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5 (수)
이규진(편고재 주인)
계룡산 하면 무엇이 떠오를까. 조선 왕도로서의 도읍지를 생각한다면 무학대사를, 민속신앙의 터전을 염두에 둔다면 신도안을, 마음이 아픈 이야기가 가슴을 적셔온다면 달래고개의 전설이 연상되지 않을까. 그러나 도자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런 것들과는 무관하게 분청철화가 눈 앞에 어른거릴 것이다. 그만큼 계룡산 밑 학봉리에 위치한 분청사기 가마터는 분청철화로 유명한 곳이다. 물론 무안이나 운대리 같은 곳에서도 분청철화가 간혹 보이기는 히자만 미미한 것이어서 계룡산이나 학봉리로 지칭되는 이곳의 대규모 분청철화와는 어짜피 비교 자체가 남새스러운 일일 것이다. 계룡산 밑 학봉리 가마터에서는 물론 분청만 만든 것은 아니다. 흑유도 있고 백자도 있다. 하지만 분청철화가 워낙 유명하다 보니 이곳의 대명사가 되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고 하면 계룡산 분청사기 가마터에서는 분청철화를 얼마나 만든 것일까. 우리는 그동안 막연하게 많이 만들었을 것이라는 추측만 해온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발굴조사 등을 통해 밝혀진 자료를 보면 막연히 짐작했던대로 그 수량이 만만치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즉 출토품의 시문기법을 살펴보면 상감이 0.46 인화가 0.60 조화가 0.04 귀얄이 9.59에 분청철화가 무려 13.36프로나 되니 압도적으로 엄청난 수량을 제작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계룡산 분청사기 가마터 하면 분청철화가 연상되는 것도 어쩌면 당연하다고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계룡산에서는 귀얄기법과 더불어 분청철화가 가장 다양하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는데 기종으로는 대접 접시 완 종지 등의 반상기류와 병, 호, 항, 대발, 제기, 마상배, 장군, 편병, 자라병, 연적 등을 들 수 있다. 이중에서도 병과 항의 수량이 가장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러 기종에 시문된 분청철화 중에서도 가장 주목되는 것은 아무래도 물고기 문양이 아닐까 생각된다. 물고기 두 마리를 엇갈려 배치하는 쌍어문, 연못 풍경 속의 물고기, 등용문과 관련된 어룡(魚龍)과 파룡(波龍) 등이 그 것인데 몇 줄의 가는 선으로 날카롭게 펼처진 등지느러미와 뾰족한 주둥이가 특징으로 추상적인 맛이 일품이다.
그런데 분청철화어문병편은 앞에서 지적한 계룡산 분청철화어문의 특징들과는 맛을 달리하고 있어 주목된다. 수초 밑에 헤엄치고 있는 물고기는 머리와 앞지느러미만 남아 있어 전체적인 모습은 알 수 없지만 선은 둔탁하고 형태도 세련되지 못해 못 생겼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하지만 그런 아쉬움 때문에 오히려 독창적인 분청철화물고기를 보고 있는 느낌이라면 나만의 독단일까. 이 분청철화어문병편은 안쪽으로 한 줄기 유약이 흘러내린 자국이 있어 병으로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 추상문의 극치를 보이고 있는 계룡산 분청철화의 쏘가리 문양 도편 한 점 없이 분청철화어문병편을 이야기 하고 있자니 한편으로는 왠지 모르게 서운하면서도 쓸쓸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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