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월)
이규진(편고재 주인)
청자 중에서도 발(鉢)은 완(碗)과 더불어 흔히 볼 수 있는 기종이다. 발은 무문도 있지만 도범으로 찍어낸 양각도 있고 상감도 있다. 흑백상감의 경우 여의두문과 국화문을 기본으로 하고 있는데 청자상감국화문발편 또한 이런 틀에서 크게 벗어난 것이라고는 보기 어렵다. 하지만 문양이 복잡한데다 다른 발들과는 다른 점이 있어 여간 주목되는 것이 아니다.
청자상감국화문발편은 내저의 원 안에 국화를 배치하고 이를 여의두문이 둘러싸고 있다. 여기서 입술에 이르는 안쪽으로 휘어진 완만한 곡선 안에는 6등분한 칸을 만들고 백상감과 흑상감의 국화문을 교차해 넣고 있다. 외면을 보면 접지면의 유약을 훑어낸 자리에 내화토 받침의 흔적이 보이고 있다. 전면에 걸쳐 당초문을, 그리고 그 안에 원으로 둘러싸인 흑백상감의 국화문이 네 곳에서 보이고 있다. 약간 흐트러진 문양이며 전성기의 비색을 벗어난 듯한 녹청색의 유약 등 13C 부안 유천리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근래 나는 사정이 있어 병원에서 한 일주일 정도를 쉬고 나왔다. 커텐으로 둘러싸인 병실 한가운데 자리가 위치해 있다 보니 밖이 전혀 보이지 않아 여간 답답한 것이 아니었다. 시절은 천지가 단풍이 절정이라는데 이 무슨 감옥살이인가 하는 생각에 우울하기도 하였다. 이제 퇴원을 하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떨치고 단풍 구경을 나설 처지는 아니다. 그런 아쉬움이 더욱 도편 중에서도 눈길이 간 것이 국화문이 들어간 청자상감국화문발편이었을까.
사실 국화야말로 가을을 대표하는 꽃 중의 하나다. 지금이야 온실에서 키운 국화들로 인해 사시사철 흔히 볼 수 있는 꽃이 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어찌 이름 모를 산기슭이나 들녘에 함초롬히 피어 있는 청초한 들국화의 매력에 비할 수 있으랴. 사군자 중의 하나인 국화는 송나라 주돈이가 <애련설>에서 국화를 은자(隱者)로 지칭하면서부터 고결한 인격과 품격의 상징으로 보편화 된 느낌이다. 이름 모를 산기슭이나 쓸쓸한 들녘에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외롭게 피어 향기를 풍기고 있는 그 고아한 모습은 속세를 떠나 유유자적한 한가함을 즐기고 있는 은일군자의 모습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우리 같은 장삼이사의 삶속에서 은일한 삶만이 능사일까 하는 생각을 더러 해보게 되기도 한다. 나이가 들다 보면 자연적으로 알던 사람도 자연 멀어지거나 줄어들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노년은 인연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귀중한 시간들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해볼 때도 있다. 병원에 입원해 있는 동안 내 생일이었는데 후배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30년도 더 전에 같은 직장에서 고락을 함께 했던 후배인데 평소에는 죽은 듯이 소식이 없다가 나도 잊고 지내는 생일만 되면 해마다 안부 전화를 해주니 고맙다 못해 감격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내게 무슨 사람 냄새가 난다고 이런 인복(人福)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뭉클해지는 감동을 지울 수가 없다
아, 바야흐로 천지는 단풍이 절정이라는데 발이 묶인 아쉬움을 일부는 찌그러지고 일부는 깨져 손상을 입은 청자상감국화문발편에 제주도 친구가 보내 준 노란 귤이나 두어 점 얹어놓고 깊어지는 가을의 냄새 가을의 청취나 마음으로나마 마음껏 소리쳐 느껴 볼거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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