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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br> 다시 읽는 ‘Song of Ariran' (4)님 웨일즈는 김산과 22차에 걸친 인터뷰 이후 중일전쟁 발발로 난징이 함락되어 활동이 여의치 않자 집필을 위해 중국 연안을 떠나 필리핀 바기오 섬으로 간 것이 1937년 말이다. 이후 집필을 끝내고 미국으로 돌아가 뉴욕 존데이(Johnday) 출판사에서 ‘Song of Arirang’을 발간한 것은 1941년이다. 이 시기 아리랑사 국면에서 보면, ‘아리랑’은 이미 전형성(典型性)을 획득하고, 한국(한민족)이라는 공동체 아이덴티티 표출 기능을 하며, 다층성과 잠재성을 지닌 메타문화(meta culture)로 존재하고 있었다. 이 책의 헌사격인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오래된 전래민요 5절 아리랑’이나 20여 회의 명징한 아리랑 진술들은 동북아시아 조선(Korea)의 국제적 질서를 담고 있다. 나아가 중국의 거대한 공산혁명 광풍 속에서 결코 바닷물 속의 소금 같이 녹아 버리는 존재가 아닌, 조국 혁명을 이루려는 한 조선 청년의 빛나는 투혼을 그려내기도 했다. 거기다 아름답고 슬픈 노래지만, 죽음을 넘고 넘어 끝내는 마지막 고개를 넘어가는 활화산 같은 열정을 추동하는 민중의 노래임을 발현해 냈다. 1930년대 말 동아시아적인 정황의 공식적이면서 지극히 비공식적인 탁월한 기억과 기록의 합체인 것이다. 그러나 주인공 김산은 1930년 베이징 경찰에 체포되고, 이어 1933년 다시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형을 산 것을 빌미로 1938년 캉성(康生)에 의해 트로츠키주파이자 일본 간첩이란 누명을 쓰고 총살당했다. 님 웨일즈는 남편 에드가 스노우(Edgar Snow, 1905~1972)와 17년간의 결혼생활을 끝내고 이혼한 개인 사정으로 활동을 하지 못했고, 미국 정계의 반공주의 강세로 책은 묻히고 말았다. 이러한 배경에서 조선은 물론이고 일본과 중국 어디에서도 읽혀질 수 없었다.(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을 연합군의 승리로 막을 내렸으나 마오쩌둥이 1949년 국공내전에서 승리하여 공산혁명을 이루고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으로 극동의 교두보인 중국을 공산세력에 내주게 된다. 이에 미국에서는 매카시즘이 기승을 부리게 되었다. 이 때문에 님 웨일스의 이 책은 미국 대중에게 보급될 수가 없었다.) 이 책은 3년 후에나 존재가 드러난다. 2차 대전이 후반기로 치닫던 1943년 그 해 7월, 김구선생은 장제스(蔣介石,1887~1975)를 만나기 위해 고단한 여정을 보내야했다. 장제스를 설득하여 국제회의에서 한국의 독립을 보장한다는 사실을 의제화 하기 위해서였다. 이후 장제스는 11월 카이로(Cairo)에서 루즈벨트와 처칠과의 회담에서 종전 후 조선을 독립시킨다는 사실을 명문화 하였다. 그런데 이 회의에 참석한 루즈벨트는 한국을 이해하기 위해 ‘Song of Ariran’을 읽게 되었다는 것이다. 필시 김구선생은 장제스와의 만남을 위해 오가는 과정에서 아리랑(광복군아리랑)을 불렀을 것이고, 루즈벨트는 낮선 ‘Ariran’에 의아(疑訝)해 했을 것이다. 이렇게 김구선생과 장개석와 루즈밸트는 역사적인 카이로회담(Cairo Conference)에 아리랑이 접속했던 것이다. 이 같은 아리랑은 빛나는 사실이다. 항일혁명 전선에서 그 열기를 북돋워 주었기 때문이다. 당시 중경 임시정부 특별간행물 ‘중국혁명에 희생된 조선의용군 추도’에 당개 최고의 중국 시인 애청(艾靑)의 추도사에도 아리랑이 언급될 정도이다. 애청은 당시 ‘광서일보’ 편집자로 활동한 조선의용대원 김창만을 만나면서라고 했다. 1988년 발행된 ‘애청시선집’에서 "애청은 조선혁명가들에 대하여 경모의 심정을 품고 있던 가운데서 아리랑을 배워 근 50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가사를 잊지 않고 부른다.”라고 했다. 이어 다음과 같은 증언을 이었다. "우리는 주저 없이 스스로를 전쟁에 바치기로 맹세했다. 무한히 광대한 대지 위에서 우리와 중국의 형제들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투쟁한 지 어언 5년이 되었다. 아리랑의 노래 소리가 화남(華南)에서 화북(華北)까지 울려 퍼지고, 우리의 족적은 중국 전장 곳곳에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런 아리랑의 동지적 유대는 1935년 중국 공산당에서 음악적 명성을 얻은 정부은(정율성,鄭律成, 1914~1976) 같은 뛰어난 조선인 음악가에 의해 항일혁명 의지와 결합시키는데 성공한 결과다. 아리랑은 중국 형명군들에게도 조선의 힘 있는 노래라는 사실을 인식시킨 것이다. 바로 이런 정황들이 1930년대 ‘김산 아리랑’의 배경인 것이다. 한편 이 시기 만주와 조선과 일본 속의 또 다른 아리랑 상황은 이와 배치되기도 한다. 시대상이 직조한 탁류에 휩쓸리고 있었던 것이다. 1930년대 중반에는 엔카풍(演歌風)‘아리랑夜曲’이 일본과 조선에서 유행하고, 1940년에는 일본 히비야공원(比谷公園)에서 ‘한일합방 30주년 기념’ 행사에서 아리랑이 연주되었다. 만주에서는 총독부의 이주 정책 홍보를 위한 ‘만주아리랑’이 불렸고, 조선에서는 ‘애국아리랑’이나 ‘아리랑술집’ 같은 친일적이고 자폐적인 가요(歌謠)가 불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아리랑’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얼시구 춤을 추네//젖꿀이 흐르는 기름진 땅에/오족의 새살림 평화롭네”라는 정책 선전가(宣傳歌)이고, ‘아리랑술집’은 "눈물로 미뤄다오 한숨도 미뤄다오/조각달 내 신세가 타관에 두고//잔속에 노래 실어 부르자 부르자/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라는 자탄가(自歎歌)이다. 뿐만 아니다. 총독부의 동원에 ‘악극(樂劇)류 아리랑’ 작품들이 여러 공연단체들에 의해 산업전선을 돌고 있었다. 이런 탁류에 비해 중국 연안 항일전선 상의 김산에게는 그 격렬함만큼 주옥같이 빛나는 아리랑이 함께하고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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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 (3)지난 회에서 1930년대를 산 세 지식인, 영화감독 나운규, 정치학자 고권삼 그리고 ‘독립혁명가’(1984년 번역자가 규정한 표현) 김산의 아리랑관(觀)을 대비하였다. 나운규는 독립운동가이며 영화감독으로서 자신이 그리는 아리랑은 남성적이고 의협적(義俠的)이라고 했고, 고권삼은 일제의 본토에서 식민지 조선의 정치사를 입론하는 입장에서 아리랑은 비폭력적이고 순치(順治)된 이들의 노래라고 했다. 그리고 김산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으로 부르는 노래’라고 했는데, 이는 1910년대로부터 30년대 격동의 조선이 겪는 파고를 몸으로 부대끼며 실천한 자가 아니면 토로할 수 없는 아리랑관이라고 규정하였다. 과연 김산의 이 같은 진술은 ‘Song of Arirang’ 속에 어떻게 구체화 되었고, 그 의미와 깊이는 어떻게 형성된 것일까? ‘Song of Ariran’의 님 웨일즈 서문은 이렇게 시작된다. 한 문장 안에서 많은 열쇠말(K-word)를 담고 있다. ‘남자(김산)’, ‘연안(延安)’, ‘1937년’, ‘도서관’, ‘영문책자’, ‘명단’인데, 이 책 속의 아리랑을 맥락적인 이해를 돕는 키워드이다. 이 중에 1937년이란 시점은 매우 의미심장한데, 김산에게는 인생과 진술의 최종의 시한(時限)이고, 님 웨일즈에게는 1941년 초 인쇄에 넘기는 기간인 3년간이란 집필의 시작 시점이다. 맥락적 이해의 중요한 단서인 것이다. "내가 그를 만난 것은 연안에서였다. 그곳에 머물러 있던 1937년 초여름 어느날, 나는 루쉰(魯迅)도서관에서 영문 책자를 빌려간 사람들의 명단을 훑어보고 있었다.” 김산과의 우연한 만남, 국민당에 포위를 당한 중국공산당 본부가 있는 연안, 두 사람의 지식욕이 강하여 독서 범위가 넓은 상황을 알려주는 노신도서관, 영어 해독과 소통이 가능한 사이라는 점, 중국 속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많은 조선인들의 존재, 이런 정황 속에서 아리랑이 언급되었고, 이들 간의 맥락 속에서 이해되어야 함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선 책명으로부터 접근해 본다. ‘Song of Ariran’에는 표제(表題)로서, 노래 가사를 통해서, 노래의 역사와 기능에 대한 진술 부분에서 ‘아리랑’이 등장한다. 우선 책명을 ‘Song of Ariran’으로 한 점이 주목된다. ‘Ariran’이 노래라고 부연한 것과 표기의 문제이다. 이는 님웨일즈가 김산이 희곡 작품명이나 상호명 ‘아리랑’을 말한 것과 구분하여 표기한 결과이다. 그리고 표기에 있어서는 모두 일반적인 표기인 ‘아리랑(Arirang)’이 아닌 ‘아리란(Ariran)’으로 표기한 문제이다. 이는 당시 일본의 표기를 따른 것으로 본다. 일본은 ‘란(Ran)’을 ‘란’과 ‘랑’으로 함께 발음한다. 이 역시 님웨일즈가 표현한 것으로 본다. 아마도 당시 님 웨일즈가 중국, 필리핀, 미국에서 집필에 참고한 자료가 모두 일본 측의 것이거나 일본어 표기 자료였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님웨일즈를 만나고 그의 자료를 검토한 김연갑 선생이 "관련 자료를 소장하고 있는 코네티컷주립대 도서관에서 충분히 검토하지 못하여 단정할 수는 없지만, 충분히 님 웨일즈는 여건 상 중국과 필리핀, 그리고 미국에서 관련 자료를 참고했을 것으로 본다.”고 지적했다. 결국 ‘Song of Ariran’이란 표현은 김산의 ‘공식 기억(Official Memory)’이 아닌, 이를 듣고 옮긴 님 웨일즈가 재해석한 표현인 것이다. ‘Song of Ariran’의 목차 앞에는 5절의 아리랑이 수록되었다. 일반적으로 이런 면에 길지 않은 글이나 경구가 담긴 경우는 주인공이나 독자에게 전하는 필자의 헌사(獻詞)일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이 책의 아리랑은 님 웨일즈가 김산과 한국인에게 보내는 헌사임이 분명하다. 이런 사실에서 이 별면 돌출은 님 웨일즈가 이 책의 이름을 ‘아리랑’으로 삼은 배경을 알 수 있게 한다. 아리랑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한국의 오래된 전래민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 아리랑 고개는 열 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 간다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아리랑 고개는 탄식의 고개/ 한번가면 다시는 못오는고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이천만 동포야 어데 있느냐/ 삼천리 강산만 살아있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 삼천리 강산만 잃었구나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a(Ariran)"로 시작하는 것들은 크게 발음하고 마지막 음절에 악센트를 붙여서 아-리-란(아-리-랑)으로 강하게 발음한다.) Song of Ariran(Old Korean folksong of exile and prison and national humiliation)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There are tweleve hills of Ariran/ And now I m clossing the last hill. many stars in the deep sky/ Many crimes in the life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Ariran is he mountain of sorrow/ And the path to Ariran has no returning.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Oh, twenty million countrymen/ where are you now? Alive are only three thound li/ of mountains and rivers.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Now I am an exile crossing the Yalu Rive/ And the mountains and rivers of three thounsand li are also lost. Ariran, Ariran, Arari O!/ Crossing the hills of Ariran. (pronounced with broad "a's" and accented on the last syllabe, thus, A-ree-ran) 이 책에서 아리랑 가사를 독립적으로 표기한 것은 이 자료가 유일하다. 그러나 다음 회에서 살피게 된 ‘아리랑2’에서는 두 편이 더 있다. ‘아리랑옥중가’와 ‘아리랑연가’가 그것이다. 이를 연관 지어 볼 때 김산이 님 웨일즈에게 아리랑을 진지하게 불러 주었고, 이에 대한 설명이 충분히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운영하는 홈페이지에 올린 "김산이 부른 아리랑-Song of Ariran 속의 아리랑에 관한 진술(2005년 자료집)”에서 제시했듯이 다양한 내용의 대화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5절 형태의 아리랑을 한 편으로 볼 때 1930년대 당대 잡가집이나 창가집이나 민요조사 자료 어디에서도 확인할 수 없다. 이는 많은 아리랑 가사에서 나름의 주제대로 재정리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다음과 같은 사항에서 확인이 된다. 하나는 후렴의 위치와 형태이다. 후렴을 먼저 부르고 사설을 부르는 방식은 본조아리랑의 전형이다. 또한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넘어간다”라는 2행 3음보 가사도 1926년 개봉 영화‘아리랑’ 주제가의 후렴이다. 이는 1930년을 전후하여 정형화된 것이다. 둘은 총 5절의 가사 배치 문제이다. 제2절 "청천하늘엔 별도 많고/ 우리네 가슴엔 수심도 많다”는 주제가‘아리랑’에 있는 것이다. 나머지는 주제가 이후에 첨부된 것들이다. 그러므로 이 5절은 주제의 서사를 염두에 두고 재구성 한 것이다. 즉, 1절 "아리랑 고개는 열 두 구비/ 마지막 고개를 넘어 간다”라고 한 것과 마지막 5절 "지금은 압록강 건너는 유랑객/ 삼천리 강산만 잃었구나”라는 데서 조국 산천을 떠나 압록강 건너 중국으로 왔다는 처지를 제시하고, 그 ‘마지막 고개’에는 잃어버린 삼천리 땅을 두고 왔다는 분통을 표현한 것이다. 비극적이지만 이는 현실이고, 김산은 이를 분명히 직시하고 아리랑을 부르는 이유를 제시하였다. 님 웨일즈는 이 아리랑을 통해 조국을 되찾기 위해 투혼을 불사르는 조선의 한 청년을 거대한 중국혁명 대열에서 발견하고 주목한 것이다. 마지막은 노래에 대한 두 곳의 부연(敷衍) 부분이다. 이 부분은 필자가 처음으로 주목하고 번역한 부분인데, 곡명 밑의 것과 5절 마지막 문장이다. 전자는 "망명과 투옥과 국가적 굴욕을 담은 한국의 전래민요”라는 부분이다. 이는 이 노래의 성격과 기능을 표현한 것이다. 김산이 처음으로 일제에 넘겨져 투옥된 1930년 11월 20일 이후의 경험을 통해 구성된 것임을 알려 주고, 김산이 아리랑을 부르는 이유를 알린 것이다. 후자는 "a(Ariran)"로 시작하는 것들은 크게 발음하고 마지막 음절에 악센트를 붙여서 아-리-란(아-리-랑)으로 발음한다.강하게”라고 설명한 부분이다. 이는 진술자와 기록자가 매우 진지하게 묻고 답한 결과이다. 이 시기 아리랑 가창에 대한 주(註)를 부친 기록은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알 수 있다. 이상에서 검토에서 ‘Song of Ariran’ 속의 아리랑 진술은 진술자 김산과 기록자 님 웨일즈 간의 진지하고 긴밀한 관계에서 이뤄진 결과임을 확인하였다. 또한 정연한 진술이었든, 아니면 정연하게 정리한 것이든 그 결과는 분명 주옥같이 빛나는 ‘아리랑’ 한 편인 것이다.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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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br> 다시 읽는 'Song of Ariran'(2)80년 전인 1941년 뉴욕 존데이 출판사에서 발행된 ‘Song of Arirang’은 1965년 일본에서 안도지로의 역으로 ‘アテテソ-한 조선인 혁명가의 생애-’라는 이름으로 처음 번역되었다. 이어 1987년 마쓰데라 이오꼬 번역으로 이와나미 출판사에서 11판까지 발행했다. 그리고 1972년 미국 파나 프레스에서 ‘Song of Arirang’재판이 발행되었다. 중국에서는 1987년 연변역사연구소에서 한국어판 '백의동포의 영상'으로 발간되었고, 중국어 번역본은 홍콩 난유애 출판사에서 ‘白衣同胞 影像’이란 이름으로 출간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1984년에서야 아리랑이란 표제로 발간되었다. 그리고 2년 후인 1986년 보유판 '아리랑 2-김산 생애 보충'이 발행되었다. 김산에게는 자신의 격한 항일 투쟁적 삶이 적국 일본에게 먼저 전달된 셈이다. 역설인가 당연지사인가? 필자는 2007년에 음반 ‘김산아리랑’(신나라 뮤직) 제작에 참여했다. 이 때 ‘Song of Arirang’소재 김산 구술의 ‘아리랑’ 관련 기록을 꼼꼼히 분류한 바 있다. 그 결과 이들은 대부분 1930년 초부터 중반에 이르는 기간의 정황에서 진술된 것임을 알 수 있었다. 구체적으로 정리하면 첫 번째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을 때 1930년 11월 "나는 일본 감옥에서 잔인한 고문을 당했다. 인간으로서 견디기 어려운 육체적 고통과 심리상태에 대한 압력을 최악의 방법으로 실험 받았다고 진술했다. 나에게 그 이상의 어떤 시련이 또 있었겠는가?”로부터 두 번째 체포되었을 때, 형을 마치는 1934년 4월 전후가 된다. 이를 전제로 한다면 김산은 영화 ‘아리랑’이 한반도와 중국, 그리고 일본 동포사회에까지 상영되어 반향을 일으키는 정점인 1930년을 전후하여 체험하고 인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조선에 민요가 하나 있다. 그것은 고통 받는 민중들의 뜨거운 가슴에서 우러나온 아름다운 옛 노래다. 심금을 울려 주는 아름다운 선율에는 슬픔이 담겨 있듯이, 이것도 슬픈 노래다. 조선이 그렇게 오랫동안 비극적이었듯이 이 노래도 비극적이다. 아름답고 비극적이기 때문에 이 노래는 300년 동안이나 모든 조선 사람들에게 애창되어 왔다.” "In Korea we have a folksong, a beautiful ancient song which was created out of the living heart of a suffering people. It is sad, as all deep-felt beauty is sad. It is tragic, as Korea has for so long been tragic. Because it is beautiful and tragic it has been the favorite song of all Koreans for three hundred years.”(김산) 이 명징한 아리랑 인식의 결정체, 김산의 진술 중 하나이다. 과연, 이 시기 이 땅의 지식인 중 누가 ‘민요 아리랑’, ‘노래 아리랑’, ‘그 넘어의 아리랑’을 인식할 수 있었을까? 다행히 여기에 꼽을 수 있는 이가 있긴 있다. 당연히 들어가야 하는 한 사람, 영화감독 나운규(羅雲奎.1902~1937)이다. 그리고 두 사람에게 견주기는 격이 떨어지지만 정치학자 고권삼(高權.1901~?)을 한 사람 더 꼽을 수 있다. 이 두 사람에게 견주는 것은 다음과 같은 진술이 확인되기 때문이다. # "우리의 고유한 기상은 남성적이다. 민족성이랄까 할 그 집단의 정신은 의협하였고 용맹하였던 것이니, 나는 그 패기를 영화 위에 살리려 하였던 것이외다. 아리랑고개, 그는 우리의 희망의 고개라. 넘자 넘자. 그 고개 어서 넘자. 이런 일관된 정신을 거기 담지(擔持)한 것이 얼마나 표현되었는지 저는 부끄러울 뿐이외다. (중략)영화가 문화사업의 하나라면 민중을 끌고 나가야 한다. 그러나 백 리 밖에서 아무리 기를 흔들어야 그 기가 민중의 눈에 보일 리가 없다. 언제나 우리는 민중보다 보(步)만 앞서서 기를 흔들어야 되리라고 생각한다.”(나운규) 나운규가 작고하기 1년 전인 1936년, 영화 '아리랑'의 감독 당시를 회고한 대목 중 일부이다. 영화 ‘아리랑’을 고개를 넘는 활기찬 패기를 넘는 남성상을 그리려 했지만 그런 역할을 했는가를 스스로 회의하고, 영화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밝힌 것이다. 나운규는 영화 ‘아리랑을 통해 민중들에게 가파를 현실을 극복하자고 추동한 것이다. # "비폭력 비협동의 理想의 정치적 가치는 문화적으로 진보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다. 조선의 ‘아이롱(아리랑)主義’는 근본적이요 적극적인데 더욱 가치가 있다. 이 <아이롱主義>는 정치사상에 있어 위대한 존재요 또 조선의 정치사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요소다.(중략) ‘아이롱主義’의 철학은 평화주의이다. 평화가 없고는 건설이 없고 건설이 없고는 문화가 없고 문화 없는 데는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평화의 使徒요 인류평화의 指導者이다.”(고권삼) 정치학자 고권삼이 1933년 일본 발행한 ‘近世朝鮮興亡史’로부터 1947년 서울에서 발행한 '朝鮮政治史'에 기술한 ‘아리랑主義’ 중 일부이다. 정치학자임으로 정치적 입장에서 해석한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1933년이란 시점의 ‘평화’와 ‘행복’은 천황 지배하의 순응에 따른 것임으로 친일적인 사고의 결과이다. 거기다가 해방 후 고국에 돌아와 서울대학교 강사와 제주도에서 좌악계열 정치가로 활동(1949년 월북하여 생사불명) 하면서도 이 친일적 인식을 수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어떻든 나운규는 영화론과 민중론을 투영해, 고권삼은 정치론을 적용해 아리랑의 성격을 재규정한 의미있는 인물들이다. 모두 풍전등화의 1910년대 초에 때어나 민족적 수난의 극점에 이르는 1930년대를 자신만의 길에 투신하여 굴곡진 삶을 산 이들이기에 아리랑을 남달리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동시대를 산 이로 유독 진지하고 실천적인 아리랑론을 진술한 김산은 언제 아리랑을 체험하여 옹골게 인식하게 되었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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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br>다시 읽는 'Song of Ariran'(1)금년은 아리랑에 관한 책으로 매우 의미있는 ‘Song of Arirang’이 간행된지 80년을 맞는 해이다. 아리랑 역사의 빛나는 보석 같은 존재이다. 우리 현대사에서 ‘아리랑’을 표제로 한 책은 10여종에 이른다. 1945년까지의 상황으로는 1930년대 초 창가집류가 5종으로 ‘映畵名曲아리랑唱歌’(1930), ‘아리랑民謠集’(1930), ‘現代映畵아리랑唱歌集’(1931), ‘아리랑民謠集’(1931), ‘현대유행신아리랑창가(’1932)가 있고, 1935년 이후 일본어 표기 의 ‘朝鮮民謠アリラン’(1935년 김지연)과 소설 ‘ありらん峠’(1938년 김문집)가 있다. 그리고 영어로 쓰여진 ‘Song of Arirang’이 있다. 이중에 마지막의 영어로 쓰여진 것은 1941년 의외의 미국에서, 의외의 미국인 여기자 님 웨일스(Nym Wales. 본명:Helen Foster Snow, 1907~1997)가 조선인 김상의 생애를 전기체로 쓴 책이다. 창가책 5종은 (사)아리랑연합회 소장자료로 서지사항이 밝혀졌고, 일본어 표기 중 김지연의 ‘朝鮮民謠アリラン’에 대해서는 필자의 연구논문이 있고, 김문집의 단편집 ‘ありらん峠’ 역시 최근 연구논문(동의대 신용주)이 발표되어있다. 그러나 ‘Song of Arirang’에 대해서는 그 유명세에 비해 서평에 머무르는 듯하다. 필자는 학부 졸업논문으로 ‘Song of Arirang’ 소재 아리랑 연구‘를 제출하면서 이 책을 탐독했다. 2001년 스터디 모임 ‘아리랑아카데미’에서 백선기(소설가 김팔봉의 서랑)선생과 김연갑선생으로부터 님 웨일즈 방문기를 듣게 되었다. 그리고 2005년 주인공 김산(1905~1938)의 아들 고영광 선생을 초청, 부친의 건국훈장 애국장 서훈식 참석을 도운 바 있다. 이 과정에서 필자는 그동안 책을 통해 풀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해결했다. 예컨대 저자 님 웨일즈가 노벨상에 두 번(1981~2)이나 노미네이트(nominate) 되었다고 했는데, 그것이 'Song of Arirang'을 대상으로 한 문학상인지의 여부였다. 결과는 중국 속의 조선인 항일투쟁가들을 기록하여 일본 제국주의를 고발했다는 평가로 문학상이 아닌 평화상의 후보지명이었음을 확인하게 되었다. 또한 님 웨일즈는 김산에 대해 단순한 취재원이었을 뿐인가라는 의문이다. 아마도 많은 분들이 갖고 있는 의문이었을 것인데, 직접 만난 두 분과 고영광선생의 증언으로는 3개월 간 22회의 ‘밀회 같은 인터뷰’이었을 뿐이고, 고매한 열정의 혁명가를 격려하는 관계였을 뿐, 연인 관계까지 갔다는 증거는 없다고 했다. 그리고 1938년 10월 19일, 중국 공산당 사회부장 캉성(康生)의 명령으로 처형되었을 때, 그 죄목은 무엇이었는가라는 문제다. 이는 아들 고영광에 의한 복권(1983년) 신청과 심사 과정에서 밝혀졌는데, ‘반혁명죄와 간첩죄’였다. 즉, 트로츠키(Leon Davidovich Trotsky)파라는 이유와 일본 경찰에서 큰 고초 없이 풀려난 것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간첩죄로 몰렸던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복권 심사과정에서 확인되었다. 공산당 문서에서는 "변명하지 않는 미련한 자”란 기록과 일본 기록에는 "결코 변절하지 않을 놈”이란 기록이 나와 결국 무협의로 복권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아직도 풀지 못한 문제가 있다. 일본의 이회성 작가나 중국의 고영광 등에 의해 자료가 발굴되면서 해결되었으나, 정작 ‘아리랑 문제’는 해결하지 못하였다. ‘아리랑 문제’란 김산이란 인물 연구와 Song of Arirang이란 텍스트 연구의 근본 문제인데, 결정적으로 과연 김산은 언제, 어떤 계기에 아리랑을 접하고, 가슴으로 인식하게 되었는가라는 의문이다. 혁명에 대한 신념만큼이나 돋보이는 아리랑에 대한 명징한 표현들은 단순한 이해 정도로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지식인들, 이광수도, 최남선도, 김소운도 여기에는 미치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모든 서평이나 김산을 언급하는 이들이 하나 같이 하는 말에는 "님 웨일스라는 탁월한 기록자가 연안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장지락(김산의 본명)은 그의 다른 무수한 동지들처럼 홍진에 묻혀 사라졌을 것이다.”라는 표현을 한다. 그러나 ‘무수한 동지들’ 중에 이토록 아리랑을 절절하게 표현할 수 있었던 인물은 오직 김산 한 사람뿐임이 분명하다. 그것은 유난히도 높고 깊은 고개를 넘고 넘은 그의 생애에서 알 수 있다. 1917년 개신교 계열 중학교에 진학, 3.1 운동에 참가하다 체포되어 3일간 구류 처분을 계기로 도일하였다. 1922년 상해로 가 김성숙을 만나 마르크스주의를 배우고,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베이징 지부에 입당하고, 공산주의 잡지 ‘혁명’을 간행하고, 1926년 ‘혁명동맹’ 편집을 맡아 선언문을 작성했다. 1927년에는 황푸군관학교 교관을 맡으며 1930년까지 홍콩, 상하이, 베이징 등지에서 활동하다 베이징 경찰에 체포, 일본 영사관으로 넘겨진 뒤 조선에서 심문을 받다 다음해 4월 풀려나 다시 베이징으로 가서 사범학교 교사로 생활했다. 1933년 4월 중국 국민당 경찰에 붙잡혀 다음해 탈출하였다. 이후 잠시 철도 노동자로 일했고, 1936년 7월에 상하이에서 조선민족해방동맹을 창설하고, 8월에는 조선 혁명가 대표로 선발되었다. 1937년에는 항일 군정 대학에서 물리학, 화학, 수학, 일본어, 한국어를 강의하였다. 님웨일즈를 만날 때까지의 이 굴곡진 역정을 김산 말고 산 이가 또 있는가. 분명 이 파란의 과정에서 김산은 아리랑을 접하고 이해했을 것이다. 그 구체적인 계기는 언제, 어디서였을까? 참고: <김산. 그리고 아리랑> www.arirangnar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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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br>판문점에 ‘아리랑’을 부여하자금년은 <남북기본합서>가 채택·발효 30주년이 되는 해이다.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역사적인 합의이다. 그 동안 5차례의 남북고위급회담과 13차례의 실무대표 접촉을 통해 합의문이 완성되었고, 1991년 12월 13일, 서울에서 개최된 제5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채택·서명되고, 1992년 2월 19일 평양에서 열린 제6차 남북고위급회담에서 확인·발효된 합의 문서이다. 서문과 남북화해, 남북불가침, 남북교류, 협력, 수정 및 발효 등 4개항 25개 조로 구성되어 있다. 이로부터 역사적인 "남과 북은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한다”를 처음으로 명시하였다. 이는 <전문>에서 더욱 구체적이고 확장적으로 제시되었다. "남과 북은 분단된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뜻에 따라 7.4 남북공동성명에서 천명된 조국통일 3대원칙을 재확인하고, 정치군사적 대결상태를 해소하여 민족적 화해를 이룩하고, 무력에 의한 침략과 충돌을 막고 긴장완화와 평화를 보장하며, 다각적인 교류. 협력을 실현하여 민족공동의 이익과 번영을 도모하며, 쌍방사이의 관계가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닌 통일을 지향하는 과정에서 잠정적으로 형성되는 특수관계라는 것을 인정하고 평화통일을 성취하기 위한 공동의 노력을 경주할 것을 다짐하면서 다음과 같이 합의하였다.” ‘통일을 지향하는 특수 관계 인정’, 이 선언적인 문구는 바로 이 합의서에서 비롯되었다. 이로서 모든 통일논리의 전제가 되었다. 실제적으로 남북한은 다른 나라로부터 승인을 받고 외교관계를 맺고 있으며 각기 유엔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엄연한 국제법적 행위주체이다. 그럼에도 남북한은 각기 주권을 가진 독립국가로서 국제법적 적용을 받아 서로를 국가로 인정한 바가 없었다. 당연히 인정할 수도 없었다. 왜냐하면 체제 정통성을 부인하는 결과로 이어지고, 통일을 민족적 과제로 달성해야 할 명분과 목표를 모호하게 하기 때문이다. 당연히 남북한은 서로의 관계를 나라와 나라 사이의 관계가 아니라고 못 박은 것이다. ‘통일을 지향하는 관계’, 이 역사적인 선언이 명문화된 것이 30년 전 합의된 <남북기본합서>로, '남북사이의 화해와 불가침 및 교류협력에 관한 합의서'다. 이 역사적인 사실을 생각할 때, 금년은 더 적극적인 통일 방안을 강구, 실천하는 해이어야 한다. 아리랑 문화운동을 하는 필자로서는 이런 인식에서 나름의 통일론으로 판문점의 미래상을 제시하고자 한다. 즉, 전 세계의 주목을 받는 역사적 장소로서의 판문점을 생태자원, 문화자원, 관광자원, 경제자원의 융합체로 하여 ‘분단을 넘어 평화와 통합의 상징’으로 ‘세계평화 테마 관광지’로 꾸며 가자는 제안이다. 이는 더 적극적인 통일방안을 강구하면서 이는 미래의 후손을 위한 것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앞으로 판문점 내에 건립되는 모든 건축물은 남북한이 공동의 목적으로, 동일한 명칭으로 건립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예컨대 새 길을 낸다든가, 새 건물을 짓는다든가 또 아니면 새로운 다리를 놓게 되면 남북이 합의하여 용도, 명칭 등을 결정하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구체적으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서울에서 문산까지는 고속화 도로 ‘통일로’가 있다. 그러나 문산에서 판문점까지는 고속화가 되어있지 않다. 마찬가지로 평양에서 개성까지는 고속화 도로가 나 있다. 그러나 개성에서 판문점까지는 고속화가 되어있지 않다. 그래서 남북 모두 판문점에 이르는 인접도로의 고속화 도로를 필요로 한다. 그 때 남북의 도로명을 ‘남북 아리랑길’로 명명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아리랑고개’는 수난과 고난을 극복한 상징적인 도로명이다. 분단 체제를 극복해야 통일을 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 고개는 판문점으로 상정할 수 있다. 길은 바로 아리랑고개에 이르는 필수 과정임으로 ‘아리랑길’은 상징적으로나 현실적으로나 적정한 명칭인 것이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 진입하는 다리는 두 곳이다. ‘돌아올 수 없는 다리’와 ‘72시간 다리’이다. 전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경계인 한반도 군사 분계선을 가로지르는 다리로, 공동경비구역 서쪽에 흐르는 사천강을 건너는 다리이다. 1953년 휴전협정 체결 후 포로교환이 이뤄진 다리로 ‘한 번 건너가면 다시 돌아 올 수 없다’는 뜻에서 ‘널문다리’라는 이름에서 개명된 것이다. 그런데 1976년 8월 미군 도끼 살인 사건이 발생하면서 북한 측에서 판문점으로 들어오는 다리로 사용할 수가 없게 되었다. 그래서 북측에서 긴급하게 새로운 다리를 건설했는데, 그것이 콘크리트 시공 시간이 사흘정도 걸렸다는 뜻으로 ‘72시간 다리’로 명명하였다. 북측에서 판문점 관할 공동경비구역으로 들어오는 사천강 상의 다리로 통일각 뒤편에 위치해 있다. 지난 2017년 북한 병사가 남측으로 오기 위해 10여초 만에 지프차로 건넌 다리이다. 이상과 같은 사정에서 사천강을 건너는 새로운 다리를 건설 할 필요가 있다. 하나는 비운의 역사가 담겨있어 보존의 필요성이 있어 사용할 수 없고, 하나는 급조한 것으로 40여년을 넘기고 있으니 새로운 다리로 건설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다음과 같은 제안을 하고자 한다. 그것은 앞에서 제안한 ‘아리랑 길’이 만나는 사천강 상의 적정한 지점에 새로운 다리를 놓자는 주장이다. 그리고 그 이름도 당연히 ‘아리랑교’ 또는 ‘아리랑다리’로 하자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제안하는 것은 남북통일을 염원하고, 통일 후에는 이를 기념하는 것은 물론, 세계평화의 거점임을 상징하는 특별한 건물을 건립하자는 것이다. 그 건물 이름은 당연히 ‘아리랑의 집(Arirang House)’이다. ‘아리랑길’과 ‘아리랑다리’와 같은 아리랑의 상징성을 부여한다는 뜻에서다. 그런데 사실 새로운 건물의 필요성은 매우 현실적이다. 왜냐하면 2018년 4월 남북정상 회담과 2019년 남북미 정상 회담 과정에서 보았듯이 장소 문제가 논란이 있었다. 군사분계선을 넘나들며 회담을 해야 하니 의전과 보안문제가 복잡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라도 남과 북이 함께 짖고, 함께 관리하고, 함께 사용할 건물을 건립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사실 지금까지 판문점 내에 세워진 건물 중 동일한 목적으로, 남북이 함께 세운 건물은 하나도 없다. 모두 상호 감시 목적이나 대응 논리로 세워진 것일 뿐이다. 이런 기존의 분단성을 극복할 필요에서도 통일 주체에 의한, 동일 목적의, 민족성을 상징하는 명칭의 건물은 필요한 것이다. 현재 판문점 내의 남북간 주요 건물은 북의 ‘판문각’과 ‘통일각’ 대(對)남의 ‘자유의 집’과 ‘평화의 집’이 있다. 결국 ‘판문’, ‘통일’, ‘자유’, ‘평화’가 이미 사용되었으니 이를 포괄함은 물론 더 큰 상징성을 가진 명칭이어야 한다는 현실성에서도 그렇다. 다만 그 건립 시기와 위치와 형태에 대한 문제인데, 이는 현실성과 국제정세와 국민적 합의를 통해 결정될 문제이다. 그러나 준비 기간은 충분해야함으로 우선 필요성에 대한 담론을 형성, 어느 일각에서라도 시작해야 한다. 이런 당위성에서 <남북기본합서> 채택·발효 30주년인 금년을 논의의 기점으로 해야 한다. 새해 벽두 상상해 보자. ‘아리랑’길을 달려 판문점에 도착하여, 세계적인 인물들이 모여 세계평화를 논의하는 ‘아리랑의 집’에서 이들의 주장을 귀담아 듣고, ‘아리랑다리’를 건너 개성으로가 고려시대의 역사 유적지를 둘러보고 금강산에 올라 인류평화를 기원하는 주체임을 상상 하면 가슴이 뛰지 않는가? 그 가슴 벅찬 날을 준비하자. 그래서 판문점에 아리랑을 부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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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br> 트로트 열풍과 ‘엄마 아리랑’ 탄생"미스트롯2 최고 시청률 29.9%”, "눈물과 감동 가득 담긴, 크리스마스의 선물!”, "반전과 이변의 대서사시를 썼다”, "TV **원조 트롯 오디션 ‘미스트롯2” 어제 한 신문의 기사 제목이다. 이것만으로도 트로트의 열풍, ‘핵 돌풍급 위력’을 실감할 수 있다. 이에 영향을 받아 더 많은 매체가 유사한 오디션 프로그램을 시행한다고 전했다. 이미 모방송국은 ‘트로트의 민족’이란 타이틀로, 또 다른 방송국에서는 ‘트로트 파이터’로 정했다고 한다. 이 프로그램은 2019년 2월부터 5월까지 TV조선에서 방송된 트로트 오디션 프로그램 ‘내일은 미스트롯’ 성공에 따른 후속 프로그램인데, 이번 시청율이 지난 회를 능가했음을 상찬한 것이다. 필자는 ‘미스트롯2’를 지켜보면서 오디션 스타 탄생에서도 감동을 받았지만 의외로 많은 것을 생각하는 계기였다. 우리 국악계를 돌아보게 된 것인데, 우선 서바이벌 오디션 방식의 장점을 확인했다. 상대평가로 진출 여부를 판정받는 서바이벌식은 모두를 가슴 조이게 하고 이목을 집중시키는 방식이다. 감동을 더 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김연자씨가 18세 때인 1970년대 참가했다며 회고하는 ‘TBS가요경연대회’와는 전혀 다른 방식이다. 또 하나는 품위와 논리를 갖춘 탄탄한 심사위원들의 존재이다. 이들은 풍부한 경험에서 나오는 여유로움과 인기있는 가수라는 자부심이 가득해 보이기 때문이다. 이들 가수들은 베테랑의 감각으로 종합적으로 평가하고, 작곡가와 프로듀서 출신들은 음악적 논리로 경연자 하나하나에 맞춤형 평가를 해주는 모습이 너무나 부러웠다. 우리 국악경연대회가 이를 벤치마킹(Benchmarking)해야 할 대목이라고 생각했다. 세 번째는 국악을 익힌 이들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는 점이다. 이것이 일부의 주장처럼 ‘꺾고 휘감는 창법’이 국악에서 간 것이란 주장을 주목해서가 아니라 우선 듣기에도 경기민요의 묘한 맛을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앞으로 이에 대해 국악계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네 번째는 기존의 기라성 같은 트롯 가수들조차도 입을 벌리게 하는 예능감을 지닌 이름 없는 가수들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국악계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한다. 만일 이런 이들이 있었다면 국악계의 손실일 뿐만 아니라 어쩌면 이들이 트롯계로 가는 것이 아닌가라는 우려를 갖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필자기 이번에 얻은 큰 수확이 또 하나 따로 있다. 트롯 아리랑인 ‘엄마 아리랑’의 부상이다. 1990년 한돌 작곡의 서유석 노래 ‘홀로아리랑’과 2002년 월드컵대회 기념가 이경애 작사 조용필 작곡의 ‘꿈의 아리랑’ 이후는 그리 뚜렷한 창작 아리랑이 없는 실정이다. 이런 상황에서 이 ‘엄마아리랑’의 부상은 주목할만한 하기 때문이다. 18일 있었던 제1회 경연에서 홍지윤이 불렀다. ‘올 하트’를 받아 본선에 진출했다. 서정적인 가사에 넘실거리는 듯한 후렴의 선율과 리듬이 묘한 감흥을 주었다. 특히 후렴에서 "사랑 음~ 사랑 음~”이란 매력적인 부분이 진도아리랑의 후렴 "응~응~응~아라리가 낳네”를 연상시켜 바로 안겨들었다. 지난 4월 ‘2020 풍류 달빛공연’에서 국악신동 김태연이 불러 격찬을 받기도 한 곡인데, 원곡자는 역시 진도 출신 '미스트롯' 1대 진(眞) 송가인(조은심)이다. 엄마아리랑 엄마아리랑 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아들딸아 잘되거라 밤낮으로 기도한다 엄마 아리랑 사랑하는 내 아가야 보고싶다 우리 아가 천년만년 지지 않는 꽃이 피는구나 아 리 랑 아 리 랑 사랑 음 사랑 음 엄마 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우리 엄마 사랑은 아리랑 엄마 아리랑 엄마아리랑 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우리 엄마 무병장수 정성으로 기원하오 엄마 아리랑 사랑하는 내 어머니 보고싶소 울 어머니 서산마루 해가 지고 달이 뜨는구나 아 리 랑 아 리 랑 사랑 음 사랑 음 엄마아리랑 아리아리랑 아라리요 쓰리쓰리랑 아라리요 우리 엄마 사랑은 아리랑 엄마 아리랑 아 리 랑 아 리 랑 사랑 음 사랑 음 엄마 엄마 우리 어머니 아 리 랑 (에야디야 에헤라디야디야 에야디야 에헤라디야디야 에야디야 에헤라디야디야) 엄마 아리랑 지난해 11월 발매된 송가인의 첫 정규 앨범의 타이틀 곡이다. 자주 송가인의 진도아리랑을 듣고 감흥을 받은 윤명선이 작사/작곡을 했고, 박현빈의 ‘샤방샤방’을 쓴 작곡가 김지환과 김연자의 ‘아모르파티’를 쓴 작사가 이건우 등이 음반 프로듀싱에 참가해 완성시킨 곡이라고 한다. 송가인은 "(그동안) 느리고 슬픈 노래, 절절한 것들을 불렀다. 트로트가 접목된 신나는 곡을 불러보고 싶었다"며 타이틀 곡으로 취입했다고 한다. 국악 리듬의 슬픈 멜로디가 인상적이다. 당연히 진도의 육자배기조 신명과 스승 강송대의 힘있는 성음을 닮은 송가인으로서는 구슬픈 보컬의 강점을 적절하게 발휘한 곡이다. 국악과 트로트가 만나 서정적이고 아름다운 가요 ‘엄마 아리랑(SONG GA IN - Mom Arirang)’을 탄생시킨 것이다. ‘엄마 아리랑’은 송가인의 강점인 국악 정서를 극대화시킨 개인적 음악성으로 성가를 얻은 곡이다. 거기에는 당연히 배경이 있다.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로 지정된 진도씻김굿 전수교육 조교이자 무속인인 어머니 송순단의 ‘엄마 덕’과 지난해 ‘내일은 미스트롯’이란 방송 오디션 프로그램의 존재와 그에 의한 본인의 성공이다. 그리고 각 시대의 이슈를 수용하는 아리랑의 소재화의 결과이기도 하다. 이는 유네스코가 인정한 아리랑의 가치 "다양한 사회 맥락 속에서 지속적으로 재창조” 되는 노래임을 ‘엄마 아리랑’이 입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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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br>아리랑의 존재로 ‘대원군을 변호함’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여 궁궐 내부와 정문인 오문(午門/세종 때 광화문으로 개명)이 완료되었다. 그리고 10월 임금이 정좌하여 법궁으로서의 경복궁(景福宮)이 탄생하였다. 세계에서 한 도성 안에 5개의 궁궐을 갖고 있는 도시는 서울 밖에 없다. 그 중 으뜸이 경복궁이다. 이 궁은 조선조 500년의 정궁으로서 그 역사를 새기고 오늘에 이른 의연한 서울의 상징이다. 도심 한복판에 대궁을 갖고 있어 역사와 현대가 공존하는 도시가 되었다. 오늘의 경복궁은 외국인 대상 최고 관광명소가 되었다. 인왕산과 북악산을 차경(此境)한 자연친화성이 으뜸이고, 유교이념에 기반한 건물배치나 내부 장식, 햇빛 반사와 미끄럼 방지를 위한 다듬지 않은 박석 사용이나 건물의 높이를 조정하여 사생활 보호를 위한 배려 등은 너무나 돋보인다. 세계적인 건축가 미스 반 데어 로에(Mies van des Rohe)가 ‘디테일은 아름답다’라는 말을 "God is in the deteils(신은 디테일 안에 있다.)”라고 표현했다. 경복궁의 티테일은 이를 입증하듯 경탄을 발하게 한다. 그러나 오늘날 경복궁의 이러한 아름다운 디테일만큼 수난의 역사를 겹겹이 갖고 있다. 명종 8년(1553년) 9월의 대화재로 인하여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顧命/임금의 유언장), 의복, 거마 등이 유실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으로는 선조가 피란을 떠나자 노비 문서와 노략의 흔적을 없애고자 난민들이 난입하여 불태웠고, 왜군과 조·명 연합군의 전투가 거듭되면서 남은 건물들이 대부분 소실되었다. 이후 273년간 폐허로 있었다. 이후 오늘날 경복궁은 존재할 수 없었을 지도 모른다. 그런데 1865년 4월 26일 고종의 수렴청정을 하던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 비 신정왕후와 대원군 이하응 주관 하에 중건이 시작되었다. 대원군의 권세로 몇 고비를 넘기며 마무리 되었다. 1868년 7월 2일, 국왕과 왕실의 이어(移御)로 경복궁이 정궁으로 되살아났고, 7년 후에 오늘의 모습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그러나 수난은 계속되었다. 1895년 경복궁 건청궁에서 명성황후가 일본군에 시해당하고(1895년 을미사변), 이듬해 양력 2월에는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파천하면서 경복궁은 왕궁으로서 운명을 다하게 되었다. 더욱이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경술국치를 당하여 훼손이 시작되었다. 일제가 여러 건물을 헐고 민간에 팔며 이른바 '시정오년기념 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면서 상품 진열관이 설치되었다. 이어서 음악당을 설치하고 조선총독부 청사를 세우기까지 했다. 많은 비난에도 조선총독부 건물은 1926년 10월 1일 완성되었다. 이는 273년 만의 중건 경복궁의 가장 큰 훼손이었다. 이후 1945년 한국전쟁과 미군정청시대(United States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후 복원기를 맞아 오늘의 경복궁 시대를 맞았다. 그런데 이 경복궁의 역사에서 대원군의 업적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서원을 철폐할 때 "서원은 선현에 대한 제사를 모시는 곳인데, 하물며 도적들이 숨어 살아서야 되는가. 나는 공자가 다시 태어난다 해도 우리 백성들을 힘들게 한다면 나는 용서하지 않겠다.”라고 한 의연한 뱃심이 없었다면 재정과 공력을 써가며 7년 완공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뿐만 아니다. 대원군은 순/헌/철종 3대 60여년의 세도정치기 매관매직과 3정문란 등을 혁파하여 탐관오리 집단을 정리했다. 이후 10년(1863~1873)이란 바탕이 없었다면 밀고 갈 수가 없었다. 결국 대원군의 개혁정책은 일정하게 민중의 호응을 얻어냈고, 그 힘으로 경복궁을 중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만일 이런 개혁 주체가 300년만 앞서 태어났어도 조선조 역사는 달랐을 것이다. 2019년, 광화문 안 경복궁에서 아리랑 큰잔치를 벌였다.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 43개가 모인 역사적인 행사 ‘경복궁아리랑 告’였다. 남북을 합해 단일 노래를 계승하는 전승단체 최다(最多)를 갖는 아리랑의 실체를 보여준 행사였다. 경복궁 중수 7년의 민중 교류로 ‘아라리’에서 ‘아리랑(렁/롱/성)’이 후렴으로 자리 잡는 형식이 형성되어 국왕으로부터 온 백성이 함께 부르는 노래를 갖게 한 역사적 사실을 새기고, 1926년 10월 1일 총독부 청사 완공에 저항하여 <아리랑>을 개봉일자로 삼은 감독 나운규의 저항정신을 기리기 위해서였다. 이런 역시적 배경에서 기획되어 금년에도 두 번째 ‘경복궁아리랑 告2’를 개최하려 했다. 그런데 코로나19로 인하여 이 연례행사가 무산(無産)되었다. 무산을 선언해야 하는 이 12월 중순, 대원군의 개혁정신과 경복궁 중건 업적을 새롭게 생각한다. "고집불통 쇄국 꼰대 대원군, 원성(怨聲)의 상징 경복궁 중건”이란 표현은 억울한 허울이 아닐까. 공사기간 전국 민중들의 갖가지 소리와 춤을 펼치는 ‘8도 민속 교류의 장’에서 ‘아리랑’을 형성시킨 역사적 사실은 묻혀있다. 아리랑의 존재, 이를 통해 대원군을 변호하고 싶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아리랑인물 제1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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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br>진도아리랑에 대한 오해진도는 무형문화유산의 섬이다. 진도에서는 소리, 그림, 서예 자랑하지 말라고 한다. 그만큼 예능이 뛰어난 이들이 모여 사는 곳이란 말이다. 실제 국가 또는 전라남도 무형문화재는 10종목이나 된다. 군 단위로서는 최고의 보유이다. 예컨대 ‘강강술래’(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8호)를 비롯하여 ‘남도들노래’(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51호), ‘남도잡가’(전라남도무형문화제 제34호), ‘다시래기’(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81호), ‘조도닻배노래’(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 40호), ‘진도만가’(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19호), ‘진도홍주’(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 ‘진도북놀이’(전라남도무형문화재 제18호), ‘진도씻김굿’(국가지정무형문화재 제72호), ‘진도소포걸군농악’(전라남도무형문화제 제39호)이 있다. 그런데 그 유명한 진도아리랑은 국가는 물론 전라남도 무형문화재에 들어있지 않다. 그럼에도 많은 이들이 진도아리랑은 이미 지정이 되어있는 줄로 안다. 적어도 전라남도 지정 ‘남도잡가’에는 들어 있다고 생각한다. 그 오해의 기반에는 이런 기록때문일 것이다. #"진도아리랑-향토문화유산, 2001년 10월 지정-전라남도 지정 남도잡가 예능보유자가 남도잡가에 포함이 되어있는 진도아리랑을 부르고 있다.”(『2008 아리랑 현황조사보고서』, 2009) #"진도아리랑은 남도잡가로서, 전라남도 지정문화재 제34호이자 우리나라 3대 아리랑의 하나이기도 합니다.”(진도군수 이진동, 아리랑 인류문화유산 등재기념 학술대회 축사) #"남도들노래가 중요무형문화재 제51호(1973년 지정), 남도민요(‘남도잡가’의 오류)가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4호(2001년 지정), 정선아리랑이 강원도 무형문화재 제1호(1971년 지정)로 지정되면서 각 종목에 포함되어 있는 아리랑이 함께 보존 전승의 지원을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진도아리랑의 보존과 진흥', 2013) 마치 진도아리랑이 ‘제34호 남도잡가’에 포함되어 지정을 받은 것으로 오인할 수 있게 한다. 이런 이유로 진도아리랑은 진도 내에서는 독립 종목으로서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현상은 진도 외의 지역, 즉 전국적으로는 정반대의 현상을 갖고 있다. 즉, ‘다시래기’, ‘씻김굿’, ‘남도들노래’, ‘만가’, ‘북놀이’ 등은 잘 몰라도 진도아리랑은 모르는 이가 거의 없는 사실 때문이다.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34호 <남도잡가>에는 보렴·화초사거리·육자배기·자진육자배기·흥타령·개구리타령·새타령·성주풀이를 지칭한다. 2001년 <남도잡가> 지정 심의에서 진도아리랑은 제외되었다. 제외된 이유는 "조선 후기 광대나 사당패 등 전문적인 소리꾼들에 의하여 집중적으로 창출 된 과도기적 장르”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생성 시기가 근대라는 이유이다. 오늘의 아리랑 상황에서 진도아리랑은 ‘육자배기조 남도 아리랑’의 독자성을 갖는다. 특히 ‘산아지타령’과의 층위를 이룬다는 점과 즉흥성과 신명성을 속성으로 갖는다는 점에서 예술적 가치도 크다. 그런데 지금은 타 종목 보유자가 경과적으로 부르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제 도무형문화재를 지정하는 시각의 교정과 보유자 지정의 편협성을 넘어 진도아리랑문화를 확장시키는 보존회 같은 공동체를 지정한다면 지금보다 더욱 돋보이는 아리랑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주인 없는 보석은 보석이 아니다.”라는 서양 속담처럼, 막연하게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도 좋지만,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아리랑’도 좋지만, ‘진도군 향토문화유산 무형유산 제1호’도 좋지만 실제 아끼고, 관리하고, 자랑하는 주인을 정해주지 않으면 "네 것도 아니고 내 것도 아닌 것”이 된다. 200여 수의 진도아리랑만의 사설을 구사하여 다른 지역 아리랑과의 차별성을 드러낼 전승공동체가 필요하다. ‘전라남도무형문화재 **호 진도아리랑 보유단체 *****’로 지정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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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br> ‘봉화아리랑’의 진실현재 지역 아리랑 상황 중에서 명칭상으로는 존재하지만 지역 보존회가 없어 전승이 단절된 아리랑이 있다. 경북 봉화군(奉化郡) ‘봉화아리랑’이다. 대한민국 경상북도 북부에 있는 군으로 군청 소재지는 봉화읍이고, 행정구역은 1읍 9면이다. 영화 ‘워낭소리’의 무대이기도 하다. ‘산수유 마을’과 춘양목(春陽木)으로 유명하다. 이 지역의 이름을 갖는 아리랑이다. 지금도 유튜브를 통해 검색하면 만정 김소희(晚汀 金素姬/1917~1995) 선생과 그의 두 제자인 안숙선과 신영희 등이 부르는 ‘봉화아리랑’을 들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선율은 우리가 익숙히 알고 있는 ‘상주아리랑’이다. 다만 사설이 다음과 같이 ‘상주아리랑’과는 다르다. 봉화아리랑 (김소희 작사) 긴소리 아리랑 아리랑 아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남녀 후렴) 이고개를 넘어가면 내고향이 저기건만/ 어이 허여서 못가는고 그리운 고향산천 언제돌아가서/ 이가슴에 맺친한을 풀어볼까 못보아 한이요 못잊어원수다/ 응어리진 이가슴을 어이할꼬 잦은소리 아리아리 쓰리쓰리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하루가고 달이가고 해가빠꿔도/ 한번간 부모형제 왜못보나 가고지고 허는사람 어서보내고/ 오고지고 허는사람 반겨주세 원수로다 원로다 원수로다/ 38선 네가 바로 원수로다 아리랑 아리랑 아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 긴소리와 잦은소리의 각각 3절 사설과 후렴이 각각 다르게 구성된 형식이 ‘상주아리랑’과 동일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하여 이런 동일 곡에 두 가지 곡명과 두 가지 사설의 있게 된 것인가? 이 ‘상주아리랑’과 ‘봉화아리랑’의 관계를 추적해 온 김연갑(아리랑학교 교장), 정창관(유튜브 ‘정창관의 아리랑’ 운영자), 배경숙(영남민요연구회 회장) 3인의 기록을 종합하면 다음과 같다. 1988년 초, 당시 문화공보부에서 88올림픽을 기념하여 ‘Korea Arirang'을 카세트로 제작했다. 이 때 김소희 선생의 ’상주아리랑‘을 수록했다. 이후 상업적인 정식 음반(8903-G24)으로 발매된 것은 1989년 3월 성음스튜디오에서 녹음하고 1991년 11월 발매한 ’상주아리랑‘이다. 그리고 1994년 초 김소희 선생이 봉화군수로부터 ’봉화아리랑‘ 작창에 대해 의뢰를 받아 8월경 서울에서 녹음을 하였다. 그 녹음 음원은 ’상주아리랑‘과 같은 선율이며, 곡명은 ’봉화아리랑‘이었다. 사설은 위의 6절 사설이다. 그런데 봉화군수(박승호)는 사설이 지나치게 민족사적이어 봉화군과는 동떨어져 새 사설에 의한 재녹음을 하게 되었다. 그 사설은 급히 군 공무원 대상 공모를 통해 마련하였다. 카세트테잎 <봉화아리랑>에 수록된 6절 사설은 다음과 같다. 봉화아리랑(공모 사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 삽재고개 넘어간다(후렴) 태백영산 우뚝 솟아 그 정기 이어받고/천삼백리 낙동강 원류가 여기로다 명륜당 훈장소리 학동선잠 깨우고/봉양리 베틀노래 흥겹게 들리누나 사미에 세운정자 풍광도 좋고요/산송이 복수박은 천하의 일미로세 백천계곡 열목어야 너만 어찌 한가하냐/청옥산 꾀꼬리가 함께 놀자 하는구나 청량산 육육봉에 바위마다 깃든 전설/갈래천 맑은 물에 은어 떼 뛰어 논다 성운에 이는 구름 단비를 가져와서/골매산정 좋은 들에 해마다 풍년일세 명륜당, 복수박, 청량산, 청옥산 같은 유적지와 지역 특산품을 사설에 반영하였다. 아리랑을 통해 지역을 알리고 싶은 소박한 애향정신이 반영되었다. 그리고 후렴에서 일반적인 ‘아리랑고개’ 대신 봉화군 소재의 ‘삽재고개’로 대체했다. 이 지역을 알리고픈 의지를 반영한 것이다. 그런데 카세트 테잎으로 제작은 되었지만 배포되지도 못하고 보급도 되지 못했다. 그 이유는 곡조가 순수 창작이 아니고, 이미 제작된 ‘상주아리랑’의 곡조라는 사실이 알려졌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봉화아리랑’은 두 가지 사설이 있음에도 정작 봉화지역에서는 불려지지 않고 녹음에 참가한 제자들이 방송이나 공연에서 전자의 사설 ‘봉화아리랑’을 부르고 있는 것이다. 일각에서는 ‘상주아리랑’과 ‘봉화아리랑’의 선후 관계를 혼동하여 ‘봉화아리랑’이 ‘상주아리랑’이 되었다고 하지만, 위의 두 가지 사설이 아닌 '상주아리랑' 사설을 부르며 '봉화아리랑'이라고 하는 것도 오류이다. 정리하면 "1988년에 김소희 선생 작창 ‘상주아리랑’이 1994년 같은 곡조에 의한 ‘봉화아리랑’이 제작되었으나 전승되지 않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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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br>밈(Meme) 아리, 아라리, 아리랑모방(模倣, imitation)을 통해 전수되는 모든 것 또는 문화적 진화를 이끄는 새로운 복제자를 밈이라고 한다. 영국의 동물행동학자 클린턴 리처드 도킨스(Clinton Richard Dawkins)는 인간은 다른 동물과 달리 생물학적 유전자 말고도 문화적 유전자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것을 문화 복제자 ‘밈’이라고 했다. 이 밈은 문화 전달의 단위 또는 모방의 단위라는 개념으로, 사람이나 집단에게서 다른 지성으로 생각 혹은 믿음이 전달될 때 전달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한다. 유전자(Gene)를 핵심어로 하여 진화론을 확장시킨 이론이다. 유전자는 DNA를 포함하는 하나의 기능적인 단위로 유전자에는 생물의 세포를 구성하고 유지하고, 이것들이 유기적인 관계를 이루는 데 필요한 정보가 담겨있으며 생식을 통해 자손에게 유전된다. 도킨스가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이 세상의 주인은 유전자’라고 하며 ‘인간은 물론 모든 동물은 유전자가 만들어 낸 기계다.’라고 했다. 인간 역시 유전자가 자기 보호막으로 세포를 만들어 자신을 다음 세대에 온전히 전달하도록 만들 기계라고도 했다. 밈과 유전자의 연관성을 들어 밈이 생명의 진화 과정에 작용하는 자기복제자의 한 종류라고 한다. 유전자가 자가복제를 통해 생물학적 정보를 전달하듯이, 밈은 모방을 거쳐 뇌에서 뇌로 개인의 생각과 신념을 전달하는 것이다. 밈은 유전자와 동일하게 변이, 경쟁, 자연선택, 유전의 과정을 거쳐 수직적으로, 혹은 수평적으로 전달되면서 진화한다. 또한 가장 많이, 효율적으로 복제되는 밈이 숙주인 인간 입장에서 그 밈이 갖는 유용성과 관련 없이 전파된다는 점에서 유전자의 이기적 측면과 유사한 특성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밈은 유전자와 매우 비슷한 성격이다. 아리랑을 예로 든다. 미상의 어떤 작자가 곡을 만들었다고 전제한다. 작자는 같은 동네 친구에게 이 곡을 들려줌으로서 아리랑은 친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복제했다. 이 친구는 주위사람들에게 곡을 들려주었다. 더 많은 사람들에게 아리랑을 알게 한 것이다. 이로써 아리랑이란 곡을 만든 작자와 친구가 사망한다 하더라도 아리랑은 사라지지 않게 되었다. 세대를 뛰어 넘어 자기를 보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뜻이다. 게다가 밈은 돌연변이도 일으켜 이 곡을 들은 밀양에 사는 친구는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그 곡을 전하는데 그만 제대로 기억하지 못하고 밀양아리랑 이란 제목으로 전파시켰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이와 같이 밈이란 DNA와 같이 문화를 새로운 개념의 자기 복제자를 뜻한다. 다시 이 밈으로 아리랑에 접근하면 기존에 해결하지 못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즉, 지금까지 우리는 메나리 아라리가 강원도에서 통혼권(通婚圈)과 장시권(場市圈)에서 전파되었거나 한강 수로를 통해 전파되었으리라는 막연한 전파론을 믿어 왔다. 그러므로 이의 인과관계를 입증하지 못하여 그럴 것이라고만 되풀이 해왔다. 그런데 ‘아리’나 ‘아라리’ 또는 ‘아리랑’이 밈으로 퍼져나갔다는 것이다. 그 구체적인 자료가 ‘불설명당경아리랑‘이다. 도광3년(1823) 청석거사(靑石居師) 수고본(手稿本)으로 전해지는 ‘불설명당경아리랑’의 후렴에서 알 수가 있다. 충청도 민간신앙 앉은굿에서 아리, 아라리, 아리랑, 사리랑이 후렴사에 쓰인 것은 매우 비맥락적 결합이다. 결과적으로 음감 좋은 어구가 밈으로 작용한 것임을 알 수 있다. "불설명당 신주경 안토지신 명당경/ 아라리 사라리 아리사리 아리랑 여시아문 일시불 천황대제 수명장/ 사라리 아라리 사리아리 사리랑" 반드시 이런 음가의 어구만이 밈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는 없다. 메나리토리의 일정 부분도 밈의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료상으로는 위의 ‘불설명당경아리랑’에서처럼 특정 음가의 어구만이 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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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br>제주의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의 기층이 땅 어디에든 아리랑은 있다. 그 곳이 우즈베키스탄(Uzbekistan)이나 사할린의 어느 골목이든 말이다. 한국인이 사는 곳에는 반드시 아리랑이 불려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물며 제주도에 아리랑이 없겠는가. 필자가 답사하며 갖는 단견이다. 그런데 어느 음악학자는 아리랑이 있는 음악권과 없는 권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제주도는 아리랑이 없는 음악권역이라고 주장한 때가 있었다. 의야해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과연 제주에는 아리랑이 없는가? 문화재청의 유네스코 인류무형유산 아리랑과 국가무형문화재 129호 아리랑 해설에는 아리랑에 대한 음악적 특징이나 각각의 아리랑 간 차이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한 저간의 이유가 있겠지만 필자의 생각으로는 아리랑의 숫자나 음악성에 대해서는 다른 종목과 달리 누구도 명확한 지론을 내놓을 수 없다고 본다. 그 이유는 ‘아리랑’은 이미 민요(노래)의 권역에서 문화 영역으로 확대되어 누구에게나 받아들여지는 보편적 해석을 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얻을 수 있는 결과는 ‘아리랑은 음악적으로 정의하거나 구분을 짓는 것은 유의미하지 않다’는 것이다. 이상과 같은 필자의 단견을 전제로 할 때 ‘제주의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 전자는 제주 지역에서 불려지는(소유한) 아리랑이고 후자는 제주만의 고유 아리랑을 말한다. 이는 광의 또는 협의의 개념이기도하고, 속지주의(屬地主義)냐 속인주의(屬人主義냐)로 구분할 수 있는데, 대체적으로 이 둘을 구분하지 않지만 제주에서 만큼은 필요한 체계이다. 이 문제는 1994년 ‘팔도아리랑기행’(김연갑, 집문당)에서 제주 우도지역 해녀들의 ‘잡노래’를 ‘제주화한 아리랑’으로 발표하고, 같은 해 제주 조천 조운선 할머니의 ‘조천아리랑’이 신나라의 ‘한반도의 아리랑에 수록이 되면서 논의되었다. 그리고 2005년 문화재청의 ‘지역별아리랑전승실태 조사보고서’에서 지역 아리랑으로 구체화 되었다. 이런 영향에서 최근 보도에 의하면 제주지역에서도 ‘제주아리랑보존회’가 법인으로 등록되었다고 한다. 어떤 아리랑이 보존되고 있는지는 모르지만 당연한 문화현상이아 본다. 이에 필자의 관심은 이들 아리랑의 기반 문제이다. 적어도 한 세대 이전의 기층에 아리랑적(?) 요소가 있느냐의 문제인데, 다음 두 가지 요소가 확인된다. 즉 속인주의로서의 ‘고권삼’이란 인물과 속지주의로서의 ‘꽃타령’ 존재이다. 고권삼은 우리 아리랑 역사에서 아리랑을 정치사상사 측면에서 주목한 인물이고, ‘꽃타령’은 ‘제주도실기’(탐라지보유,1936년)에 수록된 문헌 소재 아리랑 사료이다. 이런 자료를 통해 제주지역 아리랑은 기층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고권삼(高權三, 1901~1950)은 성산면 온평리<열운이> 태생으로 1927년 3월 와세다<早稻田>대학 전문부 정경학부를 졸업하고 동대학 연구실에 재직하였다. 광복 후 귀국하여 동국대학 교수, 서울대학 강사 등을 역임하다 1950년 6·25민족전쟁 당시 서울에서 납북拉北을 당하였다. 저서로는 1930년 일본에서 ‘조선근대정치사朝鮮近代政治史’, 1933년 일어판 ‘조선정치사강朝鮮政治史綱’, 그리고 귀국하여 1947년 한글판 ‘조선정치사’를 발간했다. 이들 저서에서 아리랑을 하나의 독립 항목으로 하여 논하였다. 요지는 이렇다. "비폭력 비협동의 理想의 정치적 가치는 문화적으로 진보할수록 더욱 빛나는 것이다. 조선의 <아리랑主義>는 근본적이요 적극적인데 더욱 가치가 있다. 이 <아이롱主義>는 정치사상에 있어 위대한 존재요 또 조선의 정치사를 빛나게 하는 문화적 요소다. <중략> <아리랑主義>의 철학은 평화주의이다. 평화가 없고는 건설이 없고 건설이 없고는 문화가 없고 문화 없는 데는 행복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국민은 평화의 使徒요 인류평화의 指導者이다.” 매우 의미심장한 시각의 해석이다. 이 같은 논의 이후 아직 우리는 이런 시각에서 접근한 성과가 없다. 일제시대 일본 내에서 정치학자라는 위치에서 한계를 갖는 논의이지만, 접근 시각과 연구방법론에서는 오늘의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런 주장자인 고권삼이 제주 출신이란 점에서 주목한 것이다. 다음 ‘제주도실기’ 소재 ‘꽃타령’을 보자. 이 자료가 수록된 ‘제주도실기’는 1887년 제주시 일도리 출생인 김두봉(金枓奉)이 1936년 오사카에서 펴낸 제주 향토지이다. 다른향토지와 다르게 문화분야를 주목하고 편집했는데, 서문에는 이런 문구가 있다. 즉, "어찌 이름 있는 곳에 실상이 없겠는가. 제주의 전모를 실상과 같이 그리고 삼신인이 태어났던 연혁과 고고학적 자료를 모아 유람자의 지침이 되도록 하고자 이 책을 발간한다”고 하였다. 결국 이 책에 담긴 내용은 나름대로 제주도적 근거를 갖는 것들이라고 전제한 것이다. 그리고 제22장 ‘한라산 별곡’중 ‘꽃타령’을 수록했다. 총 17연의 한문투 가사체 노래이다. 이 중 2연을 본다. 꽃타령아리랑 삼월 동풍 호시절에 먼저 피는 척촉화躑躅花야 춘광春光이 덧없어서 몇 등걸만 난달 만가 만화방창(萬花方暢) 방끗 만화방창 방끗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후렴) 영산홍 네얼골은 빗추어서 더욱곱다 낙근고기 꿔어들고 차문借問 주가酒家저杏花야 만화방창(萬花方暢) 방끗 만화방창 방끗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후렴) 살구꽃과 영산홍을 소재로 한 꽃노래이나 후렴에서 "만화방창 방끗 만화방창 방끗/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이다. 아리랑을 ‘후렴에서 아리 아라리 아리랑을 되풀이하는 노래’라고 규정한 문화재청 논리로만 본다면 분명 아리랑의 하나이다. 이를 수록한 편자 김두봉이 1887년생이고 대표적인 향토사가라는 점에서 이 자료 역시 아리랑의 기층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정황을 주의 깊게 살핀다면 우리가 미처 찾아내지 못하고 누군가에게만 전승되어 오는 ‘제주의 아리랑’과 ‘제주아리랑’이 있을 수 있지 않을까? 어느 지역 보다 집단 이주가 빈번했던 근대사 속의 제주와 제주인의 문화를 더욱 관찰할 필요성이 아리랑학에서도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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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br> ‘박진주’의 아리랑 사연1941년 미국에서 ‘동서협회’를 조직하여 님 웨일즈의 ‘아리랑’을 출판하는데 도움을 주고 "한국을 알자―2500만의 잊힌 친구”라는 주제의 강연회도 열었다. 그리고 이 행사에서 ‘아리랑’을 불렀다. 한국인들의 독립운동 실상과 아리랑이란 노래의 가치를 이미 알고 있는 그 여인의 이름은 펄 사이든스트리커 벅(Pearl Sydenstricker Buck), 중국어 이름 싸이전주(賽珍珠)이다. 1930년 중국에서 동·서양 문명의 갈등을 다룬 소설 ‘동풍서풍’을 발행하고, 1931년 빈농부터 대 지주가 된 인물을 그린 작품 ‘대지’를 출판하였다. 1938년 미국의 여성 작가로서는 처음으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 그리고 이 여인은 해방을 맞은 한국을 찾아왔고, 이어서 1968년 까지 10차례나 방문했다. 한국전쟁 발발 해인 1950년에는 ‘한국에서 온 두 처녀’라는 작품을, 1963년에는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라는 작품을, 1968년에는 ‘새해’라는 작품을 발표했다. 이 해에 서울시가 이 여인에게 명예 서울시민증을 수여했다. 이 때 스스로의 한국어 이름을 제시했다. 바로 박진주(朴珍珠)이다. ‘Pearl’의 번역이 이름 ‘진주’로, ‘Buck’이 성씨 ‘박’이 되었다. 이 여인을 우리는 ‘펄벅 여사’라고 불러 온다. 1892년 미국에서 태어나 선교사인 부친을 따라 중국으로 이주하여 40여 년을 살았다. 이 때의 중국 체험을 소설화한 작품이 ‘대지’이다. 이 작품으로 1938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 1960년대 중반부터는 한국 부천에서 10여년을 살기도 했다. 이때 양반가 3대의 삶을 그린 장편소설 ‘갈대는 바람에 흔들려도’를 썼다. 그리고 1973년 80세로 생을 마쳤다. 펄벅여사는 마지막 생을 산 한국을 중국보다 더 사랑했다. 그 사랑의 증거는 "한국은 고상한 국민이 살고 있는 보석 같은 나라”라는 헌사와 그 책 표지에 아리랑 대표사설과 후렴을 한글 반 궁체(宮體)로 담아 표현한 것이다. 1963년 영문학자 장왕록(張旺祿)의 번역으로 동시 발간되었다.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어 "한국 외교관 100명보다 더 큰 역할을 했다”는 평가를 받은 책이다. 그렇다면 이 책의 표지화로 담긴 아리랑에는 어떤 사연이 담겨있을까? 1960년 가을 어느 날의 당시 국빈 예우로 공보처의 안내로 경주를 거쳐 안동 양반가를 취재하러 가고 있었다. 저녁 노을이 붉게 물든 무렵 안동을 들어서는 도로에서 소 달구지를 끌고 가는 농부와 조우하게 되었다. 펄벅은 비포장의 차 먼지를 일지 않게 하기 위해 천천히 몰게 했다. 그리고 달구지의 속도로 가며 내다보았다. 소 고삐를 잡은 노인은 지게를 진채였고, 지게 위에는 볏집 한단과 잡동산이들이 담겨있었다. 빈 달구지이니 그 지게를 싣고 자신도 타고 갈만한데도 짐을 지고 가는 것이었다. ‘아, 하루 종일 밭에서 일을 하고 가는 소를 배려한 것이구나!’ 제 짐을 지고 소와 함께 가는 평화로운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농부는 소에게 들려 주는듯한 나직한 노래를 부르며 가는 것이아닌가.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 나를 버리고 가시는 님은~ 십리도 못가서 발병난다” 바로 ‘아리랑’이었다. 펄벅은 이 때의 감동을 당시 한국예술원의 한 원로 시인에게 전했다. "일시 말라 흔들리지만 한파를 견뎌내고 봄이 되면 되살아나는 갈대처럼 한국인들은 시련을 딛고 일어날 것이다. 이런 한국인들이 부르는 노래가 아리랑임을 알고 있다” 취재 후기를 남겨 전해 오는 사연이다. 며칠 전 한 신문에 펄벅 여사의 친필 서명본이 발굴되었다는 기사를 접했다. 표지와 서명을 보고 문득 여사의 아리랑 사연을 떠 올렸다. 어쩌면 여사는 어떤 이에게 이 책 하얀 내지에 서명을 하며 아리랑 사연을 전해주지 않았을까? 활달하면서도 정겨운 박진주 여사의 필체에서 ‘아~리~랑 아~리~랑~’만년필 사각이는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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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br> 악론(樂論)과 아리랑고금의 ‘음악’에 대한 정의나 해석은 다양하다. 동서양 간에도 마찬가지다. 이러한 악론(樂論)은 아리랑을 해석하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그만큼 아리랑이 정의나 해석에 그 폭이 넓다는 것을 말한다. 다음의 몇 가지 악론에 아리랑을 대입해 본다. '인간은 얼마나 음악적인가' (How Musical Is Man?)라는 도발적인 이름의 책이 있다. 이 책의 저자 존 블래킹(John Blacking)은 음악의 성격을 규정하길 "음악은 동서고금 모든 문화권에 존재하는 지극히 보편적인 인간 속성으로서 언어나 종교에 버금가는 특유의 형질이다”라고 했다. 어느 문화권의 종족에게나 음악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강하게 제시한 것이다. 그런가하면 리처드 도킨즈(Richard Dawkins)는 저서 '이기적 유전자'(The Selfish Gene)에서 "음악은 집단 구성원 간의 결속을 강화시켜주는 일종의 원숭이 상호 털 고르기 기능(Grooming)이다”라고 했다. 공동체 유지의 필요성에서 발명해 낸 것이 음악이란 것이라고 하였다. 공통의 언어, 동질의 성음, 향유의 방식을 같이할 때 무의식적인 동질감을 갖게 하기 때문에 결속력 강화의 도구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상의 두 악론은 우리 아리랑의 형성과 확산을 설명하는 배경이기도 하다. 해외동포들이 격리되어 살면서도 아리랑을 모국의 노래로 삼아 불러 온 이유인 것이다. 아리랑을 부르면 해외동포들 뿐만 아니라 남북동포 간에도 뜨거운 공동체 의식을 갖게 한다. 당나라 시인 한유(韓愈)는 또 다른 차원에서 그 본질을 말한다. 노래하는 이유를 불만의 표현으로 보고 호소의 원초적 표현 방식이라고 하였다. 말이다. 즉, "사람이 노래를 하는 것은 생각이 있어서인데, 입에서 나와 소리가 되는 것은 모두 마음에 편안함이 없어서이다.”(不平則鳴)라고 한 것이다. 이는 아리랑의 저항성(抵抗性)이란 측면을 고려하면 들어맞는 말이다. 일제하에서 소위 ‘불온(不穩)한 노래’로 탄압 받은 아리랑의 경우가 그럴 것이다. 매혹적인 책명 '음악은 왜 우리를 사로잡는가'(Music, the brain, and ecstasy)가 있다. 저자 로베르 주르뎅(Robert Jourdain)은 이 책에서 인간의 음악 인지능력을 말한다. 즉, "흔히 사람들은 가사가 기억나지 않으면 선율을 기억하지 못하지만, 선율을 기억하지 못하여도 가사는 기억한다”고 했다. 할머니의 시집살이 푸념을 담은 아라리는 선율 없이도 실타래처럼 끝없이 풀려나온다. 아라리의 사설이 적층되어 오는 배경이기도 한 것이다. 이와 함께 베로니카 베치(Veronika Beci)는 '음악과 권력'(Music and pouvoir)에서 음악의 공생관계적 생태를 말하였다. 권력과의 관계론인데, "역사에 때로는 동조하고, 때로는 유린당하고, 때로는 저항하는 음악 또한, 역사와 동등한 가치를 지닌다”라고 했다. 역사와의 관계를 적어도 근대사에서는 아리랑이 아니고서는 말할 수 없다. 장르적 확산현상이나 기능성에서도 아리랑을 시대상과 견줄수 있는 노래는 없다. 아리랑을 ‘역사의 증어’이라고 말 하는 소이이기도 하다. 굴곡진 근대사에서의 역할과 디아스포라(Diaspora) 아리랑 상황이나 남북 간의 단가 '아리랑' 합의 상황, 그리고 근대 백년 압축 성장에서 푸념과 격정으로 시대를 관통하여 불러 온 정황들을 대비하면 아리랑은 이상의 논과 규정에 부합하는 폭과 깊이가 남다른 노래이다. 그래서 우리는 아리랑을 ‘공동의 역사, 공동의 성질로 만들어진 공동체’의 노래 또는 ‘기억공동체의 노래, 민족의 노래’라는 위상을 부여하여 불러 오고 있다. 이는 어떤 노래도 넘볼 수 없는 아리랑만의 위상인 것이다.(www.arirangso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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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br>만약에 아리랑~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우리 역사상 규모가 가장 큰 국책 토목공사는 경복궁 중수 7년(1865~1872) 공사이다. 이 공사에는 조선 최대의 규모만큼이나 최대의 연인원이 강제동원되었다. 조대비(효명세자비)와 대원위(대원군)의 명에 의해 부역민(負役民), 모집된 잡역인, 여러 분야의 공장(工匠)들이 전국에서 올라 왔다. 부역민과 이들을 관리하는 중앙 및 지방의 관리(官吏) 구조는 지배자의 억압에 맞서는 피지배자의 갈등과 저항을 야기했다. 그리고 공사장 인근의 여숙, 식당, 주막에는 전국에서 몰려 온 장사치와 전문예인집단이 모이고 흩어지는 경복궁 중수 공간은 문화가 교류하는 계기를 제공했다. 경복궁 중수기간 7년은 아리랑 연구에서 중요한 국면으로 거론된다. 소위 ‘아리랑 발생설(發生說)’이나 ‘아라리/아리랑 전이설(轉移說)’이나 ‘아리랑 확산설(擴散說)’이 모두 이 공사를 기점으로 하고 있다. 발생설은 중수 공사 기간에 아리랑이 형성 또는 발생했다는 주장이고, 변이설은 기존의 토속민요 ‘아라리’가 비로소 후렴구가 붙은 통속민요 ‘아리랑’으로 전이가 되었다는 주장이다. 확산설은 이미 지역에서 불러 온 토속민요 아리랑이 공사장에서 불렸고, 이를 부역인들이 고향으로 돌아가 확산시키게 되었다는 주장이다. 어떤 설이든 아리랑 역사에서는 중요한 상황의 국면인 것이 분명하다. 박태원의 단편소설 '太平聖代'(京鄕新聞/1946)에서 경복궁 중수 기간 어느 오후 무렵, 노역이 고된만큼이나 공사장 밖의 저녁은 소리와 춤의 난장판이다. 광화문통 사정을 다음과 같이 그렸다. "둥! 둥! 둥! 두리 둥둥! 북소리 장고 소리 호적은 니나니 나팔은 뛰- 뛰-....황토마루(黃土峴) 넓으디 넓은 길에 놀이가 사뭇 짱하다. 쫓아가 보니 다른 게 아니라 신시(申時)가 지났으며 오늘 하루 역사가 파하고 지금 부역군들이 떼를 지어 대궐에서 물러 나온 것이었다. 물러 나온 부역군, 모여든 구경꾼으로 넓으디 넓은 황토 마루 큰 길이 송곳 하나 꽂을 틈 없이 빽빽한데 청 황 적 백 흑 오 색채 기(旗)는 바람에 나붓기고 호적과 나팔은 유량히 울이며 무동은 춤추고 여령(女伶)은 소리한다.” 19세기 중반 이런 난장판 7년 상황은 필연적으로 노래가 형성되거나, 전이가 되어 확산될 수 있었다. 장정들이 공사장에서 힘을 썼으니 고됨을 덜기 위해, 고향에 두고온 가족을 그리는 향수를 달래기 위해서 노래는 필연적 조건에서 창출되었을 것이다. 타 지역 부역인이 부르는 노래를 모두가 함께 부르고 향유하는 과정에서 지역적 변이가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 노래는 귀향 부역인들에 의해 다시 전 지역으로 전파 및 확산되었을 것이다. 이 정황에서 세 가지 아리랑 상황(창출-변이-전파)은 영락없이 들어맞는다. 결국 아리랑은 경복궁 중수 공사기간 7년의 시간적/공간적 상황이 만들어 낸 필연적 문화변용(Acculturation)의 결과물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가설을 할 수 있다. 경복궁 중수 시기가 35년 정도 앞당겨져 1830년 이전에 시작되었다면 아리랑 상황도 그만큼 앞당겨졌을 뿐만 아니라 그에 대한 기록도 존재할 수 있다는 기대다. 이런 상상은 이 시기 문예군주 효명세자(孝明世子/1809~1830)의 존재 때문이다. 조선의 제23대 국왕 순조의 하나 뿐인 아들(세자)이자, 제24대 국왕 헌종의 아버지이며, 대한제국 고종 황제 때 1대조인 양아버지로서 묘호가 조(祖)로 격상되어 황제로 추존 된 인물 효명세자는 지난해 6월 고궁박물관에서 ‘문예군주를 꿈 꾼 왕세자 효명세자 특별전’으로 부활했다. 특히 금년 11월 12일 국립국악원에서 192년 전 ‘춘앵전’과 ‘무산향’이란 무용작품 창제자로 현현(顯現)한다. 효명세자는 대리청정(代理廳政) 3년을 맞는 1830년에 실권을 잡고 대대적인 경복궁 중건을 계획하였다. 뿐만 아니라 400여제의 시를 지어 열성어제(列聖御製) 최다 작품을 수록했고, 창덕궁과 창경궁을 그린 동궐도(東闕圖) 제작을 주도했고, 칼춤(劒武)용 무용칼을 개발하기도 했다. 특히 26편의 궁중정제(宮中呈才)를 창제하여 무용사의 주목하는 업적을 남기기도 했다. 대리청정 3년 3개월, 짧은 22년의 생애에 남긴 문예(文藝) 업적이다. 이런 효명세자가 경복궁을 중건했다면, 아리랑 상황은 달랐을 것이다. 아리랑 국면이 35년이나 앞서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어쩌면 당대에 아리랑 상황이 기록되었을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아리랑을 주제로 한 정제도 창제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우리는 오는 12일, 192년 만에 정재무용 ‘아리랑’을 만날 수도 있지 않을까? 만약에, 효명세자가 요절하지 않았다면, 아리랑 국면은 더욱 역사적이고, 더욱 풍모가 있는 노래가 되지 않았을까? 이런 상상으로 12일, ‘철학을 담은 효명세자의 궁중무용’을 보러 가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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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Hand in hand’ 속의 Arirang세계적 유명한 노래에는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반드시 의외의 사연이 담겨져 있다. 역사 깊은 나라의 국가(國歌/National Anthem)가 그렇고, 성가(聖歌) ‘놀라운 은총’(Amazing Grace)을 들 수 있다. 전자는 영국 국가 ‘God Save the Queen’이 대표적이다. 많은 연방국가(聯邦國家)의 국가(國歌)와 세계 여러 나라 국가 제정(制定)에 영향을 주었다. 한 때 미국과 독일에서도 이를 국가로 사용한 적이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 등 많은 나라에서 ‘왕실 찬가’로도 불리고 있다. God Save the Queen God save our gracious Queen Long live our noble Queen God save the Queen Send her victorious Happy and glorious Long to reign over us God save the Queen (하느님, 저희의 자비로우신 여왕폐하를 지켜 주소서 고귀하신 저희의 여왕폐하 만수무강하게 하사 하느님, 여왕 폐하를 지켜 주소서 여왕 폐하께 승리와 복(福)과 영광을 주소서 저희 위에 길이 군림케 하소서 하느님, 폐하를 지켜 주소서) 영국의 국가적 행사나 국제경기에서는 반드시 이 국가를 부른다. 그런데 단 한 사람은 이를 부르지 않는다.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II)여왕이다. 이유는 군주를 찬양하는 노래이기 때문에 군주 자신은 부르지 않고 침묵한다. 또한 국가 의례에서 전체 6절 중 제2절은 잘 부르지 않는다. "국왕 폐하의 적들을 변방으로 흩으사/ 패배하도록 하소서”라는 가사가 전쟁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세계에서 가장 널리 불리는 노래이지만 부르지 않는 이가 있다는 사실과 부르지 않는 가사가 있다는 사실이 의외이다. ‘어메이징 그레이스’는 "영적(靈的)인 국가(國歌)”로 불리는 세계적인 기독교 성가이다. 영국 성공회 사제 존 뉴턴(John Newton/1725~1807)이 가사를 썼고, 작곡가는 미상이며 스코틀랜드 민요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다. 원래 영국에서 탄생했지만 1789년 미국에 소개된 후 널리 18세기 후반부터 국가적 신앙 부흥운동에 대유행을 했다. 이후 미국 남북전쟁(1861~1865) 때도 남북을 가리지 않고 전쟁으로 상처받은 자를 치유하는 노래로 쓰였다. 20세기 들어서 많은 가수에 의해 6천여 번이나 녹음되어 대중음악적으로도 유명하다. 2015년 이 노래가 금세기 세계에 알려지는 계기가 있었다. 6월 26일 미국 대통령 버락 오바마에 의해서 크게 부각되었다. 백인 청년이 총기를 난사해 클레멘타 핑크니(Clementa Pinckney)목사를 비롯해 9명이 숨지는 비극이 발생했다. 추도식에서 미국 대통령은 "인종 문제는 하루아침에 사라지지 않는다. 다만 우리가 다시 침묵에 빠진다면 그것은 핑크니 목사의 죽음에 대한 배신”이라고 지적했다. 그리고 침묵이 흘렀고, 얼마 후 낮은 목소리로 찬송가 〈놀라운 은총〉을 부르기 시작했다. 이에 추도객 모두가 기립하여 함께 부르기 시작했다. 그리고 숨진 9명의 이름을 차례로 읊었다. 이 장면은 전 세계에 알려져 모든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Amazing Grace Amazing Grace! How sweet the sound! That saved a wretch like me I once was lost but now I'm found Was blind, but now I see (놀라운 은총이여! 나같이 타락한 자에게도 구원의 손길 내리시는 다정한 음성! 나는 버려진 자식 그러나 지금은 집을 찾았네! 눈 뜬 장님이었으나 지금은 보이네 나를 두려움에 떨게 하신 그 은총이 두려움을 도로 거두어주셨네) 이 놀라운 노래의 작사 배경은 역설적이다. 1748년 노예무역선이 엄청난 폭풍에 휩쓸려 전복 직전에 놓였다. 이 절박한 순간을 맞자 노예업자는 생전 처음으로 "주여! 자비를 베푸소서!”라는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배는 기적처럼 폭풍우에서 벗어났다. 제2의 삶을 살게 된 노예업자는 그 감동과 감사를 노래로 불렀고, 신앙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바로 성공회 사제 존 뉴턴이다. 결국 가장 성스러운 이 성가의 작사자는 가장 악마적인 사람에 의해 작사된 노래인 것이다. 이상과 같은 노래 사연과 함께 견줄 노래가 ‘손에 손 잡고’(Hand in hand)이다. 이 노래가 우리 노래인가라는 의문을 갖게 하지만 일단은 한글 가사가 먼저 작사 되었으니 우리 노래로 보고 살펴본다. 너무나 유명한 1988년 서울올림픽 공식 주제가이다. 미국, 일본, 한국에서만 1,700만 장의 음반 판매고를 올렸고, 독일, 일본, 홍콩, 스위스, 스페인을 비롯한 17개국에서 1위를 차지하고, 올림픽 기간 중 라디오 방송 리퀘스트 1위로 명성을 얻었다. 이후 지금도 최고의 올림픽 공식 주제곡으로 꼽히고 있다. 그런데 우리는 이 노래에 대해 잘 모른다. 우선 공식 주제가가 된 배경이다. 원래 1986년 MBC문화방송과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공모 방송에서 국민투표 결과 가수 김연자의 ‘아침의 나라에서’가 올림픽 주제곡으로 선정됐다. 그래서 1986년 아시안 게임과 1988년 하계 올림픽에서 연주되는 등 올림픽 공식 노래로 소개되었다. 그런데 1988년 서울올림픽을 앞두고 너무 우리 것에만 치중하지 말고 전 세계인들이 즐길 수 있는 방향으로 초점을 맞추는 논의가 있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계적 음반회사를 대상으로 공모하기로 했다. 그 결과 음반 프로듀서 겸 작곡가인 조르조 모로더(Giovanni Giorgio Morode) 작곡, 작사는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미학과 김문환교수가 맡고, 음반 제작 및 유통에 드는 비용을 모두 부담하기로 한 프러덕션 폴리그램사가 선정되었다. 모로더는 우리나라 노래 3000여곡을 검토하고 작곡하였다. 노래는 해외에서 ‘아리랑 싱어즈’라는 이름으로 활동하던 한국인 2세 구룹 싸운드 ‘코리아나’가 맡게 되었다. 그래서 하계 88올림픽 개막식에서 1절은 한국어, 2절은 영어로 불렸다. Hand in hand 하늘 높이 솟는 불 우리들 가슴 고동치게 하네 이제 모두 다 일어나 영원히 함께 살아가야 할 길 나서자(제1절) Hand in hand we stand all across the land We can make this world a better place in which to live Hand in hand we can start to understand Breaking down the walls that come between us for all time Arirang(제2절 영어가사) 이 노래는 대단한 히트를 하여 전 세계 민주화 현장음악과 스포츠 음악으로 사용되었다. 1989년 공산권 민주화 현장의 운동가로 불렸고, 코리아나는 12월 동베를린에서 무너진 장벽을 배경으로 열창하여 주목을 받았다. 또한 2008년 베이징 올림픽 주제곡 선정 당시 총감독인 장이머우 감독이 "9만 8871곡의 응모작 중에서 서울 올림픽 주제곡 풍을 피하려 했으나 응모작 대다수가 서울 올림픽 노래와 유사해서 고생했다.” 라고 했다는 말이 있기도 했다. 이런 결과에서 1990년 4월 평양에서 김일성 생일을 기념하여 체코 서커스단이 공연하던 도중 연주되었는데 김일성은 이 노래를 알고 있더라는 후일담도 있다. 그런데 이 유명한 노래에 ‘Arirang’이 후렴에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은 드물다. 영어 가사에만 들어있는데, 이는 우리가 작곡가와 음반사와 프러덕션에 조건으로 제시한 것이다. 이를 통해 비록 외국 작곡가와 외국 프러덕션이 음반화 하였지만 원천적 소유권은 한국에 있음을 분명히 한 장치인 것이다. 세계적인 노래 ‘Hand in hand’ 속의 ‘Arirang’. 우리는 그 존재를 모르지만, 어쩌면 먼 후일 88서울 올림픽의 역사와 사연을 입증하는 ‘잃어버린 고리’(Missing Link) 역할을 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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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br> 아리랑 말, 말, 말#1 우리 가요 트로트, ‘아리랑’이라고 하자 최근 공연 중 소신 발언으로 화제를 끌고 있는 가왕 나훈아는 25년 전 공연 중 아리랑을 언급하여 화제를 일으켜서 자극을 받았다. 우리의 대중가요 트로트를 ‘아리랑’으로 명명하자는 주장이었다. 1995년 광복 60주년 기념 <나훈아 코서트>에서 이렇게 말했다. "미국은 팝송, 프랑스는 샹송, 이태리는 칸조네, 일본은 엔카가 있는데 우리는 ‘트로트’라고 한다. 이제 ‘한국은 아리랑이라고 하자” 잠시 화제는 되었지만 국민적 공감을 얻지 못해 실현되지도 못하고, 이후에도 더 이상 주장도 하지 않아 잠복된 ‘아리랑 말’이다. 그러나 이는 실현 여부를 떠나 아리랑의 상징성을 이슈화 했다는 점에서 기억할만한 발언이다. #2 아리랑은 한국인의 진언(眞言) 직지사 방장 관응(觀應)스님의 설법 중 아리랑을 언급하여 신문에 대서특필 된 바 있다. 1929년생으로 세수 94세, 법랍 75세로 입적한 스님이다. 오랫 동안 산문을 나서지 않는 스님으로 알려지신 분이 속세의 아리랑을 언급한 것이다. "한국인은 타고 나기를 아리랑을 배우지 않아도 안다. 그래서 아리랑은 마치 진언이다. 진언은 그 뜻을 묻거나 의심하지 않는다. 그 자체가 곧 전부인 것이다.” 법문(法門)이란 말이 진리를 깨친 분의 가르침 또는 ‘진리(眞理)의 세계로 들어가게 하는 문(門)’이라는 뜻이니 아리랑을 법문의 한 방편으로 쓴 것이 분명하다. 그래서 ‘아리랑 말’ 중 기억되는 말이다. #3 "아리랑 엄마” 세계적인 전위 예술가 백남준 선생(1932~2006)은 작고 직전 피아노로 아리랑을 연주했다. 주변인들 증언으로 나이가 들면서 ‘아리랑’과 ‘엄마’란 말에 집착을 보였다고 한다. 그에게 아리랑은 엄마였고, 엄마는 아리랑이었다. 흔한 표현으로 '아리랑으로 쓰고 엄마로 읽는'것은 아닐까. 한국인 심성의 원초성을 확인시켜 주는 말이다. #4 아리랑은 한국의 창(窓) 1994년 'Song of Arirang'의 저자 님 웨일즈(Nym Wales/본명 Helen Foster Snow)를 만난 아리랑 연구가 김연갑의 취재기에 나오는 말이다. 미국 자택에서 님 웨일즈를 만났을 때 단문의 대화에서 김산의 생애를 말하는 대목에서 ‘Korea'와 ’Arirang'를 동일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아리랑으로 한국을 알고 있다고 반복해서 말했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취재기에는 님 웨일즈의 말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Arirang is the window of Korea.” #5 아리랑은 옛 노래이지만 오늘의 노래. 1960년대를 장식한 세계적 듀오 그룹 싸이먼 앤 가팡클(Simon & Garfunkel) 못지않는 남성 화음을 구사한다는 자부심으로 이름한 우리나라 에스 지 워너비(SG WANNABE)의 <아리랑>이 나오면서 언급된 말이다. ‘아라리’도 있고 ‘아리랑’도 있고, 자신들의 ‘아리랑’도 있음을 표현한 ‘아리랑 말’이다. 가요 아리랑 중 기억되는 <아리랑>이 생성한 ‘아리랑 말’이다. 에스 지 워너비에 감사를 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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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br> 아리랑문화의 남상(濫觴)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94년 전인 1926년 10월 1일 오후 4시부터 5시 10분까지 서울 종로 3가 극장 단성사에서는 ‘아리랑’이 여섯 번이나 불렸다. 마지막 장면에서 주인공 영진이 두 명의 순사에 의해 포승줄에 묶여 아리랑고개를 넘어가는 장면에서는 관객 모두가 일어서서 눈물로 ‘아리랑’을 따라 불렀다. 그 순간 단성사 악대의 반주에 의해 아리랑을 부른 가수는 유경이(劉慶伊)이다. 당시 나운규 감독의 영화<아리랑> 개봉 당일의 상황이다. 단성사에서의 개봉상연은 단 3일이었다. 그러나 이후 서울 지역 극장의 재상연을 거듭하여 전국에 확산되었고, 이미 소문에 의해 알려진 주제가 아리랑은 방방곡곡에 전파되어 영화<아리랑>을 끌어들이는 자장력(磁場力)을 발휘했다. 1926년 단성사에서 영화<아리랑>의 개봉으로부터 흥행 상황은 1929년을 정점으로 자장력을 형성하고 문화 유전형질 ‘아리랑’밈(Meme)을 확산시켰다. 이 밈은 문학은 물론 연극, 무용 같은 무대공연 부야로 증식 되어갔다. 그동안 ‘아리랑’ 밈의 증식 사례를 1929년 박진 연출 연극<아리랑>으로 꼽았다. 그러나 최근 사료의 발굴로 1927년 11월 발표된 시 <아리랑>이 확인되면서 서열이 뒤집혔다. 개봉 1년후 문학 분야에서 아리랑의 의미를 인식하기 시작한 시점을 알게 된 것이다. 시 <아리랑>은 1927년 11월 『문우』 제5호에 발표되었다. 이 『문우』는 경성제국대학 예과 재학 조선인들의 모임인 ‘문우회’에서 발간한 잡지이다. 이 모임의 회칙에 의하면 "本會는 朝鮮文藝의 硏究 及 獎勵를 目的으로하고, 京城帝國大學 豫科 內에 置하고, 目的을 達하기 爲하여 每學期 一回式 朝鮮文藝雜誌를 發刊함”이라고 밝히는 동시에 『문우』를 ‘조선문예잡지’라고 규정했다. 곧 교지나 학습지가 아닌 문학지로 자임한 것이다. 이 문예지의 필자들은 자신의 작품이 조선문예의 중심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발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당시 제국대학의 학생이자 식민지 조선의 선구적 지식인이라는 위치에 있고, 변방인 조선인으로서 갖는 자의식과, ‘제국대학’의 엘리트 지식인으로서 갖는 ‘교양인’, ‘세계인’으로서의 감각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전문 작가와 학생의 위치가 기묘하게 뒤섞여 있기도 하다. 제 5호에 수필, 시, 소설, 논평을 발표한 유기춘-유진오-고유섭-한재경-민태식-정종실-노병운-한용균-이병일-최재서-신남철-이효석-김봉진-조용만-김종무-조규선-원흥균 그리고 근원 같은 이들의 이후 행적에서 확인된다. 다음 근원(槿園)의 시 ‘아리랑’도 이런 성격과 수준의 작품이다. <아리랑> 마을 닭의 첫 소래에 놀래 깨어 아침이슬을 밟으면서 들을 지나 언덕을 넘어 굽은 산길을 올라가는 초부樵夫! 손에 든 작때기로 어깨에 매인 지게를 치며 깊은 산에 울리는 아리랑의 노래 피와 같은 늙은 낙일落日은 넘어가고 회색灰色의 장막帳幕으로 변하여 가는 넓은 들에 무거운 짐을 어깨에 메고 하루의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초부樵夫! 피곤한 몸을 질질 끌면서 없는 기운을 억지로 내어 허공에 우렁차게 울리는 아리랑의 노래 아침에 노동할 힘을 주고 저녁에 피로를 회복식히는 미묘한 농촌의 고운 노래! 도회의 우울을 멀리 떠나서 한폭의 그림같은 자연미와 함께 아리랑의 노래 3연의 자유시다. 시적 긴장감은 부족하지만 아리랑을 농촌의 초부나 도회 노동자의 우렁찬 노래로 해석한 것은 소중하다. 특히 ‘아리랑’ 이라는 작품 표제가 주목이 된다. 이를 통해 '아리랑 밈'의 자기 복제 1호라는 것을 알 수 있다. 1920년대 지식인들에게 아리랑 밈의 복제를 가능하게 하였다. 이 시가 문학 아리랑, 나아가 오늘의 광대한 아리랑문화의 남상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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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br> 영화<아리랑>과 아리랑문화기찬숙/아리랑학회 이사 자기복제로 세대를 이어 자기 자신을 보존하는 생물학적 존재를 DNA이라 한다면, 하나의 완성된 정보(지식/문화)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말과 문자를 매개로 보존, 전파되는 것을 밈(Meme)이라고 한다. 밈은 유전자와 매우 비슷한 성격을 지니는데, 아리랑이란 곡을 예를 들면, 미상의 작자가 만들고, 작자는 같은 동네 친구에게 이 곡을 들려줌으로서 아리랑은 친구라는 매개체를 통해 자기 자신을 복제하였다. 그 친구는 주위 사람들에게 곡을 들려줌으로서 더 많은 사람들이 아리랑이란 곡을 알게 되었다. 이로써 아리랑이란 곡을 만든 작자와 친구가 사망한다고 하더라도 아리랑이란 노래는 사라지지 않는다. 세대를 뛰어 넘어 자기를 보전하는데 성공하였다는 뜻이다. 게다가 밈은 돌연변이(突然變異)도 일으킨다. 이 곡을 들은 밀양에 사는 친척은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 그 곡을 전하는데 그만 완벽하게 기억을 해내지를 못한다. 스스로 기억나지 않는 부분을 보완해서 밀양아리랑이란 제목으로 자기 동네사람들에게 전파한다. 돌연변이를 일으킨 것이다. 이와 같이 밈이란 DNA와 같이 새로운 개념의 문화 자기복제를 뜻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상의 아리랑 밈에 대한 설명은 매우 제한적이다. 즉 민요 또는 노래로서의 아리랑만을 한정한 것이기 때문인데, ‘아리랑문화’의 밈에 대한 설명으로는 부족하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아리랑문화’의 개념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 노래 아리랑은 1926년 영화<아리랑> 개봉과 그 흥행의 여파로 전 문화예술 장르로 확산되는 계기를 맞았다. 영화<아리랑>의 자장력(磁場力)에 의해 아리랑에 대한 특정한 사고방식이 형성될 수 있었다. 노래 아리랑뿐만 아니라 전 장르의 문화 공유로 형성된 정서(情緖) 통합체 아리랑문화가 형성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문화(文化)란 한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독특한 생활양식을 의미하며 사회 구성원들이 후천적인 학습을 통해 공유하고 있는 행동 양식과 사고방식을 말한다. 그런데 이 행동양식이나 사고방식은 유전에 의해서가 아니라 학습에 의해서 습득하고 전달받아 기층화 되고 누적된 현상이다. 그 결과 '습득된 행동'을 비롯해서 '마음 속의 관념', '논리적인 구성', '통계적으로 만들어진 것', '심리적인 방어기제' 같은 것이 바로 문화를 구성하는 요소가 된다. 다만 문화는 '구체적인 행동으로부터의 추상이고 그 자체가 행동은 아니다'(레슬리 A. 화이트, 「문화의 개념/The Concept of Culture」, 1973,)라는 것이다. 이런 바탕에서 우리의 <대한민국 문화기본법> 제3조에서는 문화를 매우 집약적으로 정의하게 되었다. 즉, 문화예술, 생활양식, 공동체적 삶의 방식, 가치 체계, 전통 및 신념 등을 포함하는 사회나 사회 구성원의 고유한 정신적·물질적·지적·감성적 특성의 총체라고 했다. 이런 정의에 기댄 ‘아리랑문화’에 대한 규정은 ‘감성적 특성’에 의해 구성되었다고 규정하고 있다. 아리랑은 민중적 비애와 한(恨)의 정조(情調)를 수렴한다. 동시에 권력에 대한 저항적 민중의지를 발현한다. 그리고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는 미래 의식의 추동체이기도 하다. 이 감성적 특성의 총체가 아리랑문화이다. 이는 노래 아리랑의 정서만으로 축적된 것이 아니다. 우리가 향유하는 전 분야 장르에서의 아리랑 주제화나 소재화로 형성한 정서인 것이다. 예를 들면 1926년 이후 1960년대까지 개봉된 9편의 ‘아리랑’ 표제 영화<아리랑>의 존재이다. 동시에 수많은 장르로 확대되어 정서를 적층시켰다. 1929년 막을 올린 연극<아리랑고개> 이후 10여편, 1927년 시 <아리랑> 이후 문학작품 30여편, 1928년 이후 무용<아리랑> 이후 30여편, 1929년 유행가 <아리랑 우지마라> 같은 유행가 20여편, 1934년 음반 <진도아리랑> 외 창작아리랑 5편 발매, 1931년 카페 <아리랑>과 1939년 <아리랑배> 같은 상호와 상품명이 50여종·····.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생활문화, 심지어는 해외 동포사회에도 확장, 전승되었다. 이런 측면에서 아리랑문화는 적층을 이루는 문화이면서, 이를 기반으로 다시 자기증식으로 진화하는 문화이다. 이러함에서 아리랑문화의 밈은 단적으로 말하면 ‘아리랑고개’이다. 이 ‘아리랑고개’라는 열쇄말은 앞에서 열거한 전 장르의 작품 표제에 함축된 것이고, 이를 정서화한 것이다. 그렇다면 이 열쇄말은 어디에서 출현하여 ‘감성적 특성’의 문화, 아리랑문화 형질을 촉진시킨 것인가를 묻게 된다. 그런데 이의 해답은 이미 위에서 제시하였다. 돌연변이라는 진화의 단서가 바로 최초의 타 장르화인 1926년 영화<아리랑> 개봉이다. 이 영화<아리랑> 이후의 현상을 "나운규와 영화<아리랑>의 역사적 무게가 노래 장르의 법칙을 압도한 결과”(김연갑, "메아리 원형 가능성 고찰”, 한국민요학회, 1986년)로 표현했듯이 아리랑의 자장력(磁場力)은 공시적 통시적으로 확장되어진다. 이 자장력이 오늘의 메타데이터Meta Date) 아리랑을, 메타인지(Meta Cognition)의 대상이 되게 하였다. 아리랑문화는 노래 아리랑의 인지 과정에 대해 한 차원 높은 시각에서 발견하고 관찰하는 정신 작용을 수반하는 대상인 것이다. 지난 10월 1일은 1926년 영화<아리랑>이 개봉된 역사적 날이다. 동시에 제8회 ‘아리랑의 날’이다. 세계를 멈추게 하는 펜데믹 코로나19에 묻히고, 추석에 밀려 잊고 지냈다. 아리랑의 저항성과 남성성을 부여한 감독 나운규와 전 장르로의 확산을 촉발시킨 영화<아리랑>을 다시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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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br> 아리랑 노가바, 그리고 ' 아리랑코로나’독일 노래 ‘소나무(O tannenbaum)’의 곡조가 북한에서는 대표적 항일혁명가 ‘적기가(赤旗歌)’의 곡조로 불리고 있다. 어떤 목적을 위해 새롭게 개사가 되어 북한에서 ‘존엄 높게’ 불리게 된 연원을 들춰보고자 한다. 1920년대 초 영국에서 ‘레드 프래그(The red flag)'로 번안되어 저항적 노동가로 불렸다. 그리고 1930년대 중반 일본으로 건너가 사회주의 민중 혁명가 ‘아카하타노 우타(赤旗 歌)’로 불렸다. 원래의 3박자를 4박자로 바꾸고 7.5조로 개사를 하여 대유행을 했다. 이로부터 만주 독립운동 진영에서 이를 ‘적기가’로 번역하고 항일의 노래로 개사하여 불렀다. 해방 후에는 북한에서 이어 부르게 된 것이다. 하나의 곡조가 다섯 나라 독일, 영,국 일본, 조선, 북한에서 개사되어 불렸던 것이다. 이와 함께 살피게 되는 노래가 또 하나 있다. 스코트랜드(애란)민요 ‘올드 랭 사인(Auld Lang Syne)’이다. 영국을 거쳐 유럽에서 지명도를 얻자 극동지역 한국, 일본으로도 전파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애국가’(윤치호작사 무궁화가/애국가)의 곡조로, 일본에서는 ‘석별의 정’으로 개사되어 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1930년대 식민지 조선의 초등학교에서 ‘졸업식 노래’로 불리게 되었다. 이런 현상은 서양식으로 표현하면 콘트라팍투어(Kontrafaktur)이고, 우리식으로 하면 ‘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노가바)이다. 전자는 마르틴 루터 종교혁명 시기 종교적 가사를 민요나 대중음악 곡조에 얹어 빨리 전파시키기 위해서 발현된 것이다. 후자는 우리나라에서 비전문음악인 운동권 지도자들이 자신들의 이념과 정서를 쉽게 담아 표현하기 위한 자구책으로 찾아낸 노래 방식이다. 이런 방식은 곡에 대한 정보나 지식 없이 가사 중심으로 불러온 번안가요이다.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모국어로 부르는 노래이니 당연히 ‘우리 노래이지’라고 여긴다. 초기 애국가를 올드 랭 사인 곡으로 부른 것이다. 그런데 1946년까지 대부분 민중들은 원래의 애국가 곡조로 알고 있었다. 사실 노래의 출처를 알려고 하는 의문도 없던 시대적 산물이었다. 근대화에 기인한 서구음악 수용의 유연성 현상에서는 제한적 한계이지만 민중들의 노래 부르려는 강한 의지가 곡조의 형식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미디어가 곧 메시지’이듯이 선택된 노래의 곡조는 가사 못지않은 강력하고 전파력 강한 메시지가 된다. 이를 실증하는 것이 ‘아리랑’이다. 이 때 ‘아리랑’이란 1926년 나운규 감독의 영화<아리랑>의 주제가로 탄생한 오늘의 ‘본조아리랑’이다. ‘민족영화 제1호’로 호명되는 영화의 주제가이다. 역시 대중성에서 압도할만한 노래이다. 한 옥타브 안에서 선율, 리듬, 박자가 조화롭게 꾸며내는 3박자 왈츠풍, 세마치장단이다. 여기에 명료한 2행 후렴에 2행 3음보의 사설을 갖춘 '후렴구+1절 ' 구조의 공식어구 형식을 정형화 시켰다. 아리랑 명성의 강력함과 노래 형식의 용이성이 ‘아리랑 노가바’를 하나의 독립 장르로 구축하게 했다. 이른바 ‘선전가’의 개사곡이다. 아리랑 곡조의 개사곡이 뚜렷하게 나타나는 시기는 1930년대 중반이다. 근대화의 공시매체 메시지 유통이 필요했던 시절이었다. 우선 선전가로서 분명한 기능을 한 것은다음의 세 가지 예를 들 수 있다. 하나는 1930년 ‘종두선전가’(種痘宣傳歌) 전단지이다. 종두는 천연두 또는 우두를 말한다. 전염병 치료제로 일본을 통해 유입된 주사(注射)에 대한 두려움을 ‘종두보다야 무섭겠냐’라고 선전하는 노래이다. 각 지역 경찰서를 통해 보급되었는데 이 자료는 당시 강원도 이천경찰서가 배포한 전단지에 수록된 자료이다. "호열자 염병에 예방주사/마마 홍역엔 우두넛키// 천하에 일색인 양귀비도/마마 한 번에 곰보된다” 천연두의 무서움이 주사에 비길 수 있느냐며 평생 ‘곰보’로 살지 않으려면 주사를 맞으라는 국가적 강권이다. 후렴은 영화 주제가 아리랑이고 당연히 곡조도 같다는 것을 알수 있다. 둘은 조선일보 1931년 1월 7일자를 통해 등장한 ‘문자보급가’이다. 당시 브로나드운동의 일환으로 신문사 주관으로 시작된 농촌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한글운동이다. 이 문자보급가의 곡조가 ‘流行 아리랑曲’이라는 기록에서 이 시기 유행하던 영화주제가 아리랑을 말하는 것이다. 아리랑고개를 ‘문맹’(文盲)으로 표현하여 넘어가야만 한다고 권고한다. "아리랑고개는 별고개라오”라고 해 놓고 더 높은 고개가 있는데, ‘이 세상 문맹’이라고 했다. 이어서 대명천지 전기불이 들어와 밤에도 훤한 세상에 ‘눈뜨고 못봄’이 웬일이냐고 한탄한다. 그리고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아리랑고개로 넘어간다”라고 후렴을 불러 문맹도 고개처럼 넘길 것이라고 격려한다. 어깨 두드리며 함께 넘자는 청유형 문자보급 노래이다. 셋은 1935년 충북 중원군 상모면 온천리 수안보 온천(水安堡 溫泉)의 선전가이다. 위의 두 가지는 계몽적 성격인데 비해 이는 상업광고적 선전가이다. 당시 전국적으로 알려진 충남 온양온천만이 아니라 수안보온천은 3만년의 역사가 깊은 온천이라는 사실을 알리려는 목적인 듯하다. "문경의 새재를 넘어스면/ 충북의 령천인 수안볼세// 정든님 모시고 이 온천하며/ 조령의 엣일을 차저보자”라고 지명과 역사를 내세웠다. 역시 후렴은 주제가 아리랑과 같고, 곡조를 ‘아리랑曲’으로 하여 본조아리랑임을 알 수 있다. 최근 세계를 멈추게 하는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이러한 고난을 극복하기 위해 서울에서 ‘아리랑코로나’가 출현했다.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에서 발표한 것으로 1950년대 ‘코로나택시’의 유행을 빗대어 코로나택시는 타봤지만 코로나19는 탈 수 없다는 풍자적 표현이다. 후렴과 곡조를 본조아리랑으로 부르고 있다. 시대적 요청에 의한 필연적 출현이다. ‘밈(Meme)’아리랑의 후렴과 곡조가 1930대에서 지금까지 지속적인 자기복제(自己複製, self-replication)의 결과에서 새로이 창출된 것이다. ‘아리랑 노가바’와 ‘아리랑코로나’의 출현은 아리랑이 특별한 노래임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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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br> 아리랑의 진화, 외국 찬송가2000년 들어서 아리랑의 공시적/통시적 확산 현상을 문화유전자(Meme)의 자기복제에 의한 진화 차원으로 재해석 되기 시작했다. 2011년 발간된 『한국의 아리랑문화』(김연갑 외, 박이정)로부터 오늘과 같은 세계적 아리랑의 전승 확산현상을 문화유전자의 자기복제를 통한 진화 결과로 재해석하였다. 문화유전자 밈은 미메시스(Mimesis)와 유전자(Gene)의 합성어로 뇌를 통해 다른 개체의 뇌로 전파되는 모방 가능한 사회적 단위를 총칭하는 용어이다. 생명체는 유전자(DNA)에 의한 수직적 자기복제로 진화하는데, 인간 사유의 총체인 문화는 이 밈의 수평적 복제에 의해서만 진화한다는 것이다. 아리랑의 진화 상황은 괄목할만하다. 해외에서 찬송가로 전승되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두 사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벨기에에서 카토릭 찬트로 불리는 ‘lullaby’(자장가)다. 세계적인 카토릭 성가단이 낸 음반 <CANTATE DOMINO>의 9번째 수록이다. 곡조가 본조아리랑이다. 런던 필하모닉 지휘자 출신의 영국인 말콤 와트 사전트(1895-1967) 씨가 채보해서 편곡하였다. 이 곡에 대한 해설이 매우 감동적이다. "신비로운 리듬은 아무리 험한 해일이 밀려와도 엄마품 속에서 잠든 아기처럼 우리를 편하게 잠 재워 준다.”고 들을 때마다 편안하게 잠들 수 있다고 찬미했다. 아리랑 리듬에 대한 이 같은 상찬은 근거가 있다. 2010년 미국 조지아주 사바나 소재 대중음악 연구센타 <뮤직 인텔리젼트 솔루션>에서 아리랑 선율을 분석한 결과에서 유추가 된다. "정말 아름다운 곡이다. 멜로디가 한 옥타브 안에서만 움직이는 특징이 있다. 그래서 아주 쉽다. 이 결과 한 소절만 듣고도 다음에 어떤 음이 나올지를 예상하게 해 준다. 앞부분에 세 음 ‘아~ 리~ 랑’이 있는데, 이 세음을 높이기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은 정말 완벽하다.” 이 연구소는 이미 <마이 웨이>(My Way)나 <브릿지 오버 더 트라블드 워터>(Bridge Over the Trabeled Water) 같은 세계적인 히트 송의 공통점을 분석하여 신곡의 히트 가능성을 예측하는 것으로 독보적인 위치에 있는 기관이다. 네덜란드가 국가(國歌)를 선정하기 전에 응모작을 분석했는데 그 결과가 국민 투표 결과와 일치하였다고 한다.이러한 신뢰도에서 아리랑의 평가도 확인된다. 이는 스위스 성가단도 이러한 분석에서 성가로 채택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다음은 1990년 미국 연합장로교회에서 발간한 찬송가집 『The Presbyterian Hymnal』에 수록된 찬송가 346장 ‘Christ, You Are the Fullness(그리스도, 찬양의 기쁨)’이다. 여기에 ‘Korean melody, Tune Name ARIRANG’으로 되어있다. 가사는 버트 폴만 (Bert Polman, b. 1945)교수가 1986년 시편 찬송가를 위해 작사했다. 편곡자는 데일 그로텐후이스(Dale Grotenhuis, b.1931)로 1986년 완성했다. 이 두 편의 해외 찬송가는 우리식으로 말하면 ‘노가바’(노래 가사 바꿔 부르기)의 일종이고 서양 찬송가사에서는 콘트라팍투어(Kontrafaktur) 방식이다. 아리랑이 해외에서 외국인의 손에서, 찬송가로도 전승되고 있다는 것은 본조아리랑이 밈으로 복제에서 복제로 거듭된 결과이다. 이는 아리랑의 진화이기도 하다. 미래에 아리랑의 진화는 더 멀리 계속될 것이다. ‘아~리~랑’의 음감과 선율과 리듬, 그리고 세계 유네스코가 부여한 ‘탁월한 보편 가치’가 밈으로 전파, 그리고 또 다른 공간에서 전파될 것이기 때문이다. ‘lullaby’ Sleep in my arms, the birds homeward fly, sleep in my arms, the cool evening falls round thee. Sleep in my arms, little baby, thy mother is here. Sleep in my arms, thou frail weary one, sleep in my arms, for thy Lord watch o'er thee. Sleep in my arms, the sweet Saviour will keep thee from harm. ‘Christ, You are the fullnes’ Christ, You are the fullness of God, first born of eveything. For by You all things were made, You hold them up. You are head of the church, which is your body. First born from the dead.You in all things are supreme! Since we have been raised with You, Lord, help keep our heart and minds. Pure and set on things that build Your rule over all the earth. All our life is now again we will share Your glory. Help us live in peace as true members of Your body. Let Your word dwell richly in us as we teach and sing. Thanks and praise be to God through You, Lord Jesus. In whatever we do let Your name receive the prai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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