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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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6)<br> 백자철화제기보편쓸쓸한 가을 풀을 연상시켜 이규진(편고재 주인) 할고대라고도 불리는 쪽굽에 돋을무늬 같기도 한 연주문 등이 있는 등 전형적인 17C 관요산 제기의 일종인 백자철화제기보편이다. 보는 곡식을 담아 놓는 제기로 둥근 형태에 귀가 달리고 주로 동으로 만들지만 백자도 있다. 백자에서는 고전적인 형태에서 벗어나 17C로 와 개선되기 시작한 전형적인 제기 중의 하나로 새로운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도편은 일찍이 지인에게서 양도를 받은 것으로 경기도 광주시 상림리 백자 가마터에서 출토된 것이다. 쪽굽에 양각의 연주문과 그리고 음각의 초화문 등은 상림리 외에도 선동리 등 17C 관요에서 더러 보이는 백자보의 특징이다. 내게는 이러한 도편이 여러 점 있다. 그러면서도 지인을 통해 이 도편을 입수한 것은 철화무늬 때문이다. 17C 백자에서 철화란 흔히 볼 수 있는 장식기법이다. 임란 후 도자기 산업의 급격한 몰락과 구입의 어려움에 따른 청화의 소멸은 대용품으로 철화의 등장을 강요한 측면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백자철화제기보편에 대한 내 지극한 관심은 단순히 철화가 들어갔다는 사실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하다고 할 수 있다. 백자철화제기보편에서 보이는 철화는 세로로 붙어 있는 연주문을 중심에 두고 좌우로 들어 있는데 초화문의 정확한 종류는 알 수가 없다. 하지만 이를 자세히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추초문 같은 느낌이 들고는 한다. 추초문이라고 하면 불현듯 떠오르는 것이 있지 않은가. 즉 금사리 시기 몇 줄의 선을 청화로 그려 넣어 쓸쓸한 가을 풀을 연상시켜 도자기 애호가들을 매료시키는 그 추초문 말이다. 그런데 백자철화제기보편의 철화무늬가 바로 이를 연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안료는 달라도 이러한 17C 철화무늬가 18C 청화무늬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라면 이 얼마나 흥미롭고도 귀중한 자료이겠는가. 경기도 광주시 상림리 백자 가마터는 광주시 일원에 흩어져 있는 그 많은 가마터 중에서도 비교적 서쪽에 위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국도를 벗어나 마차 길로 계곡을 따라 들어가면 드문드문 민가가 있는 곳이 바로 상림리인데 이곳에도 백자 가마터가 여러 곳에 산재해 있다. 굽 안에서 보이는 간지로는 신미(辛未,1631) 계유(癸酉,1633) 등이 출토되고 있어 17C 관요 중에서는 탄벌리 다음으로 이른 시기의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가마터에서는 청화는 물론 없고 철화가 보이지만 이 또한 흔치는 않다. 더구나 백자철화제기보편에서 보이는 철화무늬는 생각도 할 수 없는 것이어서 여간 귀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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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35) <br> 분청경주장흥고명접시편내태리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이규진(편고재 주인) 분청에서 보이는 명문은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관사명 지방명 장인명이 그 것이다. 지방명이나 관사명은 따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함께 병기 하는 경우도 있어 주목된다. 이처럼 명문이 새겨진 분청은 도요지나 기물의 편년 기준이 될 수 있어 그 중요성이 자못 크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분청에서 확인되는 관사명은 공안부 경승부 인녕부 덕녕부 내자시 내섬시 예빈시 사선서 장흥고 국흥고 사옹원 등이 있다. 관사명은 관사명 그대로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두 글자나 한 글자로 생략해 쓰는 경우도 있다. 관사명은 또 각기 존속기간이 다르다 보니 그 중요성에도 차이가 있다. 즉 존속기간이 짧을수록 편년 자료로서의 가치가 증대된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관사명과 지방명을 함께 쓴 경우는 어떤 특색이 있는 것일까. 여기서도 지역별 특징은 나타나고 있다. 즉 내섬시 내자시 예빈시는 전라도 충청도 강원도에서 보이고 있고 인수부 덕녕부 장흥고 등은 전라도와 충청도 경상도에서 제작되었으나 충청도와 전라도에서는 지방명이 없이 관사명만을 표기하고 있다. 또한 내자시 내섬시 예빈시는 주로 전라도와 충청도에서 제작된 반면 경상도에서는 보이지 않고 있다. 인수부와 장흥고는 전라도 충청도 경상도에서 모두 보이고 있으나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는 지방명이 없고 경상도에서만 지방명을 표기하고 있는 것도 주목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분청경주장흥고명접시편은 장흥고가 전라도와 충청도에서는 지방명이 없고 경상도에서만 지방명을 함께 쓰고 있다는 것을 충실히 증명하고 있는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경주야말로 경상도에서도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지명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분청경주장흥고명접시편은 굽 안에 두 개의 태토비짐돌받침이 있으며 굽을 감싸고 돌아가며 연권문과 초화문을 장식하고 있다, 안쪽은 내저 중앙에 두 줄의 선으로 둘러싼 국화문이 보이고 차례로 연권문과 원 그리고 초문을 장식하고 있다. 주목되는 것은 연권문을 비워 둔 자리에 경주장흥고명을 새겨 넣고 있는 점이다. 그런데 문제는 글자의 배열이 일정치 않고 뒤섞여 있는 점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우측에서 좌측으로 경흥장고(慶興長庫)를 새기고 주(注)자는 흥장(興長) 밑에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글자의 혼란스러운 배치는 글자 한자 한자를 도장으로 파 무작위로 찍다보니 생긴 결과가 아닐까 생각된다. 분청경주장흥고명접시편은 오래 전 선배로부터 양도를 받았던 것이다. 그 선배로부터 이 접시편은 경주 내태리 분청사기 가마터에서 출토된 것임도 아울러 전언을 받은 바 있다. 나도 일찍이 이 내태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답사해 본 적이 있거니와 당시 나는 경주명은 만나 볼 수가 있었지만 장흥고명은 볼 수가 없었는데 선배가 그 아쉬움을 채워 주었던 것이다. 이제는 선배도 가고 내태리 분청사기 가마터도 아득한 추억 저편의 아련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보니 새삼 분청경주장흥고명접시편이 주는 정감이 다정스럽고 정겹기만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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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4) <br> 백자명기철화말편기마민족의 일원이라도 되어 이규진(편고재 주인) 바람을 가르며 말을 달린다. 거칠 것 하나 없는 일망무제의 끝없는 초원을. 고구려를 생각하면 왜 말탄 무사가 떠오르는 것일까. 차도 비행기도 없던 시절, 드넓은 영토를 내달리자면 말 말고 이용할 수 있는 더 빠른 교통수단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렇다보니 동북아를 호령했던 대제국 고구려와 말의 연관성을 생각케 되는 것은 어찌 보면 너무도 당연한 일인지도 모를 일이다. 기마민족설이라는 것도 있다. 1948년 일본의 에가미에 의해 제기된 주장이다. 고구려에 가까운 통쿠스 계통의 기마민족의 일파가 한반도로 남하해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것이다. 그후 기마민족은 4세기 초 현해탄을 건너 북규슈 지방에 상륙하여 현지의 정치세력을 병합해 한,왜 연합왕국을 조성했다고 한다. 이 세력은 다시 4~5세기경 일본 내지로 진출 강력한 고대왕국을 수립하는데 이 것이 야마토 정권이라는 것이다. 이 설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점이 있지만 한 가지 주목하고 싶은 것은 기마민족이 가야지방을 지배했다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가야토기 중에는 의외로 말 형태의 것이 많이 보이고 있어 기마만족설과 혹시나 하는 연관성을 떠올려 보게 되기 때문이다. 가야 등에서 많이 보이던 토기 말은 조선조로 오면 백자 명기에서 나타나고 있어 주목된다. 명기란 죽은 사람의 영혼이 내세에도 평안하기를 바라며 무덤에 넣어 주는 기물들을 말한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실생활용품 도자기 대신 일부러 작게 만든 명기를 사용하는데 사발 접시 합 병 호 향로 대야 등은 물론 인물과 말과 가마 등도 만들어진다. 장난감 같이 작게 만들어지는 명기는 소꼽이라고도 하는데 지석과 함께 넣어져 당시의 시대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귀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하면 말은 명기 중에서도 어떤 의미를 지니는 것일까. 말은 피장자의 영혼을 싣고 승천한다고 믿는 상징성을 띠고 있으며 죽음이 환생으로 이어진다는 바람 때문에 부장했던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백자명기말. 그 것도 제대로 된 철화가 들어간 백자명기철화말을 한 점 갖고 싶다는 것은 오래 전부터의 바람이었다. 하지만 그 것도 무슨 큰 인연이라고 성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깨진 도편도 내게는 차지가 돌아오지를 않았었다. 몇 개월 전에는 지인 중에 일부가 깨져 달아난 백자명기철화말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몹시 마음에 드는 명품급을 갖고 있어 관심을 가져 보았지만 수리를 해 고가에 파는 바람에 아쉽게도 헛물만 켜고 만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근래 우연한 곳에서 발견을 하고 작심 끝에 구입한 것이 바로 백자명기철화말편이다. 백자명기철화말편은 현재 머리가 없고 꼬리 끝이 잘려 나갔는가 하면 네 개의 다리 중 한 개가 달아나고 없다. 그래도 원형을 유지한 채 똑바로 설 수가 있는 것이 장점이다. 다리는 내화토 받침을 하고 있으며 긴 몸체 위에는 별도로 만들어 얹어 놓은 듯한 안장이 올려져 있다. 전체적으로 회색이 많이 도는 유색의 몸체와 머리부터 안장 등으로 이어지는 곳에는 말고삐와 끈 등을 철화로 장식해 놓고 있다. 이런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볼 때 17C 지방가마에서 제작된 명기 중의 하나로 보여 진다. 고구려나 가야의 무사처럼 백자명기철화말편을 타고 내달리면 그 곳은 북방의 초원일까 낙동강 유역의 평원일까. 아, 오늘은 기마민족의 일원이라도 되어 어디론가 무작정 말이라도 달려보고 싶은 날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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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3) <br> 청자상감매병편저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이규진(편고재 주인) 부안 유천리는 강진과 더불어 청자 가마터들이 대규모로 몰려 있는 곳이다. 그렇게 운집해 있는 유천리 청자 가마터 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곳은 12호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곳은 일찍부터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1938년 노모리 켄에 의해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이때 명종 지릉의 청자여지넝쿨무늬발과 같은 도편이 출토되어 유천리 청자 가마터 성격에 대해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사적지 표지석이 있는 곳에서 조금 못 미처 좌측 외딴 민가로 들어가는 소로가 있는데 전에는 이곳 일대가 과수원이었고 12호는 이곳에 위치해 있다. 널리 알려진 것처럼 이화여대 박물관은 유천리에서 출토되었다고 전하는 많은 양의 명품 청자편들을 소장하고 있는데 이곳 12호와 인근의 가마터 출토품들이 아닐까 생각된다. 12호 인근의 외딴 민가에서 건너다보면 논과 밭을 오른쪽으로 휘돌아 흐르는 둔덕이 보이는데 큰길에서 유천리 마을로 들어가는 마차길이 나 있는 곳이기도 하다. 그리고 그 건너편 끝자락에 좌측으로 흘러내린 야산이 보이는데 여기에 면한 비탈진 밭이 하나 있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아주 오래 전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쏟아져 내리던 노곤했던 날로 기억이 되는데 농부가 밭갈이를 하고 있었고 뒤집힌 흙더미 속에서 발견했던 것으로 기억이 된다. 그러나 그때 당시나 지금이나 이 청자상감매병편은 의문점이 많아 아직도 혼란스러운 점이 없지 않아 있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안쪽을 보면 물레자국이 선명하다. 거기다 기물 자체가 휘어져 있어 매병의 일부였음을 그리 어렵지 않게 추론해 볼 수 있다. 문제는 강진보다도 더 큰 기물들을 제작했다고 전하는 곳이 유천리 청자 가마터인데 이 청자상감매병편 또한 그런 추세에 힘입어 대형의 것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그 증거로는 완만하게 휘어져 돌아간 곡선율을 들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도편의 두께라고 할 수 있는데 무려 1.5Cm가 넘는 것이다. 말하자면 휘어진 곡선의 비율이나 도편이 두께로 보아 전후좌우가 잘려나갔다고는 하지만 크기가 결코 작지 않은 대형의 기물이었음을 짐작하기에는 조금도 부복함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하지만 청자가 대형이라고 해서 무조건 명품 반열에 드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청자상감매병편의 무늬를 보고 있노라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흑백상감으로 전체를 빼꼭하게 채우고 있는 문양은 무엇을 나타내고자 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잘려나간 부분에 비해 남은 것이 너무도 작기 때문이다. 하지만 흑백상감의 국화문과 연판문에다 알 수 없는 무늬는 물론 능화창에 역상감의 흔적도 보이고 있어 그야말로 완전했더라면 화려하기가 짝이 없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궁금증을 해결키 위해 유천리 청자 가마터 도록과 책자는 물론이거니와 이화여대 박물관 소장의 도편들도 꼼꼼이 챙겨 보았지만 이처럼 복잡하면서도 화려한 문양은 전혀 찾아 볼 수가 없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볼 때 이 청자상감매병편은 특이하면서도 눈부시게 아름다운 문양을 지닌 명품의 매병이었던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청자상감매병편은 오랜 세월이 흘렀건만 상자나 박스에 넣어두는 등 내 시야에서 벗어나 본적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지금도 거실에 있는 진열장 안에 고이 모셔져 있어 수시로 꺼내 보고는 한다. 무엇이 나로 하여금 문양의 실체도 알 수 없는 도편에 대해 이처럼 끊임없는 애정과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일까. 그 것은 보기만 해도 황홀해 지는 문양의 모습이 저 봄 햇살이 눈부시게 쏱아져 내리던 노곤했던 날의 유천리 청자 가마터의 추억 속으로 나를 늘 인도하며 상상의 나래를 자극하고 있기 때문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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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2) <br> 분청명문초벌구이접시편변함없이 내 궁금증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찾아 갈 수 있을까. 물론 주소를 들고 물어물어 찾아 간다면 어디인들 못 찾아 갈 곳이 있겠는가. 하지만 옛 추억을 더듬어 기억에만 의지해 찾아 가라고 한다면 자신이 없다. 천안 보산원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두고 하는 말이다. 그만큼 이 곳을 찾아 본 것은 아주 오래 전 일로서 기억조차 아물아물하다. 그런데 그 아물아물한 기억을 더듬어 보면 가마터는 마을 앞 중간 지점 밭과 민가 뒤편의 묘지 부근 등 두 곳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이 된다. 천안 보산원리 분청사기 가마터는 충청도에서는 비교적 이른 시기인 15C 전반에 운영되었던 곳으로 상감과 국화문의 인화기법, 그리고 선문의 접시와 대접 및 병 등이 제작되었던 곳이다. 갑발은 보이지 않으며 기물들을 포개어 소성한 것으로 보아 상품의 뛰어난 도자기들을 제작했던 곳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천안 보산원리 분청사기 가마터는 행정구역상 충청북도 연기군이었으나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에 소속되는 등 복잡하게 바뀌어 갈피를 잡기가 쉽지 않다. 그런 가운데 아물아물한 기억 속에서도 내가 이곳 가마터에 대해 추억의 끈을 놓지 못하고 있는 것은 오래 전부터 간직해 오고 있는 한 점의 도편 때문이다. 도편은 접시로서 초벌구이편이다. 그러니까 말하자면 태토를 빚어 성형을 한 후 한 번 구워낸 것으로 아직 분과 유약을 발라 재벌구이를 하지 않은 상태의 것이다. 그렇다 보니 붉은 흙 기운이 그대로 살아 있다. 비교적 높은 굽 안쪽에는 다진 흔적이 보이는데 이 도편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아무래도 내저에 음각으로 새겨져 있는 연(延)자라고 할 수 있다. 예리하게 뾰족한 기물로 긁어내듯 음각을 한 것이 아니라 칼 같은 것을 약간 뉘어 각을 한 듯한 모습이 인상적이다. 연(延)자는 내저 중앙에서 약간 위쪽으로 위치 아래쪽으로 이어져 한 글자가 더 있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더 있었다고 하면 그 글자는 연(延)자와 합쳐진 지명이었을까. 천안 보산원리 분청사기 가마터를 추억만을 더듬어 지금 찾아 가라면 쉽지 않을 것이다. 그동안 뛰어넘은 세월의 간극이 너무도 크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득한 세월을 건너 뛰어 찾아 가더라도 분청명문초벌구이접시편을 만난 인연의 장소만은 정확히 짚어 낼 수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연(延)자가 주는 호기심은 도편과 처음 인연을 맺은 오래 전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내 궁금증을 자극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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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1) <br> 백자청채음각초화문향로편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에서는 시대의 간극을 뛰어넘어 같은 양식을 보이는 경우가 있어 흥미로운 바가 있다. 대표적인 것이 해무리굽이다. 초기 청자를 대표하는 것 중의 하나가 청자해무리굽완이라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처럼 굽의 접지면이 넓은 해무리굽이 조선 백자에서도 보이고 있으니 주목을 요한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문제는 청자해무리굽완이 10C 것인데 반해 백자 해무리굽은 17C 관요에서만 보이고 있으니 무려 7배여 년의 간극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오랜 세월을 뛰어넘어 서로 영향을 주고받았을 이치가 없고 보면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이채롭다 못해 흥미롭다고 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해무리굽처럼 시대를 뛰어넘어 확실하게 같은 양식을 보이는 것이라고 단언 할 수는 없어도 비슷해 보이는 것은 또 있다. 이런 점에서 내가 주목하고 있는 것은 분청에서 보이는 귀얄과 백자에서 보이는 청채다. 두 종류가 재료는 달라도 붓을 이용 칠을 해 농담의 효과를 살리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한 양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 또한 각각 16C와 19C로 3백여 년의 시대적 차이를 감안한다면 신기하면서도 흥미로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백자청채음각초화문향로편은 굽과 몸체 일부만 남아 있어 아쉽지만 현재 알려져 있는 기물들을 통해 유추해 볼 때 향로가 분명해 보인다. 굽은 접지면이 밖으로 말린 형태로 마무리를 하고 있으며 능화형의 풍혈을 배치하고 있다. 몸체에는 음각으로 초화문을 장식하고 있으며 전체를 청채로 칠하고 있다. 붓칠을 한 청채는 농담이 그리 뚜렷하지는 않으나 음각의 초화문에는 색깔이 고여 문양은 비교적 뚜렸한 편이다. 이 도편을 기존에 알려진 유물과 비교를 해 유추해 보면 몸체 좌우에는 손잡이가 달려 있고 주구는 안쪽으로 턱이 지게 말려 있어 뚜껑을 덮을 수 있도록 되어 있는 구조라고 할 수 있다. 향로로서는 상당히 큰 기물에 속하는 것도 주목되는 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19C 분원리 산인 이 백자청채음각초화문향로편은 언제 인연을 맺게 된 것인지는 기억에 없다. 다만 분원초등학교 좌측 민가 뒤편 골짜기에 그리 크지 않은 밭이 있는데 오래 전 이곳에서 만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확실한 것은 아니다. 뭄체 안쪽은 노태를 그대로 드러내고 있으며 굽 안은 백자 유약이 곱게 입혀져 있는 것도 눈길을 끈다. 하지만 아쉬운 것은 청채가 좀더 붓자국이 선명해 농담의 효과가 강조될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어찌 원한다고 될 수 있는 일이랴. 어찌 되었든 백자청채음각초화문향로편을 보면서 분청 귀얄과 백자 청채가 주는 같으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같은 양식에 주목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바가 아주 없지는 않은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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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30)<br>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내 일상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이규진(편고재 주인) 전국에 걸쳐 유튜브 경매가 난리지만 나와는 관련이 없다. 아니, 유튜브 경매 자체를 할 줄 모르는 것이다. 유행을 따르지 못하는 팔불출이라고나 할까, 그런 문외한이 얼마 전 우연히 지방 경매를 들여다보게 된 적이 있었다. 거기서 만난 것이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이다. 그러나 이 것은 팔기 위해 경매에 붙였던 것은 아니다. 경매사(사장)가 다른 물건을 진행하며 본인은 돈 안 되는 이런 것도 산다는 식의 에피소드로 잠시 보여 주기만 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것을 전화를 해 내 것으로 만들었으니 내가 나를 생각해 보아도 엉뚱한 점이 아주 없다고 할 수는 없을 듯싶다. 전화를 통해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에 대해 엉뚱한 일을 벌린 것은 아무래도 평소 도편 중에서도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것을 선호한 탓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나는 물고기 문양이 들어간 도편들을 꽤 많이 소장하고 있는 편이다. 젊은 시절 가마터에서 직접 습득한 것도 있지만 대부분은 보이는 대로 욕심을 부린 탓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소장품 중에서는 분청이 많고 청자는 비교적 적은 편인데 그런 아쉬움이 이번처럼 엉뚱한 일을 저지르게 된 원인인지도 모를 일이다.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의 현재 남아 있는 모습을 보면 굽 안은 유약을 훑어내고 있으며 굽에는 모래받침의 흔적이 있다. 외면은 담청색의 유약이 두껍게 입혀져 있으며 평평하게 벌어진 몸체 밑 부분은 전으로 꺽이는 부분부터 손상을 입어 없어지고 없다보니 흡사 둥근 연못 중앙에 굽이 섬처럼 동그마니 떠 있는 모습이다. 안쪽을 보면 전으로 돌아가며 꺽였던 부분들이 깨어져 달아난 흔적을 보이고 있다. 중앙에는 두 줄의 백상감 안에 물고기 두 마리를 대칭으로 배치하고 있는데 눈동자만은 흑상감으로 점을 찍어 액센트를 주고 있다, 바깥쪽으로도 두 줄의 백상감 원을 배치 중앙의 원과의 사이 여백에는 초화문을 넣고 있다. 초화문은 중앙에서 바깥쪽을 향해 방사선 형태로 줄기는 흑상감으로 꽃은 백상감으로 처리 흑백의 대비를 보여주고 있다. 유약과 흑백상감의 배치 등으로 보아 13세기 후반에서 14세기 전반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 진다. 전국에 걸쳐 난리법석을 떨고 있는 유튜브 경매에 대해 나는 부정적인 생각이 많은 편이다. 고미술품은, 특히 도자기는 재화로서의 의미도 있지만 그 것 못지않은 역사성과 아름다움에 대한 문화적인 요소도 있기 마련인데 경매를 통해서는 현금 대상으로서의 즉물적인 가치만이 강조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청자상감국화쌍어문접시편에서 보이는 물고기는 눈을 뜨고 잔다고 해서 예로부터 무언가를 지키거나 방비하고자 하는 벽사의 의미가 강하며 많은 알을 낳는다고 해서 다산의 의미도 강조되고 있다. 새해 벽두에 만난 물고기 두 마리가 나를 건강으로부터 지켜주고 다산의 의미처럼 내 일상을 보다 풍요롭게 해주는 그런 인연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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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9)<br> 백자중첩편수더분한 매력과 더불어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를 소성하기 위한 가마는 일정한 공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것은 가마 안에 도자기를 재임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령 가마 바닥에 고급의 갑번이나 예번을 늘어놓았을 때 그 수량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급품이 아닌 하품이나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그릇과 그릇 사이에 받침을 넣어 포개어 굽게 된다. 이 경우 굽은 물론이거니와 그릇 내저에도 흔적이 남게 된다. 그렇다고 하면 받침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 것일까. 청자와 백자에서 쓰인 받침은 같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 우선 같은 종류를 보면 가는모래받침, 굵은모래받침, 내화토빚음받침, 모래빚음받침 등이 있다. 다른 것으로는 청자에서는 규석받침이 있고 백자에서는 태토빋음받침이 있다. 청자에서 내화토+모래받침이나 백자에서 흙물+굵은모래받침 등도 다른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받침을 이용해 포개어 굽는 과정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백자중첩편이다.굵은모래받침을 이용해 그릇을 포개어 굽고 있는데 그 수량이 무려 여덟 점이나 된다. 아래쪽에는 발 다섯 점이 틈 없이 들러붙어 있고 중간에는 흔적만 남은 것 그리고 위쪽으로는 완 안에 잔이 들어 있어 모두가 여덟 점이 되는 것이다. 유색은 회백색에 잔 안에 내저 원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C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런데 백자충첩편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흡사 청자의 잔탁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미소가 절로 머금어 지고는 한다. 받침 중에서도 백자중첩편에서 보이는 굵은모래받침은 지저분해 보이는 등 보기에 깔끔하거나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서민과 싼값의 대량생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갑번이나 예번이 지닌 수량의 한계, 이를 극복키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하면 나름의 의미는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굵은모래받침의 백자중첩편이 그나마 들러붙고 깨지는 등 훼손이 심해 서민들의 손에조차 다가가지 못하고 좌절한 점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도자기 중에서 갑번이나 예번 등 상품만이 사랑 받는 존재였겠는가. 하품이기는 하지만 백자중첩편이 온전해 서민들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이 또한 그들에게서 애지중지 사랑 받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그래서인지 끝내 제 몫을 못하고 좌절한 백자중첩편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고급품에서 느끼는 저 특별한 미감과는 달리 수더분한 매력과 더불어 더욱 쓸쓸하면서도 애잔한 감정이 느껴지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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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28)<br> 백자청화시문접시편금사리의 추억과 여운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에서 멋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시문(詩文)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근래 들어 시가 위축되고 있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공자가 만년에 제자를 가르치는데 있어 육경 중에서도 시를 첫머리로 삼았다던가, 시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정서를 순화하고 다양한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 등은 모두가 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거창한 의미를 되새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자기에 시문을 장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멋이요 풍류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문은 청자나 분청에서 상감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백자에서는 청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백자에 청화로 시문이 들어간 것으로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백자 전접시에 술을 주제로 하여 청화로 칠언시를 종으로 써내려 간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溪月泠陶令醉 대나무 계곡에 달빛이 차가운데 도연명이 취해 있고 花市風香李白眼 꽃 사랑의 향기로운 바람 속에 이백이 잠들었네 到頭世事情如夢 세상사 돌아보면 품은 정은 꿈만 같고 人間無慾似樽前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동이 앞에 있는 것 같네 이러한 백자청화시문편은 경기도 광주 도마리 1호와 번천리 9호 가마터에서도 출토되고 있음은 물론 관청 건물지 터 등에서도 수습되고 있어 이 시기 일종의 멋과 풍류로 유행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백자에 시문이 들어간 것은 초선 초기뿐이 아니라 17~19세기로도 이어지는데 중기와 후기로 가면서 초기의 접시와는 달리 병 호 문방구 등으로 널리 확대되고 있어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백자청화시문접시편은 금사리에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18세기 전반 것인데 이 시기는 임란란 후 거의 사라져 버렸던 청화가 되살아나며 가장 한국적이며 사대부의 문인 취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자청화시문접시편은 이 시기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작은 조각만 남은 데다 청화로 쓰여진 시문 또한 설유국(雪濡菊) 시화니매(是花尼梅)의 일곱 글자만 남아 있어 시의 제목이나 내용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국화나 매화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기존에 알려진 백자청화시문명 도자기들이 대개 그렇듯이 술과 관련된 한시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금사리는 도자기 가마터 중에서도 내게는 꽤 친근한 이름이다. 서울에서 멀지 않아 여러 번 찾아보아 익숙한 점도 있거니와 금사리 시기 백자청화에서 보이는 저 추초문 같은 절제된 미감이 내 마음 속에 깊이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의 답사를 통해서도 추초문 같은 청화는 인연을 맺지 못했으니 지금 까지도 아쉬움이 남는다고나 할까. 그런 가운에 작은 조각에 글자도 몇 자 안 남은 백자청화시문접시편에서 금사리의 추억과 여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여간 다행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듯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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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7) <br>분청귀얄접시편고별의 마지막 인사 같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분청을 장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청자의 여운을 짙게 느끼게 하는 상감을 비롯해 문양을 찍어내는 인화, 문양 주변의 분을 긁어내는 박지, 선으로 문양을 만드는 조화, 풀비 비슷한 것을 이용해 분을 바르는 귀얄, 그릇 전체를 분에 담그는 분장(덤벙) 등이 그 것이다. 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예외적으로 철화도 있다. 이들 중 이번에는 분청귀얄접시편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기로 하자. 분청귀얄은 귀얄에 백토를 뭍혀 그릇의 표면에 바르는 장식기법의 하나다. 귀얄은 풀을 질할 때 쓰는 도구의 일종, 돼지털과 같은 뻣뻣한 털 등을 묶어 넓고 평평하게 만든 붓을 말하며 이 붓으로 그릇의 표면에 백토를 칠해 장식하는 기법을 분청귀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기법의 특징은 빠르게 돌아가는 물레 위에 그릇을 올려놓고 귀얄로 백토를 칠할 때 나타나는 붓자국과 속도감, 그리고 바탕의 암회색과 백토의 흰색이 빚어내는 선명한 색의 대비 등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걸쳐 주로 호남 지방에서 많이 제작이 되었다. 분청귀얄접시편은 작은 굽에 다섯 개의 내화토 받침이 있다. 외면은 암회색의 유태를 드러낸 채 가장자리는 돌아가며 귀얄을 하고 있는데 일정치가 않고 백토가 흘러내린 부분도 있다. 내면에는 전체적으로 귀얄 분장을 하고 있는데 이 분청귀얄접시편의 매력은 아무래도 입술 부위가 휘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마에서 소성 중 요똥에 부딪치며 휘어진 듯 싶은데 일부는 깨어져 손상을 입은 부분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휘어진 부분을 손잡이 삼아 표주박처럼 사용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여하튼 손상을 입어 원형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변형된 모습에서 보이는 의외성과 귀얄 맛을 느낄 수 있는 도편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분청귀얄은 흔한 것 같지만 귀얄이 제대로 들어간 것은 흔치 않다. 속도감과 색의 대비 등을 통해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되는데 그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분청귀얄은 각종 기명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가장 잘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접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접시는 어느 정도 평면을 유지하고 있다 보니 귀얄의 속도감과 색의 대비 등을 통해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가 가장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청귀얄접시편 또한 그런 장점에 어느 정도 호응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분청귀얄이라고 하면 분청 중에서도 무작위와 의외성이 가장 높다보니 대범함과 활달함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힘차게 돌아가는 귀얄 자국은 흡사 소용돌이치는 거센 물살을 보는듯한 박진감 넘치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아니,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 보이는 저 유명한 구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의 자유스러움이 연상되기도 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분청의 끝물이다 보니 분청귀얄접시편을 보고 있노라면 백자로 가기 이전의 저 마지막 고별의 인사 같은 생각도 들어 한편으로는 아쉬운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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