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6.03 (월)
이규진(편고재 주인)
멋이란 무엇인가. 세속에 물들지 않는 여유로움일 것이다. 곽휘원(郭暉遠)이란 사람이 아내에게 부칠 편지를 써놓고 잘못해 백지를 바꾸어 보내게 되었다. 그 아내가 답시를 보내왔는데 왈, "벽사창에 기대어 어른의 글을 받자오니 처음부터 끝까지 흰 종이뿐이오라. 아마도 어른께서 이 몸을 그리워하심이 차라리 말 아니하려는 뜻을 전하고자 하심인 듯하여이다". 근원 김용준의 <근원수필> 시(詩)와 화(畵)에 나오는 내용이다. 그런데 근원은 아내도 아내지만 써 둔 편지인 줄 알고 이를 잘못 보낸 곽휘원의 무심함이 오히려 시인이나 화가답다고 얘기한다. 어느 한 모퉁이 빈 구석이 없고서는 시와 그림이 나올 수 없다는 생각인 것이다. 말하자면 무언가 꽉 찬 듯한 빡빡함 속에는 멋과 여유가 들어설 자리가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이다
우리 옛 도자기들을 보면 빈구석들이 많아 보인다. 그런데 이런 허전함이 오히려 멋스러움을 돋보이게 하는 경우도 있다. 완벽함에 대해 조급성을 떨쳐버리지 못하는 중국이나 일본 도공들로서는 생각할 수 없는 넉넉함과 여유로뭄, 확실히 우리 옛 도자기들에는 그런 멋스로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뽐내지 않고 허한 듯한 빈구석, 그래서 야나기 무네요시는 일찍이 중국의 도자기는 어필해 오지만 한국의 도자기는 마음이 다가가지 않으면 보이지 않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지적한 것도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옳을 것이다. 다가가 허한 것을 마음으로 메꾸지 않고서는 보이지 않는 그 멋과 아름다움이야말로 우리 도자기의 특색이자 매력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백자철화호편은 17세기 지방 가마에서 만든 것이다. 밑부분은 물레자국도 선명하고 회색빛의 유약은 일정치 못한 가운데 일부는 흘러내린 자국도 보인다. 그런가 하면 손으로 집었던 듯 엄지와 검지의 흔적도 보인다. 앞뒤로 W형의 철화무늬가 선명한 가운데 요똥도 묻어있다. 굽은 잘라낸 안굽에 유약을 훑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고 있다. 거기에 1/3정도가 끼어져 달아나고 없는데 가마에서 그런 것은 아니고 이동 중이거나 사용 중에 피해를 입은 듯하다. 완전하지도 못하고 어디 한 구석 아름다움을 추구한 흔적도 없는 이 것을 나는 왜 갖고 있는 것일까. 언제 어디서 구했는지 기억도 가물가물한 이 것을 오래 지니고 있는 것은 아마도 17세기 지방가마의 자료적 가치 때문일 것이다. 입은 넓고 입술은 말린 것이 아니라 거의 수평으로 벌어진 17세기 특유의 모양에 철화 또한 옹기에 나타나고 있는 것과 같은 대범한 문양 등이 내 눈길을 끌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 것 뿐일까. 이 것이 주는 허한 아름다움은 없는 것일까. 나는 그 허함을 다가가 마음으로 메꾸어 가며 멋과 아름다움을 보고자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17세기는 한국 도자사에 있어서는 퇴보의 시기다. 17세기는 임란 직후라 많은 도공들이 일본으로 끌려가고 도요지들은 대부분 황폐화 된다. 그나마 근근히 명맥을 잇다보니 태토도 유약도 퇴보할 수밖에 없었다. 가뜩이나 귀하던 청화는 더 귀해져 거의 사라져 버리고 그 대용으로 철화가 등장한다. 그런데 17세기 백자호의 특징 중 하나는 넓은 입이다. 마치 후기의 수직으로 뽑아 올리게 되는 사발의 전단계라도 되는 듯 넓기만 하다. 따라서 태토와 유약과 문양과 기형의 모든 것이 앞 시대의 것과 후대의 것들과는 확연히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도 이 시대 항아리의 특징이다. 백자철화호편도 그런 특징들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17세기 도자기들의 퇴보가 오히려 자유분방하고 서민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결과를 초래하고 있다는 것은 참으로 아이로니컬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관요가 아닌 지방요이다보니 깔끔치 못한 이 백자철화호에서 그런 현상은 더 두드러지게 나타나 보이는 듯도 싶다.
이야기가 난 김에 17세기 도자기 이야기를 좀 더 해보자. 그동안 17세기 관요는 경기도 광주시 일대를 벗어나지 않았다는 것이 정설이었다. 탄벌리 상림리 학봉리 선동리 송정리 유사리 신대리 등등 모두가 광주시 일원에 분포해 있는 17세 도요지들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몇 해 전 그러한 상식이 뒤집어졌다. 경기도 용인시 모현면 한국외국어대학교 용인캠퍼스제2기숙사부지에서 17세기 백자요지가 발견된 것이다. 17세기 특징인 굽에 음각으로 간지가 들어가 있는데다 철화용무늬편들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틀림없는 관요인 것이다. 하지만 엄밀히 따져본다면 모현면은 광주시와 인접해 있는 곳이다 보니 크게 광주시 일대를 벗어난 것으로 보기가 어려운 점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하튼 관요도 아닌 지방 어느 곳에서 만든 것인지도 모르는 이 백자철화호 앞에서 나는 이따금 당시의 도공들은 과연 아름다움에 대한 열망이 아닌 그 무엇을 생각하며 물레를 돌렸을까 궁금해지고는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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