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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쭉한 재담과 해학 뛰어난 국악계 괴짜, 박동진여덟 살까지 서당 다니며 얄궂게 살아 온 박씨는 외가가 있는 대전으로 이사하게 된다. 꿔다 논 겉보리 서 말만 있어도 않는다는 처가살이를 아버지가 하게 된 것이다. 회덕의 송씨 씨족 마을에서 천대받고 설움당하며 산 일은 아직도 못 잊는다고 한다. 소학교(5년)를 월반해 3년에 마치고 대전중학에 들어가면서 사연은 벌어진다. 대전극장에 진을 친 협률사 공연에서 이화중선(李花中仙)ㆍ중선(中仙)자매, 장판개(張判介), 조기옥 명창 들을 만난 것. 그들이 누구인가. "사람인가 선녀인가 했소. 저들도 밥 먹고 똥싸는가 싶을 정도로 눈깔이 홀랑 뒤집힌 거야······. 내 저 짓을 꼭 배워 악마구리떼 같은 가난을 짓이겨 버리겠다고 작심한 거요.”다짜고짜 장판개(1885~1937, 전남 곡성 옥과 태생으로 적벽가에 능했음) 명창을 찾아가 소리꾼이 되겠다니 "별 희한한 놈 다 보겠다.”며 충남 청양군 정산면 백곡리에 사는 손병두(孫炳斗) 씨를 소개해 주더라는 것."그 때 형편으로 두루마기 몇 벌과 버선 몇 죽, 용채돈이라도 다소 있었으면 저승문까지라도 데리고 다녔을 겁니다.”학교를 그만두고 소리를 배우겠다니 아버지는 "비록 없이 살아도 뼈대있는 집 자식이 천인광대를 하다니 웬 변고나.”며 절연을 선언해 버렸다. 이 때가 팔팔한 나이 열 여덟. 박옹은 오늘날까지도 "다시 집에 와 살겠지······.”하고 나선 길이 홀로서기의 시작이 될 줄 몰랐다고 회고한다.1년 반 동안을 상머슴 살며 만고강산 춘하추동 등 토막소리를 배웠다. 손씨는 충서 지역을 주름잡던 상쇠꾼(꽹과리)으로 토막잡가를 잘했던 지방 명창이었다. 더 큰 선생을 만나겠다고 새경 없는 머슴살이를 청산, 대전으로 걸어오다 유성에서 난장을 만났다. 공주 갑부 김갑순(金甲淳)이 세 과시를 위해 튼 난장판이었다. 여기서 자청한 토막소리가 4~5창을 받으며 김천 진양옥(선술집) 여주인의 눈에 띈다. 동가식 서가숙하던 처지에 무조건 따라나서 술집 기생들에게 소리를 가르치기 시작한 것이다."허허 참 기맥힌 일이지······. 학생이 선생 노룻 헌 거여. 여기서 한 3년 있다 대구성악연구회로 갔지. 거기서 박지홍(朴枝洪) 선생을 만나 흥부가를 배웠어요.”28세에는 경주 권번에 가 소리 선생 노릇하며 유성준 선생을 만나 수궁가를 떼받고 최윤(崔潤) 씨한테는 거문고를 배웠다. 예기였던 조계향(曹桂香, 남원 출신)한테는 북 장단을 배우고, 이 시절 조학진(曹學珍)ㆍ김창진(金昌鎭) 씨를 만나 적벽가ㆍ흥부가를 전수받았다. 당대 명창 정정열 선생한테 춘향가를 배운 건 서울 조선성악연구회서다."젊은 놈이 기생 선생 하자니 말도 많았어요. 한시인들 그냥 놔 둬야 말이지······. 대구 고등계 형사 주임(다카마쓰) 조카딸 유키코(당시 와세다 대학생)와의 사랑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아파요. 권력과 위세에 꺾인 사랑이었어······. 그놈이 나를 개패듯 하면서 대구를 떠나도록 각서까지 쓰게 했으니까.”해방 후 잠시 조선가무단에도 몸담지만 별 재미 못 보고 62년 국립국악원(4급 을류)에 시험쳐 들어오는 집념을 보인다. 1968년 9월 30일 남산 국악고등학교 강당은 웅성거렸다. ‘시덥잖은 명창 박동진’이 흥부가를 쉬지 않고 5시간 동안 완창한대서였다. 그러나 박옹은 거뜬히 해냈다. 이것은 우리 현대 국악사의 획기적인 사건으로 이후 완창 판소리 붐이 일기 시작한다.이 당시 고수들은 이정업(李正業), 한일섭(韓一燮), 김명환(金明煥), 김득수(金得洙), 김동준(金東俊) 씨 등 5인의 명고수. 이후에도 박옹은 춘향가(8시간 40분), 심청가(7시간), 적벽가(8시간), 변강쇠타령(5시간), 숙영낭자전(5시간), 배비장타령(6시간), 옹고집타령(4시간), 장끼타령(3시간), 무수리타령(5시간) 등을 연속 열창해 내 판소리계를 경악시키고 그의 건재를 확인시키고 있다. 1973년 인간문화재 5호(적벽가)로 지정된 박옹의 기능은 강정자(姜貞子, 국립창극단 단원), 박종엽(朴鍾燁, 극단 ‘미추’ 동인), 이정(李正), 허정임(許貞妊, 추계예대), 정영재(鄭榮宰, 경북대 국악과 2년), 여창선(呂昌善, 경북대 국악과2년) 씨 등이 잇고 있다. 은관문화훈장(1981년), 전국국악대상(1982년), 서울시문화상(1983년)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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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로 한국을 사로잡은 명창 박녹주소설가 김유정이 연모한 여인 단아한 체격으로 명품 동편제를 뽑아내던 박녹주朴綠珠(1905.2.15~1979.5. 26)는 「봄봄」, 「동백꽃」을 쓴 소설가 김유정이 꿈에도 잊지 못하며 석달 간 연서를 보낸 주인공이다. 연희전문에 다니던 4살 연하의 강원도 실레마을 출신 엘리트 소설가의 연모가 이미 소리명창의 영예를 얻고 있던 당대 스타 박녹주의 삶에 파고들지는 못했다. 경북 선산(현재 구미) 고아에서 1905년 2월 15일(음력 1월 25일)에 태어난 박 녹주의 본명은 명이命伊, 호는 춘미春眉이고, 녹주는 예명이다. 박녹주는 호 적상 박재보朴在普와 박순이의 자녀로 태어난 걸로 기재되어 있으나, 실제로는 박중근과 권순이의 3녀로 태어났다. 다소 강한 억척같은 성격에 쟁쟁한 목소리를 내던 박녹주는 12살 되던 해(1916년)에 나라 제일의 명창으로 만들고 싶다는 아버지 손에 끌려 선산 도리사 사하촌에 머물고 있던 가신歌神 박기홍朴基洪 앞에 섰다. 동편제 「적벽가」에 능한 박기홍은 박녹주에게 하루 24시간 중 20시간 이상 소리를 배우도록 했다. 소리하는 자세부터 엄하게 한 박기홍은 무릎을 세우고, 허리와 목을 꼿꼿이 세운 자세로 쉼없이 소리를 하 라고 가르쳤다. 점심 때를 제하고는 새벽녘 개밥바라기별이 뜰 때까지 「춘 향가」를 가르쳤다. 박녹주는 불과 두 달만에 「춘향가」전 바탕과 「심청 가」일부를 익혔다. 이때 예명을 녹주로 지었다. 어린 박녹주는 권력으로 위협해도 목숨걸고 이도령과의 순수한 사랑을 이뤄내는 「춘향가」중 옥중가와 몽중가가 맘에 들었다. 천지 삼켜 사랑나고, 사람생겨 글내일제 뜻정자 이별별자를 어이허여 내였든고. 뜻정자를 내였거 든 이별별자를 내지를 말거나 이 두 글자 내던 사람은 날로두고 지였던가. 도 련님이 떠나실 적에 지어주고 가신 가사 한창허니 가성열은 동창의 슬픔이요, 수다에 몽불성은 정부사의 설움이라... 어려운 가사를 외다가 잘못 외면 박기홍 옆에서 지켜보던 아버지가 회초리 로 때렸다. 목에서는 피가 났다. 도리사 부근에 머물던 박기홍은 「춘향가」 외에 「심청가」를 조금 더 가르친 뒤 선산을 떠나갔다. 소리를 다 배우기도 전에 박기홍 명창은 떠나고, 박녹주는 집으로 돌아왔다. 집으로 돌아오니 녹주가 소리를 한다는 소문이 벌써 꽤 났다. 선산은 물론 김천, 왜관, 상주 등지 에서도 초청이 왔다. 이때 벌써 과연 소리는 녹주야 라는 평가를 들었다. 앳된 박녹주가 우렁찬 소리로 「춘향가」 일절을 부르면, 좌중이 다 놀랐다. 14살 되던 해(1918년)에는 노대가 김창환金昌煥을 악착같이 따라다니며 「흥보가」중 제비노정기 를 전수받았다. 제비노정기는 박녹주가 가장 애창하던 대목이다. 어린 소녀가 설움을 받아가며 김창환의 소리를 전수받은 덕에 대부분 소리꾼들이 박녹주의 제비노정기를 이어받아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박녹주의 세 번째 선생은 대구 강창호였다. 앞산 절에 머물던 강창호는 예순이 다 된 노인이었으나 소리가 쩡쩡했다. 별로 이름은 알려지지 않았지만 소리를 퍽 잘하는 편이었다. 강창호에게 박녹주는 초입부터 심청이 인당수에 빠 지는데까지, 「수궁가」중 고고천변을 두 달동안 배웠다. 강창호에게「심청가」를 배우고 집으로 돌아오자 이번에는 아버지가 권번 에서 기생수업을 받게 했다. 소리를 배우는 것조차 꺼려하던 어머니와는 달리 박녹주의 아버지는 3년간 딸을 맡기고 돈 2백원을 받아갔다. 대구 달성공 원 앞 달성권번이었다. 달성권번에서 행수기생 앵모의 양딸이 되었다. 당시 행수기생 앵모라면 우리나라 한량으로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수백명의 기생을 거느리고 있었고, 젊었을 때는 미녀 기생으로 명성을 날렸다. 박녹주가 15 살 되던 해에 행수기생 앵모는 환갑을 맞이했는데 이때 서울 한성권번과 조선 권번 기생을 필두로 부산, 동래, 광주, 원산 강경 기생들이 몰려왔다. 1천여명이 넘는 기생들은 대구 방천 옆에 2개의 가설극장을 세우고 앵모 환갑기념공연을 가질 정도였다. 앵모 밑에서 소리 춤 시조를 배우던 박녹주는 단박에 두각을 드러냈다. 앵모는 녹주, 너는 장래 크게 될 거다 면서 격려를 해주었지만 어린 나이에 기생 세계에서 살아가야 한다는 것은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아버 지가 받은 돈 2백원을 갚은 박녹주는 집으로 돌아갔다. 이때는 1919년으로 한 창 기미년 만세운동이 전국적으로 들불처럼 퍼져나가던 시기였다. 1919년 4 월 서울로 갔다가 소득없이 다시 고향 선산으로 내려와서 여름을 고향에서 보내고, 박녹주는 다시 아버지를 따라 대구로 왔다. 아버지 친구집에 머물면서 권번에 드나들었다. 이미 대구에서 김초향 다음가는 소녀명창으로 이름을 날리던 열다섯살 박녹주는 달성권번에서 알려진 김점룡, 음준옥, 조진영 등으로 부터 육자배기를 배웠다. 육자배기는 판소리와 똑같은 소리이나 명창들은 천 박하다고 부르기를 꺼려했다. 조진영에게 배운「화초사거리」는 민요 중에 서도 가장 어려운 것으로 박녹주의 마음에 쏙 들었다. 1920년, 16살이 된 박녹주는 키도 훌쑥 자라 156cm가 되었다. 하룻밤 초청되 어가면 그때 돈 10원을 받던 박녹주는 아직 머리를 얹지 않은 동기童妓였다. 당시 풍습으로는 기생이라면 화초머리를 얹어야 더 인기를 끌었다. 화초머리 란 낭군을 맞지는 않고, 그저 머리만 얹는 풍습이다. 머리를 얹어주는 사람은 명사이거나 부자양반이었다. 서로 바라는 것 없이 동기가 커서 유명해지면 그때 가서 보답을 하는 식이었다. 박녹주에게 화초머리를 얹은 사람은 변씨라는 충청도 부자였다. 박녹주가 16살 되던 가을에 댕기를 가져간 변씨는 그때 풍습대로 세간 등 모든 것을 그저 사주었다. 변덕스럽던 박녹주의 아버지는 무슨 이유에서인지 화초머리를 얹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변씨로부터 얻은 세간을 모두 팔아서 딸을 고향으로 데려갔다. 설을 쇠고, 다시 대구로 딸을 데리고 나간 박녹주의 아버지는 이번에는 강릉 에서 대구 부자 박참봉의 돈으로 권번을 차리자고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원산까지 걸어가며 마을마다 명창대회를 열어 많은 돈을 벌었다. 국창이 될 사람 국창이 될 사람 원산 명창대회는 박녹주의 창에 반한 앙콜소리로 떠나갈 듯 했다. 명창대회 라고 해서 지금의 명창 대회같은 공인받은 것은 아니고, 조금 규모가 큰 감상 회 정도였다. 공연 다음날, 박녹주는 원산 부자인 남백우로부터 초청을 받고 소리를 했다. 여기에서 22살 연상 남백우를 만났다. 보성전문을 졸업한 남백 우는 한창 때라 풍채도 좋고 인자한 편이었다. 남백우는 반세기를 소리로 물 들일 명창을 대번에 알아봤다. 녹주, 자네는 우리나라 국창이 될 사람이야. 내가 소홀히 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무엇을 원하는가? 고 물었다. 박녹주는 늘 고생하던 어머니가 이곳 선산에 살지 말고, 멀리 이사가서 사는 게 내 소원이야 하던 말을 떠올렸다. 어머니를 원산에 모셔다가 같이 살았으면 좋겠다고 한 박녹주의 바램대로 남백우는 안채와 사랑채가 있는 원산 중리의 큰 기와집을 세 얻어주고 이사비용을 댔다. 남백우는 박녹주의 첫 남편이다. 18살 되던 1922년에는 서울에서 송만갑宋萬甲(1865~1939)을 만났다. 송만갑은 우미관優美館 명창대회에 출연하고 있었다. 송만갑은 단가 「진국명산」 을 불렀다. 앞이마와 뒷머리가 툭 튀어나와 재주가 넘쳐 흐르는 송만갑은 천생 예술가였다. 몸집이 작아서 성량은 크지 않았으나 높고 강한 철성鐵聲이어서 만인의 심금을 울리는 소리였다. 당시 한성권번에 선생으로 다니던 송만갑을 따라 한성권번에 가서 1923년부터 「진국명산」과 「춘향가」를 배웠다. 헌종 때 가왕으로 불렸던 국창 송흥록이 큰할아버지인 송만갑은 이미 10살에 명창의 칭호를 들었다. 박녹주는 송만갑으로부터 「춘향가」 중 사랑가로부터 십장가까지 배웠다. 24살 되던 1928년에는 조선극장에서 팔도명창대회가 열렸다. 지금 종로세무서 위편에 있던 조선극장은 단성사 우미관과 함께 3대 극장으로 손꼽혔다. 전국 명창들이 모두 출연하다시피한 이 공연에서 재창 삼창 앙콜을 받은 박녹주에게 두 사람이 찾아왔다. 한 사람은 고려대 설립자이자 전 부통령인 인촌 김성수의 부친 김경중, 또 한 사람은 당시 연희전문학교에 다니던 대학생 김유정金裕貞이었다. 김경중은 일국의 명창이 관철동 전셋집이 웬말이냐며 수운동에 3천원 짜리 집을 사주었다. 뿐만 아니라 박녹주가 1929년 송만갑의 수제자인 김정문 金正文에게 소리를 배우도록 주선해주고, 매달 1백원이나 되는 비용도 대주었다. 소리를 아끼고 위하는 마음이었다. 박녹주가 김정문으로부터 「흥보가」의 제비 후리러 나가는데까지 배웠기에 오늘날까지 동편제 「흥보가」가 온전히 전승될 수 있었다. 이 가운데 박타령과 비단 나오는데 는 박녹주가 즐겨 부른 대목이고, 심청가 전 바탕도 김정문으로부터 전수받았다. 박녹주의 홍보가는 김소희를 통해 소리판의 맥을 잇고 있다. 유성준劉成俊으로부터는 「수궁가」일부를 배웠다. 「봄봄」, 「동백꽃」 의 작가 김유정金裕貞은 뛰어난 예술성의 박녹주에게서 어릴 때 여읜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하고 그만 짝사랑에 빠져버렸다. 나는 조선극장서 선생이 소리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모든 사람의 인기를 끄는 것이 정말 기뻤습니다. 나는 당신을 연모합니다. 나는 22살의 연전 학생이오. 고향은 강원도 춘천이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안 계시오. 그로부터 김유정은 석달 동안 매일 편지를 보냈다. 정말 밤에 본 당신은 아름답더이다. , 나는 그 길가에서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르오. 연상의 남편 있는 명창 박녹주를 사랑하는 김유 정의 연모는 때로는 협박으로 때로는 혈서로 때로는 납치극으로 변했다. 한번 만이라도 사랑을 받아달라고 애원하던 김유정은 피묻은 편지도 보냈다. 애끓는 마음을 혈서에 담아보냈지만, 박녹주는 끄덕도 하지 않았다. 김유정의 사랑고백은 온 천지로 퍼져나가 원산의 남편 남백우나 김경중까지 다 알게 되었다. 때로는 박녹주에게 너무 매정하다는 비난이 되돌아오기도 했다. 1929년 김유정은 「소낙비」란 소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노다지」 로 중앙일보에 동시에 당선됐다. 김유정이 박녹주에게 보낸 연애편지들은 지 금도 강원도 실레마을에 있는 김유정문학관의 유품으로 남아있다. 결국 이성적인 판단으로는 제어하기 힘든 일방적인 사랑으로 박녹주 바보가 되어버린 김유정은 1937년 늑막염에 폐결핵이 더해져서 유명을 달리했다. 소설가로서 막 이름을 날리기 시작했으나 30살, 젊음을 채 꽃피우기도 전에 타계한 것이다. 과한 연모가 엘리트 소설가로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 김유정의 생명까지 앗아간 것일까? 너무 짧고 그래서 더 애틋한 김유정의 삶은 서른 고개를 넘기지 못하고 막을 내렸다. 그때 박녹주는 33살이었다. 김유정은 바로 네가 죽였지! 어린 나이에 스타가 된 박녹주가 연희전문 학생 신분이던 젊은 소설가의 열정을 받아들이기 어려운 현실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김유정의 죽음을 그렇게 안타까워했다. 12살부터 소리길을 닦아온 박녹주는 20대에 벌써 대명창들과 교제하였고, 여류명창으로 이름을 떨치기 시작했다. 1928년에는 콜럼비아 레코드사에서 「심청가」를 취입했고, 연이어 빅터 태평양 레코드에서 판소리 네 바탕을 모두 출반하여 식을 줄 모르는 인기를 누렸다. 1930년에는 관훈동 '성악연구회'에 자주 나가며 평탄하게 지나갔다. 이 성악연구회란 당시 우리나라의 명창인 송 만갑,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이 주동이 된 국악인 모임이었다. 1931년 봄, 박녹주는 두 번째 남편 우석友石 김종익金鐘翊을 만났다. 김종익은 박녹주와 송만 갑을 위해 익선동에 성악연구회 사무실로 9천 5백원짜리 집을 사줬다. 그럴듯한 집을 가진 성악연구회는 정식 총회를 갖고 이동백을 초대회장으로 선출했다. 마음이 넓은 둘째 남편 김종익은 늘 너의 몸은 네 것이지만 소리는 세상 사람들 것이니 그들에게 들려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방송에 나가는 것, 레코드 취입하는 것, 성악연구회에서 창극하는 것에 대해서 관대하였다. 소리는 세상사람들에게 돌려줘야 1933년 조선성악연구회 결성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박녹주는 1935년 동양극 장에서 처음 공연을 가진 「춘향가」(조선성악연구회 주최, 정정렬 연출)에 서 춘향역을 맡았다. 인물이 곱거나 연극을 잘해서가 아니라 소리 하나만으로 춘향역을 맡은 것이다. 그해 봄 동양극장을 1주일간 인파로 가득 메운 「춘향 가」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장장 5시간에 걸친 긴 창극으로 명사 치고 이를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우리나라 국창은 모두 출연했던 이 공연은 아침 10시에서 오후 3시, 오후 7 시에서 자정까지 두 차례 열렸다. 서로 떠밀고 들어오느라 유리창이 깨지고, 출입문이 부서지는 대소동 가운데도 「춘향가」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이 도령 역은 정남희(6·25때 납북), 방자 역은 오태석, 변사또 역은 5대 명창으로 손꼽히는 김창룡, 곡성 원님 역은 송만갑, 임실 현감 역은 정정렬이 했다. 당대 60대 대명창이 조연을 맡을 정도였으니 「춘향가」는 공전의 히트를 쳤 다. 명창들은 요샛말로 애드립도 잘했다. 대사에 없는 말로 관중을 폭소의 도가니로 몰고 갔다. 한 예로 잔치 도중 운봉역을 맡은 이동백이 송만갑을 보고 여보게 곡성영감. 당신은 어디가서 못 크고 그렇게 작은가 하곤 농을 거는 게 대표적이다. 원래 키가 작은 송만갑을 놀린 것이다. 그러면 송만갑은 운 봉영감은 뭘 먹고 그리 컸소. 좀 알려주소 하고 응수를 했다. 박녹주는 성악 연구회의 창극에서 늘 주연을 했는데 34세부터 춘향역을 내놓았다. 그러나 몸 이 작고 제격이라고 해서 심청역은 39세까지 했다. 성악연구회에서의 창극생 활은 39세까지 계속됐다. 1938년 가을에는 「숙영낭자전」을 동양극장서 초연初演했다. 전통적인 「춘향가」, 「심청가」, 「흥보가 」같이 깊고 해학이 짙은 맛은 없었지만 젊은 남녀의 러브스토리이기 때문에 상당한 인기를 모았다. 박녹주는 숙영낭 자역도 맡았다. 「숙영낭자전」은 현진이란 백白진사의 외동아들이 집안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선녀 숙영낭 자와 사랑 끝에 결혼한다는 줄거리이다. 숙영낭자역을 맡은 박녹 주는 극 중 남편 백현진의 어머니 역을 맡은 임소향林小香에게 절을 해야했다. 임소향은 박녹주보다 열 살 넘게 어렸다. 큰언니로 모시던 박녹주의 절을 받는 게 미안해서 임소향은 어쩔줄 몰라했 다. 그러면 박녹주는 작은 소리로 때려 죽일 년, 절 받아라 하면서 절을 했다고 전한다. 대부분 창극에서 주역을 했으나 37세가 된 1941년에 공연한 「수궁가水宮歌」에서는 단역인 자라 어머니 역을 맡았다. 그런데 창극중에서는 이 「수궁가」가 가장 히트를 했다. 그러나 소도구가 하도 많아 지방공연을 갖지 못했다. 「수궁가」의 주역인 자라 는 임방울이, 토끼는 김연수가 맡았고 수궁용왕은 조상선이 분했다. 천생의 뛰어난 목소리를 가진 임방울은 허풍좋고 우직한 자라역을 잘도 해냈는데, 사실 임방울과 어머니역을 맡은 박녹주는 고생을 엄청했다. 딱딱한 자라옷을 등에 쓰고 엉금엉금 기어 다녀야 했기 때문이다. 공연한 때가 여름이면 땀이 온 몸을 적셨다. 둘째 남편인 김종익이 1941년 봄, 이질로 서울대 부속병원에서 타계하기 전, 박녹주는 이화중선李花中仙과 함께 병문안을 갔다. 김종익은 이달에 벌면 다음달에 저축을 하라고 했으나 한귀로 흘렸다. 만년에 생활고를 겪으면서 박녹주는 남편 김종익의 충고를 고깝게 여기고 이재를 하지 못한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해방을 맞고 처음 한 일이 여성국악동호회 결성이다. 그때 까지 국극사 조선 창극단 등 남자들이 이끄는 예술단체가 있었지만 모든게 남성 위주였다. 여성들은 푸대접을 받았다. 1945년 봄 박귀희, 김소희, 임춘앵, 정유색, 임유앵, 김경희 등 30여 명의 여성으로 여성국악동호회를 결성하고, 상무이사에 취임했다. 본격적인 여성국 악운동의 시작을 예고한 것이다. 한국전쟁시 정남희 등이 월북을 강요했으나 잘 모면했으며 명창 30여명과 함께 국민방위군 정훈공작대에 편입되어 1952년까지 군을 돌며 「열녀화」를 공연하였다. 1952년 눈병으로 한쪽 눈을 실명하였고, 대구에서 국극사國劇社를 결성하였다. 1960년부터 박귀희에게 「흥보가」를 가르치기 시작하였고, 1964년 12 월 24일 중요무형문화재 제5호 판소리(「춘향가」)의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박귀희는 송만갑, 김창환, 이동백, 정정렬 김창룡 등 5명창이 타계한 후 여류 국창으로 군림하다 남자 명창들의 맥이 거의 끊어져버린 인간문화재 시대에 김여란과 함께 쇠퇴하는 소리판을 굳건히 지켜낸 국악계의 어머니이다. 대구의 국악인 박기환씨는 박녹주가 이승만 대통령 시절, 청와대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국악인이었다며 국립국악원을 만들때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고 들려주었다. 1971년 판소리보존연구회를 창립하고 초대 이사장으로 활약 하였고, 그의 소리는 조상현, 박초선, 성창순, 성우향 등이 이어받았다. 늑대라는 별명을 가질 정도로 여성국악인으로서 다소 거칠다 싶은 목소리를 지녀 단단한 무게감을 느끼게 한 명창 박녹주는 대구·경북보다 중앙무대에서 더 큰 활동을 펼쳤다. 타계 일년전인 1978년 고향 선산에서 열린 제자들과 마지막 고별공연에서 백발가를 불러 객석을 눈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박녹주는 동편제 창법의 국보적 존재로「흥보가」명창이 자 판소리계에 우먼파워를 심은 인간 문화재이다. 평생을 소리로 보낸 박녹주에게 이 이상의 영광은 없을 것이다. 박녹주에게 소리를 배운 사람은 상당히 많다. 박녹주는 박귀희에게 송만갑제가 그대로 살아 있는 「흥보가」를, 정의진에게 박녹주제 「흥보가」를 전수했다. 판소리 기본인 다섯마당 말고도 정정렬이 유일하게 부른 「숙영낭자전」 을 배웠다. 「숙영낭자전」은 김여란과 이기권이 같이 배웠으나 이기권은 일찍 죽고 김여란은 많이 잊어버려 유일하게 박녹주만 알던 것을 박초선, 한농선, 조상현, 조순애, 박송 희 등에게 전수했다. 서편제가 호남을 중심으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면, 동편제는 영남을 중심으로 맥을 이어오고 있고 그 중심에 박녹주가 있다. 1979년 5월 26일 향년 75세를 일기로 타계하였다. 명창 박녹주 노래비는 경북 구미 노상동에 세워져 있다 [경북여성 인물사] 소리로 한국을 사로잡은 명창 박녹주 (저자:최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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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시스] 국악공연 '씻김', 28일 온라인 중계…김호규 1주기 추모한국문화재재단이 오는 28일 오후 7시 기획공연 '씻김'을 온라인 중계한다.우리나라 최초 국악 전문 신문 '국악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이자 국악인 고(故) 김호규의 1주기를 추모하며 그의 생애를 재조명하는 전통예술 국악공연이다.'소상씻김굿'은 국가무형문화재 제72호인 '진도씻김굿'의 한 종류로 죽은 망자의 원한을 풀어 극락왕생할 수 있도록 기원하는 1년 탈상(어버이의 상을 마침) 굿이다.망자의 영혼을 깨끗이 씻어준다는 의미로 씻김굿이라 부른다.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될 만큼 춤이나 음악에서 예술적 요소가 뛰어나, 전통 사자의례를 넘어 예술 공연으로 변모해 왔다.이번 공연은 진도씻김굿 보존회가 진행하며, 추모의 주인공 고(故) 김호규 선생 아버지인 '명인 김병섭류 설장고 보존회'가 무대를 준비했다.더불어 서도소리 전수조교 유지숙과 그의 제자들이 펼치는 '수심가와 산염불, 자진염불', 진도씻김굿 이수자 및 승무 이수자 강은영이 펼치는 북춤 등 각종 국가무형문화재 진수들이 펼쳐진다.김호규는 1959년 전북 익산에서 우도 설장고 명인 고(故) 김병섭(1921~1987)의 3남 2녀 중 2남으로 출생했다. 1994년 9월 7일 '국악의 해'와 '한국방문의해'를 맞아 우리나라 최초로 국악 전문 신문 '놀이문화'를 창간했다.이후 8호부터 '국악신문'으로 제호를 변경, 25년간 꾸준히 293호까지 발간하며 전통문화 홍보에 기여했다. 후학들을 위한 체계적인 시스템 마련을 위해 2016년부터 3년간 국악로전통문화학교를 설립, 운영하기도 했다.이 외 농악명인전, 차세대 명인전, 전국 국악 경연대회 등을 개최하며 국악의 대중화에 앞장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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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큐] 명창 안비취선생의 음악과 인생고 안비취선생의 음악과 걸어오신 인생길에 대한 다큐멘터리 #안비취#중요무형문화재제5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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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과 헐버트안중근 의사, 1909년 10월 26일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 러일전쟁 발발 직후인 1904년 2월 한국과 일본은 ‘한일의정서’에 서명하였다. 한일의정서에서 대한제국은 일본의 전쟁 수행에 편의를 제공하고,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보장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 약속을 헌신짝처럼 내팽개치고 1905년 11월 총칼로 위협하며 오늘날 우리가 을사늑약이라 부르는 ‘한일협약’을 강제하여 대한제국의 보호국임을 자처했다. 2년 뒤 1907년 고종황제는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여 을사늑약을 원천무효라고 세계만방에 선언하며 일본의 보호통치에 반기를 들었다. 그해 7월 일본은 고종황제를 강제로 퇴위시켰다. 다시 2년 뒤 1909년 10월 26일 만주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저격해 쓰러뜨렸다. 얼마 전까지 조선통감이고 조선 침략의 수괴였던 그를 한민족을 대신해서 처단한 것이다. 이 한발의 총성은 한민족의 가슴을 뜨겁게 하고 동아시아를 진동시켰다.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 안중근이 뤼순(旅順)감옥으로 이송된 지 달포가 지나서다. 취조실 한편에 난로가 놓였지만 마루바닥에서 올라오는 냉기에 안중근은 코끝이 시렸다. 일본경찰에서 꽤 높은 경시 계급장을 단 사카이(境喜明)도 손이 곱은지 틈만 나면 손가락을 호호 불어댔다. 사카이는 끊임없이 안중근의 거사에 배후를 캐내려고 전방위적 심문을 이어갔다. 사카이가 뜬금없는 질문을 들이댔다. "미국 사람 ‘하루바토’를 아는가?” 안중근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이 자가 왜 갑자기 헐버트(Homer Hulbert)의 이름을 꺼내는가? 안중근이 대답에 뜸을 들이자 사카이가 "하루바토를 만난 적이 있소, 없소?”라고 다그쳤다. 안중근은 호흡을 가다듬으며, "헐버트를 만난 적은 없소.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다. 1909년 12월 2일의 일이다.(일본 경찰에 공술한 내용이 담긴 통감부 기밀문서) 왜 안중근이 한 이방인에게 예를 갖추어 최상의 존경을 표했을까? 둘은 잘 아는 사이였을까? 헐버트는 과연 안중근에게, 그리고 한민족에게 어떤 존재였을까? 고종황제의 특사 헐버트 미국인 호머 헐버트는 1886년 7월 ‘육영공원(育英公院)’ 교사가 되기 위해 조선 제물포에 도착했다. 학생들을 잘 가르치기 위한 책임감으로 조선 말글을 공부했으나 한글을 접하자마자 한글에 매료되었고, 배운지 4일 만에 한글을 읽고 썼다. 1889년 조선 말글의 우수성에 대한 최초의 글 ‘조선어’를 <뉴욕 트리뷴>지에 기고했고, 1891년에는 최초의 한글교과서 <사민필지>를 출간했다. 1893년 배재학당 삼문출판사 책임자가 되고, 1896년 서재필의 <독립신문> 창간을 도왔다. 1895년 일본군이 심야에 궁궐에 진입해 민비를 살해한 직후, 미국인 언더우드, 애비슨과 함께 고종의 침전에서 불침번을 섰다. 1905년 고종황제의 대미 특사로 미국 루즈벨트 행정부에 고종황제의 친서를 전달했다. 1907년 5월 고종황제의 특사로 만국평화회의가 열리는 헤이그를 방문해 한국인 3인 특사를 지원했고, 헤이그 평화클럽에서 일본의 불법성을 폭로했다. 헤이그 특사로 활약한 탓에 고종황제의 퇴위와 더불어 일본의 박해로 한국을 떠나 미국으로 돌아갔다. 1909년 가사 정리를 위해 잠시 한국을 방문했을 때, 상해 소재 독일은행에 예치된 고종황제의 내탕금 인출을 위한 위임장을 받았다. 독일은행을 찾아가 인출을 요구했으나 이미 이완용과 짜고 일본 통감부가 불법 인출해 간 뒤였다. 1903년에는 YMCA창립준비위원장 및 총회의장으로 한국YMCA 창립을 선포했다. 1903년 조선왕조 역사서 <대동기년>을 출간했고, 1905년 <한국사 The History of Korea>를 출간했다. 1906년 한국의 역사, 문화를 집대성한 <대한제국의 종말 The Passing of Korea>를 출간했다. 안중근 의사는 대한제국의 험난한 시대상황을 함께 겪은 동시대인으로서 여기까지 기록된 헐버트의 우국충정과 활약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사카이 경시가 "미국인 하루바토를 아는가?”라고 심문했을 때, "헐버트를 만난 적은 없소. 그러나 한국인이라면 헐버트를 하루라도 잊어서는 아니 되오.”라고 단호하게 대답했던 것이다. 독립운동가 헐버트 그 이후 헐버트는 1919년 파리강화회의 기간 중 프랑스에서 임시정부 대표 김규식과 함께 한국의 독립을 호소했다. 1924년 미국 전역 220곳을 방문해 강연하며 식어가는 한국독립운동 열기를 되살렸다. 1919년 이후 1945년까지 ‘한국친우회’와 ‘구미위원부’ 등 한국 독립운동단체에서 중심 연사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1주년을 맞아 1949년 7월 29일 대한민국 국빈 초청으로 8.15 광복절 행사에 참여하기 위해 내한했으나, 86살 노구로 긴 항해의 여독을 이기지 못하고 8월 5일 서거했다. 정부는 외국인 최초의 ‘사회장’으로 영결식을 거행하고 양화진에 안장했다. 한국으로 출발하면서 그는 어느 기자에게 "나는 웨스트민스터 사원보다 한국 땅에 묻히기를 원하노라”고 말했다. 한국인이 기억하는 헐버트 대학을 졸업하고 1886년 23살의 나이로 조선 땅을 밟은 이후, 그의 삶은 한국과 한국인 공동체 속에 온전히 담겼다. 63년 동안 한민족과 영욕을 함께 한 헐버트 박사의 삶은 교육자, 한글학자, 언어학자, 역사학자, 언론인, 아리랑 채보자, 선교사, 황제의 밀사, 독립운동가로 점철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50년 3월 1일 헐버트에게 독립운동에 헌신한 공로를 기려 ‘건국공로훈장 태극장(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2014년 10월 9일 헐버트에게 한글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기려 ‘금관문화훈장’을 추서하였다. (사)서울아리랑페스티벌은 2015년 10월 7일, 아리랑을 최초로 채보하여 영원한 한민족의 노래로 발전케 한 공로를 인정하여 헐버트에게 제1회 ‘서울아리랑 상’을 추서하였다. 헐버트는 1906년 역사서 <대한제국의 종말> 헌사에서 "비방이 그 극에 이르고 정의가 사라지고 있는 이때에, 나의 지극한 존경의 표시와 흔들리지 않는 충성의 맹세로서, 대한제국의 황제 폐하에게” "그리고, 지금은 자신의 역사가 그 종말을 고하는 모습을 목격하고 있지만, 장차 이 민족의 정기가 어둠에서 깨어나면, 잠이란 죽음의 가상이기는 하나, 죽음 그 자체는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게 될, 한민족에게, 이 책을 바칩니다. 호머 헐버트” 라고 썼다. 한민족은 반드시 부활해서 독립 국가를 쟁취할 것이라는 ‘대한 독립’의 열망과 신념을 피력했다. 그리고 헐버트는 끝내 한국이 독립하는 환희의 역사를 우리와 함께 맞이했다. 오늘 우리는 어느 한국인보다 한국을 더 사랑한 ‘파란 눈의 한국혼’ 헐버트를 기억한다. - 김동진 저 ‘헐버트의 꿈, 조선은 피어나리’에서 발췌 (재외동포신문 이형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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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레이스키1860년대 이후 많은 조선인이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했다. 1900년대 초 연해주 인구 20%가 조선 출신이었다. 러시아인은 그들을 ‘한국의’ ‘한국적인’이라는 뜻의 러시아어 ‘카레이스키’(корéйский)로 불렀다. 사회주의 혁명으로 소련이 탄생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카레이스키와 일제의 내통을 의심했다. 1937~39년 연해주의 카레이스키 17여만명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켰다. 카레이스키는 새 터전에서도 논농사를 지었고, 조선의 생활문화를 이어갔다. 1989년 11월 독일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 동유럽 공산정권이 연쇄 붕괴했다. 불똥이 소련으로 튀었다. 90년 3월 리투아니아, 91년 4월 조지아가 차례로 독립했다. 8월에는 에스토니아(20일), 라트비아(21일), 우크라이나(24일), 벨라루스(25일), 몰도바(27일), 키르기스스탄(31일)이 하루가 멀다고 뒤를 이었다. 같은 해 12월 12일 러시아마저 독립했다. 16일 카자흐스탄 독립을 끝으로 소련은 사라졌다. 독립한 국가마다 민족주의가 창궐했다. 카레이스키가 많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도 그랬다. 카레이스키 입지는 좁아졌다. 재일 소설가 이회성은 1935년 러시아 사할린에서 태어났다. 황해도 출신인 부친이 이주 탄광 노동자였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일본에 정착했다. 그는 72년 한국인 최초로 아쿠타가와(芥川)상을 받았다. 소련 붕괴 직후 러시아 사할린과 연해주, 중앙아시아를 돌며 카레이스키를 취재했다. 92년 펴낸 장편 소설 『유역』(流域)이 그 얘기다. 남북한 어디에도 속하지 못한 채, 현지인도 한국인도 아닌 제3의 정체성. ‘자이니치’(在日) 이회성에게 카레이스키는 거울을 통해 본 자신이었다. 정부는 1988년부터 카레이스키의 한국 국적 회복이나 영주 귀국을 허용했다. 이른바 ‘150년 만의 귀향’이다. 경기 안산시 땟골마을, 광주광역시 고려인마을이 이들의 집단 거주지다. 많은 카레이스키가 여전히 현지에서 힘겹게 살아간다. 2010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에 독거노인이 된 1세대 카레이스키 보호시설 ‘아리랑 요양원’이 개원했다. 시설이 코로나19로 어려움을 겪자 최근 정부가 긴급 의료 지원에 나섰다. 잘한 일이다. 그게 나라다. 다만, 권력자 말 한마디 대신 국정 시스템으로 그렇게 한다면, 그건 더 좋은 나라다.(중앙일보 장혜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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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 큰사전’ 원고 ‘말모이’, 보물 된다최초의 한글사전인 ‘말모이’와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의 원고가 보물로 지정된다. 8일 문화재청은 ‘말모이 원고’와 ‘조선말 큰사전 원고’ 2종 4건을 보물로 지정 예고했다고 밝혔다. 근대문화재가 보물로 지정되는 것은 17년 만이다. 두 문화재는 일제강점기 우리말을 지켜낸 국민적 노력의 결실을 보여주는 자료로 가치를 인정받았다. ‘말모이 원고’의 경우 한글학자 주시경(1876∼1914)이 제자들과 1911년 집필을 시작했다. 240자 원고지에 단정한 붓글씨로 쓰인 원고는 사전 출간을 염두에 둔 구성이 특징이다. 그러나 1914년 주시경이 세상을 떠나고, 제자 김두봉이 3·1운동을 계기로 망명하면서 편찬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정식 출간되지 못했다. 이후 조선어학회의 ‘조선말 큰사전’ 편찬의 결정적 디딤돌이 됐다. ‘조선말 큰사전 원고’는 조선어학회(한글학회 전신)가 1929∼1942년 작성한 사전 원고의 필사본 교정지 총 14책이다. 오랜 기간 다수의 학자가 참여해 손때가 묻은 세월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제작 과정에서 범국민적 움직임도 있었다. 각계 인사 108명이 결성해 사전편찬 사업을 시작하고, 영친왕이 후원금 1000원(현재 약 958만 원)을 기부했으며, 국민들이 지역별 사투리와 우리말 자료를 모아 학회로 보내 힘을 보탰다. 이번 보물 지정 예고는 근대문화재의 역사적·학술적 가치 재평가 차원에서 이뤄졌다. 그간 근대문화재 중 국보는 0건, 보물은 33건에 불과하며 이 가운데 26건은 안중근 의사 유묵이다. 황정연 문화재청 유형문화재과 연구사는 "등록문화재 제도가 생긴 2005년부터 국보·보물 지정이 전혀 없었다”며 "근대문화재의 역사성에 대해 본격적인 재평가가 이뤄질 것”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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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할린에 두고 온 나의 아버지사할린에 두고 온 나의 아버지 공노원/사할린 한국어교육협회 부회장 나는 1939년 한반도에서 강제동원 되어 사할린으로 강제이주하신 부모님이 사할린 코르샤코프 항구에서 태어난 공노원입니다. 우리 가족은 조선에서 왔고, 중국의 현자 공자님의 후손이고 20대손이라고 하셨고, 그래서 저의 이름은 노나라 노자, 원나라 원자에서 따온 노원이라 지어 주셨습니다. 이 세상을 크게 보라는 세계관을 심어 주셨습니다. 그래서 세계사는 저의 큰 관심사이었습니다. 러시아에서 태어나서 러시아말을 하고 살지만 우리 가족은 언제나 조선어로 말을 하고 조선 김치를 먹고 살았습니다. 전쟁이 끝나고 해방이 되었지만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억류된 우리 가족은 할 수 없이 러시아 국민이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늘 너희만이라도 반드시 조선땅에 가서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다행히 오늘 한국으로 영구귀국해서 인천에서 살고 있습니다. 이미 돌아가신 아버지 대신 사할린 2세로서 한국에 정주하게 되었습니다. 사할린 동토의 땅에 어머니와 함께 누워계십니다. 어미니의 유언으로 합장을 해드렸습니다. 아버지(공재철 1914-1970년)는 언제나 조선말만 하시고 러시아말은 배우려고 하지 않으셨습니다. 탄광에서 일을 하셔서 그래도 대충 알아듣고 소통은 하셨습니다. 국적을 바꾸면 한국으로 돌아갈 수 없다고 절대 러시아나 북한 국적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일제 강점기에도 일본어 이름도 러시아 시대에도 러시아 이름도 우리에게는 있을 수 없다고 부정하셨습니다, 러시아 이름으로 개명한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실 정도이셨습니다. 우리는 언젠가는 반드시 고향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했습니다. 20년이 흘러서 우리 형제는 대학에 입학하기 위해 할 수 없이 조선학교를 졸업하고 러시아 국적을 받았습니다. 1964년 사할린사범대학 생물과를 조업하고 지금까지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편을 잡고 있습니다. 한국어 교육에 대한 출발은 1988년 한국올림픽 성공이후 아버지와 부모님의 고향인 논산과 공주를 방문하고 눈부신 발전을 한 대한민국을 보고 교직생활에 큰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한러수교로 열린 고향길 1990년 꿈에도 그리던 한국에 교육자로 초청을 받고 처음 한국땅을 밟자 제일 처음 떠오르는 사람은 수년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의 목소리었습니다. 1970년 탄광에서 일하시다가 갑작스런 죽음으로 56세에 이 세상을 떠나신 아버지의 유훈이 강하게 떠올랐습니다. "조선어를 잊지말아라. 너는 언제가 우리말을 사용하고 가르쳐라.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 잊지말아라 ” 그러나 이미 사할린에서 조선말이 사라진지 오래입니다. 그래서 결심을 하고 다시 한국어 공부를 해서 다음 세대에게 한국을 알리는 유일한 길은 한국어를 공용하게 하는 것입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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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wangju: Light of Liberty in East AsiaSouth Korean Film: The Man Standing Next After watching the 2020 South Korean film, "The Man Standing Next,” about the events leading up to President Park Cheong-hee’s assassination by his close friend, and head of the CIA (South Korean) Kim Jae-gyu on ) October 26, 1979, I decided to learn more about the South Korean democracy movement. Leading up to Park’s assassination a series of social, economic, and political events transpire, culminating in KCIA Director Kim Jae-gyu’s decision to assassinate President Park. First and most importantly President Park’s continuation of the authoritarian Yushin Constitution, first instituted through martial law and dissolution of the National Assembly, its continuation fueled popular political opposition for open presidential elections nationwide. On August 9th, 1979 the female workers of the YH Trading Company staged a lockout in protest of the Park Administration (any criticism of the Yushin Constitution demanded 15 years of prison). The opposition party, led by Kim Young-sam (native of Busan), heavily criticized the action and was subsequently expelled from the National Assembly on October 4, 1979: 66 other National Assembly members resigned in protest. This political unrest was also being fueled by the Oil Shock (starting in July 1979) which hit the cities of Busan and Masan the hardest, where they experienced an unemployment rate twice the national average. It was just too much and on October 16, 1979 student led popular protest (starting at Busan University) quickly spread to neighboring Masan, where the students of Kyungnam University led their own popular uprising. The film depicts a defining question of the film: "How much are you willing to sacrifice?” "Why did we do the revolution? Why are we doing any of this? To kill 2-3 million citizens to stay in power? Is that worth the sacrifice?” Director Kim Jae-gyu decided that it was too many, and he sacrificed himself so that the people of Busan and Masan could live. May 18 Gwangju Uprising But in the ensuing political confusion after Park’s death, General Chun Doo-hwan took power in a military coup on December 12th, 1979, which set the stage for confrontation with student democratic reformers in the Spring of 1980. General Chun and his cadre had learned an important lesson from the Busan and Masan uprisings: "To maintain control popular protests must be dealt with swiftly, harshly, and with overwhelming force.” When students returned to campuses in the spring of 1980 and once again took the streets in protest against authoritarian rule (this time starting at Seoul Station), General Chun chose Gwangju to send a message to the rest of South Korea: do not challenge his rule. After visiting, Busan and Masan, I also decided to visit Gwangju to learn more about the Gwangju May 18 Uprising. I took the KTX train south from Seoul Station (just two hours), jumped on the 518 bus and toured the city of Gwangju. Similar to the Busan – Masan Democratic Protests just 7 months prior, students from Chonnam and Chosun University also led the popular protests in Gwangju. Although this time, General Chun was ready and on May 18, 1980 he declared martial law for the entire country: instituting curfews, shutting down universities, prohibited political activities, and freedom of the press. The Gwangju Uprising was famously ended through military force, turning the downtown streets of Gwangju into a warzone. The sacrifice of the Gwangju citizens for liberal democracy in South Korea (representative government, civil liberties, freedom of the press and assembly) resonates as you walk through the gates of the May 18 National Cemetery, reading "Democracy’s Strength,” and view the headstones of all those who fought and died against authoritarian rule. A Nation that Forgets its Past has No Future As authoritarian and totalitarian regimes around the world rise again, the past becomes ever present, and for people that forget their past there is no future. Current generations, with no memory of the sacrifice or danger, must learn again to fight authoritarian rule. It is the burden of each and every generation to keep the authoritarian rulers at bay, to fight them for every inch, because in the end the light always wins, and Gwangju (meaning the City of Light) continues to shine not only as a beacon of liberal democracy but for the Korean people, but for people around the world. In the recent Hong Kong uprisings (Fall of 2019), student led protests on South Korean campuses called for the support of the Hong Kong democratic protestors. There were even clashes on South Korean campuses between South Korean students and Chinese exchange students (now 70,000 in South Korea). The Hong Kong democratic protestors even sang the famed "March” song of the Gwangju Uprising throughout the streets of Hong Kong. Gwangju, the City of Light, shines on as a leader of liberal democracy in East Asia. It is our responsibility to not only not forget the sacrifice, but to keep its promise with our own. A new generation of leaders is needed to fight this new wave of authoritarian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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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모] 2020 제7회 한강건축상상전 나의 한강 사용법(My Hangang River Manual)※ 공모 요강표 공모방법 공모명 2020 제7회 한강건축상상전 나의 한강 사용법(My Hangang River Manual) 지원자격 누구나 참여가능 (일반인 부문/ 전문가 부문) -일반인 부문: 일반 시민 누구나(다양한 관점에서 아이디어 구성에 초점) (자유로운 V-log, 다큐, 그래픽, 드로잉 등 건축적 해석 미포함 가능) -전문가 부문: 전문가(대학생 포함, 건축/ 조경/ 토목/ 디자인 분야 등) 전문가적 창의성 및 실현가능성 반영 (3D모델링, 공간/시설 디자인 등 건축적 해석을 포함한 영상) 공모내용 한강을 사용하는 재미있고 창의적인 방법(상상) ① 한강을 즐기고 이용하는 참신한 아이디어(수변공간 활용, 도시경관, 다양한 활동 등) ② ’한강에 ○○○○가 생긴다면‘에 대한 상상(공간, 시설, 가로시설, 프로그램 등) ③ 코로나19 상황에 대처하는 한강을 이용하는 방법 ④ 그 외 한강을 키워드로 한 재미있고 창의적인 상상 접수 · 제출 참가 신청 기간 2020.7.30.(목) ~ 2020.9.16.(수) 방법 이메일 접수: office@hangangrivr.kr 제출 서류 1. 참가 신청서, 참가작 설명서, 참가 동의서 각 1부 「서식 1~3호」 2-1. 영상 원본파일 (1분 이상 3분 이내 동영상) ※ 파일형식: AVI, WMV, MP4 / 용량 500MB 이내 해상도: 화면비율 16:9 (1920픽셀×1080픽셀 이상, FHD)2-2. 드로잉 원본파일 (A3용지 사이즈 420㎜×297㎜ 1~3장) ※ 제출형식: jpg, png 등 이미지 파일 / 용량 100MB 이내 선정 선정절차 접 수 ⇨ 심사 및 선정 ⇨ 전시 2020.7.30.(목) ~ 2020.9.16.(수) 2020. 09. 25. (금) 결과발표 예정 10월 중 선정심사 2020 제7회 「한강건축상상전」 나의 한강사용법 공모전 심사위원회 (내·외부 전문가로 별도 구성) 심사기준 공공성, 독창성, 예술성, 실현 가능성, 전시 적합성 등 *부문별 배점 상이 유의 준수사항 ※ 응모작품은 순수 창작물이어야 하며, 최종 선정 이후라도 모작(위작) 등의 논란 발생 시 수상이 취소됨 ※ 영상 및 드로잉은 공공장소에 상영(전시)되는 점을 감안하여 표출에 적합한 내용으로 제작하여야 함 ※ 저작권이나 초상권에 대한 모든 책임은 출품자(창작자)에게 있으며, 선정된 이후라도 이와 같은 사실이 밝혀질 경우 해당 수상 취소 및 지원금이 환수됨 ※ 당선 후 별도의 약정기간 동안 공익적 목적의 전시, 홍보를 위한 영상 및 이미지 사용을 승인함 ※ 응모작품 및 참가작 설명서에는 참가자를 인지할 수 있는 인적사항 등 기재 불가 - 영상: 제목화면 흰색바탕 중앙에 작품명(검정색, 50포인트, 굴림체 굵게)만 표기 - 드로잉: 표지 미작성 ※ 기타 문의사항은 한강건축상상전 운영사무국 02-322-5670 로 연락 주시기 바랍니다. 「서식 1호」 2020 제7회 한강건축상상전 ‘나의 한강사용법(My Hangangriver Manual)’ 참 가 신 청 서 접수번호(※공란) 참여부문 일반인 부문 ( ) 전문가 부문 ( ) 기 본 정 보 성 명 연락처 휴대전화) 이메일) 주 소 생년월일 팀원(참가자) 명단 성 명 생년월일 연락처 성 명 생년월일 연락처 성 명 생년월일 연락처 참여 동기 본인은 서울특별시 2020 제7회 한강건축상상전 ‘나의 한강 사용법(My Hangang River Manual)’의 공모 내용을 숙지하고 위와 같이 참가 신청합니다. 2020 년 월 일 신청자 (서명 또는 인) 서울특별시장 귀하 ※ 제출서류 1. 참가 신청서, 참가작 설명서, 참가 동의서 각 1부 2. 영상 또는 드로잉 원본파일 ※ 모든 자료는 주어진 양식에 작성하되 필요에 따라 변경작성 가능 ※ 공모에 팀을 구성하여 참가하는 경우 ‘기본정보’에 대표자 사항을 기입하고 팀원(참가자) 명단을 작성하며, 개인으로 참여하는 경우 ‘팀원(참가자) 명단’ 란은 작성하지 아니함 「서식 2-1호」 2020 제7회 한강건축상상전 ‘나의 한강사용법(My Hangangriver Manual)’ 참 가 작 설 명 서 (영 상) 접수번호(※공란) 영상제목 및 주제 (키워드) ※ 영상 제목 및 주제, 영상 컨셉에 대해 간략하게 적어주세요 ◦ 제목: ◦ 주제: ◦ 대상지: 영상 이미지 ※ 영상의 스틸 컷 이미지를 넣어주세요 영상설명 ※ 영상의 한강건축상상 기획의도 및 세부내용을 기재해주세요 ◦ ◦ ◦ ◦ ※ 서식 안에 자유롭게 기재하시되 필요에 따라 변경 또는 추가하여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서식 2-2호」 2020 제7회 한강건축상상전 ‘나의 한강사용법(My Hangangriver Manual)’ 참 가 작 설 명 서 (드로잉) 접수번호(※공란) 그림제목 및 주제 (키워드) ※ 그림 제목 및 주제,장소 그림 컨셉에 대해 간략하게 적어주세요 ◦ 제목: ◦ 주제: ◦ 대상지: 그림 이미지 ※ 드로잉 스캔본을 첨부해주세요 그림설명 ※ 드로잉의 한강건축상상 기획의도 및 세부내용을 기재해주세요 ◦ ◦ ◦ ◦ ※ 서식 안에 자유롭게 기재하시되 필요에 따라 변경 또는 추가하여 작성하시기 바랍니다. 「서식 3호」 2020 제7회 한강건축상상전 ‘나의 한강사용법(My Hangangriver Manual)’ 참 가 동 의 서 본인은 서울특별시 2020 제7회 한강건축상상전 「나의 한강 사용법(My Hangang River Manual)」 공모에 참여하고자 관계서류 등을 제출함에 있어 다음과 같이 제반사항을 준수할 것을 동의합니다. 1. 서울특별시에서 정한 공모사항에 대한 모든 내용을 준수할 것이며, 모든 관련 증빙서류는 성실하게 작성·제출하겠습니다. 만약, 허위·과장된 제안내용이 발견될 시에는 어떠한 불이익과 처분도 감수하겠습니다. 2. 응모작품은 본 공모를 위해 제작한 영상 또는 드로잉으로 타인의 저작물을 활용하지 않았으며, 영상 및 드로잉은 제출규격을 준수하는 한편 공공장소에 전시되는 점 등 전시 환경을 충분히 고려하여 전시 표출에 적합한 내용으로 계획, 제작하였습니다. 3. 서울특별시에서 제시한 공모절차 및 평가기준 등을 확인하였고, 심사위원 구성과 평가방법, 평가결과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4. 제출한 작품의 저작권은 창작자에게 귀속하며, 서울특별시는 공익적 목적의 전시, 촬영, 홍보를 위한 저작물의 사용권을 갖는다는 것을 확인하고, 이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습니다. 2020 년 월 일 동 의 자(신청자) : (서명 또는 인) 서울특별시장 귀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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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 관련 사항 청와대 건의6월 22일 박병훈 전 진도문화원장은 청와대에 아리랑의 어원, 성격 등에 대하여 건의했다. A4용지 3쪽 분량의 ‘대통령님께 올리는 건의서’에 의하면 "국가적 축제에서 애상적인 내용이 쓰이는 것은 지양되어야 한다”라고 건의했다. 문건에는 한스런 곡조의 ‘이별의 노래’라는 성격이 고착된 것은 영화<아리랑> 주제가에서 비롯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고 그 사설 7편을 제시했다. 이어 어원에서도 이별을 뜻하는 ‘我難離說’ 외 7종의 설을 제시했다. 이에 대해 만가(輓歌), 상여소리’ 기원설 등에 의해 형성된 결과라고 주장했다. 그 실례를 "옛날 전념병 예방 때부터 부적에 쓰여져 있기도 하다”고 했다. 이런 이유로 1964년부터 남북단일팀 단가로도 불리고, 광화문광장의 ‘아리랑페스티벌’이나 백두산에서 남북정상이 함께 하는 아리랑 합창 등에서 애상적이고, 한스런 곡조와 사설이 불리는 것은 마땅하지 않다며 유념해 달라는 청원이다. 박병훈 전 진도문화원장은 현재 (사)진도아리랑보존회 회장으로 2019년 제1회 ‘아리랑코리아’대상 수상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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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의 힘으로 ‘코로나’ 고개를 넘다아리랑의 힘으로 ‘코로나’ 고개를 넘다 안상윤 /편집위원 문경새재는 조선시대에 ‘과거 길’로 부르던 곳이었다. 영남의 수재들이 과거 시험을 보기 위해 한양으로 가던 길목이었다. 새재(鳥嶺)를 넘어 충청북도를 거쳐 경기도 이천으로 들어갔다. 당시 사람들은 삼삼오오 패를 이뤄 하루에 30km 정도 걸었다고 전한다. 부지런히 걸으면 한양까지는 대략 경남에서 20일, 경북에서는 보름 정도 걸렸을 것으로 계산된다. 과거에 합격한 사람의 희소식은 사람이 도착하기 전에 소문이 먼저 전해졌다. 그래서 지명이 ‘경사를 듣는다’는 의미로 ‘문경(聞慶)’이라 정해졌다. ‘문경새재’는 기쁨 외에 슬픔과 고난의 의미도 지닌다. 민요 ‘아리랑’에 등장하면서부터이다. 아리랑의 노랫말,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는 ‘고난을 극복한다’라는 의미를 갖는다. 고개를 넘어가는 힘든 과정이 고생을 견디며 마침내 이겨내는 모습과 닮은 까닭일 것이다. 아리랑 민요에서 ‘고개’는 수난을 상징하고 그것은 어김없이 극복의 대상이 된다. 그런 연유로 모든 아리랑 노래의 후렴에는 "아리랑 고개를 넘어간다.”가 붙는다. 아리랑은 노래 그 이상의 역할을 해 왔음을 알게 한다. 실제로 1930년 대에 천연두가 온 나라를 덮쳤을 때, 민중은 아리랑 가사에 "종두(種痘)를 맞고 천연두를 이겨내자.”는 내용을 담아 전파한 선례가 있다. ‘아리랑 고개’는 문경새재를 일컫는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간다.”, "할미성 꼭대기 진을 치고/ 왜병졍 오기를 기다린다.” 등의 기록에서 보듯, 아리랑의 역사를 다룬 문헌에 문경새재가 언급되면서 문경새재가 아리랑의 실지(實地)임을 확인한다. 아리랑의 시초는 경복궁과 관련이 있다. 1865년 고종의 생부(生父)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98)이 풍양 조씨, 안동 김씨 등 세도가문들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상징적 조치로 경복궁 중건에 나선다. 국가 재정이 어렵던 시절 대원군은 7,225칸 규모의 왕궁을 지으면서 백성들의 원성을 샀다. "땡전(當錢) 한 푼 없다.”는 유행어를 야기한 ‘당백전當百錢’을 주조해 실질가치보다 백 배나 높은 명목가치를 지니게 만들어 그 차액으로 부족한 재원을 확보하려는 계산에서였다. 이 시기 문경 새재의 박달나무들이 있는대로 베어져 경복궁으로 공출된다. 공사장 각종 도구의 자루로 쓰였기 때문이다. 또한 반강제적으로 부역인들도 동원되었다. 이들이 모두 1017m 높이의 조령산(鳥嶺山)과 1106m 높이의 주흘산(主屹山) 사이에 난 새재를 넘어갔다. 조령산은 ‘새도 쉬어갈’ 정도로 높고, 주흘산은 ‘중악(中嶽)’이라는 별칭답게 나라의 기둥이 되는 산'이다. 이 새재를 넘어 충청북도와 경기도를 거쳐 한양으로 향하면서 ‘문경아리랑’이 만들어졌다. 경복궁 공사에 동원된 삼남 출신들이 고단함을 덜기 위해 부른 이 노동요 성격의 ‘문경아리랑’이 일꾼들 사이에 퍼지면서 전국으로 파급되었다. ‘아리랑고개’는 경복궁 중건을 매개로 문경새재에서 연유한 시어(詩語)인 것이다. 1896년 고종의 외무 특사이던 H. B. 헐버트(Homer Bezaleel Hulbert/1863~1949) 박사는 서양 악보에 가사를 채록해 알파벳으로 남겼다. "문경새재 물 박달나무 홍두깨 방망이로 다 나가네.”라는 노랫말이었다. 이후 새로운 아리랑들이 생겨나 나라 전체로 파급시켰다. 정든 조국땅을 떠나 이역만리를 헤매야 했던 디아스포라(Diaspora)들도 ‘광복군 아리랑’, ‘북간도 아리랑’, ‘치르치크 아리랑’ 등 자신들의 처지에 맞게 노랫말을 지어 아리랑을 불렀다. 아리랑은 민족으로 하여금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게 해준 힘이었다. 아리랑은 2012년 유네스코 인류 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문경시가 수집한 국내외 아리랑 노랫말은 10,068 수에 이른다. 최근 문경시는 단산에 아리랑기념관을 지어 아리랑의 모든 역사를 보존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해마다 아리랑 축제가 전국 곳곳에서 개최된다. ‘문경새재아리랑제’도 2008년부터 열리고 있다. 2020년에는 코로나 상황임을 감안해 아리랑의 힘으로 역병을 이겨내자는 취지로 6월 13일에 축제 행사를 가짐으로써 다른 축제들과 차별화를 보였다. 새재도립공원에 마련한 야외공연장에서 고구려 부여 동예 등이 하늘에 지내던 ‘동맹영고무천(東盟迎鼓舞天)’ 유습(遺習)을 빌려 쑥을 피운 채 춤추고 노래하고 땅을 밟으며 힘을 구하는 의식이었다. 2020년을 강타하고 있는 ‘코로나 19’ 고난을 다시 아리랑 정신에 기대 이겨내자는 몸부림이었다. 한민족이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집단 정서를 가동해 상생의 기운을 얻어온 저력의 중심에는 늘 아리랑이 있었음을 반영한 기획이었다. 지금 추세로라면 조만간 90년 전 ‘종두선전(種痘宣傳) 아리랑’의 경우처럼 ‘코로나 극복 아리랑’이 등장할 수도 있어 보인다. 아리랑은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하나이면서 여럿이다. 상황에 맞게 자기 복제를 계속하는 프랙탈Practal 이론의 전형에 속한다. 앞이 뒤를 끌어주고 뒤가 앞을 밀어주는 모양새다. 아리랑은 노래 그 이상이다. 한국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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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 이춘목"저는 어려서부터 국악을 배웠습니다. 그때는 어떤 특별한 계기가 있거나 배우고 싶어서 시작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이것이 내 평생 직업이라는 생각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20대에 들어 우연히 배운 ‘소리’는 제 삶을 서서히 지배해 나갔습니다. 사실 저는 소리가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그저 선생님의 가르침대로 한 걸음, 두 걸음 소리에 다가가며 지금에 이르렀습니다. 35년간 서도소리를 업으로 살아 온 인생, 지금 돌아보면 참으로 행복합니다. 김정연 선생님께서 걸어오신 그 외롭고 힘들었던 길, 선생님께서 작고하실 때까지 불태웠던 예술혼을, 미약하지만 제자로서 그 맥을 잇고 싶었습니다.” 이춘목 선생은 서울 종로구 운니동에 있던 국립국악원 부설 국악사 양성소(현재 국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국립국악원의 단원으로 있던 21살 때 김정연 선생의 전수자로 서도소리에 입문하게 되었다. "당시 김정연 선생님께서 저희 국악원에 오시게 되어 처음 만나 뵈었어요. 저는 당시 피리, 가야금, 민요, 판소리, 무용 등 다방면에서 국악 공부를 계속 해왔기 때문에 처음 선생님으로부터 서도 소리를 배웠을 때 그리 낯설지는 않았어요. 당시 선생님께 맨 처음 배운 서도소리가 ‘초목이’였는데, 제 이름인 ‘춘목이’와 비슷해서 선생님을 비롯한 주변에서들 저를 ‘초목이’라고 불렀어요. 그렇게 운명처럼 서도소리와 맺게 된 인연이 지금까지 계속 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춘목 선생은 1972년부터 서도소리 예능 보유자였던 김정연 선생님께 전수를 받기 시작해 수년간의 이수 과정을 거쳤으며, 전수 조교의 직분까지 맡으며 서도소리의 맥을 이어갔다. 그리고 2001년 11월, 그는 스승인 김정연 선생님에 이어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 서도소리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이는 서도소리로, 우리 전통 소리의 발전과 보급에 희망을 주는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평안도·황해도 등 관서 지방의 향토 가요인 ‘서도소리’의 맥 이어 서도소리는 중요무형문화재 제29호로 지정되어 있는데, 서도민요인 ‘수심가’와 시창인 ‘관산융마’, 그리고 ‘배뱅이굿’ 등이 그 지정 종목이다. 장학선과 김정연·오복녀 등 제1세대 보유자들은 모두 작고하였고, 현재 이춘목 선생을 비롯해 이은관·김광숙 이 3명이 서도소리 보유자로 지정되어 활발한 활동을 해오고 있다. 서도민요란, 황해도와 평안도 지방의 민요를 말한다. 5도 위에 3도를 쌓은 음으로 남도민요에 비해 청이 높고, 중간 음에서 격렬하게 떨면서 숨 가쁘게 몰아치다가 하강하는 창법이 특징이다. 이 창법은 길게 떨리는 소리로 이어지면서, 마치 한이 서려있는 듯한 색다른 여운을 준다. 그래서 서도민요는 미묘한 꾸밈음이나 서도민요 특유의 조름목 등을 악기로 나타내기 어려워, 노래를 할 때에는 기악 반주가 거의 들어가지 않는다. 대체로 서도민요의 특징은 콧소리로 얕게 탈탈거리며 떠는 소리, 큰소리로 길게 뽑다가 갑자기 콧소리로 변해 조용히 떠는 소리 등 장식음에 있으며, 기악 반주가 곁든 것이 적고, 채보된 곡이 드물다. 서도소리를 들어 본 사람들은 "서도소리는 옥구슬이 구르듯 맑고 청아하면서도 인간의 한과 서글픔이 담긴 듯 애절함이 느껴지는 소리”라고 말하고들 한다. 서도의 정서가 담긴 소리, 말을 길게 질러내는 ‘수심가’가 대표적 "서도 소리는 나름대로 상당한 멋과 매력이 있어요. 관서 지방(황해도·평안도)의 소리다 보니, 흔히 듣는 소리도 아니며 소리 자체에 한이 들어 있는 듯 떨리는 음이 많고 깊은 울림이 느껴집니다. 북쪽 지방은 아무래도 산이 많고 바다가 많아서 사람들의 기질이 다소 억세고 과부가 많았다 합니다. 또 북방 이민족의 결탁으로 벼슬을 못 받고 어렵게 사는 사람들이 많았죠. 따라서 이런 서러움과 한이 섞여 있는 소리가 바로 서도소리죠. 또한 ‘서도소리는 대동강 물을 먹어 보고 해야 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어려운 소리로 꼽힙니다.” 흔히 소리를 이야기할 때 ‘남南의 육자배기, 북北의 수심가’라 한다. 육자배기가 남도민요를 대표하는 것처럼 수심가愁心歌는 서도민요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다. 서도민요뿐 아니라 ‘공명가’, ‘영변가’와 같은 서도 잡가까지도 끝을 여밀 때는 반드시 수심가조로 끝나는 공통점이 있다. 서도소리는 짧은 장절형식章節形式으로 된 민요와, 좀 긴 통절형식通節形式으로 된 잡가, 길게 뻗으며 한시漢詩를 읊는 시창詩唱 등이 있으며, 민요는 평안도민요와 황해도민요로 나뉜다. 서도소리의 선율은 흔히 ‘수심가토리’라 하여 위의 음은 흘러내리고, 가운데 음은 심하게 떨며, 아래 음은 곧게 뻗는 특이한 가락으로 되어 있는데, 느리게 부르면 구슬픈 느낌을 준다. 평안도민요에는 ‘수심가’·‘엮음수심가’·‘긴아리’·‘안주애원성’ 등이 있는데, 이 중 서도의 정서가 담긴 소리말을 매우 길게 질러내는 ‘수심가’가 대표적이다. 황해도민요에는 ‘긴난봉가’·‘산염불’·‘자진염불’·‘몽금포타령’ 등이 있는데, 이 가운데 ‘정情의 노래’라는 뜻의 ‘난봉가’와 ‘산염불’이 특히 유명하다. 잡가에는 ‘공명가’·‘사설공명가’·‘적벽부’·‘초한가’·‘관동팔경’·‘추풍감별곡’·‘관산융마關山戎馬’ 등 앉아서 부르는 좌창坐唱이 있는데, 이 중에서 ‘공명가’가 가장 유명하다. 시창으로도 분류되는 ‘관상융마’는 조선 정조 때 신광수가 지은 한시를 시창 비슷하게 읊는 것으로, 매우 유창하고 꿋꿋한 느낌을 준다. 공연, 제자 양성 등 서도소리 보존과 전승에 전력 다할 것 국내에서 활동 중인 예능 보유자가 단 3명으로, 전통 소리 가운데 가장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분야가 바로 서도소리이다. 예전에 관서 지방에서 활발하게 전승되던 서도소리는 해방 후 남북으로 분단되면서, 피난 온 소리 명창들이 낯선 타지에서 그 맥을 어렵게 전수하며 우리 고유의 전통을 조심스레 지켜 오고 있다. "서도소리는 본 거지인 황해도와 평안도 등 북한에서는 이미 없어진 지 오래된 소리입니다. 현재 서도소리는, 서도소리보존회를 중심으로 일부 소리 명창들에 의해 겨우 유지되고 있습니다. 우리의 전통문화이며 아름다운 소리인 서도소리가 후세에 맥을 잇기 위해서라도 정부 차원의 관심과 지원이 필요합니다.” 어느 새 소리 인생 35년을 맞은 이춘목 선생. 그는 끝으로 "요즘 소리를 하려는 젊은 사람들이 거의 없고, 더구나 서도소리는 비인기 분야이지만 그만큼 희소가치가 있는 소리”라고 하면서, "앞으로 중요무형문화재라는 책임감과 자부심을 갖고 제자들을 열심히 가르치며, 서도소리를 원형 그대로 잘 보존하고 계승하여 세계적인 문화재로 만들 수 있길 기대한다.”며 청아한 목소리로 힘주어 말을 맺었다. ▶글 : 허주희 ▶사진 : 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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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칼럼] 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은!그래서, 문경새재아리랑은! 기찬숙 아리랑학회 이사 아리랑은 하나이면서 여럿이고, 여럿이면서 하나이다. 같으면서 다르고, 다르면서 같다. 또한 옛것이면서 오늘의 것이고, 오늘의 것이면서 옛 것이다. 그래서 우리 아리랑은 전형적인 메타문화 (Meta Culture)이다. 아리랑은 중층적 유기체이다. 이미 있었던 것이 새로운 것을 있게 하고, 새로운 것이 이미 있었던 것을 다시 새롭게 한다. 그래서 동시적이고 역동적인 선후 관계의 양상을 띄며 변화와 지속이 이루어지며 계속 재생산 된다. 그래서 아리랑은 ‘자기복제에 의한 증식’ 프렉탈 이론의 실체이다. 아리랑은 모순적 복합성, 표면과 이면의 주제가 다른 양가성을 갖는다. 또한 보편성과 특수성과 통시성까지 내재하고 있다. 나아가 ‘부분의 합은 전체와 동일하다’에서 ‘전체는 부분의 합보다 크다’는 해석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앤섬(andsum)적 사고가 아니라, 트랜섬(transum)적 사고의 대상이다. 아리랑은 순전한 우리의 인문지리적 특성에 기인한 노래이다. 뚜렷한 봄 여름 가을 겨울이라는 4계의 풍토적 조건과 산·강·들·바다가 공존하는 지리적 조건이 문화를 받아 들이고, 가두고, 변화시킨다. 이러한 지속과 변용을 통해 아리랑은 구심력과 원심력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아리랑은 지역의 사투리가 투영되고, 노래의 시김새가 흐르는 대로 곳곳에서 형성된 노래이다. 아리랑은 민중적 비애와 한(恨)의 정조(情調)를 수렴하고, 권력에 대한 저항적 민중의지를 발현하고, 고통과 모순을 극복하는 미래 의식의 추동체이다. 그래서 아리랑은 민요, 노래, 그 이상의 노래이다. 모든 아리랑의 후렴에는 ‘아리랑고개’가 위치한다. ‘고개’는 역사적 수난과 고난을 상징하며 극복의 대상으로서 상정된 것이다. 그래서 모든 아리랑에서 반드시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라고 노래한다. ‘아리랑고개’는 아리랑과 고개의 합성어이다. 아리랑의 역사에 등장하는 고개는 ‘문경새재’이다. 새재의 박달나무가 공출되었고 삼남의 부역인들이 새재를 넘나들었다. 그래서 ‘아리랑고개’는 분명 문경새재에서 연유한 시어(詩語)이다. 문경새재는 경북 문경시 소재(所在). 백두대간 소백산맥 주흘산(主屹山)을 넘나든 이들의 고개다. 이들과 함께 고개를 넘나든 노래가 있으니 새재아리랑이다. 그래서 문경의 새재아리랑은 고개를 넘어 기쁜 소식을 듣는 이들의 동반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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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규 - 우리의 오랜 친구, 개1, 민중의 심리에 잠재된 개의 의미 개는 우리 민족에게 오랜 세월 동안 사랑을 받아왔던 동물이다. 그의 위치는 집을 지키는 수호신적인 기능뿐만 아니라, 죽어서 인간을 보신시켜 주는 희생양이기도 하다. 이러한 개의 속성을 바탕으로 하여 개의 의미는 여러 가지 상징을 부여받아 왔다. 개가 출현한 꿈의 경우는 법관쪾경찰관쪾경비원쪾신문기자쪾탐정가 등의 사건해결사로, 충복, 머슴 등의 경우는 개의 충성스러움을 뜻하기도 한다. 동시에 전염병이나 방해물을 상징하기 때문에 이중적인 의미를 나타내기도 한다. 개띠의 사주로는 天藝星(천예성)이라고 하여, 기예가 뛰어난 사람들이 많고 마음이 착하고 유순하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일찍부터 재물 운이 좋아 성공이 빠르며, 청렴하고 정직한 편이다. 남자는 색욕이 강한 편이고 호언장담을 잘하여 가정에 소홀 하는 경향이 많다. 구비문학을 통해서 살펴 본 개의 존재는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개가 전형적인 忠(충)의 실천적인 동물로 표현되어 있으며, 이러한 이야기가 개관련담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로는 주로 속담에 나타나는 것으로 비천한 개의 본성을 통해 인간의 그릇된 성질을 나타내고자 하는 것이다. 설화를 중심으로 할 때 개는 미물이기는 하지만 주인에게 충성을 바치는 상징적인 존재물로 부각되어 있다. 개가 그러한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개무덤형 전설>의 유포와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이와 유사한 형태의 이야기까지도 형성하면서 전승을 이루었다. 이러한 이야기의 형성은 개의 속성이 사람을 잘 따른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했다고 생각된다. 이외에도 개는 악한 사람에 의해 저질러진 사건을 해결하는 수사관적인 위치에 놓여진 이야기도 있는데, 이 역시도 개가 후각을 통해 물건을 잘 찾아내는 본성과 관련되어 형성된 것이다. 민요의 경우는 낱말의 유희요와 같이 개의 반복을 통한 개타령도 있으나, 대개는 정요(情謠) 형태의 내용을 취하고 있다. 즉 여자가 임을 기다리는 심정을 바탕으로 개가 이것을 방해한다는 일종의 심리적인 미움의 대상으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개의 역할은 임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밤중에 집으로 접근하는 일반인을 경계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개의 상징은 절대적인 미움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임을 기다리는 여인의 심리적인 상황을 노출하는 의미 상징으로 활용되고 있다고 평가된다. 속담에서도 개의 본성을 바탕으로 한 내용이 대부분이며, 이러한 비유는 원초적으로 사악하거나 멍청한 행동을 하는 사람을 나쁘게 말할 때 사용되는 특징이 있다. 따라서 개의 본성, 예컨대 똥을 먹는다거나 흙구덩이에서 노는 습성들이 속담의 형성에 직접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개의 존재는 부정적인 면보다는 긍정적이며 인간에게 매우 친근한 동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인간세계에 오래 전부터 소속되어 왔기 때문에 개에 대한 인간의 관심이 그 만큼 높다는 것을 증명하는 좋은 예이다. 그러나 현재 인간들의 생활공간이 변화되면서 개의 육체를 인위적으로 변형시키는 작태를 벌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아파트의 공간에서 개를 못 키우게 하고 있는데, 이를 위해 개의 성대를 잘라 버리는 수술이 유행하고 있음을 들 수 있다. 2,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개와 관련된 말들 중에는 좋은 말보다 나쁜의미로 사용되는 말이 많다. '말도 안되는 무슨 개 같은 말’이냐고, 또 ‘개 같은 짓’을 한다며 비상식적인 일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한다. 형편없이 나쁜 상황을 개 같은 일이라고 비유하기도 한다. 개떡이란 말도 있다. 심하게는 욕을 할때도 개 같은 ××란 말로 남을 비하하기도 한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자’ 라는 말에서도 개같이 번다는 뜻의 의미는 별로 좋은 뜻은 아니다. 이처럼 개와 관련된 말을 하면서 고상해지는 경우는 없다. 3, 우리의 일상생활 중 개는 사람들을 위해 충복의 역할을 한다. 먹을 것도 사람이 먹다 남은 것을 먹는다. 도둑이 들어오지 못하게 주인 없는 집을 지키고 노인분들에게는 친구가 되어주는가 하면 맹인이 길을 걸을 때 길을 안내하기도 한다. 사냥할 때는 사냥감을 찾아 주기도 한다. 마약탐색도 해 주고 범죄 수사시 많은 활약을 한다. 최근에는 사람들의 취미생활을 위해 다양한 모습으로 즐거움을 주고 있다. 심지어 배가 고프거나 영양이 부족한 사람들을 위해서는 살신성인의 역할로 잡아 먹히기까지 한다. 죽어가는 주인을 위해 수건에 물을 적셔와 회생시켰다는 일화도 있다. 개는 인간을 위해 하지 않는 일이 없을 정도로 고마운 일을 많이 한다. 사람들이 개를 넣어 좋지 않은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을 때면 개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 개들이 뭘 그리 잘못했다고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개자를 넣는지’하고 억울해할 것이다. 4, 개는 꼭 필요한 일을 위해 짖는다. 생각해 보면 동물이 소리를 낼 때 운다고 하고, 노래한다고 표현한다. 새가 울고 꾀꼬리가 노래하고, 여우도 운다고 하지 짖는다고 하지 않는다. 새도 여우도 닭도 짖는다고 하지 않는다. 개는 노래한다고, 운다고 하지 않는다. 짖는다는 표현은 개에게 붙이는 대표적인 수식어다. 개가 짖는다고 한다. 왜 개는 짖는다고 할까. 사전을 찾아보면 ‘짖는다’는 지껄이다를 농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이 일상 말하는 것을 농으로 표현하면 짖는다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용될 때는 그런 의미로 상용되지는 않고 있다. 개는 세가지 경우에 짖는다. 도둑이 들어왔을 때 짖어 겁을 먹게 하고, 도둑이 들어 왔음을 주인에게 알린다. 또 주인이 왔을 때 반가워서 짖는다. 그 어느 경우가 헛소리로 해석될 것인가. 개는 가장 중요하고 필요할 때 짖는다. 도둑을 물리치거나 마약탐색을 하는 개들의 행위는 매우 의미있고 보람있는 일이다. 눈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인도하는 것은 약자를 위한 숭고한 일이라고까지 할 수 있다.그 같은 일을 어느 누가 개같은 짓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올해는 개의 해다. 개만도 못한 놈이라고 하지 말자. 개는 다산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태어난 자기 자식도 열심히 키운다. 우리 개의 해에 다같이 개같이 잘 살자. 무엇인가 열심히 자기 몫을 다하는 개처럼 뛰자. 개는 꼭 필요한 일을 위해 짖는다. 우리사회가 지향하는 평등하고 누구나 행복을 누릴 수 있도록 꼭 필요하고 보람된 일을 위해 개처럼 열심히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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