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뉴스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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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8)무정한세월 야속하다 청춘시절 날 데려와 팔십삼이 먹도록 여기서 다 늙어 영혼이 되네. 아이구 원통하고도 참말루 싫어 누구게다 한을 다 풀까요. 서른다섯에 남편을 잃고 혼저 자탄 애탄하며 팔십 서이를 살어 나와 누구게다 이런 한을 풀겠나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로 날 넘겨주게. 감상 청춘에 사할린으로 와 여든세살이 되었다. 타향살이에 살림살이는 구차했고 서른다섯 청상과부 설움마저 감내해야 했다. 자탄 애탄하며 살아 온 삶이 돌아보니 원통하고 허망하다. 무정한 세월에 그 한을 어이하리. 아리고 쓰린 가슴을 부여안고 아리랑고개를 노래로 넘는다. 기댈 데 없는 허랑한 심사를 민체로 흘려 풀었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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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정들소리'를 전승하는 자인계정들소리보존회자인계정 들소리는 경산시 자인면 일대에서 농사철에 부르던 농요(農謠)로 계정숲을 중심으로 이 지역에 뿌리깊은 농업노동요로 이어져 왔다. 자인 계정들 소리는 자인면 일대에서 주로 농사철에 부르던 들소리(農謠)의 집성이다. 자인면 일대는 '신라의 서촌'이라 불리던 유서 깊은 곡창이며 민속예능의 보고이다. 계정들소리도 이 가운데서 형성된 뿌리 깊은 농업 노동요라 할 수 있다. 계정들의 가운데 자인이 위치하고 이곳에 자인단오굿의 '한장군놀이'로 유명한 계정숲이 있다. 계정숲을 중심으로 오랜 역사를 가진 자인 단오굿이 해마다 단오절에 벌어진다. 계정숲에는 지금도 자인 단오굿에 관련되는 한장군 사당과 묘가 있고, 그 아래로부터 펼쳐지는 들판을 계정들이라 한다. 이 계정들을 중심으로 하여 불리어지던 다양한 농업 노농요를 수집하고 재구성한 것이 바로 '자인 계정들소리'이다. 제39회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1998)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자인 계정들 소리'는 후창자 24명이 추가되어 뒷소리의 발음이 더 씩씩하고 장(壯)하다. 계정들 소리의 소리꾼들은 선창 6명과 후창74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상도 민요의 특징인 메나리(산유화)제로 구성된 역동적인 소리로 풍년을 기리는 `들지신 밟기`로 시작돼 `모찌기 소리`, `모심기 소리`, `논매기 소리`, `메타작 소리`, `방아타령`으로 이어진다. 이와함께 산에 나무를 하러가거나 들에 풀을 베러 가면서 넋두리로 부르는 `어사잉어`와 못둑과 밭둑을 쌓을 때, 돌과 나무를 운반할 때 부르는 `목도 소리`와 `망깨 소리`, `보역사 소리`, `칭칭이` 등 모두 열한 개의 소리를 풍물장단에 흥겹게 춤을 추며 부른다. 다른 지역의 대부분 농요는 선율이 거의 같은 경우가 많지만 자인계정 들소리는 소리마다 각기 다른 선율로 돼 있는 것이 특징이다. 더욱이 대부분의 소리가 3박으로 흥청거리는 멋을 곁들이고 있으며 목도 소리와 타작 소리만은 2박으로 씩씩하고 힘차다. 풍년을 기리는 '시진밟기' 산에서 나무를 하거나 풀 베러 갈 대 넔두리로 불렀던 '어사잉이'(어사용)이가 있고, 둑을 쌓을 때나 산판을 할 때 나무둥글이나 돌을 운반하면서 부르는 '목도소리', 못둑을 다지는 '망깨소리', 보(洑)의 물길을 트는 보가래질을 할 때의 '보역사(洑役事)소리', 그리고, 본격적인 나락농사를 시작하면서 부르는 '모찌기소리', 모를 심으면서 부르는 '모심기소리', 논 맬 때 부르는 '논매기소리', 한 톨의 곡식이라도 알뜰히 거두려는 '타작소리'가 있다. 풍년을 기리는 '방아타령'과 신나고 흥겨운 '칭칭이'의 풍물장단에 흥겹게 춤을 추며 상일꾼을 소에 거꾸로 태워 마을로 돌아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경산 자인계정숲 일원에서 개최되는 경산 자인단오제 첫날 호장장군 행렬과한장군대제를 시작으로 첫날은 국가무형문화재 한장군대제, 국가무형문화제 자인단오 큰굿, 경북무형문화재 보안농악, 경북무형문화재 계정들소리, 국가무형문화재 여원무,국가무형문화재 팔광대 공연등과 개막식이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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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2)<BR> "굿• 판• 춤• 놀이는 박제되면 안된다".머리말을 어째서 두번째로 쓰는가. 1988년에 '공포와 잔혹의 연극'이라는 제목으로 책을 내려다가 여의치 않아 중도에 머리말만 쓰고 말았던 적이 있다. 할말은 많고 할 일도 많은데 알아주는 사람없어 무엇을 하던 돈이 있어야 겠다고 해서 생전 처음으로 혜화동 로타리 입구 건물 4층 20여평을 얻어 카페를 시작했었다. 장사라곤 해보지 못한 머리를 굴려 만 4년을 운영하면서 나는 음료수를 나르고 청소하는 등 바깥일을 보았으며 아내는 주방을 맡아 다리가 붓도록 부엌일을 했다. 잠은 부엌 위에 만든 다락방에서 자고 살림도 장사도 함께 했다. 지금 생각하면 악몽같은 생활이었다. 4층에서 주점을 한다는 것이 악조건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런점 때문에 밤 늦게 찾아와 성황을 이루어 주었고 따라서 엄청난 밤손님들의 주벽을 견뎌야만 했다. 나의 적극적 삶은 우리를 무척이나 고달프게 하고 다늦은 나이에 수모도 많이 겪었지만 반대로 나의 내면에서는 작품 의욕에 불을 지르고, 외부에서 당하면 당할수록 작품으로 대결하게 하니, 당시 4년간은 나의 절정의 시기가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아무튼 나는 다소 돈을 만지게 되었고, 88년 이후 10여 년간을 매년 10여 차례 공연을 하였으니 달반을 못넘기며 새로운 작품에 달려 들었다. 자는 것 이외에 눈떠있는 시간은 작품에 대한 생각뿐이었고 작품이 확실시 되면 시를 써서 사념을 확고히 하고 연출을 구상한 다음 파트너인 아내와 상의하면 곧 작품에 임할 수 있었다. 제작, 기획, 대본, 연출, 출연, 미술, 조명, 음향, 의상, 분장, 홍보물 제작까지 나와 아내 둘이서 담당하고, 때론 주위의 제자들과 함께 하게 되면 하고 우리둘이 번갈아 차를 몰고 소도구를 운반해서 장소와 시간을 가리지 않고 무대를 만들어 작품을 올렸다. 무세중과 전위예술 제2권 예술세계에서 밝혀지겠지만 제1권 공연편에는 공연 기록으로 무엇을 했나를 연도별로 주로 팜프렛에 나온 글을 수록했고 제2권에 가서야 '왜' '어떻게' 했느냐를 밝힐 예정이기에 더이상 깊이있게 내용을 다루지 않았다. 그러나 주제를 밝히고 간략한 연출 진행을 기록한 제1권은 1998년으로 60고개를 넘어선 환갑기념으로 출간하게 되었으며 죽을때까지 해내야 할 작품들이 산같이 쌓여 있기에 지난 36년간의 작품들을 일단 정리해 보았다. 공연 주제의 대부분은 통·막· 살을 위시로 하여 우리 시대 통일 의식의 발로요 80년대의 군사 독재자들의 무자비한 폭력적 제압에 항거하는 공포의식으로 표현되었으며 천민자본주의 말로 현상으로 이어지는 환경파괴 인간성 괴멸에 대한 잔혹의식으로 대처한 작품들이었다고 본다. 그런 주제들은 그런 현상들을 그대로 수용하거나 관용할 수 없다라는 강박관념에서라기 보다는 오히려 전위적 표현으로 긍정으로 유도하려는 강한 부정적인 몸부림과 아우성 같은 것이 아니었던가. 즉흥성이 갖는 생생한 짓거리, 현장성이 갖는 현실적 긴장감, 강한 주제 전달의 상징성, 인간성의 무분별한 교감, 이러한 난장성이 갖는 퍼포먼스적 굿 개념, 확실한 언어 전달이 아닌 소리, 짓, 춤의 한 묶음 마당에서 맘, 몸, 얼이 행위하는자와 보는자가 밀착되고 교감되어지리라. 나는 민족을 민족 문화의 바탕이고, 전통은 그 심지가 되며 전위는 지킴이로서 민족얼을 지키고 보호하고 재창조시키는 매체로 본다. 우리의 굿과 판과 춤과 놀이는 어느 일정한 시공에 머물고 있어서는 안되고 더더욱 박물관에 박제되어 있어서도 안된다. 그것들을 우리 삶으로 끌어내어 그 본질을 규명하고 그것들이 오늘의 양식이 되고 미래의 견인 차가 되도록 도극, 전위 정신의 힘으로 이끌어 주어야 한다. 4331년 4월 12일 (1998년 5월 23일) 의정부에서 무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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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4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한류문화컬럼니스트) ‘국악의 날’ 지정은 국악의 진흥 및 발전을 위한 기반 구축의 하나이다. ‘국악의 날’ 지정은 지속가능한 한류음악의 원형자산인 국악발전을 위한 또 하나의 창조적 시스템으로 작용할 것이다. 국악진흥법 제14조는 ‘국악의 날’을 지정하도록 되어 있다. 그 내용은 "국악의 진흥 및 국악문화산업의 활성화를 도모하고 국악에 대한 관심을 높이기 위하여 대통령령으로 국악의 날을 지정한다.”이다. 문화체육부에서는 1994년을 ‘국악의 해’로 지정하여 국악 발전과 국악의 활성화를 도모한 적이 있다. 연구사업과 학술사업, 그리고 공연사업 등에 많은 예산이 책정되고 투입되어 국악의 대중화 및 활성화에 많은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그 여파는 몇 년 정도 지속되었다. 그런데, ‘국악진흥법’이 공포되고 ‘국악의 날’이 지정된다고 하니, 여기저기에서 불만의 소리들이 들려온다. ‘국악의 해’가 있었던 30년 전에 특정 계층, 특정 집단들이 이익을 독식했다는 것이다. 그 당시에 어떤 계층과 집단에서는 국물도 못 먹었다고 한다. 사회의 모든 분야가 그렇듯이 기득권과 소외 계층이 있게 마련이지만, 국악예술 분야에도 기득권과 소외 계층으로 나뉜 것으로 보여져 국가기관과 지도층에서 세심한 보살핌과 배려가 필요한 것 같다. 그 때의 ‘국악의 해’ 이후로 국악계의 양극화가 해소되지 않은 것으로 보여져 많은 아쉬움을 갖게 한다. 그렇다면 ‘국악의 날’은 어떤 날로 정해지면 좋을까? 한마디로 각계, 각층, 각 장르 등 그리고 기득권과 소외 계층에서도 수긍할 수 있는 최대공약수를 찾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하겠다. 현재의 우리 국악계는 장르별, 전공별, 또는 계층별로 자기주장과 이해관계가 첨예한 것 같다. 이러한 상태에서는 ‘국악의 날’이 정해진다 해도 모두 시큰둥하고 "당신들이나 잘 먹고 잘 살아라” 식이 될 것이다. ‘국악의 날’은 국악인들에게 잔치 날이어야 하고 축제날이어야 할 텐데, 오히려 양극화가 심화되지 않을까 걱정되기도 한다. 현재의 우리 국악은 크게 정악과 민속악으로 분류된다. 요즘에는 이 두 가지를 교육기관에서 같이 교육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전문적으로 정악은 국립국악원을 중심으로 보존 전승하고 있고, 민속악은 중요무형문화재 제도 하에 민간에서 자유롭게 보존 전승하고 있다. 따라서 ‘정악’과 ‘민속악’이라는 용어가 교과서처럼 공식적으로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한국전쟁 이후로서 100년도 채 안 된다. 더불어, ‘국악의 날’을 지정하는데 있어서는 모든 국악예술인들이 수궁하고 거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공감대 즉, 역사성, 음악성, 그리고 음악 문화적, 문헌적 근거가 고려되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떤 날로 정하는 것이 좋을까? 일단, 악기와 노래가 존재했던 때로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 보자. 한국음악사를 살펴보면, 상고시대의 음악문화가 삼국시대의 신라를 거치고 통일신라에 이르러서는 고구려와 백제의 음악문화를 흡수‧수용하게 되는데, 그 음악이 신라 향가음악이다. 그리고 그 향가음악은 다시 고려조에 전해지면서 매우 중요한 음악사적 역할을 한다.(『신라향가음악』 박상진 지음, 참조) 그동안 국악계뿐만 아니라 문학계에서의 이러한 신라(통일신라 포함)음악에 대한 연구는 『고려사』 악지와 『삼국유사』에 산재해 있는 신라음악 관련 기사, 그리고 『삼국사기』 그 중에서도 특히 악지(樂志)에 기록된 신라악 조(條) 등 국내 문헌 자료와 관련 유물자료를 주로 참고 대상으로 하여 왔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향가는 천년왕국 신라인들에 의해 불려진 대중가요였다. 향가음악은 『고려사』에서 보듯이 삼국의 속악이 고려조에 사용되었고, 또 그것들은 조선조 초기까지도 시용(時用)되었다. 또한 『고려사』에는 고려조의 음악들이 삼국시대 특히 신라의 음악을 계승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해주는 기록이 실려 있다.(新羅百濟高句麗之樂 高麗竝用之編之樂譜……『高麗史』 志 卷第 二十五二 三國俗樂條) 따라서 향가음악이 고려가요에 전해졌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 고려가요를 담은 고악보가 바로 「시용향악보(時用鄕樂譜)」이다. 이 「시용향악보」를 오선보로 역보(驛譜)하여 보면 고려가요의 음악적 형태는 물론, 신라의 향가음악에 대한 편린(片鱗)도 짐작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신라시대의 향가음악 중 노래 곡은 어떤 악곡들이 존재했고, 그 때 연주된 악기들과 곡들은 몇 곡 정도였는지, 그리고 고려시대로 전해져서 노래 불려진 고려가요의 음악들은 어떤 곡이었는지, 현재 불려지는 노래와는 닮았을까, 안 닮았을까?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회에 이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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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0)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백설이 자자진 골에 구름이 머흐레라 반가운 매화는 어느 곳에 피었는고 석양에 홀로 서이셔 갈 곳 몰라 하노라 고려말 목은 이색(李穡, 1328~1396)이 읊은 매화시이다. 매화를 노래한 우리나라 최초의 시로 알려져 있다. 흰 눈이 수북이 쌓인 골짜기는 필시 고려말의 혼란기를 뜻하는 것이다. 혼란의 구름이 머물러 있으니 눈 속에 피는 설중매를 마주할 길이 없다. 매화를 기다리는 마음은 나라의 혼란이 사라지기를 바라는 심정을 읊은 것이다. 석양에 홀로 청청하게 서 있었다는 행간을 읽으면, 깊은 눈 속에 매화가 피어있듯이 고려가 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와중의 격변을 그려볼 수 있다. 그저 눈 속에 피는 한 송이 매화를 읊은 것이 아니다. 이색이 누구인가.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 호는 목은(牧隱)이다. 포은(圃隱) 정몽주, 야은(冶隱) 길재와 더불어 삼은(三隱)의 한 사람이다. 공교롭게도 내가 태어난 고향 마을 이름이 길은(吉隱)이다. 큰 스승님들이 지어주신 대여섯 개의 호를 나누어 쓰다가, 한 페친의 권유로 시방은 이 이름을 내 호로 사용하고 있다. 어찌 삼은의 언저리라도 갈 수 있겠는가만, 길하고 풍요로운 본질을 그윽이 품고 초야에 은닉해 남은 삶을 꾸리겠다는 마음만은 변함없다. 옛 선비들이 앞다투어 설중매를 노래하고 그 기운에 의탁해 세사에 더럽혀진 마음을 씻고자 했던 이유도 대개 이런 것이었을 것이다. 2008년경 본 지면에 소개했던 내용이기도 하지만, 졸저 '남도를 품은 이야기'(다할미디어, 2022) 한 대목을 다시 가져와 본다. "역학적으로 보면 겨울은 곤음(坤陰)에 해당한다. 시간을 분절하고 공간을 나눠 오행의 의미를 부여할 때 만물이 생장을 정지하는 죽음의 계절을 겨울로 표현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치 해 뜨는 동쪽을 새싹의 색깔인 청색으로 정하고 해가 지는 서쪽을 색깔 없는 흰색으로 정하는 이유와도 같다. 그래서다. 매화는 죽음으로부터 소생하는 혹은 환생하는 재생의 꽃이다. 하고많은 해석들이 있지만 단연 매화의 본질은 여기에 있다고 봐야 한다." 고향 산은 아득히 음기가 서려 있고 대지의 바람은 차고 눈은 깊이 쌓였는데 창을 올리고 편히 앉아 주역을 읽노라 가지 끝에 흰 것 하나, 하늘 뜻을 보이네 삼봉 정도전이 노래한 '매설헌도(梅雪軒圖)'이다. 나는 이 시를 호우의 철학으로 풀이하여 정몽주가 읊은 봄비와 비교해본 바 있다. 겨우내 곤음의 동굴 속에서 검은 피와 붉은 피를 튀기며 새로 올 봄에 대한 혈전을 치렀을 그들의 심경을 읽어내 보고자 했던 것이다. 삼봉 정도전은 이후 이성계를 도와 유교 조선을 기획하고 건국에 성공한다. 주역을 읽으며 올려다본 가지 끝의 흰 것, 그것이 새로 맞이한 삼봉의 봄이었을 것이다. 그에 비하면 목은 이색의 시는 처량하기 그지없다. 분명 백설 잦아진 골 양지바른 어느 언덕에 설중매 만발했을 텐데, 기울어가는 석양을 홀로 바라보며 갈 길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다. 만약 고려가 망하지 않고 심기일전 불교와 무신권력을 혁명했더라면 목은은 눈 속의 매화를 발견한 기쁨을 노래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삼봉을 승리자로만 읽는 것은 아니요 목은을 패배자로만 읽는 것도 아니다. 목은은 줄곧 김구용 정몽주 이숭인 등을 학관으로 채용해 신유학의 보급과 발전에 기여한다. 유교와 불교의 융합을 주장함과 동시에 도첩제(度牒制)를 실시해 승려의 수를 제한하고 불교의 폐단을 줄이려고도 했다. 이성계의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이 강화도로 쫓겨나자 조민수와 함께 창왕을 옹립한다. 이성계 세력이 권력을 잡자 여러 곳으로 유배되었고 1392년 정몽주가 피살되자 이에 연루되어 또 유배 생활을 한다. 이성계의 끊임없는 출사 종용이 있었지만 끝내 고사하고 여강(驪江)으로 가던 도중에 생을 마감한다. 문하에 충절을 지킨 제자들이 많이 배출되었지만, 역설적으로 조선왕조 건국에 공헌한 제자들도 많이 배출된다. 정도전, 하륜, 윤소중, 권근 등이 그들이다. 변혁이나 혁명의 의미를 서로 달리 해석한 때문이었을까? 홍매화는 어떻게 붉은 꽃이 되었을까 옛날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 이야기다. 한 임금이 매화꽃을 어찌나 사랑했던지 매화라는 궁녀까지 총애하게 되었다. 이것을 시기한 신하들이 모의하기를, 매화가 역적들과 밀통해 임금을 죽이려 한다고 했다. 매화는 참소를 받고 처형되었다. 매화꽃 때문에 궁녀 매화를 잃었다고 생각한 임금은 전국의 모든 매화나무를 없애라고 명을 내렸다. 하지만 어떤 시골에서 매화나무를 끔찍하게 사랑했던 한 소녀가 몰래 매화나무를 길렀다. 발각되어 심문을 받게 되었다. 소녀는 이것이 일반 매화와는 다른 빨간 매화라고 우겼다. 신하들이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봄까지 기다리기로 했다. 소녀는 매일 밤 손끝을 매화 가시에 찔러 피를 냈다. 꽃망울에 붉은 피를 흘려 붉은 기운을 넣기 위함이었다. 날마다 피를 흘린 소녀는 이내 죽고 말았다. 봄이 되자 놀랍게도 그때까지는 전혀 보지 못하던 홍매화가 피었다. 매화와 관련된 이야기는 주로 충절이나 정절, 고결한 의지, 강직한 품성 등을 나타내는 데 소환되는 특급 콘텐츠다. 우리나라를 비롯해 중국 일본 등 동양의 시인묵객들이 매화를 노래하거나 그림으로 그리고 혹은 도자기 등의 예술품으로 표현했던 이유도 이런 심성을 흠모했기 때문일 것이다. 소녀라는 이름이 상징하는 잉태와 모성의 여신성(女神性), 봄이 상징하는 재생과 부활의 에너지들이 응축된 콘텐츠라는 점 재론이 필요치 않다. 어찌 이것이 옛일에만 국한되겠는가. 마침 우리집 안마당을 둘러보니 설중매가 이미 꽃망울을 터뜨리고 있다. 하지만 정초 한발의 서슬이 채 가시지 않아서일까. 봄이 아득하기만 하다. 문득 석양에 홀로 서서 갈길 몰라하는 목은을 마주한다. 눈 녹는 그 길에 대통령선거가 있다. 올해도 봄날의 정령 매화가 지천으로 필까? 정치로 말하자면 격조는 언감생심 차마 부끄러워 설중매를 거론할 수조차 없는 현실인데 말이다. 가난하지만 비굴하지 않게 살려고 안빈낙도를 꿈꾸는 일조차 사치가 되어버린 듯하다. 포은과 목은, 삼봉의 혈전들이 그러했을지도 모르겠다. 아직은 곤음의 시간, 그저 매일 밤 손끝을 매화 가시에 찔러 피를 내야 할 모양이다. 시대의 도도한 흐름을 달리 해석하는 것은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예컨대 봄의 전령 매화나무를 모두 베어버리는 무모함을 눈 뜨고 볼 수만은 없지 않은가. 그것은 역사를 거스르는 퇴행이다. 매월당 김시습의 探梅 큰 가지 작은 가지에 눈이 모두 쌓였는데 따뜻한 기운 알아내고 차례대로 피는구나 고운자태 곧은 마음이라 비록 말이 없지만 남쪽 가지엔 봄의 정취 가장 먼저 어리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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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9)<br> 백자중첩편수더분한 매력과 더불어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를 소성하기 위한 가마는 일정한 공간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것은 가마 안에 도자기를 재임하기 위해서는 한계를 지닐 수밖에 없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령 가마 바닥에 고급의 갑번이나 예번을 늘어놓았을 때 그 수량은 지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따라서 고급품이 아닌 하품이나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그릇과 그릇 사이에 받침을 넣어 포개어 굽게 된다. 이 경우 굽은 물론이거니와 그릇 내저에도 흔적이 남게 된다. 그렇다고 하면 받침에는 어떤 종류가 있는 것일까. 청자와 백자에서 쓰인 받침은 같은 것도 있지만 다른 것도 있다. 우선 같은 종류를 보면 가는모래받침, 굵은모래받침, 내화토빚음받침, 모래빚음받침 등이 있다. 다른 것으로는 청자에서는 규석받침이 있고 백자에서는 태토빋음받침이 있다. 청자에서 내화토+모래받침이나 백자에서 흙물+굵은모래받침 등도 다른 종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처럼 받침을 이용해 포개어 굽는 과정을 너무도 잘 보여주고 있는 것이 백자중첩편이다.굵은모래받침을 이용해 그릇을 포개어 굽고 있는데 그 수량이 무려 여덟 점이나 된다. 아래쪽에는 발 다섯 점이 틈 없이 들러붙어 있고 중간에는 흔적만 남은 것 그리고 위쪽으로는 완 안에 잔이 들어 있어 모두가 여덟 점이 되는 것이다. 유색은 회백색에 잔 안에 내저 원각이 있는 것으로 보아 17C 지방가마에서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추측된다. 그런데 백자충첩편의 전체적인 모습을 보면 흡사 청자의 잔탁을 마주하고 있는 느낌이 들어 미소가 절로 머금어 지고는 한다. 받침 중에서도 백자중첩편에서 보이는 굵은모래받침은 지저분해 보이는 등 보기에 깔끔하거나 아름다워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서민과 싼값의 대량생산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하면 이해가 안 가는 것도 아니다. 갑번이나 예번이 지닌 수량의 한계, 이를 극복키 위한 노력의 일환이었다고 하면 나름의 의미는 충분히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아쉬운 것은 굵은모래받침의 백자중첩편이 그나마 들러붙고 깨지는 등 훼손이 심해 서민들의 손에조차 다가가지 못하고 좌절한 점일 것이다. 하지만 어찌 도자기 중에서 갑번이나 예번 등 상품만이 사랑 받는 존재였겠는가. 하품이기는 하지만 백자중첩편이 온전해 서민들의 손에 들어갔더라면 이 또한 그들에게서 애지중지 사랑 받지 않았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그래서인지 끝내 제 몫을 못하고 좌절한 백자중첩편을 보고 있노라면 왠지 모르게 고급품에서 느끼는 저 특별한 미감과는 달리 수더분한 매력과 더불어 더욱 쓸쓸하면서도 애잔한 감정이 느껴지고는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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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79)<br> 최승희 명무의 '화랑무'화랑무 화랑무(花郞舞)는 세계적 무용가 최승희(崔承喜)가 1937년 발표한 작품으로, 신라의 화랑의 모습을 무용화한 작품으로 남성적 춤사위가 주를 이룬다. 경기도 무형문화재 제34호로 지정된 '안성 향당무'에서 신라 시대 때부터 화랑무가 봉황금란무와 함께 전승되어 오고 있다.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를 거치면서 안성 장시를 주 무대로 발전했다. 최승희(1911-1969) 1911년 강원도 홍천 출생 북한에서 조선무용가동맹위원장, 무용학교교장, 최승희무용연구소 소장 역임 1937년 세계 순회공연(3년간 150회) 1957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1951~1952년 중국 공연예술대 무용과 교수 1929년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1946년 월북 후 최승희무용연구소 설립 1999년 한국예술평론가협의회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선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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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7)백운동 마당에는 신선이 놀고 학포동 중허리에 실안개가 떠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성인봉 장재로 넘어간다. 감상 울릉도에 대한 지명은 신라 512년(지증왕 13)에 우산국에 대한 이야기로 처음 등장한다. 고려 태조 때 우릉도(芋陵島), 덕종 때 우릉성(羽陵城), 인종 때 울릉도(蔚陵島) 등의 지명이 등장하고 울릉도(鬱陵島)·우릉도(于陵島)·무릉도(武陵島) 등으로 불렸다. 일본은 울릉도를 죽도(竹島: 다케시마)라 하고 독도를 송도(松島: 마쓰시마)라고 하기도 하였으나 메이지 정권 전후에 울릉도를 마쓰시마,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하였다. 울릉도는 자연환경이 빼어난 소중한 우리 영토로서 3無(도둑, 공해, 뱀) 5多(향나무, 물, 바람, 미인, 돌)의 전화를 입지 않은 평화의 땅이다. 형제봉, 미륵봉, 나리령 등 크고 작은 산봉우리를 거느리고 있는 울릉도의 진산 성인봉과, 낮은 지대에서 보면 이곳에는 항상 흰 구름이 자욱한 백운동과 장재는 울릉도의 별천지이며, 학포동 마을 뒷편으로는 노인봉이 보인다. 자연경관이 빼어난 울릉도의 평화로운 모습을 문양지에 고체로 옮겼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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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대한민국학술원 회원 신용하의 음흉(陰凶)함신용하 교수의 애국가 작사자 '안창호설' 관련 글은 두 편이 있다. 첫 편은 ‘대한민국학술원통신’ 2018년 4월 1일자, 제297호에 발표한 ‘愛國歌 作詞는 누구의 작품인가’이다. 이에 대해서는 필자가 2018년 4월 16자 통신사 ‘뉴시스’에 ‘애국가는 절대 도산 안창호의 작품일 수 없다’로 반박한 바 있다. 두 번째는 도산안창호기념사업회가 주최하는 도산안창호포럼 2021년 08월 26일 발표한 ‘도산 안창호 선생의 ‘애국가’ 작사에 대하여’의 결과물이다. 도산안창호포럼 제3집 ‘애국가 작사와 도산안창호’ 첫 머리에 수록된 원고로써 이번 비판의 대상이다. 신교수의 이번 글의 핵심은 안창호가 1907년 3월~1908년 9월 사이 작사했다는 주장이다. 나름의 근거를 들긴 하였다. 그러나 모두 필자에 의해 검토되어 용도 폐기된 것들의 조합 정도인데다, 한 건도 자신이 발굴한, 자신만의 해석을 가한 대목은 없다. 그런데도 강연을 하고, 10여년 이상 안창호 주장자들을 뒤로 밀고 첫 번째에 원고를 수록한 것은 흥사단이 ‘신용하’라는 권위와 명성을 이용한 것이고, 신교수는 이를 알면서도 응한 것으로 본다. 애국가 작사자를 이렇게 쉽게 진영논리로 밀어붙여서는 안된다는 인식에서, 신교수에게는 다소 지난친 감이 있지만 비판을 하게 되었다. 이제 본론으로 들어간다. 그런데 첫 문장부터 가관이다. 신교수의 주장 배경이기도 하고, 상상력으로 구축한 가설이기도 하다. 이 가설로부터 전개 과정의 논지를 들어 비판하고, 결론으로 신교수의 간교함을 제시하고자 한다. 이해의 편이를 위해 주요 문제 대목을 인용하고 구체적으로 반박하기로 한다. #1 "도산 안창호 선생은 나라의 자주독립과 애국사상 배양에서 ‘애국가’의 중요성을 일찍 인식하고 애국계몽 운동가들과 지식인 학생들에게 애국가 제정과 제창을 적극 권장하였다.” 애국계몽운동가, 지식인, 학생들을 대상으로 "애국가 제정과 제창을 적극 권장하였다.”고 전제하였다. 안창호가 작사했다는 전제 상황을 제시한 것이다. 도대체 언제, 어디에서, 어떤 기록을 통해 애국가 제정과 제창을 권장했다는 말인가? 이에 대한 답이 이후에 제시되지 않는 것으로 보아 이는 허위이다. 분명히 근거 없는 가설이다. 다만 귀국하면서 국가(애국가)에 대한 기능(상징조작의 효용성)에 대해서는 인식하고 강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는 안창호가 국내 사정을 잘 몰랐던 데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독립신문은 이미 논설을 통해 이를 피력해 왔고, 지면을 통해서는 ‘애국가 지어 부르기 운동’ 등을 실천한 상황이었다. 그러니 이는 안창호만의 인식은 아닌 것이다. 이의 증거가 ‘태극학보(太極學報)’ 1908년 3월 발행 제18호를 통해 발표한 ‘讚愛國歌’의 실체이다. 이를 통해 안창호는 이미 그 효용성을 발휘하고 있는 어떤 애국가를 찬(贊)하였기 때문이다. #2 "임시정부와 독립운동가들이 ‘국가’로서 부른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되는 ‘애국가’는 자료를 검증해본 결과 도산이 1907년 3월~1908년 9월 사이 작사한 것이라고 필자는 판단하고 있다.” 이렇게 안창호가 귀국하면서부터 대성학교를 개교하는 시점에 한정하여 현 애국가를 작사했다고 ‘판단’하였다. 증거를 제시하지 못하고 추정을 하였을 뿐이다. 사실 약 1년 반이라는 시기를 제시한 것이니 이 자체가 막연한 추측인 셈이다. 신교수는 이 상황은 이렇게 진전시킨다. 즉, 1907년 2월 20일 일본을 거쳐 서울에 도착한 후 3월 1일 균명학교 외 3개교 연석 귀국강연회에서 애국가에 대해 설했다는 것이다. 이를 각주(대한매일신보, 1907년 3월 20일자)로 제시하여 근거로 삼았다. #3 "國旗拜禮 西署 萬里峴 義務均明學校에서 去番 歸國하얏든 美國儒學生 安昌浩氏가 生徒에게 대하야 勸勉한 內開에 美國 各鐘學校에서는 愛國思想으로 매일 上學전에 國旗에 拜禮하고 愛國歌를 唱함을 見한즉 其開明模範을 令人感昻이라. 然則 凡吾학교도 從今施行하자 하므로 該校에서 去月曜日로 爲始하야 拜旗唱歌禮를 擧行한다더라” 안창호가 귀국한지 한 달만에 학생들에게 첫 강연을 하였는데, 미국의 학교 상황으로 조회 때 국기에 경례하고 애국가(국가)를 창함을 보고와서 권한 결과 균명학교에서 3월 18일 월요일 조회에서 "拜旗唱歌禮를 擧行한다더라”라고 하였다. 그런데 신교수는 ‘拜旗唱歌禮’를 국기 경례를 했는데 애국가는 부르지 못하고 애국적인 창가를 불렀다고 했다. 애국가와 창가를 구분하였다. 그 이유를 "아직 조선에서는 애국가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므로 애국적 창가(唱歌)로 제창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미국학교에서 "國旗에 拜禮하고 愛國歌를 唱함”에 대한 강연 결과로 의무균명학교에서도 그대로 했다는 뜻으로 ‘拜旗唱歌禮’를 하였다는 것인데, 애국가가 정해져 있지 않아 다른 창가로 대신했다고 이해한 것이다. 이는 명백한 상상이며 가공이다. 대성학교 개교(1908년 9월 26일) 전에는 현 애국가가 없었음을 강조하기 위한 억지일 뿐이다. 특히 "아직 애국가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므로~”라는 표현도 터무니가 없다. 왜냐하면 이미 1902년 제정한 ‘대한제국애국가’가 관립학교와 국가적인 행사에서 연주된 데에다 교회 등에서도 여러 애국가를 부른 기록들이 허다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정’이란 용어 사용도 전혀 학술적이지 못한데다 사실도 아니다. 왜냐하면 1908년 9월 이전에 "애국가”가 불렸음은 1907년 11월 14일 ‘황성기독교청년회관신건축 상량예식’ 식순에 ‘愛國歌’가 있음은 물론, 안창호가 강연자로 참석한 1907년 7월의 한 행사 기사에서 ‘애국가’의 존재를 분명히 알려주고 있다는 데서도 그렇다. ‘대한매일신보’ 1907년 7월 18일자 <女子敎育의 視察>이란 기사 일부이다. "광무 11년 7월 8일에 본지 명륜당 내에서 녀자교육연구회를 개하였는데 각학도는 방학의 시를 당하여 7, 8백 명이 참회(參會)하였고, 교회 부인 급 려염부인(閭閻婦人) 4, 5백은 서편으로 참석하였고 일반사회는 1천 8, 9백 명이 동편으로 방청하는데 대황제폐하 만세의 황태자전하 천세와 엄귀비전하(嚴貴妃殿下) 천세(千歲)를 삼호(三呼)한 후에 진명녀학교 생도는 애국가로 축사를 쟁창(爭唱)하고 차제로 열좌(列坐)한 후 부인 연설원은 황부인 몌례 씨와 금부인 혈넌씨와 12세 녀자 옥어진(玉於鎭) 씨요 남자 연설원은 안창호와 김희경인데 박수갈채함은 난가진언(難可盡言)이고…” 이 두 행사에서 불린 것이 어떤 애국가인지는 단정할 수 없으나 에케르트 작곡 ‘大韓帝國愛國歌’이거나 현 애국가일 가능성이 크다. 그러므로 "아직 애국가가 지정되어 있지 않으므로”로라는 주장이나 1908년 9월 이전에는 현 애국가는 물론 "애국가”가 지정되지 않아 부를 수 없었다는 주장은 가당치가 않은 것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는 스스로가 부정하고 있기도 하다. 다음 단락에서 "1908년 8월까지 애국계몽기에 부른 애국가는 주로 ‘무궁화노래’라는 이름의 황실 찬양 중심의 다른 애국가였다.”라고 하여 이미 다른 "애국가”가 있었음을 시인하였기 때문이다. 그야말로 자가당착이 아닐 수 없다. 신교수의 문해력을 의심하게 한다. 그리고 억지는 계속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4 "도산이 신민회를 1907년 4월 창립한 뒤, 이듬해 구국교육운동의 모범학교로 1908년 9월 26일 평양에 대성학교를 설립했을 바로 이때 ‘애국가’의 문제가 대두 되었다. 도산이 새 ‘애국가’(‘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으로 시작하는 애국가)를 창작 보급하기 시작하기 이전 1908년 8월까지 애국계몽기에 부른 애국가는 주로 ‘무궁화노래’라는 이름의 황실 찬양 중심의 다른 애국가였다.” 신교수의 #2에서 "도산이 1907년 3월~1908년 9월 사이 작사한 것”이란 주장에 이어, 안창호가 지어 1908년 9월 26일 대성학교 개교 이후에 발표하였다고 한 발 더 나아간 것이다. 정리하면 지은 시기는 약 1년 반 동안, 이를 세상에 알린 것은 대성학교 개교 후라는 것이다. 그리고 작사 동기는 개교 이전에는 "황실 찬양 중심의 다른 애국가”만 있어서 새로운 시대의 새 애국가가 필요해서라고 한 것이다. 그러면서 현 애국가와 동일 후렴을 쓰는 ‘무궁화노래’(별칭 황실가)는 독립신문 1997년 7월 13일자에 서재필이 "계관시인 윤치호가 지은 것”이라고 한 사실을 수용하며, 현 애국가의 탄생(?)을 서사적으로 이렇게 기술하였다. 5# "대성학교 개교 직후 그(안창호)가 추대한 대성학교 교장 윤치호가 평양의 대성학교로 내려오자, 도산이 이전의 <애국가>(무궁화노래)는 황실 중심이어서 적당치 아니하므로 새로이 한 절을 지어보시라고 윤치호에게 요청하였다. 윤치호는 ‘미처 좋은 생각이 아니나니 도산이 생각한 바가 있는가’하매 도산이 책상 서랍에서 미리 써서 넣어 두었던 것을 보인 것이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유하사 우리나라만세’의 애국가였다. 윤치호는 즉석에서 그것이 매우 잘 되었다고 찬성하여 대성학교에서(안창호 작사의) 새 가사의 애국가가 제창되기 시작하여 전국에 보급되기 시작하였다는 증언이 있다.” 따라가다 보니 "증언이 있다.”로 끝났다. 이는 그동안 필자의 논증으로 전문(傳聞)에 전문으로 유포된 이야기를 답습한 내용이다. 신교수가 #2에서 "판단하고 있다.”를 가능케 한 것이 겨우 이런 ‘증언’임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신교수 판단의 근거는 바로 인용한 5# 뿐인 것이된다. 이를 분절하여 다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는 현 애국가와 동일한 후렴의 ‘무궁화노래’를 작사한 윤치호가 교장이 평앙 대성학교 에 내려왔다. 둘은 안창호가 이미 자신이 지어 놓은 상태에서 황실찬양 내용의 애국가를 지은 윤치호에게 정당치 않으니 다시 지어달라고 하였다. 셋은 윤치호가 좋은 생각이 아니 난다고 하였다. 이에 안창호가 지어놓았던 애국가(현 애국가)를 보여 주니 윤치호가 좋다고 하였다. 넷은 윤치호의 찬성하에 안창호가 지은 것 현 애국가를 대성학교에서 보급하였다. 핵심은 1908년 9월에 안창호가 지은 것을 윤치호의 찬성하에 세상에 처음 알렸다는 점이다. 이상이 사실일까? 그렇다면 두말할 나위 없이 현 애국가 가사는 1908년 9월 이전에는 존재할 수 없는 것이 된다. 당연히 대성학교 안창호의 서랍에서 아직 세상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에 대해 신교수는 이런 사족(蛇足)을 달았다. #6 "새 애국가의 본 가사는 도산의 작품이지만 후렴은 ‘무궁화노래’의 후렴을 차용했음으로 도산은 새 애국가를 자기 작품으로 밝히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 때문에 애국가를 도산의 작품이 아니라 윤치호의 작품이라고 보는 견해도 나오게 된다고 본다.” 윤치호가 작사를 하였다는 오해가 있을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윤치호 작사 ‘무궁화가’의 후렴을 차용하였기 때문에 안창호가 자신의 작품이라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하였다. 역시 신교수의자신의 가설을 강화하는 주장인데, 이런 정도는 윤치호가 이미 1906년 10월 3일 한영서원 개교 후 입학생들을 위해 1907년에 들어 새로 작사했다는 증거인 ‘자필 가사지’의 존재를 대입하면 내세울 것이 되지 못한다. 이런 정도는 너무 궁색한 논지이다. 이어서 신교수는 이런 주장을 내놓았다. 이미 필자가 ‘찬미가’ 수록 3편의 창작 작품을 대상으로 분석한 결과 ‘주제 지향과 가사의 응결성’을 발표한 바가 있다. 이와 같이 애국가 가사와 안창호의 다른 작품과의 분석을 한 것인데, 2절부터 시작하여 마지막에 1절을 분석하였다. 그 결과는 ‘東海’와 같은 시어, "바다가 변하여 돌이 된들”과 같은 영원성의 비유 등을 들어 공통점이 있으니 안창호 작품이라고 주장을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비교 대상인 안창호 작품들의 출현 시기의 문제이다. 즉, 남이장군(南怡將軍) ‘북정가(北征歌)’의 "백두산 높은 봉은 칼을 갈아 다 없애고/ 두만강 깊은 물은 말을 먹여 다 없애리라”나 유길준 ‘독립기념경절회창가’의 "장백산 높다해도~동해물 깊다해도”나 윤치호의 ‘찬미가’ 14장(현 애국가)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출현 이후의 소작이란 문제다. 이 시기의 문제는 안창호의 비교 작품들에서 확인되는 시어나 비유 등이 바로 앞서 열거한 작품들에서 영향을 받은 결과로 보게 하는 것이다. 이를 이해한다면 다음 대목도 실효를 거둘 수 없음은 알게 한다. #7 "여러 사람의 증언들에 차이가 있을 때에는 작품의 내용 분석이 작가를 밝히는 좋은 방법이 된다. ‘동해문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의 애국가 가사의 내용과 표현을 다음과 같이 도산의 다른 작품과 비교해 보면, 이 애국가의 본 가사는 도산 작품임이 분명해진다.” 내용 분석을 통해 작가를 판별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아무리 독창적인 노래 가사를 지었다고 해도 전 세대 또는 동시대의 다른 작품에서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작가만의 독특한 핵심어의 대비가 아니고서는 판단하기 어려운 것이 사실이다. 신교수는 이러한 문제, 즉 작품의 상호텍스트성(intertextuality) 개념을 이해하지 못한 듯하다. 신교수가 애국가 가사와 안창호의 다른 작품과의 분석 결과 제시 정도로 작자를 규명 하려 했다면 옳은 방법은 아니다.문제는 작품의 외연과 내연을 관통하는 주제와 핵심어의 여부이다. 애국가 가사의 핵심어는 바로 ‘하느님’(하나님)이 된다. 필자는 앞장에서 현 애국가의 주제를 제1절 가사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들어 ‘충군 애국적 신앙’이라고 학인 한 바 있다. 그런데 안창호는 ‘하느님’을 쓴 바도 없고, 신앙고백을 한 적도 없다. 그런데도 이런 가사를 쓸 수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안창호는 이런 신앙적 표현을 어떤 노래, 아니 어떤 강연이나 담화에서도 하였다는 기록이나 증언을 찾을 수가 없다. 그래서 이 단 하나의 핵심어 사용 여부로 안창호는 애국가의 작사자가 될 수 없음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다. 앞의 #1~#6까지의 신교수 주장도 결정적인 한 가지 증거로 전면 부정을 하게 된다. 아니 전복이 된다. 왜냐하면 "동해문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이란 가사의 애국가는 이미 대성학교 개교 3개월 전인 1908년 6월 25일 광학서포에서 발간한 윤치호 역술 ‘찬미가’(재판) 15쪽 제14장 ‘Patriotic Hymn’에 나오기 때문이다. 결국 신교수가 그렇게도 강조한 안창호가 지어놓았다가 윤치호의 찬성으로 1908년 9월에 서랍에서 꺼내 발표하였다는 주장은 성립할 수 없는 것이 된다. 이 사실 하나로 신교수의 너절한 주장은 허사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반드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어처구니 없는 것으로 신교수는 알면서 숨긴 것이 있다는 점이다. 매우 충격적인데, 자신의 주장 시점보다 절대 시간 3개월이 빠른 기록 증거이다. 바로 ‘찬미가’ 수록 14편 ‘Patriotic Hymn’이다. 이는 결코 몰라서가 아니다. 존재를 알고 있었음이 자신의 글 곳곳에서 명백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즉, 12쪽 "이 ‘무궁화노래’는 윤치호가 편찬한 ‘찬미가’에서 <Patriotic Hymn>(애국가)으로 번역해 수록~”이라고 한 것과 15쪽 각주7의 참고문헌 "① 尹致昊 譯述, 찬미가, 1908”로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특히 20쪽 각주8은 결정적인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알고 있음을 분명하게 확인시켜 주는 대목이다. "윤치호 ‘찬미가’(재판 1908년)에서 ‘무궁화가’의 영문 제목을 ‘애국가Patriotic Hymn’으로 번역한 것은 윤치호임이 분명함으로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그의 ‘애국가’는 이 ‘무궁화노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신교수가 "그의 ‘애국가’는 이 ‘무궁화노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라고 한 ‘무궁화가’는 ‘애국가Patriotic Hymn’이며, ‘찬미가’ 수록 제10장이며, 또한 ‘애국가Patriotic Hymn’ No[1]이기도 하다. 제10장의 ‘No[1]’이란 표기 의미는 제14장을 같은 ‘애국가Patriotic Hymn’ 두 번째, 즉 ‘No[2]’로 변별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교수가 단 각주8의 논리대로 하면 제14장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윤치호가 ‘애국가’를 작사했다는 그의 ‘애국가’는 이 제14장 ‘애국가Patriotic Hymn No[2]’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왜냐하면, 같은 곡조에, 같은 곡명을 썼기 때문이다. 이렇게 신교수는 스스로가 인정을 하였다. 그러므로 여기에 안창호가 끼어들 여지는 없게 된다. 3개월 전이란 절대 시점상으로나 ‘No[1]’이란 변별의 면밀함에서 윤치호 작이 아닐 수가 없게 된다. 신교수가 ‘찬미가 제14장’의 존재를 감춘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인 것이다. 윤치호 역술 ‘찬미가’ 제15 쪽에 수록된 ‘제14장’(현 애국가)의 존재를 왜 숨겼을까? 학술원 회원이란 권위로 자신의 가설(억지 주장)을 유지하기 위해서? 아니면 강연료(원고료)를 받기 위해서? 하여튼 어떤 이유에서건 불리한 사안을 숨긴 것은 매우 음흉한 짓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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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세중과 전위예술(1) <BR>"전통과의 충돌"한국 전위예술의 1세대 무세중은 한국의 전위예술가로, 1937년 김세중(金世中)의 몸을 빌려 서울에서 태어났다. 그는 전통과 충돌하고, 서구 공간과 충돌하고, 분단과 충돌하고, 체제와 충돌하고, 마침내 문명과 충돌했다. 그러면서 그는 스스로 부질없는 씨족의 성, 광산 김씨를 떼어버리고, 인민 ‘중(衆)’자로 바꾸어 무세중(巫世衆)이 되었다. 1960년대는 민족의 넋과 얼이 깃들어져 있는 민족예술의 시원을 찾아 전국 방방곡곡을 헤매었다. 그곳에서 민속극의 원천과 우리들의 몸짓과 춤사위를 발견하고 기록하며 봉산탈춤 (이근성), 양주 별산대 놀이(김성대 선생), 동래 들놀음 (박덕업), 남사당 덧뵈기 춤(남형우), 고성 오광대(장재봉) 춤을 익히고 전수 받아 한국 탈춤을 연마하기 시작한다. 마침내 1969년 10월 14일 YWCA에서 춤을 가르쳐 주신 네 분의 스승님을 모시고 '韓國 民俗 假面舞劇 춤사위 종합 전수 발표회'를 열었으며 스승과 제자가 한 무대에서 함께 공연하는 감동의 무대를 가졌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민속의 새로운 재창조를 위한 민예 부흥 운동가로서 1971년 '東亞 民俗 藝術院'을 설립하고 '극단 民族'을 창립하였다. 민속극의 본질 규명을 위한 '마당으로의 환원 작업', ' 민속극 창조 기능의 재활'의 마당극 운동에 앞장섰고 민족극의 미학을 정립하고자 힘썼다. 서울 한복판 덕수궁 뒤뜰에서 풍물놀이, 꼭두각시놀음, 북청사자 놀음, 송파 산대놀이, 산신굿, 마당극제, 판소리 마당굿을 기획 공연하였고, 서울대 고대 연대 등 30여 개 대학에서 마당굿 놀이를 순회 공연하고 탈춤반을 만들어 지도하며 축제 무대 공연을 시도하게 하였다. 또한 '남사당'을 사단법인체로 승격시켜 유랑 예인 집단의 체계적 발전과 정착을 위한 창립 작업에 몰두하였고, 1972년에 민속극회 남사당놀이 여섯 마당을 최초로 무대에 올리는 '남사당제'를 기획 연출하였으며, 한편으로는 3백여 가지의 한국 춤사위를 연구 정리하고 이론적으로 체계화 시켜 '한국 민속극 춤사위 연구'라는 탁월하고 선구자적 학술 논문을 발표하였다. 무세중 선생의 첫 출판 '무세중과 전위예술'에 담긴 '전위예술'을 연재하기로 한다. 다음은 이 책의 서문이다. (편집자 주) 어느 젊은 날 여름, 한밤 중에 잠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책상 앞에 앉아 잠결에선가 끄적대고 다시 잠자리에 들었는데 다음날 일어나 종이 위에 쓴것을 읽어보니 다음과 같았다. "이렇게 자고 먹고 싸고 살다가 언제 어디서 내가 왜 자고 먹고 사는지 모른채 살고 먹고 싸다 죽어버리는 것이 아닐까?" 나는 마치 살고 있는 것이 죽기위한 연습같이 느껴져 몸서리 친적이있다. 나라는 고기덩어리 몸둥아리는 그저 편안한것만 좋아해서 그냥 놔두면 채울것 다 채우고나서 가라 앉으려들고, 마음일랑 속절없이 내팽개쳐 놓을량이면 한없이 달아나 밑도 끝도 없는 황당무개한 곳으로 날아가 까불어대고....... 생겨나길 내 의지대로가 아니어서 인지 운명, 팔자에 몸을 실어 사랑에 속고 돈에우는 가련한 인생에 목을 매고 자폭 자살하는 삶을 살거냐, 어쩌다 지은 德이 있어 있을것 없을것 다 차려놓고 홍이야 청이야 세월가는 줄 모르고 제속을 파먹어가니 제껍데기에 파묻혀 스스로 숨이 막혀 떠나는거냐. 내가 태어난건 내 뜻대로가 아니드라도 돌아가는 길의 선택은 내 뜻대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하여 사는 길을 道, 그것을 엮고 묶고 펼치고 행하는 것을 劇이라하여 道劇이라고 칭하고 삶을 깨 고 삶을 깨닫고 삶을 깨우치는 분골쇄신의 道劇작업을 실행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意識하기 까지에는 몇가지 단계가 있었던 것 같다. 1962년 연극아카데미(드라마센터)에 들어간 이후 1977년 내 개인 창작발표회를 갖기까지 15년간은 자기 발견을 위한 民族本質追求로서의 民俗劇研究와 民藝復興을 제창하여 民衆精神을 모색하고 그것의 회복을 위한 운동을 전개하면서 傳統을 克服하기 위하여서도 '傳統과의 衝突'를 시도하였고, 새로운 進步 的自我와 전통의 파괴를 통한 전통의 再創造라는 입장을 확고히 세우게 되었던 것이다. 1977년 독일로 건너간 후 서구 문명과의 만남에서 나는 자연 서구 '空間과의 衝突'을 작품으로 끌어내지 않을 수 없었다. 거기서 '밤'이라는 어둡고 차고 잔인한 이중인격적인 白人文明社會에서 충격을 받고 그들 幕 위의 際媒와 횡포를 고발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리고 1982년에 돌아와 反이데올로기 · 反테크놀로지 · 反연극을 통한 '통일을 위한 막걸리살풀이'(통·막·살)를 전위적 표현으로 시도하였고 超現實主義 그림작품들을 고통과 잔혹의 내면 세력으로 유도시켰던 것이다. 이른바 새로운 얼빛(눈빛, 얼굴빛, 몸빛 등 육체로 발산되는 빛), 새로운 넋소리(목소리, 뼈소리, 살소리, 피소리 등 육체 속에서 부딪쳐 나오는 소리) 새로운 몸짓(손짓, 발짓 등 精氣를 몸으로부터 나오는 온갖 움직임)들을 일깨워 인간 내면에 잠재하는 신비함들을 밖으로 끌어내는 작업의 道劇을 창출하기에 이르렀다. 항상 이 움추려드는 자기의 벽을 깨고, 항상 生存하는 까닭을 깨닫고, 항상 마음을 비우고 새로움으로 진작하기 위하여 깨우치는道劇思想이 민족의 차원에서 이해 될때는 마치 人道 의 회복에 도극사상의 근본이 있듯이 새로운 민족의 빛, 새로운 민족의 소리, 새로운 민족의 짓을 깨우쳐 나오게하여 우리 민족의 가장 절실한 과제인 統一과 民主에 이바지되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이 테러적일 수 밖에 없는 것은 以小事大 즉 작은 것으로 큰 것을 치룰때 우리 씨름의 원칙처럼 상대방의 힘을 빌려 상대가 스스로 넘어가게 하는 것과 같이 外勢에 침을 놓고 맥을 끊는(Hit and Run) 충격요법으로 자신을 유지해야 하는 것과 같은 논리가 되는 것이다. 공연예술도 마찬가지이다. 온갖 이야기로 뒤집어 씌워 눈물을 안고 쓸어지는 리얼리즘이나 철저하게 보여주기 위한 쇼가 아니라 번갯불처럼 氣와 氣가 교류되고 以心傳心으로 통하고 그리고 어느새 사라져 버리는 퍼포 밍 아트(Performing Art)의 퍼포먼스(공연예술이라고 꼬집어 말할 수 없음), 무엇을 보여주고 이야기해주는 것이 아니라 무질서하고 이야기 없는 상황전개에서 느껴지는 암시와 이해되는 상징. 또한 즉흥적으로 살아있는 자들의 순간적인 눈빛, 몸짓, 목소리의 교합 그리고 그것들은 오랫동안 기억 속에 남아서 생을 풍요롭게 자극시켜 주게 되는 것이다. 1982년 이후의 창작활동은 내가 봐도 왕성했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8년 간의 독일 체류기 간동안 직·간접으로 의식해온 합리주의 사고와 나의 다혈질 정열이 묘하게 어울려 창작 충동을 일으키게 하였고, 또 정치사회 상황인식에 철저하게 가졌던 나는 내 작품들을 고통, 잔혹의 상황극작품으로 이끌게 된것이다. 어느새 내 나이 쉰셋. 나이 먹으니 헛배도 나오는 몸둥아리로만 추나. 다만 몸을 빌릴뿐인데 머리가 있기 때문에 나는 이제부터 나 자신에게 정직하게 내 道劇의 세계를 펼쳐 나갈 것이다. 내 모든 바램은 이 나라를 수호하시며 나를 지켜주는 단군 산신령 할아버님과 바다를 지키시는 용신령님의 끝없는 배려 하에 그 염원이 이루어지리라 믿는다. 1988년 12월 무세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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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9)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한강의 끝자락 조강포에서 터울림을 한 것이 4년 전이다. 주지하듯이 조강포는 마금포, 강령포와 더불어 한강 하류의 3대 포구였다. 한강, 예성강, 임진강의 염하(鹽河)가 만나 한길을 이루고 서해로 접어드는 물길이다. 전라 충청의 모든 물류가 한양으로 나들던 길목이요 대중국 교류의 대문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쉬었다가 한물을 올라가면 서울 마포다. 지금은 철책으로 막아버려 북쪽 땅끝이 되어버린 곳이다. 2018년 당시 나는 이곳을 중심으로 풍물활동을 하던 노나메기팀과 합류하여 조강포 나루표지석 앞에서 신년 마당밟이를 하였다. 땅을 울리니 터울림이요 바람을 더불어 울리니 공명(共鳴)이었다. 아시아문화연구원 김용국 원장과 만나 내가 제안을 하였고, 노나메기 대표가 응대하여 이루어진 쾌거였다. 분단 이후 최초로 조강포를 울렸던 쇠북소리는 북녘땅 어디까지 울려 퍼졌을까. 지난 2003년 장두석, 박병천, 박사규(기천 문주)선생님을 따라 백두산 정상에서 분단 이후 최초의 천제를 모셨던 기억이 새롭다. 땅이란 무엇일까. 국토란 무엇일까. 조강포에서 바라보면 손을 뻗으면 닿을 듯한 곳이 모두 북한이다. 우리의 울림이 얼어붙은 한강을 그윽하게 울려 평안도로 황해도로 울려 퍼졌을까. 분단 이후 최초로 울린 조강포의 터밟이, 울림(共鳴)이란 무엇인가 지난해 말 (사)나라풍물굿의 요청으로 특강을 하였다. 대주제는 '전환기의 풍물굿: 풍물굿이 변화하는 이 시기에 어떻게 대처하고 적응해 갈 것인가'였고, 내 강의 주제는 '울림이란 무엇인가-대동의 공명론'이었다. 질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의 '리토르넬로'를 소개하며 우리 농악의 '울림', 그 정체에 대해 설명한 강의였다. 주의할 것은 여기서의 대동(大同)이 집단주의나 전체주의하고는 전혀 다르다는 점이다. 어쨌든 하고많은 다른 표현들 놔두고 왜 농악을 '울린다'라고 표현하는 것일까? 통상 서양에서는 '새가 노래한다'고 하고, 우리는 '새가 운다'라고 하는데, '운다'라는 표현이 '울음을 운다'의 뜻일까? 이론이야 많이 있겠지만 내가 주장해 온 결론을 말한다면, 더불어 울리는 일 곧 공명(共鳴)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맞울림과 더불어 울림에 대해서는 본 지면을 통해 여러 번 소개했으므로 구체적인 리뷰는 생략한다. 내 강의는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 농악의 기원, 특히 '울림'이란 공명의 본질에 대한 해석이라고 할 수 있다. 땔나무꾼 나를 초청한 (사)나라풍물굿은 2021년 나라터밟이 행사를 주도하고, 만북울림이라는 이름으로 광화문 등 나라터 울림을 주도했던 그룹이다. 지난해 이들은 한강, 낙동강, 섬진강, 금강, 영산강 등 5개 강의 발원지와 하구를 찾아 샘굿이라는 이름으로 상생의 울림을 도모하기도 했다. 농악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는 시선이자 일종의 운동이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다. 나는 이들을 일러 천만 농악꾼(풍물꾼)이라고 표현한다. 본래 마을굿에서 연원한 농악을 염두에 둔다면 천만 아니라 이천만 삼천만 동호인을 보유한 집단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그래서다. 이들이 행하는 활동과 운동이 사실은 '농악'의 본질을 연행해 온 것이고, 곧 공명의 울림을 실천해왔다는 점을 환기하고 싶다. 지면상 자세한 이야기는 차차 나누기로 하고, 농악(農樂)의 본질에 대한 이야기 한 토막만 붙여두기로 한다. 농악(農樂)이란 이름에 대하여 농악(農樂)이란 이름이 일제강점기 우리 풍물을 농사(農事)에 제한하여 붙인 이름이라고들 한다. 농악의 바이블이라고 하는 정병호의 '농악'에서도 그렇게 주장했고, 여타 전문 연구자들도 그렇게 주장해왔다. 그래서 대안으로 사용한 이름이 '풍물'이다. 과연 그러한가? 결론적으로 말하면, 풍물을 축소하여 농악이란 이름으로 호명한 것이 아니라, 농악을 오히려 축소하여 풍물이란 이름으로 호명했다고 하는 편이 옳다. 물론 '풍물'이라는 용어를 사용해 온 저간의 역사와 활동은 그것대로 존중되어야 하지만, 농악이란 이름 혹은 울림이라는 정체를 올바로 지적해두는 것이 필요해 보인다. 정초의 마당밟이와 지신밟기에 포섭된 벽사(闢邪)적 기능뿐 아니라 대지와 천상의 신을 울리는 신명의 기능을 염두에 두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남도 문화재위원 김희태가 오랫동안 이를 주장해왔다. 나는 그가 발굴한 여러 자료를 통해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뿐만 아니라 그 맥락에 대해 더욱 견실한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농악이란 용어가 사용된 내력을 몇 가지만 살펴본다. 장흥사람 안유신(安由愼, 1580~1657)이 지은 '유두관농악(流頭觀農樂)'은 보성에서 농악을 보고 지은 시다. 16세기에 농악이란 이름이 쓰였음을 알 수 있다. 1890년대 매천 황현(1855~1910)의 <매천야록(梅泉野錄)>에는 농악에 대한 자세한 설명까지 곁들였다. 충청도 서천 유생 최덕기(崔德基, 1874~1929)가 쓴 향촌일기 <갑오기사(甲午記事)>에도 농악이 나온다. 김제출신 근대학자 석정 이정직(1841~1910)의 저서 <연석산방미정시고(燕石山房未定詩藁)>에는 시 제목을 아예 '농악'으로 뽑았다. 1914년까지 살았던 보성선비 이교문(李敎文, 1846~1914)의 <일봉유고(日峯遺稿)>에도 '농악'이란 제목의 7언 율시가 있다. 동학과 관련한 석남역사(石南歷史) 및 후손들의 증언집에도 농악이란 이름이 빈출한다. 여기에 마당밟이 지신밟기를 포함한 마을굿(당산굿), 두레풍장, 나례희, 군사 훈련, 유랑 연희, 무격의례 혹은 탈놀이 등 수많은 장르가 합해져 이루어진 것이 오늘날의 농악이다. 관련 내용은 차차 소개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강상헌은 지난해 농민신문 칼럼에서 갑골문 농(農)자를 천문(天文)에 빗대어 설명한 바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농사는 살림의 다른 이름이다. 죽임의 반대말이 살림이다. 글농사, 밥농사 등 한 해 농사에 비유하는 수많은 언설들이 이를 말해준다. 농사와 농악을 농업만으로 이해했던 오류를 시정하는 것이 터울림 혹은 땅울림이라는 공명의 방식을 제대로 인식하는 첩경이다. 땅이 살아야 나라가 산다 지난해 칼럼에서 해남의 소농지원 사업을 소개한 바 있다. 이것이야말로 기왕에 해왔던 지력 약탈농업, 소농 수탈농업 등 땅의 기운을 빼앗고 마을의 정기를 빼앗고 종국에는 지역이 소멸해가는 기왕의 시스템을 혁신하는 패러다임의 전환이라고 생각해서였다. 그래서 드는 생각이다. 농악이란 이름을 너무 농업에 의존한 호명으로 격하시켜온 것 아닌가? 농사의 효용만을 따져, 땅을 수탈하는 농업, 소농과 가족농을 죽이는 농업구조로 재편해온 것처럼 말이다. 어디 농업만 그러하겠는가? 정치, 경제, 문화 전반이 다르지 않다. 예컨대 농악이 가진 종합적이고 총체적인 맥락을 살피지 못한 채 어떤 주된 기능만을 내세우게 되면 얻는 것보다 잃는 것이 많아지지 않겠는가. 농악이란 이름의 출처와 공명의 본질에 대해 극구 이야기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농악의 출처가 그렇고 생성의 역사가 그러하며 재구성된 맥락이 또한 그러하다. 그래서 꿈꾸어 본다. 혹여 이번 대통령에 당선된 누군가 취임식 할 때, 덩더꿍 꽹과리 들고 덩실덩실 춤추고 나올 수는 없을까? 1994년 남아프리카공화국 넬슨 만델라가 취임할 때, 저들 고유의 춤을 추며 나왔듯이, 자신을 괴롭혔던 교도관과 그의 친구들을 귀빈석에 모셔 자랑스럽게 소개했듯이, 그런 농악 한마당 취임식을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편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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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민족음악원 이사장 이광수, "국악계가 상생(相生)의 길로 나아가야"사물놀이 창시자, 비나리 명인 이광수 선생이 운영하고 있는 민족음악원이 올해 창립 25주년을 맞이한다. 사물놀이는 1978년 농악기 치배의 핵심 악기인 꾕가리, 장구, 북, 징을 가지고 농악가락을 정리해서 발표하여 새롭게 탄생한 농악 장르이다. 열광적 농악 연주의 대명사 '사물놀이'는 가락에 집중하고, 농악 가락을 서서 연주하던 것을 수정하여 앉은 형태로 만들었다. 최근 '2024사물놀이 겨울캠프 1기'를 마치고 다음 갬프를 준비하고 있다. 전국에서 이광수 선생 수업을 받기 위해 국악인들이 예산을 방문하고 있다. Q.이사장님 지난 1년 동안 (사)민족음악원 어떻게 전승 활동을 하셨는지요. 회장님 사적인 일도 알려주세요. A. 안녕하십니까? (사)민족음악원 이사장 이광수입니다. 먼저 물심양면으로 대한민국 국악 발전을 위해 애쓰고 있는 ㈜국악신문사 기미양 발행인과 직원 분들께 감사의 마음을 담아 새해 인사를 전하고 싶습니다. 지난해(癸卯年)의 전승 활동에 대해 답변드리자면, 기나긴 ‘코로나19(COVID-19)’의 터널이 지나가고 드디어 여름, 겨울로 이어지는 ‘사물놀이 계절 캠프’와 매달 마지막 주에 진행되는 ‘사물놀이 월말캠프’ 등 일상적인 전승 활동이 재개(再開)되었던 한해였습니다. 그리고 올해(甲辰年)로 24회째를 맞이하게 되는 ‘예산전국사물놀이경연대회’도 비대면 영상심사에서 대면대회로 전환되어 성황리에 진행되었습니다. 사물놀이 경연대회는 각축(角逐)을 벌이는 경연의 장이기도 하지만, 전승 현황을 짚어보고, 앞으로의 전승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중요한 자리입니다. 전 지구적 재난을 겪고, 다시 시작된 사물놀이 캠프와 경연이다 보니 여러 가지로 우려되는 사항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오히려 열정적인 참여와 향상된 경연 수준이 확인되는, 가슴 뿌듯한 자리였습니다. 이제 고희(古稀)를 넘어선 나이에 날로 발전하는 후학(後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큰 즐거움이 아닐 수 없습니다. 많은 후학을 양성하는 것을 앞으로 인생의 지향(志向)으로 삼고 살아갈 계획입니다. Q. 단체를 간략하게 소개해 주세요. A. (사)민족음악원은 저의 고향인 충남 예산에서 1999년에 설립한 단체입니다. 돌이켜보면 사물놀이를 세상에 내놓고, 전 세계를 순회하며 수많은 공연 활동을 해왔습니다. 지구촌 곳곳을 다니며 국악을 세상에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가는 곳마다 국빈(國賓)에 준하는 대접을 받을 만큼 우리 문화의 위상을 높이는 데도 공헌했다고 생각합니다. 현재 K-POP이 전 세계에 대한민국을 알리고, 국가 위상을 드높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여정 속에 서서히 자리 잡게 된 생각은, 내 고향 예산에 뭔가 공헌할 방법과 후학 양성에 대한 것입니다. 예산군과 예산 지역 인사들이 저의 뜻을 헤아리고 협조해 주셨습니다. 현재 민족음악원은 설립 25주년을 맞이하고 있고, 공연 활동과 전승 활동, 그리고 대한민국 전통예술 전반에 관한 연구 활동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대부분의 단원이 30년 이상의 전승활동 경력을 가지고 각자의 영역에서도 활발하게 활동을 이어가고 있습니다. Q.지난 해 얻은 성과는 A. 앞서 말씀드렸듯이 공연 활동과 교육 활동의 중단을 초래했던 ‘코로나19’가 지나가고, 서서히 일상적인 활동이 재개되었습니다. 일단은 3년 정도의 휴지기(休止期)를 지나서 다시 일상으로 돌아온 것. 그 자체로 반가운 일이었고, 원활한 일상으로 복귀하기 위한 내적 정비와 점검, 그리고 진행을 해왔던 지난해였습니다. 그간 적잖은 변화가 있었더군요. 어려운 생활환경 속에 예술 활동을 포기하는 예술가도 있었고, 지속적이었던 교육의 대상이 새로운 인원으로 교체되기도 하고, 신생팀들이 등장해서 새로운 예술의 장을 열어가기도 했습니다. 앞으로도 어떤 변화와 재난이 이어질지 알 수 없지만, 합리적인 원칙을 바탕으로 대한민국 전통예술의 맥을 이어가는 데에 주력하겠습니다. Q.새해 역점사업은 A. (사)민족음악원은 협력 기관인 ‘충남전통예술강사협동조합’과 손잡고 ‘비나리 자격증’과 ‘사물놀이 자격증’을 발급하려 합니다. 체계적인 예술 교육과 전통예술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사물놀이를 올곧게 전승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인재 양성을 위해, 일정 시간의 자격검정 연수 과정을 수료하면 응시 자격이 부여되고, 자격검정 시험을 통해 공신력 있는 자격증을 발급할 계획입니다. 이것은 ‘사물놀이’를 만들고 세상에 내놓은 당사자인, 제가 해야 할 일 가운데 하나로 여겨집니다. 자격증 발급기관 인증은 끝난 상태이고, 자격검정 연수 교육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는 일상적인 공연 활동, 교육사업, 그리고 사물놀이 경연대회를 더욱 내실 있게 진행하는 것이 변함없는 목표라 할 수 있습니다. Q.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 A. 종종 안팎으로 소란스러운 일들이 있습니다. 이런 일들의 대부분은 공적(公的) 태도를 가지느냐, 사적(私的) 태도를 가지느냐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즉, 공적 이익에 힘써야 할 위치에서, 사적 이익을 추구하다 보니 많은 문제가 발생하는 것입니다. 예술 활동은 기본적으로 이타적(利他的) 행위라 생각되고, 문화는 한 개인의 소유가 될 수 없습니다. 이기적 행위와 그릇된 소유욕은 문화예술 발전에 커다란 걸림돌입니다. 조금 더 넓은 마음으로 모두가 상생(相生)의 길 위에 설 수 있도록 다 같이 노력했으면 좋겠습니다. 갑진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시고, 가내 두루 평안하길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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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9) 선사인(先史人) 주거지로 추정되는 ‘바위그늘 유적’ 발견향토사연구원 이만유 낙동강 상류 금천(錦川)이 흐르는 경북 문경시 산양면 일대에는 기존에 알려진 것 외에 필자가 향토사 연구 활동을 하면서 새롭게 발견하여 세상에 알린 청동기시대 대표 유적인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남아 있다. 그중 2020년 4월 2일 ‘청동기시대 상징 고인돌, 성혈(性穴) 또 발견’이란 제목과 ‘북두칠성 별자리 성혈, 남근석(男根石)으로 추정되는 돌도 발견’이란 부제를 달아 언론에 보도한 바가 있는데 이 유적이 훼손될 위기에 처해, 행정당국에 보존 대책을 건의한바 관련 부서에서 현지 확인하고 보존 가치와 청동기 유적의 실체를 확인하기 위하여 지난 1월 13일 고고학 전문가이신 세종문화재연구소 유병록 박사를 모셔서 현지 조사를 할 때 필자도 동행하였다. 이날 왕태리 청동기 유적 현지를 보고 난 뒤, 유병록 박사와 여운황 문경시 문화예술과 문화재관리팀장과 함께 금천변 일대에 분포하고 있는 기존 청동기 유적을 탐방하기로 하여 필자가 현지로 안내하였다. ‘연소리 대형 성혈석’ ‘ 녹문리 성혈석 군집지’ ‘현리 성혈석 너럭바위’ ‘ 산북면 서중리 웅창마을’ 등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금천변 현리 야산 남쪽에 있는 대형 바위를 살펴보든 유병록 박사께서 "암음(岩蔭-바위그늘)이다”하는 외침이 있었다. 깜짝 놀라 셋이 모여 움푹 들어간 바위 밑과 주변을 살펴보았는데 거기에는 도자기편(분청사기, 백자)과 와편(瓦片)이 흩어져 있었다. 선사인들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곳은 수천 년의 세월이 지나면서 물길이나 지형이 덮이고 묻혀있어 그때와는 지금 외형이 많이 달라져 있으므로 쉽사리 ‘암음’이라 단정할 수는 없다. 과연 이곳 대형 바위와 그 주변이 선사시대인들의 주거지인‘바위그늘’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발굴을 통해서만 밝혀질 수 있다. 그러나 제반 여건이나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바위그늘’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한다. ‘바위그늘유적’은 동굴유적과 마찬가지로 자연에 존재하는 대형 바위 아래 그늘을 이용한 선사인들의 주거지다. 자연 절벽에 그늘이 진 곳, 풍화작용에 의해 오목하게 형성된 곳, 하천이나 바다의 절벽에 파식작용에 의하여 움푹 파인 곳으로 햇빛이 잘 들어오고 북풍을 막을 수 있는 남쪽으로 트여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그늘 내부와 그늘의 트인 앞에 선사인들이 사용한 유물이나 생존을 위해 취했던 동·식물 등을 발굴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바위그늘유적’이 지금까지 발굴 조사된 곳은 충북 단양군 매포읍 상시리, 부산 금곡동 율리, 경북 청도군 운문면 오진리, 제주시 조천읍 북촌리 유적 등으로 소수에 불과하다. 이러한 유적이 외국에서는 구석기시대 유물이 주로 발견되었지만, 우리나라는 신석기시대로부터 청동기시대, 철기시대와 삼국, 고려, 조선시대까지의 다양한 유물이 확인되고 있다. 만약 문경에서 ‘바위그늘유적’이 존재한다면 이것은 우리나라 고고학계의 주목을 받는 놀라운 일이 될 것이며 얼마 전 중부내륙고속철도 문경읍 마원리 문경역 주변 공사장에서 신석기시대 유물이 소수 발견되었다 하지만, 우리 문경지역의 역사가 청동기시대에 머물다가 신석기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확실하고 획기적인 일이 될 것이다. 필자가 여러 차례 고인돌과 성혈석이 다수 분포된 금천 일대는 지금으로부터 삼천여 년 전에 살았던 ‘청동기인들의 집단 거주지다’라고 말해 왔는데 이곳의 대형 바위가 발굴 과정을 거쳐 ‘바위그늘’로 최종 확정되는 결과가 나온다면 필자의 추정이 사실이 되는 것이다. 하루빨리 당국에서 ‘현리 바위그늘 선사유적’ 발굴 계획을 수립, 추진하여 묻혀있는 역사가 햇빛을 볼 수 있게 되길 바라며, 아울러 필자가 이제까지 주장해 온 문경시 전체 청동기시대 유물인 고인돌과 성혈석에 대한 지표조사를 실시하고 훼손을 방지하는 보존 대책도 함께 세워주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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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128)<br> 백자청화시문접시편금사리의 추억과 여운을 이규진(편고재 주인) 도자기에서 멋을 느낄 수 있는 것은 여러 가지가 있다. 그중 하나가 시문(詩文)이 들어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근래 들어 시가 위축되고 있는 느낌이 들기는 하지만 전에는 그렇지가 않았다. 공자가 만년에 제자를 가르치는데 있어 육경 중에서도 시를 첫머리로 삼았다던가, 시는 인간의 가장 순수한 감정에서 우러난 것이므로 정서를 순화하고 다양한 사물을 인식하는 데는 그만한 것이 없다는 생각 등은 모두가 시의 중요성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하지만 이처럼 거창한 의미를 되새기지 않는다 하더라도 도자기에 시문을 장식한다는 것은 그 자체로 멋이요 풍류가 아닐 수 없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시문은 청자나 분청에서 상감으로 들어가기도 하지만 백자에서는 청화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이처럼 백자에 청화로 시문이 들어간 것으로는 조선 초기에 만들어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백자청화시문명전접시가 널리 알려져 있다. 백자 전접시에 술을 주제로 하여 청화로 칠언시를 종으로 써내려 간 것인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竹溪月泠陶令醉 대나무 계곡에 달빛이 차가운데 도연명이 취해 있고 花市風香李白眼 꽃 사랑의 향기로운 바람 속에 이백이 잠들었네 到頭世事情如夢 세상사 돌아보면 품은 정은 꿈만 같고 人間無慾似樽前 사람이 술을 마시지 않아도 술동이 앞에 있는 것 같네 이러한 백자청화시문편은 경기도 광주 도마리 1호와 번천리 9호 가마터에서도 출토되고 있음은 물론 관청 건물지 터 등에서도 수습되고 있어 이 시기 일종의 멋과 풍류로 유행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백자에 시문이 들어간 것은 초선 초기뿐이 아니라 17~19세기로도 이어지는데 중기와 후기로 가면서 초기의 접시와는 달리 병 호 문방구 등으로 널리 확대되고 있어 주목된다고 할 수 있다. 백자청화시문접시편은 금사리에서 나온 것이다. 말하자면 18세기 전반 것인데 이 시기는 임란란 후 거의 사라져 버렸던 청화가 되살아나며 가장 한국적이며 사대부의 문인 취향이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백자청화시문접시편은 이 시기를 입증하는 귀중한 자료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작은 조각만 남은 데다 청화로 쓰여진 시문 또한 설유국(雪濡菊) 시화니매(是花尼梅)의 일곱 글자만 남아 있어 시의 제목이나 내용을 알 수가 없다는 점이다. 하지만 국화나 매화 등이 보이는 것으로 보아 기존에 알려진 백자청화시문명 도자기들이 대개 그렇듯이 술과 관련된 한시의 일부가 아닐까 생각된다. 금사리는 도자기 가마터 중에서도 내게는 꽤 친근한 이름이다. 서울에서 멀지 않아 여러 번 찾아보아 익숙한 점도 있거니와 금사리 시기 백자청화에서 보이는 저 추초문 같은 절제된 미감이 내 마음 속에 깊이 강렬한 인상으로 각인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몇 번의 답사를 통해서도 추초문 같은 청화는 인연을 맺지 못했으니 지금 까지도 아쉬움이 남는다고나 할까. 그런 가운에 작은 조각에 글자도 몇 자 안 남은 백자청화시문접시편에서 금사리의 추억과 여운을 느낄 수 있다는 것은 그나마 여간 다행한 일 중의 하나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듯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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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78)<br> 춤꾼 정명자의 '가무보살춤'가무보살춤 세계적인 무용가로 이름을 날렸던 최승희가 안무한 부처의 자애를 받이들인 보살의 자애로움을 춤을 통해 표현한 작품이며, 동양적인 이미지를 형상화한 대표작이라 할 수 있다. 언제부터 추어졌는지를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관음보살의 자비행을 표현하고 있는 듯하지만 보현보살의 행원을 형상화 했다고 보는 설이 정설이다. 최승희 탄생 100주년기념 공연으로, 정명자가 재해석하여 2011년 예악당에서 발표한 '가무보살춤' 작품이다. 정명자 * 한국국악협회이사 * 예빛아트 대표 *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97호 '살풀이춤'이수자 (2023년) * 경상남도무형문화재 제21호. 진주교방굿거리이수자(2003년) * 경상북도 무형문화재제 9호. 대구살풀이춤 이수자(2011년) * 제3회 장흥전국전통 가무악대제전 종합우승 대통령상수상( 2001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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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 사설(176)울며 넘던 피눈물의 아리랑고개 한번 가면 소식 없던 탄식의 고개 업고 지고 쫓겨서 흘러가더니 기쁨 싣고 떼를 지어 뛰 넘어 오네 어서 넘어라 어서 넘어라 에헤헤 기쁨 싣고 돌아오는 아리랑고개 이천이십사년 새날에 조선족아리랑을 쓰다 불긍거후루 주인 한얼 이종선 감상 일제치하 조선의 백성들은 폭정에 못 이겨 고향을 버리고 북간도로 만주로 살길을 찾아 떠났다. 불모의 땅을 일궈 희망을 싹 틔웠고, 간난의 고통을 아리랑을 부르며 이겨냈다. 쓰러질 때마다 다시 일어났고 꿋꿋하게 나아갔다. 피눈물로 탄식하며 넘던 고개를 희망을 서로 다독이며 기쁨을 업고 지고 다시 넘어 돌아온 것이다. 작가 이종선(李鍾宣)은 아호가 한얼, 醉月堂이다. 한국서학회 이사장, 성신여대 미술대학 동양화과 초빙교수와 예술의전당 서예박물관 강사, 한국서총 총간사를 지냈고, 지금은 경희대 교육대학원 초빙교수, 중국난정서회 서울연구원장, 사단법인 한국서예술협회 회장, 이즘한글서예가회 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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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3박상진(철학박사, 동국대학교 한국음악과 명예교수, 한류문화컬럼니스트) 2024년 1월 9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에서 개최된 ‘2024 문화예술인 신년 인사회’에 참석한 윤석열 대통령은 문화예술인들을 향하여 ‘우리는 계속해서 힘을 다해 지원하지만, 여러분이 하는 일에는 개입하거나 관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또한 윤대통령은 미국 방문 때 하버드대학교의 간담회에서 있었던 일을 소개하였다, 간담회의 인터뷰 내용은, "K팝과 K콘텐츠가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랑을 받는 이유는 무엇인가요?”라고 질문을 받았다. 윤대통령은 "정부의 개입이 없어서 그런 것 같다.”라고 말하여 신년 인사회의 좌중을 환호하게 하였다. 그리고, 하버드대 간담회 장에 있었던 조지프 교수는 "윤대통령이 학생이었다면 A+를 받을 만한 대답이었다”라고 말한 일화를 윤대통령은 소개하였다. 윤대통령은 미국 방문 때의 국빈 만찬에서 ‘아메리칸 파이’라는 미국의 포크록 가수 돈 맥클린의 노래를 불렀을 때의 상황도 언급하였는데, 질 바이든 여사가 계속 노래를 부르라 하여 노래를 부르게 되었다면서, "미국 국민들이 우리나라에 호감을 갖게 된 이유는 큰 이벤트보다도 한 소절의 노래 영향이 더 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라고 윤대통령은 말하였다. 소위 문화의 힘을 강조한 것이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거나 관여하지 않는다”는 윤대통령의 말은, 한류를 강조하고 문화예술인들의 창작활동을 존중한다는 말로서 K컬처에 대한 성과를 긍정적으로 보고 있으며, 문화예술계에 대한 기대감을 한껏 드러낸 고무적인 발언이라고 풀이된다. 윤대통령의 글로벌 마인드적 바탕에서 K컬처의 지속 가능한 미래 비전적 기대감을 표현한 말이라고 생각된다. K컬처의 기류에 편승해서 숟가락 하나 더 올려놓고 생색내는 말과 정책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K컬처 진흥에 대한 환경적 인프라 구축이 필요하다는 것을 은연중 강조한 것으로 사료된다. 지난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72”에서는, 우리나라 영화 관객이 1000만 명을 돌파하고 K컬처를 주도하며 영화 발전을 이끈 것은 영화인들의 피눈물 나는 노력과 아울러 ‘스크린쿼터제’ 의 영향 덕분이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국악계에서도 ‘국악진흥법’을 계기로 ‘국악쿼터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부에서는 1966년 8월 3일에 이루어진 영화법 제2차 개정 때 ‘스크린쿼터제’를 도입하였다. 그 당시에는 ‘스크린쿼터제’를 맞출 만한 번번한 영화를 제대로 제작하지도 못하던 때였다. 그런데도 정부와 영화인들은 ‘스크린쿼터제’를 도입하여 한국 영화발전의 기반을 구축하고, 오늘날 글로벌에서 주목받는 K콘텐츠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자리매김하기까지 거의 50년 정도가 걸렸다고 본다. 지난 회에서도 지적하였듯이, 다른 문화예술의 장르 중에서 영화의 제작 과정은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문화에 대한 정부의 기조가 비교적 잘 실천되어진 장르로 보인다. 그럼으로써 한국인만의 장기(長技)인 창조적 상상력이 발현된 영화 K콘텐츠를 제작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최근까지도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을 아낌없이 해준다는 말이 많이 들린다. 좋은 현상이다. 그런데 경쟁을 붙인다고 한다. 그러면서 지원 받는 대신에 성과를 내야 한다고 한다. 여기에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그건 아니다”라는 말이 들린다. 이것은 갑과 을의 관계에서나 볼 수 있는 말들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남의 작품 모방하고 흉내를 내게 된다. 경연대회도 아니고, 누가 경쟁을 붙이고 성과에 대한 심사는 누가 한단 말인가? 글로벌 마인드에서 벗어난 후진적 발상이 아닐 수 없다. 현재 성과를 내고 있는 K컬처, K팝 등은 누군가 심사를 하고, 또 합격을 해서 세계 최고가 된 것이 아니다. ‘박상진의 한류 이야기’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귤을 탱자로 만드는 우(愚)를 범해서는 안 된다. 후진적 정치권에서는 일색(一色)을 원하지만, 선진 문화에서는 다색다양(多色多樣)을 추구한다. 그렇게 만들어지고 있는 글로벌 문화가 K컬처인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도 강조하였듯이, 그야말로 문화예술 지원 정책에 있어서 "지원은 하되 간섭은 하지 않는다”는 대원칙이 지켜질 때 하버드 대학교의 조지프 교수에게서 A+를 받을 수 있지 않겠는가. ‘국악진흥법’을 계기로 ‘영화법’의 ‘스크린쿼터제’와 같은 ‘국악쿼터제’가 도입되기를 다시 한번 강조한다. K팝의 원형자산은 전통음악 즉 국악이다. 한류 즉 K팝을 지속가능하게 하기 위해서는 국악의 대중화에 대한 기반 구축이 중요하다. 그 중 하나가 공영방송 등에서의 역할인 ‘국악쿼터제’이다. 이는 국민들께 국악향유의 혜택을 증진할 수 있는 기회로도 실현될 것이다. 또한, ‘국악진흥법’의 비전은 젊은이들을 위한 것이어야 하고 미션 또한 젊은 국악인들의 다양한 창조 정신을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미래 세대 비전에 대한 국악진흥 및 한류음악 증진 시스템 구축, 미션에 대한 다양한 창조적 시스템이 시행령에 반영되고 구축되어져야 할 것이다. 특정 기관에서 지원금 나눠주고 거기에 국악예술인들을 줄 세우고, 더 나아가 그 창작 지원금을 규제하고 감독하는 시행령이 되어서는 안 된다. ‘국악진흥법’의 시행령은, 국악진흥과 한류확산을 담보하면서 국악예술인들을 지원하는 새로운 창조적 시스템이 확장 내지는 구축될 수 있는 내용이 담겨져야 한다. 그것이 ‘국악진흥법’이 제정된 취지에 더 부합할 것이다. 그렇게 될 때, 젊은이들의 미션은 다양한 창조 정신을 발휘하게 될 것이고, 더욱 풍성하고 다색 다양한 한류음악을 창조하는 것으로 기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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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도북놀이보존회장 이희춘, "다문화 청소년과 함께하는 진도북놀이"진도북놀이보존회는 다문화.결손가정.저소득층 청소년 대상으로 만든 초아반(초등학교 아이들반) 25명이 진도북춤 교육을 통하여 민족 정체성 확립과 전통음악을 접하는 기회를 제공해오고 있다. 8년째 이어온 초아반 무료 강습을 해오고 있는데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회원들과 함께 빗기내민속전수관에서 매주 일요일마다 오후반(기초반), 저녁반(완성반)을 나누어서 수업을 하고 있다. 수업을 위해 회원들이 학생들을 자동차로 픽업을 해서 데리고 오고 있다. 그래서 가능한 일요일에는 외부 공연을 잡지 않는다고 한다. 특히 초아반에서 진도북춤을 배운 다문화어린이들에게 민족 정체성을 확립시키는 데 큰 역활을 해오고 있다. Q. 진도북놀이보존회 지난해 어떻게 보내셨어요. 개인적인 전승활동도 알려주세요 A. 진도 대표적 지역축제는 4월 세계적 주목을 받는 바다가 갈라지는 날 바다길을 가르는 '신비의 바닷길 축제'이다. 이날 거리축제의 꽃은 북퍼레이드이다. 이날 진도북놀이보존회가 일렬로 진을 꾸며서 '진도북춤'으로 신명을 울리고 신비의 바닷길을 안내한다. 특히 미국문화를 대표하는 맥도날드 광고에 진도북춤이 큰 역활을 했다. 진도대파 햄버거 홍보를 알리는 지상파 광고가 나가자 여기저기서 전화를 받았다. ' 진도대파 진도북춤 타고 맥도날드 왔네' 그리고 지방무형문화재 '진도북놀이' 발표회. '진도북춤 명인 합동추모제' 등 보존회의 활발한 활동으로 진도북춤의 위상을 높였으며 회원간의 유대강화 및 지역 국악발전에 기여하였다고 본다. 축제 및 북놀이 보존회-신비의 바닷길 축제(2023.04.22.~24 회동 축제장) 맥도날드 광고 촬영(2023.05.08.~09.진도 창포리 마을) 진도대파 햄버거 맥도날드 광고 공연(2023.07.07.~09. 서울 여의도 ifc몰.맥도날드 매장 앞) 진도북놀이 박관용류 하계연수회(2023.08.28.~29. 무형문화재 전수관) 거리 북퍼레이드 200여명 참여. 3개 류 북놀이 합동공연 진도북놀이 체험 부스운영-명량대첩축제(2023.09.09. 녹진 대교 광장) KTV국민방송 30분 방영-영혼의 몸짓 촬영(2023.09.13. 세방낙조 전망대.운림산방.빗기내 민속전수관.목포 국악사 등) 3개류 지방발표회 각류 25여명 총 75명 참여-제3회 진도북 페스티벌(2023.11.03. 무형문화재 전수관 야외마당) 전국 북춤.북놀이 예술단체 11팀 초청 무형의 품격전 공연(2023.11.16. 보성문화원) 향토무형문화유산 발표회(2023.11.29. 무형문화재 전수관) 거리 북퍼레이드 230여명 참여.진도북놀이 체험 부스운영-지방발표회(2023.12.08. 삼별초 공원) 인도 전통북 연주단. 필리핀 전통음악단등 2팀 초청-합동추모공연(2023.12.09.무형문화재 전수관 강당) 개인적으로는 다문화 학생들과 특히 사할린 청소년들에게 관심이 많다. 매년 진도에는 연해주 고려인과 사할린 동포 청소년들이 국립남도국악원에서 한달동안 전통민속예술을 배우러 온다. 작년에 '진도북춤'을 배우러 온 사할린 학생들 14명과 지도교사들에게 진도를 상징하는 캐릭터(운림산방)가 들어간 티셔츠를 선물했다. 연말에는 국악신문 사할린장학회를 통해 사할린 청소년에게 장학금 후원도 했다. 그리고 3월 8일 여성의 날에 김포사할린동포회 초청공연을 위촉받았다. 동포들에게 전통문화 공연을 통해 민족정체성 확립에 기여하고자 한다. Q. 진도북놀이보존회 단체 소개해 주세요 A. 1984년 진도북놀이보존회 창립, 1987년 전라남도 무형문화재 제18호 진도북놀이 지정되었고, 3개 류파로 나뉘어 전승되고 있으며, 박관용류는 김관우.이희춘으로 양태옥류는 박강열로 이어지고. 장성천류는 김길선.김병천으로 이어져 활발한 전승 보전을 위해 활동하고 있다. 현재 회장 이희춘. 총무 노준영, 회원 80명 진도 거주자로서 활동하고 있다. Q. 지난 해 성과 A. 코로나에서 벗어 났으나 그 여파로 축제 및 행사에 참여자가 적어 어려움을 겪었지만, 다섯 분의 진도북춤 예능보유자 선생님 추모행사를 통해 다시한번 회원간에 유대와 화합을 다지는 계기가 되어 모든 회원들의 전승활동에 힘을 실어 주었다. 2005년 전수관에서 매일 일반인 40여 명을 대상으로 수업을 해오고 있다.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수업을 해오고 있다. 제가 지은 반이름이 재미있다고 한다. 순수 진도 사투리인데,. 월요일(우하니 반) 화요일(무용반) 수요일(항꾼에 반), 목요반(만드리 반), 금요일(솔찬게 반), 토요반(오지게 반), 일요일(초아 반)이라는 이름을 짓게 되어 주목을 받고 있다. 회둰들과 더 흥미있고 즐거운 마음으로 전통잇기를 하고 있다 Q.새해 역점 사업은 A. 4월 신비의 바닷길 축제에 이루어지는 진도 북퍼레이드는 관광객 참여 프로그램으로 발전시키려고 한다. 많은 관광객 그리고 외국인등 직접 참여하여 즐겁고 신명난 축제가 되도록 계획하고 있다. 첫째. 진도 북페스티벌은 전국 규모에서 온누리북페스티벌로 발전되도록 지자체와 협의 하여 발전시켜 나갈 계획이다. 둘째. 초등생 북춤 무료수업 확대하고자 한다. (매주 일요일. 빗기내민속전수관) 셋째. 다문화.결손가정.저소득층 청소년 대상으로 진도북춤 교육을 통하여 민족 정체성 확립과 전통음악을 접하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넷째. 진도북놀이에 대한 학술적 고찰을 중심으로 하는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Q.국악계에 하고 싶은 말 A. '국악진흥법' 통과를 자축하며, 오랫동안 힘써 주신 분들께 감사드린다. 다양한 지원 사업으로 국악융성시대를 기대하며, 전문 국악교사가 학교에 배치되어, 음악 교과서에 우리의 전통음악이 서양음악보다도 비중이 높아야 된다. 국악 조기 교육을 통해 자라나는 다음세대에게 우리 전통민속예술의 정체성을 알릴수 있었으면 좋겠다. '국악은 민족의 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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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28)이윤선/문화재청 문화재전문위원·전남도 문화재전문위원 해마다 명절이 되면 어머니는 '밀백기'를 만드셨다. 추석과 설은 물론 유두 백중에도 빠짐없이 준비하셨다. 설날 필수적으로 장만하는 것이 조청(엿)이고 추석날 필수로 준비하는 것이 송편이라면 모든 명절을 통틀어 준비하는 음식이 '밀백기'다. 송편도 각각의 명절마다 준비하던 것이었지만 어느 시기부턴가 추석 음식으로 정착되었다는 점, 몇 차례 이 지면을 통해 소개한 바 있다. 설날 가래떡을 찍어 먹기 위해 조청을 준비한다는 점도 지난 칼럼에서 소개해두었다. 그렇다면 왜 명절에 밀백기를 해야만 했을까? '밀+백기'에서 '밀'은 명절을, '백기'는 두부조림 혹은 두부탕을 말한다. 진도, 해남 등 남도 일부 지역에서 명절을 '밀'이라 한다. '밀'이란 명칭의 분포권은 한 세기 전만 하더라도 지금의 잔존지역보다 훨씬 넓었을 것이다. <전남방언사전>을 쓴 이기갑은 '밀'이 '명일'에서 온 말일 수 있다 한다. '명일(名日)'은 '명절'이다. 지금으로 치면 '국경일'의 총칭이다. '일'이 탈락하면서 '명'이 '밀'로 변화되었다. 백기라 호명하는 두부조림은 고춧가루 등의 양념을 치지 않는다. 돼지고기를 넣기는 하지만 두부볶음 혹은 두부국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뚜부백기'라고도 한다. '백기'는 어디서 온 말일까? 감옥 출소 후 먹는 두부의 출처 콩밥 먹는다는 말이 있다. 징역살이하는 것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사전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일제시대에는 전쟁물자 동원을 위한 공출제도 등으로 인해 농촌생활이 극도로 궁핍했다. 보리밥은커녕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다 보니 감옥살이를 하는 사람들에게 제대로 된 식사를 제공하는 것이 어려웠다. 따라서 당시 만주지방에서 생산되던 값싼 콩을 대량으로 들여와 콩밥을 해먹인 데서 유래한 말이다." 그런가? 합리적인 추론이긴 하나 2% 부족해 보인다. 주목할 것은 감옥을 출소할 때 너나없이 흰두부를 입에 가득 넣어 먹인다는 점이다. 오래된 전통일까? 근대에 생긴 풍속일까? 출소자에게 두부를 먹이는 것은 흰색이 가지고 있는 문화적 의미, 정화, 씻김 등으로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흰두부처럼 정화하고 새사람이 되라는 의미로도 풀이한다. 또 이런 해석도 있다. 교도소에서 콩밥을 많이 먹었으니 다시는 감옥으로 들어가지 말라고 먹인다는 것이다. 두부가 콩으로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이치라나. 감옥에서 영양공급이 불충분했을 것이므로 영양소 많은 두부를 먹인다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이 설은 콩밥이 제대로 된 식사가 아니라는 설에 배치된다. 두부에는 단백질, 지방, 탄수화물, 필수 아미노산, 뇌세포의 대사 기능 촉진, 불안감을 해소하는 가바(Gaba) 등이 들어 있다는 점에서 영양식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균형 잡힌 식단이 아니라는 뜻으로 들린다. 중국 산시성(山西省) 츠바이치((吃白起·흘백기) 전통 명절에 밀백기를 만드는 곳을 추적하였더니 우리나라보다는 중국의 한 지역이 눈에 들어온다. 산시성에 현존하는 백기육(白起肉)이란 흰두부 요리다. 고기 육(肉)자가 들어가 있으니 고기요리일까? 아니다. 순두부탕이라고 할만한 구성이다. 진도와 남해안 지역에서 지금도 명절마다 만들어서 먹는 밀백기와 많이 닮았다. 고기도 넣지 않고 갖은양념도 넣지 않고 그저 흰두부 중심으로 끓인 음식이다. 아니, 무엇보다 백기라는 이름이 같다. 산시성에서는 이 요리를 만들어 먹으면서 '츠바이치(吃白起·흘백기)'라 한다. '백기를 삶아 먹는다'는 뜻이다. '백기'는 사람 이름이다. 전국시대 때 얘기다. 진(秦)나라 전쟁의 신으로 불리는 백기(白起)가 지금의 산시성 가오핑(高平)시에서 조(趙)나라를 대적한다. 마침내 조나라 군사가 투항했는데 '반란이 우려된다'며 스스로 구덩이를 파게 하고 그 속에 군사들을 참살했다. 한반도 현대사에 산견되는 제주 4.3이며 여순이며 민족동란에 이르는 처형의 모습들이 눈에 어른거린다. 조나라로 돌려 보낸 어린이 240명 외 45만 명을 이같은 방식으로 갱살(坑殺, 구덩이에 산채로 파묻음)했다니 생각만 해도 몸서리쳐진다. 사기 열전에는 이를 '조나라 사람들이 벌벌 떨었다(趙人大震)'고 보고하고 있다. 이 때문에 백기는 중국 역사에서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잔혹한 처형 혹은 살인자로 낙인찍혀 있다. 산시성 사람들이 백기육 즉 두부탕을 먹는 것은 원수의 뇌를 씹어먹듯 조상의 한을 되갚는다는 의미라 한다. 물론 조나라의 패배는 효성왕 조단(趙丹, 기원전 265~245)이 노장 염파를 전쟁에 쓰지 않고 돈을 써서 유언비어를 퍼뜨리는 방식으로 애송이 조괄(趙括)로 바꾸었기 때문이라 한다. 옹졸한 제왕이 무능한 장수를 등용했기에 40만 대군이 스스로 구덩이를 파고 죽을 수밖에 없었다는 것 아닌가. 그래서다. 어머니가 명절마다 만드시던 '밀백기'를 상고한다. 진도와 남도지역에 잔존하는 밀백기의 전통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가? 남도지역과 지금의 산시성 곧 기원전 조나라와 어떤 특별한 관계라도 있단 말인가. 아니면 대(對)중국 문화교류의 풍속이 진도를 중심으로 한 남도지역에 잔존하고 있단 말인가. 아니면 우리 또한 어떤 원수의 뇌를 씹어먹듯 밀백기를 명절마다 만들어 먹었으며 이 행위를 통해 조상의 한을 되갚고 있기라도 하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그 원수는 누구이며 우리의 조상은 어떤 패전 혹은 어떤 억압의 시대를 감내해왔단 말인가. 어쩌면 출소하면서 흰두부를 먹는 전통도 어떤 연관을 갖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라마다 지방마다 전통도 다르고 풍속도 다르다. 하지만 동아시아를 통틀어 유사한 전통과 풍속도 있다. 중국 산시성의 흘백기와 진도 등 남도 해안의 밀백기 풍속의 같은 점과 다른 점을 생각해보는 추석이다. 두부의 역사 지역에 따라 더부, 둠비, 두위, 뒤비, 드비, 디비, 조패, 조푸, 조피, 조프 등으로 부른다. 언제부터 두부를 만들어 먹었을까? 심승구의 논문 '조선시대 조포사와 진관사'에 의하면 우리나라에 두부가 전래 된 시기는 고려말이다. 이색의 <목은집>에, 과거를 치른 뒤 두부를 먹었다(1365년)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최덕경의 '대두의 기원과 장(醬, 젓갈, 간장, 된장)·시(豉, 메주) 및 두부(豆腐)의 보급에 대한 재검토'에 의하면 두부가 문헌 속에 등장하는 것은 중국의 오대(五代, 당과 송의 중간시대)다. 조포사(造泡寺)와의 연관은 두부를 '두포(豆泡)' 혹은 '포(泡)'라고 불렀다는 데서 찾는다. 이 사찰에서 나라 제사에 쓰는 두부를 만들었다. 능(陵, 임금의 무덤)이나 원소(園所, 왕세자의 무덤)에 속한 국가기관의 하나, '능침사' 또는 '능침조포사' 등으로 불렀다. 이외 관가에서 두부를 만들어 바치던 곳을 조포소라고 했다. 이들 연구에 의하면 16세기 이전 두부는 오늘날의 형태라기보다는 거의 순두부에 가까운 것이었다. 당시의 제사용 두부와 그 의미들을 상상해볼 수 있는 정보들이다. 이것으로 백기(白起)의 이름이 등장하는 기원전까지 두부가 소급될 수 있을지 알기 어렵다. 아마 두부가 만들어진 이후 각색되거나 재구성된 신화 아닐까 싶다. 우리 어머니들이 명절마다 두부를 만드시던 까닭 또한 명절이 절기 제사였기 때문이다. 분명한 것은 기원에 관한 소급의 가부를 떠나 '밀백기' 혹은 '두부백기'라는 이름을 공유하는 한중간의 문화 유사성이다. 또한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우리나라 출소자들에게 먹이는 흰두부는 죄의 씻음이나 정화, 나아가 거듭남의 의미(과거를 보고 나서 먹는 두부)가 담긴 풍속으로 이해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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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자의 여로 (127) <br>분청귀얄접시편고별의 마지막 인사 같은 이규진(편고재 주인) 분청을 장식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청자의 여운을 짙게 느끼게 하는 상감을 비롯해 문양을 찍어내는 인화, 문양 주변의 분을 긁어내는 박지, 선으로 문양을 만드는 조화, 풀비 비슷한 것을 이용해 분을 바르는 귀얄, 그릇 전체를 분에 담그는 분장(덤벙) 등이 그 것이다. 분과는 직접적인 관련이 없지만 예외적으로 철화도 있다. 이들 중 이번에는 분청귀얄접시편에 대해 관심을 가져보기로 하자. 분청귀얄은 귀얄에 백토를 뭍혀 그릇의 표면에 바르는 장식기법의 하나다. 귀얄은 풀을 질할 때 쓰는 도구의 일종, 돼지털과 같은 뻣뻣한 털 등을 묶어 넓고 평평하게 만든 붓을 말하며 이 붓으로 그릇의 표면에 백토를 칠해 장식하는 기법을 분청귀얄이라고 하는 것이다. 이 기법의 특징은 빠르게 돌아가는 물레 위에 그릇을 올려놓고 귀얄로 백토를 칠할 때 나타나는 붓자국과 속도감, 그리고 바탕의 암회색과 백토의 흰색이 빚어내는 선명한 색의 대비 등이 장점이라고 할 수 있다. 15세기 후반에서 16세기에 걸쳐 주로 호남 지방에서 많이 제작이 되었다. 분청귀얄접시편은 작은 굽에 다섯 개의 내화토 받침이 있다. 외면은 암회색의 유태를 드러낸 채 가장자리는 돌아가며 귀얄을 하고 있는데 일정치가 않고 백토가 흘러내린 부분도 있다. 내면에는 전체적으로 귀얄 분장을 하고 있는데 이 분청귀얄접시편의 매력은 아무래도 입술 부위가 휘어진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가마에서 소성 중 요똥에 부딪치며 휘어진 듯 싶은데 일부는 깨어져 손상을 입은 부분도 있다. 재미있는 것은 이 휘어진 부분을 손잡이 삼아 표주박처럼 사용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엉뚱한 생각도 해보게 된다. 여하튼 손상을 입어 원형을 잃어버리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름의 변형된 모습에서 보이는 의외성과 귀얄 맛을 느낄 수 있는 도편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실 분청귀얄은 흔한 것 같지만 귀얄이 제대로 들어간 것은 흔치 않다. 속도감과 색의 대비 등을 통해 문양이 선명하게 드러나야 되는데 그 것이 쉽지 않은 것이다. 분청귀얄은 각종 기명에서 사용되고 있지만 가장 잘 특색을 나타내고 있는 것은 아무래도 접시가 아닐까 생각된다. 접시는 어느 정도 평면을 유지하고 있다 보니 귀얄의 속도감과 색의 대비 등을 통해 장점을 드러낼 수 있는 여지가 가장 많아 보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분청귀얄접시편 또한 그런 장점에 어느 정도 호응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분청귀얄이라고 하면 분청 중에서도 무작위와 의외성이 가장 높다보니 대범함과 활달함 또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고 할 수 있다. 힘차게 돌아가는 귀얄 자국은 흡사 소용돌이치는 거센 물살을 보는듯한 박진감 넘치는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아니, 불교 경전인 '숫타니파타'에서 보이는 저 유명한 구절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의 자유스러움이 연상되기도 한다고나 할까. 하지만 분청의 끝물이다 보니 분청귀얄접시편을 보고 있노라면 백자로 가기 이전의 저 마지막 고별의 인사 같은 생각도 들어 한편으로는 아쉬운 느낌도 없지 않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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