 남도에 있으니 바꾸어 말하면 남도지역을 사실상 고인돌의 나라라고 불러도 무방할까? 고인돌은 굄돌을 통해 만든 인조동굴이다 문제는 왜 그냥 덮지(덮은돌) 않고 돌을 고였(굄돌)을까 하는 점이다. 까닭이 있을 것이다. 땅에 있는 구조물을 이용하거나 평지 혹은 땅을 파고 돌을 덮으면 덮은돌 혹은 누운돌이 된다. 굄돌을 사용한 이유는 돌을 고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떤 환경 즉 판석과 굄돌간의 공간에 있다고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이 무엇일까? 굄돌을 괴면 공간이 생긴다. 그 공간은 지상으로부터 떠 있기도 하고 혹은 지표 아래 조성되기도 한다. 진도군 조도면 가사도의 할아버지당을 사례 삼아본다. 쭈뼛쭈뼛 세운 거석들 위로 마치 고인돌처럼 판석을 덮은 형국이다. 왜 이렇게 만들었을까? 혹은 청동기시대의 잔존물을 후대에 마을당(堂)으로 삼은 것일까? 이런 형식은 서남해안 특히 섬지역에서 산견되는 '고려장' 혹은 '고린장'이라고 부르는 묘제에서도 발견된다. 하나같이 돌을 좌우로 쌓아 올리고 판석이나 흙을 덮는 구조로 되어 있다. 지난 칼럼에서 옹장(甕葬)과 석장(石葬)의 아우라를 말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크게 보면 동굴의 다른 형태이기 때문이다. 여러 차례의 지면을 통해 자연토굴에서 인위적 토굴로 이어지는 맥락을 주장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이 같은 동굴의 이미저리는 고인돌에서 옹관으로 특히 아이들의 주검을 처리하는 독장으로 이어져왔다고 본다는 점도 밝혀두었다. 이천년을 지나고서도 유독 아이들의 주검을 독담 혹은 독장 형식으로 처리하는 이유를 상기해보면 한편의 답이 주어질 수 있다. 주체세력이 다를 수는 있지만 선대는 고인돌로 후대는 옹관으로 장묘제가 바뀌었다고 볼 수 있다. 초분과의 관련은 차차 설명해나간다. 어쨌든 '굄돌'을 강조하여 고인돌이라 호명한 이유도 여기 있지 않을까? 돌을 괴서 만든 인조동굴, 여기서 말하는 동굴은 자궁 모티프이며 고대인들의 생산관념과 긴밀하게 연결된다. 즉 고인돌은 무덤 양식이면서 생산을 하는 재생의 동굴이기도 하다. 고인돌에 그려진 북두칠성이나 윷판바위, 불교의 관음설화는 물론 수많은 여음굴 설화들도 관련된다. 고대인들은 고인돌에 어떤 신화들을 투사하였던 것일까. 단군신화, 웅녀가 탄생한 동굴은 어디에 있을까? 동굴 관련 설화의 역사는 깊고도 넓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아무래도 단군신화다. 이들 설화소는 남근바위와 대칭을 이루며 음양론으로 해석되기도 하지만 동굴 자체 즉 음기(陰氣) 만으로 출산 혹은 생산의 의미를 완성하기도 한다.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 아래 인간세상을 구하고자 천부인 3개를 받아 3개의 큰 봉우리가 있는 태백산 정상에 내려왔으며 무리 3000을 거느리고 정상의 신단수 아래 '신시(神市)'를 열고 환웅천왕이 되었다. 3이라는 숫자를 주목하자. 단군신화 동굴의 삼칠일에 대해서는 대개 7일이 세 번 거듭된 날짜로 해석해왔다. 현재까지 전승되어온 세이레 습속에 착안한 해석이다. 예컨대 아이가 출생하면 7일째 되는 날은 초이레, 14일째 되는 날은 두이레, 21일이 되는 날을 세이레라 한다. 출입문에 숯과 한지 등을 끼워 넣은 왼새끼 즉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이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착안하면 이것이 세 번의 칠일임을 알 수 있다. 북두칠성을 상징 삼는 부족이 3이라는 숫자를 상징 삼는 세력과 연대했을까? 숫자 3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유익한 숫자로 이해되었던 점 불문가지다. 특히 동양권 예컨대 우실하에 의하면 몽골리안의 3이라는 숫자는 다시 그것을 3번 더하는 숫자 9를 최정점으로 여긴다. 불교의 장례기간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이 7을 다시 일곱 번 더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문제 제기, 그렇다면 웅녀가 태어난 동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지난 칼럼에서 다룬 중국 지린성의 국동대혈이나 수많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천연동굴 곧 여음굴일까? 단군신화가 지극한 상징이고 비유라면 동굴 또한 지극한 상징과 비유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신약성경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동굴)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그렇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곳도 동굴 무덤이었다. 출입문에 숯과 한지 등을 끼워 넣은 왼새끼 즉 금줄을 걸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 이레를 중요하게 생각했다는 점 착안하면 이것이 세 번의 칠일임을 알 수 있다. 북두칠성을 상징 삼는 부족이 3이라는 숫자를 상징 삼는 세력과 연대했을까? 숫자 3이 동서고금을 통하여 유익한 숫자로 이해되었던 점 불문가지다. 특히 동양권 예컨대 우실하에 의하면 몽골리안의 3이라는 숫자는 다시 그것을 3번 더하는 숫자 9를 최정점으로 여긴다. 불교의 장례기간 사십구재(四十九齋)도 이 7을 다시 일곱 번 더한 것이다. 여기서 또 하나 문제 제기, 그렇다면 웅녀가 태어난 동굴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중국 지린성의 국동대혈이나 수많은 설화 속에 등장하는 천연동굴 곧 여음굴일까? 단군신화가 지극한 상징이고 비유라면 동굴 또한 지극한 상징과 비유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신약성경 요한복음 20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안식 후 첫날 일찍이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무덤(동굴)에 와서 돌이 무덤에서 옮겨진 것을 보고~" 그렇다. 예수가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지 3일 만에 부활한 곳도 동굴 무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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