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5.24 (금)
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기계 문명의 발전이 절정인 오늘날 문명 상황에서
무형유산은 인간의 삶과 더불어 호흡하고,
이 시대를 기록하고 발언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형유산 정신의 회복이지 않겠는가"
6년 전 무형문화재에 대한 논쟁을 이 지면에 다룬 적이 있다(2018. 8. 24). 원형과 전형 논쟁에 관한 것이었다. 오늘 그것을 다시 환기하는 이유는 그 이름이 명을 다해서라고나 할까. 규정한 법률에 의하면 세시풍속은 물론이거니와 기후 인식이나 갖은 관념들까지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담아내려고 한다. 문화재보호법을 제정한 1962년으로부터 지금까지 겪어 온 세월의 변화에 대한 반영이라고 말하는 것이 옳겠다.
대개 원형(原型)과 원형(原形)은 일반인들이 전혀 구분하지 않고 쓴 용어다. 법률이든 관념이든 모두 의식의 본바탕 혹은 무의식의 근본이라는 의미로 범용하였기 때문이다. 통틀어 아키타이프(Archetype)라 했다. 인류가 공유하는 공통 경험의 집단 무의식이라는 뜻이다. 아키타입은 고정 불변하는 원형질이라는 의미이므로 이전에도 변하지 않았고 이후로도 변하지 않을 것을 이르는 말이다.
무형문화재법으로 돌아가 생각해본다. 원형을 무형문화재로 지정한다는 규정은 잘못된 것이었음을 이미 법률이 증명했다. 아니 문화재라는 이름 자체가 그렇다. 다시 생각해보는 것은 무형문화유산의 특질은 생성하고 변화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다만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강제하여 그 형식과 내용을 붙잡아두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대상을 이렇게 규정해왔다. "무형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은 특정한 시기의 형식, 형태나 내용에 대해 보존의 가치가 있다고 당대의 사회와 여러 전문가가 합의하여 그 형식과 내용을 붙잡아두는 것일 뿐이다." 물론 여기에는 전통과 전승을 기반 삼는 제 규정과 규칙들이 전제되어 있다. 2016년 3월 28일 무형문화재법(무형문화재 보전 및 진흥에 관한 법률)을 따로 제정하면서 원형(原型)을 폐기하고 전형(典型)을 법률용어로 채택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무형문화재법의 효용 상실과 문화분권시대의 과제
어느 특정한 시기에 완성된(문화재보호법 제2조, 여러 세대에 걸쳐 전승되어 온 것) 형식과 형태 및 내용(典型)을 사회적 합의(전문가들의 심사)에 의해 국가와 지자체가 강제하여 보존하는 것이 무형문화재였다. 이 형식(혹은 형태)과 내용을 전형(典型)이라는 법률용어로 갈무리한 것이 문형문화재법의 분리 제정이다. 이로써 일정한 시기의 양식을 마치 고정불변의 원형처럼 오해하는 논쟁이 일단락되었다.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생성, 변화, 발전되는 무형문화유산의 특질에 제동을 걸어서도 안 되고, 마치 원형만을, 혹은 전형만을 국가가 강제하여 보호, 보존한다는 셈법도 변해왔다고 볼 수 있다. 기왕의 문화재는 문화재대로 보호, 보존, 계승하고, 전통에 기반한 제 문화유산들은 자유롭게 현대의 문화와 버무려질 수 있도록 장려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내 논의를 인용해둔다. 진짜민속(Folklore 혹은 Real Folklore)/가짜민속(Fake lore)논쟁이 한때 민속학계를 달군 적이 있다. 하지만 현 단계 페이크로어를 얘기하는 학자들은 많지 않다. 원형/전형 논쟁처럼 시의성도 없고 논점도 무의미해졌기 때문이다. 굳이 따지면 포크로어는 프로토타입(典型)에 해당되고 페이크로어는 포메이션 타입(造型) 혹은 게임 용어의 키노타입(Keno type)에 해당된다. 무형문화재법이 독립되고 전형이라는 용어를 법률화시키면서 원형/전형 논쟁 및 포크로어/페이크로어 논쟁은 일단락되었다고 봐야 한다. 다시 쟁점 삼으려면 내가 제시한 논의들을 반박하거나 새로운 개념, 새로운 해석을 들고나와야 가능하다. 내가 오래전부터 정리한 것은, 무형문화유산은 끊임없이 변해왔다는 것이다. 그중에서 특정하여 무형문화재로 지정한 것들이 전형(오리지널한 특질)의 지위를 갖게 되었고, 지정시기에 특정한(인정받은) 형식과 내용을 보존하는 것일 뿐이다. 무형문화재 제도의 국제적 배경과 제정 근거에 대해서는 본지의 지난 칼럼(2018. 11. 15)에 자세하게 소개해두었으니 참조 가능하다.
문화융성에서 문화공명으로
다시 명토 박아 둔다. 원형에서 전형으로 법률용어를 바꾼 지 오래다. 이 시점에 우리가 문제 삼아야 할 것은 문화분권이다. 이제는 큰 그림 이른바 빅픽쳐를 그릴 때다. 무형문화유산이 우리 문화의 토대를 어떻게 구축하고, 남북의 문화적 통일 혹은 상생의 문제를 포함해 동아시아의 상생과 평화를 위해 어떤 비전으로 기능하는지를 끊임없이 되묻고 이 시대를 견인해가야 한다. "어제에 묻고 내일에 답하다". 수묵비엔날레 김상철 교수가 쓴 기획의 글을 무형유산에 적용해 풀어본 적이 있다. "무형문화유산은 인간의 삶은 물론 인간과 자연, 인간과 사회, 인간과 시대에 대한 성찰의 내용을 담고 있는 일종의 '정신'이다. 그러나 무형유산은 형식주의의 양식으로 전락하여 전형(典刑)을 답습하는 고루한 전통주의에 함몰됨으로써 본연의 가치를 망실하고 말았다. 그 결과 근대 이후 점차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으며, 급기야는 오늘의 침체와 부진의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무엇보다 근본적인 원인은 변화하는 시대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고 본연의 '정신'을 잃어버린 결과라 할 것이다. 기계문명의 발전이 절정에 이른 오늘날 문명 상황에서 무형유산은 여하히 인간의 삶과 더불어 호흡하고, 이 시대를 기록하고 발언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바로 무형유산 정신의 회복이지 않겠는가."
문화유산과 문화융성에서 문화창의로
문화재라는 개념에서 문화유산으로 개념이 확대되었다. 문화재의 활용은 문화콘텐츠라는 이름으로 호명해왔다. 근대문화재니 유네스코 문화유산이니 혹은 자연유산, 세계유산, 축제유산 등의 다종다양한 이름과 개념들이 등장하였다. 기왕의 문화재라는 이름으로 이를 다 담아내기는 역부족이다. 하지만 국가행정, 지방행정 모두 부처 간 이견이나 갈등으로 이를 풀어내지 못한다. 내가 시간 날 때마다 주장하는 얘기다. 우리나라 민속 문화 기반 의례음악의 연행을 '울린다'고 표현한다. 무엇을 울린다는 것일까? 마당을 밟으니 땅을 울리는 것이요 북장고와 꽹과리, 징으로 울리니 공중을 울리는 것이다. 곧 하늘을 울리는 것이므로 공중을 나는 새와 들짐승까지도 울림의 영역에 포함된다. 울림의 파장들은 상하좌우를 가리지 않고 침윤하여 본디 가진 메시지들을 전한다. 이들 의례음악을 굳이 '울린다'라고 표현한 이유가 무엇일까? 울림이 공명(共鳴)이기 때문이다. 한자말 공명(共鳴)은 우리말 '울림'의 다른 말이다. 의례음악의 울리는 기능이 공명의 세계를 도모하는 데 있다는 뜻이다. 이미 BTS가 세계의 음악을 흔들고 있다. 하지만 경제와 문화 전반이 세계적 위상에 오르고 있는데도 정작 우리는 그만한 권위를 주장하거나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것이 좋은 것이여 따위의 자족이 아니라 적어도 동아시아, 아니 세계 무대에 우리 문화의 오리지널한 특장과 의미를 설명해줄 필요가 있는데 말이다. 지난 칼럼에서 문화재청을 문화창의청 아니 문화창의부로 승격시키고 도래하는 문화융성의 시대를 대비하자고 주장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뿌리 없는 나무가 어디 있고 가지 없는 열매가 어디 있겠는가. 용비어천가 들머리를 다시 생각해본다. 뿌리 깊은 나무 바람에 흔들리지 아니할 새 꽃 많이 피고 열매가 많이 맺을 것이니. 그렇다. 저기 저만치 우리의 문화유산에 기반한 문화융성, 문화공명의 시대가 온다. 이를 창발할 준비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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