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2 (일)
이규진(편고재 주인)
한반도 남단에 위치한 전라남도 고흥은 멀고도 멀다. 지금도 멀지만 교통이 불편하던 예전에는 더 멀어 보이든 곳이다. 그런 고흥을 오래 전 몇 차례 방문했던 적이 있었다. 이 지역에 있는 운대리 분청도요지 답사를 위해서였다.
운대리 분청도요지를 당일치기로 다녀오려면 일찍 서둘지 않으면 안된다. 강남 고속터미널에서 첫 버스를 타고 광주로 가 차를 갈아탄 후 고흥 읍에서 택시를 대절해 들어갔다가 되돌아 역순으로 서울로 돌아와 집에를 도착하면 저녁 12시경. 새벽부터 밤늦은 시간까지 차 안에서 시달리고서도 도요지를 돌아볼 수 있는 시간은 고작 두어 시간에 불과했으니 지금 생각해 보아도 열정이 넘치지 않으면 불가능했던 젊은 날의 추억이 아닐 수 없다.
사실 운대리 분청도요지는 매우 중요한 곳이다. 청자 도요지가 전라남도 강진과 전라북도 부안에, 그리고 백자 도요지가 경기도 광주 일대에 운집해 있는 것과 비교해 볼 수 있는 유일한 곳이기 때문이다. 이곳에는 5개의 초기 청자요지와 무려 25개에 달하는 분청 가마터가 산재해 있다. 그 뿐 아니라 이곳에서는 상감 인화 조화 박지 귀얄 덤벙 등 종류를 총망라한 도편들이 출토되고 있어 가히 분청의 보물창고라고 할만하다.
하지만 운대리 분청도요지에서 주목을 요하는 것은 아무래도 다른 곳에서 보기 어려운 덤벙분청이다. 일명 분장분청이라고도 하는 이 기종은 굽은 물론 기물 전체를 백토로 분장한 것이 특징인데 다도와 관련해 특히 일본인들이 좋아하는 종류다. 따라서 한 때는 일본인들이 관광단을 조직 떼로 몰려와 이곳을 헤집고 다녔던 시절도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특기할만한 것은 운대리 분청도요지에서는 소량이나마 철화분청이 출도 되고 있다는 점이다. 사실 철화분청하면 계룡산 학봉리가 우선 떠오른다. 여기서는 철화가 들어간 철화분청이 대량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두 지역의 차이를 보면 계룡산 학봉리 것이 귀얄 바탕에 철화의 액센트가 강한데 비해 운대리 것은 덤벙 바탕에 철화를 아껴 쓴 듯 간략하게 무늬를 표현하고 있다는 점이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마도 계룡산 학봉리에서는 철화가 체계화 되고 일상화 된데 비해 운대리에서는 시험 정도에 머문 결과가 아닌가 추측된다.
나는 오래 전부터 이 운대리 분청도요지에 관심이 많아 몇 차례 답사를 통해 덤벙을 비롯해 갖가지 종류의 분청편들을 만나 본 바 있다. 하지만 철화분청편을 보지 못해 늘 아쉬움과 허전함이 남아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얼마 전 이 운대리 철화분청편 두 점을 지인으로부터 구했다. 내가 도편에 관심이 많은 것을 알고 있던 지인이 양도를 해준 것이다. 오래 된 아쉬움을 털어 버릴 수 있도록 도와 준 지인에게 고맙고 감사할 뿐이다.
양도를 받은 두 점 중 한 점은 분청사발편이고 이번에 소개하는 한 점은 철화분청손잡이잔편이다. 굽은 완전하고 측면이 동그스럼하게 올라가다 입술은 약간 외반 되었는데 전체적으로 몸체의 2/3정도가 달아나고 없다. 백토분장을 한 외면에 추상적인 무늬가 철화로 들어 있는데 색감은 짙어지다 못해 먹으로 그린 듯한 검은색이다. 손잡이가 붙었던 흔적도 약간은 남아 있어 이 것이 철화분청손잡이잔편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생각해 보면 운대리 분청도요지를 답사했던 것도 아득한 세월 저편의 일이다. 그렇다고 하면 그 곳은 지금 어떻게 달라져 있을까. 몇 군데는 발굴도 하고 박물관도 들어섰다고 하니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이 분명하다. 그 변화가 보고 싶어서라도 한 번쯤은 찾아보고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막연한 그리움만 앞설 뿐 언제 다시 용기를 내어 그 먼 곳을 찾게 될지 지금으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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