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목록
-
KBS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김병준(‘전통으로 소리길로’ 작가) 국내 애청자와 북한과 중국 일본 등 해외동포들을 대상으로 라디오를 통해 찾아가는 KBS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는 우리 고유한 전통문화 돌아보며 국악을 감상하는 프로그램이다. 서기철 국장님이 기획한 우리 것 사랑 뜻이 담긴 이 ‘전통으로 소리길로’는 남상일 명창이 MC로 나서 준 덕분에 매주 토요일과 일요일 오후 3시부터 4시까지 AM 972KHz. 1170KHz방송되고 있다. 휴대폰에서 앱을 깔아 들으면 더 간단히 청취할 수 있다. 폰에서 ‘KBS-Kong’ 다운 받아서 ‘한민족방송’만 선택하면 좋은 음질로 들을 수 있으니 휴대폰으로 청취하는 걸 추천한다. 김병준 작가가 방송을 한지 40여년이 된다. 1981년 KBS-3TV에서 ‘시조와 창’이란 프로그램을 시작한 이후, KBS 1라디오 장수 프로그램이었던 ‘흥겨운 우리가락’을 김성녀 교수 진행으로 12년을 했었고, 국방홍보원 국군방송에서는 라디오 사극을 8년간 2천 4백여 편을 집필했고, 국악방송은 개국 초기부터 15년 동안 ‘우면골 상사디야’ ‘상암골 상사디야’ 일일 프로그램을 하면서 나름 우리 것과 국악에 대한 사랑을 꾸준히 방송을 통해 알려 본 셈이다. 그 40여년 기간 동안 국립극장 무대에서 창극 ‘백범 김구’, 국악원에서 국내 최초 경서도 소리극 ‘남촌별곡’ 같은 전통 뮤지컬도 올렸고, KBS 1TV를 통해 마당놀이 ‘뺑파전’을 올리고, 공연무대며 이런 저런 전통관련 행사에도 동참해 왔다. 그 여정 속에 변하지 않은 게 있다면 ‘우리 것에 대한 사랑’이라 하겠다. 그래서 KBS한민족방송에 남북한 동포들이 함께 들으면 좋을 프로그램이 뭘까? 해외 교민과 동포들이 같이 들으면 의미 있고 흥미도 있을 프로그램은 어떤 형식과 내용으로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다 남상일 명창이 진행을 맡아 주면서 일사천리로 내달리게 됐다. 늘 자주 말했던 ‘우리 것은 좋은 것이여!’ 이 우리 것을 방송으로 담고 싶었기에 진행자가 국악예술인이었으면 했고, 막간 사극 코너도 소화해야 하니 연기력도 뛰어나야 했는데, 남상일 명창이 진행을 맡으면서 성우들과 함께 우리 역사 속에 흥미로운 사건들, 잊혀서는 안될 서민들 생활사와 문화예술 이야기가 흥미롭게 풀려나갔다. 리포터를 통해서 우리 문화계 분들을 폭넓게 취재해 미술, 음악, 민속, 유무형 문화재 관련 전문가 분들 이야기를 전해 드릴 수 있었고, 작가는 우리 것 우리소리 사랑하는 이웃사촌들을 찾아 나서서 한분 한분 이야기와 그분들 소리와 연주도 소개해 주는 코너도 계속해 오고 있다. 그리고 방송국 스튜디오로 자리해서 남상일 명창과 13분 대담을 하는 초대석까지 마련하고 보니, 매주 한 시간짜리 프로그램에다가 꽤 많은 살림살이를 차린 셈이다. 진행자 남상일 명창이 연기하며 소리하며 전체를 이끌고 있다, ‘실록 만화경’이란 사극코너로 우리 옛 생활상과 역사를 흥미롭게 돌아보고, 리포터가 취재해 온 ‘문화예술인 한마디’도 소개하고, 우리 국악계 뿐 아니라 문화계 인사들을 스튜디오로 초대해서 대담을 나누고, 작가가 일반 애청자와 국악 동호인들을 만나 국악사랑 이야기며 한 곡조 부른 걸 소개하는 코너며, 우리 전통 속에 소중한 것들을 하나 하나 다시 새겨보는 ‘사랑채 뜨락에’ 같은 인문학적인 코너도 있고. 현재 우리네 지역에서 어떤 일이 화제인가. 지역 생활상을 전해주는 ‘고향 나루터’ 같은 코너며, 우리소리에 얽힌 이야기들을 하나 둘 풀어 나가는 ‘사설마다 사연이’ 코너 까지 참 욕심도 많게 1시간 짜리 프로에 가득 채운 모습이다. 그걸 매주 2편씩 제작하며 달려오고 있다. 해마다 특집프로그램도 제작해서 지난해 추석 무렵은 코로나씻김 마당놀이 ‘떴다 소리꾼 상사디야’ 2부작을 올렸고, 북한인민배우들이 부른 민요를 특집으로 소개한 ‘대동강수 한강수 민요로 만나다’ 같은 작품도 올려졌으며, 삼일절 무렵에는 ‘열사여 항일의 깃발이여’ 같은 특집으로 겨레의 나라사랑 얼을 되돌아 보기도했다. 우리 프로그램은 그냥 허공에 날리지 않는다. 한편 유튜브 다시보기 영상으로 제작해 올리고 있다. 유튜브에서 ‘남상일 명창 전통으로 소리길로’ 검색해 보면 무수히 많은 영상물이 떠 오를 것이다. 이리 기록하는 뜻은 우리 것 사랑, 국악사랑 마음을 미디어로 올려 나누고 남겨 보자는 마음이다. 이 글을 보시는 분이라면 우리 것 사랑하는 분이 틀림없을 것이다. 그럼 남상일 명창 프로그램에 동참해 보는 것도 재미있고 의미있는 일 아닌가 싶다. 그래서 작가의 이메일과 전화번호 공개하니. 나도 국악사랑 한마디 하겠다. 나도 배운 소리가 있고 배운 가락이 있으니 자랑한번 해보고 싶다. 이런 국악 동호인 여러분. 김병준에게 연락만 주시면 여러분 이야기와 노래며 연주를 녹음해서 남상일 명창이 소개해 드리는 이 ‘전통사랑 이웃사촌’ 코너에 적극 동참해 보시라는 말씀 전하니, 아무쪼록 KBS한민족방송 ‘전통으로 소리길로’와 함께 우리 것 사랑 함께 해 주셨으면 하는 마음 간절히 전하며 새해 복 많이 나누시고 건강하시길 빌어 올린다.
-
[도서소개] 왕릉 가는길# "어느 왕릉을 가건 실크로드처럼 펼쳐진 아름다운 길이 있고 소나무, 참나무, 물푸레나무를 비롯한 온갖 나무들이 울울창창했다. (…) 서울 근교 엎드리면 코 닿을 만한 거리에 있는 30여 개에 이르는 조선 왕릉 길은 조선 최초의 왕릉 정릉에서부터 정조의 건릉까지 600킬로미터로 이어져 있다. 조선왕조 500년과 그 뒤로 이어진 역사와 문화의 현장을 찾아 천천히 그 길을 따라서 걸어 보자.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산천을 사랑하고 알리는 진정한 홍보대사가 될 것이다.”(본문 중에서) # "경종이 잠든 의릉은 묘명 그대로 크고 아름다운[懿] 무덤[陵]이다. 그런데 찬찬히 살펴보면 어딘가 어색하다. 일반적으로 왕과 비의 쌍릉은 봉분이 좌우로 나란히 솟아 있는데 이 능은 앞뒤로 배치되어 있다. 앞쪽이 왕비 선의왕후의 묘이고, 뒤편에 경종의 묘가 터를 잡았다. 효종과 인선왕후 장씨가 묻힌 여주의 영릉도 이와 같은 구조로 되어 있는데, 왕의 능을 상봉, 왕비의 능을 하봉이라고 부른다. 이러한 동원상하릉의 배치 양식은 유교적 인습을 따른 것이지만, 이곳에 안치한 시신이 왕성한 생기가 흐르는 정혈正穴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한 풍수지리적인 측면도 있었다고 한다. 왕릉과는 다르지만 파주시 파평면에 있는 율곡栗谷 이이李珥의 가족묘도 풍수지리상 역장逆葬이다. 율곡 내외의 묘가 제일 위에 있고 그 아래에 아버지 이원수와 신사임당 내외가 합장되어 있다.”(41p 2. 비운의 왕 크고 아름다운 무덤에 들다) 조선조 왕릉을 만날 수 있는 책 「왕릉 가는 길」에서 인용한 두 대목이다. 왕릉의 역사와 사연을 만나게 해 준다. ‘조선의 왕릉은 어떻게 조성 되었는가’에서부터 ‘정조‧효의왕후 건릉’ 까지, 38가지 소재에 답해 준다. 이 책은 조선 팔도 안 가본 곳이 없는 명불허전 답사 전문가, 우리나라에 ‘걷기 열풍’을 불러온 주역 신정일 작가의 신작이다. 가까운 서울의 선능, 태릉부터 파주 동구릉, 영월 장릉까지, 518년 동안 조선을 다스렸던 조선 왕조에는 27명의 왕과 왕비, 그리고 추존 왕을 합쳐 42기의 능이 있고, 14기의 원과 64기의 묘가 현존하고 있다. 신정일 작가는 왕릉을 한 곳 한 곳 직접 답사하며, 130여 컷의 사진과 함께 왕실 이야기를 재미있게 풀었다. 한반도 최고의 명당은 어떻게 선정되고, 거기에 잠든 수많은 왕과 왕비, 세자와 세손들에게는 어떤 가슴 찡하고도 슬픈 사연들이 있을까? 조선 왕릉을 한 바퀴 둘러보는 것만으로도 518년 조선왕조의 명장면과 하이라이트를 모두 감상한 것과 같다. 신정일 작가는 "한 발 한 발 걷다 보면 이 땅의 모든 사람이 대한민국의 역사와 산천을 사랑하고 알리는 진정한 홍보대사가 될 것이다.”라며 조선 왕릉을 아는 것은 인문, 역사적 지식은 물론이고 지리, 풍수 관점의 상식도 풍부하게 쌓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선 왕릉은 수십 년에 걸친 연구와 복원, 관리사업의 노력으로, 2009년 6월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이후 10년 동안 능제 복원, 역사‧문화 환경 복원 등의 노력이 있었고, 그 결과 2020년 가을 ‘조선 왕릉 순례길’이 개방되었다. 조선 왕릉 순례길은 총 6개 코스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 일본 시코쿠 순례길에 버금가는 역사적, 환경적 가치를 가졌다. 이 책은 서울 선릉부터 영월 장릉까지, 서울, 경기, 강원도의 여러 조선 왕릉을 잇는 600km 왕릉길을 소개하며 각 왕릉에 대한 설명과 그에 얽힌 역사 이야기를 풀어간다. 저마다의 아름다운 역사와 이야기를 지닌 518년 시간의 길, 뜻깊은 풍경과 정취가 가득한 조선 왕릉 길에 들어서 보기 바란다. 그대를 부른다! 저자 신정일 우리나라 옛길을 재발견하기 위해 심혈을 기울이고 있는 저자는 현재 문화재청 문화재위원과 산림청 국가산림문화자산 심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대기업, 지자체 등에서 강연 요청이 끊이지 않는 인기 강연자이기도 하다. 저서로는 《신정일의 신 택리지》 시리즈(11권)와 《신정일의 한국의 사찰 답사기》, 《대동여지도로 사라진 옛고을을 가다》 시리즈(3권), 《꿈속에서라도 꼭 한번 살고 싶은 곳》, 《천재 허균》, 《조선의 천재들이 벌인 참혹한 전쟁》, 《가슴 설레는 걷기 여행》, 《그토록 가지고 싶은 문장들》, 《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답사기》 등 70여 권이 있다. 신정일 지음 | 2021년 1월 4일 출간 | 값 18,000원 | 쌤앤파커스
-
국외소재문화재, 새로운 얼굴을 갖다문화재청(청장 김현모)은 정부혁신과 적극행정의 하나로 외국에서 우리나라 국외소재문화재(이하 ‘국외문화재’)를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상징화하는 브랜드 정체성(Brand Identity, 이하 BI)을 개발하였다. 국외문화재 통합 BI 개발은 국외문화재 보호·활용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추진되었다. 앞으로 각종 책자나 답사지도, 홍보 배너(띠 광고), 초청장 등 홍보자료와 국외부동산문화재 성격을 갖은 외교공관·독립운동 사적지, 이민사 건물 등에 부착하는 사인물(현판, 인증서,현수막 등)에 활용할 예정이다. 지난해 영국, 캐나다, 폴란드 등 외국 사례 조사를 토대로 ▲ 영문 상표명 작명(네이밍) 개발(8월), ▲ 기본 BI 개발(9~10월), ▲ 응용 BI 개발(11~12월) 등 단계를 거쳤다. 기본 BI는 태극기에 사용되는 건곤감리를 바탕으로 양 끝을 뫼비우스의 띠처럼 연결하여 국외문화재가 과거와 미래, 우리나라와 소재국 등을 이어주는 역사·문화 교류의 상징이 되도록 이미지화했다. 영문 상표명은 여러 명칭이 경합되었는데 전문가 자문, 원어민 평가 등을 거쳐 우리나라의 역사성이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음을강조하기 위해 ‘Heritage of Korea’(헤리티지오브 코리아)로 확정했다. 문화재청은 이번 통합 BI 개발을 계기로 각 부처에서 개별 추진하는 국외문화재사업의 통일적인 이미지가 형성될 수 있도록 문화체육관광부(외국 홍보), 외교부(외교공관·이민사), 국가보훈처(독립운동사적지), 교육부(역사유적지) 등과 적극 협력을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또 국외문화재가 외국 소장자나 소장기관의 인식 개선을 통해 현지에서 자발적으로 보존·관리될 수 있도록 보존·관리 안내서 배포,보수·복원 지원, 홍보·활용 지원 등을 단계별로 추진해 나갈 예정이다.
-
국립무형유산원, 「한 장으로 읽는 무형문화재」 전자책 발간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원장 채수희)은국가무형문화재에 대한 국민의 이해도와접근성을 높이기 위하여 국가무형문화재 디지털 홍보 안내서인 『한 장으로 읽는 무형문화재–신명나는 무형문화재』(이하 『한 장으로 읽는 무형문화재』)를 발간하였다. 『한 장으로 읽는 무형문화재』는 국가무형문화재 종목별 개요와 간략한 소개, 내용과 특징, 해당 종목이 오늘날 가진 역할과 가치 등을 한 장으로 정리하여, 국가무형문화재 전 종목을 온라인에서 손쉽게 만나볼 수 있도록 전자책으로 발간하였다. 2020년에는 전통 공연·예술 분야를 수록하였으며, 2021년에는 의례·의식 및 전통 지식·생활관습 등 분야, 2022년에는 전통 기술 분야를 발간할 계획이다. 이번에 제작된 『한 장으로 읽는 무형문화재』는 ‘신명나는 무형문화재’라는 부제로 전통 공연·예술 분야인 무용(진주검무 등 7종목), 연희(양주별산대놀이 등14종목), 음악(종묘제례악 등 27종목) 관련 국가무형문화재 48종목을 수록하고 있다. 국립무형유산원은 이번 전자책 발간을 통해 무형문화재에 대한 국민의 접근성과 관심도를 높이는 한편, 초·중·고등학교 교육 현장 등에서 우리 전통문화 이해의 폭을 넓힐 수 있는 교육 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한 장으로 읽는 무형문화재』는누구나 쉽게 열람하고 활용할 수 있도록 국립무형유산원 무형유산 디지털 아카이브 누리집(www.iha.go.kr)에 공개하고 있으며 자유롭게 파일을 내려받을 수 있다.
-
[온라인 공연]국제 아동청소년 예술공연 플랫폼 'K-PAP 2021(Korean Performing Arts Platform for children and youth 2021)국제 아동청소년 예술공연 플랫폼인 'K-PAP 2021(Korean Performing Arts Platform for children and youth 2021)'이 12∼24일 온라인 무대에서 열린다. K-PAP은 국내 유일 아동·청소년 예술공연 축제인 아시테지 겨울축제 프로그램의 일환이다. 이번 K-PAP에서는 ▲ 라운드테이블: 페이스 타임 위드 덴마크 ▲ 특별기획 포럼: 2021 전국어린이연극잔치 운영방안 ▲ K-PAP 톡: 스몰 토크쇼 ▲ 아티스트 라운지: 톡 방 ▲ 넥스트 제너레이션 등 5개 프로그램이 마련된다. 줌(ZOOM)과 유튜브 등 온라인으로 열리는 행사에는 국내외 프로모터, 아티스트들이 참여해 아동·청소년 공연예술 교류의 장을 만들어간다. 자세한 일정과 내용은 아시테지코리아 홈페이지(www.assitejkorea.org)에서 확인할 수 있다.
-
[연극소식] 조선 소프라노 윤심덕이 살았다면… 연극 '관부연락선'오는 3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되는 연극< 관부연락선 >(작_이희준, 연출_이기쁨)은 조선 최초의 소프라노 윤심덕이 살아 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라는 상상으로 만들어진 작품이다. 일본에서 부산으로 향하는 관부연락선 도쿠주마루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 관부연락선 >은 밀항을 하기 위해 배에서 숨어 지내는 ‘홍석주’가 바다에 뛰어든 ‘윤심덕’을 구해주면서 시작된다.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여인은 같은 것 하나 없는 서로의 생각과 삶의 방식에 투닥거리고 갈등을 빚기도 하지만 결국 서로를 이해하고 우정을 나누며 각자가 그리는 희망을 응원하게 된다. 많은 것이 허락되지 않았고 운명에 순응하는 것이 옳다고 여기는 1920년대 여성들의 모습과는 사뭇 다른 두 여인, 홍석주와 윤심덕은 자신들의 앞에 놓인 운명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더 나은 삶으로 향하기 위해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 두 여인의 모습은 관객들에게 큰 울림을 남길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연극< 관부연락선 >은 이희준 작가와 이기쁨 연출의 만남으로 기대를 모으고 있다. 뮤지컬 < 미아 파밀리아 >, < 미오 프라텔로 >, < 아킬레스 >, < 천사에 관하여: 타락천사편 >, < 다원영의 악의 기원 > 등으로 관객과 평단의 인정을 받은 이희준 작가와, 2019년 백상예술대상 연극부문 젊은연극인상에 노미네이트되며 뮤지컬< 난설 >, 연극< 산책하는 침략자 >, < 줄리엣과 줄리엣 >, < 대한민국 난투극 >등에서 입체감 있는 연출로 주목받고 있는 이기쁨 연출의 하모니가 어떤 시너지를 낼지 궁금증을 불러일으킨다. 또한 이희준 작가가 오랜만에 선보이는 연극 작품이라는 점도 또 하나의 기대 포인트가 될 전망이다. 공연관계자는 "연극< 관부연락선 >을 통해서 오늘보다 더 나은 내일이 있을 거라는 희망을 이야기하고 싶었다. 공연을 보러 오신 관객분들에게 석주와 심덕이 전하는 따뜻한 희망이 고스란히 전해지길 바란다.” 는 소감을 전했다. 관부연락선은 1905년 9월 산요기선주식회사(山陽汽船株式會社)에 의해 개설되어 조선의 부산항과 일본의 시모노세키항을 연결하던 해운 노선. 명칭의 부관/관부는 각각 부산(釜山)과 시모노세키(下關)의 한자를 따서 붙인 이름이다.경부선철도의 부산잔교역과 일본의 산요 본선 시모노세키역을 연결하는 노선이었기 때문에 연락선이라는 명칭이 붙었다. 1945년 6월 공습과 어뢰/기뢰의 의한 공격이 잦아지자 정기 항로로서의 부관연락선은 휴항하였다. 2021년 봄을 기다리게 하는 연극< 관부연락선 >은 3월 1일부터 5월 9일까지 대학로 자유극장에서 공연하며, 1월 중 캐스팅 공개와 함께 1차 티켓 오픈에 관한 소식을 전할 예정이다.
-
전 세계 한류 팬 1억명 돌파 KF,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 발간2012년부터 매년 전 세계 한류현황을 분석하여 책으로 펴내고 있는 KF(한국국제교류재단, 이사장 이근)가 외교부와 함께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을 발간했다.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은 전 세계 총 109개국의 한류 현황, 문화적 특성, 문화교류 시 유의사항 등을 비롯하여 98개국의 한류 동호회 및 동호회원 현황을 포함하고 있다. 2020년 9월 기준 전 세계 한류 동호회 수는 1,835개, 한류 팬 수는 전년의 99,328,297명 대비 약 545만 명이 증가한 104,777,808명으로, 사상 최초 1억 명을 돌파하였다. 동호회 당 회원 수도 전년 대비 약 2천명이 증가한 것으로 조사되어, 경쟁력 있는 동호회를 중심으로 점진적 통합 및 성장 양상임을 보여준다. 2020년 팬데믹 위기 속 한류의 소프트파워가 여실히 드러나, 초연결 사회에서 진가 발휘 2020년 유례없는 팬데믹의 확산 가운데에서도 전방위적으로 약진한 한류의 저력은 ▲다양한 플랫폼 및 채널 특성에 맞게 체계적·전략적으로 운영되는 동호회 활동들(‘번역’, ‘해석’, ‘리액션’, ‘커버댄스’), ▲대중문화 콘텐츠의 향유에 큰 장벽이 되는 언어적 한계의 극복 가능성을 증명한 성공 사례들(영화 < 기생충 >의 아카데미 최우수작품상 수상, 방탄소년단의 한국어 음악 빌보드 차트 진입), ▲디지털 플랫폼에 최적화된 미디어 기술로 구현해낸 세계 최초 유료 온택트(Ontact: 온라인을 통한 대면 방식) 콘서트 ▲웹 환경에 최적화된 한국식 포맷을 창조하여 신 한류 장르로 자리 잡은 세계 최초 웹툰 플랫폼 등에 힘입은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한류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 한류 팬의 열정이 식지 않는 러시아 등 한류의 지속 성장세 지역별로는 조사 이래 최초로 아시아 지역에서 동호회 수가 감소하였다. 일본의 혐한류, 중국의 한한령, 그리고 한류 스타들의 윤리적 문제가 이슈화된 영향으로 분석된다. 반면 미주, 유럽, 아프리카, 중동 등 아시아 외 모든 지역에서 동호회 수가 증가하여 지역 편중이 완화되는 긍정적 신호를 보이기도 했다. 미주 지역에서는 한류가 지속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미국은 동호회들이 회원 수 평균 100만 명에 달하는 체계적인 조직 시스템으로 성장, 한류 강국이 되었다. 영화 < 기생충 >의 아카데미 4관왕 쾌거, < 킹덤 > 등 드라마의 흥행, < 핑크퐁 > 등 어린이 캐릭터의 인기에 더불어 웹툰, 게임, 한식까지 미국 내 시장의 파이를 키워가고 있다. 브라질, 멕시코,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에서도 K-pop과 K-drama를 중심으로 활발한 동호회 활동이 이어지고 있다. 이에 힘입어 미주 지역 동호회원 수는 전년 1,215만 명 대비 30%가 증가한 1,580만 명을 기록했다. 유럽 지역의 동호회원 수는 한류 열기가 가장 뜨거운 러시아를 중심으로 1,504만 명에서 1,879만 명으로 25% 증가하였다. 러시아인들의 한국문화 사랑은 K-drama와 K-pop에서 영화, 클래식, 음식, 한국어, 전통문화 등 전 분야로 확장되고 있다. 타 문화권의 대중문화가 쉽게 자리 잡기 어려운 아프리카·중동 지역에서도 K-drama와 K-pop을 필두로 한류가 상승세를 탔고, 이집트와 요르단이 두드러졌다. 이 지역 동호회원 수는 전년 32만 명 대비 119만 명으로 3.7배 급증하여 향후 한류의 행보가 기대를 모은다. 괄목할만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초기 한류의 전진기지였던 아시아 지역의 한류 성장 위축, ▲한류 팬이 러시아에 편중된(동호회원 수의 80% 차지) 유럽 지역, ▲지나치게 ‘상업적’이거나 ‘선정적’인 한류와 ‘맹목적’인 한류 팬에 대한 반감 역시 관찰됨에 따라 실효성 있는 대책을 수립하기 위한 철저한 원인 분석과 한류의 입지 유지를 위한 새로운 전략이 요구된다. "높은 완성도의 한류 콘텐츠가 글로벌 플랫폼에서 선전, 한국 콘텐츠에 대한 세계적 관심으로 선순환” 이근 KF 이사장은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은 어려운 시기에도 지속되고 있는 한류의 확산을 수치와 보고서로 확인할 수 있는 자료”라고 언급하며 "국내외 문화예술 및 한류 관련 유관 기관에서 사업 방향을 수립하고, 우리 국민이 한류 현황을 이해하는 데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되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KF는 < 2020 지구촌 한류현황 >을 정부, 언론, 문화예술기관 등에 배포할 계획이며, 한류에 관심이 있는 사람은 온라인(http://ebook.kf.or.kr)으로 편리하게 책자를 열람할 수 있다.
-
[연재소설] 흙의 소리 19흙의 소리 이 동 희 길 <5> 박연은 관로官路라고 할까 벼슬 길에 나간 후 주로 청직淸職에 있었다. 앞에서 말한 대로 집현전 교리, 사간원 정언, 사헌부 지평, 세자 시강원 문학 등 간원諫院 헌부憲府 춘방春坊의 요직을 두루 거치었다. 문장과 학문에 단연 두터운 인정을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예악의 중심에 서서 조선조 국악의 중추적 역할을 하기까지 다른 관직들을 맡기도 하였다. 전지하기를, 제생원 의녀 중 나이 젊고 총명한 3 4인을 골라 교훈을 시키어 문리를 통하게 하라고 하였다. 인하여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 박연을 훈도관으로 삼아 전적으로 교훈을 맡게 하라고 명하였다. 전교수관前敎授官 박연 등이 조정에 들어와서 질의하기를, 본국에서 생산되는 약재 62종 안에 중국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지 않은 단삼(丹蔘) 누로(漏蘆) 시호(柴胡) 방기(防己) 목통(木通) 자완(紫莞) 위령선(葳靈仙) 백렴(白歛) 후박(厚朴) 궁궁(芎藭) 통초(通草) 고본(藁本) 독활(獨活) 경삼릉(京三陵) 등 14종을 중국 약과 비교하여 새로 진짜 종자를 얻은 것이 6종이나 된다고 하여, 중국에서 생산되는 것과 같지 않은 향약(鄕藥)인 단삼 방기 후박 자완 궁궁 통초 독활 경삼릉은 지금부터 쓰지 못하게 명하였다. 세종실록 19권 5년 3월 17일 무술과 3월 22일 계묘에 실려 있는 대목이다. 그 후 시기를 보아 박연은 심혈을 기울여 문맥을 다듬고 정성스런 글씨로 왕에게 상소를 한다. 성조聖朝가 새로이 일어남에 바야흐로 예악의 순수한 다스림을 일으키려는데 개혁의 초기인지라 습속에 폐조廢朝의 잔재가 남아 있으니 심히 개탄스러운 일입니다. 대락 그런 내용이었다. 참으로 용기 있고 혁신적인 청원이었다. 성조는 조선, 폐조는 고려를 뜻하였다. 이 상소는 즉각 받아들여졌고 박연은 그 일을 하게 되었다. 세종이 등극해 나라 만들기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면서 박연은 예악을 맡아 활약하게 된다. 자신이 강설講說한 내용이 되돌아온 것이었다. 책상물림으로, 이론이며 지식일 뿐 실제로 행해 보지 못한 고대 중국의 고사 옛 성현의 덕목을 시정施政 현장에서 실현할 안을 내놓아야 하였던 것이었다. 개국 초기의 어수선한 정국과 2차에 걸친 왕자의 난으로 어지러운 풍파를 딛고 조선 건국 27년만에 즉위한 세종의 입지는 결코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이몸이 죽고 죽어 일백번 고쳐 죽어… 백골이 흙이 되고 먼지가 되어 넋이 한 내끼도 없이 산화되더라도 변함없이 나라와 왕을 지키겠다는, 그 너무도 유명한 이야기를 모를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고려의 대표적인 충신이자 성리학의 조종이며 만인의 추앙을 받는 정몽주鄭夢周를 제거하고 새 나라 조선을 세운 할아버지(태조 이성계)와 새 나라를 꿈꾸며 정몽주에게 철퇴를 가하는 아버지(태종 이방원)는 할아버지를 도와 개국을 설계한 정도전鄭道傳의 등에 다시 칼을 꽂는다. 이 얼마나 소름 끼치는 일인가. 지금도 개성의 선죽교에는 정몽주의 핏자국이 보인다고 한다. 태조는 도읍을 한양으로 옮기고 조선 건국을 하였지만 민심을 장악하지 못하고 지식인들의 이반離反을 막지 못하였다. 가령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목은牧隱 이색李穡 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吉再 같은 대선비들과 함께 하였더라면 나라가 어찌 되었을까. 그리고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원천석元天錫 같은 선비도 있었다. 역사에 그런 가정법이 무슨 소용인가. 소름 끼치는 이야기를 마저 해야겠다. 1398년(태조 7) 8월과 1400년(정종 2) 1월, 두 번 왕자들의 혈난血亂이 벌어진다. 태조는 신의왕후 한씨가 낳은 방우 방과 방원 등 여섯 형제와 계비 신덕왕후 강씨가 낳은 방번 방석 형제 중에 여덟 번째 아들 방석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한씨 소생의 왕자들은 이에 반발하여 사병私兵을 동원하여 건국공신인 정도전 남은南誾 등을 제거하고 세자 방석과 그의 형 방번을 무참히 살해한다. 그리고 다시 같은 어머니 배에서 태어난 왕자 형제끼리 칼부림을 한다. 하륜河崙 이거이李居易 등 방원의 심복들은 방원을 세자로 책봉하려 했으나 정치적 입장을 고려하여 둘째인 방과가 세자가 되고 1339년 왕위에 오른다. 정종이다. 그런데 이후 정종과 정비 정안왕후 사이에 소생이 없자 또 다시 세자의 지위를 놓고 방원과 방간은 갈등을 겪는데 공신功臣 책정 문제로 불만을 품고 있던 박포朴苞가 방간을 충동하여 방원과 무력 충돌을 하게 되고 싸움에 이긴 방원은 왕이 된다. 태종이다. 정종 2년 11월이다. 2차 왕자의 난을 지켜 보며 자란 두 형에 대한 이야기는 앞에서 했다. 왕권에 신물이 나서 십리 백리 떠나갈 법하지 않은가. 어떻든 그것은 지나간 일들이고 세종은 왕위에 오른 후 타고난 영명英明으로 새 나라 새 문물제도의 정립에 정열을 쏟았고 거기에 필수적으로 대두한 것이 예악이었다. 예와 악은 국가 문물제도의 핵심이었다. 내용이며 형식이고 얼굴이요 몸체였다. 예가 인이라 한다면 악은 어지러운 시대를 뚫고 나가는 인정仁政의 열쇠 구멍이었다. 열쇠 꾸러미였다.
-
이무성 화백의 작화 : [연재소설] 흙의 소리 19
-
송만갑 명창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송만갑 명창 판소리 춘향가 중 '이별가' Mankab Song(Pansori maestro): 'Chunhyang-ga'(Korean farewell song) 1934년 녹음
-
박병천, 가ㆍ무ㆍ악에 능한 씻김굿의 예능보유자피는 못 속인다. 진도 무당 박병천(朴秉千ㆍ58, 진도씻김굿 기능 보유자) 씨는 자신이 무업에 종사하게 된 것을 당연하게 생각하며 이 일이 천하다고 여겨 본 적도 없을 뿐더러 어디서나 자신있게 나선다. 오히려 몸 속에서 우러나는 천부적인 몸통발림, 재기(才技), 목청을 놔두고 무얼 하겠느냐는 되물음이다. "진도 입대조(入代祖)가 9대라니까 적어도 우리 가문은 250년 이상을 무업에 종사한 거여. 우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빌어 준 덕택에 숱한 사람들이 마음놓고 좋은 곳으로 갔을 거구먼.” 어려서부터 어정(굿)판을 좇아 다니며 몸에 익힌 박씨의 남도 풍물 가락은 귀신까지 감복시켜 버리고 만다. 특히 가(歌), 무(舞), 악(樂), 의식(儀式)은 물론 농악에까지 능해 가히 이 분야의 독보적 존재다. 박병천과 무악. 삼현육각(징ㆍ장구ㆍ대금ㆍ북ㆍ쌍피리ㆍ아쟁)으로 뒷바라지하는 씻김굿의 무악은 당연히 징이 발군이다. 잔잔한 파도같이 밀려오는 삼현육각의 소용돌이가 갑자기 멈춰버리고 대금과 쌍피리의 구성진 죽관음이 한 맺힌 망자의 넋을 위무할 즈음 난데없는 박병천의 징이 오장육부를 훑어 내며 마무리지어 버린다. 그의 징 소리는 일반 사물놀이의 징 소리와는 판이하게 다르다. 듣는 이의 마음가짐과 한의 두께에 따라 계면(界面, 슬프고 애원적인 것) 섞인 탄식음일 수 있고 우렁차고 씩씩한 미래성일 수도 있다. 박씨의 무악은 1985년 베를린음악제에 출전, 6개국 32개 지역을 순회하며 음악 선진국들을 놀라게 했고 LA올림픽 개막 축제 공연, 니카라과 세계민속음악제 등을 통해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켰다. 인간의 원초적 감성에 호소하는 무악의 기본음은 동서양은 물론, 유ㆍ무식, 종교까지를 뛰어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의 무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요즘의 외국 유학보다도 힘든 당시 목포 유학(목포중, 6년제)을 마치고 한때는 딴 직업을 찾으려 했지만 무슨 일을 해도 되는 게 없었단다. 스무 살 때 어머니 김소심(金小心, 무가의 대가였음) 임종을 지켜보며 받은 충격이 오늘로 이어진다. 이승과 저승을 넘나드는 혼수 상태에서 잠깐 정신이 돌아오면 "아가, 오늘이 음력 며칠이제······. 내 건너 안서방네 성주굿 해 줘야 할 텐디······.” 순간 박씨는 자귀로 뒤통수를 얻어맞는 충격을 느꼈단다. 한평생을 ‘무당’ 이라 천대받으면서도 죽은 사람 좋은 곳으로 가 달라고 빌어 온 무업이 먹고살기 위해 한 일이 아니었음을 번개스치듯 깨달았다는 것이다. "어머니, 지가 한번 대신 해볼까요?.” 이 말에 김소심 씨는 벌떡 일어나 "배울테면 똑바로 배워야 한다. 어정판에 돈 조금 내놓는 건 가난해서 그런 게야······. 돈 적다고 슬슬 하다가는 신장이 노하는 법이야.” 이후 박씨는 굿판에 가 돈타령한 적 없고 돈 벌어 써 본 일도 없다. 일곱 살 때부터 부락 농악칠 때 무동을 서 인기를 독차지했고 국민학교 때는 학예회 콩쿠르에 나가 ‘끼’를 보여 줬다. 고교 시절 밴드부에 들어가 클라리넷을 불며 ‘요것이 바로 혈통 세습’임을 스스로 느꼈다는 것이다. 쉽게 손만 떼면 곡이 절로 나왔다고. "한때는 내가 전라도 ‘번개’였지. 무당이라고 업신여기는 놈은 무조건 한방부터 내질러 버렸으니까. 도대체 남 잘되고 좋은 곳으로 가라 빌어 주는 게 뭐 잘못된 거냐는 생각이었지······.” 그의 주먹 솜씨는 전남에서 알아줬고 알 만한 사람은 대세 불리하면 박씨 이름을 팔고 다닐 정도였다고 회고한다. 그러나 지금 그의 손가락 마디엔 징채, 북채, 장구채를 쥐어 생긴 상수리만한 굳은 살들이 돋아 있다. 진도 무당은 박(朴)ㆍ함(咸)ㆍ노(魯)ㆍ채(蔡)ㆍ최(崔)ㆍ이(李)ㆍ김(金)의 칠성(七姓)받이가 있는데 이 중에서도 전통 세습무는 밀양 박씨가 뚜렷한 단일 계보를 이어오고 있다. 박씨 조부(대금 명인)가 타계했을 당시 (일제 때) "비록 천한 사람이 죽었지만 진도군장(珍島郡葬)으로 모셔졌다.”면서 세습무 집안을 떳떳하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고 했다. 진도 신청(神廳) 계보는 박씨 가문 위주로 만들어진 것이다. 중ㆍ고ㆍ대학은 물론 대학원 강의까지 나가며 국문ㆍ민속학 교수들과 난상 토론을 전개하고 진도만가(挽歌), 북춤, 강강수월래, 다시래기(초상집에서 상주를 위로하는 놀이), 씻김굿 등을 다듬고 정리해 이 분야에도 일가견을 갖고 있다. 1971년 전국민속경연대회 국무총리상(남도 들노래팀), 1972년 국무총리상(강강수월래), 1973년 대통령상(강강수월래), 1974년 문교부 장관상(진도만가), 1975년 거문도뱃노래 발표, 1976년 진도다시래기 발표 등 민속학에 끼친 공헌도 만만치 않다. 그 자신 인간문화재 72호(1980년 지정, 진도씻김굿 기능 보유자)로 남도굿과 가락을 통해 17명의 중앙ㆍ지방 문화재 지정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지금도 박씨는 자신한다. 문명교(서양 종교 등 무를 업신여기는 종교를 그는 ‘문명교’라 불렀다.)를 믿는 집안에서도 객적은 일이 있으면 무(巫)가 혹세무민이 아님을 현장에서 보여 주겠다고. 이와 같은 맥락에서 박씨는 쓸데없는 피해 의식, 열패감 등으로 조상을 속이려는 재인 후손들을 경멸한다. 우리 민속악의 고향이며 연원인 무악을 잘 보존하고 되살려 맥을 되찾아야 할 책임이 오히려 뒤따르고 있다는 주장이다. 우리 민족의 원형을 담고 있는 무굿이 시절 인연을 잘못 만나 한동안 밀렸지만, 이제는 우리 것을 바로 보고 찾으려는 안목이 생겨 운세가 달라지고 있다고 내다본다. 다섯 바탕 판소리 장단 외에 ‘선부리’ 가락까지 들어간 무악은 서양 음악에만 심취된 사람들도 녹여 낼 수 있다는 것이다. 박씨는 지금 재인 가문의 단명과 손(孫) 귀함을 크게 염려하고 있다. 300년 가까운 가문의 세습무가 자신의 대에 와 끊어지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9가지 종류(한 가지만 9시간씩 걸려 81시간 소요)의 씻김굿을 제대로 전수받기도 힘들 뿐더러 아들 환영(桓永)은 국립국악원 대금 주자로 있어 더욱 걱정이다. 서울 종로구 창신동의 ‘박병천 문화재전수소’에 제자들은 많다. 그러나 그의 징 솜씨뿐만 아니라 북, 장구, 무무(巫舞) 등을 배우려는 사람은 많지만, 정작 씻김굿 한 바탕을 제대로 전수받으려는 후학이 없다. 박병천 문화재전수소를 통해 많은 제자들을 길러 냈지만 정작 씻김굿 한 바탕을 제대로 배우려는 후학은 드물다. "저는 누구보다도 자랑스럽고 훌륭한 조상을 가졌습니다. 할아버지는 불던 대금에서 피가 떨어지며 운명하셨다고 들었어요. 어정판 시나위 속에 징채를 잡다가 여생을 마치고 싶습니다.” • 박병천 세습 무가 계보도 출처: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전통 예인 백사람, 초판 1995., 4쇄 2006., 이규원, 정범태)
-
여성친화도시 전국 96개 지정여성가족부(장관 정영애)는 1월 29일(금) 오후 2시 30분 올해 여성친화도시로 신규 지정된 14개 지자체 및 재지정 7개 지자체와 여성친화도시 조성 협약을 맺고, 지난해 우수도시로 선정된 3개 지자체에 정부포상*을 수여한다. ‘여성친화도시’란 지역정책과 발전과정에 여성과 남성이 균형 있게 참여하여 여성의 역량강화, 돌봄 및 안전이 구현되도록 정책을 운영하는 시군구를 말하며, 여성친화도시 지정이 시작된 2009년 이후 지자체의 참여가 해마다 늘어 2021년 여성친화도시는 모두 96개에 이른다. * 여성친화도시 : (’09)2개→ (’11)30개→ (’13)50개→ (’15)66개 →(’17)86개→(’18)87개 →(’19)92개 →(’20)96개 →(’21)96개이날 행사는 협약 서명식과 함께 자치단체별 여성친화도시 중점 사업이 소개되며, 코로나19 확산 방지를 위해 비대면으로 진행한다. 구 분 지자체 신규지정(14) 경기 이천시, 경기 파주시, 경기 하남시, 경남 고성군, 경남 진주시, 대전 중구, 서울 동대문구, 서울 동작구, 서울 종로구, 인천 남동구, 전남 화순군, 충북 괴산군, 충북 진천군, 충남 천안시 재지정(7) 경기 부천시, 경남 창원시, 경북 칠곡군, 대전 대덕구, 부산 사하구, 인천 연수구, 전남 강진군 여성친화도시 조성 우수 기관으로 전남 강진군이 대통령 표창을, 경기 용인시와 충북 청주시가 국무총리 표창을 수상한다. 전남 강진군은 지역 특화 여성일자리 사업인 ‘푸소(FU-SO) 체험’ 브랜드화로 여성농업인 경제소득 향상에 기여해 다른 여성친화도시의 본보기로 자리 잡았다는 평가를 받았다. * 푸소(FU-SO) 체험 : 강진형 농촌민박 및 영농체험, 1박2일, 2박3일, 일주일 살기 등 프로그램 운영 경기 용인시는 용인종합가족센터 운영 및 돌봄 공동체 "함께 쓰는 육아일기” 등의 사업을 통해 양성평등한 돌봄문화 확산의 성공적인 사례를 보여주었다. 충북 청주시는 지역의 대학(University), 청주시(City), 기업·단체(Company)가 참여하는 UCC네트워크를 운영하고, 가족친화 네트워크 운영과 마을 돌봄 활성화 지원 등 지역공동체의 참여를 활성화했다. 한편, 여성친화도시로 지정된 지자체는 행정조직 내와 각종 위원회의 여성 대표성을 높이고 시민참여단을 운영하는 등 양성평등한 추진기반을 구축한다. 이를 통해 지역 여성의 경제·사회활동 참여 확대, 안전한 마을 만들기, 가족친화 환경 조성 등 다양한 특화 사업을 추진한다. 신규 지정된 지자체는 경기 이천시·파주시·하남시, 경남 고성군·진주시, 대전 중구, 서울 동대문구·동작구·종로구, 인천 남동구, 전남 화순군, 충북 괴산군·진천군, 충남 천안시 등 14곳이며, 각 지자체가 수립한 ‘여성친화도시 조성 계획’에 따라 향후 5년간 여성친화도시로서 사업을 추진하게 된다. 경기 부천시, 경남 창원시, 경북 칠곡군, 대전 대덕구, 부산 사하구, 인천 연수구, 전남 강진군 등 7곳은 지난 사업의 성과와 앞으로의 계획에 대한 심사를 거쳐 여성친화도시로 재지정됐다. 재지정된 도시는 시민참여단과 민관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여성안심귀갓길을 조성(경기 부천시)하고, 부서(기관) 간 벽 허물기 TF등을 운영(부산 사하구)해 여성친화적 환경 조성을 추진하였으며, 경력단절여성 성공창업 지원(대전 대덕구) 등 새로운 추진계획을 수립하였다. 정영애 여성가족부장관은 "지역사회 구성원 모두가 평등하고 행복한 여성친화도시를 조성해, 생활 속에서 삶의 질이 높아지는 것을 체감할 수 있도록 지자체와 상호 협력해 나갈 것이다.”라며, "여성가족부는 여성친화도시가 계획하는 생활밀착형 양성평등 정책이 지역 주민의 삶에 뿌리내리고 더 많은 지자체로 확산될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밝혔다.
-
[보도자료] 서울예대 한국음악 전공 입학안내, 가장 한국적 음악으로 ‘21세기 음악’을 창조한다.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에 공감하는 미래 예술가라면! 주목할 예술대학, 눈여겨볼 전공이 있다. 바로 서울예술대학교(총장 이남식) 한국음악전공이다. 한국음악전공은 전통예술의 재현에 그치지 않고 다양한 현대적 예술장르와 끊임없이 교감하면서 새로운 융합형 예술가를 양성하고 있다. ‘민족 예술혼의 현재화, 세계화’라는 서울예대의 창학이념과도 맞닿아 있는 것. 가장 한국적이면서 가장 세계적인 예술을 온몸으로 체현할 수 있는 인재라면 한국음악전공을 주의 깊게 살펴보자 한국 전통음악+대중음악+서양 클래식+Jazz 결합 ‘21세기 음악’ 창조 21세기 세계 음악계의 동향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다. 실제 세계시장에 한국의 전통음악을 인식시키는 과업이 가능한, 또 필요한 시기로, 현재 문화예술계는 한국의 전통을 기반으로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실험적인 새로운 음악콘텐츠를 원한다. 그리고 이는 또 다른 문화예술장르와 융합해 실제 전통을 기반으로 한 독창적이며 예술적인 뉴 폼 아트를 구현,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고 있다. BTS의 <아리랑>이나 BTS 슈가의 <대취타> 등이 그렇다. 서울예대 한국음악전공은 한국 전통음악, 대중음악, 서양 클래식, Jazz를결합, ‘21세기 음악’을 창조한다는 이념을 바탕에 두고 있다. 한국적이면서도 현대적인 음악교육을 병행하고자 다양한 음악커리큘럼을 도입해 체계적으로 운영하며 우리 음악 세계화에 앞장서고 있다. 한국음악 전공은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음악에 대한 이해와 실기의 연마를 통해서 연주가, 작곡가 등의 창작예술인을 양성하고 있다. 기악·성악·타악·작곡·이론 등 각 전공별 전문성을 함양하고 전통문화를 발전적으로 계승하며 세계문화의 다양성을 수용할 수 있는 글로벌 예술인을 기르는 데 모든 역량을 기울이고 있다. 한국음악 전공은 기악전공과 작곡전공은 악기별로, 성악전공은 장르별로, 타악전공은 고법과 풍물연희의 각 악기별 세부전공을 둔다. 각 세부전공은 전공과정과 아울러 인접 학문에 대한 다층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으며, 순수음악은 물론 무용음악, 극음악, 배경음악, 실용음악의 음악장르는 물론 영상, 영화, 연출, 사진, 광고 등 다양한 장르와 융합함으로써 한국음악의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k-Traditional Music・k-Crossover Music 분야 조합 통한 융합예술 교육 전통음악의 세계화를 목표로 민족예술의 혼을 담은 전통음악의 명맥을 이어가는 k-Traditional Music과 21세기 세계 음악계의 동향을 반영해 다양한 음악과의 융합으로 새 음악장르를 창출해내는 k-Crossover Music 등 두 분야를 적절히 조합해 각자의 장점을 살린 1인 콘텐츠 제작 및 문화예술 공연을 제작, 국내 및 해외에서 활발하게 펼칠 수 있도록 다양한 융합예술 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한국음악전공 교육과정의 강점 한국 전통예술의 보편화를 기반으로 한 글로벌화를 통해 더욱 혁신적인 21세기 음악의 흐름에 앞장설 수 있으며, 세계 수준의 한국적이며 독창적인 음악콘텐츠를 제작, 실제 연주가 가능하다. 한국 전통악기와 서양 클래식악기의 융합은 더 나아가 인접 과목과의 교류를 확대해 여러 예술장르와 융합할 수 있는 음악예술가로의 자질을 향상시킨다.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며 현재 음악계의 동향을 파악해 다양한 예술과의 통섭을 이루며 창작할 수 있는 안목과 예술 감각, 실기능력을 동시에 향상시킨다. 2021 정시에서 총 10명 선발...정원내 일반전형 학생부 40, 실기 60 서울예대 한국음악전공은 2021학년도 정시에서 기악 5명, 타악 2명, 성악 2명, 작곡 1명 등 총 10명을 정원내 일반전형으로 선발한다. 아울러 전문대졸 11명, 농어촌 1명, 장애인 1명, 외국인 3명 등 총 16명을 정원외 특별전형으로 선발한다. 정원내 일반전형과 정원외 특별전형 농어촌 및 장애인은 학생부 40, 실기 60으로 성적을 반영하며, 정원외 특별전형 전문대졸 및 외국인은 실기 100%로 선발한다. 학생부 반영 교과는 국어, 영어이다. 서울예대 정시모집 원서접수는 1월 7일부터 1월 18일까지다. 실기고사는 1월 23일부터 24일 사이에 실시되며 자세한 일정은 1월 20일 오후 6시 서울예대 홈페이지에 공지된다. 홍보팀장 윤치호 (☎) 031-412-7187, 010-9173-0777
-
한글서예로 읽는 우리 음악사설19한산셤 달 발근 밤의 수루에 혼자 안자 큰 칼 녀픠 차고 기픈 시람 하난 적의 어듸서 일성호가난 남의 애를 긋나니 이충무공의 시를 쓰니 때는 경자세모라 취월당 주인 한얼 이 선 작품해설 한산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혼자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 하는 적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 작품감상 중과부적의 팽팽한 긴장 속에 홀로 잠 못 이루는 한산도의 밤. 망루를 비추는 밝은 달빛은 망연하고 속절없다. 백척간두의 나라 걱정에 잡은 칼자루에 힘을 주어 보지만, 멀리서 들려오는 한 가락 풀잎 피리소리에 장군의 애간장은 이내 끊어져 녹는다. 국한 고문을 고체와 예서로 이순신 장군의 노심초사하는 심정을 헤아려 엄정하게 썼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한얼과 醉月堂 등을 호로 쓰고 있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으로 있다.
-
박대헌의 고서이야기 19박대헌 고서점 호산방 주인, 완주 책박물관장 못 잊도록 생각이 나거든 이십오여 년 전 언론인 L씨로부터 시인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이 쓴 엽서와 편지 이십여 통을 얻었다. 이 편지는, 평북 철산(鐵山) 출신으로 중국 상해와 봉천 등지에서 독립운동을 하다가 193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주필·부사장을 지낸 유봉영(劉鳳榮, 1897-1985)에게 보낸 것들이다. 안서는 고향 정주(定州)에서, 철산과 경성, 중국 봉천으로 옮겨 다닌 친구 유봉영에게 편지와 엽서를 보냈는데, 1919년 편지에는 ‘안서용고(岸曙用稿)’라는 글자가 인쇄된 오백칠십육 자(24×24) 전용 원고지를 사용하고 있다.(*사진 42~43) 또 다른 이백사십 자(12×20) 원고지에 쓴 1922년 3월 23일 편지에는 소월(素月) 김정식(金廷湜, 1902-1934)의 「못잊어」를 연상케 하는 내용의 시가 적혀 있다.(*사진 44) 「못잊어」풍의 시가 들어 있는 안서의 편지는 모두 넉 장이다. 안서는 여기에 지금 무슨 생각을 하며 어떻게 살고 있다고 시시콜콜하게 적고 있다. 문제의 시는 안서가 친구에게 자신의 심각한 고민을 다음과 같이 토로하면서 소개됐다. 狂人? 泥醉? 戀愛熱中? 이 세 가지만이 現實世界의 모든 苦痛에서 自由롭게 하여 주는 듯합니다. 眞正한 告白을 하면 나는 그 동안 웃읍은 로맨쓰를 가젓읍니다. 그것은 아모것도 몰으는 十七歲의 所謂 生離別리와 놀앗읍니다. 한데 그것이 郭山一周에 갓득히 所聞이 낫읍니다. 하고 저 便에서는 共同生活을 請하여, 참말로 ᄯᅡᆨ하엿읍니다. 만은 그것도 이제는 지내간 ᄭᅮᆷ되고 말앗습니다. 온갖 힘을 다하야 다른 곳으로 살님 가도록 하엿읍니다. 罪를 지엇읍니다. 그러나 엇지합닛가. 사람의 맘이란 물과도 갓고 바람과도 갓튼 것이매. 그것을 엇지합니가. 日前에 이러한 말을—그말은 쓰지 안읍니다—듯고 卽興으로 詩하나 지여주엇읍니다. 안서가 열일곱 살짜리 애인을 떠나 보내며 즉흥으로 지은 시에는 제목이 없다. 그 전문은 다음과 같다. 못닛도록 사모차게 생각이 나거든, 야속하나마 그런데로 살으십시구려, 그려면 더러는 니저도 집니다. 못닛도록 살틀하게 그립어오거든 설으나마 세월만 가라고 합시구려, 그러면 더러는 니저도 집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럿케 말하겠지요, "사모차게 생각나는 못니즐 당신을 그대로 생각을 안는다고 니저바리며, 살틀하게 그립어오는 못니즐 당신을 그런대로 세월을 보낸다고 닛겠읍닛가?” 소월은 이와 비슷한 시를 1923년 5월에 발간된 『개벽』 35호에 처음 발표했다. 발표 시기는 안서의 편지보다 두 달가량 늦다. 『개벽』에 발표된 시는 「사욕절(思慾絶) I, 못닛도록 생각이 나겟지요」라는 제목으로, 『진달래ᄭᅩᆺ』에 수록되기 전의 작품이다.(발표 당시 제목) 못닛도록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歲月만 가랍시구려. 그러면 더러는 닛치겟지요, 아수운대로 그러케 살읍시구려. 그러나 당신이 니르겟지요, "그립어 살틀이도 못닛는 당신을 오래다고 생각인들 떠지오릿가?” 그리고 이는 다시 1925년 소월의 첫 시집 『진달래꽃』에 「못니저」(발표 당시 제목)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었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한세상 지내시구려, 사노라면 니칠날 잇스리다. 못니저 생각이 나겟지요, 그런대로 세월만 가라시구려, 못니저도 더러는 니치오리다. 그러나 또한긋 이럿치요, "그립어 살틀히 못닛는데, 어찌면 생각이 떠지나요?” 안서의 편지에 실린 시와 『개벽』에 발표한 소월의 시 「사욕절 I, 못잊도록 생각이 나겠지요」 그리고 『진달래꽃』에 수록한 「못잊어」는 시어와 리듬에서 차이가 날 뿐, 같은 시가 개작을 통해 변모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리만큼 내용과 분위기가 비슷하다. 널리 알려진 대로 안서는 소월에게 특별한 스승이다. 안서는 평북 정주의 오산학교에서 소월의 시재(詩才)를 발굴해 키웠으며, 그를 문단에 데뷔시키고, 소월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시 스승이 되어 주었다. 안서는 소월이 쓴 대부분의 시를 미리 받아 첨삭(添削)·정서(正書)한 다음 잡지사에 넘겼다. 이런 작업은 소월 사후에까지 이어져, 소월의 유고를 손질해 각종 잡지에 발표하고, 『소월시초』(1939), 『소월민요집』(1948)을 펴내기도 했다. 안서가 편지에 쓴 문제의 시는 소월이 『개벽』에 「사욕절 I, 못잊도록 생각이 나겠지요」를 발표했을 때보다 두 달가량 앞섰고 시를 쓴 동기가 분명한 만큼 원작자가 안서일 가능성이 크다. 이 같은 점은 안서의 또 다른 편지에 실린 시 「사향(思鄕)」을 통해서도 확인된다. 1919년 5월 15일 경성에서 쓴 이 시는, 안서의 첫 시집이자 한국 최초의 근대시집인 『해파리의 노래』(1923)에 같은 제목으로 조금 변형되어 실려 있으며, 『진달래꽃』에 수록된 소월의 시 「제비」와 비슷하다. 「사향」의 첫 행 "공중(空中)에 나는 제비의 몸으로도”와 「제비」의 첫 행 "하눌로 나라다니는 제비의 몸으로도”는 거의 똑같다.(*사진 45) 소월의 대표작인 「못잊어」와 「제비」의 원형을 밝힐 수 있었다는 점 외에도, 안서의 편지들은 근대문학사와 관련해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판소리(Pansori epic chant) 의 역사 ( Video :English subtitles)판소리의 발생 판소리의 발생에 관해서는 아직 뚜렷한 정설이 없다. 다만 무가기원설, 육자백이토리설, 판놀음기원설, 광대소리기원설 등 여러 가지 학설들이 쏟아져 나와있다.어진 화랑제도에서 판소리의 뿌리를 찾는 것이 타당하다고 한다. 화랑제도가 과거제도로 바뀌면서 예능에 능통한 일부 화랑들은 남사당을 조직하여 유랑하기도 하였고, ‘광대’란 말 역시 화랑의 방언이기에, 판소리의 근원을 신라의 화랑에 두는 게 옳다는 주장이다. 한편, 전라도 무속을 배경으로 한 무가에서 판소리가 비롯되었다는 설도 있다.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문화적 풍신이 전라도 무속과 유사하고, 초기 소리 광대들의 출신이 거의 무당이었으며, 무당들 중에는 전라도 지방출신이 많았다는 점 등에서 판소리의 기원을 전라도 지방으로 유추하는 것이다. 판소리는 본래, 18세기 일반 서민들의 호응이 절대적으로 뒷받침 되어 독립하고 발전한 예술 장르였다. 그러나 이후, 점차 양반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으면서 양반들의 기호에 맞는 내용으로 변화하였다. 양반들은 사설의 윤색과 개작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는데, 19세기 후반, 고창의 신재효(1812∼1884)는 구전(口傳)으로 전수되던 판소리 사설 가운데 여섯 바탕을 직접 문자로 정리하는 업적을 세웠다. 또 중인으로서 아전 출신이었던 그는, 풍부한 재력을 바탕으로 많은 판소리 제자를 배출하고 후원하기도 했다. 판소리를 생성시킨 주도 세력 또한 한강 이남의 시나위권,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 활동하던 무격(巫覡)이었던 것으로 보이며, 오늘날에도 시나위권의 단골(丹骨)들이 부르는 서사무가(敍事巫歌)의 연행 형태, 장단, 음조 등에서 판소리와 유사한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점에서도, 이 주장은 타당성을 갖는다. 17세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이라는 혼돈과 격변의 시간을 거쳐 급격히 확대된 평민층의 현실적인 불만과 욕구, 그리고 무엇보다도 최하층의 천민으로서 신분 변화를 꿈꾸던 무격(巫覡)들의 이상이 결합하여, 판소리라는 새로운 민속 예술이 탄생했다. 전승 정보 지금까지 발견된 판소리 사설 자료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조선 영조 30년(1754년), 만화(晩華) 유진한(柳振漢)이 지은 <만화집(晩華集)> 의 <춘향가> 한시(漢詩) 사설 200구(句)이다. 또 문헌 자료 <관우희(觀優戱)>에 의하면, 늦어도 정·순조 때에 12종의 판소리 바탕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과거에 급제하면 광대와 재인(才人)들을 불러 3일유가(三日遊街)하고 홍패고사(紅牌告祀)를 지내던 풍습이 있었는데, 정조 때의 가난한 선비였던 송만재(宋晩載)는 잔치를 베풀 수 없었다. 그래서 <관우희(觀優戱)> 라는 글로 이를 대신하여,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판소리 12 마당에 관한 최초의 문헌으로 주목받고 있다. 관우희(觀優戱)에는 <심청가>, <춘향가>, <흥보가>,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배비장타령>, <장끼타령>, <옹고집>, <왈자타령>(↔무숙이타령), <강릉매화전>, <가짜신선타령>(→숙영낭자전) 등 12바탕 판소리의 내용이 소개되어 있어, 당대에 성행했던 판소리의 규모와 내용 등을 익히 짐작하게 한다. 예능보유자 숙종 말 이후 영,정조 때에는 우춘대, 하은담, 최선달과 같은 명창이 있었다. 또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 송흥록, 모흥갑, 염계달, 고수관, 김제철, 주덕기, 황해천, 박유전, 송광록 등의 명창이 있었는데, 이 중 여덟을 골라 '전기 8명창(前期 八名唱)'이라 한다. 이때는 특히 판소리의 음악적 수준이 크게 향상되어, 권삼득의 설렁제, 모흥갑의 강산제(→東강산제), 염계달·고수관의 경드름과 추천목, 김제철·신만엽의 석화제 등 독특한 음악적 더늠이 나온 시기다. 그 밖에 동편제의 시조(始祖)인 남원 운봉의 송흥록, 중고제의 시조(始祖)인 경기도 여주 염계달의 활약도 두드러지며, 순창에서 태어나 보성 강산에서 살았던 서편제의 시조(始祖) 박유전 역시 판소리의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며, 가왕(歌王)으로 불리던 송흥록은 진양 장단을 완성한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철종 무렵에는 박만순, 이날치, 송우룡, 김세종, 장자백, 정창업, 정춘풍, 김찬업, 그리고 김정근, 한송학 등이 활약하였는데, 그 중 여덟을 골라 '후기 팔명창(後期 八名唱)'이라 한다. 전기 팔명창 시대가 판소리를 제각기 다른 스타일의 동편, 서편, 중고제 등의 유파로 분화시켰던 시기였다면, 후기 팔명창 시대는 이러한 유파적 특성과 음악적 특색이 정착되고 더욱 심화된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후기 팔명창 중에서 박만순·송우룡·장자백·김찬업은 동편제를 이었고, 이날치·정창업은 서편제를, 김정근·한송학은 중고제를 각각 계승하여 널리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또 이후 고종 후기에서 일제하 1930년대까지는 '오명창 시대(五名唱 時代)'라 일컬어진다. 이 때 활약했던 김창환, 송만갑, 이동백, 김창룡, 정정렬, 박기홍, 유성준, 김채만, 전도성 등의 명창 중 다섯을 골라 '오명창(五名唱)'이라 부르곤 하는데, 대개 송만갑, 이동백, 김창환, 김창룡, 정정렬을 꼽는 게 일반적이다. 판소리 명창은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조선시대 영조 말기 정조 초기에 하한담·최선달 등이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황해천·송흥록·송광록·모흥갑·염계달·김제철·신만엽·방만춘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또 고종 초까지는 박유전·박만순·이날치·김세종·송우룡·정창업·정춘풍·장자백 등의 명창이 활동했다. 20세기 초까지는 박기홍·전도성·김창환·이동백·김창룡·김채만·정정렬 등이 활동했다. 판소리는 점차 무대화되다가 여성국극단에 의해 여성창자들이 등장하기도 했다.오늘날 판소리 예능보유자로는 춘향가에 김여란·김연수·김소희(본명 김순옥(金順玉)), 심청가에 정권진, 흥보가에 박녹주·강도근, 수궁가에 정광수(본명 정용훈(丁榕薰))·박초월, 적벽가에 박동진·박봉술·한승호(본명 한갑주(韓甲珠))가 인정되었으며 이후 춘향가에 오정숙, 심청가에 성창순·조상현이 인정되었다. 또한 춘향가에 성우향(본명 판례), 흥보가에 박송희(본명 정자), 적벽가에 송순섭이 새로 인정되었다.(2006년 상황) 현대로 넘어온 1940년 이후에는 김정문, 정응민, 공창식, 장판개, 조몽실, 임방울, 김연수, 박동실, 정광수, 성원목 등의 남자 명창과 이화중선, 박녹주, 김여란, 박초월, 김소희 등의 여류 명창이 나타나, 각기 판소리의 일가를 이루며 널리 활약하고 있다.
-
외국 대학생, 한국 공공외교에 대한 다양한 시각과 의견 제시외교부는 국내외 외국국적 대학(원)생을 대상으로 개최한 ‘2020 대한민국 공공외교 소논문 공모전’의 수상작 20편을 1월 11일 논문집으로 발간했다고 전했다. 이번 공모전에서는 미국 시카고대학교 정치학 박사과정에 재학중인 제나 깁슨(Jenna Gibson)의 '유튜브 외교 : 2018년 평양 콘서트에 대한 유튜브 댓글 감정분석'이 대상을 수상했다. 이 소논문은 2018년 남북정상회담의 사전 행사로 개최된 평양 콘서트의 유튜브 댓글 분석을 통해 대중문화를 접목시킨 공공외교 행사가 서로 다른 문화적 배경을 지닌 세계인들에게 어떤 반응을 이끌어내는지를 분석하고,향후 유사한 문화 공공외교 사업을 시행함에 있어 ▲해당 분야에서 글로벌 영향력을 지닌 전문가의 참여, ▲정치적 선전보다는 관중과의 자연스러운 소통, ▲문화적 차이를 좁히려는 노력 등이 중요함을 강조하고 있다. 한편, 최우수상에는 호주 뉴사우스웨일스대학교 박사과정 중인 알렉산더 하인드(Alexander Hynd)의 '바다로 세계로 : 공공외교와 대한민국 해군의 역할'와 네덜란드 라이덴대학교에 재학중인 플루제 폰테인(Floortje Fontein)의 '코로나19 상황 속 한국의 보건외교'가 선정됐다. 소논문 '바다로 세계로'는 ▲인도적 지원 및 재난대응, ▲해적 소탕, ▲해군 협력 등 최근 동북아 지역 국가들의 해군 활동이 각 국의 국가 이미지와 소프트파워에 미치는 영향을 분석하고, 향후 공공외교 측면에서 한국 해군이 의료지원 및 환경보존 분야에서의 역할과 기여를 강화해 나갈 것을 제안하고 있다. 함께 최우수상을 수상한 '코로나19 상황 속 한국의 보건외교'는 ▲한국의 모범적인 코로나19 대응 현황 및 ▲경험공유 노력, ▲방역물자 지원 등의 사례가 한국의 소프트파워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하고, 미중 경쟁구도로 국제협력이 제한된 상황 속에서 한국이 앞으로도 보건안보를 포함한 다양한 분야에서 국제협력 증진에 기여하는 방향으로 공공외교를 전개해 나갈 것을 제안한다.이번 공모전에서는 상기 외 한국의 과학기술, 공적개발원조(ODA), 환경정책, 민주주의 등을 공공외교의 시각에서 조망하고 한국 공공외교의 나아갈 방향을 제시한 소논문 17편이 수상작으로 선정됐다.‘2020 대한민국 공공외교 소논문 공모전’은 우리 공공외교에 대한 외국인들의 다양하고 참신한 시각과 의견을 모아 국내외로 공유하고, 우리 공공외교의 국제적인 인지도를 높이는 한편, 관련 연구를 지속적으로 활성화하기 위한 토대를 강화한 것으로 평가된다.
-
[음반] 정창관의 신보유람 19정창관/한국고음반연구회 부회장 산조는 우리의 대표적인 전통 기악 독주곡이다. 가야금에서 시작한 산조는 대금, 거문고, 아쟁, 피리, 해금, 퉁소, 태평소 등 많은 국악기의 연주에 수용되어 현재 매우 중요한 레퍼토리로 자리 잡고 있다. 음역이 좁은 피리는 1960년대 지영희와 이충선 명인에 의해 구성되었으며, 무대 독주곡으로서 맨 처음 선 보인 것은 1970년대 정재국 명인에 의해 연주된 산조이다. 본 음반에는 지영희류, 이충선류, 정재국류 피리산조(긴산조와 짧은산조)가 수록되어 있다. 1960년대 1970년대의 초기 피리산조를 짚어 보고 21세기 피리산조의 나아갈 방향에 관하여 고찰해 보고자 출반하였다고 한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지영희류 피리산조는 명인이 남긴 산조 악보를 정리한 박승률의 악보를 분석하고 재구성한 것이다. 진양-중모리-도살풀이-자진모리의 이충선류 피리산조는 국악사 양성소에서 발행한 등사본 악보, 김기수가 채보한 악보, 서한범에 의해 재구성된 악보 3종이 존재하고 있는데 그 선율이 조금 차이가 있다. 3종의 악보를 분석한 후 재구성하여 연주한 것이다. 진양-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의 정재국류 피리산조는 명인이 고등학교 때 배운 스승인 이충선의 가락과 전라도에서 피리 잘하기로 유명한 오진석의 가락을 바탕으로 완성되어 1972년 최초의 피리독주회에서 발표되었다. 긴산조와 짧은산조가 수록되어 있으며 정악의 영향을 받아 꿋꿋한 힘과 웅장함을 지니고 있다. 장고는 국립국악원 단원인 양재춘 고수가 잡았다. 진윤경 연주자는 한국예술종합학교 전통예술원과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국악과 석사, 한국학중앙연구원 음악학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을 거쳐 현재는 부산대학교 한국음악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이 음반은 2010년 J_ONE <Memento Mori>에서 이어지는 연주자의 5번째 음반이다. 연주와 이론에 열정적인 연주자로 연주력만으로 이런 음반이 나올 수가 없다. 무척 크고 고운 피리소리를 만끽할 수 있다. 박범훈류 피리산조도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 * 관련 음반 : http://www.gugakcd.kr/music_detail.asp?cd_num=GGC-20030&page=1
-
[광주MBC] (다큐)씻김굿을 세계에 알린 사람, 진도 씻김굿 명인 박병천예향의 고장, 진도 민속예술의 고장, 진도 씻김굿을 세계에 알린 사람, 진도씻김굿 명인 박병천
-
진도북춤 #박병천 #강은영(진도북춤. 행사명:86문화예술축전 전통명무공연.일시:19860920. 장소:국립극장 대극장. 출연:박병천. 해설:국수호) #진도북춤#박병천 (진도북춤 (박병천류 진도북춤), 행사명: 팔일 八佾. 장소 : 한국문화의집. 일시 : 2019.04.30.화 오후8시, 주최 : 한국문화재재단, 후원 : 문화재청) 진도북춤 진도북춤은 전남 진도 지역에서 양손에 채를 쥐고 추는 춤으로, ‘진도북놀이’라고도 일컫는다. 북은 몸에 밀착시켜 어깨끈을 메고, 허리끈으로 조여 묶는다. 양손에 채를 쥐고 양쪽 모두 연주한다는 뜻에서 양북이라고도 하고, 채를 쌍으로 들고 춘다고 해서 쌍북이라고도 한다. 진도북은 통나무로 된 오동나무나 미루나무의 중앙 부분을 파서 여기에 소가죽, 말가죽 등을 대고 소가 죽 줄을 X자로 매서 가죽을 고정시킨다. 1980~1990년대의 양태옥이나 박관용의 경우, 소리북을 메고 북춤을 추기도 했다. 북춤을 출 때 고깔을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지만 이후 북춤이 변화를 겪으면서, 특히 박병천 등에 의해 상투머리를 하기도 했다. 조선 말기와 일제강점기에는 김행원金行元, 1878~1935(진도 출신, 김득수의 아버지)이 북춤이 뛰어나 호남 일대에서 명성을 크게 떨쳤다고 전해진다. 이외에 김기수金基洙, 김성남金成南, 임장수, 박태주 등이 명성을 날렸다. 지산면 소포리의 박태주는 북을 잘 쳤다는 의미에서 흔히 ‘북태주’라고 불렸다. 진도에서 최초로 고법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던 김득수金得洙도 아버지 김행원의 예술적 기질을 타고 태어나 명인의 반열에 올라섰다. 또한 북을 전문으로 다루는 사람들이 점차 생겨났는데, 양태옥梁太玉, 1919~2003(군내면 정자리 출신), 장성천張成天, 1923~1993(임회면 석교리 출신), 박관용朴寬用(진도읍 출신), 곽덕환郭德煥(임회면 상만리 출신), 박병천朴秉千(지산면 인지리 출신) 등이 선조들의 기예를 계승했다. 양태옥은 "북을 치려면 양태옥 만큼 쳐라.”라는 말로 유명하며, 곽덕환은 "다듬이질 사위가 일품이다.”라는 말로 유명하다. 박관용 또한 춤사위가 유명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뒤이어 이름을 날린 북고수들은 대개 본명보다 조도 꼴기미의 최우물, 포산의 돌무채, 해남 옥동의 꼭지바 등의 속명으로 알려졌다. 삼당리의 김길선은 장성천의 뒤를 이어 북놀이 문화재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고, 소포리의 김내식은 일명 ‘북태주’의 북춤을 계승한 인물로 명성이 자자하다. 1983년 정병호鄭炳皓가 진도 의신면 청룡리에서 진도북춤을 보고 적극 홍보하면서 진도북춤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1984년 2월 16일에는 진도북놀이보존회가 창립되었다. 1987년 전라남도 지정무형문화재 제18호로 지정되면서 전형적인 진도북춤의 양식이 고정되기 시작했다. 또한 장성천, 양태옥, 박관용이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면서 유파를 형성하기에 이른다. 양태옥은 14세 때부터 김행원에게 북춤을 이어받았고, 박관용과 장성천은 소포리의 박태주에게서 북춤을 전승받았다고 한다. 박관용은 유년시절을 소포리에서 보냈으므로 직간접적으로 박태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초창기 진도북놀이보존회는 장성천을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1984년 10월 25일 국립중앙극장에 초청되어 공연을 하는 등 전국적인 공연행사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1985년 제7회 명무전에는 진도북춤이라는 이름으로 박관용과 한순자韓順子가 출연하였다. 1985년에 양태옥이 전국 국악기악 부문 경연대회인 제3회 신라문화제에서 수상하였다. 이어 1987년 9월에 진도북놀이가 전라남도 지정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예능보유자로는 장성천·양태옥·박관용이 지정되었고, 만가 예능보유자로는 설재복·김항규가 선정되었다. 박관용의 북춤은 박태주의 대를 이었다고 알려져있다. 이후 지산면 인지리의 조태홍의 춤가락을 곁들였다고 한다. 박관용의 북춤은 느린 살풀이, 중모리, 당악, 휘몰이까지 정연한 가락으로 구성되어 있다. 양태옥류 북춤은 신청농악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비무계로서 신청에 가입했던 경력이 있고, 소방대농악을 이끌며 북춤을 계승해 왔기 때문이다. 이는 진도의 농악을 ‘신청농악’이라고 한 데서도 드러난다. 신청농악에 소고놀이, 방고(반고)놀이, 북놀이, 장고놀이, 상쇠의 부포놀이 등의 개인놀음이 있었던 것으로 보아, 진도북춤의 연마에도 심혈을 기울였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양태옥류의 북춤은 흔히 걸북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양태옥류 걸북춤의은 2장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장 1절은 머리춤, 2절은 살신무殺神舞인 살풀이가락춤으로 되어 있다. 2장 1절은 오신무娛神舞인 삼채가락춤, 2절은 풍악무風樂舞인 당악가락춤, 오방진가락춤, 벙어리삼채가락춤, 영산다드래기가락춤, 3절은 송신무送神舞인 이채가락춤, 휘모리가락춤, 4절은 뒷풀이춤인 굿거리가락춤으로 되어 있다. 장성천은 임회면 십일시에 전수관을 열어 북춤뿐만 아니라 판소리, 가야금 등을 후학들에게 가르치기도 하였다. 특히 진도북놀이보존회를 이끌면서 조직화에 힘썼다. 타계 후에는 1997년 6월 24일자로 김길선이 예능보유자로 승계되었다. 진도북춤 예인들은 각종 대회에서 입상하여 기예능을 인정받았고, 발표회를 통해 진도북춤을 무대화하였으며, 후학을 양성하는 데도 심혈을 기울였다. 박관용은 1987년 진도 의신면 진설리에 북춤연구원을 열었다. 또한 박관용은 1984년 8월 호남농악경연대회에 출전하여 최우수상을 받았다. 1984년 광주에서 열린 전국예술제 무용부문에서 장려상을 받았고, 서울예술제에서 북춤을 발표했으며, 국립중앙극장의 명무전에 출연하였다. 1985년 제14회 남도문화제 북춤 개인 연기상을 수상하였으며, 국립중앙극장에서 북춤 발표회도 가졌다. 1987년 5월 전주대사습에서 북춤으로 입선을 하였다. 양태옥은 1988년 3월 1일, 광주에 전수학원을 차렸다. 이곳에서는 진도북춤뿐만 아니라 타악, 법고, 관악, 현악 등의 다양한 악기를 학습시켰는데, 특히 사물놀이, 북가락, 대금, 태평소, 가야금, 아쟁 등에 주력하였다. 박병천은 양태옥에게 사사했다고 한다. 진도북춤은 다양한 가락과 춤사위를 곁들인 놀이이자 춤으로 연행되어 왔다. 박병천은 북춤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서울의 집(코리아하우스) 악장 시절에 진도의 기교적 춤사위를 곁들인 진도북춤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고 인정받았다. 박병천은 서울의 집 때부터 안무하고 재창조한 북춤을 한국예술종합학교와 대불대학교에서 가르친 바 있다. 특징 및 의의 진도북춤의 특징은 양손을 사용하면서 발생하는 다듬이질가락과 엇박가락의 활용에 있다. 또 진도씻김굿의 지전살풀이춤에서 보이는 바람막이 춤사위와 외바람막이 춤사위, 가세치기 춤사위 등이 활용된다. 양태옥류 북춤은 흔히 걸북춤이라는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어깨에 메고 친다는 뜻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양태옥 북춤의 특징은 원박을 치면서 오른쪽 팔과 다리를 올렸다가 내리치는 춤사위에 있다. 박관용류의 북춤은 여성적인 성격이 강하다. 그의 진도북춤은 박태주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후 지산면 인지리 조태흥의 춤가락이 곁들여졌다고 한다. 특히 박관용 북춤의 가락은 더더구 가락이라고 부르기도 하는데, 이 가락을 일반적으로 많이 사용한다. 첫 박은 길고 강하게 두드리지만 다음 가락부터는 유연하게 넘기는 것이 보통이다. 손목을 먼저 들어 올려 누르듯 북을 두드려 북의 울림을 부드럽게 조절한다. 양태옥류 북춤에 비해 다듬이질가락을 많이 사용한다. 장성천의 북춤은 굿거리, 자진모리, 당악, 구정놀음 등으로 구성된다. 여기서 구정놀음은 버꾸놀음으로 대치될 수도 있다. 장성천류의 북춤은 곽덕환을 중심으로 전승된 임회면의 진도북춤이라고 할 수 있다. 박병천류의 북춤이 모리가락에서 왼손의 손등을 저면으로 보이면서 사뿐히 넘기는 것에 비해, 장성천류의 북춤은 왼손 바닥이 전면을 보일 수 있게 뒤집어서 넘기는 가락을 특징으로 한다. 이때 허리를 곧게 세우거나 아예 뒤로 젖히기도 한다. 특히 첫 박을 강하게 치는 경우와 첫 박부터 아예 엇박으로 치는 경우가 혼용된다. 다른 유파들이 엇박을 주로 2박자 이후의 박에서 운용하는 것과는 사뭇 대조적이다. 참고문헌 걸북춤(허순선, 도서출판 금광, 1997), 구술진도음악사(이윤선, 이소북, 2003), 민속놀이 진도신청농악(양태옥, 운제전통기악연수원, 1993),장성천·김길선의 진도북놀이(진도북놀이 연구회, 동심원, 2012), 진도 마당놀이에 관한 연구(반혜성, 서울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진도군의 발전방향의 모색과 전망(김혜정, 전남대학교 사회교육원, 1999), 진도북춤에 관한 고찰(김은희, 조선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4), 진도의 농악과 북놀이(국립남도국악원 총서11, 국립남도국악원, 2009). 출처:박혜영(朴惠英). 진도북춤 (한국민속예술사전 : 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