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월)
"그 음악, 저는 이렇게 듣고 있답니다.”
취미가 생활이 되고, 취향이 탐구의 대상이 되는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독보적인 클래식 레코드 라이프
본업인 소설만큼 취미생활에도 진심인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 특히 재즈와 클래식에 대한 깊은 조예와 애정은 그의 작품세계에도 필수적으로 녹아들어 있다. 더불어 육십 년 가까이 레코드점을 들락거리며 아날로그 레코드 수집을 취미로 삼아온 그는 개인적으로 소장중인 1만 5천여 장 가운데 486장의 클래식 레코드와 100여 곡의 클래식 음악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에세이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를 통해 자신만의 특별한 컬렉션을 공개한 바 있다.
"고등학생 시절 구해서 지금껏 애지중지 아껴 듣는 음반이 있는가 하면, 외국에 살 때 중고가게에서 마구잡이로 사들인 음반도 있다(당시에는 제법 희귀한 레코드를 싼 값에 살 수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곧잘 방과후 한큐 산노미야역 근처의 ‘마스다 명곡당’이라는 작은 클래식 레코드 전문점에 들러 레코드를 샀다. 레코드를 사려고 점심을 거른 적도 있다. 그런 음반을 오랜만에 집어들면 가슴이 절로 따뜻해진다." (본문 10p)
일본의 인기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정경화의 베토벤의 바이올린 협주곡 D장조 작품번호 61 녹음에 대해 이렇게 적었다. 신간 '오래되고 멋진 클래식 레코드 2'에서다.
이 책은 재즈와 클래식 음악에 조예가 깊은 일본의 인기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클래식 음반 이야기다.
하루키는 타인의 기준에 구애받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 성향과 감각을 바탕으로 좋고 싫음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 "음악 체험의 묘미이자 필수"라고 말한다.
하루키는 약 60년에 걸쳐 소장한 클래식 레코드 1만5000여 장 가운데 전작(1권)에서 486장을 소개한 데 이어 이번에는 이보다 많은 590장을 다뤘다. ‘힘주는 걸’ 싫어하는 하루키 특유의 스타일로 명반에 대한 상찬뿐 아니라 ‘이런 게 왜 우리집에 있을까’라는 식으로 가볍게 접근한다. 자신이 수집한 티셔츠만으로 멋진 에세이를 완성한 ‘무라카미 T’(2021년)와 함께 보면 더욱 흥미로울 것이다.
한편 하루키는 취미와 취향에 관해 저마다 개인의 ‘호불호’가 얼마나 중요한지 이야기한다. 타인의 기준에 구애받지 않고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과 감각을 바탕으로 좋음/싫음을 발견해나가는 과정이 ‘음악 체험의 묘미이자 필수’라는 것이다. 자신만의 취미나 고유한 취향을 만들어나가고 싶어하는 이들에게는 이러한 하루키의 자세가 유의미한 길잡이가 될 것이다.
"제멋대로인 ‘호불호’가 있기에 우리는 음악에서 저마다 개인적인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 어떤 음악에건 똑같이 감동하고 감탄할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런 일은 거의 불가능하거니와, 그래서는 도무지 ‘음악 애호’가 생겨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이상하게 별 감흥이 없네’ 하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는 음악이 있기에 ‘이건 훌륭해, 걸작이다’ 하며 감동하고 깊이 스며드는 음악이 나오는 것이다. 그렇게 자기만의 산과 골짜기를 또렷하게 발견해나가는 것이 ‘음악 체험’의 묘미 중 하나라고 나는 생각한다."(본문 11p)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작가이자 성실함과 꾸준함을 잃지 않는 직업인으로서 늘 찬사를 받는 무라카미 하루키. 그가 펼쳐 보이는 이 취미세계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무언가를 통해 설레고 기쁘고 위로받으며 일상의 작은 행복을 추구하는 평범한 한 사람의 면모 또한 만나볼 수 있다.
‘가쓰오 육수로 요리한 듯 우직한’ ‘공을 끝까지 잡고 있는 투수 같은’……
음악을 듣고 즐기고 묘사하는 무라카미 하루키만의 맛
무라카미 하루키가 육십 년 가까이 구축해온 취미세계의 방대함과 깊이는 애호가와 초보자 모두를 감탄하게 한다. 더불어 시종 균일한 에너지로 총 590장에 이르는 각각의 앨범에 대해 절묘한 평을 써낼 수 있는 건 무라카미 하루키라서 가능한 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경화의 바이올린 연주는 야구로 치면 ‘공을 끝까지 잡고 있는 투수’를 연상시킨다. 마지막 한순간까지 소리가 손가락을 떠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소리 하나하나에 영혼의 조각 같은 것이 따라붙는다. 이런 연주를 할 수 있는 사람은 흔치 않다. 마음이 뜨겁게 타올라도 의식은 그 안쪽에 단단하고 날카롭게 얼어붙어 있다". (본문 94p 베토벤 바이올린협주곡 D장조 작품번호 61)
"도입부부터 곡의 중심을 향해 신속하고 예리하게 치고 들어간다. 잘 벼린 손도끼를 휘둘러 뒤엉킨 덤불숲을 베어내며 미지의 땅으로 들어가는 듯한 스릴이 있다. 그렇다고 난폭하지는 않다. 영롱한 아름다움도 곳곳에 엿보인다. 이런 타입의 ‘B단조 소나타’는 이 레코드 전에는 존재하지 않았고, 이후에도 (아마) 존재하지 않았으리라 생각한다. 눈이 번쩍 뜨일 만큼 통쾌하고 스케일이 큰 피아니즘이다." (본문 192p 리스트 피아노소나타 B단조)
"스토코프스키의 음악은 정말이지 캐릭터가 가득 실려 있다. ‘방금 지옥을 보고 왔습니다’ 하는 느낌으로 서슴없이 지옥도를 펼쳐나간다. 각색의 정도가 과하다고 쓴소리를 하는 사람도 있는데, 나 같은 보통 사람이야 ‘그 음악을 듣고 가슴이 설렌다면 그만 아닌가’ 싶다. 스토코프스키의 방식이 전부 옳다는 말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런 음악에서는 그의 재주가 빛을 발한다." (본문 270p 차이콥스키 환상곡 〈프란체스카 다 리미니〉 작품번호 32)
하루키는 클래식 작곡가와 음악, 지휘자와 연주자에 대해 다채로운 이야기들을 풀어놓으면서, 자연과 일상의 소재를 빌려 묘사하거나 쉽고 단순하지만 진심이 담긴 언어로 감상을 덧붙인다. 애호가도 초보자도 우선 책장을 하나둘 넘기다보면 하루키만의 예리함과 애정이 담겨 리드미컬하게 흘러가는 문장들 속에 자연스레 오감을 맡기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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