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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22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중 ‘한류와 4차 산업혁명(2)’는 지난 회에 이어 문화와 문명사적 테두리 안에서 정치, 경제 등을 들여다보며 한류의 지속가능성을 모색해 보고자 한다. BBC는 "1990년대 한국의 자유화 분위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큰 투자를 만들어냈고, 아시아권에선 미국보다 한국이 만든 프로그램에 더 공감했으며, 중국 프로그램보다 정서적으로도 구미에 맞았다”라고 분석했다. 한국 드라마 팬인 영국 작가 테일러–디오르 럼블은 "세련되고 화려한 연출, 환상적인 내용으로 현실도피에 알맞았다.”라고 하면서 "특히 부채 ‧ 실업 등 경제적인 문제들은 팬데믹을 극복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라고 보도했다. 이러한 세계인들의 인식 변화는 한국의 발전된 정치와 경제적 상황의 결과에 의한 것이라고 볼 때, 현재의 한류가 지속적으로 가능하도록 하는 정치와 경제적 발전의 모색은 더 적극적으로 필요한 사항으로 여겨진다. 그 발전적 모색은 문명사적으로 ‘산업혁명’을 가져다준 ‘새로운 길’의 모색에서 그 답을 찾고자 하는 것이다. ‘산업혁명’은 일반적인 개념으로 사용되어오다가 영국의 역사학자 아널드 토인비에 의해 학술용어로 정착되었다. 토인비는 기술적 혁신으로 인해 나타난 사회 ‧ 경제적인 큰 변화를 산업혁명이라고 명명했다. 산업혁명의 주요 내용으로는 급격한 인구의 증가, 농촌 인구의 상대적인 감소, 기계의 발명과 공장에 의한 수공업의 대체, 부의 축적과 자본주의 출현, 공장 시스템 하에서의 노동자의 지위 약화 등을 언급했다.(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태유 글 참조) 산업혁명을 1차와 2차로 구분한 것은 생물학자 패트릭 게데스(Patrick Gedds), 경제학자 데이비드 란데스(David Landes) 등에 의해서이다. 일반적으로 1차 산업혁명은 1780년 경 영국에서 일어난 석탄, 야금, 직물 혁명, 그리고 2차 산업혁명은 1870년 경 독일과 미국에서 시작된 전기, 화학, 강철 혁명으로 정의한다. 또한, 란데스는 2차 산업혁명을 화학과 전기과학의 극적인 발전 및 내연기관과 같은 에너지원에 기반한 새로운 산업의 등장으로 정의한다. 3차 산업혁명과 관련된 논의는 사회학자 다니엘 벨(Daniel Bell)의 저서 『탈 산업사회의 도래』에서 시작되었다. 벨은 사회발전 단계를 산업화 이전 사회와 산업사회, 그리고 산업화 이후의 사회로 구분하고, 산업화 이후 세계를 정보와 지식이 주요 자산인 사회라고 규정한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보화 사회이다. 4차 산업혁명은 경제학자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 다보스포럼 회장이 주창한 개념으로서 인공지능(AI), 로봇기술, 사물인터넷(IoT), 바이오 등의 초지능(super intelligence) 기술이 인간과 사물 간에 초연결(hyper connectivity) 소통체계를 구축하여 생산과정이 최적화되는 산업혁신을 의미한다. 이러한 기술적 혁신들이 물리적, 디지털, 생물학적 공간에서 서로 상호작용을 하며, 이것이 기존의 산업혁명과 구별되는 본질적인 차이점이라고 강조한다. 토마스 무어(Thmos Moor)는 하루 6시간 노동으로 삶을 풍족하게 영위할 수 있는 세상을 유토피아(Utopia)라고 주장했다. 그렇다면 오늘날 현대 산업사회는 이미 유토피아에 매우 근접한 사회라고 볼 수도 있다. AI와 로봇이 본격적으로 생산현장에 투입되는 4차 산업혁명 시대에는 하루 3시간 남짓 또는 주 3일 노동으로 모든 근로자가 풍족하게 삶을 영위한다고 할 수 있는, 그야말로 현대인이 꿈꾸는 유토피아가 성큼 다가오고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유토피아 세상이 도래하여 많은 여가 시간이 생기면 많은 사람들은 결국, 여행, 체육, 취미, 오락 등의 활동으로 여가시간을 보내게 될 것이다. 이런 활동의 상당 부분으로 인해 화물의 적채가 이루어지고 여객의 폭발적 증가가 이루어질 것이다. 최근 베니스, 암스테르담 등의 유명 관광지에서는 관광객을 제한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이러한 현상은 관광객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주민들의 삶에 지장을 초래하는 바람에 취해지는 조치라고 한다. 이러한 화물과 여객의 폭발적 증가 추세는 기존의 길, 즉 동북아에서 믈라카 해협과 수에즈 운하, 지브랄타 해협을 지나 유럽으로 가는 기존 항로의 수용 능력을 이미 넘어서고 있다. 그런 이유로 말레이반도를 관통하는 새 운하가 계획되고 있고, 수에즈 운하가 확장되었지만 여전히 병목 현상이 계속되고 있고, 또 니카라과에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새로운 운하도 추진되고 있다. 이처럼 기존의 항로는 4차 산업혁명 시대의 화물과 여객을 더는 수용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런데 4차 산업혁명의 새로운 문명에 의해서, 전 세계의 모든 생산자가 전 세계의 모든 소비자를 대상으로 확장되고 있고, 고도화된 새로운 시대의 삶에 필요한 모든 맞춤화된 상품을 서로 사고파는 세상이 되고 있다. 그리고 늘어나는 여가시간에 지구상의 모든 곳을 여행하는 세상이 되어 가고 있고, 때문에 기존의 길은 모두 차고 넘쳐서 새로운 길을 모색해야 할 처지가 되었다. 그 ‘새로운 길’은 때마침, 온난화 현상으로 녹아가고 있는 북극에 있는 길로서 ‘북극항로’인 것이다. 지금 4차 산업혁명의 세상이 ‘북극항로’라는 새로운 길을 향해 돌진하고 있다. 과거에 새로운 시대를 열었던 새로운 길이 기존의 길을 대체하는 길이었다면, 북극항로는 기존의 길이 차고 넘쳐서 새로 열릴 수밖에 없는 길이다. 과거의 새로운 길은 인류 문명이 기존의 길을 버리고 선택한 새로운 길이었다면, 지금 열리기 시작하는 북극항로는 기존의 길에 더하여 인류 문명이 선택의 여지도 없이 떠밀려서 갈 수 밖에 없는 단 하나의 새 길인 것이다. 그래서 어차피 가야만 할 길이라면 우리가 먼저 가서 선점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4차 산업혁명 시대는 2차 산업혁명시대처럼 승자독식(勝者獨食)이 아닌 선승독식(先勝獨食)의 시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터는 먼저 가면 승리자이고 늦게 가면 패배자이다. 이것이야말로 속도가 점점 빨라지게 되는 지식 기반사회의 가장 기본적인 속성이다. 지식기반 사회라고 할 수 있는 4차 산업혁명의 시대를 성공시키기 위한 준비로서 ‘새로운 길’을 선점하는 것이다. 그래서 대한민국이 선도해야 할 4차 산업혁명은 곧 북극항로의 선점이고 북극항로의 선점은 그 주변국과 우리나라와의 관계를 발상의 전환을 통하여 획기적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최상의 방책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류와 4차 산업혁명’의 내용은 『한국의 선택-김태유‧이대식 엮음,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발행』 중 김태유의 글을 인용 및 참조하였습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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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21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는 문화와 문명사적 테두리 안에서 정치, 경제, 사회, 그리고 문화를 들여다보며, 한류 문화가 미래를 향해 지속적으로 발전하기를 염원하는데 그 의미를 담고 있다. 최근 ‘한류’는 K-POP의 BTS는 물론, 오징어 게임 ‧ 기생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우리도 놀랄 정도로 세계인들이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갖게 하고 있다. 영국의 BBC 방송에서는 "‘오징어 게임’의 인기는 갑자기 나타난 현상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최근 몇 년간 서구 전역에 만들어진 ‘한국 쓰나미’의 가장 최근 물결”이라고 보도했다. BBC는 한국 등 아시아의 정치 경제적 흐름에 따른 사회 분위기의 변화라고 짚었다. BBC는 "1990년대 한국의 자유화 분위기는 엔터테인먼트 산업에 큰 투자를 만들어냈고, 일본이 경기 침체로 고전하는 동안 중국이 부상했다”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동시에 한국 문화도 주목받기 시작했는데, 아시아권에선 미국보다 한국이 만든 프로그램이 더 공감을 이끌어냈고, 중국 프로그램보다 정서적으로도 구미에 맞았다”라고 분석했다. 한국 드라마 팬인 영국 작가 테일러–디오르 럼블은 "세련되고 화려한 연출, 환상적인 내용으로 현실도피에 알맞았다.”라고 하면서 "특히 부채 ‧ 실업 등 경제적인 문제들은 팬데믹을 극복하기가 상대적으로 어려운 사람들에게 큰 반향을 일으켰다”라고 봤다.(국민일보 기사 참조) 영국 일간지 가디언이 보도하기를, 전 세계 5억 명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는 외국어 학습 애플리케이션 ‘듀오 링고’에서 ‘오징어 게임’ 방영 직후 한국어 학습자가 영국에서 2주 만에 76%, 미국에서는 40%나 늘었다고 했다. 현재 전 세계 듀오 링고 한국어 학습자는 80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한국어를 제1외국어로 택하는 외국의 대학들도 늘어나고 있다. 듀오링고 측은 이렇게 치솟는 한국어 학습 수요의 동력을 ‘한류’의 영향이라고 했다. 식민지와 전쟁을 겪으며 제기할 수 없는 폐허 속에서 세계 10위 경제권으로 우뚝 선 나라는 세계사적으로 볼 때 한국이 유일하다고 한다. 이것을 우리는 ‘한강의 기적’이라고 부른다. 작금의 한류도 ‘한강의 기적’의 토대 위해 형성된 한국인의 창의적 상상력의 발현이라고 볼 수 있다.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국내외의 정치 상황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특수성을 고려한다면 과연 한류는 꺾임 없이 지속 가능할 것인지에 대한 생각이 든다. 산업화는 늦었어도 정보화는 앞 당기자라는 국정철학은 우리나라를 현재의 정보화 선진국으로 도약하게 했다. 그렇다면 4차 산업혁명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하는데, 이를 성공시킴으로써 제2의 한강의 기적을 만들어 내고 한류를 지속시켜야 할 텐데 우리는 그것에 대한 준비는 하고 있는 것인지를 돌아보게 된다. 따라서 여러 정치 상황과 한반도의 지정학적 문제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길’을 모색할 시점이라고 생각한다. 인류 문명사를 되돌아보면, 새로운 길이 열릴 때 비로소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서울대학교 명예교수 김태유 글 참조) 인류 문명사의 ‘새로운 길’인 변곡점에 대해서 간단히 살펴보겠다. 실크로드(Silk Road)가 처음 열린 것은 기원전 100년을 전후한 때이다. 동방의 비단, 도자기 같은 상품과 화약, 종이 등의 제조기술이 서역으로 갔고, 서역의 향신료인 후추와 호두, 깨 등과 유리제품 및 제조기술이 동방으로 들어왔다. 이때 실크로드 선상에 있는 그리스, 로마, 페르시아, 이슬람, 훈, 몽골, 중국 등의 고대문명이 번영하게 된다. 이때까지만 해도 동북아시아가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면에서 인류 문명의 중심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향신료길(Spice Route)이 본격적으로 열리기 시작한 것 8세기 경이다. 인도네시아의 말루크제도에서 생산된 후추, 정향, 육두구, 계피, 침향 등의 향신료가 중동지역을 거쳐 알렉산드리아와 콘스탄티노플에서 지중해로 넘겨졌다. 11세기에 시작된 십자군 전쟁 등의 기독교와 무슬림 간의 천년을 이어온 숙적 관계는 향신료 무역을 독점하기 위한 뺏고 빼앗기는 싸움이었다. 이때 전성기를 맞은 이슬람 문명은 그리스 로마의 고전과 페르시아 인도 문화를 종합 발전시켜 르네상스 문화의 기반을 제공한다. 1488년 이후 네덜란드는 동인도 회사를 앞세워 선발 주자인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제치고 새로운 항로인 희망봉을 통하여 향신료 무역을 독점함으로써 상업혁명(Commercial Revolution)으로 새로운 시대를 열었다. 기존의 향신료 길에 의존하던 중동 무슬림과 지중해 기독교 문명이 동반 쇠퇴하고 본격적으로 서유럽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1784년 네덜란드를 제압한 영국은 5대양 6대주에 해가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을 건설한다. 향신료와 차 무역에 이어 영국은 면직물 생산을 시작함으로써 제조업에 기반한 산업혁명((Industrial Revolution)을 일으킨다. 8천 년 동안 이어져 온 기존의 농업문명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새로운 시대의 문명이 탄생한 것이다. 상업 제국으로 시작된 영국의 세기(Pax Britannica-영국의 지배에 의한 패권)는 산업혁명이라는 문명사적 대변혁을 통하여 역동적으로 발전하는 산업문명사회를 열어간다. 가난과 질병과 신분의 족쇄로 고통받던 농업사회의 대중에게 풍요와 건강과 자유민주 질서를 가능케 한 산업혁명은 한마디로 인류 문명 사상 가장 큰 축복의 서막이었다.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더 빨리 더 크게 발전하여 현재는 미국의 세기(Pax Americana-미국의 힘에 의해 유지되는 패권) 로 절정에 이른 현대산업 문명의 중심축을 형성하고 있다. 그야말로 인류문명은 인간의 경제활동에 의해 창출된 가치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업혁명으로 범선을 타고 5대양을 종횡으로 누비기 시작한 서유럽인들은 지구상의 모든 땅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했다. 당장 주인 없는 빈 땅은 필요하든 말든 사막과 동토를 가리지 않고 바다 멀리 외로운 돌섬에서 대륙붕에 이르기까지 모두 깃발을 꽂아 점령해 버렸다. 3차 산업혁명(The Third Industrial Revolution)을 처음 언급한 미래학자 제레미 리프킨은 태양광, 풍력 등 친환경 신재생에너지의 출현과 마이크로그리드 등이 정보통신기술(ICT)과 결합해서 출현한 새로운 경제로의 발전과정이라고 3차 산업혁명을 언급했다. 소위 우리가 말하는 정보화 사회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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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20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얼마 전 자동차 전용 도로를 운전하며 가는데 "길어깨 없음”이라는 표지판을 보고 어리둥절했다. ‘길어깨’?, 약 20여 년 전에 노견(路肩)을 우리말로 바로 쓴다고 ‘길어깨’로 잠깐 사용하다가 ‘갓길’로 개정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느닷없이 ‘길어깨’라는 용어가 등장한 것이다. 이미 도로교통법이 1991년에 개정돼서 시행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아마도 도로 공사에서 설치한 표지판일 텐데 아직도 20여 년 전 용어를 사용하다니, 오래전부터 사용하던 것을 감각 없이 그대로 사용하는 것인지 의아할 따름이다. 길어깨(노견)라는 말은 영어의 ‘Road Shoulder’를 일본에서 영문자 그대로 ‘노견’으로 직역한 일본말을 다시 우리말로 그대로 바꾼 것이다. 만약 한자 단어 ‘노견’을 그대로 한글로 표기하여 계속 사용했다면 아마도 ‘길거리를 방황하는 개’의 뜻으로 읽혔을 것이다. 그래서 노견을 노변(路邊)의 개념으로써 갓길이라고 개정한 것이다. 갓길은 큰 도로 옆의 가장자리 길을 말하는 것으로서 우리나라 토착어이다.(이어령 글 참조) 한자나 영어 같은 외래어들은 구두 신고 발을 긁는 것과 같다. 상처 위에 생긴 딱정이가 떨어지면 여린 새살이 난다. 한자와 외래어들은 한국인의 마음에 난 상처를 덮은 딱지 같은 것이다. 그 딱지가 떨어지면 새로 나온 새살의 감촉과 신경줄 같은 토착어가 살아난다. 이렇게 같은 뜻의 센서티브한 토속 문화가 있다. 좋은 말을 자꾸 쓰면 굳은살이 박힌다. 일상어는 발뒤꿈치처럼 굳은살이 박힌 언어이다. 창조력의 씨앗은 당연히 지극히 이 토착어 또는 토속문화 속에 녹아들어 있다. 그것을 우리는 풍토(風土)라고 부르는데, 우리가 발을 딛고 사는 토(土) 즉 ‘흙’은 고정불변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바람(풍)’은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 변화의 상징이다. 일본인이 아무리 약탈을 해가도 흙은 약탈할 수 없었다. 땅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혼이 묻혀 있다. 그러나 바람은 끊임없이 변한다. 동쪽에서도 불고 서쪽에서도 불어온다. 서양에서 그리고 일본과 중국에서도 불어 들어온다. 결국 흙 속에 저 바람 속에 우리의 운명이 있고, 과거와 오늘이 있고 또한, 미래가 있는 것이다. 토착어를 우리는 보통 모국어라고 부른다, 그러나 토착어는 모국어보다도 더 원천적인 언어라고 할 수 있다. 이어령 선생에 의하면, "토착어란 세 살 때 어머니의 품에서 옹알이를 할 때부터 몸에 익힌 모국어이다. 내 인생의 첫 책은 어머니의 모습이고, 어머니의 말, 어머니가 읽어주셨던 그 많은 모음과 자음에서 상상력을 길렀다”라고 말한다. 한마디로 모국어로 생각하는 것이 왜 창조력과 영감의 원천인지를 설명하는 대목이다. 한국의 미(美)를 말할 때 ‘여백(餘白)의 미’라고 한다. 여백의 미란, 종이 전체에서 그림이나 글씨 따위의 내용이 없이 비어 있는 부분을 말한다. 한국화 중 ‘산수화, ’풍속화‘ 등에서 주로 나타나 있다. 한국음악 중 국악도 ’여백의 미‘를 표현한 예술이라고 할 수 있는데, 서양음악은 화성 음악으로써 음악을 꽉 채운 듯이 느껴지지만, 국악은 선율음악으로써 서양음악에 비교해서 웅장함이 덜 느껴지면서 서양음악에 비해서 단출함도 느껴지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 여백 속에는 무엇이 있는지는 보고 느끼는 사람의 상상에 맡기는 거다. 그 여백 안에 무엇을 넣든 그건 각자의 자유다. 그 여백은 상상하는 이를 끌어들이는 힘으로 작용한다. 정확하게 여백이 없이는 상상하는 이를 끌어들이는 힘을 갖지 못한다. 그 여백은 한국 음식도 그렇다. 한국 음식 하나하나는 완성품이 아니다. 밥은 싱겁고 반찬은 짜다. 싱거운 밥이 맵고 짠 김치와 입속에서 어우러질 때 진정한 맛이 난다. 먹는 사람이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비로소 완성되는 것이 한국 음식이다. ‘흙’은 고정불변의 상징이라면, ‘바람’은 한순간도 머물지 않는 변화의 상징이다. 그 흙 속에서 5000년보다 훨씬 많은 세월의 굴곡의 역사를 딛고 아름답고 귀중한 우리의 토속문화 즉, 전통문화가 피어난 것이다. 그 흙의 역사 속에서 피어난 전통문화 속에는 우리 선조들의 혼이 서려 있다. 우리 선조들의 눈물과 피와 땀이 있다. 일제 강점기가 말살하려 했던 그 전통문화는 은근과 끈기의 엄청난 창조적 힘으로써 그 모진 ‘바람’을 받아치고 극복하고 끌어안으면서 오늘의 ‘한류(韓流)’를 만들어낸 것이다. ‘한류’는 한국문화가 세계적으로 소비되고 있는 현상을 말한다. 한류의 열풍은 중국뿐만 아니라 일본과 동남아시아, 그리고 세계로 확산되었다. 또한 TV 드라마, 대중가요, 영화 등 대중문화뿐만 아니라, 가전제품, 김치, 고추장, 라면 등에 이르기까지 포괄적인 모든 현상까지도 한류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 그중에 특히 K-POP의 역할이 독보적이다. "싸이 때문에 세계가 한국을 주목하고 있다. 싸이는 한국의 영웅이다.”라고 2012년 한국을 방문한 에릭 슈밋 구글 회장은 말하였다. 2012년도에 싸이의 '강남스타일'을 발표하면서 불기 시작한 싸이 열풍은 2013년도에 UN 미래포럼(the Millennium Project)에서 ‘싸이 현상’으로 명명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싸이 현상’을 미래학자들은 대표적인 ‘미래 현상’이라고 주장하기에 이르렀다.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21회”부터는 싸이의 이야기, 소녀시대 이야기, 방탄소년단의 이야기 등, 이들이 어떻게 세계 최고의 K-POP 한류 가수가 되었는지 그 원인을 분석하는 시간을 갖고자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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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9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고가 마사오는 감수성이 민감한 유소년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고가 마사오는 고가 마사오 예술대관『古賀政男藝術大觀』의 회고기에서 "큰 형의 가게에 60여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나는 이들이 흥얼거리는 민요를 날마다 들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작고 1년 전인 1977년 <저 꽃 이 꽃>이란 노래에 대해 ”만일 내가 유소년 시절을 조선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이러한 곡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 라고 말함으로써, 한국의 정서와 전통음악이 자신의 음악적 기반이었음을 시인하였다.(김열규 글 참조) 그리고 한 때는 ‘아리랑’도 본인이 작곡하였다고 주장하였으나 이내 취소하고 사과한 사건도 있었다. 고가 마사오는 약 11년의 기나긴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면서 음악가로서의 소질과 재능을 키워나갔다. 한국 전통의 민요나 판소리, 풍물 장단과 대중가요 등이 그의 음악적 형성에 큰 밑바탕이 되었으리라는 점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가 마사오의 음악은 처음 들어보는 곡이라도 마치 예전에 즐겨듣던 곡으로 착각할 정도로 멜로디가 친근한 곡이 많다. 그것은 당시 홀어머니와 함께 사는 고가 마사오의 처지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어려운 생활의 연속으로서, 마치 식민지 조선의 백성과 정서적으로 동질감을 느끼게 되면서 조선의 음악에 더욱 호감을 갖게 된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것은, 후일 고가 마사오의 음악에 한국의 정서나 가락이 상당 부분 반영되어진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생각한다.(소리바위 글 참조) 전수린과 고가 마사오는 어릴 적부터 같은 동네에 살면서 친교를 다져왔던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의 친교는 성인이 되어서도 계속되었으며 양국을 오가며 만날 때는 서로 포옹까지 하였다고 하니 꽤 친교가 두터웠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관계가 어쩌면 서로에게 음악적 영향을 끼치게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고가 마사오의 작곡이 먼저 작곡한 전수린의 곡에서 영향을 받았다는 것 또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사실, 이러한 내용들은 일본의 유행가와 한국의 유행가가 닭과 달걀의 관계처럼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상호간에 영향을 주고받으며 태동하고 성장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그리고, 18회에서는 후지야마 이치로에 의해 도입된 크루너 창법과 소위 고부시(小節)와 우나리(으르렁거린다)로 불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창법들이 가미되어 엔카의 창법이 갖춰지는 과정을 소개하였다. 고부시(小節)와 우나리(으르렁거린다, 떤다)는 악보에서는 표기할 수 없는 미묘한 억양이나 장단 같은 국악의 시김새를 의미하는데, 한국의 전통성악이나 트로트에서 표현하는 ‘꺾기’ ‘뒤집기’ ‘흔들기’ 등을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창법을 잘 표현한 가수들이 미소라 히바리 등 한국계 일본인 가수라고 한다. 그렇다면, 한국의 전통성악에는 어떤 독창적인 특징적 요소가 있는 것일까?. 최근에 트로트 경연 방송에서 심사위원인 마스터들의 심사평에서 ‘꺾기’, ‘흔들기’, ‘떨기’, ‘뒤집기’ 등의 용어가 나온다. 이러한 용어는 발라드 음악이나 록음악, 혹은 재즈와 팝음악에서는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다른 장르의 대중음악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오직 트로트에서만 들을 수 있는 용어들이다. 이러한 트로트 창법의 기교(국악에서는 시김새라고 표현)는 민요나 판소리에서의 대표적인 요소라고 할 수 있다. ‘꺾기’는 반음 위의 음에서 그 음으로 빠르게 흐느끼듯 내려오는 기교를 말하는데, 판소리와 민요 등 어느 장르에서나 자연스럽게 표현되고 있다. 특히 슬픈 음악인 계면조에서 다양하게 사용되고 있다. ‘뒤집기’는 방울목, 치는목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사람들은 요들송 표현 같다고 하여 요들목이라고도 부른다. 요들송의 기교처럼 긴 한음 소리에 살짝 힘을 빼고 요들목을 소리에 얹으면서 소리를 뒤집는 기교를 말한다. 노래를 할 때 이러한 뒤집는 시김새를 적절히 사용하면 화사하면서도 아름다움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아무 대목에서나 분별없이 사용하면 음악에 대한 격도 떨어지고 듣기 역겨운 음악이 된다.(서도명창 유지숙 글 참조) 트로트를 부룰 때 국악의 성악을 전공한 사람은 일반가수들이 표현하지 못하는 기교들을 자유자재로 더 깊이 표현할 수 있지만, 오히려 트로트를 부를 때는 국악적 요소를 빼느라고 힘들어 한다. 자칫 트로트가 민요처럼 들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국악의 성악 전공자가 트로트를 부르게 되면 맛깔스러움을 느끼게 하는데 그 이유는 가창력, 바로 복식호흡을 통한 호흡법 등 소위 공력을 통한 수련 과정의 결과라고 생각해 본다. 노래할 때의 좋은 호흡은 고음, 중음, 저음은 물론 강약, 그리고 굵게 떠는음, 가늘게 떠는음 등 노래의 다이내믹을 자유자재로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트로트는, 트로트라는 용어를 제외하고는 우리나라에서 독창적으로 개발된 세계에서 유일한 대중가요 스타일의 현대 민요라고 해도 지나침이 없을 것 같다.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중 트로트와 관련한 이야기는 19회로 마무리를 하고 20회부터는 K-POP과 관련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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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8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17회에서, 일본에서 표절 시비가 일었던 1931년 고가 마사오 작곡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와 1926년 전수린 작곡의 <고요한 장안>의 악보를 비교분석한 결과, 두 곡의 화성 체계가 거의 유사하고, 리듬 패턴이 8개의 마디가 비슷하거나 같으며, 리듬은 어김없이 두 곡 모두 한국의 동살풀이 장단을 차용한 뽕짝리듬이라는 것으로 분석하면서 고가 마사오가 전수린을 표절했다고 결론지었다. 추가로, 한국의 동살풀이 장단과 엔카 리듬은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 악보 비교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살펴 보겠다. 엔카 리듬과 동살풀이 장단의 악보 비교 분석(김덕수 글 참조) * 위의 <동살풀이 장단> 중 4번이 대표적인 뽕짝 리듬이다. "뽕 짝 뽕 짝, 뽕 짜작 뽕 짝, 뽕 짝 뽕 짝, 뽕 짜작 뽕 짝” 위와 같이 <엔카 리듬>과 국악의 <동살풀이 장단>을 비교 분석하면, (1) <엔카 리듬>과 국악의 <동살풀이 장단>의 리듬 패턴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2) 4/4박자로서 템포도 거의 똑같다. (3) <엔카 리듬>과 <동살풀이 장단>은 2분박으로 동종의 리듬이다. 또한, <동살풀이 장단>은 위의 4가지보다도 훨씬 많은 변형장단을 보유하고 있다. 4/4박자로서 2분박 계통으로 템포도 같아 같은 종류의 리듬이라고 볼 수 있다. 한편, 일본의 엔카가 미야코부시 음계와 같이 일본만이 가지고 있는 특유의 음악이라고 주장되어지는 것과 마찬가지로, 엔카의 창법도 일본만이 가지고 있고 일본인만이 표현할 수 있는 일본 특유의 창법이라고 주장하는 한국 사람이 의외로 많다. 과연 그럴까?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의 작사자는 다카하시 쿠키타로인데 홋카이도의 지방신문 기자였다. 1931년 여름에 다카하시 쿠키타로가 일본 콜롬비아 문예부에 시를 투고하면서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가 탄생하는 계기가 된다. 문예부에서 작곡을 의뢰받은 고가 마사오는 매일 기타를 치면서 고심하며 작곡을 하게 된다. 고가 마사오는 완성된 악보를 후지야마 이치로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는데, 후지야마 이치로는 그 당시 도쿄음악학교(도쿄예술대학 음악학부의 전신)에 재학 중인 장래가 촉망되는 클래식 음악을 전공하는 학생이었다. 그런데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는 음역이 너무 낮아 쉽게 부르지 못하였다고 한다.(지난 회 악보 참조) 이 때, 후지야마는 당시 미국에 머물던 누나로부터 마이크로폰에 속삭이듯 부르는 크루너 창법에 대해서 전해 듣게 되었다. 후지야마는 일본에서 아직 보급이 안 되었던 이 크루너 창법을 채택하여 노래를 불렀던 것이다. 클래식을 전공한 후지야마는 크루너 창법에 정통 성악기술을 접목하여 새로운 발성으로 엔카를 부르게 된 것이다. 이러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일본 엔카의 시작곡인 고가 마사오 작곡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가 탄생되었는데, 이 노래는 1931년 9월에 일본 콜롬비아에서 후지야마 이치로의 노래로 음반이 발매되었던 것이다. 참고로 크루너 창법이란, ‘크루너’는 ‘나직하게 노래하다, 조그맣게 속삭이다’의 ‘croon’에서 파생된 단어로서 부드러운 콧소리가 가미된 창법을 구사하는 가수를 지칭한다. 정식표현으로는 ‘crooning’이며 1920년부터 미국 대중음악에서 시작된 것으로 보이는데, 가라앉는 듯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중얼거리듯 부른다는 창법이다. 1940년대에 이 창법은 사라지면서 로큰롤이 등장하게 된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는 후지야마 이치로에 의해 불려지면서 엔카의 창법이 확립되기 시작하는데, 이후에 일본에서는 소위 고부시(小節)와 우나리(으르렁거린다)로 불리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창법들이 등장하게 된다. 고부시는 작은 마디라는 뜻으로 우리나라 민요나 가곡 등에서 악보에서는 표기할 수 없는 미묘한 억양이나 장단을 의미하는 단어이다. 다시 말하면, 우리 전통성악이나 트로트에서 표현하는 ‘꺾기’를 말하는데 전통음악의 시김새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엔카의 음악을 가장 잘 표현한 가수는 아버지가 한국인인 미소라 히바리이다. 미소라 히바리는 잔잔하게 부르기만 했던 일본 엔카를 인간의 온갖 감성을 담아서 다이내믹하게 표현함으로써 일본 엔카를 반석 위에 올려 놓게 한 장본인이다. 미소라 히바리가 부른 엔카는 대부분 히트할 정도로 역동성을 갖춘 한국인의 특성을 잘 반영하였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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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7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1926년, 한국의 전수린 작곡의 <고요한 장안>은 가수 이애리수에 의해 막간극의 노래로 불리면서 대중들의 사랑을 받았다. 그리고 이 <고요한 장안(일본명, "원정”)>은 1932년도에 일본에서 발표하게 되는데, 이때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출판하는 잡지 『신청년』에서 1931년도에 발표된 ‘고가 마사오’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 淚か溜息か)>가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원정)>을 표절했다는 기사가 보도된다. 만약에 일본의 음악 평론가들이 말한 것처럼 고가 마사오가 전수린을 표절했다는 주장이 사실로 확인된다면, 한국의 트로트가 엔카의 아류라는 사실은 성립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한국의 트로트가 일본의 엔카에 영향을 미쳤다는 의미가 된다. 그래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필자는 <고요한 장안>과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의 악보를 비교해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지금부터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6회’의 악보를 옆에 놓고 필자와 함께 두 곡을 비교해 보면 좋겠다. 두 곡의 악보를 비교할 때 음악적 내용이 다수 포함되어 있어서 음악 전공자가 아니면 다소 어려운 점이 있으리라고 생각하지만, 일본의 엔카와 한국의 트로트에 대한 음악적 연관성, 그리고 한국의 트로트가 음악적으로 왜곡되어 오늘에 이른 점 등을 생각하면 두 곡과 관련한 악보의 비교는 마지막으로 반드시 겪어야 하는 부득이한 과정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애독자의 양해를 바란다. 악보의 1은 <고요한 장안>이고, 2는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이다. 위의 악보를 분석하면 다음과 같다. (1) <고요한 장안>은 Motive가 정확히 2마디 구조를 취하고 있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는 4마디 구조를 취하고 있다. (2) <고요한 장안>은 V 화음이 자연단음계로 되어 있다.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는 화성단음계를 사용하고 있다. 즉, 속 7화음을 사용하고 있다. (3) 코드의 사용과 진행이 대체로 두 곡 모두 비슷하다. (4) 1번 마디, 3번 마디, 15번 마디는 악보의 리듬 패턴이 비슷하다. 그러나 20번 마디, 21번 마디는 리듬 패턴은 거의 같다고 볼 수 있으며 화성 또한 동일하다. (5) 1 <고요한 장안>의 24번 마디 셋째 박부터 25번 끝마디와 2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의 23, 24, 25번 끝마디의 선율과 리듬이 모두 같다. (6) 리듬은 어김없이 두 곡 모두 ‘뽕짝 리듬’이다 위의 내용을 다시 정리하면, 전수린은 자연단음계를 사용하여 국악적 즉, 민족음악적 분위기가 느껴지도록 작곡하였다. 고가 마사오는 코드 사용과 진행에 있어서 전수린과 흡사하다. 다만, 속 7화음(화성단음계)을 사용함으로써 서양음악적 느낌이 나도록 한 것으로 보인다. 리듬 패턴이 8개의 마디가 비슷하거나 같은 것으로 보아 표절이라고 조심스럽게 이야기할 수 있으며, 화성의 진행으로 보아 듣기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비슷한 음악으로도 들릴 수 있다고 생각된다. 또한, <고요한 장안>의 24번 마디 셋째 박부터 25번 끝마디와 2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의 23, 24, 25번 끝마디의 선율과 리듬이 모두 같은 것으로 보아 고가 마사오가 전수린을 표절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o 리듬은 어김없이 두 곡 모두 ‘뽕짝 리듬’이다. 분석에 대한 결론은, ① 일부분에서의 멜로디가 같다는 것을 보면 고가 마사오가 전수린을 표절했다고 볼 수 있다. ② 화성 체계가 거의 유사한데, 이 또한, 일본에서 표절 시비가 일어난 큰 이유 중 하나라고 생각된다. ③ 리듬은 어김없이 두 곡 모두 ‘뽕짝 리듬’이다. 즉, 국악의 동살풀이 장단 중 ‘동살풀이 리듬’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간주된다. ④ 그리고, 일본에서의 표절시비 중 가장 결정적인 부분 중 하나는 ‘동살풀이 리듬’을 차용한 ‘뽕짝 리듬’에서 비롯되었다고 판단된다. 왜냐하면, 이 시절의 일본은 ‘뽕짝 리듬’과 같은 리듬이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상과 같이, 소위 ‘뽕짝 리듬’인 일본 ‘엔카의 리듬’은 한국 전통 장단의 ‘동살풀이 장단’이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 또한, 고가 마사오 작곡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는 전수린 작곡의 <고요한 장안>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서 표절이라고 판단된다. 1980년대 일본에서는 엔카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다. 엔카를 토착적 문화라고 말해도 아무런 문제가 없는 일본에서 엔카의 원류(源流)가 한국이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그 이유는, 많은 엔카 가수가 한국계(재일 한국인)라는 사실이 알려졌고, 엔카의 거장 고가 마사오도 한국계일지 모른다는 설이 나돌았던 것이다. 또 고가 마사오의 경우 한국계 혈통과는 대체적으로 무관하다고 보고 있지만 한국에 오랜 기간 체류했다는 사실을 가지고 ‘한국 문화의 영향’과 밀접한 관계에 있지 않느냐라고 논하는 사람도 존재한다는 것이다.(신현준 글 참조) 또한, 음계이론(미야꼬부시-都節)을 잘못 적용하여 트로트를 왜색이라고 주장하는 한국 사람은 많아도 트로트나 엔카를 일본 고유의 것이라고 주장하는 일본인은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민경찬 글 참조) 그러한 이유를, ① 엔카의 대표적인 작곡가인 고가 마사오가 어린 시절 한국에서 한국 전통음악의 영향을 받았다는 점, ② ‘미소라 히바리’ 등 엔카 가수들의 상당수가 한국계라는 점, ③ 엔카 속에 한국 전통적 음악 요소가 많이 내포돼 있다는 점, ④ 호소력을 요구하는 창법이 일본 가수보다는 한국 가수들에게 더 어울린다는 점 등의 이유로 엔카의 원류가 한국이라고 생각하는 일본인이 의외로 많다고 한다. 따라서 트로트는 한국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역수출됐다는 것이 일본 가요계의 정설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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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6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그동안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를 15회까지 소개하면서 일본 엔카라는 장르가 만들어진 시점, 첫 번째 엔카인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가 발표되면서 고가 마사오가 한국의 전수린을 표절했다는 점, 한반도에서 고구려 음악, 백제 음악, 신라음악이 일본 열도에 전해지면서 일본 전통음악이 생성됐다는 점, 그리고 일본 전통음악이 근대 명치유신 때까지 일본의 속악으로 이어져 오다가 ‘엔카‘라는 장르가 만들어지기까지 ’미야꼬부시’인 ‘요나누끼’ 음계가 만들어졌다는 점과 요나누끼 음계는 일본만이 갖는 특별한 음계가 아니고, 장음계의 경우는 ‘도레미솔라’ 음계, 단음계의 경우는 ‘미도시라파’ 음계라는 것을 설명하였다. 전수린은 개성에서 소학교를 다니면서 바이올린의 기초를 닦았고, 송도고보를 다니면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정식으로 공부하였다. 어릴 때는 동요도 작곡하는 천재성을 보이기도 하였다. 그 후 서울로 이사하여 홍난파를 만난 후 본격적인 음악 활동을 하면서 편곡과 작곡 작업을 하게 되는데, 1926년에 <고요한 장안>을 작곡하게 되면서 이애리수에 의해 막간극의 노래로 불려졌다는 점과 1932년에 일본에서는 <원정>이라는 곡명으로 바꿔서 발표하였다. 한편, 일본 엔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가 마사오는 아버지를 여의고 7세 때 어머니와 함께 인천으로 이사 와서 인천공립심상고등소학교에 다니다가 12세 때 서울로 와 선린상업학교를 17세에 졸업을 하게 된다. 형님 집에서 살면서 고가 마사오는 늘 형님 집에 놀러 와서 한국의 전통악기를 연주하며 노래 부르던 한국 사람들과 함께 어울려 지냈다는 점을 설명하였고, 그 후 1922년에 서울을 떠나 오사카에 살면서 1923년에 메이지(明治) 대학 경상학부에 진학하게 된다. 고가 마사오는 1931년에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를 발표하면서 전수린을 표절했다는 표절시비가 일어난다. 그런데, 전수린 작곡의 <고요한 장안>은 일본에서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 보다도 6개월 늦게 발표됐는데도,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출판하는 잡지 『신청년』에서 1931년도에 발표된 ‘고가 마사오’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가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원정)>을 표절했다고 하는 기사(이호섭 글 참조)가 실렸다. 일본 음악평론가 사이에서 표절시비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렇다면, 엔카의 태동기에 엔카의 아버지라고 불려지도록 한 결정적 작품인 고가 마사오 작곡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 淚か溜息か)>와 한국의 트로트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는 전수린 작곡의 첫 트로트 곡인 <고요한 장안>의 노래를 비교함으로써 소위 일본 엔카와 한국의 트로트는 서로 어떤 음악적 연관성이 있는지 악보 분석을 통해 그 표절시비에 대해서 탐색해 보고자 한다. <고요한 장안>과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의 악보 비교 가사는 생략하고 노래 멜로디만 비교하였다. 위의 악보를 비교 분석한 설명은 다음 회에서 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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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5한을 흥으로 극복한 전수린 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한국 ‘트로트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마땅한 천재성을 가진 전수린은 어릴 때부터 동요를 작곡하기도 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한국 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와 함께 활동하면서 민족가요인 <황성옛터>를 위시해서 정답고 잊을 수 없는 대중명곡을 수 백곡 작곡하였다. 또한, 전수린은 대중음악의 초창기 아무것도 없는 한국 가요계의 황량한 벌판을 개척하며 대중음악의 집을 지었고, 일본 등에 유학을 가지 않고도 일제강점기 불모지였던 한국 대중가요의 개척자로서 고가 마사오의 엔카 음악에 영향을 미친 천재적 작곡가이다. 천재적 예술가란 하느님이 자신의 실수로 만들어진 아이를 그냥 세상에 내보냈다가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을 것임을 알고 급하게 특별한 재능을 하나씩 준 존재들이라고 한다. 눈곱 하나 떼어다 붙여서 피카소 같은 천재 미술가가 되게 하고, 귀지 하나 넣어주어 베토벤 같은 천재 음악가가 태어나게 한 것이라고 한다. 실재로 문화 예술의 영역에는 이와 같은 아이들이 존재한다. 모차르트처럼 절대음감을 가진 네 살짜리 아이들이 있는 것이다. 이런 아이들에게 일반 교육을 시키면 인생의 낙오자가 될 수밖에 없다. 그리스 비극 <필록테테스 Philoctetes>에 나오는 ‘활과 상처’의 예술 이론을 바탕으로 한 이야기이다.(이어령 글 참조) 필록테테스 장군은 트로이 전쟁에 참전 중 독사에게 물리게 되는데, 이 때 병을 앓고 발작을 일으켜 무인도에 버려진다. 그러나 그가 잃지 않은 것이 있으니, 아폴로 신에게서 받은 백발백중의 신궁(神弓)이었다. 그리스 군은 트로이 전쟁에서 이기려면 반드시 이 신궁이 필요하다는 신탁(神託)을 받고, 승리를 얻기 위해 그의 활을 몰래 훔치기 위해서 무인도에 사자(使者)를 보낸다. 사자가 필록테테스의 활을 가져 오려면 활과 함께 그의 병인 고통의 상처도 가져와야 한다. 활과 상처는 분리할 수 없는 것임을 깨달은 사자는 필록테테스와 함께 트로이 전쟁에 참가하고, 결국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니체는 인간의 발달을 3단계로 설명하는데, 그것은 낙타, 사자, 어린아이이다. 맨 처음 인간은 낙타에 비유한다. 무거운 짐을 지고 사막을 건너며 참고 견디는 인고(忍苦)의 존재, 그 다음 단계는 힘이 센 사자이다. 힘으로 주위를 지배하고 개척하는 존재, 그 다음은 어린아이이다. 어린아이는 어떤 편견이나 틀도 없는 순진무구한 존재 그 자체이다. 어린아이는 그 무엇도 될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의 상징이다. 어린아이는 누구나 태어날 때부터 천재성을 가진다. 그 자체가 무서운 힘이다. 그래서 예술가들의 무한 창조성을 종종 어린 아이의 생성의 힘과 비교하곤 한다. 예술가는 무인도에서 상처를 끌어안고 혼자 괴로워하는 존재이다. 어느 시대 어느 사회에서든 마찬가지이다. 그 괴로움의 상처를 받아주지 않고 그의 활만 탐내는 사회는 절대로 풍요로운 사회가 될 수 없다. 신궁의 파워와 함께 그 상처까지 포용하는 사회와 역사만이 승리와 행복의 영광을 얻는 문화국가를 이루는 것이다. 천재적 작곡가 전수린은 무인도 같은 절망적인 일제 강점기의 숨막히는 시대에서 민족의 상처를 끌어안고 괴로워하며 전수린 만의 창조적 대중가요의 영역을 개척한 것이다. 그런데, 전수린의 창조적 대중가요의 영역은 민족의 상처를 끌어안고 괴로워하며 슬퍼하는 한(恨)의 표현뿐만 아니라, 민족의 한을 극복하며 보듬어 안는 희망의 메시지도 강하게 담은 노래들도 많다. 이것은 마치 우리나라 전통음악의 형식을 많이 닮아 있다. 우리 전통음악은 대부분 느리게 시작해서 점점 빨라져 흥겹게 끝나는데, 이러한 스타일은 느린 슬픈 음악에서 빠르게 흥겨운 음악으로 고난의 한을 극복하는 과정을 담은 것이다. 한마디로 우리 음악은 몇 천 년 간 강대국 사이에서 견뎌온 한국인의 창조력이자 돌파력의 표현인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한의 민족이 아닌 흥(興)의 민족임을 말하는 것이다. 참고로 ‘한민족은 한의 민족’이라는 말은, 일본의 야나기 무네요시가 처음 만들어낸 말인데, 일제 강점기의 야네기 무네요시는 우리문화의 우수성을 극찬했던 사람이었지만, 우리나라의 문화말살 정책을 처음 기획했던 인물로서 식민사관을 주입하는데 앞장섰던 인물이다. 그의 식민사관은, 우리나라 사람들이 우리 스스로를 멸시하고 부정하도록 만들었고, 일본을 우러러 생각하도록 만든 것이다.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의 두 얼굴인 것이다. 현재도 일부 국민들은 이러한 식민사관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본이 우리보다 우월하다는 생각을 버리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아직도 대중음악의 장르에까지 일부 남아 있는 것은 안타까울 뿐이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시대에 일본 등 해외에 유학 한 번 가지 않은 음악 영재인 전수린은 이러한 전통음악예술을 자기의 대중가요 작품에 고스란히 반영시켜 자기만의 정체성을 개척한 장본인이다. 그야말로 전수린의 천재성이 드러나는 대목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그의 두 번째 작품인 <고요한 장안>은 물론 세 번째 작품인 <황성옛터>도 국악의 장단인 중모리 장단과 국악의 전통음계가 들어 있다. 천재적 작곡가인 전수린은 전통음악의 가치를 통해서 철학을 배우고 인생을 배웠을 것이다. 그럼으로써,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사고하는 방식이 선구자적 역량을 갖추었으리라고 생각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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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4한국 트로트의 아버지 전수린 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엔카의 전설이라고 불리는 다카기 이치로는, 제이피(JP)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일본 엔카의 원점이 되는 천재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는 일본 후쿠오카 출신이지만 유년 시절에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다. 그가 일본에 건너가 탄생시킨 엔카의 멜로디는 한국의 것이고, 엔카의 원조는 한국이다.”라고 말하였다. 또한 1932년 일본의 음악평론가 ‘모리(森一也)’는, 당시 ‘고가 마사오’가 조선에 살고 있었을 때 들었던 ‘전수린’의 멜로디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그렇다면 전수린은 어떤 작곡가인지 좀 더 자세히 알아보도록 하자. 이미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전수린(全壽麟, 1907~1984))의 본명은 전수남(全壽南)이다. 악극단 취성좌(聚星座)의 바이올린 주자로서 개성의 백천 지방으로 순회공연을 갔다가 비에 갇혀 있던 쓸쓸한 여인숙에서 애수 어린 <황성의 적(황성옛터)>를 작곡해 일약 민족가요의 작곡가가 된 전수린은 인삼으로 유명한 개성이 그의 고향이다. 어릴 때부터 습작으로 동요를 작곡하기도 한 전수린은 명문인 개성의 송도고등보통학교(송도고보-1952년 인천으로 이전) 재학 중 장봉손(張奉孫)에게서 바이올린의 기초를 배웠고, 호수돈 여학교의 교장인 니콜스(Nicols) 여사(루추 부인이라는 설도 있음)에게서 정식으로 바이올린과 음악이론을 사사하면서 음악가의 꿈을 키웠다. 송도고보를 졸업(15세 때 중퇴라는 설도 있음)한 후에는 완고한 부모님을 설득해서 본격적인 음악 공부를 시작한다. 1925년에 청운의 뜻을 품고 상경한 전수린은, 열아홉 살 때 <봉선화> <성불사의 밤> 등을 작곡한 한국 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 선생이 주도하는 연악회(硏樂會)에 들어가 음악을 익히면서 동요 작곡가로 활동하게 된다. 그리고 다음 해부터는 이미 가수들을 위한 편곡을 하기 시작하는데, <부활> <카츄샤> 같은 외국 가요를 편곡해서 불렀을 뿐만 아니라, 이때까지 우리나라 고유의 대중가요가 없던 시절에 당시의 순회극단인 동방예술단(東方藝術團)과 취성좌에 악사로 있으면서 독자적인 작곡을 하기 시작한다. 단발머리 소녀 박단마를 하루아침에 인기가수로 만든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는 1937년에 작곡하여 1938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악극단 취성좌와 함께 순회공연을 하면서 작곡구상을 하던 전수린이 최초로 작곡한 처녀작은 이애리수가 노래한 <이국하늘>이며, 1926년경에 작곡해서 막간극의 노래로 불리다가 1932년에 일본에서 발표한 <고요한 장안>이 두 번째, 그리고 그 유명한 <황성옛터>가 세 번째 작품이다. 일제강점기에서 <황성옛터>는 공연히 시비를 당했고, 작사, 작곡이 모두 불온하다고 해서 한국 최초의 금지 가요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황성옛터>는 한국의 세레나데라고 해서 일본사람들도 곧잘 부르던 노래였다. 악극단 취성좌의 인기가수 이애리수가 이 노래를 부르면 수많은 관중들은 저도 모르게 따라 불렀으며, 삼천리 방방곡곡 우리 겨레가 있는 곳에서는 으레 애수 어린 <황성옛터>의 가락이 흘러나왔다. <황성옛터>의 작곡으로 일약 민족가요의 작곡가가 된 전수린은, 이애리수를 인기가수로 만들었을 뿐 아니라 풋내기 열일곱 살의 소녀 가수 박단마를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의 단 한 곡으로 스타덤에 오르게 했으며, 또한 16세의 소녀 가수 황금심에게 <알뜰한 당신>을 부르게 해서 단 한 곡의 데뷔곡으로 황금의 신인을 만들기도 하였다. <알뜰한 당신>을 황금심이 부르면서 히트하게 되고, 레코드가 나오자 삽시간에 화제를 모으며 빅터레코드사를 돈방석 위에 올려놓기도 하였으며, 당시의 인기가수였던 김복희와 박단마를 능가하였다. 박단마, 이애리수, 황금심에게 데뷔곡을 주어 동시에 히트를 시키고 불멸의 스타가 되게 하자, 작곡가 전수린의 주변에는 신인 가수들은 물론 기성 가수들까지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전수린의 곡을 얻기 위해서 온갖 노력을 다할 정도였다. 남달리 정서적으로 풍부했던 작곡가 전수린은 자신의 이미지를 소중히 여기는 음악인이었다. <황성옛터>가 방초 우거진 개성 만월대를 모델로 했듯이 그의 정감에는 항상 뚜렷한 대상을 두었다. 그 한 예를 들면, 손금옹이 부른 <무정>이라는 노래는 이 노래를 부른 손금옹 자신의 시련을 소재로 전수린이 작사, 작곡했다. 손금옹 자신에게 시련의 고배를 마시게 했던 김모라는 청년은 분통을 못 이긴 나머지 악기점마다 돌아다니며 <무정>을 모조리 뒤져 싹쓸이하는 소동을 빚기도 했다. 시련한 여자를 위로하는 내용으로 작곡한 <무정>은 황금심이 부르면서 히트를 했다. 전수린은 작사가 이부풍과 콤비가 되어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 등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가요를 작곡했으며, 이 무렵 그의 특기는 신인가수의 데뷔곡을 히트시키는 히트 제조기라고도 할 수 있겠다. 또한 전수린은 화려한 무대에 서서 인기를 독점해버린 가수들의 그늘에 서서 잘 알려지지 않은 일면도 있으나, 한때는 명지휘자로서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기도 했으며 지방공연 때는 끈질기게 따라다니는 여성 팬들 때문에 숨어다녀야만 하는 일도 있었다. 1942년에 다마가와(玉川)로 창씨개명(創氏改名)한 전수린은 ‘다마가와 위문대’를 조직하여 만주와 일본 북해도 탄광 지대까지 가서 한국 출신 노무자들을 위로하는 위문공연 활동을 하였다. 8‧15해방 이후에는 서울에서 악기점을 운영하였다. 1965년에는 라디오 연속방송극 주제가로 <강화도령> 등을 작곡하였고, 1970년에는 한국가요반세기동지회의 초대 회장을 지내기도 하였다. 부인 이순희 여사와 함께 슬하에 7남매를 두고 단란한 가정의 가장이었던 전수린은 한국음악의 선구자인 홍난파와 함께 활동하면서 민족가요인 <황성옛터>를 위시해서 정답고 잊을 수 없는 대중명곡을 수 백곡 작곡하였다. 또한, 초창기 아무것도 없는 한국 가요계의 황량한 벌판을 개척하며 대중음악의 집을 지었고, 일본 등에 유학을 가지 않고도 일제강점기 불모지였던 한국 대중가요의 개척자로서 고가 마사오의 엔카 음악에 영향을 미친 천재 작곡가 전수린은 한국 ‘트로트의 아버지’라고 불러야 마땅하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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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3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뉴욕의 유엔본부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기증한 ‘월인천강지곡’의 활자본, 그리고 그것을 인쇄한 활자들을 복원한 조형물이 그 위용을 드러내며 전시되어 있다. 이것은 1991년 9월에 유엔에 가입한 기념물이다. <월인천강지곡>의 고본(古本)을 복사 확대한 복제품인데, 사람 키만큼 높은 유리 상자에 보관되어 있어 한눈에 띈다. 더구나 한글 활자로 된 것이기에 한국의 고유어인 한글의 독창성을 당당하게 전시하는 효과를 톡톡히 보고 있다. 이 전시물은, 최초의 한글 활자본인 월인천강지곡을 1000년 동안 보존된다는 특별한 한지에 복원하고, 당시의 활자를 재주조하여 조형물로 전시한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은 1447년에 쓰였으니 한국의 금속활자가 1440년경의 구텐베르크(Gutenberg)의 금속활자보다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이 막강한 한자 문화의 지배권에서도 주눅 들지 않고 한글을 창제한 나라임을 만천하에 자연스럽게 알리는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월인천강지곡은 불경에 나오는 말로서 ‘월인천강(月印千江)’의 뜻은 하나의 달이 똑같은 모양으로 천(千)의 강물에 비친다는 뜻이다. 역사는 때론 소수에 의해 움직인다. 한 사람의 아이디어가 나라 전체의 이미지를 좋게도 나쁘게도 바꿀 수 있다. 그래서 창조는 개인의 힘이지만 그것의 결과는 국력이 된다. 최근에 살아있는 자기계발서로 평가받고 있고, 대통령이 한국 외교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극찬하며 미래문화특사로 임명된 BTS(방탄소년단), 그리고 싸이에 이어 미국의 저스틴 비버를 뛰어넘어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유튜브 구독자 수를 보유한 블랙핑크 등은 한류인 K-POP으로써 K-문화의 새로운 위상을 보여주고 있다. 그렇다면, 일제 강점기였던 100년 전 한국의 대중음악의 현실은 어떠했는지 알아보도록 하자. 일반적으로 우리나라 최초의 가요를 1926년 윤심덕이 불러 히트시킨 ‘사의 찬미’라고 하지만 그보다 앞선 1923년 무렵에 많은 국민들이 따라 불렀던 ‘이 풍진 세월’이라는 주장도 있다. 가사는 "이 풍진 세상을 만났으니 너의 희망은 무엇이냐”로 시작하는 노래로서 원래 제목은 '희망가'이다. '사의 찬미'는 이바노비치의 왈츠곡 ‘도나우강의 잔물결’에서 곡을 흉내냈다고 하는데, 이 풍진 세월도 원작자는 영국인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이후에 한국인 스스로 창조적으로 작곡된 곡이 1926년경에 작곡된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인데, 이 곡은 한국에서는 실제로 극 중에 막간 가수의 노래로 불려지고 있었던 노래이다. 전수린은 1907년 개성에서 출생하였다. 어렸을 때부터 호수돈 여학교의 교장인 ‘루추부인’으로부터 바이올린을 배우고, 어린 나이에 동요를 작곡하기 시작하였다. 15세 때 송도고보를 중퇴한 전수린은 서울로 올라가 연악회(硏樂會)를 주도하고 있던 홍난파와 함께 활동하게 된다. 전수린은 한국 작곡가 최초로 ‘빅타 레코드사’에 전속되어 1932년에 '황성옛터'와 '고요한 장안'을 일본에서 발표하여 일약 유명한 작곡가가 된다. 한편, 엔카의 대부로 불리게 된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고가 마사오 작곡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 淚か溜息か)'는 1931년에 발표되었는데, 1932년에 표절시비에 휘말리게 된다. 한국의 전수린 작곡의 '원정'(한국에서는 '고요한 장안'으로 발표)을 표절했다는 것이다. '원정'이 발표됐을 때 일본 박문관(博文館)에서 출판하는 잡지 '신청년'에서 고가 마사오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가 전수린의 '고요한 장안(원정)'을 표절했다고 하는 기사(이호섭 글 참조)가 실렸다는 사실이다. 이 같은 사실을 일본의 음악평론가 ‘모리(森一也)’는, 당시 ‘고가마사오’가 조선에 살고 있었을 때 들었던 ‘전수린’의 멜로디에 영향을 받은 것 같다고 분석하고 있다. 또한, 일본 엔카를 대표하는 원로 가수이자 일본엔카협회 이사장인 다카기 이치로는 제이피뉴스와의 인터뷰에서 엔카의 원조는 한국이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다카기 이치로는 "일본 엔카의 한 획을 그은 사람들은 대부분 한국의 피가 섞여 있으며 엔카 멜로디 원조는 한국입니다.”라고 언급하면서 고가 마사오가 유년시절 한국에 살면서 교육을 받았고, 한국의 전통문화를 가까이 했음을 강조하며 엔카의 멜로디는 한국의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카기 이치로는 10대부터 일본 민요를 배우기 시작해 엔카 가수 한길을 고집한 45년 베테랑 엔카 가수이다. 1963년 데뷔하여 300곡 이상의 곡을 발표했고, 아내 쓰야마 요코와 듀엣으로 부른 '신주쿠소다치'는 160만장의 음반이 팔리며 엔카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그는 일본 엔카를 지키기 위해 1997년 일본엔카가요협회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기도 하다. 다카기 이치로는, "엔카는 메이지 시대부터 바이올린 연주에 맞춰 그날의 뉴스, 사건을 전달하는 형태로 시작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때의 엔카는 연가(演歌)가 아닌 염가(艶歌)였죠, 염(艶)자는 일본어로 섹시하고, 빛나고, 성숙하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깊이 있는 음악이라는 것이죠, 그것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연출’이라는 의미의 연가가 되었습니다. 일본 엔카의 원점이 되고 있는 천재 작곡가 고가 마사오(古賀政男)씨는 일본 후쿠오카 출신으로 유년시절 한국에서 교육을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일본에 건너와 탄생시킨 엔카의 멜로디는 한국의 것이었죠, 그러니까 엔카의 원조는 한국입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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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2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지난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1회’는 국악 음계에 대한 내용이 너무 어려웠다는 의견들이 많았다. 그래서 이번 회에서는 고가 마사오와 전수린과 관련된 이야기를 하기 전에 문화에 대한 이해를 돕기 위한 여담을 간단하게 하고자 한다. 각국의 문화적 정서에 따라서 한 가지 사물을 놓고도 접근하는 방식은 제각각이다. 길 위에 우주인이 떨어뜨리고 간 물건이 있다고 가정하자. 물론 지구에는 전혀 없는 생소한 물건이다. 그걸 프랑스 사람이 주었다면 눈으로 샅샅이 뜯어보았을 것이다. 독일 사람이라면 귀에 대고 흔들어 볼 것이다. 이것은 프랑스의 시각문화와 독일의 청각문화의 차이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뛰고 나서 생각한다’는 스페인 사람은 우선 발로 깨버리고 그 속을 볼 것이다. 의회민주주의 창시국인 영국 사람은 스페인과는 정반대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집으로 가져가서 가족들의 투표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결정할 것이다. 군자(君子)의 나라인 중국 사람은, 우선 점잖게 사방을 둘러보며 아무도 없는지를 확인하고 허리춤에 그걸 감추고 집으로 가서 생각한다. 골동품처럼 모셔두고 그것이 무엇인지 알 때까지 기다릴 것이다. 그렇다면, 일본 사람은 어떻게 할까? 그 물건을 10분의 1 크기로 축소해서 만들어 놓는다. 그리고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나루호토(아, 그렇구나)!’ 하며 무릎을 친다. (이어령 글 참조) 바야흐로 수학의 세상이라고 한다. 제4차 산업혁명을 이야기할 때면 반드시 출현하는 용어가 빅데이터, 인공 지능(AI), 사물인터넷 등이다. 이것은 다 수학을 기반으로 한다. 세계수학경시대회를 보면 우리나라 중·고등학생들이 상을 휩쓸고 있다. 그런데 수학에 대한 흥미는 세계 꼴찌 수준이라고 한다. 인공 지능에서 두각을 나타내는 나라들은 수학경시대회 성적은 별로지만 흥미도는 세계 최고 수준이라고 한다. 음악 분야의 경우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계 콩쿠르에서 수상은 해외 유학파들의 차지였다. 하지만 국내에도 최고 수준의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교육기관이 생기면서 유학을 거치지 않은 학생들도 수상을 하고 있다. 이제는 우리나라 음악 전공 학생들이 세계 콩쿠르에서 상위에 입상하는 것은 특별한 일이 아니다. 그런데 예술교육을 받기 위해 한국으로 유학 오는 외국인은 왜 거의 없는 실정일까. 그 이유로 우리나라의 교육제도를 탓하는 이들이 많다. 일제강점기에 뿌리내린 ‘톱-다운(Top-Down)’ 방식의 주입식 교육의 틀이 가장 큰 요인이다. 흔히 비유하기로 한국 사람은 우뇌형인데, 좌뇌형 시스템 속에서 작동하려니 큰 어려움을 겪는 것이다. 특히 예술교육과 수학 교육이 큰 문제이다. 우뇌형은 틀을 만드는 것뿐만 아니라 그 틀 안에 자신의 창조적 상상력을 마음껏 발휘하여 표현하는 것이다. 좌뇌형은 틀을 만드는 것이 목적이며 한번 만들어진 틀 안의 내용을 고수하려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창의성과 끼가 있는 한국 사람은 우뇌형에 해당하고, 한번 배운 것을 바꾸지 않고 그대로 유지하는 것을 덕목으로 삼는 일본 사람은 좌뇌형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우리나라 국민성은 우뇌형인데 아직도 교육은 좌뇌형 스타일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 많다. 그러니 ‘톱-다운’ 방식의 틀 하나 만들어 놓고 붕어빵을 뽑아내는 교육을 하는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 예술교육은 예술인 음악가를 양성하는 것이 아니라 예술인 교육자를 양성하는 교육의 성격이 강하다. 그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은 우리나라의 음악 문화를 전통적 바탕과 음악적 생성의 원인 등 다양한 시선으로 보지 않고 붕어빵식 자신의 음악적 잣대로만 음악을 분석하고 평가한다. 국민성은 우수한데 제도가 발목을 잡는 형국이다. 그런 점에서 K-POP 등 한류를 형성하고 있는 대중음악은 제도권의 구애를 받지 않고 자신들의 예술적 역량을 마음껏 발휘할 수 있는 것이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학교 성적은 엉망이었는데 스위스 바젤로 간 뒤 좋은 예비학교에서 좋은 교사를 만나 처음으로 인정을 받는다. 자신의 가치를 알아봐 주는 사람이 생기면서 아인슈타인은 마침내 최고의 물리학자가 된 것이다. 21세기 비틀즈라고 불리며 아메리칸 뮤직 어워드 3년 연속 수상, 빌보드 핫100 1위, 그래미 어워드 후보에 오른 방탄소년단(BTS)은 2013년 중소기획사에서 데뷔했지만, 비슷한 경쟁을 해야 하는 국내를 벗어나 일찌감치 해외로 진출하였다. 멤버들은 자신들이 겪은 고생했던 삶들을 스스로 작품에 반영하며 그들만의 메시지를 유튜브에 자체 프로그램을 만들어 올렸다. 직접 트위터로 진솔하게 팬들과 소통하는 등, 스스로 활로를 개척하며 세계 최고의 K-POP 그룹이 되었다. 이러한 음악 영재들은 음악을 통해서 철학을 배우고 인생을 배운다.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 사고하는 방식이 일반사람들과는 다르다. 이들에게 일반 철학을 가르치고 일반교양을 주입하다 보면 재능의 날이 무뎌진다. 한류라고 인정받는 K-POP 등 대중음악은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창의성과 끼를 마음껏 발휘한 결과물인 것이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때부터 지금까지 소멸하지 않고 삶의 희비 애환을 담아 작곡되어 불리는 트로트 등의 대중가요는 100년의 역사를 가진 대중 명곡으로서의 가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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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1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0회’를 보고, 보내주신 의견을 애독자분들과 공유하고자 한다. "오늘도 잘 봤어요^^, 근데 한 가지 착오가 있는 듯해서 ㅡ문의, ‘요나누끼(四七拔き)’의 ‘도 레 미 솔 라’는 한국의 전통음계인 ‘황(黃; 도) 태(太; 레) 중(仲; 미) 임(林; 솔) 남(南; 라)’에 해당한다." 중, 중(仲; 미)은 중(仲; 파)의 오기인 듯 하네요. 요나누끼는 黃. 太. 姑. 林. 南. ??.”(서울예술대학교 하주화 명예교수 제보) "선생님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5음 음계를 논술하신 부분에서 서양의 평균율 5음계와 중국의 궁조 5음계, 일본의 요나누끼 음계(5음계)는 모두 도음계(도, 레, 미, 솔, 라)가 맞습니다. 하지만 선생님께서 말씀하신 우리나라 5음계(황 태 중 임 남)는 도 레 미 솔 라가 아닌 솔, 라, 도, 레, 미, 음 구조입니다. 도음계 구조로 말씀하시려면 황, 태, 고, 임, 남(도, 레, 미, 솔, 라)로 되어 있다고 하셔야 합니다. 이는 우리나라 전통음계 중에서 서양의 5음계(Pentatonic Scale)와 유사한 음계는 황, 태, 중, 임, 남을 예로 든 솔음계입니다. 하지만 우리나라 민요 중에 아리랑과 같이 맺는 음이 도음으로 끝나는 음악을 솔음계라고 하지말고 도음계라고 명하자고 황준연교수가 한국음악 용어에 관한 학술회의(1993년 무렵 경기도 여주 라마다호텔)에서 주장하였고 백대웅교수를 비롯한 여러 교수님들이 이 주장을 수용하여 아리랑과 같이 도로 끝을 맺는 음악은 도음계, 창부타령과 같이 솔음으로 끝을 맺는 음악은 솔음계로 구분하기로 합의한 바 있습니다. 요컨대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5음계(도음계)와 같다고 주장 하시려면 황, 태, 고, 임, 남 이라고 논리를 주장하셔야 옳다고 생각합니다. 가능하시면 정정을 하시면 좋을 듯 합니다. 선생님의 명예와도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전북대학교 이화동 교수 제보) "소중한 글 공유 감사합니다. 기본적으로 동감 동의합니다. 음악적으로 이리 풀어주시니 감사하고 든든합니다.^^ 본문에 실수로 동백아가씨 연도를 1963이라 적으신 듯요. 이미지 설명에서는 맞게 1964로 적으셨습니다.”(단국대학교 장유정 교수 제보) 세분 교수님께서 보내주신 의견에 심심한 감사를 드린다. 사실 일반 대중들은 국악의 5음계인 황 태 중 (고) 임 남을 잘 모르고 생소할 뿐이다. 글을 쓰면서도 이 부분을 언급할지 고민 했지만, 이러한 기회를 통해서 한번 소개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음 구조보다는 음계 구성에 비중을 두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일반 대중들이 조금이라도 귀에 익숙할 듯한 ‘황 태 중 임 남’을 쓰게 된 것이 결과적으로 실수가 되고 말았다. 필자의 명예를 위해서도 의견을 주신대로 ‘황 태 고 임 남’으로 바로 잡는다. 그렇게 하면 ‘도 레 미 솔 라’는 ‘솔 라 도 레 미’로 바꾸지 않아도 된다. 위의 내용을 기준으로 국악의 7음계와 서양음악의 7음계를 비교하면 다음과 같다. 황 태 고 중 임 남 응 – 음이름(계이름) c d e f g a b - 음이름 도 레 미 파 솔 라 시 - 계이름 서양음악은 음이름과 계이름으로 나뉘어져 있다. 고정음인 음높이를 가리키는 음이름과 각종 조(調, Key)를 기초로 해서 음마다 다르게 부르는 계이름이 있다. 국악은 위와 같은 음이름을 계이름으로도 혼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계이름과 비슷한 구음(口音)이라고 있지만 전공 악기마다 음을 다르게 부르면서 서양음악의 계이름과 같은 구실을 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국악의 순정율인 음정과 서양음악의 평균율의 음정을 비교하는 것도 무리라고 보지만 정확한 음정보다는 비슷한 음높이로 이해하면 좋겠다. 기회가 되면 국악의 순정율인 12율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여 이해를 돕도록 하겠다. 아울러 현대의 오선보를 활용한 창작국악은 평균율에 근접하도록 창작하고 연주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다시, 미야꼬부시의 요나누끼와 관련한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음구성인 ‘미 도 시 라 미’는 ‘파’가 생략된 미야꼬부시인 요나누끼의 단음계인 ‘미 도 시 라 파’와 비슷하다. 음계구조는 조금 다르지만. 특히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음계인 ‘미 도 시라 미’ 중에서 ‘시’음은 ‘도’음에서 꺾어서 내는 음으로, 일본의 미야꼬부시 음계의 ‘시’음보다 더 많이 주음(主音)처럼 사용한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전통음악에는 꺾는 음이 없다. ‘도’에서 꺾어내는 ‘시’음은 흔들어주면서 슬픈 감정을 표현한다. 요나누끼의 ‘파’ 대신 우리가 ‘미’음을 사용하는 이유는 요나누끼의 ‘파’는 슬픈 표현의 음인 반음의 효과만 있는 반면 국악에서 ’미‘음을 사용하는 것은 그 ‘미’음을 격렬하게 흔들어주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서 요나누끼 스타일의 노래보다 훨씬 더 슬픈 감정을 표현하는 특징이 있는 것이다. 판소리와 남도민요의 음구성과 음악적 특징을 설명하는 이유는, 요나누끼의 단음계인 ‘미 도 시 라 파’의 5음계는 일본 대중음악인 엔카만이 갖는 음계의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우리나라에서 이러한 요나누끼의 5음계의 음조직으로 작곡된 노래라면 두말할 것 없이 엔카의 아류라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오해를 받은 노래가 ‘동백아가씨’이다. 그래서 우리 국악의 전통음계와 비교해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본 엔카의 대부라고 불리는 고가 마사오 작곡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 淚か溜息か)>는한국의 전수린 작곡의 <고요한 장안>의 노래를 표절했다고 한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다음 회에 이야기해 보겠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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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10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트로트라는 용어는 일본인 특유의 발음과 결합해 ‘도로토’로 불렸다. 한국도 트로트를 저마다 ‘도로토’ ‘트로트’ 등 서로 다르게 부르다가 1960년대 이후 트로트로 수정되어 하나의 장르로 굳어지게 되었다. 이 장르가 뽕짝이라는 별칭을 얻은 것도 이 무렵이다. 1960년대 중반 신문이나 잡지에서는 트로트와 뽕짝이라는 말이 혼용되었다. 뽕짝이라는 용어는 비칭(卑稱)의 성격이 강해서 점차 트로트라는 말로 대체되었다고 하지만, 여전히 대중들 사이에서 뽕짝은 살아 숨 쉬고 있다. 사실 ‘뽕짝’은 트로트의 리듬을 들리는 대로 표현된 말로서 비칭이라는 데는 동의하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 비칭이라기보다는 애칭(愛稱)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트로트의 리듬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언급하고자 한다. 노래방 기구가 없던 시절에 우리 국악인들은 회식이나 모임 장소 등에서 소위 뽕짝인 유행가를 부를 때는 장고장단에 맞추어 노래를 부르곤 했다. 이때 반주 장단은 망설임도 없이 ‘동살풀이 장단’을 치며 흥을 북돋우었다. 여기에 뽕짝 노래는 어색하지 않게 아주 잘 어울렸고, 흥겹게 어깨춤까지 추었다. 가사의 리듬에 따라서 자연스럽게 장단도 변화시키면서 말이다. 현재는 이러한 뽕짝 리듬인 유행가를 일본에서는 엔카라고 부르고 한국에서는 트로트라고 부른다. 그런데 한국의 트로트는 일본의 엔카를 흉내 낸 왜색 가요라고 한다. 그래서 부르기를 금지당하는 수모를 겪던 시절도 있었다. 아직도 한국의 트로트는 일본의 음계인 미야꼬부시(都節)나 요나누끼 음계가 적용된 음악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현재도 이러한 비판 없는 주장들을 인용하고 받아쓴 트로트 관련 기사들이 "일본 엔카의 아류인 트로트”라고 언론에 보도되기도 한다. 과연 한국의 트로트는 유행가가 시작된 일제 강점기 때부터 일본의 엔카를 흉내 낸 왜색가요인지를 탐색해 보는 것은 우리나라의 트로트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요소라고 생각한다. 일본의 음계인 미야꼬부시(都節)와 요나누끼 음계는 어떤 음계인지부터 알아보도록 하자(채승기 ‧ 나운영 글 참조). 일본은 19세기인 메이지(明治) 시대(1867~1912)까지만 해도 음계에 대한 정리가 안 되어 있었다. 요나누끼 음계란, 말 만들기를 좋아하는 일본인들이 근대에 만든 말로서 일본 대사전과 일본 음악사전에도 나오지 않는 신조어(新造語)이다. 즉 요나누끼 음계는 미야꼬부시의 다른 이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요나누끼(よなぬき)’라는 말의 뜻은 요(よっつ=4), 나(ななっつ=7), 누끼(拔き=빼기)로서 7음계에서 4음과 7음을 뺀 나머지 5음 음계를 말하는 것이다. 장음계의 경우는 도 레 미 파솔 라 시중에서 ‘파’와 ‘시’를 빼면 되고, 단음계의 경우에는 도 레미 파 솔라 시 중에서 ‘레’와 ‘솔’을 빼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하면 장음계의 경우는 ‘도 레 미 솔 라’, 단음계의 경우에는 ‘미 도 시 라 파‘의 5음 음계가 되는데 이것을 ’요나누끼 음계‘라고 하는 것이다. 1938년에 동경에서 발행된 음악사전에는 미야꼬부시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1892년에 우에하라 로꾸시로라는 음악 이론가가 쓴 책 속악선율고(俗樂旋律考)에서 처음으로 ‘도시음계-음(陰)음계’라는 뜻인 ‘미야꼬부시(みやこぶし,都節)’와 ‘시골음계-양(陽)음계’의 뜻인 ‘이나까부시(ぃなかぶし,田舍節)’라는 이름을 붙여 음계이름으로 쓰이기 시작하였다. 미야꼬부시는 하행 5음계로서 ‘미 도 시 라 파’이고, 이나까부시는 상행 5음계로서 ‘도 레 미 솔 라’가 된다. 미야꼬부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일본의 기타 교본으로 공부한 한국의 일부 대중가요 작곡가들은 기타 코드나 멜로디가 본의 아니게 미야꼬부시 음계로 작곡돼서 왜색 가요 시비가 일었던 것도 사실이다. 대표적인 노래가 1963년도의 '동백아가씨'이다. 5음 음계라도 어떤 음과 조합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른 음계가 될 수 있는데, 5음 음계로 작곡된 곡으로 '새마을 노래', '반달', '고향의 봄' 등이 있다. 교회에서 불리는 찬송가는 '복의 근원 강림하사', '내 주를 가까이' 등이 있고, 우리에게 친숙한 스코틀랜드 민요인 '[올드 랭 사인', '어메이징 그레이스' 등 우리나라와 일본뿐만 아니라 서양의 전통민요들도 대부분 5음 음계로 구성되어 있다. ‘요나누끼(四七拔き)’의 ‘도 레 미 솔 라’는 한국의 전통음계인 ‘황(黃; 도) 태(太; 레) 중(仲; 미) 임(林; 솔) 남(南; 라)’에 해당한다. 서양음악의 평균율과 국악의 순정률의 음계에는 차이가 있지만 음계 구성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요나누끼(四七拔き)’의 장음계인 ‘도 레 미 솔 라’는 일본에만 있는 음계가 아니고, 음양오행(陰陽五行 : 木火土金水)의 원리에 따른 것으로 한국, 일본, 중국에서 공통으로 사용되었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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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9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일본은 메이지 시대(1868~1912)가 열리면서 일본 대중음악의 태동기가 시작된다. 1892년 음악 이론가 우에하라 로꾸시로가 쓴 책 ‘속악선율고’(俗樂旋律考)에 일본의 음계가 처음으로 언급된 것으로 보아, 일본의 대중가요는 19세기 후반 무렵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는 일본의 전통 민속음악과 함께 속악(俗樂)이라고 부른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는 일본의 대중가요를 지칭하는 소위 엔카라는 용어는 없었다. 일본이 서양음악을 접하게 된 것은 서양문물이 유입되면서부터다. 1910년 무렵에는 유성기 레코드가 수입되었지만 열악한 환경으로 일반인들에게 잘 보급되지 않았고, 서양 노래나 일본 가요들을 들을 기회는 쉽지 않았다. 한국은 일본과 음악적으로 교류하기 이전인 1870년경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서양음악이 유입된 시기는 일본과 비슷한 시기이거나, 우리나라가 조금 앞선 시기일 수도 있다. 1901년부터 1916년까지는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이왕직 군악대장으로 복무하며 양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1910년경부터는 본격적인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어 이미 ‘조선정악전습소’ ‘이화학당’ ‘배재학당’ 등에서 서양식의 성악과 기악을 가르치고 있었다.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마치고 온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창작가요를 작곡할 소양과 외국 음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1910년경 일본은 레코드가 일반적으로 보급되지 않았고, 번안곡이나 창작곡의 노래 가사만 인쇄해 거리에서 바이올린을 켜며 노래 가사집을 팔던 거리의 악사들이 있었다. 이들은 엔카시(艶歌師)로 불렸다. 일본 가요계는 훗날 일본 유행가요에 장르 이름을 붙일 필요성을 깨닫고, 일본적인 이름을 찾다가 엔카(艶歌)에서 착안해 이와 발음이 똑같은 엔카(演歌)라는 말로 고쳐 쓰게 되었다. 이것은 모두 다 아는 사실이다. 엔카라는 용어를 사용한 시기도, 일본 엔카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고가 마사오의 발표 작품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를 발표한 1931년경이다. 일본에서 엔카의 아버지라고 부르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는 누구인가? 고가 마사오를 탐색하는 것은 일본 엔카를 이해하는 데 필수 불가결이라고 생각한다. 일본 대중가요계에 큰 발자국을 남기며 엔카의 아버지라고 불리는 고가 마사오(1904년 11월 18일~1978년 7월 25일)는 현재의 후쿠오카 현(福岡 縣) 오가와 시에서 태어나 7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그해에 어머니와 함께 경기도 인천으로 이주하여 살았다. 인천공립심상소학교를 다니다가 12살 때 서울로 이사해서 경성 남대문소학교로 전학했다. 소학교 졸업 후에는 선린상업학교에 진학했다. 선린상업학교에서 밴드 활동과 합창단을 조직하여 음악 활동에 심취하며 재능을 보였다고 한다. 17살에 선린상업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가족과 함께 오사카로 돌아가 상점에서 잠시 근무하기도 했다. 그 이듬해 1923년에는 메이지(明治) 대학을 입학하고, 1931년에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를 발표하면서 두각을 나타낸다. 그 후로 고가 마사오는 엔카의 대부로 불렸고, 작고할 때까지 작곡한 곡으로는 약 4,000여 곡에 이른다고 한다. 고가 마사오는 감수성이 민감한 7세부터인 유소년 시절을 한국에서 보냈다. 발달심리학에서는 7,8세부터는 두뇌 발달이 감성의 영역에서 이성의 영역으로 바뀌며, 신체와 정서의 자극에 따라서 상상력과 창의력이 키워진다고 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이, 고가 마사오는 ‘고가 마사오 예술대관(古賀政男藝術大觀)’의 회고기에서 "큰 형의 가게에 60여 명의 조선인이 있었는데, 나는 이들이 흥얼거리는 조선 민요를 날마다 들었다.”라고 전했다. 작고 1년 전인 1977년 ‘저 꽃 이 꽃’이란 노래는 "만일 내가 유소년 시절을 조선에서 보내지 않았다면 이런 곡을 만들 수 없었을 것이다.”라고 고백해 한국의 정서와 전통음악이 자신의 음악적 기반이었음을 시인했다.(김열규; "아리랑 역사여, 겨레의 소리여” 글 참조) 고가 마사오는 약 11년의 기나긴 청소년기를 한국에서 보내며 음악가로서의 소질과 재능을 키워나갔다. 한국 전통의 민요나 판소리, 풍물 장단 등이 그의 음악적 형성에 큰 밑바탕이 되었으리라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가 마사오의 음악은 처음 듣는 곡이라도 예전에 즐겨들었던 곡으로 착각할 만큼 멜로디가 친근한 곡이 많다. 당시 고가 마사오는 홀어머니와 살면서 어려운 형편이었고, 식민지 조선의 백성과 정서적인 동질감을 느끼게 되면서 조선의 음악에 많은 호감을 느끼게 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이것은 후일 고가 마사오의 음악에 한국의 정서나 가락이 상당 부분 반영된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여겨진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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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8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현재까지 일본의 전통음악인 가가쿠(雅樂)로 전승되고 있는 고구려 음악인 고마가쿠(高麗樂)는 848년에 일본의 왕립음악기관인 가가쿠료(雅樂寮)의 악제개혁(樂制改革) 때 백제음악인 구다라가쿠(百濟樂)와 신라음악인 시라기가쿠(新羅樂)를 통폐합시켜 가가쿠료의 오른쪽인 우방(右坊)에 배치하였다. 좌방(左坊)에는 당나라 음악인 도가쿠(唐樂)를 배치했다. 현재 일본에서는 고마가쿠는 우방악으로 도가쿠는 좌방악이라고도 부른다.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음악가들의 활약상을 조금 더 짚어보도록 하자. 570년에 일본에서 고구려 사신이 머물던 고려관(高麗館), 또는 일명 상락관(相樂館)이 완성됐을 당시 고구려 음악인 고마가쿠가 상락관에서 연주되었다. 701년 왕립음악기관인 가가쿠료의 직원령(職員令)에 의하면 당시에 고구려의 고려악사(高麗樂師)는 4명이었고, 그 문하생인 고려악생(高麗樂生)은 20명이었다. 고려악사 4명은 횡적(橫笛; 가로부는 피리) · 군후((고구려 거문고)는 연주되지 않았고, 그 대신에 고(鼓)가 추가되어 고마가쿠에서 연주되었다. 고마가쿠의 횡적은 현행 고마부에(高麗笛; 고려적)로 전승되었고, 막목은 현행 히치리키(觱篥; 피리)로 전승됐으며 고(鼓)는 현행 산노쓰즈미(三の鼓)로 전승되고 있다. 고마부에는 가로로 부는 피리로 한반도에서 일본으로 전파된 대금과 같이 옆으로 부는 악기이다. 한 개의 취구와 6개의 지공이 있고 길이는 37cm 지름은 9mm 정도로 우리나라 대금보다는 작은 악기이다. 막목은 일본에서는 히치리키라고 부르는데 한반도에서 넘어간 악기로 현재 우리나라의 당피리와 비슷하다. 악기의 길이는 약 18cm 정도이다. 산노쓰즈미는 우리나라의 장구의 형태처럼 허리가 잘록하고, 길이가 20cm 정도로 장구에 비하면 아주 작은 편이다. 음악 스타일이라고 할 수 있는 그 당시 음악의 악조(樂調) 체계는 어떠했을까? 고구려, 백제, 신라는 악기만 일본에 전한 것이 아니었다. 음악의 체계까지 전해지면서 일본 음악의 이론이 정립될 수 있도록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악조의 이름에서 알 수가 있다. 현행 일본의 아악인 가가쿠의 고마가쿠에서 사용되는 악조(樂調)는 세 가지이다. 박일월조(狛壹越調)라고 부르는 고려일월조(高麗壹越調)와 박평조(狛平調)라고 부르는 고려평조(高麗平調), 박쌍조(狛雙調)라고 부르는 고려쌍조(高麗雙調) 등, 세 가지이다. 박일월조와 고려일월조는 일본말로 고마 이치고쓰조(狛壹越調 또는 高麗壹越調)이고, 박평조와 고려평조는 고마 소조(狛平調 또는 高麗平調)이며, 박쌍조와 고려쌍조는 고마 효조(狛雙調 또는 高麗雙調)라고 부른다. 세 악조의 기본음의 음고(키)는 고마가쿠는 D키이고 도가쿠는 C키로 고마가쿠가 당나라 음악인 도가쿠보다 음정이 장2도가 높다. 세 가지 악조로 공연되는 곡을 살펴보면 고려 평조로 된 고마가쿠의 무악곡(舞樂曲, Bugaku)은 임가(林歌, Ringa)에만 해당된다. 고려쌍조의 무악곡은 백빈(白濱, Hakuhin) · 소지마리(蘇志磨利, Soshimari) · 지구(地久, Chikyū) · 등천락(登天樂: Tōtenraku)에 해당되며, 고려일월조의 무악곡은 감취악(酣醉樂, Kansuiraku) · 고려용(高麗龍: Komaryū) · 곤륜팔선(崑崙八仙, Konron Hassen) · 귀덕후(歸德侯, Kitokugo) · 길간(桔桿, Kikkan) · 납소리(納蘇利, Nasori) · 박모(狛鉾, Komaboko) · 신말갈(新靺鞨, Shinmaka) · 신조소(新鳥蘇, Shintoriso) · 인화락(仁和樂: Ninnaraku)·장보락(長保樂: Chōbōraku) · 진숙덕(進宿德, Shinshukutoku) · 퇴숙덕(退宿德, Tsishukutoku) · 호접악(胡蝶樂, Kochōraku) 등이 해당된다. 현재 일본 가가쿠에서 공연되고 있다. 일본 전통음악은 고대부터 19세기 중반인 에도시대를 거쳐 근대에 이르기까지 고구려 음악인 고마가쿠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을 계속 거듭하였다. 가가쿠라는 이름으로 많은 악기들이 변형되고, 새로이 만들어지면서 현재까지도 전통음악이 유지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민속음악인 속악(俗樂)도 활성화되기 시작한다. 일본의 대중음악은 19세기 후반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는 일본의 전통 민속음악과 함께 속악(俗樂)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에도시대를 지나 메이지 시대(1868~1912)를 열면서 일본은 대중음악의 태동기를 맞이하게 된다. 이때까지는 일본의 대중가요를 지칭하는 소위 엔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다. 19세기 후반부터 서양문물이 유입되면서 간접적으로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무렵 한국도 1870년경부터 서양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아 한국의 서양음악 유입은 일본과는 크게 상관이 없다고 본다. 지난 2회에 걸쳐 삼국시대에 전수한 일본 전통음악에 대해 간단히 살펴보았다. 다음 회에서는 트로트 뽕짝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겠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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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뽕짝을 좀 더 깊이 이해하기 위해 한국과 일본의 음악 관계를 역사적으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역사적 사실의 토대는 일본근대음악과 엔카와 뽕짝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결정적인 요소이기도 하다. (‘일본을 알아야 한다’ 이일영 글, ‘한겨레음악대사전’ 송방송 저 참조). 고대에서 근대까지의 일본음악은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음악적 교류가 어떻게 이루어 졌는지 역사를 찾아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 본다. 고대 일본은 문화적 빈국으로 우리나라로부터 다양한 문화를 받아들였다. 8세기 일본 나라시대(奈良時代) 때의 역사서인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아래와 같이 기록되어 전해진다. 서기 453년 일본의 19대 인교 천황(允恭天皇)의 장례식에 신라 제19대 눌지왕(訥祗王, ?~458)이 악공 80여 명과 여러 악기를 보냈다는 기록이다. 그러나 일본 역사서 ‘일본서기’는 이를 바쳤다고 왜곡하고 있다. 554년에는 일본 궁중에 백제 음악인이 와 있었는데 이 사람들과 교체하기 위하여 백제 성왕(523~554) 시대 팔품의 관직을 가진 삼근(三斤)이라는 음악인을 파견하여 일본으로 건너왔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554년 이전에 이미 백제의 여러 음악인이 일본 궁중에서 음악을 담당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이다. 당시 일본에는 궁중 연희를 치를 만한 음악인과 악기가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후 백제 무왕(600~640) 시대에는 예인(藝人) 미마지(味摩之)가 612년에 기악무(伎樂舞)를 일본에 전했고, 이는 일본의 전통 가면극 기가쿠(伎樂)의 형성에 기여했다. 미마지는 일본 사쿠라이 마을에서 소년들을 모아 기가쿠를 가르쳤다는 내용도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 고구려 음악이 일본에 전해진 기록은 684년 제40대 천황(天武天皇?~686) 때이다. 기록에는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高麗樂)가 전해졌다고 하는데, 고마가쿠는 일본의 궁중음악 가가쿠(雅樂) 중 신소우도쿠(進走禿:가면춤의 일종) 가 되었다고 한다. 당시 고구려와 백제는 같은 악기를 사용하였지만, 일본에 서로 다른 음악으로 전해졌다는 사실에서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은 서로 다른 독자적인 음악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확인하게 된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일본은 임나일본부설을 통해 우리나라의 문화를 받아들인 사실을 부인하며 역사 왜곡을 일삼고 있다. 임나일본부설이란 4세기 중엽에 한반도의 가야 지역을 군사적으로 정벌해 임나일본부라는 통치기관을 설치하고 6세기 중엽까지 한반도 남부를 경영했다는 학설이다. 현재는 학설로서의 생명력을 거의 잃었지만 고구려, 백제, 신라의 음악을 전해 받은 일본은 현재까지도 임나일본부설을 교과서에 실어 교육을 하고 있다. 일본에는 중국의 수나라(581~630)와 당나라(618~907)의 음악 도가쿠(唐樂)도 전해졌다. ‘일본서기’의 기록을 보면 우리나라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高麗樂)가 도가쿠보다 먼저 일본에 전해졌음을 확실히 밝히고 있다. 고마가쿠는 848년 일본의 왕립음악기관인 가가쿠료(雅樂寮)의 악제개혁(樂制改革) 때 백제음악 구다라가쿠와 신라음악 시라기가쿠를 통폐합시켜 가가쿠료의 오른쪽 우방(右坊)에 배치했다. 좌방(左坊)에는 당나라 음악 도가쿠(唐樂)를 배치했고,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는 당나라 음악 도가쿠와 함께 일본 가가쿠(雅樂)의 양대산맥으로 현재까지 전승되고 있다. 일본은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의 바탕으로 전통춤과 전통가요도 형성된다. 무용과 노래가 함께 어우러진 음악 쿠니부리노 우타마이(国風歌舞)와 일본의 가요 우타이모노(謡物)가 있다. 일본의 전통 궁중음악 가가쿠(雅樂)의 도가쿠(唐樂)와 고마가쿠(高麗樂)는 관현악 중심의 실내음악이다. 무용 음악은 부가쿠(舞楽), 기악 합주의 독립된 음악은 칸겐(管弦)이라 부른다. 그밖에 다양한 종류의 민간 속악(俗樂)을 호가쿠(邦樂)로 분류하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일본 민속음악인 호가쿠를 속악으로 부르고 있다.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가 일본에 끼치는 영향은 19세기 중반인 에도막부 마지막 시대(1603~1868)까지 계속 이어진다. 다음 회는 고구려 음악 고마가쿠의 영향으로 발전을 이룬, 일본 전통음악에 대해 조금 더 소개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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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6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트로트 이해를 돕기 위해 몇 가지 배경지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트로트는 ‘빠르게 걷다’, ‘바쁜 걸음으로 뛰다’ 등의 뜻을 담고 있다. 재즈의 한 요소로 1914년 이후 미국과 영국 등에서 연주 용어로 굳어졌다. 주로 싱커페이션 리듬인 당김음 주법의 피아노 연주 스타일 ‘래그타임(ragtime)’ 곡, 재즈 템포 4분의 4박자 사교춤의 스텝 또는 그 연주 리듬을 일컫는 폭스 트롯(foxtrot)로 부터 시작됐다는 설이 있다. 사교춤은 볼룸댄스라고도 부르는데 사교적인 즐거움을 위해 2명 내지 그 이상의 사람들과 함께 추는 춤을 말한다. 왈츠(waltz), 탱고(tango), 차차차(cha cha cha) 등을 비롯해 블루스(blues), 부기우기(boogie woogie), 트위스트(twist) 등도 넓은 의미로 볼룸댄스라고 부른다. ‘폭스’라는 수식어는 이 리듬을 고안해 낸 무용가 핸리 폭스(Henry Fox)를 일컫는다. 폭스 리듬은 미국에서 발원하여 1920년대 한국과 일본에 상륙했고, 전통음악과 만나 트로트와 엔카로 정착된 것이다. 참고로 오늘날 서양에서 트로트는 사교댄스 용어로만 남아 있고 연주 용어로는 사용하지 않는다. 당시 한국에서는 전통음악과 결부되어 많은 곡이 작곡되었다. 앞으로 그 곡들을 소개하겠지만, 대표적인 예가 ‘한류 이야기 5회’에 소개된 ‘황성 옛터’(황성의 적)이다. ‘황성 옛터’는 4분의 3박자로 국악의 중모리장단이 입혀졌는데, 가사의 어법과 잘 어우러진 곡이다. 중모리장단의 한 장단은 한마디 3/4 박자로 4마디에 총 12박을 이룬다. ①떵-떡 ②쿵떠떡 ③떵-떡 ④쿵-떡 과 같은 식이다. 중모리장단을 아는 사람은 금방 고개 끄덕일 것이다. 작곡자 전수린은 중모리장단을 처음부터 기획하고 작곡한 것은 아니다. 몸과 마음에 스민 전통 음악적 바탕이 자신도 모르게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개성 만월대의 폐허를 보며 즉흥적으로 선율에 옮겼고 배우 왕 평이 가사를 담아 이애리수가 부르게 되었다. 이애리수는 일제강점기의 억눌린 감정을 한 맺힌 설움으로 노래했고, 조선총독부는 민족감정을 선동한다는 이유로 금지곡으로 지정하였다. 그러나 삽시간에 전국적으로 퍼져 유행했고 순식간에 5만장이 판매되었다. 이런 파장은 바로 우리 전통음악 문화의 힘이 아닐까 싶다. 1920년대 이후 트로트 장르 유행가 악보(신나라 레코드 복각 악보 참조)를 보면 대부분 4분의 3박자, 4분의 4박자, 8분의 6박자 등이다. 댄스곡에서는 작곡자가 곡 분위기에 따라 이름을 붙여 템포와 악상을 지시하였다. 왈츠, 블루스, 탱고, 맘보, 룸바, 부기우기 등과 같이 하나의 리듬으로 간주되어 악보 위에 씌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명칭을 보면, 댄스곡 리듬에 충실해서 작곡된 것도 아니다. 단지 댄스곡의 분위기 위주로 곡을 썼다는 의미가 더 큰 것으로 보인다. 1920년대 이후의 트로트는 아직 완벽하게 정리되지 않은 큰 틀의 트로트 장르의 새로운 창작곡의 폭스트로트의 리듬과 한국의 전통음악적 요소가 녹아들어간 트로트의 정착시기라고 볼 수 있겠다. 1950~1960년대 악보를 보면 유행가(대중가요)의 장르가 좀 더 세분화되고 다양해진다. 음악적 역량이 높아짐에 따라 리듬 용어가 아닌 음악 용어들이 가요계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흘러간 유행가'는 모두 트로트라고 불러도 지나치지 않지만, 트로트를 ’흘러간 유행가‘의 범주에 모두 넣었던 것과는 달리 폭스트롯의 리듬 수준을 넘어 전문화되어 가는 것을 알 수 있다. 트로트의 템포와 악상 용어로 사용했던 왈츠, 블루스, 탱고, 맘보, 룸바, 부기우기 등도 더 이상 사용하지 않게 된 것이다. 1950년대까지는 트로트가 하나의 장르나 형식으로 보지 않고 ’흘러간 유행가‘의 대명사로 여겼음을 알 수 있다. 요즘 우리가 사용하는 트로트 장르는 리듬 패턴을 넘어 악곡 양식(song form)을 지칭한다. 소위 ‘뽕짝’이라고 부르는 ‘트로트’. 혹자는 ‘엔카 스타일’이라고 말하며 현재 일본에서는 없어지고 우리나라에만 있는 용어라고 하는데, 과연 그런가? 그렇다면 왜 그럴까? 다음 회에서 만나 보고자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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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5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엔카의 유래에 대해 이야기하기 전에, 지난 회에 발행된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4’에서 오류 등 수정과 보완할 사항이 발생하여 잠시 언급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많이 친숙한 가수 김정구의 친형인 김용환의 이름 중 ‘환’자가 편집과정에서 탈자가 발생하였다. 물론 편집자의 발 빠른 대응으로 발견 즉시 교정되었다. 그리고 ‘황성옛터’ 악보 중 한국콘텐츠진흥원 출처의 악보를 인용했는데, 그 악보 자체의 오류로 인한 잘못된 정보가 독자들께 전달되었다. 물론 편집자의 잽싼 대응으로 틀린 작사가의 이름이 ‘황정’에서 ‘왕평’으로 수정되었다. 그럼에도 오류로 인한 혼란을 끼친 것 같아서 사죄의 말씀을 드린다. 그러면서 ‘황성옛터’에 대한 곡 설명을 해드리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 잠깐 언급하고자 한다.‘황성옛터’의 본래 제목은 ‘황성(荒城)의 적(跡)이다. 이 곡명은 1932년도 최초의 취입 레코드 라벨에 인쇄되었던 곡명이다(정문교 신나라레코드 사장 제보). 왕평(王平) 작사, 전수린 작곡, 이애리수 노래이다. 이 ‘황성옛터’는 1928년도에 전수린이 소속되어 있던 순회극단 연극사(硏劇舍)가 개성공연을 하고 있을 때 작곡된 노래로서 폐허가 된 고려의 옛 궁터인 황성(고려 현종 때 지금의 평양에 축조한 성) 만월대를 찾아 받은 쓸쓸한 감회를 그린 노래이다. 이 노래는 그 해 가을 단성사에서 가수 이애리수가 막간무대에서 불렀는데, 노래 부를 때마다 관중들도 따라 불러 크게 히트하면서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조선총독부는 유행을 방지하기 위해 금지시켰으나 계속 불려졌다고 한다(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조). 가수 이애리수는 이 노래를 통해서 배우에서 가수로 전환하는 일대 운명의 전환기를 맞게 된다. 고려의 옛 궁터인 황성 만월대의 달 밝은 밤, 역사의 무상함을 느껴 즉흥적으로 작곡한 황성옛터는 느린 3/4박자의 리듬에 단음계로 만들어진 곡이다. 국악의 중모리 장단에 선율을 얹어 작곡한 것으로 보인다. 전수린의 즉흥성에 중모리장단이 자연스럽게 표출된 것일 것이다. 그러면 엔카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자. 일본에서는, 일본 대중가요를 지칭하는 소위 엔카라는 장르의 이름은 언제부터 사용하고 있었을까? 일본 가요음악의 태동기인 19세기 후반 무렵(이 당시 일본에서는 속악(俗樂)이라고 불렀음)부터 1920년대 후반까지도 엔카라는 용어 자체가 없었다. 그리고 1800년대 후반부터 서양문물이 유입되면서 간접적으로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 가요계의 초창기라고 할 수 있는 1910년 무렵에는 유성기라고 불리는 레코드가 수입되었지만, 열악한 환경 속에서 레코드가 일반인들에게 잘 보급되지 않아 일반 국민들은 서양 노래나 일본의 가요들을 쉽게 들을 수 있는 기회를 갖지 못했다. 그래서 이 당시에는 원곡의 음이나 리듬은 그대로 두고 가사만을 다른 언어나 시대에 맞게 바꾸어 고친 번안곡을 부르는 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음악들을 악보로 인쇄해서 보급하는 수준은 아직 갖춰져 있지 않아 노래가사만 수록된 노래집이 등장하게 된다. 이렇게 서양의 번안곡과 함께 새로이 작곡한 창작곡의 노래 가사만 인쇄해 거리에 돌아다니면서 노래집을 팔던 사람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처음에는 샤미센을 연주하다가 나중에 서양음악이 유입되면서 바이올린을 켜며 노래 가사집을 팔던 거리의 악사들이었다. 일본에서는 그동안 이들을 엔카시(艶歌師)라고 불러 왔던 것이다. 일본 가요계는 훗날 ‘엔카의 대부’라고 불리는 고가 마사오가 등장할 무렵, 이름 붙이기를 좋아하는 일본 사람들은 유행가요에 장르 이름을 붙일 필요를 느끼게 되었다. 이렇게 일본식의 이름을 찾다가 엔카시의 엔카(艶歌)에서 착안해 이와 발음이 똑같은 한자말만 바꿔 엔카(演歌)라는 말로 일본 유행가의 장르 이름을 탄생시키게 된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일본 엔카의 대부로 고가 마사오 작곡의 <술은 눈물인가 한숨인가(酒は 淚か溜息か)>는 1931년도에 일본에서 발표하게 되는데, 이 때 발표한 이 노래를 일본 음악계에서는 고가 마사오의 최초의 공식적인 작품이라고 본다. 그리고 이 노래는 발표하자마자 대히트를 치게 된다. 그러면서, 이 노래를 통해서 일본에서는 고가 마사오를 ‘엔카의 대부’라고 부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절대적으로 추종할 수 없는 엔카의 우두머리가 된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엔카라는 장르가 탄생한 시기는 바로 1930년도의 전후가 된다고 추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다음 회에서는 트로트의 유래에 대해서 알아보기로 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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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4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한국은 일본과 음악적으로 교류하기 이전인, 1870년경부터 교회를 중심으로 서양음악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1901년부터 1916년까지는 독일인 프란츠 에케르트(1852~1916)가 우리나라로 건너와 이왕직군악대장으로 복무하며 양악을 가르치기도 했다. 1800년대 후반에 설립된 ‘배재학당’과 ‘이화학당’, 1911년에 재발족 된 ‘조선정악전습소’에서는 음악학교들이 설립되어 서양식의 성악과 기악을 가르쳤다. 이 시기에 ‘시카고 음악학교’ 등 미국이나 유럽으로 유학을 다녀오는 이들도 있었기 때문에 창작가요를 작곡할 소양과 외국음악에 대한 정보를 충분히 갖춘 시기라고도 볼 수 있다. 이러한 바탕으로 1932년에는 전수린을 기폭제로 한국 작곡가의 절정시대가 개막된다. 1926년부터 1936년 사이에 데뷔한 작곡가들을 살펴보자. 1927년 경성방송 개국을 계기로 홍난파와 관현악단을 창설한 김교성은 <찔레꽃>, <직녀성> 등 수많은 히트작을 남겼고, 1932년에 빅타레코드에 전속되었다. 천재 작곡가 김용환은 김정구의 친형으로 배우이자 가수, 작곡가를 겸했고 1932년 폴리돌에 전속되었다. <홍도야 울지마라>, <처녀총각> 등을 남긴 김준영은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한 한국 서양음악의 선구자이자 피아니스트였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바이올리니스트 문호월은 <노들강변> 이난영의 <봄맞이> 남인수의 <천리타향>을 남겼고, 일본 음악학교를 졸업한 손목인은 고복수의 <타향살이>, <목포의 눈물> 등 주옥같은 선율을 남겼다. 한국 최고의 작곡가 ‘박시춘’도 이 시기에 데뷔했는데 <애수의 소야곡>, <이별의 부산정거장>, <신라의 달밤>, <삼다도 소식>, 등 수많은 히트곡을 남겼다. 한국의 슈베르트라고 불리는 이재호는 일본의 고등음악학교를 졸업하고 20세에 오케레코드에 전속되어 <나그네 설움>, <번지 없는 주막> 등 불후의 명작을 쏟아낸다. 홍난파도 이 시기에 데뷔하는데 안옥경의 <여인의 호소> 이규남의 <유랑의 나그네> 등을 발표했다. 특히 가곡 분야에 두각을 보여 <성불사의 밤>, <봉선화> 등의 주옥같은 음악을 남겼다. (이호섭 글 참조) 위에 언급된 곡들은 거의 100년 동안 우리 국민 속에서 애환과 희비를 담아 불려온 명곡이라 할 수 있겠다. 명곡의 사전적 의미는 매우 잘 만들어진 이름난 악곡을 말하는데, 이 시절 트로트 음악은 100년 동안 불려지고 연주되는 소위 명곡에 해당하는 음악이다. 유행에 관계없이 대중이 늘 즐겨 듣거나 부르는 노래와 악곡으로서 ‘대중명곡’인 것이다. 이러한 곡들은 우리말을 빼앗기고, 전통문화가 말살된 마음의 상처에 아픔을 도려내고 새살이 돋게 하듯이 작곡 되어졌다. 비록 서양음악의 낯선 틀 속에서 작곡 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 위에 전통음악인 민요와 판소리의 요소를 담아 대중음악으로 만들어지게 된 것이다. 서양음악의 틀에 숨결을 불어넣어 우리만의 독특하고 새로운 대중음악인 트로트를 탄생시킨 것이다. 서양음악의 음 구성을 보통 7음 음계, 5음 음계, 3음 음계라고 한다. 우리 전통음계도 7음 음계, 5음 음계, 3음 음계 등으로 구성되어 작곡을 할 때 활용되고 있다. 한국의 대중음악인 트로트를 작곡할 때 7음 음계와 5음 음계가 활용되고 있는데, 일본의 엔카도 이와 같은 음계를 활용하고 있다. 슬픈 음악일 때 미, 파, 시, 도가 쓰이는 것은 일본의 엔카나 한국의 트로트, 그리고 서양음악도 똑같다. 한국은 슬픈 음악에서 일본의 엔카보다 미, 파, 시, 도를 더 강하게 표현할 뿐 아니라 꺾기까지 첨가해 슬픔을 극도로 표현한다. 음계에 관해서는 다음에 자세히 설명하겠다. 다음 회에서는 엔카 장르가 언제 만들어졌는지, 트로트와 엔카의 유래를 소개한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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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3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우리 고유의 전통문화는 일제 강점기 민족문화말살정책에 의해 강제적으로 파괴당하는 아픔을 겪었다. 일제는 조선의 문화와 언어를 지우기 위해 내선일체内鮮一体 를 내세우며 황국신민화정책皇國臣民化政策을 추진했다. 민초들은 저항했지만 속절없이 핍박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시련은 우리를 더욱 강하게 만들었다. 온갖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항일운동을 하며 한국문화를 수호하고 계승, 개발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 시기는 농경사회에서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단계로 문명사회로의 전환점이 일어나는 때이기도 하다. 농촌이 도시가 되는 변화의 소용돌이 한가운데를 지나야하니 당연히 고통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또한 새로운 서양문화가 유입되면서 우리의 전통음악인 민요와 판소리는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민초들의 대중음악에 여러 장르의 서양음악이 영향을 끼쳤고 변화를 가져오기 시작했다. 전통음악인 민요와 판소리를 바탕으로 한 음악위에 서양음악 형식을 빌리면서 새로운 형태의 음악이 창작된 시기였다. 유행가인 트로트가 그 중 하나이다. 중국 춘추전국 시대의 천리마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백락에 얽힌 이야기에 의하면, 천리의 초원을 달렸어야 할 천리마가 주인을 잘 못 만나 소금 짐이나 메고 다녔다. 안쓰러운 마음에 백락이 자신의 옷을 벗어 덮어주자 천리마는 눈물을 흘리며 감동하여 하늘을 향해 크게 울었다고 한다. 알아봐주는 사람이 없으면 천리마는 결국 묻혀버리는 소금 짐이나 지는 소금장수의 말에 불과하다. 천리를 달려야 하는 명마가 소금 짐이나 끌며 매질을 당한다고 생각하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일제의 억압에도 불구하고 영민한 우리 조상들은 스스로 길을 찾는 천리마가 되었다. 유행가인 트로트를 통해 민족의식에 불을 지르고 자아의식을 깨워 도시의 문패와 번지수로 설명되는 노래를 하게 한 것이다. 이것은 새 시대의 새 가치를 담자는 창조의 의미이기도 하다. 고정불변의 전통에 갇혀 새 가치를 창조하지 못하는 유산상속자들과는 달리 새로운 시대상을 표출했다. 성도 이름도 사용할 수 없고 사는 집도 온전하지 못한 채 빼앗긴 나라의 슬픔을 노래했다. 그 당시에 부른 노래로 ‘번지 없는 주막’이란 제목의 가사이다. "문패도 번지수도 없는 주막에/궂은 비 나리 던 그 밤이 애절 쿠려/능수버들~”. 이 노래(트로트)는 문패와 번지수, 나의 집을 찾겠다는 열망과 역설적으로 민족적 자아를 드러내고 있다. 일제 강압의 이질적 문화틈바구니 속에서 그 시대의 갈등과 응축된 내면의 자의식을 각혈하듯 토해냈다. 황금심의 ‘알뜰한 당신’의 가사를 보면 "울고 왔다 울고 가는/설운 사정을/당신이 몰라주면~”이다. 절망적이고 암울한 상황에서도 사랑하는 이웃과 가족을 위로했다. 17세에 부른 빅단마의 ‘나는 열일곱 살이에요’에서는 "나는 가슴이/두근거려요/당신만 아세요/열일곱 살이에요~”라는 가사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트로트는 일제 강점기의 고난을 거치면서 국민들에게 위로가 되었던 것이다. ※ 외부 필진 기고는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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