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월)
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1987년 3월, 어느 고서 경매전에서의 일이다. 『매창시집(梅窓詩集)』이 출품됐다. 매창은 조선 중기의 여성 시인으로, 시문과 거문고에 뛰어난 부안(扶安) 기생이다. 경매전에 출품된 『매창시집』은 매창의 한시를 1957년에 시인 신석정(辛夕汀)이 번역한 그 친필원고본이었다. 십육절지의 갱지 육십여 장에 만년필로 썼는데, 출품자는 이것이 신석정의 친필원고인지를 모르고 경매에 출품했다.
나는 이 『매창시집』을 보는 순간 부안의 명기(名妓)를 떠올렸다. 매창에 관한 신석정의 글을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떠올라, 혹시 신석정의 원고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책을 펼치자마자 서문 끝 부분에 "丁酉比斯伐艸舍에서 辛夕汀”이란 서명이 첫눈에 들어왔다. 이 글씨는 흘림체로 씌어 있어 ‘신석정’을 염두에 두지 않고는 그 판독이 결코 쉽지 않았다. 그래서 출품자도 미처 알지 못했던 것이다. 경매 마감 시간이 임박해 입찰 신청을 하려고 하니 누군가가 먼저 신청을 해 놓았다. 경합이 되었지만, 나는 별로 걱정하지 않았다. 경합 상대가 누구인지는 몰라도 신석정 원고를 알아보기는 쉽지 않을 거라고 자만한 탓도 있다. 모든 경매가 그렇지만 경매에서 이등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물건이 욕심나면 무조건 자신이 평가할 수 있는 최고가를 적어 내야 한다. 『매창시집』은 욕심을 내볼만한 책이라 소신껏 가격을 적어 냈다. 곧 신청이 마감되자 P선생의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오늘 신석정 원고본을 구했다!”
P선생은 고서 수집에 일가를 이룬 분으로, 특히 금석문(金石文) 감식안으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분이다. 나는 의아해 하면서도, P선생이 상당히 높은 가격을 써냈나 보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게 어찌 된 일인가. P선생은 자신만의 단독 입찰인 줄 알고 경매 접수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경매장에 한바탕 폭소가 쏟아졌고, 이렇게 해서 나는 『매창시집』을 내정가 이만 원에 구입할 수 있었다.
그 후 이 책은 S박물관으로 들어갔는데, 가격은 구입가의 수십 배로 뛰어 있었다. 고서의 세계에서는 이렇게 구입 가격의 수십 배 되는 가격으로 거래되는 경우도 종종 있다. 많은 사람의 이목이 집중되는 경매전에서도 눈이 밝으면 가끔 ‘땡잡는’ 수가 생긴다.
서점 주인이 귀한 책인 줄 알면서도 싸게 팔았다면, 수집가는 응당 고마운 마음이 들 것이다. 그러나 주인이 그 가치를 제대로 몰라 싸게 팔았다면, 수집가는 고맙다는 마음을 갖기보다는 되레 그 주인을 얕잡아 보게 된다. 반대로 별로 가치 없는 책을 귀한 책인 줄 알고 비싸게 부르는 고서점 주인을 신뢰하지 않을 것은 뻔하다. 어찌 보면 고서점 주인은 프로이고 수집가는 아마추어라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고서 수집에는 프로도 아마추어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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