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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으로 남북을 잇는 최신아예술단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Pick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두번째 인터뷰어는 함경북도 청진 예술대학을 졸업하고 함경북도예술단에서 활동한 최신아예술단 최신아 (1969년생)단장을 국악신문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기미양-안녕하세요, 먼저 통일부에서 통일교육위원으로 위촉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축하합니다. 최신아 선생님, 북에서 대한민국에 온지 얼마나 되었나요? 최신아-네, 감사합니다. 아마도 북한에서 오신 분들 중 통일교육위원으로 임명을 받은 사람은 제가 처음인 것 같습니다. 한국에 온지 10년이 안되었지만 제가 이룬 성과 중 가장 기쁜 일 중 하나입니다. 2012년 봄에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처음에 와서 고생 많이 했습니다. Q.북한에서 한국에 온 이유는? A. 저는 함경북도 예술단 예술 감독을 26년 역임했습니다. 그러나 예술가로서 표현의 자유가 인정되는 한국에서 작품 활동을 하기 위해 탈북을 했습니다. 우연히 중국에 나왔다가 인터넷에서 남한 방송을 보게 되었습니다. 남한 땅에 평양예술단이 있다고 해 보니 진짜 순수한 북한예술단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는 보장받고 활동하고 있다는 것을 보고 짦은 순간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첫째 남한에 가서 진짜 최승희 무용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둘째 북한에서 예술가는 자유로운 표현을 할 수 없다는 점에서. 저의 이름을 걸고 나만의 고유한 예술세계를 완성하고 싶었습니다. 셋째.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귀멀고 눈멀고 살아야 하는 아이들과 함께 자유민주주의가 있는 남한에서 자유인으로 살고 싶었습니다. Q.중국에서 직접 한국에 왔나요? 오면서 힘든 고비를 어떻게 넘겼나요? A. 네, 저는 2009년 북한에서 여권을 떼고 중국에 와서, 태국으로 넘어가서 3개월 후 한국에 가기 위해 죽음의 사선을 넘고 넘었습니다. 북한에서는 펼칠 수 없는 순수한 예술을 위해, 저희 예술가의 꿈을 이루기 위해 떠났는데, 당시 검열이 너무 심할 때인지라 검열관이 내 앞에 서자 갑자기 말문이 막혀서 벙어리 역활을 했는데 그게 통하더라고요. 하늘이 도우셨다고 기도를 하면서... 곤명으로 와서 산을 6시간 타고 죽기 살기로 태국으로 건너 갔습니다. 거기서방콕을 거쳐 한국으로 무사히 입국하였습니다. 가파른 산 비탈길을 넘어야 하는데 당시 중국에서 만나서 같이 도망을 나온 어린 친구가 더는 못가겠다고 그냥 여기서 죽겠다고 땅바닥에 주저 앉아서 포기할 때, 같이 죽더라도 한국에 가야 한다고 그 친구를 부추켜서 붙잡고 오느라 땀이 어찌나 비처럼 쏟아지는지....간신히 고개를 넘고 넘어 태국까지 무사히 건너왔습니다. 거기서 대한민국으로 왔습니다. 드디어 죽을 고비를 수차례 넘기고 자유의 나라로 왔습니다. Q.나중에 큰 따님 강나라는 북한에서 어떻게 탈출했나요? 남겨진 북한의 딸은? 가슴 아픈 질문을 드리네요. A. 제가 한국에 와서 3년 만에 맏딸을 데려왔는데요. 늘 가슴 한구석에 딸에 대한 그리움으로 갈망하던 끝에 브로커를 통해 데려오게 되었습니다. 아직 오지 못한 막내딸 때문에 밤에도 제대로 못자고 있지만 함께 살 그날만 그려봅니다. 맛있는 음식 먹을 때마다 목구멍에 잘 안 넘억갑니다. 멋있는 옷도 사놓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꿈에서는 가끔 만나서 붙잡고 울고...자식 그리운 것은 말을 다 할 수 있을까요? Q.북한에서 무용가로만 활동하다가, 처음에 남한에 적응하기 얼마나 어려웠나요? A. 한국에 와서 3년 동안은 막막했습니다. 무용을 포기하고 자신을 치유하고자 하루종일 창가에서 십자수를 시작했습니다. 힘들게 한국에 왔지만 하나원을 나오니 직업이 없는 실업자가 되더라구요, 그래도 북한에서는 완벽한 무용가였지만 여기서는 그걸 인정해 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냥 무용을 포기하고 집에서 십자수를 하며 나 자신을 위로하고 식당에 나가서 알바로 생활비를 벌면서 살았습니다. 첫번째로 답답한 것은 이질화 된 남한의 문화극복이었습니다. 남한에서는 언어 소통도 힘들고 무엇을 사려고 해도 말(표현)이 너무 달라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너무나 없었습니다. 북에서 온 사람 중 주유소에서 전화 받는 일을 하다가 말귀를 못 알아들어서 1달도 못 버티고 식당에서 일을 해야만 하는 분도 많습니다. 돈을 북한에서 가지고 온 것도 아니고 빈손으로 왔는데 저희한테 주어진 것은 오직 실업과 빈곤이었습니다. 좌절도 했고 다시 북에 가고 싶은 생각을 하루에도 열 번씩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북한에서 태어나서 예술 활동을 하면서 남한에 와서 예술 활동을 한다는 것은 꿈도 못 꾸는 일이었거든요. 지금은 SNS를 통해 소통을 하고 있습니다. 많은 격려와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Q.탈북후 다시 무용가로서 기회가 주어진 것은 언제인가요? 대한민국에 와서 꿈은? A. 제가 2015년도에 7월에 한통의 전화가 오면서 그때부터 무용을 시작하는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국악방송국에서 진행하는 '국민대통합 아리랑'공연에서 전국 순회 공연에출연하면서 저라는 사람을 알리게 했고, 그로부터 최신아예술단 창단을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해에는 강남문화재단이 주최하는 759회 목요상설무대에서 ‘아리랑 아라리요 북에 보내는 편지‘를 발표하게 되어 주목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지역사회의 소외계층을 위한 기획공연을 통하여 많은 관심과 호응을 얻었습니다. Q. ‘최신아예술단’을 창단하시게 되는 계기가 궁금합니다. 소개도 해주세요 A. 최신아예술단은 2015년 11월에 창립됐습니다. 2012년 4월에 하나원 나와서 3년후 국악방송국 모 간부가 방송출연에 나와달라고 해서 북한에서 경력을 밝히고 난후 국민대통합 아리랑에서 장구춤을 선보인 후 격려와 용기를 받고 결심을 했습니다. 저의 이름 세 글자를 걸고 최신아예술단으로 만들어 현재까지 공연하며 오고 있습니다. 전통무용을 전공으로 한 대학 졸업생들로 오디션을 통해 5명의 인원으로 시작하였습니다. 현재는 무용을 전문으로 배웠던 분들도 계시고 또 대한민국의 살풀이 이수자분들도 계시고 초등부 학생들도 계시고 취미반도 있고 성인반도 있습니다. 그래서 무용을 정말 너무나 하고 싶었는데 체격이 안되거나 여러 가지 조건으로서 못했던 분들의 꿈을 키우기 위해서 저에게 배우러 오기 때문에 "최신아 무용연구소”라 하면 정말 대한민국에 없는, 한 동작 한 동작 체형에 맞게 연구하면서 배워주는 연구소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합니다. 현재 문하생들은 글로벌하게도 중국 유학생부터 조선족, 일본, 캐나다, 그리고 한국분들. 탈북인들을 대상으로 지도하고 있습니다. 특히 지방에서도 많이 오고 계십니다. 이제는 최신아무용연구소로 발전시켜서 현재는 예술단과 무용연구소를 겸하고 있습니다. 우선 남한에 오신 북한 출신 예술가들과 소통을 하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그리고 북한무용이나 최승희무용에 대한 연구에도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Q.처음 남한에서 섰던 첫 무대는 언제 어떤 무대인가요? 이후 특별한 무대는 A. 영광스럽게 광복 70주년 기념으로 아리랑 명인 이춘희 명창과 남도잡가 신영희 명창과 함께 하는 '2015국민대통합 아리랑 순회공연'을 성료하고, 2016년에는 괌에 초청돼서 북한무용을 보여주는 특별한 공연을 했고, 2018년에는 인도에 가서 ‘남북의 아리랑’ 주제로 투어공연을 하면서 북한무용의 진수를 알려왔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최근 사할린 동포들과 함께 하는 2019년 제3회사할린아리랑제입니다. Q.기사를 검색하니 최근 해외공연으로 사할린에 갔는데? 어떻게 해서 사할린아리랑제에 가게 됐나요? 북한 출신은 안보상 북한과 가까운 사할린을 가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A. 그해 4월 이미시문화서원(좌장:한명희) 주최로 열린 '3·1운동&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추념 음악회'에 최신아가 이끄는 최신아예술단이 출연해서, 선보인 최승희의 '장고춤'을 사할린 동포들이 본 것이 이번 초청의 기회가 됐습니다. 그 중 한 가족이 고향이 북한이라고 합니다. 이후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꾸준히 아리랑을 알려 온 아리랑학회 기미양 연구이사(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장)에게 사할린 동포들이 부탁해서, "사할린 동포들이 최신아 씨를 무조건 초대해달라고 했다"고 전해 듣고 가게 되었습니다. 가보니 북한이 고향인 분들이 적지않게 계시더군요. 1945년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한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시는 고난을 위로해드리고 싶었습니다. Q.2019사할린아리랑제 공연에서 어떤 작품을 선보이었나요? A.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 기획 측에서 북한의 대표적 무용 '쟁강춤' 선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북한 고유의 민족성이 담긴 쟁강춤은 북한 무용의 꽃입니다. 귀신을 쫓고 복을 맞이한다는 의미로 손에 부채를 들고, 손목에는 방울을 달아 '쟁강쟁강' 소리가 나는 '쟁강춤'은 최승희의 '무희춤'으로부터 이어져 온 대표적인 북한무용입니다. 남한 전통무용에 비해, 러시아 예술만 접해 온 동포들에게 우선 북한무용은 박자나 호흡 속도가 러시아 무용과 거의 비슷합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한국 전통무용과 북한무용이 한 무대에서 이루어져서 감동이었습니다. 한국무용가 영덕에서 오신 김옥순 무용가의 전통무용의 정적인 살풀이춤과는 대조적이어서 조화가 되었다고 봅니다. 다음에도 또 와 달라고 했습니다. 저 자신도 관객의 호응과 열기가 전해져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합니다. Q.70년 동안 우리는 남과 북이 갈라져 있다. 북한 무용가로서 사할린아리랑축제에 다녀왔는데, 예술가로서 역사적 의미를 부여한다면? A. 북한무용가로서 최승희 선생님이 최초로 사할린에 공연 갔는데, 제가 또 두 번째로 최승희 선생님의 뒤를 이어서 사할린에 가서 공연하고 왔다는 데 의의를 두고 있습니다. 그리고 남북통일에는 동포사회의 역활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분들이 "우리 가족은 북과 남에 흩어져서 살고 있다. 북에 공부하러 간 자식들을 마음대로 오고가지 못하고 있다. 다시 만나는 길은 남북통일 밖에 없다. 우리는 갈라져 있지만 하나의 민족이다"라고 하시면서, 저의 손을 잡고 눈물을 글썽거리셨습니다. 남북을 잇는 예술가의 길을 가겠다고 굳게 다짐을 했습니다. 제가 북한무용을 알리는 길도 통일에 기여한다고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북한무용을 전 세계에 알려야겠다는 꿈이 더 확실해졌습니다. 북한에서 무용가 입문경위 Q.언제부터 무용을 시작했나요? 계기는? A. 저는 평양에서 알아주는 예술가의 집에서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습니다. 어려서부터 배구를 좋아해서 초등학교에서는 스포츠 소조 활동을 하였습니다. 저희 학급이 2중 영예 붉은기 학급이 되어 배려로 평양학생소녀궁전 가야금 소조에 다니게 되었는데 제가 손가락이 아프다고 복도에 나왔다가 신명나는 장단소리가 나서 호기심으로 찾아 간 곳이 무용소조였습니다. 그러다 그 다음 해 우리 가족은 청진으로 추방을 당해서 지방으로 내려와 예술대학에 월반으로 입학해 본격적인 무용가의 길로 가게 되었습니다. 그때가 13살입니다. Q.해방후 남과 북은 민속예술도 이질감이 생겨났습니다. 북한 민속무용은 전통적 민족무용을 그대로 계승하지 않고 시대의 목적에 따라서 재창조 되어 민족적 색채를 지닌 현대적 계승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북한무용은 빠르기나 호흡이 전통무용보다 훨씬 빠릅니다. 재창조 되는 과정에서 사회주의 체제 나라 중 영향을 받았나요. A. 북한은 1950년 이후 가장 영향을 받은 무용은 우쿠라이나 발레입니다. 남한은 현대무용 하는 분들이 따로 있고 발레 하는 분들이 따로 전통 무용하는 분들이 따로 있어요. 남한은 더운 지역이다 보니까 빨리 추면 덥지 않아요. 그러니까 온유하게 천천히 부드럽게 그냥 우아하게 부드럽게 춤을 추지만, 북한은 아주 추운 지역이어서 가만히 있으면 춥기 때문에 항상 뛰어야 되요. 러시아처럼 발 동동 구르며.... 그런 식으로.... 춤이 역동적이고 카리스마 있으면서도 경쾌한 춤이 나왔기 때문에..... 전래되는 놀이문화를 봐도 남과 북의 차이점이라 하면 남쪽은 따뜻해서 온화하고 부드러운 춤사위가 살아있고, 북한은 추위가 강하니 강렬함과 역동적인 춤사위가 다른 것 같습니다. 북청사자놀음이나 밀양백중놀이를 비교해 봐도 확연히 드러납니다. Q.(남한과 비교해서) 북한무용의 특성에 대해 구체적으로 알고 싶습니다. 북한무용은 당의 문예정책에 의해 '민족적 형식과 사회주의 내용'을 주입시킨 시대적 변용에 의해 새로이 창출되었다고 하는데, 예를 든다면? A. 그래서 전 인민에게 노동을 장려하는 천리마 운동을 하는데 신나는 박진감 있는 박자가 어울리지요. 남측이 계승하고 있는 전통무용은 전혀 어울리지 않지요. 북한은 "인민의 민족적인 생활풍습과 정서가 짙게 반영되어 있는 예술형식의 하나”로 무용예술을 정의하기 때문에 민족무용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남한무용이 자신의 의도와 감성을 표현하기 위함이라면, 북한무용은 당에서 내려온 문예정책 안에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기에 예술적 사고의 확장을 위한 다양한 주제나 느낌을 표현하는 활동이 제한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장르로 이루어진 예술무용에 대한 심미안을 표현할 수 없습니다. 북한무용이 탄생한지 올해로 70년이 됩니다. 북한학으로 보지 않고, 시대적 문화변용(Acculturation)에 의한 예술을 바라보는 시각에서 새로운 평가가 필요하다고 봅니다. Q.북한무용을 한마디로 한다면? A. 북한무용은 한마디로 말하면 '최승희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 해방 이후 남북이 갈라지고 나서 북한은 사회주의로 길을 가면서 예술도 시대적 변화에 맞추어러시아 예술을 수용했습니다. 1950년대부터는 우리 전통무용을 근간으로 한 우크라이나 무용을 받아들이게 됩니다. 빠른 반주에 맞추어서 동작을 크게 하면서 우화함과 세련된 춤동작을 창작하여 왔습니다. 추운 지방의 특성을 살려 경쾌함과 역동적이며 빠른 톤으로 춤동작을 만들어 왔습니다. 그래서 북한 무용수들은 발레에서부터 모던댄스는 기본동작으로 배우고, 한국 전통무용을 전공으로 배우고 있습니다. 1960년대는 발레 기본과 최승희 선생이 정리한 '조선무용기본'을 통해 무용수들을 훈련해 왔지만, 1970년대 이후부터는 변화가 일어나서 '민속무용기본'을 만들어 무용수들을 훈련하고 있습니다. 남한의 춤 연구가 정병호 교수는 북한무용에 대해서 "대체로 움직임이 기계적이고 절도가 있으며 동작이 크고 빠른 동작이 많으며, 목이나 손목 동작은 유난히 각을 많이 만들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Q.무용가로서 가장 존경하는 무용가는 누구인가요? A. 제가 가장 존경하는 무용가는 예전에도 현재도 '최승희'선생님이십니다. 일제강점기 조선무용을 전세계에 알린 세계적 예술가이십니다. K-한류 1호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 동양인으로서 일단 쭉 뻗은 큰 키와 섬세한 맵시, 서구적 마스크와 유연한 품세를 그 누구도 따라갈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 나와서 더욱 자세하게 알게 된 보살춤 같은 창작작품은 환타지를 넘어 신비주의를 보여줍니다. 북한 무용의 발달 과정은 최승희의 영향을 받아 처음에는 일제시대부터 이어 온 신무용으로서 조선민족무용과 서양식 무용을 근간으로 당의 목적과 필요성에 의해 재창조 되고 있다. 1960년대 와서는"민족적인 형식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담으라”는 당의 문예정책에 부합하는 민속무용으로 개발되었으나 1970년대 이후부터는 혁명수행을 위한 수단으로 북한무용을 이끌어온 '피바다식 가극무용'이 공연되면서 지금의 북한민속무용을 형성하게 된 것이다. Q.북한에서 무용가로서 가장 기억에 남는 무대는? A. 저는 북한에서 김일성, 김정일을 모시고 무대를 한 적도 있습니다. 북한 전국무용대회 솔로(독무) 무대에서 15년 동안 1위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저는 무엇이든지 1등을 해야 하는 성격입니다. 다행히 달리기 수영 등산 등 대회에서 늘 상위권을 할 수 있는 체력을 타고 났습니다. 부모님께 감사하죠. Q.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무용을 사제자로 전수받은 탈북 무용가 최신아라는 타이틀이 붙고, 이병옥교수가 최단장을 최승희 무용정신을 계승하고 있다고 평가해주셨는데, 무용가로서 자신의 소개 부탁드려요? A. 탈북 무용가 최신아라는 타이틀은너무 과분한 말씀입니다. 북한무용 자체가 최승희 선생님의 무용정신을 이어 받았기에 거기에 저도 포함되어 있던 것 같습니다.저는 북한에서 예술대학을 졸업하였고, 그후 예술단에서 무용수로 한 26년간 활동하다가 남한에 온 지 11년이 됐어요. 최승희 춤 중 가장 자신있게 출 수 있는 춤은 사당춤, 장구춤, 쟁강춤입니다. Q.북한에서 최승희 무용은 누구에게 배우셨나요. 스승이 ‘최승희 무용’을 가르칠 때 최승희에 대한 설명을 어떻게 하셨나요? 북한에서의 최승희 무용가에 대한 평가는? A. 저희 담임 선생님이 최승희 선생님의 제자다 보니까, 최승희 선생의 사당춤을 배워줄 때 한마디 한마디 하실 때마다 최승희 선생님이 이런 표정을 짓고 이렇게 춤을 이런 형식으로 쳤다는 얘기를 많이 들려주셨어요. 그래서 북한에선 최승희 선생님에 대해 세 글자만 불러도 대단한 것입니다. 그때 당시에는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세 글자 외에는 그 누구의 이름을 부른다는 게 쉽지 않는 거였어요. 그래서 저희 때는 최승희 선생님이 활발하게 활약을 했다는 내용도 잘 몰랐어요. 남한에 와서 많이 알게 되었고 북한에서는 잘 모르고 살았던 것 같습니다. Q.남과 북의 춤을 비교하신다면 어떻게 다른가요? 무대에서 북한과 남한의 관객의 반응은 어떻게 다른가요? A. 남쪽은 무용은 워낙 더운 지방의 특색을 살려 우와하고 부드러운 춤을 추지만 북쪽의 춤은 강한바람과 추위를 이겨내는 고구려 정신으로 경쾌함과 역동적이고 아름다운 춤을 추고 있습니다. 북한은 형식적 박수를 치고, 남한은 자연스럼 감성에서 나오는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공연후에 꽃다발도 안겨주고 사인도 해달라고 한다. 모든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남한 춤사위는 화려하고 우와함이 있다면 북한은 화려하고 우와미가 있고, 거기에 다이나믹(역동성)이 하나 더 추가됩니다. 전체적으로 스토리가 있는 퍼포먼스가 완성되어야 합니다. 저의 개인적인 관점에서, 관객을 바라보는 남한 무용가의 시선은 무대에서 자기도취형이랄 수 있고, 북한 무용가의 시선은 반드시 시선을 관객과 눈이 맞추어야만 합니다. 관객을 끌고 가는 것이 첫째입니다. 북한 무용은 첫째가 관객을 의식해야만 합니다. 소통이 안되면 완성된 작품이 아닙니다. 그래서 북한은 얼굴표현이 아주 중요합니다. 연기력이 있어야 합니다. 관객의 호응을 못 받으면 무대에 서기가 쉽지 않습니다. 선전 선동의 기본이라고 하죠. Q.북한에서 전통무용 살풀이. 태평무를 배웠다는데 북한무용 춤사위 기본동작에 어떻게 반영되나요? A. 북한무용 춤사위 기본동작에는 살풀이 태평무를 위한 동작이 다 들어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앉기동작과 수건춤 동작, 뿌리치기 동작 등을 꼽을 수 있습니다. 문예정책에 의하면 북한의 무용은 이러한 민족무용을 근간으로 발전된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무용 의상도 전통한복을 기초로 창작됩니다. Q.최신아씨가 북한 대집단체조 공연에서 맡은 역할은? A. 저는 1993년 전승 40돐기념공연 대집단체조 (’대집단체조 아리랑 공연‘ 원조)에서 '기러기떼 날으네' 출연과 동시에 예술감독 역활을 맡았습니다. 작품은 '빈터에서 우리는 자랐다'와 '지새지 말아다오 평양의 밤아'에서 무용수로 참여하였습니다. Q.북한에서 30여년 무용을 하면서 무용가로서 북한 무용가의 자질은 한마디로 무엇인가? A. 무용가라 하면 ‘종합예술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무용가라고 하면 첫째 선율에 맞추어서 몸을 움직여야 하기에 음악을 받아들이는 음악적 청음(귀명창)이 발달해야 하고, 기본적 악기를 연주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장단(박자)을 따라갈 수 있기 때문입니다. 북한에서는 전통무용에서부터 발레, 현대무용을 배워야만이 무대에 설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신적으로는 이론적 단계까지 공부를 해서 무용론, 초리론, 무용표기법까지 완벽하게 마스터해서 소화를 해야만 아래 후배를 이끌 수 있습니다. 육제적으로는 체력을 강하게 만들기 위해 매일 하루도 안 쉬고 혹독한 연습을 해야만이 뒤처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그 어떤 장르의 예술인들보다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단련해야만 무대에서 제대로 된 작품을 보여줄 수 있습니다. 대부분 북한 무용가는 가무악을 겸비하고 있습니다. 장구 같은 악기 연주는 필수입니다. Q.주목되는 아리랑 작품이 있는데(아리랑환타지.서울아리랑) 어떤 계기로 만들었나요? A. ‘아리랑환타지’작품은 제이케이앤컴퍼니에서 피아노를 중심으로 한 앙상블과 함께 아리랑환타지 작품을 콜라보로 하자는 제안이 들어와서 보내준 음악을 듣고 결정을 했습니다. 20일 만에 창작하여 여수에서 공연을 하였습니다.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 선율에 세계인이 인정하는 신명나는 장구를 메고 장구춤을 형상화 했습니다. 남북의 통일된 모습을 상상하며 기쁨과 상생을 상상하며 화려한 부채와 신명나는 장구춤으로 창작하였습니다. 서울아리랑 작품은 국악방송 15주기기념 ‘기적의 아리랑’ 공연에서 소리아밴드와 함께 콜라보로 창작하여 만든 춤입니다. 대한민국의 아름다움이 담긴 긴부채를 꽃처럼 묘사해 행복한 모습을 서울아리랑 음악에 맞추어 춤을 창작하였습니다. Q.'서울아리랑' 작품을 하시면서 직접 부른 가사를 알려주세요 A. ‘그리운 강남’이라고 1930년대 나온 음악으로 아리랑을 부르며 고향으로 갈 그날을 그리며 창작하였습니다. 가사는 ‘정이월 다가고 사월이라네 강남갔던 제비가 돌아오면은 이 땅에도 또다시 봄이 온다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강남을 어서 가세’입니다. 여기서는 장사익 선생이 잘 부르는 곡이더군요. 이미 널리 알려져서 강남아리랑이라고도 하더군요, 그래서 서울아리랑 창작무의 주제곡으로 선정했습니다. Q.한국에 나와서 창작하신 무용작품들은 어떻게 만들었나요? A. 무용작품도 시, 소설과 같이 이야기를 만들어 주제와 내용을 국민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창작을 합니다. 대충이라는 단어는 안 통하는거죠. 그래서 그 어떤 동작을 넣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작가가 작품을 쓰는 것처럼...시놉시스를 구상하고 시나리오를 짜고, 주인공(배역을 맡은 무용수)들이 내용을 숙지하고 무용으로 옮기는 작업을 통해 하나의 창작작품이 탄생을 하는 거죠. 이 과정에서 며칠동안 잠도 안자고 안무를 구상합니다. 길을 가다가도 구상과 몸짓이 떠오르죠. 한국에 와서는 창작작품에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남한의 아름다우면서도 우아한 살풀이, 부드러운 선을 살리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북한의 역동적이면서 격동적인 무용을 배합하여서 5개의 작품을 창작하여 무대에 올렸습니다. Q.북한에서 가장 자신있는 당신의 레파토리(대표) 작품은? 지금 제자들과 무대에 오른다면 보여주실 수 있는 총 작품은 얼마나 되는가요. A. 북한에서 가장 자신있는 작품은 장구춤, 쟁강춤, 사당춤, 나의초소, 도라지춤, 물동이춤 등등입니다. 제가 무대에서 보여줄 수 있는 작품은 북한에서 배운 장고5인무. 쟁강춤, 사당춤, 장고춤과 제가 남한에서 발표한 창작무 서울아리랑, 아리랑환타지, 그리운강남, 임진강, 삼색부채춤, 매직춤입니다. 어림 잡아 10여 작품입니다. TV조선 '모란봉 클럽'에 출연했던 본인 작품 아리랑환타지가 유튜브에서 인기입니다. 이후 인기있는 작품은 역시 ‘서울아리랑’과 ‘아리랑환타지’ 작품입니다. 무용곡은 남북이 애창하는 민족의 노래 아리랑입니다. Q.현재 인기가 좋은 매직춤(사계절춤) 에 대해 관심이 많습니다. 어떻게 만든 것인가요? 남한에 와서 처음 안무를 맡은 작품이 있나요? 창작작품에 따라서 의상 디자인도 직접 구상했다는데 자세한 설명 듣고 싶어요. A. 제가 대한민국에 처음 도착하여 국정원에서 이 음악을 듣고 가사도 좋고 곡도 좋아서 제가 한국에서 무용을 한다면 꼭 이 음악 한국의 사계절을 담고 싶었서 창작을 하였던 것 같습니다. 남한에 와서 남원한복패션쇼에서 안무를 맡았습니다. 그리고 저의 모든 창작작품은 제가 디자인을 하고 의상사에게 맡겨 완성합니다. Q.최근 북한 예술가 중 가장 인기있는 모녀라고 하는데, KBS와 MBC, 전주 얼쑤 우리 가락과 부산 KBS 가요 1번지토크쇼, 남도 국립국악원공연. 최근 강나라는 드라마 ‘사랑의 불시착’ 실제 자문위원이었고, 어머니는 함경북도 예술단 예술 감독을 맡은 모녀가 MBN ‘대한민국 팔도명물인증쇼&에 나왔다는 방송을 보았습니다. 방송을 통해 북한문화예술을 어떻게 전달해 주고 싶으신지요? A. 제가 방송을 통해 알려줄 것은 우리의 문화예술의 뿌리는 하나다라는 것과 북한의 전통을 알아야 통일을 대비해 준비할 수 있는 것이라고 알려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북한무용의 다양성과 역동성이 무대에서 다이나믹한 효과를 줄 수 있다고 봅니다. 속도감이 빨라서 한국무용과는 차이가 나죠. 무대에서 정적인 한국무용과는 대비가 되어서 관객들의 호응이 높습니다. 일단 신선하고 새로운 장르이니만큼.......... Q.'이북5도무형문화재'는 황해도·평안남도·평안북도·함경남도·함경북도 북한 지역에 있는 5개 지역을 기반으로 한 19개의 종목문화재를 가리키는데, 현재 이북5도무형문화재 제1호 애원성에서부터 만구대탁굿, 돈돌날이, 두만강뗏목놀이소리, 제2호 평양검무 제3호 부채춤, 평안도 다리굿, 제4호 화관무. 제4호 평북 농요평안도 등이 등록되어 있습니다. 본인이 신청한 종목은 무엇인가요? A. 제가 3년전에 북한의 전통무용으로 "최승희 류 평양 장구춤” 종목을 신청했습니다. 평양장구춤은 최승희선생님의 장구무용을 북한의 최고 춤꾼인 홍정화 선생님이 승화 발전시켜 오늘날에는 공훈배우, 인민배우 급수시험작품으로 진행되고 있는 난이도가 높은 무용작품입니다. 앞으로 쟁강춤도 북한의 무형문화재로 만들고 싶습니다. 최근 황해도무형문화재 제4호 화관무 2020 정기공연이 코로나 사태로 인하여 지난 1월 20일 비대면 동영상 공연으로 진행되었습니다. Q.개인적으로 첫째. 앞으로의 계획은? 둘째, 통일부 통일자문위원으로서 통일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하실건지요? A. 아마도 무용가로서 무용은 제가 죽을 때까지 해야 하지 않을까요? 내 몸이 허락할 때까지 할 것 같습니다. 특히 저는 북한에서도 살아봤고, 남한에서도 살아 봤잖아요. 아마 저는 통일되면 남과 북에 예술인들을 이어주는 역할을 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남과 북의 무용을 승화 발전시켜 우리의 문화예술을 전 세계에 알리는 역할과 현재 운영하고 있는 최신아무용연구소가 발전되어 특수한 문화적 요건에 의해 탄생한 북한무용을 세계에 알리기 위한 글로벌 차원의 북한무용연구소를 만드는 것이 저의 꿈입니다. 한반도 민족유산을 지켜나가기 위한 노력을 해서 통일후 남북문화예술 발전을 위해 한걸음 뚜벅 나아갈 것입니다. Q.마지막으로 통일부 통일자문위원 최신아 선생에게 한가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사할린은 북한지역과 지정학적으로 오고 가기 쉬운 북러관계에서 다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1950년 이후 북한 노동자들이 나와서 돌아가지 않고 눌러 앉아 있는 북한 출신 실향민들이 사할린 동포들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남북한합동공연을 한다면 가장 1순위가 사할린입니다. 지정학적 특수한 여건에서 남북이 제3지역에서 합동공연을 할 수 있는 1순위 지역입니다. 그런 성격의 남북공연이 60년만에 사할린에서 개최되었습니다. 그래서 지난 2018년 광복절 기념 남북한합동공연이 사할린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최되어 다녀왔습니다. 공식 행사명은 '광복 73주년, 남부사할린과 쿠릴열도 해방 73주년 기념 우정의 날'입니다. 사할린 동포 강제동원 80주년을 기리기 위해 사할린주한인협회가 주최하는 남북러합동공연 행사입니다. 남측에서는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북측에서는 삼지연악단과 모란봉악단 단원으로 구성된 통일음악단, 사할린동포의 아리랑무용단, 사할린의 에트노스예술학교 학생들이 출현했습니다. 북한에서 나온 3000명의 노동자 중 많은 북한 사람들도 함께 한 광장은 인산인해로 열기와 박수 소리가 가득 메웠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게 되니, 남측의 경고가 반복되어도 김일성 3부자를 우상화 및 찬양하는 공연이 계속 이어졌다. 결국 북측의 예측불허 공연으로 행사진행이 불발되어 남한 측 공연단은 무대에서 모두 철수하는 급작스런 해프닝이 벌어졌습니다. 그래서 무대는 북한 선전선동가 일색으로 끝났습니다. 무대 앞에서는 현란한 북한 공연이 이어져서 북한공연팀은 우뢰와 같은 박수를 받고 흥이 오른 관객들은 무대 잎에 나와서 부르스를 추고, 무대 뒤에서는 남과 북 공연 대표팀이 고함을 지르고 큰 싸움까지 붙었습니다. 모든 일을 추진한 사할린한인협회는 북측 공연 책임자에게 책임을 묻고 싸우고 나서는 북한 공연팀을 이동시키는 리무진 버스도 철수시켰습니다.,,,,그날 대한민국 신문방송은 모두 '사할린 남북합동공연 불발'이라고 전했습니다. 앞으로 이런 남북공동 행사가 제3국에서 성공적으로 진행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자문을 구하고 싶습니다. A. 네, 방송과 신문지면을 통해 사할린에서 몇십년만에 모란봉악단이 와서 국립남도국악원과 함께 콜라보 공연을 하였다고 들었습니다. 그런데 남북합동공연이 불발이 되어서 안타까웠습니다. 남북이 함께 하는 공연에서 감자기 북측에서 김정은 체제 선전가를 부르는 무대에서 남측 국립국악원과 국립남도국악원 공연팀이 무대에 같이 설 수는 없지요. 왜냐하면 사전에 국가 체제에 관한 선전가는 안 부르기로 합의를 보았는데, 북측이 그 합의를 준수하지 않은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남측의 민간단체가 함께 했다면 그 공연은 함께 해도 문제가 되지 않겠지요. 국립기관과 민간단체가 함께 공연을 했다면 어느 정도 조율이 가능했을 겁니다. 100명 정도 되는 인원이 사할린까지 날아가서 국민혈세를 쓰고서 그냥 오다니 말도 안되는 남북 국제행사입니다. 민간단체 공연팀이 같이 갔다면 예정대로 무대에서 남북이 아리랑을 대합창으로 휘날레는 했을 겁니다. 즉 국민들 앞에서 대의명분은 서는 거지요. 북한에서 나온 노동자들과 사할린 동포들이 얼마나 서운했을까요. 우리는 하나인데... 당시 기사를 보니 "사할린다민족협회 아코뺜 싸르키스 조리코비츠 회장은 사전 리허설을 보고 직관적으로 "사할린에서 남과 북이 만나 아리랑을 함께 부르니 하나의 민족이다"고 외쳐 기립 박수를 받았다.”라고 했는데. 예를 들어 제가 참가한 사할린아리랑제추진단이 정례화 하고 있는 사할린아리랑제와 같은 민간단체가 매년 사할린에서 열리는 아리랑축제와 함께 했다면..남북러가 참가하는 공연 타이틀은 이름값을 했을겁니다. 그리고 후일담으로 국립국악원에서 오프닝 무대의에서 유지숙 명창이 부른 '애원성' 같은 북한지역 서도민요는 현지 관객의 취향에는 맞지 않아서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들었습니다. 사할린 동포들이나 북한 노동자들은 전통민요의 멋을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차라리 트롯트를 더 좋아합니다. 그러나 북한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제2호 아리랑은 다 좋아합니다. 영천아리랑은 북한 민요음반에 첫 번째 인기곡목입니다. 밀양아리랑도 좋아합니다. 주의해야 할 것은 북한과 러시아는 박자 빠르기가 남한과 확연하게 다릅니다. 처음 들어보느 낯설고 느린 전통민요 코드는 맞지 않습니다. 남북합동공연에는 전문가의 조언이 필요합니다. 사전조사를 철저히 해야합니다. 차라리 남측에서 처음에 유지숙 명창이 아리랑 메들리를 부르거나, 북한이 좋아하는 영천아리랑이나 북한 최고 유행가 '휘파람'을 불렀다면 중간에 타협도 가능하지 않겠어요? 관객은 대한민국이 아닌 러시아 동포들과 북한 노동자입니다. 그들의 취향에 대한 배려가 먼저입니다. 2018년 사할린아리랑추진단이 한국에서 사할린한인협회와 MOU를 맺고(<사할린아리랑제, 北 예술단 참가 추진···현지 한인협회 MOU> 뉴시스, 2018-06-19)두 단체는 "한민족공동체 결속에 기여하는 아리랑의 기능을 활용, 올해 제3회 사할린아리랑제에서 사할린을 거점으로 삼는 아리랑로드를 확장하기로 했다. 급변하는 국제관계에서 북한 동포들과 아리랑공동체를 공유한다는 취지다. 금년 사할린아리랑제는 러시아는 물론, 남북 합동공연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사할린아리랑추진단은 2018년 사할린을 세번 오가며 남과 북이 유네스코에 공동등재 된 인류무형문화유산 아리랑을 주제로 하여 남북합동 공연을 같이 하자고 사할린한인협회에 제안을 했죠. 그러나 무슨 연유에서 결국 성사가 안 되었죠. 공동주최가 안되어도 한꼭지 무대를 주었다면, 국립기관 단체 공연팀이 공연 도중 철수를 해도 민간단체는 탄력성을 가지고 남북합동 공연은 마무리 되었을 겁니다. 적어도 불발이라는 기사는 안나가겠죠. 감사합니다. 새해에도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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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 대표국악신문은 새로운 코너로 ‘이메일 인터뷰’를 마련했다. 이 코너를 통해 더 원활하게 국악인들의 의미있는 활동을 공유하기 위해서다. 첫 인터뷰 인물은 이혜솔 국악인이다. 사할린 동포들로 구성된 사할린아리랑합창단(단장:최나타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에서 '은상'을 수상하게 한 국악인이면서 아리랑 전승자이다. 이후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들도 이회장의 활발한 전승활동에 주목하게 된다. 코로나로 세계가 멈추었을 때 지난 3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독도에서 제주까지' 전국 아리랑전승단체를 찾아가서 아리랑코로나를 알리고 현지 답사를 해왔기 때문이다. 지난 9월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에서 처음으로 ‘아리랑코로나’를 무대화 한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이혜솔(1952년생) 대표를 객원기자 기미양 선생이 인터뷰했다.(편집자 주) Q. 올해 코로나로 인해 많은 단체와 공연자들이 무대에 서지를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잘 마치셨습니다. 처음 만나는 무관중 언택트 공연에 어려움은 없었는지요? A. 코로나19로 인한 사회적 거리두기를 엄수하는 가운데 지난 10월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를 무사히 마쳤습니다. 금년의 국악계는 어느 분야보다도 어려움을 겪고 있기에 모두에게 힘을 실어주고 싶었습니다. 공연의 제1조건이 관객을 전제로 하는 것인데, 관객 없이 해야 하는 공연을 위해 극히 제한된 출연자와 스탭과 관객으로 치룰 수 밖에 없는 실정에도 불구하고 행사를 준비했습니다. 무대에 20명만 올라와야 하는 조건에서 극장밖에 있다가 다른 공연팀과 계속 교체를 해야했습니다. 어려운 시국에도 불구하고 모든 회원들이 일사분란하게 협조를 해주어서 잘 마치었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자랑스럽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끝나서 관객들 앞에서 공연을 하는 날을 기원해 봅니다. Q. 매년 정례화 되고 있는 아리랑축제를 올해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코로나와 함께 무사히 치루었는데, 올해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행사 주제는 무엇입니까? A. 전 세계가 멈춰어져 있는 이 어려운 "코로나19 고개를 넘어가보자”라는 의미에서 어서어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대주제를 가지고 준비를 했습니다. 코로나라는 힘든 고개를 아리랑 고개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가지고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보급하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온 국민과 힘을 합쳐서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라는 의지를 제10회왕십리아리랑제 공연에 담아보았습니다. Q. 이번 행사에서는 전세계 어느 곳을 막론하고 인류가 태어나서 처음 만나는 코로나 19사태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를 정하셨네요. 회원들 반응은 어떠했는지요? 난생 처음 실시된 무관중 공연에서 어려운 점이 었었지만, 이런 새로운 형식의 실험적 무대에서 얻은 게 있다면 무엇인지요? A. 우리는 코로나를 넘고 가야 할 '고개'로 인식하고 '아리랑고개를 넘어가자'고 주제는 바로 통했습니다. 올해부터 모든 공연은 코로나 전후로 나누어진다고 봅니다. 그동안 모든 공연은 절대적 관객 대상 공연이었지만 이번에는 관객이 아닌 우리 출연자 스스로를 향한 공연을 해보자는 마음으로 무대에 나섰습니다. 처음으로 우리가 우리를 바라보는 기회를 가졌습니다. Q. 전체 프로그램은 2부로 나누어져서, 제1부는 대동의 노래, 제2부는 상생의 노래로 구성이 되어있는데, 어떠한 내용으로 이루어졌나요? A. 전국 지역에서는 아리랑의 힘으로 대동단결하여 코로나를 막아내고 우리 모두가 다시 안정되어 함께 잘 살아보자는 상생의 노래로 나누어 보았습니다. 지역은 '왕십리에서 제주까지' 불리는 지역 아리랑으로 구성했습니다. 왕십리아리랑을 시작으로 서울아리랑, 강원도아리랑, 상주아리랑, 밀양아리랑, 제주아리랑 등이 불려졌습니다. 서울에서 활동을 하지만 강원도 평창이 고향인 사람은 아라리를 부르고. 경상도 사람은 밀양아리랑, 제주에서 올라온 이는 제주아리랑을 불렀습니다. 제주아리랑은 유재희(서귀포아리랑보존회장) 명창이 불렀습니다. Q. 코로나로 처음으로 개최된 무관중 공연이었지만 제10회를 맞이하는 소감은? A. "아리랑은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안에 우리 경기 아리랑 선율인 왕십리아리랑도 포함된다고 믿습니다. 자부심을 가지고 왕십리아리랑을 부르고 있습니;다. 앞으로 소리극 ‘김소월이 사랑한 왕십리’를 기획하고 있습니다. 시놉시스와 시나리오는 준비 중에 있습니다. Q. 왕십리아리랑은 이혜솔 회장이 작사하고, 통일앙상블 대표 윤은화가 작곡한 새로운 아리랑인데, 어떤 내용이 담긴 사설인지 궁금합니다. 국내외 무대에서 왕십리아리랑 반응은 어떤가요? A. 첫 소절은 처음에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라고 시작합니다. 본조아리랑을 선율로 해서인지 일단 경쾌하고 따라서 부르기 쉽다는 것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는 왕십리아리랑을 작편곡 한 윤은화 작곡가와 통일앙상블 밴드(9명의 연주자)가 함께 가서 연주 반주에 맞추어서 불러서 더욱 좋았습니다. 이미 음반 작업을 하면서 함께 연습을 한 팀들이 그대로 갔기 때문에,,,,..그래서인지 현지 동포들이 후렴을 따라서 부르고 음악가들이 악보를 달라고 해서 부고 왔습니다. 2019년 봄에 왕십리아리랑제에 관객으로 참가한 사할린동포들에게서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우리의 서울은 왕십리래요 아리랑고개를 서로 함께 넘어요 서울의 왕십리 우리 사는 곳 개나리 화창한 꽃동산이래요. 사랑과 희망이 넘쳐 흐르는 서울의 서울은 우리 왕십리래요 우리 서로 벅찬 가슴 마주하면서 손잡아요 어깨동무 함께할래요. 이 아리랑을 만들게 된 연유는 제가 청년기부터 몸담고 살았던 서울 동부의 중심지인 왕십리 시민들과 함께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누구나 다 알고 부를 수 있는 아리랑 가락에 성동구 지역 역사를 담아 보았습니다. 아리랑의 대동정신으로 지역공동체 결속에 이바지 하려고 합니다. 이 아리랑은 국내보다 해외에서 더 반응이 좋은 편입니다. 미국 순회공연. 일본, 사할린 공연에서 동포들에게 러브콜을 받았습니다. 본조아리랑의 위상을 실감하고 있습니다. 동포들을 만나면서 아리랑은 결속력을 속성으로 하는 노래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롭스크 동포들이 와달라고 했는데 올해 못갔죠. 코로나로......코로나만 종식되면 바로 갈려고, 트렁크 짐은 싸놓은 채 그대로입니다. 작년 2월 초 가려고 비행기표 예약을 했다가 이대로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그러다가 지쳐서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 부르게 되었습니다. Q. 지난 해 2월초 러시아 사할린과 하바로 바로 가려고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사회적 거리두기가 심각해지자 아리랑코로나를 지어서 코로나를 막아내자고 우리들에게 위로를 해주었습니다. 카다로그 앞에 나와있는 이 가사가 아리랑코로나인가요? 어떤 계기로 해서 만든 아리랑인가요? A. 지난 5월에 새로 만든 ‘아리랑코로나’가 무대에서 초연되었습니다. 국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의 급격한 확산세는 한풀 꺾였지만, 전국 곳곳에서 산발적 감염이 이어지면서 신규 확진자가 늘어면서 전국 축제와 예술활동이 거의 중단된 현실에서 이번 무대에서 회원들과 함께 불렀습니다. Q. '아리랑코로나'는 어떤 의미를 담아내려고 했나요? A. 일제강점기 1930년대 종두선전가라는 종두아리랑. 마마아리랑이라는 방역아리랑이 불려졌습니다. 아리랑으로 천연두 전염병을 이겨보자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저는 아리랑의 힘으로 전세계를 멈추게 하는 이 무서운 코로나 바이러스를 막아보자는 뜻에서 만들어 보았습니다. "몸은 멀어도 마음은 가까이, 뭉치면 죽고 헤어지면 산다네”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입니다. 90년만에 나온 방역아리랑, 특별한 아리랑이지요. 이회장은 주먹을 높이 쳐들면서 이번 코로나19를 막아내자는 방역아리랑이라고 강조했다. 지난 9월부터 독도 울릉도에서부터 제주까지 찾아가는 작은 공연을 진행하고 있다. 가장 추운 나라 러시아 동포들에게 녹음을 해서 전해주고 국내 이주하고 있는 동포들과 공유하고 있다. 최근 러시아 고려인 청소년과 하바롭스크 사할린 동포들에게 음원과 동영상을 전해주고 있다. 아리랑코로나 노래가 알려지자 (재)아리랑선풍재단 아리랑체조단도 이 음원을 보내주면 집단체조를 해보이겠다고 연락이 왔다고 한다. 아리랑코로나 작사.작창:이혜솔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고개를 넘어간다(후렴) 코로나 택시는 탈만큼 탔지만 코로나 바이러스는 무섭어 도망간다 코로나 마마님은 언제 가시려나 구경일랑 그만하고 가시게나 바다 건너 님 보고싶지만 가고 싶어도 갈수없네 원수로다 원수로다 원수로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원수로다 흩어지면 죽고 뭉치면 산다지만 뭉치면 죽고 흩어지면 산다네 Q. 2년동안 아주 특별한 아리랑 전승활동을 하시느라 애쓰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데, 부모님 고향은 어디인이신가요? 부모님 중 누가 소리를 잘하신 분이 계셨나요? 소리를 하시면서 영향을 주신 분이 계시나요? A. 아버님 고향은 청주이시고, 어머니는 경기도 평택이시지만 어릴때 서울로 이사를 하고 줄곧 서울에서 살고 있습니니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나신 아버지는 공부보다도 소리를 좋아하셔서 판소리 춘향전은 다 외우셔서 사랑방에 손님들 모이면 걸죽하게 뽑아 내셨습니다. 그렇게 아버지는 평생 풍류객이라는 소리를 듣고 서울을 오가며 사셨습니다. 우리 형제들 모두 아버지 소리를 듣고 자라서인지 모두 다 소리를 잘합니다. 저의 목소리는 아버지를 쏙 닮아서 통성입니다. 나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풍류를 찾아서 서울을 오가는 멋쟁이 아버지는 살림을 나 몰라라 하셨습니다. 갈수록 식구들 입은 늘고 살길이 막막해지지만 청주 사람들이면 다 아는 양반집 친정에서 곱게 자란 어머니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저 친정에서 곡식을 얻어서 우리 식구들 먹이다가.....나중에는 나어린 막내에게 젖을 물리다가 몇번이나 달리는 트럭에 뛰어 들었다가 모진 목숨 건지게 되자, 장남만큼은 반드시 공부를 시키겠다고 7남매를 끌고 생면부지 서울로 상경을 하셨습니다. 간신히 아버지를 찾아 용두동에 하꼬방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고,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젖먹이를 업고 어머니는 묵을 쑤어서 머리에 이고 행상을 시작하셨습니다. 그런데 큰언니가 촛불을 키고 바느질을 하다가 집에 불이 나서 이불이고 신발이고 몽땅 다 타버렸습니다. 다시 빈털털이가 되어 창신동으로 이사를 가서 임시 천막을 치고 맨 땅에서 추우나 더우나 어렵게 살게 되었습니다. 어머니는 장사를 마치면 이고 나간 함지박에 매일 벽돌을 한 두개씩 사서 이고 들어오셨습니다. 매일 천막안에 사방에 벽돌이 하나씩 하나씩 쌓아서 벽이 되었습니다. 마침내 사방을 두를만큼 벽돌이 모아져서 그 자리에 판자집을 짓고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나중에 묵장사로 목돈을 모우신 어머니는 동대문 시장에 나가서 비단을 받아서 이고 지고 나가서 비단 보따리 장사로 우리 7남매 자식들을 힘들게 키우셨습니다. 어머니의 눈물과 땀으로 우리 형제는 하루 하루 커가는데, 판소리와 경기소리에 미친 아버지는 풍류를 즐기면서 사시느라 어머니는 평생 외롭게 독수공방을 하시면서 우리를 지켜 주셨습니다. 지금 생각하니 긴긴 세월 어머니는 아버지 대신 가장 노릇 하시느라 여린 여자의 몸으로 사내 대장부처럼 우리 7남매를 굳건히 키워주셨습니다. 어머니라는 이름으로 ,,,,,세딸 중 막내딸로 태어난 저는 어머니 품속에서 사랑을 가장 많이 받았습니다. 밑으로 남동생이 3명이나 있었지만,........ 아버지 때문에 흘린 어머니의 눈물을 제가 가장 많이 닦아 드렸습니다. 두 언니들은 바로 사회에 진출을 하고 집에 남아있는 저는 어머니와 함께 하는 시간이 많았기에....어머니는 늘 저에게 "곱게 자라야 시집가서 고운 대접 받는다"고 막내딸만큼은 손에 찬물 안 묻히게 하셨습니다. 저는 그런 어머니의 가이없는 정성을 자식을 낳고서야 깨달았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너무 철없는 막내딸이지요. 이렇게 우리 7남매는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눈물을 먹고 자랐습니다. 가족을 지키기 위해 일생을 희생하신 어머니를 매일 바라보며, 우리 7남매는 "중용을 지키고 불손한 일로 남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 자식이 되어야 한다"라고 다짐을 하면서 성장했습니다. 그래서 우리 형제는 어머니를 기쁘게 하기 위해 더욱 열심히 살아야만 했습니다. 평생 5시가 되면 일어나서 달이 뜰때까지 열심히 일하는 습관이 몸에 배어졌습니다. 그 덕에 모두 일찌기 자수성가해서 서울에서 부자라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이쁜 작은댁을 데리고 사시던 아버지는 칠순을 넘기시고 중풍에 쓰러져서야 집에 돌아와 안주하시게 되었지만..... 몇해 동안 앓다가 결국 조강지처 품에서 돌아가셨습니다.(이때 우리 형제는 불같이 일어나서 반대를 했지만 어머니는 아버지를 받아 들이시고 돌아가실 때까지 수족이 되어 지극정성으로 모셨습니다. 손주들에게 할아버지를 찾아주어야 한다고 하시면서) 저의 노래는 어린 나이에 시집을 와서 고생하신 슬픈 어머니의 한을 담아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지금도 힘들때나 기쁠때 양평에 있는 어머니 무덤을 찾아가서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노래를 불러 드리고 옵니다.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에는 지인들의 어머니만 뵈도 가슴이 떨립니다. 어머니, 어머니 불러도 대답없는 나의 엄니.....그래서 저의 인생의 반은 어머니 것입니다. 국악 입문경위 Q. 풍류를 즐기시는 아버지 때문에 고생은 했지만 미워하는 아버지의 목을 빼닮아서 노래를 부르게 된 것이네요. 유년기에서부터 들어온 사랑방에서 장구 장단에 부르는 노래 소리가 서울에 이사와서도 낯설지는 않았겠죠. 유년기에 무대같은 데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있나요? A. 어릴 때부터 고향 청주에서는 노래를 잘한다는 소리를 듣고 자랐습니다. 소풍을 갈때나 학예발표회 무대에서 늘 일등으로 불려나와서 노래를 불러서 박수를 많이 받았습니다. 저도 소리 공부를 하고 싶었지만 형편이 어려웠습니다. 스승을 모시고 소리 공부를 하는 사람이 부러웠습니다. 서울에 이주하게 되자 저축을 하여 돈이 생겨서 제일 먼저 산 것이 녹음기입니다. 길을 지날 때마다 전파사에서 흘러나오는 민요를 들으면 발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바로 음반을 사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일을 했습니다. 어머니가 민요 가락을 따라 부르는 저를 보고 피는 못속인다고 했습니다. 이렇게 저의 10대는 소리 공부에 대한 목마름으로 잠 못이루는 밤을 지세웠습니다. Q. 늦은 나이에 국악에 입문을 하게 된 경위를 듣고 싶습니다. A. 언젠가는 반드시 소리를 배워야지 하다가 일찍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가정이 안정되고 어린 자식들이 학교에 다니게 되자, 비로소 마흔살이 훌쩍 넘은 늦은 나이에 꿈에도 그리운 소리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수업 중에도 녹음을 해가지고 와서 일하면서 반복해서 혼자 연습을 하면서 열심히 따라 불렀습니다. 당시 단순노동에 불과한 자영업을 하면서 소리는 나에게 많은 위안과 꿈을 주었습니다. 테이프를 틀고 들어보니 이 소리들은 자라면서 아버지가 신명나게 불렀던 노래이었습니다. 아버지가 몸서리치게 그리 좋아하시던 그 노래를 이제는 제가 부르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이가 들면서 아버지가 더욱 생각이 납니다. 아버지가 미워서 아버지가 늘 부르시던 노래(민요)를 녹음을 안해 놓은 것이 후회가 됩니다. 지금도 비오는 날 눈을 감으면 정가, 민요에서 판소리까지 즐기시던 아버지의 소리가 들립니다. 드디어 경기민요를 배우게 되고 무대에 서게 되자 집안(남편)에서 반대를 했습니다. 그래서 일찌감치 연습 공간을 따로 얻어서 소리 도반들과 같이 매일 모여서 공부를 하는 바람에 점점 소리에 깊게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소 내 안의 나 자신이 얼마나 노래를 부르고 싶어 하는지 심오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경기민요 전수자들에게 지도하는 정도의 인정을 받고 내공을 쌓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스승을 찾아서 경기민요부터 서도민요를 지금도 배우고 있습니다. 이은관 선생에게서 서도민요 이수를 받았지만 배움의 길은 끝이 없나봅니다. 늦게 배운 도둑질에 밤 샌줄 모른다고..... Q. 늦게 배운 소리에 불구하고 서도민요 이수자까지 했으니 원은 푸셨네요. 경기민요 서도민요는 어떤 스승에게 배우셨나요? 소리 공부를 하시면서 기억에 남는 스승이 계시나요? A. 서도소리 예능보유자 김순자 선생님, 김경배선생님, 이은관 선생님, 경기민요 예능보유자 묵계월선생님, 전숙희선생님, 김혜란선생님께 사사했습니다. 그 중 이은관 선생님이 무대에 많이 세워주셨습니다. 전숙희 선생님과 김혜란 선생에게 혹독한 수업을 받았습니다. 그런 시간들이 이제는 자산이 되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제자들이 전국경연대회에서 많은 상을 타가지고 옵니다. 늘 스승님께 감사를 드리게 됩니다. Q. 경기민요, 서도소리를 이수하고, 강원도 '아라리'도 배우시고, 최근에는 ‘제주민요’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데 어떤 계기가 되어서 제주의 소리도 관심을 가지게 되셨는지요? A. 오랫동안 같이 공부를 했던 제주도 소리 친구 유재희 선생이 제주민요축제에 초청공연으로 자주 가게 되면서 신비로운 서우제소리에 반했습니다. 경기민요와 서도민요를 수십년간 불렀지만, 제주민요는 또 다른 맛이 납니다. 서우제소리를 들으면 배를 타고 신비로운 섬으로 끌려가는 듯한 선율에 넋이 나가더라구요. 이어도 소리는 여자들만이 산다는 섬으로 떠나간다는 내용입니다. 고난의 속세를 떠나서 유토피아로 떠나가는 거지요. 한번 간 사람은 절대 돌아오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는 전설의 섬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도 하라. 이어도 하라. 이엿말 하면 나 눈물 난다. 이엿말은 말앙은 가라. 강남을 가건 해남을 보라. 이어도가 반이엥 한다." 어느새 둥둥 배를 타고 상상속의 섬으로 떠나가는 환타지가 느껴지면서 온 마음이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거기는 돌아가신 어머니가 계신 곳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제주민요를 들으면 어머니가 더욱 생각납니다. 오랜만에 아주 특별한 외식을 하는 기분으로 제주민요도 조금씩 부르고 있습니다. 나의 레파토리는 사할린아리랑 이회장은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출범 이후 첫번째 지도자로, 국내외 사할린 동포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다. 하바롭스크 아리랑지부 회원들이 와서 아리랑을 가르쳐 달라고 했을때, 바로 출국 준비를 했다가 코로나로 미루어진 상태이다. Q. 지난 해 3월부터 10월까지 지도를 해주신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전국아리랑경연대회에서 은상을 수상하셨습니다. 러시아 동포들에게 지도하시면서 어려웠던 점은? 수상 소감은? 어떤 감동이 들으셨습니까? A. 아리랑학교에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를 구하는데 1년동안 책임을 지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경기도에서 양주까지 가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2번 이상은 못한다는 것입니다. 공주나 문경 같은 지방에서는 1번만 와주겠다는 겁니다. 지도하는 사람이 바뀌면 일정한 곡을 따라 부르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제가 아리랑학회 위촉을 받고 3월부터 시작했습니다. 섹스폰 연주하는 친구들과 제자들까지 데리고 와서 수업시간 중 쉬는 시간 10분 동안 선율을 익히게 하기 위해 섹스폰 연주까지 들려주며 지도를 하였습니다. 드디어 10월 14일 전국아리랑경연대회를 위해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회원들이 성금을 모아서 단원들 12명의 의상을 새로 마추고 소품을 준비해서 무대에 올렸습니다. 광화문 광장에서 사할린 동포들은 난생 처음 입어보는 한복 무대복을 입고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무대에서 심사위원들도 관객들도 모두 함께 구구절절한 서러운 사할린아리랑을 들으며 함께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사할린에는 왜 왔나 왜왔나 일본놈 무섭어 따라왔지” 강제동원으로 끌려 간 4만명 조선인들이 돌아오지 못하고 억류된 70년의 한을 가슴에 묵혀두고 있다가 터진 것이지요. 심사위원들이 20여 단체의 경연자 중 2등상인 은상까지 주셔서 그분들의 깊은 한이 그날만큼은 치유가 되셨을겁니다. 왕복 7시간이나 되는 왕십리에서 양주를 다니면서 한 여름에는 너무 더워서 힘들었지만, 사할린 동포 어른들이 아리랑을 배우려고 하시는 열망 때문에 더 열심히 가르쳤습니다. 더욱이 수상까지 해서 개인적으로는 환갑 이후 저의 생애 가장 기쁜 날입니다. 부르시면 언제든지 달려 갈겁니다. Q. 전국아리랑전승단체가 지역적으로 55단체가 존재합니다. 경기도에만해도 10여 단체가 있습니다. 서울을 중심으로 김포, 인천. 가평. 포천, 수원 등등에서 양주끼지 오기는 너무 멀지요. 길이 막혀서 약 왕복 7시간 이상 걸립니다. 드디어 10월 중순 작년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에 이어 올해 사할린 동포들과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두드러진 아리랑 전승활동이라는 평가를 받을만합니다. 올해 계획은? A. "사할린동포분들께 내가 해드릴수 있는 것은 다 해드리고 싶어요” 사할린 동포분들께 아리랑을 가르치며 보람이 있었습니다. 추운 나라에서 고생하시다가 이제는 그리운 조국 한국 나와서 아리랑을 배우시고 싶다는데. 아무리 멀어도 최선을 다해서 해드리고 싶어요. 우선 사할린아리랑과 아리랑코로나 2곡을 가르쳐드릴겁니다. 양주와 인전 지역 사할린 동포들과 다문화 어린이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코로나가 끝나면 러시아 동포을의 요청을 받아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들에게 아리랑을 가르치러 갈겁니다. 지금은 동영상을 보냈습니다. Q. 사할린 동포들에게 직접 아리랑을 가르친 첫번째 사례입니다. 아리랑 소리꾼으로써 어떤 의미가 있는지요? A. 제가 사할린 동포를 처음 알게 된 것은 1983년 KBS특별생방송 '누가 이사람을 아시나요' 이산가족 찾기 방송에서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모형제 찾는 방송을 보고 울지 않는 이들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국내에 영주귀국 해서 사신다는 것은 사할린아리랑축제를 통해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부끄러웠습니다. 벌써 조국에 오신지가 15년이나 되셨다는데..... 4천명이 오셔서 전국 25지역에서 살고 계신다는데,,,,,,,,,작년 광화문광장에서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함께 행진을 했던 100여 분의 사할린 동포들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양주에 영주귀국하신 김세르게이 음악가가 살고 계시는 곳에 사할린아리랑합창단이 있고, 인천에 영주 귀국하신 사할린한국어교육협회 공노원 부회장님이 다문화 어린이들에게 한국어와 아리랑을 가르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작년 3월 아리랑학교에서 위촉을 받고 망서림 없이 수락을 하고 사할린아리랑에 이어 올해는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학교 수업을 통해 아리랑이 ‘민족의 노래’라는 칭호를 받게 된 것은 일제강점기 국외로 강제이주한 동포들이 조국을 그리는 노래로 불리게 되면서부터라고 알게 되었습니다. 아리랑 전승자라는 이름을 걸고 동포들을 찾아가면서 가르치고 싶습니다. 제가 남은 시간 동안 주어진 임무라고 생각합니다. Q. 사할린 동포 중 이번에 제자로 삼은 어린이가 있으시다는데 소개를 해주세요. A. 제가 신아리나를 처음 본 것은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축제 ‘디아스포라 아리랑’ 무대에서 무반주로 사할린아리랑‘을 독창으로 부른 당시 5살 먹은 당차고 씩씩한 신아리나(8세)입니다. 이번에 아리랑코로나를 함께 불렀습니다. 영주 귀국한 사할린 4세로서 할머니를 따라서 한국에서 살고 있습니다. 아직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하지 못한 부모 밑에서 언니(14세)와 어렵게 살고 있습니다. 아리랑코로나를 가르치면서 영민한 신아리나 어린이를 제자로 삼게 되었습니다. 앞으로 새해를 맞이하여 우리 왕십리아리랑보존회 홍보대사로 위촉하고 회원들과 함께 장학금도 보내 줄려고 합니다. Q. 전국55단체 아리랑전승단체 중 왕십리아리랑보존회는 후발주자이지만, 작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55개 지역 아리랑워크샾, 경복궁아리랑고,사할린아리랑제 등 국가행사에 참여했습니다. 느낀점은? A. 2019년 서울아리랑페스티발 아리랑퍼레이드에서 각 지역 아리랑보존단체 50여개 지역단체가 깃발을 들고 입장하는 현장에서 국악인으로서 아리랑을 선택한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특히 수많은 노래가 있지만 각각의 지명을 달고 창출된 **아리랑은 충격이었습니다. 학술적으로도 60여종 아리랑이 전국에서 불려진다는 것. 전국 아리랑 전승단체가 연대한다는 것은 전세계에 없다고 봅니다. 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에 자부심이 앞섭니다. 거기에는 책임같은 의무를 실천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A. 일년 전에 일본 땅에서 개최된 안중근의사추모제에서 가슴이 벅찼어요. 처음에 안중근의사숭모회에서 연락을 받고 출발을 했지만 아무것도 모르고 간거지요. 추모제를 준비하는 주관단체가 일본 사람들이라는 것. 구름같이 모여든 마을사람들이 성금을 모아 자발적으로 준비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웠습니다. 안중근 의사의 동양평화론이 일본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봅니다. 그리고 현지에서 어려웠던 시절 일본 농촌이나 오지로 시집을 간 한국 여성들이 우리 한복을 입고 부채춤을 추고 도라지타령과 아리랑을 부르는 것을 보고 눈물이 났습니다. 인사를 하면서 서로 손 잡자마자 바로 눈물이 앞섰습니다. 저는 안중근의사의 의병활동을 추모하는 '아무르아리랑'을 헌사했습니다. 다시 한번 아리랑은 동포사회에서 정체성을 확인하는 ’민족의 노래‘라는 것을 강하게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제가 아리랑의 세계에 처음으로 눈을 뜨게 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Q. 국악인으로 살면서 ’노래의 힘‘을 느끼신 적 있으신가요. A. 아리랑을 통해 노래의 힘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과 북은 물론 한민족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애국가‘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일제의 폭압에 대한 저항의 노래를 불렸고, 강제이주한 사할린 동포들이 부른 디아스포라 아리랑인 사할린아리랑은 고난을 극복하는 힘이 되었다고 봅니다. 사할린아리랑제에서 만난 사할린 한인의 역사를 통해 절절히 느끼고 돌아왔습니다. 우리말을 모르는 러시아 동포 3세 4세들도 아리랑을 부르고 알더군요. Q. 그렇다면 가장 자극을 받은 아리랑축제는? A. 2018년 제11회 문경새재아리랑제에서 '디아스포라 아리랑'이라는 주제로 펼쳐진 무대에서 러일남북중 5개국에서 향유하는 아리랑이 지역과 문화에 따라 다르게 부른 양상을 보고, 아리랑의 다양성에 대해 감동과 자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동포사회에서 아리랑은 흥얼거리는 민요가 아닌 바로 애국가라는 것을 확인했습니다. 집에 돌아와서 나만의 아리랑을 만들어야겠다. 나의 소리길를 가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후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깊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할린아리랑합창단 결성 소식을 듣고 바로 달려 간 것입니다. Q. 30여 년 국악인생을 살면서 오롯이 담아낸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 음반은 녹음을 마친 걸로 아는데 언제 발매가 됩니까? A. 처음에는 왕십리아리랑(작편곡:윤은화)을 중심으로 4년전 서울경기 지역 아리랑을 녹음을 완료했습니다. 그런데 2019년 사할린을 다녀오고 나서 사할린아리랑을 편곡하여서 넣으려고 합니다, 추가로 아리랑코로나도 넣고 싶고, 그래서 4년이나 끌었습니다. 이제는 아리랑에 욕심이 납니다. 내년에는 나올겁니다. Q. 최근 3박 4일 동안 서귀포아리랑보존회 유재희 회장과 함께 제주도아리랑답사에서 얻은 성과는 무엇인가요? A. 서귀포아리랑보존회 회원들과 서귀포 역사 유적지를 다니면서 많은 이야기를 듣고 나누었습니다. 제주민들의 증언을 통해 아리랑 역사에서 사할린과 제주도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모두 본조아리랑을 부른다는 것입니다. 1930년대 본조아리랑이 대유행을 했습니다. 1940년 전후 제주에서도 사할린이나 일본, 오키나와에 강제동원으로 끌려간 사람들이 본조아리랑을 불렀지요. 문헌에 있는 제주아리랑 선율은 본조아리랑입니다. 어업에 종사하거나 강제동원된 사람들이 가지고 간 아리랑이라고 봅니다. 출가 해녀들이 대마도나 홋가이도로 동원되어 아직도 돌아오지 못하고 부른 아리랑도 본조아리랑이었습니다. 거기에는 일본 사람들이 부쳐준 아리랑고개가 존재한다는 것, 이번 답사에서 민족 고난이 있는 곳에 아리랑이 불려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리랑은 역사의 노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습니다. Q. 앞으로 계획은? A. 내년에는 왕십리아리랑전국경연대회를 개최하려고 합니다. 올해 준비를 했다가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갑자기 사회적 거리가 강화되는 바람에 부득불 취소를 했습니다. 국내외 이주한 다문화 어린이들과 러시아 동포들에게도 아리랑을 알릴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올해에도 아리랑학교 아리랑 지도자로 위촉을 받았습니다.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로 알려지게 되면서 하바롭스크와 사할린 동포사회에서 수업 요청을 받았습니다. 내년에는 코로나가 종식되어 러시아 아리랑학교가 성사되어 아리랑배우기 수업이 완수되기를 기원합니다. 연혁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2016년 왕십리아리랑보존회 결성 2018년 사단법인 왕십리아리랑보존회 설립/이혜솔 이사장 취임 안중근의사추모제(주관:일본 미야기현 대림사) 초청명창 위촉 제8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2019년 아리랑학교 지도자 위촉(아리랑학회) 사할린아리랑합창단 지도자 위촉 (공동주관:아리랑학회) <찾아가는 사할린아리랑> 공연 (양주사할린동포협회, 율정마을) 제9회 이혜솔의 왕십리아리랑발표회(주최:성동구청) 제7회서울아리랑페스티발 초청공연 및 아리랑퍼레이드 참가 전국아리랑전승단체(55개 지역단체) 워크샾 참가(주관:문화재청) 경복궁 아리랑고유제(45지역 아리랑전승단체) 참가 제3회사할린아리랑제 아리랑명창 초청공연(이혜솔의 아리랑) 2020년 제10회 왕십리아리랑제 주관(주최:성동구청) 전국아리랑전승단체협의회 가입단체 아리랑코로나 발표회 독도에서 제주까지 ‘아리랑코로나 부르기’성료 (공동주관:아리랑학회) www.arirang129.com 아리랑은 인류무형문화유산이며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제129호이다. 이 두 유산의 해설문에는 아리랑의 수를 ‘50여종’이다. 기관과 학계에서는 50여 종의 아리랑 곡명을 누구도 구체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았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함의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제시한 수는 명목상의 수이지 자체의 의미는 없다는 것이다. 또 하나는 ‘셀 수가 없다’는 의미다. 사실 최근의 한 연구논문에는 음반에서 정리한 곡명 수를 192종이라고 하였다. 이런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조사 기관과 목적에 따라 그 수가 차이가 있을 수 있고, 이를 인정할 수밖에 없다. 아리랑은 자기 복제라는 속성을 갖고 있는 노래이기 때문이란 것이다. 다음 세 번째는 이 수는 앞으로 더 늘어날 수 있다는 여지를 표현한 것이란 점이다. 어쩌면 이 세 번째를 함의한 것일 수가 있다. 왜냐하면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등재되면, 그 가치 향유를 목적으로 한 아리랑 전승단체가 더 형성될 것이고, 그 범위가 세계적일 수 있기 때문이다. 바로 왕십리아리랑보존회의 결성과 창작 활동은 이 세 번째의 함의를 실증하는 것이다.” 우리가 전래되는 전통민요만 알고 있는 ‘밀양아리랑’은 1926년 9월 창작되었고, 그해 10월엔 영화 나운규의 아리랑에 등장한 ‘본조아리랑’이 탄생되었으며, 1934년엔 ‘진도아리랑’, 1936년에는 대구아리랑, 1972년엔 ‘상주아리랑’이 새롭게 세상에 나왔다. 아리랑은 댓구 형식이라서 기억하기 쉬운 구조를 가지고 2줄의 사설, 2줄의 후렴만 있으면 되는 것이라서, 외국인들도 한번 들으면 누구나 기억하기 쉬어서 각인이 된다고 한다. 그래서 누구나 지어 부르기도 쉬운 노래다. 이는 아리랑이 가진 창작과 개사의 속성을 지닌 '노가바' 형식의 노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리랑의 속성에 맞게 ‘왕십리아리랑’도 시대적 요청에 의해서 세상에 나온 것이다. 전국아리랑전승자협의회 정은하 회장은 아리랑코로나 가사를 받고서 "코로나 시대에 코로나를 이기자는 '아리랑코로나를 만들어서 알리고, 사할린 동포들에게 사할린아리랑을 가르치는 아리랑동지! 다시 한번 우리는 이혜솔 회장의 자발적 전승활동에 박수를 보낸다"라고 반겼다.(기미양:국악신문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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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선 명무, 호남살풀이춤최 선, 그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평생 춤꾼! 이렇게 부른다. 그것은 무대에서 삶이 잠잔 시간 보다 훨씬 많기 때문일까? 아니면 선생을 잘 모르더라도 무용가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다. 선생의 몸에는 '춤끼'가 자르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선생는 일제의 식민 탄압이 극에 달하던 1935년 11월 7일 전북 임실에서 유교집안의 8남매 중 3남으로 태어났다. 위로 두명의 형님들은 일본 유학까지 마친 인텔리였고 부친은 유학에 밝은 시골 선비여서 최 선 선생도 당연히 그런 가풍을 따라야 옳은 일이었다. 그러나 그의 타고난 기질은 일반적인 학문을 공부 하는 쪽보다는 예능쪽이었다. 선생은 일찍이 그러한 자기 기질을 발견했고, 수많은 질타와 역경을 고집 하나로 이겨내며 일생을 춤꾼으로 살아오고 있다. "춤은 무당이나 하는 것이거늘 어찌 남자인 네가 춤군이 되어 집안 망신을 시키려느냐”며 무섭게 질타하는 부친의 노여움, 집안 식구들의 눈치, 동네 사람들의 비아냥이 열 살도 채않된 그에게는 너무 벅찬 부담이 됐을텐데도 그런 모든 아픔을 당차게 이겨낸 것을 보면 아마도 선생은 춤을 위해 태어난 일것이다. 오지게추운 겨울 밤에도 어머니의 옷가지를 몰래들고 마을 뒷산에 올라 달빛을 조명삼아 혼을 불사르다가 동상에 걸려 발톱이 빠지고 오한에 떨던 꼬마, 보통학교(초등학교) 학예회 때면 인기를 독차지하던 꼬마 최 선이 오늘 한국 무용계의 거목으로 우뚝 서는 계기를 이룬 것은 완산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월북무용가 최승희의 수제자인 김미화 선생과의 인연이 바로 그것이었다. 당시 전주에 내려와 무용 강습을 하고 있던 김미화 선생이 한눈에 춤 꾼으로 뛰어난 재질이 있음을 알아보고 체계적인 무용을 가르치면서부터 선생의 춤은 탄탄한 바탕과 독창적인 예술성을 갖추는 계기가 되었다. 선생의 나이 불과 열 두어살 때였다. 이때부터 선생의 춤 인생은 한번도 쉴틈없이 이어진다. 동족 상잔의 비극인 6. 25 사변중에도 죽음의 사선을 넘나들며 춤을 추었고, 하반영 선생 등을 따라 전주고등학교 기숙사에서 연극도 했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엔 마침 전주에 국악원이 개설되고 주위에서 전주국악원에 계신 추월이라는 할머니 선생이 판소리도 잘하지만 춤을 잘 추신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 갔다. 그 분은 항상 단아한 모습으로 국악원의 넓은 대청마루에 계셨으며, 방이 여러곳이 있는데도 거기서 판소리도 하고 춤을 추셨다. "그 때 당시에 봤을때 돗자리를 깔고 춤을 추시더라구요. 당시만 해도 수건춤이라 것만 알았지 살풀이 라는 것은 처음 알았지요. 또한 그때는 음악이 없기 때문에 무 장단이나 장구, 북, 꽹과리 등 구음으로만 춤을 했지요." 추월 선생이 직접 장구도 치시고, 돗자리 위에서 수건춤을 가르쳤던것을 기억한다는 선생은 지금 선생이 일궈낸 호남살풀이춤의 기초를 배우게 된다. 051026cholsun4.jpg소위 "수건 춤”을 배우게 되는데, 한량들이 흥에 겨워 기교도 없이 추던 그런 춤, 다시 말하면 춤의 가장 기초적인 동작에 불과한 것이었다. 그러나 왠만한 사람들에겐 그 수건 춤이 별것 아닌 것으로 여겨졌을 망정 선생에게는 가장 한국적인 춤, 가장 전라도 같은 춤으로 인식됐고, 그것을 내것으로 만들어야겠다는 어떤 사명감에 사로 잡혀 밤낮으로 춤다운 춤으로 만드는 작업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 수건춤이 바로 선생을 오늘의 한국무용계 거목으로 성장시킨 것이다. 남자 초립동이 춘다는 의미로 "동초(童草) 수건춤” 또는 "호남살풀이 춤”으로 불리우는 이 춤으로 최 선 선생은 지난 84년 11월 개천 예술제 특장부문에서 「호남살풀이」로 대통령상을 수상하는 기쁨을 안았으며, 96년 3월 전라북도 지정무형문화재 15호가 인정됐다. 그래서 이기반 시인은 「닫혔던 하늘 문이 열리고 / 막혔던 강물이 흐른다. / 천만년 억겁에 / 쌓인 세월의 갈등도 / 원한에 사무친 시름이랑 / 철 철 철 녹아내린다. 」중략 이렇게 「살풀이춤에서」시로 찬양해 줬다. 어쨌든 최 선이 그 수건 춤에 매달리는 사이 어느 덧 그도 스무살 청년으로 성장했고, 춤 실력도 인정 받는 등 예술인으로서의 면모를 갖췄다는 자신감에 전주에서 처음으로 "최 선 무용연구소”를 차려 후진 양성에도 힘쓰게 된다. "6. 25 직후 무용가가 거의 없어 애로사항이 많았서요 아마 황무지인 전주에 한국 춤을 개척한것은 저 밖에 없을겁니다” 전쟁도 끝나고, 공비 소탕도 대충 마무리돼 사회질서가 잡혀가던 1954년 전주도립극장에서 「논개」「승무」 「장고춤」 등으로 첫 개인발표회를 가져 전북 무용계에 커다란 화제를 모았다. 전주도립극장을 가득 메운 관객들앞에서 자신의 춤을 마음껏 펼치고 난 그날 밤, 그는 복받치는 서러움으로 밤새껏 울었다. 너무나 거칠었던 세파를 헤쳐온 지난 날들의 그림자가 안개처럼 그의 가슴에 퍼져왔기 때문이었다. 이 첫 무용 발표후 그는 당시 서울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면서 명성을 얻고 있던 정인방 선생을 만나 정식으로 사사를 받는 영광을 안는다. 이때 서울 무대 입성과 전통 무용의 맥을 잇는 후계자로서의 위치가 굳어진 계기가 바로 정인방 선생과 만남이었던 것이다. 이렇게 선생은 인정 받면가면서 한국무용 최고로 꼽히는 선생은 개인발표나 후진양성면에서도 그 누구보다도 활발한 활동을 펼쳐왔다. 특히 승무 살풀이 무당춤 등 한국 전통무용 뿐아니라 창작무용에도 뛰어난 실력을 가진 선생은 1979년에 열린 제1회 대한민국무용제에서 「가잿골의 전설」로 대상이 없는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후 정신없는 국내외 공연과 발표회 등이 선생의 춤 진수를 과시하기도 했다. 80년엔 한길무용회 특별회원으로 일본 자유중국 미국등지를, 그리고 85년엔 대통령상 수상 혜택으로 미국 동남아공연을 가졌고 그 밖에도 미국 일본등에서 열린 세미나에 참가하는 열의를 보였다. 70년대부터 무용협회 전북지부 지부장직을 맡아 오랫동안 일해온 선생은 그동안 전라예술제를 비롯, 각종무용제를 주최, 전북에 무용의 뿌리를 내리고 맥을 잇는 활동을 지금까지 펼쳐왔다. "죽을 때까지 춤을 추다 죽어야지, 우리 전통춤을 좀 더 멀리 또많이 전수, 보급하는 일이 남은 삶 내가 해야 할 일” 이라고 확신하는 선생의 춤은 현재 전북대 무용학과의 장인숙 교수, 이해인 교수, 김원(현대무용), 원광대 이길주 교수, 충남대 정은혜 교수, 서울 고선아 선생, 광주 허순선 교수, 그리고 선생의 딸 최지원 씨에 의해 전수되고 있다. 끝으로 선생은 제자들과 딸 지원 씨에게 부탁한다. 호남살풀이 춤이 영원히 살아 전승 보존되고, 꽃을 피었으면 한다고. 특히 딸이 아버지의 염원과 꿈, 그리고 다 추지 못하것을 열심히 하여 아버지 보다 나은 춤을 추었으면 한다. 김호규 기자 hg1411@kukak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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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유영건 회장 인터뷰일주일간의 한국방문을 마치고 떠난 故 안익태 선생의 부인 롤리타 안 여사는 이런 말을 남겼다. "애국가가 바로 한국이고, 애국가를 들을 때 남편과 한국인들의 순수한 감정을 마음속으로부터 느낍니다. 그 애국가를 한국에 돌려드리고 가서 정말 행복합니다.” 뭉클하다. 앞서 16일 문화관광부를 찾아 애국가 저작권을 무상으로 양도했던 그다. 애국가 저작권을 둘러싼 구구한 논란은 이렇게 해피엔딩으로 막을 내리는 듯하다. 애국가 저작권 문제가 불거진 것은 지난해말 가수·연주자에게도 전송권을 부여한 개정 저작권법이 발효되면서부터다. 그런데 저작권법이 강화된 데 불만을 품은 일부 네티즌이 "애국가까지 돈 내고 들어야 하나”라며 새삼 시비를 걸면서 여론이 부정적으로 흘렀다. 차제에 애국가를 바꾸자는 극단적인 주장도 나왔다. 애국가에 대해서는 다소 오해가 있다. 알려진 것과 달리 애국가는 정부가 법령으로 공식 제정한 적은 없다. 1948년 정부수립 때 국가로 채택됐고, 그것이 교과서 등에 실리면서 자연스럽게 국가로 인정돼왔다. 서울〓수도, 태극기〓국기, 한국어〓국어이듯 애국가가 대한민국의 국가라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운 ‘관습헌법'일 것이다. 한국의 저작권사업과 콘텐츠 산업은 최근 아시아를 강타한 한류 열풍에 힘입어 차세대 한국의 성장 동력을 각광받고 있는 분야다. 시장 규모만도 지난해 생산 기준으로 6조원 대에 이르렀으며, 유통 시장을 포함하면 더 큰 시장을 형성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산업의 최대 걸림돌은 불법복제로, 많은 저작권 및 콘텐츠 산업이 복제로 인해 산업 기반이 뿌리 채 흔들렸고, 최근엔 인터넷은 물론 지적재산권에까지 불법복제 문제가 심각해지고 있다. 이에 국악신문사는 (사)한국음악저작권협회 유영건 회장을 만나 지난 2개월여 동안 논란 돼온 `저작권법 개정에 대한 문제와 저작권협회의 의견과 음원을 관리하고 있는 유영건 회장에 대해 알아보았다. 올해 1월부터 저작권 및 콘텐츠 불법복제에 대한 논쟁이 인터넷과 언론지면을 통해 집중적으로 이뤄지고 있습니다. 갑작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까지 언론과 업계의 이슈가 된 이유가 궁금합니다. 이 문제는 새로운 이슈인가요 아니면 누적된 문제로 볼 수 있나요. -새로운 문제로 볼 수는 없지만 저작권과 문화콘텐츠 산업 규모가 커지기 전에는 우리 모두 이 같은 문제를 심각하게 인식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입니다. 과거에도 저작권과 콘텐츠 불법복제 문제가 없지는 않았습니다. 음반은 한때 4000억 원에 달하는 시장 규모를 자랑했지만 지금은 1300억 원 수준으로 떨어졌습니다. 이는 최근 들어 심각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더 큰 문제는 불법복제가 이뤄지고 있으면서도 사용자 스스로 `도둑'이라는 인식을 갖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더욱 심각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음반 시장은 고사 위기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음반 외에도 게임과 영화가 출시되기도 전에 복제되고 있는게 최근의 현실입니다. 이 같은 문제를 인식한 언론과 관련 협ㆍ단체들이 이슈를 제기해 왔으며, 이 같은 활동이 최근 저작권법 개정과 맞물리면서 사회 전체의 이슈로까지 확대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우리 저작권법상 저작권에는 저작재산권과 저작인격권이라는 양대 권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저작재산권이란 저작권자가 저작물을 배타적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리로, 저작권법상 인정되고 있는 저작재산권으로는 복제권(제16조), 공연권(제17조), 방송권(제18조), 전송권 (제18조의2), 전시권(제19조), 배포권(제20조), 2차적 저작물등의 작성권(제21조) 및 대여권(제65조의 2)등의 지분권(bundles of right)이 있습니다. 여기서 타인의 음악 저작물을 이용하고자 하는 자가 각 저작권자로부터 허락받아야할 권리는 복제권 및 저작물을 공중에 제공할 권리입니다. 또한 저작재산권에 내포된 복제권, 공연권, 방송권, 전송권 등 개별적인 권리는 각기 별개의 성질을 가지고 있으며, 별도의 경제적 가치를 가지고 있는 것이라 할 것이므로, 그 중 어느 하나에 대한 합법적인 이용권자리고 하여 당연히 그와 다른 권리까지 가지게 된다고 볼 수는 없고,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허락받지 아니한 권리는 이를 이용할 수 없다고 보아야 합니다. 개인적으로는 이제라도 음원과 콘텐츠 불법복제 문제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하고 있어 다행이라고 봅니다.- 처음에 음악을 선택하게 된 동기와 어떤 장르의 음악을 했는지요. -저는 작곡가입니다. 장르는 순수 음악과 대중 음악을 주로 해 왔습니다. 제가 알기로 집안에서 음악을 좋하했습니다. 아버님(유동현)은 시조(정악)를 즐겨 부르시고 시조대회에 나가 수상도 하시고 퉁소도 잘불었다고 합니다. 어머님(정명숙)은 초등학교 교사로 계셨는데 음감이 뛰어나신분 이였지요, 그러나 전문적인 집안은 아니었구요. 아버님이 제 나이 일곱에 돌아 가셨는데 故 김월하 선생님과 인연이 많았다고 합니다. 김월하 선생이 부산에 피난 오셔서 고생하실때 돈독한 관계였다고 합니다. 아버님이 돌아가시고 김월하 선생이 서울에서 활동 하던 중 방송에 아버지를 소개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작곡자의 소질은 부산 금정초등 3학년 때 기악부 활동을 했는데 그때부터인것 같습니다. 4학년부터 작곡에 재능이 보였고 칭찬을 많이 받았습니다. 저희 집안은 6남 3녀이며, 음악은 모두 좋아하셨고 위로 형님 한분이 고교시절부터 교회성가대 지휘하고 있습니다. 저는 학창시절과 지금까지 음악과 지냈지만, 사실은 늦깍이 입니다. 작곡학위는 마흔세살에 연세대 음악교육원에 들어가 받았습니다. 여기서 올 4.0 만점을 받았고 졸업때 학생대표로 학위를 받았습니다.- 현재 협회에 저희 국악 관련 회원은 몇분이고, 협회에서 국악에 대한 배려와 회장님은 국악을 알고 있는지요. -저희는 정회원과 일반회원으로 구분되어지고 있으며 현재 이사로 박해일 선생님, 황용주 선생님이 계시고, 박범훈(중앙대 총장) 등 20여분이 활동하고 계십니다. 준회원은 분야별로 구분되지 않았지만 약 40여명 됩니다. 전통음악부문에 배려는 사실상 별로 없습니다. 저희 협회는 일종의 징수 기관입니다. 음원을 관리하고 그 것을 나눠주는 역활입니다. 다른 파트도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음악의 기둥인 국악을 배려하여 창작요건를 고취시키겠습니다. 국악은 가야금을 8년 정도 배웠습니다. 김성연(이화여대 국악전공) 선생에게 성금련 류 가야금 산조를 다 배웠습니다. 그리고 황병기 선생님의 침향무 등도 배웠습니다. 앞으로 정신적 여유와 시간이 있으면 선율 음악인 아쟁도 하고 싶고, 강태홍 류 가야금 산조를 더 배우고 싶습니다. 그 후에 가야금산조와 아쟁과 관련된 전통음악(20-30분)곡을 쓰고 싶습니다. 서양의 소나타처럼 산조를 활용하여 대곡을 쓰고 싶습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제 인생의 목표가 그러합니다.- 협회 회원 자격 조건이 있다면는요. -제가 알기론 대한민국 국악계 등 국악게에서도 창작활동을 활발히 하고 있는것으로 압니다. 굳이 자격이 있다면 고정된 매체를 기준으로 발표된 음원이나 발표회 프로그램, 출판물에 게시된 자료을 협회에 제출하며 준회원으로 가입됩니다. 또한 경력은 상관없습니다.-유영건 회장은 지난 10월 18일 2004 CLSAC 세계총회를 1984년 일본에서 첫 회가 열린 이후 두번째로 개최하는 역량을 보였다. 특히 총회에서 아시아 국가들의 음악 저작권 네트워크를 만들고 지적재산인 창작과 소유 그리고 경제, 사회 및 문화적 측면에서 삶을 풍요롭게 만들 수 있는 가치를 창출하겠다고 한다. 대담/김호규 기자(hg1411@kukak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