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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3: 백석의 연인, 자야 여사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가벼운 몸살기를 느끼며 느지막이 일어나 창밖을 본다. 연무가 자욱하고 만추의 소슬한 가을비가 실낱같이 내린다. 기류가 흐르는지 마당가 은행나무 잎들이 노란 나비들의 군무같이 흩날린다. 가속도로 늙어가는 나이 탓인지 하나둘씩 내 곁을 떠나는 지인들의 혼백 같다는 생각도 든다. 통유리 창가의 내 익숙한 의자에 화석처럼 앉아 씁쓸 달짝지근한 조락의 우수에 잠기다가, 하루 일과의 관성처럼 조간신문을 집어들었다. ‘양치기 백석(白石/1912~1995)’이라는 칼럼이 대뜸 눈에 띄었다. 참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로 전날 나는 대학에서 지기처럼 지내던 몇몇 교수들과 환담하며 우연히 백석과 자야(子夜/1916~1999) 얘기로 꽃을 피우지 않았던가. 백석 시인의 애인이었던 자야 여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아마도 지난 80년대 말엽쯤의 일이 아닌가 한다. 당시 서울음대 김정자 교수가 자야 여사를 모시고 남양주 덕소의 내 우거(寓居)를 방문했다. 김정자 교수는 가야고 전공이지만 자야 여사에게 우리 전통가곡을 따로 배우고 있었다. 자야 여사, 그러니까 김진향(金眞香/김영한)은 전통가곡의 맥을 잇고 중흥시킨 금하 하규일(琴下 河圭一) 스승을 사사했다. 말하자면 전통가곡의 정맥을 이어받은 인물이다. 자야 여사가 멀리 덕소까지 내방한 뜻은 음악 얘기가 아니었다. 지금 생각해도 그녀는 시정의 아낙들과는 달리 확실히 걸출한 안목이 있었던 듯싶다. 전통음악이나 전통문화를 꽃피우려면 당장 목전의 음악적 기량에만 매달리면 안 되고, 멀리 보고 좋은 인재를 키워야 된다며 자기 지론을 폈다. 그리고 돈은 자기가 댈 터이니 내가 인재학교를 세워서 키워 달라는 제의였다. 물각유주(物各有主)라고 했던가. 세상에 인연이 닿지 않으면 복이 굴러와도 눈치마저 채지 못하는 모양이다. 물론 나는 전공이 따로 있으니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사양했다. 지금 생각하면 일말의 후회가 없지도 않다. 알량한 지식만으로 무장한 재승박덕형 인사들이 하도 요란을 떠는 저간의 세태를 겪다 보니 참다운 인성 교육이 얼마나 소중한 일인지를 뒤늦게 절감하고 있으니 말이다. 아무튼 당시 천억대가 넘는다던 성북동의 대원각은 영재교육의 종잣돈이 될 인연을 살짝 비켜서 법정 스님에게 넘겨졌고, 그 후 길상사라는 이름으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자야 여사는 웬만한 범부들이 부끄러울 만큼 선공후사의 국가관과 역사관을 지닌 인물이었다. 아마도 법도 있는 권번 생활을 하면서 당대 숱한 우국지사형 대장부들과의 교유에서 받은 영향이 아닐까 한다. 국립국악원장으로 있을 때였다. 한 번은 대원각 기부 사실을 떠올리며 여사에게 국악원 발전기금을 넌지시 부탁했다. 그분의 소유로 대원각 외에 서초동에 큰 빌딩이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여사는 왠지 국약계를 위해 쓰자는 말에는 마뜩찮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다. 자야 여사의 선행이 또 언론에 보도되었다. 시가 백억여 원이 넘는 서초동 빌딩을 과학영재를 키워 달라며 과기처에 희사했다는 기사였다. 파란만장한 인생 역정을 살아오며 색즉시공(色卽是空)이요 공즉시색(空卽是色)의 경계를 일찌감치 간파했는지, 여사는 아무런 미련 없이 세상살이 공수래공수거의 삶을 깔끔히 솔선수범했다. 자야 여사는 나를 만날 때마다 힘주어 말한 얘기가 있다. 당신 살아 생전에 스승 하규일 선생을 기리고, 백석을 국문학계에 현창시키겠다는 계획이었다. 부끄럽게도 당시 나는 백석이 누군지 전혀 알지 못했고, 따라서 자야 여사의 그 같은 말을 귀담아 듣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던 어느 해, 아마도 90년대 초반이지 싶다. 여사가 여느 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서울시립대 내 연구실로 찾아왔다. 그리고 자신이 쓴 원고 뭉치를 내게 건넸다. 자신과 백석 시인 사이의 사랑 얘기를 쓴 일종의 자전적 소설인데, 한번 읽어 보고 잘 다듬어 달라는 청이었다. 예상대로 여사의 글은 어법이 서툴고 문투가 시대에 맞지 않을 뿐만 아니라 문장의 구성 또한 진부했다. 조금 손 좀 봐서 될 일이 아니었다. 나는 여사에게 사실대로 말했다. 국문학 전공 박사과정 정도의 학생을 소개해 드릴 테니 아예 처음부터 환골탈태해야 되겠다고…. 그 후 얼마마한 시간이 흘렀는지는 기억이 없다. 자야 여사가 내게 책 한 권을 보내왔다. 문학동네에서 펴낸 ‘내 사랑 백석’이라는 제호의 책이었다. 속지에는 ‘한명희 선생깨 6월 22일 1995년 김진향’이라고 친필 서명이 돼 있었다. 지금도 보관하고 있지만 원고의 문투처럼 ‘선생께’라야 할 철자를 ‘선생깨’로 표기한 사실도 역시 그녀다운 어법이다 싶어 오히려 친근감이 느껴졌다. 자야 여사를 알고 지낸 기간은 십여 년 남짓. 한강교 옆 외딴 고층 아파트 댁에 초대를 받기도 했고, 어느 때는 덕소 내 집 마당 단풍나무 밑 평상에 앉아 하규일제 전통가곡을 시범 삼아 부르기도 했다. 간혹 외국을 다녀올 때면 내가 약골이라고 건강식품을 챙겨 주기도 했고, 특이한 술을 선물하기도 했다. 하지만 자야 여사와 나는 자별한 사이도 아니었고 소원한 사이도 아니었다. 그저 같은 서울 하늘 밑에 서로 믿고 지내는 지인 한 분 계시는 정도의 친교 거리였지 싶다. 한 세기가 저물어 가던 1998년도의 일이다. 자야 여사에게서 저녁식사를 하자는 전화가 왔다. 약속한 서초동의 어느 일식집으로 나갔다. 그때의 만남에서 얻은 잔상이 아직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여사의 옷차림이었다. 나는 그동안 여사가 그토록 대담하게 튀는 정장을 한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아래위를 모두 순백의 양장으로 갖춰 입고, 머리는 단정하게 치장돼 있었다. 깔끔하고 정갈한 그분의 성품이 촌치의 착오도 없이 의상으로 표출된 분위기였다. 그날 만남의 요지는 당신이 죽기 전에 자신의 가곡 한바탕을 국악원에서 녹음했으면 좋겠다는 부탁이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하규일 전승의 가곡은 국악원 악사들의 반주로 간간이 녹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여사의 건강은 점점 쇠약해 갔고, 긴 호흡으로 노래할 기력마저 소진돼 갔다. 결국 이듬해 자야 여사는 이승의 마지막 소망을 미완으로 남긴 채 삶을 영별하고 말았다. 나와의 느슨하면서도 예사롭지 않은 인연도 이렇게 과거지사로 뜬구름같이 흩어져 갔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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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2: 전통음악을 사랑하는 고마운 기업인, 초해 윤영달 선생한명희/이미시문화서원 좌장 대학 때 전공이 물리학이라는 사실을 알고는 잠시 의아스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물론 내 선입견이지만, 수학이나 물리학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분들은 왠지 심성이나 인상이 냉철하고 이지적이지 싶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분을 보는 순간 그 같은 사견은 여지없이 사라지고 말았다. 한마디로 그분의 인상을 가장 적확的確하게 집어내는 낱말을 하나 고르라면, 나는 서슴없이 인후仁厚라는 두 글자를 고를 것이다. 그만큼 그분의 인상은 누가 봐도 인자하고 후덕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저 같은 덕성스런 풍모 때문에 큰 기업을 일굴 수 있었구나 하는 자못 관상학적인 단상이 스쳐가기도 했다. 그처럼 만인이 호감을 느끼게 하는 풍격 있는 용모를 타고난 분은 도대체 누구일까? 바로 제과업계의 대표기업인 크라운해태제과 초해超海 윤영달尹永達 회장이다. 윤영달 회장은 한국 사회의 명문대가名門大家인 해남 윤씨의 후손이다. 송강 정철 선생과 함께 조선 중기 시문학의 쌍벽이었던 고산 윤선도 선생의 13세 손이다. 윤선도 선생은 고산孤山이라는 호가 함축하듯 성품이 강직하고 고고했다. 따라서 그의 관직 생활에는 풍파도 많았다. 어찌 보면 유배나 관직 삭탈 등 굴곡이 많았던 용행사장用行舍藏 덕에 오히려 주옥같은 시문들을 후대에 남길 시간적 여유를 얻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조선조 문학사에서 송강이 가사문학에 거봉이었다면 고산은 시문학에 태두였다. 교과서를 통해서 널리 회자되는 고산의 ‘오우가五友歌’는 자연주의 문학의 백미처럼 지금도 청초한 시상으로 뭇사람들의 가슴속에 잔잔히 녹아 있다. 나무도 아닌 것이 풀도 아닌 것이 곧기는 뉘 식이며 속은 어이 비였는가 저러고 사시에 푸르니 그를 좋아하노라 오우가 중에서 대나무를 읊은 이 시조는 고산의 대쪽같은 오상고절傲霜孤節이 여실히 응축돼 있다. 각설하고, 달관의 안목으로 아름다운 대자연의 품에 들어 유유자적했던 고산의 후손답게 크라운해태제과 윤 회장 역시 풍류적인 기질이 다분한 기업가다. 그림이나 조각 분야도 그러하거니와 특히 전통 한국 음악에 대한 그의 애정과 호감은 각별한 데가 있다. 언필칭 국악을 좋아한다는 사람은 드물지 않다. 하지만 스스로 좋아서 속속들이 사랑하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세태가 그러하기에 사심 없이 한악을 좋아하고 즐기는 윤 회장의 예술애호정신은 그래서 한층 돋보인다. 널리 인지된 사실이지만 윤 회장은 매년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벌을 거창하게 개최한다. 한국인의 정서와 현대사의 애환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민족의 노래를 널리 선양하며 역사의식을 환기시키기 위한 그분의 속깊은 애국심의 발로가 아닐 수 없다. 뿐만이 아니다. 많은 사람들이 부러워하는 일이지만, 윤 회장은 역시 예술애호가답게 송추의 수십만 평의 산과 계곡에 조각 동산과 연주 장소와 휴식 공간 등을 꾸며서 아트밸리라는 문화예술 명소를 조성하여 만인이 함께 즐길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해 주고 있다. 나도 어느 때 한 번 몇몇 지인들과 초대받아 고즈넉한 산등성이의 정자에서 차를 마시던 기억이 지금도 인상 깊게 남아 있다. 윤영달 회장의 이런저런 운치 있는 예술적 행적을 좇다 보면, 분명 나는 그 끝자락에 멀리 고산 선생의 절창 오우가가 태산처럼 우뚝 서 있음을 직감하게 된다. 내 벗이 몇인가 하니 수석水石과 송죽松竹이라 동산에 달 오르니 긔 더욱 반갑고야 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여 무엇하리 윤영달 회장이 후원하고 이끄는 여러 문화예술 행사들을 감안해 보면, 윤 회장이야말로 이태리 르네상스를 꽃피웠던 한악계의 진정한 코시모 메디치Cosimo Medici라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이미 십수 년 전부터 정악 계통의 원로 연주가들을 규합하여 양주풍류악회를 결성하고 매달 정기음악회를 이어오고 있으며, 국악 콩쿠르를 통해서 선발한 청소년들을 위주로 영재국악회를 만들어 육성시키고 있기도 하다. 또한 정악계의 원로들로 공연단을 구성하여 해외 순회 공연까지 지속해 오고 있는데, 일본과 베트남과 유럽을 비롯해서 금년에는 몽골 공연을 예정하고 있다. 여러 사례들을 예시할 필요도 없다. 윤 회장의 진정한 한악 사랑의 진면목은 회사 직원들에게도 단가나 시조, 가곡, 일무 같은 정통적인 음악을 익히게 하는 시책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 사소하고 쉬운 일 같지만 기실 기업 현장에서는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공리적인 타산에 앞서 예술을 사랑하는 윤 회장의 가치관이 여사한 기업의 정서적 기조基調와 체질로 이어지고 있다는 명백한 징표임에 분명한 것이다. (본 연재는 이지출판사 출간 '한악계의 별들'에서 발췌하여 게재한다. 이를 허락해주신 출판사와 필자에게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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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악계 별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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