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목록
-
공연예술로 하나가 되는 '더원아트코리아' 최재학 대표를 만나다2년 전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서울연희대전'이란 이름의 한 공연이 있었다. 제1회 '장구대전'이란 부제가 붙어있고, 입장권 전석이 판매 되어 화제가 되었다. 무대에서 오직 '장구'만을 가지고 나와 6개 유파별 6인이 개인놀이(설장구)를 무대화하여 한 판을 벌인 것이다. 당시 출연자들은 관객들의 폭발적 호응으로 무대와 관객이 하나가 되는 신명나는 공연을 보여 주었다. 관객들의 반응에 고무되어 지난 해에는 2차 연희대전이 열렸는데, '북'이 부제였다. 1회 때보다 출연자도 더 많아졌고, 북 공연만으로 북의 다양하고 독특한 맛을 보여주어 큰 센세이션을 선사했다. 이런 이색 기획으로 새로운 바람을 몰고 가는 공연기획에 주목하여, (주)국악신문 이동식 대기자가 '더원아트코리아' 기획사의 최재학 대표를 만나서 공연예술의 새바람에 대한 기대와 포부를 들어보았다. Q. 안녕하세요. 공연예술에 새바람을 불어 오셨다던데요. A. 네, 최근 기획한 공연 모두 티켓 판매가 매진되었습니다. 장구만으로 장구만의 멋과 다양한 얼굴을 새롭게 펼쳐보자는 것이었는데 모두 판매만으로 매진되었으니까요. 그래서 2회에는 '북'을 가지고 더 많은 분들이 참여하는 공연으로 키워 보았는데 이것도 '인서울'하기가 좋았습니다. 전통예술도 이렇게 형식을 다시 설정하면 우리 젊은 분들에게 끌릴 수 있구나 하는 새로운 인식의 변화를 서로 공감하게 된 것이지요. 올해는 세번째로 '벅수'만을 가지고 판을 짜보려고 합니다. 저는 원래 '꽹과리'를 배운 국악인입니다. 제가 익히고 여러 사람들이 참여하는 이런 풍물연희가 이 시대에 동시대성을 가지고 있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시작했고, 시대의 요구에 어떻게 하면 함꼐 갈 수 있는가에 초점을 맞추었죠. 풍물 고유의 색채는 살리되, 형식을 좀 비틀어보자, 그렇게 우리 젊은 현대인들이 좋아할 수 있는 공연을 만들어 보자고 기획을 해 본 것인데 1회 때 크게 주목을 받게 되었습니다. 당시 명인보다는 중견 연희자들이 나와서 서로 에너지를 주고 받으면서 더욱 시너지 효과를 낸 것 같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젊은이들에게 많은 무대를 주고 싶습니다. 장구대전 6인, 6개의 유파는 김병섭류 호남우도농악의 이동욱, 최상근류 호남좌도농악 설장구의 염창수, 김동언류 호남우도농악 설장구의 임재태, 박염류 영남농악 설장구의 김한준,김형순류 호남우도농악 설장구의 박현승,김기복류 안성남사당놀이 웃다리농악 설장구의 하현조이다. Q.서울연희대전이라고 이름이 거창해서 무엇을 보여주는가 했더니 결국에는 풍물을 다양하게 해석하고 새롭게 펼치는 것이군요, 기존의 공연을 벗어난 노력이 보이던데... A.최근 우리 공연계를 살펴보면, 우선 창작을 해야한다는 관념이 우선적으로 앞서다 보니...... 낯선 창작공연이 많은데 이게 호응이 쉽지 않습니다. 풍물 악기, 혹은 풍물 자체의 형식도 각각이 갖고 있고, 연희자는 저마다의 특장(特長)이 분명히 있는데, 이런 공연들은 관객들의 반응을 위한 일종의 충격요법식 공연을 해야한다는 생각에 파묻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희는 연주하는 악기 각각의 맛과 연희자의 특장을 살려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말하자면 이제 현대인들에게는 보다 친근하고 은근하고 그만의 독특한 개성이 있으면 더 좋아하고 끌려 올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Q.그동안 공연한 것을 보니까 'ㅊ ㅊ-하다'라는 제목의 페스티벌을 1년에 한번씩 열었더라고요. 이거 무슨 뜻이고 어떻게 읽어야하는지 .......'ㅊㅊ-하다 ' 공연 A.하하, 죄송합니다. 저는 청년들이 무언가 일을 해내고 있다, 그것을 청춘들이 이해하고 사랑해줄 수 있다는 뜻에서 "청춘이 청하다" 혹은 "청년이 채우다"란 뜻을 요즘 유행하는 두음(頭音)만으로 표기하는 방법으로 고안해낸 것인데 사실 그냥 '치읓 치읓하다 '로 읽어도 됩니다. 이것도 좀 사람들에게 어필하는 방법을 찾다가 생각해낸 것인데, 대기자님에게 처럼 궁금증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지 않습니까? Q. 하하 그렇군요. 그동안 3년 연속으로 이 'ㅊ ㅊ- 하다'를 해왔는데 어떻든가요? A.예, 처음에는 우선 무용만으로 공연 전판을 꾸며 보았습니다, 거기에 2회 째에는 무용에다가 '기악'이 더 들어갔고요, 세 번째에는 무용, 기악에다가 성악이 더 들어갔고요. 지난해 4회 째에는 여기다가 연희까지 들어갔습니다. 말하자면 무용에서 기악, 성악, 연희까지 들어가는 큰 잔치판으로 점점 확대해 나간 것이지요. 그만큼 판이 커지고 다채로와지니, 관객들은 지루해 하지 않고 즐거워하시더라고요. 전통예술도 이제 젊은 분들에게 더 사랑을 받아야 하는데 젊은 청춘들이 좋아하는 것을 청춘 예술가들이 만들어가서 청춘들의 판을 만들어나가자는 의도가 일단 시작부터 좋은 반응으로 이어진 것 같습니다. Q.제가 관심을 갖게 된 것 중에는 '사물놀이의 명품화' 뭐 이런 것을 추진한다는데 그게 무슨 말입니까? 사물놀이는 시간이 지나면 좀 시끄럽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기는 하던데 A.사물놀이는 한국 전통타악의 대표적인 브랜드로서 대중화가 되었습니다만 과거 원형의 모습이 가지고 있는 음악성이 많이 엷어졌다는 지적을 받고 있지요. 어느 큰 공연에 끼어들어가는 형식이 아니라 사물놀이 자체만으로도 독립적인 무대가 되고, 감동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서 사물놀이의 명품화를 꾸준히 추진, 지원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인 것이 여성타악연희 그룹 '도리'의 지원입니다. 여성들만으로 구성된 '도리'팀이 사물놀이가 가진 고유의 음악성을 복원하여 관객들에게 사물놀이의 고품격 감동을 선사하는 것인데, 바로 그 사물놀이 명품화 프로젝트 ‘세 개의 사물’로 2019년에는 수도권 5군데, 2021년에는 전국 8개 도시 투어를 성공적으로 진행한 바 있습니다. ‘세 개의 사물’은 말 그대로 세 편의 각기 다른 사물놀이 ‘영남농악’, ‘우도굿’, ‘웃다리풍물’을 의미합니다. 사물놀이의 고급화와 명품화를 지향하는 이 그룹이 벌써 창단 10주년을 맞아 올 연말에는 창단 10주년 기념공연을 열기 위해 목하 노력하고 있습니다. 사물놀이만이 아니라 비나리, 설장고, 판굿 등이 합쳐져서 더 큰 재미를 선사하려고 합니다. Q.여러가지 많은 활동이 있군요. 이 더원아트코리아(theoneartkorea) 라는 공연 기획사의 목표는 무엇인가요? A. 저의 목표는 "문화예술의 생태계를 바꾸자"는 것입니다. 전통공연예술활동을 하다보니 참 이상하다라는 생각을 했어요. 공연을 하면서 티켓은 거의 초대 혹은 유료를 가장한 초대, 또는 강매? 그리고 활동을 하는 사람들은 관련 직장을 들어가지 않는다면 레슨, 그 레슨생들과 가족들은 그들 공연의 관객이 되고요, 창작공연도 그렇습니다. 창작공연을 하려면 지원사업을 받아야 하는데, 그게 주객이 전도가 되는 느낌입니다. 창작작업을 하기위해 지원사업을 활용하는 것이 아니고, 지원사업에 맞춰서 창작을 해야한다는 것이지요. 그리고 선생님들, 또 선정 권한을 가진 분들과의 인맥이 형성되지 않으면 공연하기도 힘든... 이런 상황을 깨기 위해서는 좀 판을 흔들어야 하지 않는가? 하는 것입니다. 새로 판을 짜고 새로운 형식의 공연이 이뤄지면 사람들이 주목을 하고 따라 오고, 그것으로 생태계가 커지고 하는... 이런 새로운 세상을 열어보자는 것입니다. Q.공연예술분야의 안정적인 공연환경이 중요한데 이걸 어떻게 풀어야 하는지 A.문화예술분야에서도 사회적 기업의 역할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우리나라의 공연 풍토는 국가의 육성에 의존해오고 있는데, 이것이 사실 공연 생태계를 죽이는 역할도 하고 있지요. 정부가 지원을 줄이면 어떤 것도 유지하기가 쉽지 않은 상태가 되는... 그러기에 다른 분야에서처럼 공연생태계에도 진정한 의미에서 사회적 기업이 나와야 하고요... 대부분의 문화예술사회적 기업은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사회적 목적을 위해 사회적기업을 만들었다기보다는 먹고 살기 위해 사회적기업의 제도에 들어왔다고 보는게 맞을 것 같습니다. 공연예술가들이 그들의 활동만으로도 생계를 유지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가거나 혹은 그들의 예술활동에 있어 집중이 가능하도록 서포터 하는 역할을 하고 그런 산업을 정착시키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아직 어렵지만 전통공연 쪽에서도 예술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공연 매니지멘트 제도도 펴 나가고 싶고요. Q.말하자면 전통예술시장의 규모가 더 커져야 하는 것 아닌가요? 앞으로의 전망을 어떻게 보냐요? A.사실 지금까지 경험으로 보면 그리 낙관적이지는 않습니다. 시장이라는 것은 상호작용이 되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저희 같은 회사가 공연 매니지먼트 상품을 내놓아도 공연자들은 거기에 돈을 쓰는 것에 인색해요. 공연을 어떻게 매니지먼트 하는가에 따라 소비자들이 움직일 수 있고, 그러한 활동 성과가 결국은 본인을 키울 수 있는 상호작용을 만들어내는데 기본적으로 대부분 전통예술가들은 본인을 위한 투자를 손해라고 생각하는 인식이 강하고, 그런 인식을 바꿔내는 것도 우리의 목표입니다. 실제 우리의 매니지먼트를 받아서 공연해 본 사람들은 공연에만 집중할 수 있고, 출력되는 결과물들에 만족해 하면서 힘을 얻고 있기도 하지요. Q.결국에는 작품이 잘 나와야 하는군요. 젊은이들이 흥미를 느끼고 접근할 수 있도록 프로그램이랄까 공연 각 종목의 화제성, 혹은 끌림 이런 것들을 잘 버무려내야한다는...? A.그렇지요. 작품이 매력이 있고 아티스트들도 매력이 있다면 얼마든지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그 매력을 저희가 직접 기획하거나 제작하는 것이고, 우리는 이 방면의 의뢰자를 최대한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할 자신이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공연도 점차 컬리티를 높여서 명품화 하고 완성된 작품으로 사랑을 받는 판이 만들어지겠지요 아이구, 저희가 감사를 해야지요. 앞으로 국악신문과도 여러 가지 기획을 함께 고민하고 많은 공연단체나 국악인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마음을 합치기를 기대해 보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 시대가 요구하는 동시대성을 읽어가고 있는 최대표가 우리에게 국악의 센세이션을 선사한 '장구대전'에 이어 '북대전' 그리고 '벅구대전'의 무대화에 대한 기대가 크다.
-
국악인생 60여년, 한상일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한상일(1955~) 대구시립국악단 예술감독 및 상임지휘자는 국악에 입문한 지 올해로 60여 년을 맞는다. 때 맞춰 지난 1월 25일 서울문화투데이 신문에서 선정하는 제15회 문화대상에서 국악부문 대상을 수상했다. 국립창극단을 대형화하고,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했으며, 우리 민요 아리랑의 보급에 큰 기여를 해왔으니 만큼 수상은 당연해 보인다. 한 감독을 3월 30일 오전 창덕궁 근처에서 만났다. 창덕궁의 건너편에 있었던 옛 국악학교 터와 창극 연출가 허규(1934~2000) 선생이 운영하던 북촌창우극장에 대한 추억이 아련한 곳이다. 한 감독이 배우고 공연했던 시간들이 켜켜이 밴 공간들이었다. 한감독의 음악 인생은 아버지 한범수(1911~1984) 선생에게서 비롯됐다. 해금과 대금 연주에서 ‘한범수류’를 만든 장인이셨다. Q. ‘한범수류’는 어떤 특색을 가졌나요? A. "진양은 음양오행설에 입각해 가락을 짰고, 중모리에는 바리에이션을 넣었어요. 대개 산조는 판소리 어법을 많이 차용하는데 선친은 판소리 어법을 배제한 채 기악을 판소리의 아류가 아닌 개성을 갖춘 독자적 영역으로 만들었죠. 독립곡 형태의 양식을 갖는 잘 짜인 산조였어요.” 한 감독은 출생지인 충남 부여에서 옮겨와 서울서 살던 9살 무렵부터 선친에게서 악기 연주를 배우기 시작했다. 당적(소금)에 입술을 갖다 대고 ‘빈 병 불 듯이’ 소리를 내는 법부터 배웠다. 맨 처음 부른 곡은 아리랑이었다. 유일하게 알던 곡이었던 까닭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들어보시더니 ‘재능이 있다’ 느끼셨는지 ‘한번 해보자’고 하시더군요” 본격적인 교육은 배문중학교에 진학하면서부터였다. 전문 과정이니 만큼 선친은 곡의 음악적 성격과 그에 합당한 표현법에 관한 이론을 먼저 설명하신 후에 연주하는 법을 가르치셨다. ‘이론 먼저 기능 나중’식 교육법이었다. 산조곡은 음양오행설에 근거한 12주기와 24주기 식 기승전결법을 배웠다. 기자는 연주가 스토리를 가진 채 청중에게 설득력 있게 전달되도록 하기 위함이 아니었을까, 추측해 본다. 아버지의 도제식 교육으로 소금과 대금을 사사한 후에 서울국악예고와 추계예술대학에 진학해 피리를 전공했다. 왼손잡이여서 대금 연주는 접었다. 다른 연주자들과 대금 잡는 방향이 거꾸로여서 합주에 지장을 준 때문이었다. 이후 한상일은 작곡의 길에 들어서 중앙대 대학원 작곡 과정 석사를 거쳐 1987년 국립창극단 기악부 초대 지휘자로 임명되면서 창극에 전주곡을 비롯, 간주곡과 엔딩곡 등을 작곡해 기악 연주를 가세한다. 소리꾼과 고수 2인의 무대인 판소리와 달리 창극에는 출연자가 많이 등장하고 다양한 연기가 표출되는 만큼 기악 연주의 역할이 절대 필요하다고 판단한 데 따른 것이었다. 그는 이 획기적 시도로 창극의 사이즈를 대형화시키는 일대 변혁을 일으켰다. 여기서 그는 국악관현악단 창단의 필요성에 몰입한다. 서구의 오페라나 발레처럼 노래와 춤에 걸맞은 관현악단의 기악 연주가 더해짐으로써 창극 공연의 효과를 극대화시키고 싶었다. 기왕에는 연주자들이 재량껏 즉흥연주로 채우던 부분을 악보에 근거한 연주로 체계화시키고자 한 것이었다. 그의 헌신적인 노력으로 1995년 1월 1일 마침내 국립국악관현악단이 창단됐다. 이 공로로 그는 2000년 국무총리 표창과 2003년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후 모교인 서울국악예술고(현 국립전통예술고)에서 5년간 교사 생활을 했고, 동국대학교에서 20여 년 간 한국음악을 가르치면서 인재 양성에 힘을 쏟았다. 동국대에서 1년 정도 재직했을 때인 1999년 문화부에서 연락이 왔다. 초대 박범훈 단장에 이어 제2대 국립국악관현악단장으로 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기관을 창설시킨 주역이었으니 만큼 자연스러운 주문이었다. 동국대 강의가 걸림돌이 됐으나 ‘강의에 지장을 주지 않도록 하겠다’는 한 교수의 다짐과 설득에 당시 송석구 동국대 총장이 흔쾌히 응해주면서 그는 겸직을 할 수 있었다. 한 단장 재임 시절 국립국악관현악단은 그의 창의력 넘치는 작곡과 연주 지휘에 힘입어 창극, 무용 등의 장르와 동반 성장하며 "한국음악을 새로운 경지로 끌어올렸다.”라는 평가를 받았다. ‘맥’과 ‘강강술래’, ‘대(代)’ 등이 그의 분신들이다. 그는 특히 강강술래의 매력을 잊지 못한다. 진도 아낙들이 힘든 시집살이의 슬픔과 고된 노동의 괴로움을 노랫말과 군무로 씻어내는 놀이문화여서 전국화시켜 국민놀이로 승화시킬 수도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비애와 한을 해학과 긍정으로 바꾸는 지혜와 의지가 표출되는 놀이인 까닭이다. 강강술래의 다양한 버전을 작사작곡해 각계각층에 전파하고 싶어 한다. 기자 역시 대립과 갈등이 있는 우리 사회 전 분야에 강강술래 놀이가 확산되면 모순 해소에 큰 도움이 될 것으로 전망한다. ‘강강술래의 아리랑화(化)’일 터이다. 한상일 감독의 이력 가운데 특이한 부분은 박사 코스였다. 성균관대 유학대학원에 입학해 철학을 전공한 때문이었다. Q. 왜 갑자기 동양철학을 공부하실 생각을 하셨는지요? A."원래는 예악학(禮樂學)을 공부하고 싶어서였어요. 전통음악을 하다 보니 예악의 뿌리와 이론적 배경을 알고 싶었죠” 그러나 기대와 달리 유학대학원에서는 사서삼경을 비롯한 경전 해석만 배웠지 예악에 관해서는 공부할 길이 없었다. 책도 교수진도 없었던 까닭이었다. 그는 결국 판소리가 어떻게 체계화됐는지의 과정을 연구해 그걸로 학위를 취득했다. 억지춘양으로 배운 것들이었지만, 경전 공부가 한국음악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고 깊게 만들어준 효과를 누릴 수 있었다. 소리에 대해 인식을 새로이 하면서 세계인이 좋아할 만한 소리를 개발하기 위해 전통악기를 개량하는 시도에 힘을 보탰던 것도 그런 영향이었다. 국악의 보전과 계승, 창작 지원 그리고 해외 진출을 돕는 ‘국악진흥법’이 지난해 6월 국회를 통과해 올 7월부터 시행에 들어간다. 국악인들의 기대가 모아지고 있다. 현역의 한상일 감독도 환영을 표한다. Q. ‘국악진흥법’은 국악인들의 오랜 숙원이지요. A.-"네, 국악인들이 오랫동안 바라던 거여서 기대가 큽니다. 우리 국악사에 선을 긋는 전기가 될 것으로 봅니다.” ‘국악의 날’을 제정해 우리 문화의 소중함을 길이 간직해 나갔으면, 하는 희망도 피력한다. 일반의 관심을 높이는 데 크게 기능할 것으로 여기는 까닭이다. Q.국악이 국민들에게 다가가기 위해서는 A."국민들로 하여금 국악에 대한 관심을 잃지 않도록 하는 여건 조성이 중요합니다. 일본이 학교 졸업식 같은 행사에 반드시 ‘사미센’ 연주를 동반하고 영화나 드라마, 만화 등에도 일본 음악을 삽입하는 걸 볼 때마다 부러움을 갖게 됩니다. 우리도 그런 사회 분위기가 조성되면 좋겠어요” 한 감독은 대중매체가 좀 더 국악 프로그램 편성에 시간을 할애하는 게 큰 힘이 되는 만큼 정책 차원에서 배려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뜻도 피력한다. 아울러 교육 과정에도 국악 악기 연주 코스가 마련되기를 희망한다. 한때 베네수엘라의 불우 청소년 계도 프로그램이던 ‘엘 시스테마(El Systema)’를 도입해 청소년 국악기악단을 운영하던 중 지도 교수의 운영비 횡령 사건으로 중단 돼버린 사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그 프로그램의 부활을 기다린다. 기자는 국악진흥책 시행을 계기로 세계로 뻗는 K-pop의 흐름에 K-국악도 동참했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 우리 가요가 한국음악 전공자들의 가세로 탄력을 받고 있는 추세를 반영한 까닭이다. 세계 젊은이들이 좋아할 만한 소리와 노래, 춤을 바탕으로 하는 킬러 콘텐츠가 나올 수 있도록 선택과 집중이 이루어지기를 기대한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에 대한 관심도 깊다. 생애 첫 피리 연주곡이 아리랑이기도 했지만, 아리랑이 국악의 대중화와 보급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데다 무엇보다 한민족의 정신이라고 여기는 까닭이다. Q. ‘아리랑에 대한 관심이 많으시다고 들었습니다. A."우리 민족은 기쁠 때나 슬플 때나 즐거울 때나 힘들 때나 아리랑에 의지해 살아왔습니다. 아리랑을 단순한 민요가 아니라 선교사이던 호머 헐버트(1863~1949) 박사의 표현처럼 ‘한민족에게 쌀과 같은 필수불가결한 존재’ 혹은 고난 극복의 수단으로 보고 싶은 겁니다” 한상일 감독은 1989년 무렵 (사)아리랑연합회 창립에 일조하며 임원을 맡으면서 아리랑의 보급과 대중화에 이바지해 왔다. 특히 발굴과 보존 및 아리랑의 가치 구현에 관심이 크다. 19세기부터 중앙아시아와 사할린 등지로 내몰린 동포들이 한국을 이루는 요소들 즉, 겨레의 글 한글과 겨레의 민요 아리랑에 의지해 고난의 세월을 견뎌 왔음을 아는 까닭이다. 그들은 낯선 환경에서도 그곳 풍경을 담은 아리랑 노랫말을 우리말로 지어 불렀다. 그들에게 한글과 아리랑은 등대의 불빛처럼 어둠 속에서 앞을 헤쳐 나갈 수 있도록 길잡이가 되어 주었다. 범민족 차원에서 북한에 존재하는 아리랑도 수집해 보존할 생각도 펴고 싶어 한다. 한 감독은 아리랑을 유네스코 세계무형문화유산에 등재하는 과정에서 음원을 제작하는 공헌을 했다. 대표 아리랑을 모아 일류 장인들과 연주했다. 올 6월 대규모의 아리랑축제를 상정해놓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 행사가 성사 된다면 수 천 명의 전국 생활국악인들이 대규모 인간띠를 만들어 대합창을 이뤄내는 순간 대한민국은 용트림을 하며 에너지를 뿜어댈 것이다. 우리 속의 편협과 미움을 떨쳐내는 벅찬 경험을 제공해 줄 것이다. 그 소식을 접하자 한상일 감독이 "벌써부터 가슴이 뛴다”라고 말한 것은 당연해 보였다. 그가 여생의 계획으로 ‘아리랑 정신의 구현’을 버킷 리스트의 맨 윗부분에 올려놓고 있는 까닭이다. 한 감독은 자기에게도 그 기회가 닿기를 갈망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일본이 "일제 강점기에 한국의 아리랑을 가져가 30여곡의 ‘일본판 아리랑’을 작곡했다.”라는 일본 매체의 보도를 접하면서 문화는 창조의 힘만큼이나 보존능력이 필요하다는 데 공감하게 된다. 단단히 움켜잡지 않으면 놓치게 마련이다. 한상일 감독의 아리랑 보존과 전승 노력에 절로 박수를 치게 되는 이유이다.
-
한얼 칠십 서예전을 기대한다.중진 서예가이며 왕성한 활동으로 최근 가장 주목받는 서예가 중 한 분인 한얼 이종선씨가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서예전을 인사동 입구에 있는 전시공간 코트(Kote)에서 11월 17일부터 연다. 이종선 씨는 국악신문에〔한글서예로 읽는 우리음악사설〕을 매주 한편 씩 2년이 넘게 발표하면서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과 아취를 널리 확산시키는 것으로 유명하다. 전시회를 앞두고 이동식 문화대기자가 이종선 씨를 미리 만나보았다. Q. 오랜만입니다. 일년 만이군요. 지난해 이맘 때 [우리음악사설] 전 이후. ‘칠십이이전(七十而已展)이란 이름이 다소 생소한데요? A. 네, 쑥스러운 이야기이지만 제가 올해 칠순 고희(古稀)입니다. 나이가 요즘 말로 7학년으로 접어들게 되었기에 그동안 제가 어떤 작업을 어떻게 했는가를 저 자신도 돌아보고 또 서예를 좋아하시는 분들과도 함께 보는 자리를 준비했습니다. ‘칠십이이’라는 표현은 ‘칠십이구나’ 혹은 ‘칠십일뿐이다’ 등으로 풀 수 있는데 다시 말하면 ‘이제 고희, 칠십인데 어느새 칠십이지만 다만 이제 칠십일뿐이네’ 라는 뜻도 들어가 있습니다. Q. 그럼 어떤 작품들이 선보이는가요? A. 전시되는 작품이 150여 점이 되니 조금 많지요? 저로서는 저의 서예세계의 현재만이 아니라 지금까지의 저의 서예 역정과, 그리고 서예의 이상향을 찾아온 그동안의 노력을 되돌아보고, 그 속에서 앞으로의 갈 길도 다시 생각해보자는 전시입니다. 말하자면 저의 서예작품의 모든 분야, 여기에는 한글작품과 한문작품 국한문 혼서작품 및 사설작품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Q. 이 선생님은 한글 서예의 새로운 풍격을 구현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러한 세계로 들어가게 된 계기가 있었나요? A. 제가 625 전쟁이 막 끝나기 전에 시골 마을에서 태어나 자라다 보니 어릴 때 필재가 있다는 말을 들었지만 서예를 배우지 못했다가 한창 인생을 시작하던 청년기에 사업의 실패를 경험하면서 서예를 만나서 시작했으니 조금 많이 늦었지요. 늦게 시작했지만 여러 선생님들, 특히 소헌 정도준 선생을 만나 대한민국미술대전과 동아미전에서 초대작가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세상에 나오게 되었는데, 서예의 본원이랄까 뿌리랄까, 또 한국인으로서의 서예의 뿌리를 생각하다 보니, 한글의 뿌리는 훈민정음 해례본의 한글자형, 흔히 판본체라고 합니다만, 거기에 있다는 자각이 들어 한글서예 작업에 매진하게 되어, 2002년의 첫 번째 개인전에서 발표를 했습니다. 다만 판본체는 각이 진 엄격한 고딕체인데 이런 정형적인 구도를 벗어나기 위해 새로운 조형, 새로운 장법으로 도전한 것입니다. 물론 이 작업에 대해 좋다고 하신 분도, 나쁘다고 하신 분도 있지만 그쪽으로 저는 끊임없이 천착을 하다 보니 지금 같이 저 나름대로는 어느 정도 완성됐다고 생각하는 것이 되었지요. 저로서는 이것이 저만의 특징적 예술세계라 하고 싶습니다. Q. 최근 쓰신 "뒷동산 도라지꽃"으로 시작되는 '횡성아리랑' 이란 작품을 보니까 맨 위에는 한글 판본체와 광개토대왕체가 섞여 있으면서 마치 도라지꽃이 서로 얼굴을 맞대고 기대어 피어있는 형상의 느낌이 오고, 그 밑의 사설에는 행서로 간 궁체가 받쳐주고 있어서 변화가 있는데 한글서체도 일정하지는 않은 모양이지요? A. 저의 한글서예는 몇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방금 말씀하신 것은 궁체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하여 나온 민체흘림이고요, 훈민정음 원래의 정격 고체, 이것을 제가 자유로운 표현으로 다시 쓴 판본류가 있습니다. 궁체는 여성적인 곡선과 우아함이 특징인데, 저는 여기에 꾸미지 않는 강직한 세로획을 첨가하여 강건함을 표현합니다. 근래의 궁체가 부드러운 곡선에 집착하여 획력이 부족해지는 면을 보충한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민체흘림은 한문서예의 행서를 연마한 후에 한글의 자모음이 갖고 있는 특성을 대입시켜 만든 새로운 획과 조형입니다. 저는 한글서예를 하지만 한문서예, 그 중에서도 안진경의 해서와 행서를 좋아해서 이를 저의 한글서예에 녹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안진경은 강직한 분으로 그의 일생도 등락을 거듭했는데, 서예가로서 안진경은 그때까지 유행하던 왕희지의 부드럽고 우아한 서체에서 남성적이고 강건한 서체로 흐름을 바꿔놓아 사람들이 그의 서체에는 힘줄이 있다고 할 정도로 남성적이면서 굳건하고 탄탄한 느낌을 주는데 이런 요소들을 한글민체에 담아내려고 애를 썼습니다. 그 바탕위에 대소, 강약의 변화와 판본류인 한문고체에서 보여주는 자유로운 장법을 적용해 한글흘림의 영역을 확대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고체라고 부르는 판본체의 글씨 영역이 있습니다. 훈민정음 창제 당시의 엄격한 형태를 많이 연습을 했고, 특히 한글고체의 원류라 할 수 있는 호태왕비, 즉 광개토대왕비를 제가 좋아했기에, 그러한 질박미(質朴美)와 호방함을 나름 구현해냈습니다. Q. 한글서예의 표현세계가 엄청 넓어졌다는 말이군요 A. 네, 저는 우리 한글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살아있는 글자가 되어야 한다고 각합니다. 한자는 네모라는 틀에 맞추어 쓰고 있기에 가로세로 일정한 크기에 맞춰 쓰고, 그 영향으로 우리 한글도 가지런하게 흐트러지지 않게 쓰는 것을 많이 했습니다만 저는 이러한 틀을 부수고 자유롭고 편안하게 하는 예술세계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곧 의미전달이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한자(漢字)건 한글이건 한 자 한 자의 크기도 뜻에 따라 차이가 있고 문장에서의 의미전달의 중요성에 따라 크기나 필법이 꼭 갇혀 있지 않습니다. 내려 긋는 선도 말하자면 꼭 꼬리를 가늘게 빼는 기법을 벗어나서 편하게 마감하지요. 그렇게 하니 우리 한글서예 작품이, 물론 그 안에 한자를 겸용하기도 하지만, 훨씬 우리들에게 친근하고 격조 있게 다가오고 있지요. 다만 이러한 서체에의 도전은 획들의 사용으로 인해 장력이 충돌이 생길 수 있는데, 위에서 흔들린 것은 밑에서 잡아주고, 좌에서 넘어진 것은 우에서 받쳐주고 있고, 위에서 커진 것은 아래에서 작아지며 전체를 흐트러지지 않게 하고 있습니다. Q. 한자 한문을 모르는 세대가 많아지면서 한글 서예의 의미가 더 커지고 있군요. 그런 분들도 한글의 조형세계가 넓어진 것을 보면 좋아할 것 같습니다만 A. 최근 우리 사회가 먹고 사는 문제를 넘어서서 생활에 여유가 생기고 개인의 취미를 살리려는 분위기가 형성된 이후에 서예를 찾는 분들이 많아져서 저희는 기쁩니다. 그런 젊은 분들중에는 굳이 어려운 한자 아니라도 한글 서예로 여러 가지 많은 작품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나름대로 새로운 조형을 추구하는 분들도 많더라고요 Q. 한글 서예는 외국인들도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 어떤가요? A. 그동안 한글서예를 세계에 알리기 위해 여러 행사를 했습니다. 2019년에 몽골에서 초대전을 크게 한 적이 있는데, 여기에는 외국인 작가 5명, 몽골인 작가 8명도 함께 한글서예에 참여한 바 있습니다. 중국 절강성 소흥에 있는 월수(越秀)외국어대학에서 한글날을 맞춰 한극과 서예 강좌를 하였고 한글서예 전시회도 연 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미국, 러시아, 우즈베키스탄 등에서도 한국서학회 주최로 한글 서예전을 연 적이 있습니다. 외국에서도 점차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Q. 그래도 한자서예가 모든 서예의 바탕 아닙니까? 또 기본으로도 잘 공부를 해야 하는 것이기도 하고 A. 물론입니다. 사실 서예의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서 갑골문, 고문, 금문, 전서 등은 한문을 모르면 어려운 것이 사실입니다만, 그만큼 표현 세계가 깊고 넓은 만큼 공부하는 맛이 나지요. 특히 서예는 단순히 뜻을 전달하는 역할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글자 하나하나, 문장 전체를 통해서 서예를 하는 사람의 인격과 격조와 삶의 자세 같은 것을 느끼게 하니 그만큼 멋진 예술이지요. 한자 서예를 오래 연마하면 글씨와 사람이 하나가 되지요.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르면 사람이 꼭 이런 저런 것을 쓴다는 느낌도 넘어서야 진정한 서예가 된다고 합니다. 옛날 중국인이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반드시 마음으로 하여금 붓을 잊게 하고, 손으로 하여금 글씨를 잊게 하여, 마음과 손이 하나가 되면 글씨에는 쓸데없는 생각이 없어진다.” Q. 지난 번에도 궁금했지만 여전히 궁금한 것은 컴퓨터로 깨끗하고 정제된 글씨체를 모두 재현함으로써 컴퓨터 키보드가 붓을 대신하는 세상에 글씨를 쓴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하는 점입니다만? A. 단순히 글자만을 추구한다면 그런 말을 할 수 있겠지만 서예는 그것이 아니지요. 추운 겨울을 견디고 이른 봄 기어이 꽃을 피워내는 매화나 사철 푸르름을 잃지 않고 곧게 뻗어 오르는 대나무, 아무도 알아주는 이가 없어도 홀로 심산유곡에서 잔잔하고 맑은 향기를 발산하는 난초처럼 서예에는 자신의 삶을 반성하고, 어떤 상황에도 흔들리지 않는 마음을 유지하려는 선인들의 정신세계가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그러기에 서예야말로 첨단 전자 문명에 찌드는 우리들의 심성(心性)과 덕성(德性)을 개발해 능히 이 세상을 살아나가는 힘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예술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교육을 시작하는 초기 단계인 초등학교에서부터 서예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선조들의 정신세계가 담겨 있고 인격 수양을 하는 중요한 과정인 서예를 가르치지 않으니 최근 우리 사회가 혼란스러운 것이 아니냐고 저는 생각합니다. Q. 이 선생님의 한자서예 세계도 워낙 다양하고 광대하다는 평이 있어서, 이번 전시회에 어떤 작품이 보여질까 궁금하기도 합니다. A. 네 지난 시간 저도 정말 열심히 공부하고 작업해서 이룬 것도 없지는 않지만 서예라는것은 끝이 없는 길이지요. 아직도 해야 할 일, 가야할 길이 많고도 길다는 뜻입니다. 고희라고 하지만 서예는 더 많은 변화와 신 개념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다만 칠십일 뿐이다’라는 뜻의 전시회 제목을 사실, ‘이제 겨우 칠십일 뿐이다’ 라는 말로 바꿔서, 더 많은 변화를 추구하는 전환점으로 삼고 싶어서 저의 서예의 역정을 되돌아보는 것이기도 합니다. Q. 이번 전시회에 동문, 후배들의 작품도 나온다고 하지요? A. 제가 소헌 정도준 선생께 배웠고 저와 같이 동문 수학하면서 동고동락한 친구 겸 후배들이 ‘오거서루(五車書樓)’ 회를 만들어 같이 또는 개별 활동을 하고 있는데 그들의 작품 하고요, 그동안 서로 방문 교류를 해 온 중국 소흥(紹興, 샤오싱)의 난정서법가협회 회원 5명이 축하의 작품을 보내주셨습니다. 어쨌든 고희전인데 마침 이분들도 전시장에 오셔서 고희연을 열어주신다고 하니 저로서야 영광이지요. Q. 이번에 전시하는 곳이 코트라는 곳인데 좀 생소한 장소군요? A. 인사동의 남쪽 입구인데 서울이 재개발로 옛모습을 다 잃어가는 상황에서 여기는 서울 종로의 근대의 역사가 남아 있는 유일한 공간입니다. 여기 젊은 여사장님이 이런 역사적인 공간을 예술의 메카로 지켜내려고 많이 노력하는 분이고요. 그래서 이곳 넓은 공간을 쓰게 되었습니다. 와 보시면 아니 서울에 이런 공간이 남아있단 말인가 하며 놀라실 분이 많을 것입니다. 넓은 공간에서 서예의 역사를 함께 보는 것이지요. 전시는 17일에 시작해서 25일까지입니다. 많이 와 보시길 바랍니다. Q. 다시 긴 시간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전시회의 성공을 빌겠습니다. A. 네 감사합니다. 꼭 와서 보시기를 청합니다.
-
소리꾼 장사익, "사람은 만나야!"노래로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 사랑을 받는 가수들에게는 목소리가 가장 큰 매력일 것이고 그런 사람을 수식하는 말로 노래하는 사람이라는 가인, 노래손님이라는 가객, 노래왕이라는 가왕 등의 애칭이 있는데, 그런 등급을 떠나서 진정으로 가수에게 붙여줄 수 있는 최고의 호칭은 소리꾼이 아닌가 한다. 원래는 판소리를 하는 분들에게 붙이는 호칭인데, 대중가수에도 이런 호칭을 붙여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넘치는 분이 있다면 나는 단연코 장사익 씨를 들고 있다. 아마 여기에 시비를 걸 분들은 많지 않을 듯하다. 우리 삶의 구석구석 외롭고 슬프고 힘들 때를 족집게처럼 집어내어 노래로 위로해주고 눈물을 닦아주는 소리꾼 장사익, 해마다 전국을 돌며 노래로 우리의 마음을 풀어주던 장사익 씨가 코로나19 사태로 몇 년 동안 우리를 만나지 못하다가 마침내 10월 5일 세종문화회관에서 음악회를 연다고 한다. 4년만의 음악회다. 장사익이 벌일 소리판의 타이틀은 ‘사람이 사람을 만나’였다. 타이틀을 접하는 순간 문득 간절하게 장사익 님, 사람 장사익을 만나고 싶어졌다. 장 선생과는 사람과 사람으로 몇 번 만난 귀한 인연이 있었다. 그래서 국악신문에 그 분 만나서 4년만의 음악회 이야기를 들어보자고 제의하고는 다짜고짜 연락을 취해 장 선생 집을 찾았다. 원래는 아무리 전직이라고 하더라도 기자들에게 집을 잘 공개하지 않는데, 마침 세검정 근처에 있는 집으로 바로 오란다. 비탈을 깎아서 조성된 주택가를 땀을 흘리며 걸어 올라가니 미리 나와 있다가 환한 웃음으로 맞이해주신다. "좋아하는 시인 마종기의 시 중에 ‘사람이 사람을 만나 서로 좋아하면 두 사람 사이에 물길이 튼다’ 는 구절이 있어요. 아는 사람의 추천을 받아 그 싯구절을 읽듯이 외우듯이 그냥 입으로 중얼거리고 흥얼거리곤 했는데, 그동안 여러 분들을 직접 만나지를 못했으니 이 구절처럼 직접 만나고 싶은 마음이 너무나 간절해졌지요. 물길이 트이면 마음도 통하고 그러면 친구도 되고 슬픔도 나눌 수 있잖아요? 그리고 행복해지고요. 제가 흥얼거리는 것이 노래가 되기는 하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도 노래를 부른 지 30년인데, 원래 제 노래가 그런 것이니 이런 노래도 들려드리고 싶고, 그렇게 모두가 사람으로 만나 마음의 물길을 트게 하고 싶어서 준비를 했는데, 다행히 코로나도 마침 많이 물러가네요. 오늘 아침 맑은 가을 하늘처럼 말이지요.” 누구나 자기가 좋아하는 가수가 있고 좋아하는 노래에 꽂히는 사연이 있다. KBS초대 북경 특파원을 하고 돌아온 1996년에 우연히 친구의 권유로 세종문화회관에서의 장사익 공연을 객석 맨 뒤에서 본 순간 나는 이 걸쭉한 목소리, 우리의 북을 반주로 하는 그의 긴 호흡의 영창(詠唱)에 빠져들고 말았다. 힘든 삶을 살다가 45살이라는 늦은 나이에 가수로 데뷔하게 된 그의 삶의 족적도 노래의 감동을 더해주었다. 곧 CD를 사서 매일 밤 10시 회사 일이 끝나고 집까지 가는 동안에 몸과 마음이 지친 상태로 차 안에서 듣고 또 들었다. 찔레꽃, 국밥집에서, 꽃, 섬, 그리고 하늘 가는 길 등등. 특히나 하늘 가는 길이 가장 가슴에 와 닿았다. 그것으로 나는 몸과 마음을 풀면서 소리꾼 장사익의 영원한 팬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저는 시인들의 시를 노래로 만들어 부르는데요, 이번에도 마종기 시인뿐 아니라 서정춘 시인의 "11월처럼”, 허형만 시인의 "구두”, 한상호 시인의 "뒷짐”을 노래로 만들어 부릅니다. 모두 우리들 삶 구석 풍경을 그린 멋진 시들입니다. 우리가 목소리로 노래를 부른다면 시인들은 시가 곧 노래지요. 그런 시인들의 시를 보면 시인들이 가수고, 저는 목소리를 빌려 그 시를 전해주는 역할이지요. 시인들의 시에는 기가 막힌 시어(詩語)들이 있잖습니까? 그 격조 있고 의미 있는 세계를 노래로 전하고 싶은 것입니다. 저처럼 노래를 좀 못해도(웃음), 좋은 시는 그 자체로도 먹고 들어가잖아요.” 아름다운 시로 장 선생은 미당 서정주의 ‘황혼길’을 예로 든다. 이제 나이가 들어 삶을 마감하는 것을 "언덕 넘어 딸네 집에 가듯이 나도 이제 잠이나 들까”라고 해서, 우리의 삶과 죽음을 그렇게 깔끔하고 진하게 갈음해 줄 수 없단다. 그런 시인들이 온 힘으로 찾아낸 시어들을 노래로 들려주는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하늘 가는 길’이란 노래도 바로 그런 경지일 것이다. 그의 노래에는 고된 삶이 있고 그 삶을 넘어선 죽음이 있는데, 그 죽음은 힘들고 외로운 삶의 연장이겠지만, 그것을 노래로 넘어서서 모두에게 해원(解寃)의 평화로운 세계를 열어준다는 것이다. "흔히 우리에게는 한이 많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저는 우리들은 한에 얽매이는 게 아니라 그것을 부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싶습니다. 진도 사람들의 흥타령 같은 것을 들어보세요. 그들은 삶의 모든 힘든 것을 풀어버립니다. 민요는 맺힌 것을 풀어버리는 것입니다. 한이 맺히면 원(寃)이 되는데, 이 원을 풀어주는 것이지요. 그게 곧 해원(解寃)입니다. 우리들의 노래에는 이러한 힘이 있지요. 저도 그런 삶의 노래를 함께 부르고 나누고 싶은 것입니다” 지난 6월 세계적인 반 클라이번 국제 콩쿠르에서 우승한 임윤찬 군이 인터뷰에서 우륵의 가야금 소리에서 애이불비(哀而不悲)의 경지를 언급해 화제가 된 적이 있는데, 서양 악기를 연주하는 청년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온 것을 많은 사람들이 놀라워했지만 사실 김소월의 ‘진달래꽃’이란 시에 짙게 담겨있는 이런 정서처럼, 슬프더라도 드러내 슬퍼하지 않는 경지가 곧 우리 민족정서의 본질적인 속성이라면 장사익의 노래에서 바로 그런 정서를 공감하게 한다고 하겠다. 그것이야말로 한국인의 노래일 터이다. 장 선생의 말을 듣고 있는 동안 창밖으로 먹구름이 몰려오더니 한바탕 소나기가 온다. 멋지게 마련한 창 밖 수반(水盤) 위로 수많은 물방울 들이 떨어져 수 십대의 팀퍼니 소리를 듣는 것 같다. 갑자기 눈 앞의 먼지를 다 씻어가고는 곧 햇살이 나온다. 2004년부터 2006년 미국 순회공연에서 우리 동포들의 눈물을 바가지로 흘리게 한 것은 유명하다. 어떤 분이 와서 실컷 울고 나서 속이 시원해졌다며 사이다를 한 박스 마신 것 같았다고 하더란다. 우리 말을 모르는 미국 음악계에서도 "당신 노래의 뜻은 모르겠지만 당신 노래를 들으니 바로 한국의 노래임을 알겠습니다.”라는 반응을 얻어낸 것도 바로 이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장사익의 노래에서 블루스와 같은 인상을 받았다고 했다는데, 거기에 덧붙여 텁텁한 그의 목소리가 막걸리를 닮았다는 말에 ‘막걸리 블루스’가 아니냐고 했더니 장 선생이 펄쩍 뛴다. "저는 술 담배를 전혀 못합니다. 아니 안합니다. 그러니 막걸리 블루스라는 말은 어울리지 않지요. 그냥 우리 한국인들이 편하게 부르던 우리들 식의 노래를 할 뿐입니다” 우리 한국의 노래는 중국이나 일본과 무엇이 다른가? 그것은 바로 막걸리로 대표 되는 술, 그리고 된장으로 대표 되는 식재료와 식습관의 차이가 아니겠는가? 된장과 마늘과 고추를 즐겨 먹는 한국 사람들, 그들이 나고 자라고 죽으며 보고 듣고 느끼고 함께 사는 이 땅, 그것이 바로 한국의 노래인 것이리라. 그러기에 우리 전통음악에는 징이 있고 북이 있고 꽹과리가 있고 꺾음과 풀림과 추임새가 있다. 그것들이 바로 한국의 음악이자 한국의 노래이다. 장사익은 대중가수라고 하지만 그의 노래에는 전통의 모든 요소들이 들어있고 녹아있어 대중음악이니 국악이니 하는 구분이 의미가 없다. 그런 그의 소리는 때로는 가슴을 후비고, 슬픔과 즐거움, 그리고 간절함 그 자체다. 어린 시절 동네 뒷산 공동묘지에서 하루 30분씩 소리를 질러 목이 트인 데다가 마흔다섯 데뷔 전까지 전자회사·가구점·독서실·카센터 등을 전전하면서 힘들게 살아온 삶의 경험이 그 속에 녹아들어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기에 그의 소리가 한국을 대표하는 소리로 인정받는 것이리라. 사실 우리들이 의식을 잘 하지 못하지만 장사익의 노래는 박자가 잘 안 맞는다. 스승으로 모셨던 타악기의 명인 흑우 김대환 선생이 이에 대해 "박자 없는 노래”라고 한 이유이다. 가끔씩 박자가 늘어지고 음정이 덜 올라가기도 한다. ‘찔레꽃’ 노래가 그랬고 ‘섬’이란 노래도 그렇다. 그것은 그의 노래가 자연발생적이기에 그렇다고 한다. 원래 우리들의 민요가 그렇게 생겨난 것 아닌가? 기분에 따라서 흥얼거리다가 거기에 음정이 생기고 박자가 생기는 것이고, 부르다 힘이 들면 잠시 쉬며 가는 것이고... 그런 게 우리 노래다. 엄격한 박자와 음정을 지키는 서양음악이 우리와 다른 점이다. 그 자신이 마시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것이야말로 막걸리의 특성 그대로다. 그런 소리가 사람들에게 위로를 주었다. 이번 공연에 트럼펫을 하는 원로 음악인 최선배 씨가 나온다. 그 얘기를 하니 눈이 반짝이신다. "우리의 1세대 재즈음악가로 유명한 분이지요. 제가 어려울 때 삶을 이끌어주시고 음악에 눈 뜨게 해주신 분 중 한 분입니다. 1970년대 종로구 공간사랑에서 고 김대환선생과 한국적 프리재즈를 실험했고 그 무렵 김덕수 사물놀이, 공옥진의 병신춤이 그를 이어 태어났습니다. 말하자면 공연예술의 살아있는 역사입니다. 홍대 앞 지하 공연장에서 연주도 오래 하셨고요. 선배 음악인들이 먼저 가셨지만 아직 현역의 소리를 내주신다고 해서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습니다 ." 장 선생으로서는 이번 공연이 부활의 날개짓이라 할 수 있다. 젊을 때와 달리 잦은 공연과 연습으로 성대가 붇다가 굳어져 좁아지는 등 소리를 내기 힘든 상태가 되어 3번이나 수술을 받아야 했는데, 최근 코로나 사태로 쉬면서 목도 자연스럽게 되살아나 이제 다시 옛날의 소리를 들려줄 수 있게 되었단다. 다만 높은 고음은 예전처럼 올라가지 않지만 이 또한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조금은 편하게 노래를 하겠다고 한다. "우리네 삶이 그렇지요. 쉬어가라는 것이지요. 목이 갈라지는 것도 천천히 가라는 것 아니겠어요? 그동안 너무 목을 많이 썼기에 그런 것인데, 마침 코로나로 목을 충분히 쉬게 되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장사익 씨는 공연도 공연이지만 그의 노래를 듣고 싶은 자리라면 격식을 차리지 않고 찾아가 노래를 들려주는 것으로도 유명하다. 얼마 전 돌아가신 분 중에 자신의 장례식에서 그의 노래를 듣고 싶다고 하신다는 말을 듣고는 기왕이면 돌아가시기 전에 들려드리겠다고 곧바로 달려가 노래로 행복하게 돌아가시게 해 드렸다고 귀띔을 한다. 바로 그의 노래 ‘하늘 가는 길’이 일찍 열어 보인 대로 죽음은 삶의 연장이고 그 죽음을 담담히 아름답게 맞는 것이 우리들의 소망이라면 장사익 씨의 노래가 그런 역할을 해주는 게 아니겠는가? 오랫동안 만나지 못했던 사람들을 직접 만나 서로 마음의 물길을 트겠다는 이번 공연은 서울을 시발로 전국을 돌 게 될 것이다. 이제 코로나로 거리두기, 집합 금지 등의 제한이 풀어지면서 야외에서 서로 입을 가리지 않고도 만날 수 있게 되었다. 사람들이 서로 만나 부대끼며 슬픔과 기쁨, 용기와 믿음을 나누는 것이 우리들의 세상이었기에 장사익의 소리, 노래가 듣고 즐기는 것을 넘어서서 우리가 사는 세상다운 세상의 새 출발을 다짐하는 장이 될 것을 기대해본다.
-
[Chief Reporter Interview] Chair professor Park Beom-hun, ‘Finding New Terrain in Korean Music’In March of next year, the Department of Korean Music will begin their courses In the middle of August, a man located in his professor’s office is thinking hard about something and thus unable to pay attention to the changing weather outside his window. This man is a musician of Korean traditional music. But also a composer, a music conductor, a Korean traditional music scholar, a university president, an educational and cultural policymaker, and once again returning as a Korean traditional music scholar while looking after his professor’s office, chair professor Park Beom-hun. Recently, Park Beom-hun has been busy with the preparations for the opening of the ‘Department of Korean Music’ at Dongguk University Seoul Campus, deciding on the full-time professors and chair professors, an administration, and so forth. Chief reporter Lee Dong-sik looked for Park Beom-hun, someone he regards as a close acquaintance since the time that Lee was a reporter at KBS. During the 80-minute interview, it became clear that the topic of conversation was the promotion of Buddhist music as new terrain in Korean music by the religious university. From this point onwards, let us listen to his thoughts. This article was translated by Linda Pauw (intern reporter) Q. Chief reporter Lee Dong-sik – Instead of going on vacation what are you doing in this hot weather? A. Chair professor Park Beom-hun – A pleasure to see you. This fall semester we are checking various matters, such as whether the received applications of students for the opening of the college of arts Korean Music Department are going according to plan. Opening a new department is a lot of work. Our department will accept all new students via rolling admissions and there is exactly one month left for this. Creating the content and means of education of the subjects that fit the new department’s vision and purpose of establishment, the confirmation of professors, but also deciding the factors of the screening process, and becoming acquainted with the defined evaluation criteria et cetera are all tasks that need to be confirmed and examined one by one. Q. Lee – Dongkuk University originally hosted their Korean Music Department on their Gyeongju Campus but the news that a new department is being created in Seoul is unexpected. A. It is a bit embarrassing to admit but if art-related departments are not operated in places where associated artists come together, inevitably, problems such as the securing of a faculty or students’ classes will arise. Also, our university is a religious university established by the Jogye Order of Buddhism but when the department was still located in Gyeongju, there was an inadequacy regarding the element of promotion of Buddhist music. Therefore, the university authorities should research and teach the foundations of Buddhist music more in-depth for a new terrain of Korean music to open, this can be achieved by suggesting the establishment of a Department of Korean Music in the middle of Seoul as a way for outstanding artists to be more involved as teachers. As you are well aware, the number of universities in the metropolitan area cannot be increased. Thus, by developing the then slightly lacking research and cultivation of Buddhist music in an era in which the world welcomes Hallyu, our university, as a religious university, thought hard about the viewpoint in which we have to bring up the talents of Korean music that our country is demanding, and decided to create a Korean music department in Seoul by turning around the existing capacity of employees. Q. Earlier, you mentioned that we can cultivate our music through Buddhist music, but the Buddhist music that we know is charged with a specific religious undertone, for instance, Buddhist hymns and chants, Buddhist prayers, and the song ‘Hoesimgok’ that became famous through the singing of Kim Yeong-im and so on. Would it not be difficult to look at this as mainstream traditional music? A. The foundation of Korean music is Buddhism. As it entered the Three Kingdoms period, it has been Buddhism that has lived with our people for more than 1500 years. The remaining melodies, the stories told in the middle of songs, the beats, and such that were made engraved the three elements of traditional music, song, dance, and appreciation, inside of us before we knew it and are manifesting this without us realizing even in modern times. It is a situation of which we are not aware. It was through Buddhist scriptures that we learned about the concept of music, not only Buddhist prayers or chants but also Yeongsan Hoesang, Hoesimgok, Binari, Tapdori, Sanyeombul, and more folk songs among Korean traditional music that is performed are all considered to be Buddhist music. So in fact, it has already deeply penetrated our music. I propose that it is important to precisely know these things, to research what we can take and disregard, and to then rekindle this with our artistic talents of this era. As there are 15 applications to our department we cannot say that this suffices, but our goal is to produce the best talent through the direct training of excellent professors, if at all possible. Q. Then, has it been confirmed who will be part of the teaching faculty? A. We can boast that all musicians representing this era are included in the faculty. Kim Deok-su and An Suk-seon who you know are involved, as well as Kim Yeong-jae, Kim Seong-nyeo, Park Ae-ri, Lee Chun-hui, Kim Hae-suk, and more. We gathered the most outstanding experts in the fields of vocal music, instrumental music, dance, and composition. This September, students can enroll and in March next year, we will open the doors of our new department. Q. I think there might be concerns about whether the world of traditional Korean music’s demand for manpower is not saturated as there are traditional music departments or Korean music departments at the top universities of our country. A. Recently, our country is trying to develop the fields of semiconductors and nuclear energy, there is absolutely no manpower discharge structure so would there not be a situation in which you cannot handle the manpower? The current state of our music is filled with anticipation due to the phenomenon of Hallyu, to keep up with this trend more new manpower, and more new talent needs to emerge. These talents, while performing that of the past, have to create new music that surpasses the level of imitation. If you look closely, our traditional music has always been creative music. That is what has been passed down to the next generation. In this era, we are already making and delivering music that appeals to people over the world beyond our own country, to do this it is absolutely essential to find the strength in our traditional music and reinvent this. Recently, a research that stated that Psy’s song ‘Gangnam Style’ worked well for people around the world because the music was based on a hwimori-rhythm can be regarded as an example of this. To establish this, performing is of course important, but education in composition that maximizes the ability to create new music in each field is absolutely necessary. Our school makes sure that the faculty members can provide personalized one-on-one education to our students. Because the National Theater is nearby, by always seeing, hearing, and learning on site we focus on developing the capability for traditional music to be reborn as the music of this era. Q. Some are concerned that this era will not last long, as in some areas the current popularity of our idols or the Korean Wave has not been universally recognized. A. The thing that we are overlooking is that Western music has also derived from religious music. Because Christianity (Catholicism) gave birth to Western music culture, we can say that Western music’s roots are Christianity. Likewise, the roots of East Asian music can be found in Buddhism. Western music incorporated ethnic and regional music from this background. Ethnic music from Hungary, Finland, Russia, Spain, and other Western countries has risen to the mainstream of Western music since the mid-19th century and is currently dominating the world. Asia’s music is based on Buddhist music, and I think it is time for Asian ethnic music to rise as world music. These elements should now be raised as modern music and world music. Q. However, the question that always torments us is to what extent is this still our music… A. Ah, right. Whether we are talking about culture or music, anything new is essentially bibimbap. Think about our bibimbap. As garnish we throw in various vegetables, we add sesame oil, and lastly, we add red pepper paste and mix it all in, this is essential to bibimbap. There might be a difference in the amount of red pepper paste added, but once that red pepper paste goes into our music it really becomes our music. Then we can ask what that red pepper paste represents exactly. Element-wise, for example, it could represent the form of a beat or song, the problem of music intervals, the method of vocal usage, movement, and other different elements like these. The problem is how do we blend these elements? And if we do this correctly, would that not result in the best version of our music? We have to identify these factors and share them. Q. I think we talked a lot about the new department. As you know too, professor, our gugak industry and our traditional music industry have suffered a lot under the corona pandemic and dealt with problems such as the cancelation of performances and a decrease in its audience although it is slightly getting better lately. How should we look at this? Is there any solution to this? A. Haha. Us Koreans who see through music or folklore are truly wise people. Don’t we have the wisdom to define objects that bring harm or annoy us as byeolsin or evil spirits, and send them away through a gut (exorcism)? Corona does make our lives difficult, but should even our spirits have a hard time because of this? Just as we overcome our saddest times by singing, we should banish this crisis by holding a byeolsingut (exorcising ritual). This is our humor and positive mind. Q. A concern that we have is that Western instruments’ expressiveness is powerful by nature whereas there is an aspect to our instruments that makes this expressiveness difficult to follow. How do you look at this problem? A. Isn’t distinguishing Western instruments from our instruments defining the limits of our music in advance? Previously, I held a North and South Korean concert in Pyongyang, at this concert the cello players who performed wore hanbok, and Western instruments and traditional Korean instruments were able to coexist. A conductor named Seiji Ozawa is a world-famous conductor of Western music. After that yangban came to China, he fell in love with the charm of the erhu and after inviting a Chinese performer to Boston to open a concert together with the Boston Orchestra, the erhu gained worldwide recognition. Now, we need to have the wisdom to exceed the distinction between instruments and styles and open a world of music. In foreign countries, the world of music is already expanding in that direction. I think this starts with us not being bound by instruments or a certain music form but us ‘submitting’ to our music. To be honest, this is a North Korean way of talking though… Even in our own three Asian countries, each presents its specific national characteristics. I think it is important that we draw from this source when needed and discard it when there is an excess to make a more universal style of music. Q. However, we still have nationalistic feelings toward Japan and lately, some voices are proposing that the roots of Japanese enka music are Korean. A. It seems true that, historically, our music moved to Japan during the Three Kingdom period. And that is how it became their music, but are we also not creating music in our own style by adopting Chinese and Western music? Regarding the origin of Japanese enka, there are records of Koga Masao, who is referred to as the founder of enka, having lived in Incheon and lately, a theory has come out that he is Korean, but because the basic vocal register for enka music does not exist in our country it is difficult to say that they have copied what is ours. This is something for researchers to reveal, but it would be sensible to think about how we can embrace this or that element as our own instead of sinking into nationalist sentiments about who is the original or where did someone copy something. In the past, there was a project in which musicians from Korea, Japan, and China worked together. If they looked at the sheet music, they could not express the meaning of the music but when they all held hands, started practicing, and sang, they all related to each other and the music came out wonderfully. Absorbing the strengths of each country and reviving this in the current age, that is the task that is given to us. Q. I think the time for me to ask other questions that I’m curious about has run out. You are leading the foundation of this Korean Music Department, I hope that through more compositions or the training of our younger generation our music can proudly spread abroad. A. Yes, as we were in a hurry I have spoken in rambles, but our music is always the beginning. What is clear is that we should not cling to the past and with new music should not just create gugak but also a wide range of Korean music. The answer lies in the fact that nowadays almost all university departments choose the name Korean Music Department. Now we have to find and create Korean music, and we are confident that the foundation of our Dongkuk University’s Korean Music Department under the best leaders of our time creates the opportunity to meet this desire and expectation. Thank you. English translation: Linda Pauw (Intern reporter) Linda Pauw is a Dutch student of Korean Studies and Critical Heritage Studies. Pauw came to Korea after finishing her Master's program at Leiden University to attend Yonsei University's Korean Studies Program.
-
박범훈 석좌교수, '한국음악의 새길 찾다'8월의 한가운데, 창밖의 일기 변화에 눈을 두지 않고 연구실에서 뭔가를 열심히 생각하는 분. 국악인. 작곡가, 지휘자, 국악학자, 대학총장, 교육문화정책가, 다시 국악학자로 돌아와 연구실을 지키는 박범훈 석좌교수. 최근 동국대 서울캠퍼스에 ‘한국음악학과’ 개강 준비와 전임교수, 석좌교수 내정 등으로 분망(奔忙)한 틈에 KBS기자 시절부터 친분을 가진 이동식 대기자가 찾았다. 80분 간의 인터뷰에서 그의 화두가 종립대학(宗立大學)으로써의 불교음악 진흥이 곧 우리 음악 새길 찾기임을 확인했다. 이제 그의 공안(公案)을 함께 하기로 한다. Q. 이동식 대기자- 이 염천에 피서 안가시고 무얼 하십니까? A. 박범훈 석좌교수- 반갑습니다. 이번 가을 학기에 학생들을 모집하는 예술대학 한국음악과의 개설에 차질이 없도록 제반 사항을 점검하고 있습니다. 학과 개설은 일이 많지요. 우리 학과는 다 수시모집으로 신입생 모집이 이뤄지는데 그게 딱 한 달 남았거든요. 새 학과의 비전과 설립목적에 맞는 교과목의 교육내용과 방법, 교수확보, 또 전형방법의 확정과 구체적 평가기준의 숙지 등등 하나하나가 다 확인하고 점검해야할 일이니까요. Q. 이- 동국대학교는 원래 경주캠퍼스에 한국음악과가 있었는데 서울 한복판에 새로 학과가 만들어진다는 소식은 의외입니다만. A. 조금 부끄러운 이야기이지만 예술관련 학과는 관계되는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곳에서 운영되지 않으면 교수진 확보나 학생들 수업 등에 문제가 많이 생길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우리 대학이 불교 조계종이 설립한 종립대학인데 그동안 지역(경주캠퍼스)에 있으면서 불교음악의 진흥이라는 차원에서는 미흡함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대학당국이 기왕이면 불교음악의 바탕을 더욱 심도있게 연구하고 가르쳐 한국음악의 새 길을 열기 위해서는 뛰어난 예술인들이 선생님으로 좀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으로 서울 한복판에 한국음악과를 신설하자고 해서 성사된 것입니다. 잘 아시겠지만 수도권에는 대학의 정원이 늘어날 수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리 대학으로서는 종립대학으로서 그동안 조금 미진했던 불교음악의 연구와 연마를 배양해서 이 시대 세계가 환영하는 한류, 우리나라가 요구하는 한국음악의 인재들을 키워내야 할 시점이라는 고심을 한 끝에 기존의 정원을 돌려서 서울에 한국음악과를 만들기로 한 것이지요. Q. 방금 불교음악을 통해 우리 음악을 키운다고 하셨는데, 우리가 아는 불교음악은 이를테면 찬불가라던가 범패, 염불, 또는 김영임이 불러 유명해진 회심곡 등등 특정 종교적인 색채를 띠고 있는데 이것은 전통음악의 주류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 아닌가요? A. 한국음악의 바탕은 곧 불교 음악입니다. 삼국시대에 들어와서 우리민족과 1500년 이상 같이 살아온 불교이기에 거기에서 만들어지고 남아있는 가락과 사설과 장단 등 전통음악의 요소인 가, 무, 악 3요소가 모두가 어느 새 우리 속으로 파고 들어와 있고 그것이 현대에서도 알게 모르게 발현되고 있는데, 우리들이 그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지요. 우리가 음악이란 개념을 접한 것도 불교경전을 통해서였고, 염불이나 범패뿐 아니라 국악에서 연주하는 영산회상, 회심곡, 비나리, 탑돌이, 산염불 등 민요가 다 불교음악입니다. 그러니 실제로 이미 우리음악으로 깊이 들어와 있는 것이지요. 그런 것을 정확히 알고 그것에서 취하고 버릴 것을 연구하고 그것을 이 시대 우리들의 예술적인 재능으로 다시 피워내는 일이 중요한데, 그것을 하자는 것입니다. 사실 모집인원이 15명이라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지만 기왕이면 우수한 교수진들과의 직접 교육을 통해 최고의 인재를 배출하겠다는 목표입니다. Q. 그럼 교수진들은 다 확정이 되었나요? A. 나름 이 시대를 대표하는 음악인들이 다 망라되었다고 자랑할 수 있습니다. 잘 아시는 김덕수 안숙선을 비롯해 김영재, 김성녀, 박애리, 이춘희, 김해숙 등등 성악, 기악, 무용, 작곡 부문에서 최고의 전문가들이 모였습니다. 다음 오는 9월에 학생들을 모집해서 내년 3월에 학과의 문을 열게 됩니다. Q. 우리나라 유수의 대학에 국악과 혹은 한국음악과가 있어 국악계의 인력수요가 포화상태가 아니냐는 걱정도 있을 것 같은데요.. A. 최근 우리나라가 반도체나 원자력 분야를 키워나가려고 보니까 절대 인력의 배출구조가 없어서 인력을 감당하지 못하는 사태가 일어나고 있지 않습니까? 우리 음악의 현주소는 한류라는 현상으로 기대에 차 있는데, 이런 추세에 맞추려면 새로운 인력, 인재들이 더 많이 나와야지요. 그 인재들은, 과거의 것을 연주하는, 말하자면 답습의 차원을 넘어서서 새로운 음악을 창작해 내야하는 것이고요. 잘 보시면 우리 전통음악은 언제나 창작음악이었습니다. 그것이 후대에 전해지고 있는 것이지요. 이 시대 우리들은 우리나라를 넘어서 세계인들에게 호소력이 있는 음악들을 이미 만들어서 전하고 있는데, 이렇게 하려면 우리 전통의 힘을 찾아내어 이를 다시 재창조하는 것이 절대적입니다. 최근 사이의 곡 '강남스타일'이 휘몰이장단을 바탕으로 했기에 세계인들에게 먹혀들었다는 분석이 나온 것이 그 한 사례라 하겠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연주는 물론이지만 각 분야에서 새 음악을 만드는 역량을 극대화하는 작곡 교육이 절대 필요합니다. 우리 학교는 교수진들이 학생들에게 1 대 1 맞춤형 수업을 제공하도록 합니다. 거기에 국립극장이 가까이 있으니 늘 현장에서 보고 듣고 배움으로서 이 시대 음악으로 다시 태어나게 하는 역량을 키우는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Q. 일각에서는 현재의 우리 아이돌의 인기나 한류가 보편적인 인정을 받지 못해서 오래가지 않을 것이라는 걱정을 하기도 하던데요 A. 우리가 지나치고 있는 것으로, 서양음악도 그 모체는 종교음악이라는 것입니다. 기독교(천주교)가 서양의 음악문화를 탄생시켰기에 서양음악의 모체는 기독교라고 할 수 있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동양의 음악은 불교가 그 모체이지요. 서양음악은 그런 바탕에서 민족적인, 지역적인 음악을 흡수했지요. 헝가리, 핀란드, 러시아, 스페인 등의 민족음악들이 19세기 중반 이후에 서양음악의 본류로 올라가서 현재 세계를 풍미하고 있습니다. 아시아의 음악은 불교가 그 바탕에 있는 것이고, 이제는 아시아의 민족음악들이 세계음악으로 올라갈 때가 아닌가 합니다. 이런 요소들이 이제 현대음악, 세계의 음악으로 끌어올려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Q. 그런데 어디까지가 우리 음악이냐 하는 문제가 늘 우리를 고민하게 합니다만···. A. 아, 그거요, 음악이건 문화건, 새로운 것은 본질적으로 비빔밥입니다. 우리 비빔밥을 생각하면 됩니다. 거기에 고명으로 나물을 갖가지 넣고 참기름도 넣고서 마지막에 고추장을 넣어 비비는데, 그게 핵심이지요. 그 고추장을 얼마나 넣느냐의 정도 차이가 있겠지만, 일단 우리 음악의 고추장이 들어가면 그게 곧 우리 음악이지요. 그럼 그 고추장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냐 하고 또 물을 수 있는데, 그것은 요소별로, 즉 장단이나 곡의 형식, 음계문제, 소리를 내는 방법, 몸짓에 따라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는데 그것을 어떻게 배합하느냐의 문제이고, 그것을 잘 하면 그게 최고의 우리 음악이 되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 요소들을 우리가 알아내고 공유해야 한다는 것이지요. Q. 너무 학과이야기를 많이 한 것 같습니다. 교수님 아시다시피 코로나로 우리 국악계, 전통음악계가 공연 취소, 관객 감소 등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는데 최근에는 조금씩 회복되긴 하지만, 이거 어떻게 봐야 합니까? 해결 방법이 있나요? A. 하하. 음악이나 민속을 통해서 보는 우리 민족은 참으로 지혜로운 민족입니다. 우리에게 해를 끼치거나 귀찮게 하는 대상을 우리는 별신, 잡신으로 규정하고 이를 굿으로 보내는 지혜가 있지 않습니까? 코로나가 우리를 힘들게 하지만 이것 때문에 우리의 마음까지 힘들어서야 되겠습니까? 가장 슬플 때에 노래로 이겨내듯이 우리는 이 위기를 별신굿을 해서 추방해야 하죠. 그것은 해학이자 우리들의 긍정적인 마음입니다. Q. 우리들이 안고 있는 고민은 서양악기가 워낙 표현력이 강해서 우리 악기가 따라가기 힘든 측면이 있다는 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지요? A. 서양악기와 우리 악기를 구분하는 것 자체가 우리 음악의 한계를 미리 규정짓는 일이 아닐까요? 전에 남북한 음악회를 평양에서 한 적이 있는데 거기서는 첼로 연주자가 한복을 입고 나오기도 하고, 서양악기와 전통악기가 공존하고 있더라구요. 오자와 세이지라고 하는 지휘자, 세계적인 서양음악의 지휘자이지요. 그 양반이 중국에 왔다가 얼후(二胡)의 매력에 푹 빠져 중국 연주자를 보스턴에 초청해 보스턴 오케스트러와 협연을 열어준 일이 있고, 그 이후 얼후가 세계적으로 인기를 얻게 되었는데, 이제는 악기나 양식의 구분을 넘어서서 원하는 음악세계를 열어가는 지혜가 있어야하지요. 이미 외국에서는 그런 쪽으로 많이 음악세계가 넓어지고 있고요. 그것은 악기나 형식에 우리가 얽매이지 않고 그것들을 우리의 음악에 '복종'시키는 것에서 시작된다고 봅니다. 사실 이 말은 북한식 어법이기는 하지만···. 우리 동양 3국만 해도 각각의 민족적인 특징이 다르게 나타나는데 이것들을 필요하면 끌어 쓰고 넘치면 버리고 해서 보다 보편적인 음악으로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입니다. Q. 그래도 우리들은 아직 일본에 대해서는 민족적인 감정이 있고, 요즈음에는 일본 엔카(演歌)의 원류가 한국이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는데요. A. 역사적으로 보면 삼국시대 우리 음악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사실인 것 같고. 그렇게 그들의 음악으로 되었는데 우리도 중국 음악이나 서양음악을 받아들이면서 또 우리 식의 음악으로 발전하고 있지 않아요? 일본 엔카의 원류에 대해서는 창시자로 일컬어지는 고가 마사오(古賀政男)가 인천에서 살았다는 전력이 있고 최근에는 한국인이라는 설까지 나오기는 하지만, 엔카의 기본 음계는 우리나라에서는 없는 것이기에 우리 것을 베꼈다고 하기는 어렵다는 소리도 있지요. 그것은 연구가들이 밝힐 일이지만 누가 원조니 어디가 어디를 베꼈니 하는 민족적인 감정에 함몰되기 보다는 그런 저런 요소들을 우리가 다 어떻게 우리 것으로 수용하느냐 하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 현명할 것 같습니다. 예전에 한중일 세 나라 음악인들이 함께 하는 작업이 있었는데, 악보로 보면 음악의 표현이 살지 못하는데 함께 손잡고 연습하고 부르고 하면 다들 마음이 통하고 음악이 멋지게 나오더라고요. 각 나라의 장점을 흡수하고 이를 현대에 다시 살리는 작업, 그게 우리에게 부여된 과제이지요. Q. 이런 저런 궁금한 점을 묻다 보니 시간이 다 된 것 같습니다. 이번 한국음악과를 창설하는데 주도적인 일을 하고 계시는데, 더 많은 창작이나 후진 양성으로 우리 음악이 당당히 세계에 퍼지도록 해주시길 바랍니다. A. 네 급한 김에 저도 두서없는 말을 했습니다만, 우리 음악은 언제나 늘 시작입니다. 분명한 것은 과거에 매달리지 말고 새 음악으로 국악만이 아니라 넓은 한국음악을 만들어내는 일이지요. 요즈음 대학의 학과가 거의 다 한국음악과라는 이름을 택하는 데에 그 답이 있습니다. 이제 우리는 한국음악을 찾고 만들어가야 하고, 우리 동국대의 한국음악과 창설이 당대 최고의 지도자들에 의해 그런 희망과 기대를 충족할 수 있는 계기를 만들 수 있다는 자신이 있습니다. 고맙습니다.
-
안주영 ‘코트’ 대표, ‘시간의 마음’을 읽고 ‘땅의 지문’을 지키는 문화 독립 전사종로 2가에서 인사동으로 진입하는 초입 왼편에 복합 문화공간이 숨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곳이지만, 정작 이 장소를 아는 사람은 드물다. 기자도 서울 시내를 거의 꿰듯이 돌아다니는 편이지만, 이 공간은 생소했다. 60년 묵은 5층 건물 해봉빌딩을 ‘ㄱ’ 자 모양의 본관과 별관이 병풍처럼 두른 형상이다. 500평 부지에 건물 연면적 1000평의 규모이다. 이 공간 안에 카페, 전시실, 창작 랩, 서재, 커피숍, 숙박시설, 와인바 등이 들어있다. 다음달에는 음식점도 들어선다. 아티스트들과 창작인 수십 명이 이 공간을 쓰고 있다. 공간의 이름은 ‘코트'(KOTE)이다. ‘꽃’과 ‘뜰’이라는 의미를 담은 작명이다. 멀쩡해 보이는 이 공간은 겉모습과는 달리 치열한 전투를 겪고 있다. 서울시 도심 재개발 프로젝트에 따라 이미 뜯겨나간 피맛골에 이어 철거 위기를 맞고 있는 까닭이다. 이 공간을 리모델링해서 ‘땅의 지문’에 맞게 문화 전진기지로 만들려는 ‘코트’ 대표 안주영(1968~ )씨를 만나 현황과 포부를 들어봤다. 안 대표는 남다른 세계관을 가진 문화 전사이다. 2022년 3월 19일 오전 10시 인사동 ‘코트 랩’에서. Q. 여기서 구체적으로 무얼 시도하시는 건가요? A. "‘공정 무역’을 실현하려고 합니다.” Q. 공정 무역? A."네. 가난한 예술가들에게 경제적 자유를 제공함으로써 예술의 자유를 구현하게끔 도우려는 거지요. 아티스트들이 돈 걱정 않고 창작할 수 있어야 하는데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죠. 그들에게 창작에만 몰입할 수 있도록 공간을 내주려는 겁니다.” 인터뷰 현장인 ‘코트 랩’은 본관 건물 2층에 위치해 있다. 아티스트마다 넓찍한 책상 두 개가 있는 공간을 사용한다. 자기 사무실을 가질 여력이 안 되는 아티스트들에게는 안성맞춤일 것 같다. 임대료는 월 30만 원으로 싼 편이다. Q.어떤 아티스트들이 입주해 있나요? A."다양합니다. 사진작가, 현대 무용가, 패브릭 디자이너, 연극영화 연출가, 광고 기획자, 잡지 편집자, 다큐멘터리스트, 작곡가, 메타버스 개발자, 셰프 등이에요. 모두가 사막에서 샘을 찾듯이 오신 분들이죠.” 2백 평 넓이의 ‘코트 랩’에는 여러 분야의 창작인들이 열정을 쏟아 작업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서로가 소통하며 영감을 주고받기도 한다. Q.가난한 창작인들에게 큰 도움이 되겠군요. 이런 생각을 그전부터 가졌던 건가요? A."제가 2013년에 ‘명동성당 지하 신자 공간 만들기 1898’ 운동 기획에 참여한 적이 있었어요. 명동성당을 1898년 축성 당시 모습으로 복원하는 데 주안점을 둔 프로젝트였죠. 화장품과 중국인의 공간이 되어버린 명동에 영혼의 숨결을 불어넣으려는 도심 재생 운동과 지향점을 맞췄어요. 2014년에 완공됐는데, 천 평의 지하 공간에는 신자 지원시설을 집중 배치했어요. 지하의 중앙에 광장을 두고 사방으로 꽃집, 서점, 화랑, 커피숍, 편의점, 패스트푸드점, 전시장, 간이 공연장, 수도원 물품 직판장 등을 마련했죠. 이 과정을 진행하면서 저는 이런 인식을 터득하게 됐어요. ‘공간은 마땅히 사용자가 그 주인공이어야 한다’.” 그녀의 이력이 궁금해졌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경북 안동의 좋은 집안에서 태어나 대학을 마치고 한글판 ‘타임 연구’지 편집장을 시작으로 영어 통역사, 사모 펀드, 투자자문, 자산운용, 뉴욕호텔 인수 프로젝트, 도심 재생 프로젝트 매니지먼트 등의 업무를 거쳤다. 마지막으로 맡은 일이 그나마 지금의 일과 관련성이 있을 뿐, 그전의 일들은 지금 작업과 전혀 연결 고리가 없어 보인다. Q.어떤 계기로 이 공간과 인연을 맺으셨는지요? A."제가 명동 프로젝트를 마친 직후에 이곳을 방문했다가 골목 안쪽에 서 있는 오동나무를 보았는데 그 오동이 저를 이곳으로 이끌었습니다.” 이야기 즉슨 이랬다. 그녀는 2016년 ‘승동교회와 피맛골이 교차하는 지점’인 이곳 뒷마당에서 늙은 오동나무를 발견하고선 부둥켜안고 울었다. 유서 깊은 두 문화공간 가운데서 백여 년을 버텨온 나무였다. 그녀는 오동이 "건물에 포위당한 채 죽어가고 있다”라고 느꼈다. 피맛골 자리는 깡그리 헐리고 있었고, ‘코트’ 구역도 개발 국면에 처해 있었다. 그 가운데 선 오동은 머리 부분이 이미 잘려나간 채 기괴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안주영 씨는 나무의 영혼을 감지하며 ‘왜 이런 취급을 받고 있나?’ 안타까워했다. ‘예전 자기 집 마당에 서 있던 오동이 생각이 나서였다’라고 밝히기도 했지만, 생면부지의 나무를 붙잡고 눈물을 흘리는 건 여간 섬세한 감성이 아니다. 일반이 표현하기는 어려운 감정선이다. 필자는 그녀가 오동에게서 ‘시간의 마음’을 읽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오규원 시인의 언급처럼 "시간에게도 다양한 감정이 있는” 까닭이다. 이 오동과의 첫 대면에서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서 그녀는 결심했다. ‘이 오동나무를 살려야겠다’ Q.계기치고는 대단히 특별하군요. 그 정도면 ‘운명적’이라는 느낌이 드는군요. A."확실히 그렇습니다. 다들 ‘죽었다’며 베려 하는데 저만 살려야겠다고 달려들었으니까요. ‘미친 여자’ 소리도 들었습니다. 저는 이 오동을 개발과 보존의 경계에 선 존재로 여기죠. 그야말로 ‘경계에 핀 꽃’인 거죠. 살릴 결심을 한 뒤 이 주변을 공부를 해보니 대단히 유서 깊은 곳이었습니다. 깜짝 놀랐죠. 삼일 독립운동의 산실 역할을 한 호해여관과 1920년대 최초로 연극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활동사진을 틀었던 조선극장이 바로 이 터에 있었더군요. 이웃에는 학생들이 삼일 만세운동을 도모했던 승동교회와 탑골공원이 있고요.” 오동나무와 조우하면서 "알 수 없는 힘에 이끌린” 그녀는 ‘공간을 통한 나눔’의 실현을 소명으로 삼았다. 이 공간이 예사 터가 아님을 알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개발에 맞섰다. ‘땅의 지문’을 읽은 것이다. 오랜 시간 이 터에 뿌리내려 깊이 박힌 ‘땅의 지문’을 이어가는 일을 자신의 소명으로 받아들였다. 남다르고 당찬 모습이다. 그녀의 우직함을 읽게 하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조선극장 터를 표시한 표지석이 다른 지번에 세워져 있는 사실을 발견하고 관계기관을 찾아가 자료를 제시하며 정정할 것을 요청해 공무원을 당황하게 만든 해프닝이다. 안 대표는 ‘코트’ 터에 조선극장의 문화 지문을 잇기 위해서는 오동부터 살려야 한다고 생각했다. 건물의 지붕을 뚫고 서 있던 오동나무를 보던 날 ‘오동나무를 중심으로 정원을 만들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잘릴 위기에 처한 오동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기를 들어야 했다. 오동나무를 지켜 중정을 만드는 방안으로 공간 재배치에 나섰다.오동 주변의 작은 건물들을 허물고 주 건물 3개 동은 남겨 리모델링을 거친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2021년불법철거로 일부가 부서진 별관은, ‘코트’ 사태를 자신의 일처럼 함께 견디어 준 코트 커뮤니티와 예술가들 덕분에 지킬 수 있었고 보수공사를 통해 재탄생하고 있다. 여러 아티스트들이 온몸으로 막아 부서진 돌 틈에서 마침내 꽃으로 피어나, ‘코트’ 사태를 다룬 전시의 한 제목처럼, ‘깨어진 틈 사이로 피는 꽃’이 구현되고 있다. Q. 이제 오동나무를 베려 들지는 않는 것 같군요. 이 나무로 ‘코트’의 상징으로 삼으실 건가요? A."네. 이제는 살았어요.(웃음) 별관 뒤편 오동이 자리 잡은 마당을 유럽식 중정(中庭) 모양의 공간으로 살리려고 해요. 그러면 이태리나 스페인의 도시들을 걷다가 골목 속에서 반갑게 만나게 되는 중정이 인사동에도 들어서게 되는 거죠. 휴식과 소통, 축제의 공간이 될 수 있어요. 벌써 그럴 가능성을 보였어요. 2021년 6월에는 국내에 거주하는 프렌치 커뮤니티들이 이 중정 공간에서 프랑스의 음악축제를 열어 즐겼고, 10월에는 벨기에 대사관이 주관하는 벨기에 페스티벌이 열렸어요. 지난 3월 18일에는 매 학기마다 나라를 옮겨가며 유목민처럼 수업하는 미국 미네르바(Minerva) 대학 학생들이 이번 학기를 서울에서 지내면서 이곳에서 축제를 즐겼죠. 모두가 서울 속에서 익숙한 풍경을 찾아낸 겁니다. 저는 이 공간으로 끌리듯 들어선 모든 이들을 "이 공간이 초대한 사람”이라고 여겨요.(웃음) 그 사람들한테서 정말 동지애 같은 에너지를 얻곤 합니다.” 안 대표의 유일한 난제는 동업자와의 관계이다. 서머셋 몸(Somerset Maugham)의 소설 ‘달과 6 펜스’에서 ‘달’은 꿈을, ‘6펜스’는 현실을 상징한다. 안 대표가 ‘달’을 꿈꾼다면, 동업자는 ‘6펜스’를 쫓는다. 철학이 다르다 보니 동업자는 공격적이다. 개발지상주의자답게 처음에는 오동을 베어버리려 한 데 이어 호시탐탐 별관을 철거하려 하고,주차 공간을 만들 생각을 한다. ‘땡처리’ 업체들을 유치해 더 많은 임대료를 받고 싶어 한다. 개발이익을 최대화하려 함이다. 그동안 오동나무 앞 별관 건물을 파괴하려 포클레인을 동원하고, 고압수를 대포처럼 쏘고, 수시로 ‘용역’을 동원해 영업을 못 하게 막고, 공간을 돌아다니며 험악한 분위기를 조성했다. 안 대표는 건물 파괴에 저항하다 물 대포를 맞아 바닥에 쓰러지기도 하고, ‘용역’들의 갖은 횡포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해 왔다. 그렇게 맞서다 보니 그녀는 갑자기 문화 지킴이이자 전사가 돼버렸다. 그렇지만 늘 마음이 편치 않다. 같은 배를 탄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공동운명체 사이라 공존을 바라는데 쉽지 않은 탓이다. A."2016년 말 지분 20%로 참여했어요. 그러다 ‘디자인 하우스’라는 유명 잡지사를 유치해 사업이 안정되자 동업자가 저를 ‘아웃’시켜버리더군요. 그랬는데 2019년 말에 동업자가 급하게 연락을 해와서는 ‘사기를 당해 20억 적자를 지고 임대료도 6개월 연체돼 명도 당할 상황에 처해 있다’며 도움을 요청했어요. 이 공간에 대한 미련 때문에 다시 참여하게 되었죠. 동업자가 진 적자를 10억으로 해 떠안고 지분을 50:50으로 나누고 제가 건물의 관리 운영권에 대한 최종 의사 결정권을 갖는 조건으로 다시 계약을 체결했어요. 그런데 그뿐이었어요. 명도는 모면했지만, 동업자는 저와의 계약을 이행할 의사가 없었던 거죠. 특히 본관 1층 전면 90평은 2019년부터 2023년까지 제가 전차 계약을 체결한 공간인데도 막무가내입니다.” 별관에는 한때 ‘독립 뇨리점’을 입점시켜 일제강점기의 시대적 분위기와 메뉴를 앞세워 명소로 만들려 시도했으나, 더 높은 임대료를 받으려는 동업자의 훼방으로 무산됐다. 자신이 직접 임차한 해봉빌딩에 입점시키려는 시도도 했으나 무위로 끝났다. 당시 해봉빌딩은 5층 전체에 쓰레기가 가득했고, 지하에는 물이 찬 상태였는데 거금을 들여 쓰레기를 치우고 물을 빼내고 고치면서까지 유치하고 싶어 했다. 창의적이면서 터의 지문과도 잘 맞아 무릎을 쳤던 까닭이다. 별다른 관광자원이 없는 인사동에 꽤 괜찮은 관광 콘텐츠가 하나 등장할 뻔했다. 올 3월 초에는 루이비통 트렁크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기획했다가 또다시 방해를 받았다. 고민 끝에 동업자 요구를 받아들여 ‘땡처리’ 전시장 개장을 수락했다. 공격을 받으면 몸통을 지키기 위해 꼬리를 잘라주고 달아나는 도마뱀처럼 그도 창작의 산실인 ‘코트 랩’을 지키기 위해 전시공간을 양보한 것이다. 공존을 원치 않는 그들의 훼방이 있을 때마다 공허함을 느끼는 안 대표에게 친구들은 큰 힘이 된다. 특히 이곳에서 축제를 가졌던 프랑스 커뮤니티와 외국인 아티스트들 그리고 소식을 접한 미네르바 대학생 수십 명이 이 공간에 머무르며 ‘코트’를 지원했다. 그들은 지금도 저항 문구를 만들고, 인터넷에 실상을 올리고, 사진전을 열어 대중에 알리고, 노숙을 하며 ‘용역’의 침입에 맞서고, 피케팅을 하며 시위에 동참한다. 꽃을 꽃으로 존재하게끔 도우려는 마음들의 결집이다. 안 대표는 그들에게 감사하며, 토니 쉐이 ‘자포스Zappos’ 신발 CEO의 신념이 옳았음을 확인하곤 한다. 토니 쉐이는 라스베이거스에 창작 공간을 만들면서 "여러 예술혼들이 모이면 기적이 발생한다.”라고 말한 바 있다. 그 기적은 창작뿐 아니라 예술 환경을 지키려는 마음에도 적용될 터이다. Q.‘공정 무역’ 실현을 위해서는 열정과 사명 그리고 그것을 실현시켜 줄 돈 만들기, 그 셋을 연결할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할 텐데 수익 창출 방안은 어떤 게 있는지요? A."네. 여러 계획들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창작자들을 위한 공유공간 임대, 전시 대관, 이벤트 공연, 음악연주회, 파티, 출판기념회, 전시 오프닝과 클로징 행사, 광고나 드라마 촬영, 브랜드 팝업과 론칭 행사, 세미나와 콘퍼런스 유치, 파티 유치, 스몰웨딩 장소 제공, 마켓 유치, 이색 음식점 입점 등 문화 관련 사업들을 수익 사업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시간이 흐를수록 ‘코트’의 전망은 밝아지고 있다. 여러 조짐들이 보인다. 광고회사들이 레트로 감성을 좇아 이 공간에서 CF를 촬영한 사례가 안 대표에게 예상 못한 힘을 실어주었다. 갤럭시와 아이폰 두 경쟁 휴대폰 회사가 차례로 이곳에서 촬영을 한 일은 이 공간의 가능성을 대변한다. 스포츠용품 업체가 BTS를 홍보모델로 삼아 진행한 사은 행사는 직원 실수로문제가 생겼었으나 결과적으로 BTS 팬클럽‘아미’와 인연을 맺어주고, 그들이 ‘코트랩’의 첫 번째 입주자가 되는 전화위복의 행운을 제공했다. 코로나19 사태로 귀국한 젊은 아티스트들이 이 공간에 속속 둥지를 틀고 있다. 디지털 로봇비서RPA 기반의 업무자동화기업, 스마트 로봇을 활용하는 주얼리 공작소, 편집숍들이 들어오고 있다. 안 대표는 코트의 취지를 이해하고 수용하는 아티스트들로 구성한 예술인 연대 성격의 ‘예술 학교’ 프로그램도 모색하고 있다. ‘코트 랩’이 이들로 채워지면, 천군만마의 동지들이 생기게 될 터이다. 모두가 문화로서 문화를 지키고 살리려는 계획이다. ‘땅의 지문’을 매개로 경계를 허물고 사람을 이어 예술혼을 살리려는 안 대표의 뜻을 ‘시간의 마음’이 따뜻하게 품을 것이라 예상한다. Q.마음 고생이 심할 텐데 후회가 든 적은 없었는지요? A."오동과의 인연으로 우연히 이 공간이 제게 왔어요. 평생 모은 돈을 이곳에 쏟아부었죠. 건물주가 나가라면 언제든 나가야 하는 입장입니다. 그런다 해도 후회는 없어요. 운명처럼 제게 온 이 소중한 공간을 어떻게든 이 공간 본연의 모습으로 살려보고 싶다는 생각뿐이에요. 세상의 소리가 아닌 제 마음의 소리에 따라 하루를 살아도 영원히 사는 길을 가고자 합니다.” 그는 욕망이 자기 삶을 어떻게 삼키고, 욕심이 공동체를 어떻게 망가트리는지 모르는 부류들에게 순수와 환희로 피어나는 꽃의 의지를 보여주려 한다. A."참 신기하게도 지금은 오동이 저를 지켜줘요. 지칠 때 오동나무를 안으면 뒤에서 또 다른 누군가가 저를 가만히 감싸주는 느낌을 받거든요.” 기자는 안주영 대표의 오동이 요제프 보이스(Joseph Beuys1921~86)의 떡갈나무처럼 전설이 되기를 바란다. 전위 예술가인 보이스는 1982년 독일 중부 카셀(Kassel) 시에 7천 점의 비석을 세우고 그 끝에 떡갈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그리고선 하나씩 하나씩 비석을 치우고 그 자리에 떡갈나무를 심어나가 마침내 5년 후 7천 그루가 들어선 녹색공간을 만들었다. "주차 공간도 비좁은데 쓸데없는 짓을 한다.”라고 비난하던 목소리들은 자취를 감추었다. 문화운동가 한 사람의 통찰력만으로도 세상이 얼마나 긍정적으로 바뀔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례이다. 요제프 보이스가 떡갈나무로 시의 면모를 푸르게 바꾸었듯이, 안주영의 오동도 이 땅의 지문을 살리고 시간의 마음을 담는 인식 전환의 모티브로 역할할 수 있으면 좋겠다. 바람 탓에 빗나간 것처럼 보이는 화살들마저도 모두가 과녁을 향했다는 사실을 알아 안 대표가 자부심을 잃지 않기를 바란다. 방향을 놓치지 않는다면, 웃으며 옛이야기를 할 날이 반드시 올 터이다. 긴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기자도 앞으로 틈날 때마다 인사동 ‘코트’ 2층의 ‘내면의 서재’에서 커피를 마시며 책을 뒤져보거나 ‘조선 살롱’에서 와인을 마시며 음악을 듣거나 하고 싶어졌다. 꽃이 피는 터인 ‘코트’에서 영혼이 아름다운 아티스트들과 더불어 꽃인 양 행세하고 싶어졌다.
-
가곡 무대 변사 ‘광대 김명곤’김명곤 씨는 독일어 교사, 잡지사 기자, 연극배우, 영화배우, 극단 대표, 시나리오 작가, 성악가, 소리꾼, 국립극장장, 문화부 장관 등의 다양한 경력을 갖고 있지만, 노는 ‘광대’로 불리는 걸 좋아한다. 예인 김명곤을 관통하는 것은 전통의 가치이다. 그 자신도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고 여긴다. 국악도 그를 형상화하는 주요한 키워드이다. 국악과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되었는지, 국악이 그의 삶과 창작에 어떻게 투영되었는지, 국악의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는 어떤 게 있을 것인지 등을 주제로 대담을 했다. 지난 10월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한 ‘굿모닝 가곡’은 관객 반응이 뜨거웠다. 가곡만 들려주는 게 아니라 노래에 얽힌 스토리를 극과 영상자료 그리고 해설을 통해 전달했다. 특히 변사의 역할이 화제를 모았다. 변사는 특유의 목소리로 다소 코믹하게 노래에 얽힌 사연을 풀어주는 기능을 함으로써 음성 더빙이 안 되던 20세기 초 무성영화 시절, 극의 전개와 출연자의 대사를 읊어주던 역할을 하였다. 이 변사를 김명곤 씨가 맡아 해 폭발적인 반응을 얻었다. 모든 무대 요소를 가곡 공연이라는 드라마 속으로 이끌었다. 성공적인 반응에 힘입어 ‘예술의 전당’ 측은 12월 1일부터 이틀간 세 차례 앙코르 공연을 개최한다. Q. 가곡 무대에 변사가 등장하는 건 획기적 발상이군요. A. 네. 관객들의 호응이 컸습니다. ‘변사 쪼(조)’라는 말이 생겼을 정도예요. Q 변사를 맡으시면서 참고한 모델이 있었나요? A. 옛날 연극할 때도 신파극에서 변사를 맡아 했었어요. 전설적인 변사 고설봉 선생이나 최후의 변사 신출 선생을 인터뷰하면서 기법을 배우기도 했죠. 저한테는 굉장히 친숙하고 익숙한 역할입니다. Q. 변사가 해설을 해주면 관객들의 곡에 대한 이해가 높아지죠. A. 맞아요. 그냥 해설이 아니라 드라마틱하게 언변을 구사해서 사람의 감정을 끓어오르게 하는 효과를 내죠. 노래의 배경이나 시대적 분위기 그리고 작곡 작사에 얽힌 뒷얘기를 하니까 펑펑 우는 분들도 있더군요. Q. 감정이입이 되는 거죠. 젊은 세대들에게는 변사의 존재가 생소할 텐데 먹혔군요. A. 코미디언들이 과장되게 구사하던 것과 달리 저는 친근하게 다가가려고 애썼죠. 홍난파의 ‘울 밑에 선 봉선화’를 소개하며 "일제시대 때 우리 민족은 새장에 갇힌 새였다. 앵무새였다.” 이런 시대 상황을 코믹하게만 하지 않고 시 낭송하듯 들려주었죠. ‘동심초’ 같은 서정적인 노래는 그 시가 탄생한 중국 당나라 시대 여류 시인 설도의 시를 들려주고 이것을 김한석이 어떻게 아름다운 노랫말로 옮겼는지를 알려주었죠. 이렇게 하니 관객이 편하게 교감을 하더군요. Q 가곡뿐만 아니라 판소리 가운데서도 몇몇 대목을 변사의 해설에 이어 창을 들려주면 청중 호응이 크지 않을까 싶군요. 오페라로 치면 아리아들만 선곡해서 들려주는 갈라(Gala) 형식이 되는 거죠. A. 재미있을 것 같군요. 시도해봄 직합니다. 보통은 소리꾼들이 몇 마디 해설을 하고선 소리를 하는데 클래식에서 레너드 번스타인이나 금난새 같은 지휘자가 곡을 소개하고 연주를 들려주면서 이해를 돕듯이, 판소리도 변사가 그 해설 기능을 맡아 할 수 있는 거죠. 관객들은 해설을 누가 하느냐에 따라 반응이 달라지거든요. Q. 가곡에 이어 판소리 변사로도 나서 보시죠.(웃음) A. 저는 할 수 있죠. 서양 음악, 우리 소리 모두 공부를 했으니까요. 모르는 분야 같으면 나서기 어렵겠지만, 동서양 음악에 대한 이해가 있고 또 제가 노래 부르는 걸 즐겨해서 재미나게 전달할 수 있을 것 같군요. Q. 네. 가곡과 판소리 장르의 ‘송해 선생’이 되시면 좋을 것 같군요.(웃음) 90살이 넘도록 하시면서 우리 음악에 대한 대중성도 높여주시고요. A. 네. 저도 그러면 좋겠습니다.(웃음) Q. 국악과 인연을 맺은 이야기를 좀 해볼까요. 대학 2학년 때 고향 전주에서 가까운 김제에 놀러 갔다가 소리 배우는 단발머리 소녀들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으셨다고요? A. 네. 그때까지만 해도 저는 서양음악에 매료돼 있었죠. 클래식, 오페라 아리아, 팝송 따위만 듣고 불렀는데 판소리를 듣고 충격을 받았죠. 이렇게 좋은 우리 소리가 있었구나, 그런데 왜 몰랐을까....하고요. 그때 단발머리 소녀들 가운데 하나가 방송작가 김병준 씨 부인인 소리꾼 남궁정애 여사입니다. 그날을 계기로 저의 판소리 사랑이 시작된 거죠. LP판을 사서 듣기 시작한 겁니다. Q. 어떤 곡들이었나요? A. 임방울, 김현수, 박록주 명인들의 단가였어요. 알고 산 게 아니라 그 당시 인기 있던 레코드들을 사서 듣다 보니 그렇게 된 거였어요. 가장 좋아했던 곡이 김현수 선생의 ‘사철가’였죠. 20대 초반이었는데 어떻게 그런 늙은 노래가 가슴에 와닿던지... 아마 폐병을 앓았고, 힘들게 객지 생활을 하다 보니 심리적으로 힐링을 받았던 게 아닌가 싶어요. Q. 그런 판소리들이 인생 전반에 어떻게 투영되었나요? A. 임권택 감독이 저한테 시나리오를 맡긴 1993년 영화 '서편제'에 제가 그 ‘사철가’를 삽입해 불렀죠. '개벽'에는 동학 혁명의 ‘녹두장군’ 전봉준 역을 맡아 칼춤 추며 부르는 노래를 제가 직접 불렀고요. 영화나 연극의 대본을 쓰면서 소리꾼 명인들의 말과 어투를 많이 차용했죠. 예를 들면, 서편제에서 "부귀공명보다도 좋고 황금보다도 좋은 것이 이 소리 속 판이여, 이놈아!”라고 아들에게 일갈한 대사나, 연극 '격정만리'에서 격동기 연극인의 입을 통해 "황금도 사랑도 명예도 다 싫소. 오로지 나의 소망은 조선 냄새나는 위대한 예술을 하고 싶은 것이외다.”라고 읊조린 대사들이 그런 것들입니다. Q. 명창 박초월 선생에게 사사했다는 얘길 듣고 많이 놀란 적이 있습니다. A. 대학 4학년 때 종로 단성사 앞을 지나다 ‘박초월 국악전습소’라는 한자 간판을 발견하고선 무턱대고 4층으로 올라갔죠. 그 자리에 박초월 명인과 조상현 선생이 함께 계셨어요. 알고 보니 두 분이 판소리 보존회의 회장과 사무국장을 맡아 하셨더군요. 조 선생이 북을 당기더니 노래를 해보라고 해서 불렀는데 웃음거리가 됐죠. 판소리 곡을 이태리 벨칸토 창법으로 불렀으니 두 분이 보기에 얼마나 웃겼겠어요. 학생들도 웃고. 그렇게 입문을 했는데 그때 제1 조교가 김수연 명창이었고, 제2 조교가 김경숙 명창이었어요. 저는 박초월 선생님이 직접 가르쳐주셨어요. 타향에서 어렵게 산다는 걸 아시고선 거기서 숙식하며 지내라고 배려해주셨죠. 아침에는 밥도 갖다주시고. 그렇게 지내다 보니 총무 비슷하게 됐어요.(웃음) 그러다 박 선생님이 당신 아이들 가정교사를 맡기셔서 그 댁에 입주하게 되었죠. 불광동이었는데 새벽마다 불광산에 올라 목을 풀고 소리를 지르는 훈련을 했죠. 그렇게 10여 년을 배웠습니다. 박 선생님 덕에 국악계의 명인들을 두루 만나는 행운도 누렸죠. 그분들 인터뷰 기사를 써서 월간 신동아에 연재도 했습니다. 나중에 그 인터뷰를 묶어서 '광대의 꿈'이라는 단행본으로 출판도 했죠. 그분들을 만난 게 제 인생에 큰 자양분이 되었죠. 지금도 고맙게 생각하는 부분입니다. 김명곤 씨는 이 대목을 이렇게 표현한다. "판소리와의 인연은 마치 누가 미리 연출해놓은 것처럼 내 인생에 파고들었다.” Q. 레퍼토리 가운데 가장 애창하는 곡이 어떤 건가요? A. 홍보가, 수궁가를 배웠는데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곡은 ‘고고천변’입니다. 거북이가 뭍으로 나와 처음 맞이한 세상 풍경을 노래하는 대목이죠. 박 선생님은 남자들에겐 민요는 안 가르치셨어요. 대체로 민요는 여자 장르의 곡으로 취급했어요. 단가인 ‘사철가’도 제가 즐기는 곡인데, 서편제를 하면서 제가 따로 배운 노래입니다. 김수철 씨가 작곡한 서편제 중 삽입곡 ‘소리길’도 멜로디가 너무 좋아서 제가 가사를 붙여 부르곤 합니다. 김명곤 대표는 "전통은 모든 예술의 고향”이라는 모토를 갖고 있다. 그가 우리 음악에 천착하는 이유이다. Q. 국립극장장과 문화부 장관을 지내면서도 한국음악을 살리려고 노력을 많이 하셨죠? A. 네. 뒤돌아보면 우리 음악과 그 음악을 하는 광대를 조선조는 5백 년간 무시하고 홀대했어요. 그래서 국립극장장일 때는 대통령 선거에 나섰던 노무현 후보에게 전통예술에 대한 지원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문화부 장관이 되면서 국악진흥과를 신설해 독립부서로 두고 한국음악 지원에 나서기도 했죠. 이 국악진흥과는 제가 떠나면서 같이 없어져 버렸어요. 문화재청이나 국립국악원이나 다른 기구들이 대체할 수 있다고 여긴 듯합니다. 저로서는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죠. 그걸로 한류의 세계화를 도모했으니까요. 우리 전통예술 분야는 정치지도자가 의지를 갖고 육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봅니다. Q. 요즘 국악 하는 젊은이들이 각종 오디션 프로그램에서 빼어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걸 자주 봅니다. 소리 내는 기본이 탄탄하니 노래를 잘할 수밖에 없죠. 확실히 우리의 자산이라 할 수 있겠죠? A. 네. 동감입니다. 일각에서는 전통이 허물어진다고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있지만, 서양도 클래식과 팝이 서로 퓨전 하며 대중의 취향에 맞추고 있죠. 물론 전통도 지켜가면서요. 어느 게 옳은 길인지는 아무도 알 수 없죠. 분명한 사실은 이러한 시도가 새로운 세계를 여는 초석이 된다는 겁니다. 교류하고 소통하며 필요하면 통합도 가능하죠. 서양음악 하는 사람들도 판소리 창법을 연구하고, 한국음악 하는 사람들도 퓨전을 시도하고 그러면서 새로운 길을 찾아가는 거죠. 음악 장르 전체가 동반 발전하는 겁니다. 경계를 두지 말고 두 음악 세계가 서로 통합하고 융합하도록 협업을 계속 시도하는 게 중요합니다. 저는 그 과정에서 서로서로 좀 더 들여다보고 이해해보라고 권하고 설득하려고 합니다. 그것이 올드보이로서 저의 남은 인생의 사명이라고 생각합니다. 네. 오늘 바쁘신 와중에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국악의 저변을 넓히는 창의적 예술가로 활동하시는 모습 오래 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김명곤 대표는 내년 초 ‘예술의 전당’이 기획하는 획기적 가곡 공연 프로그램을 의논해야 한다며 회의실로 향했다. 어떤 형식일지가 궁금했다. 창의적 열정의 소유자인 그가 지휘하는 만큼 기대가 크다. ‘꽃을 밟고 지나간 말의 발굽에서 향기가 날(踏花歸路馬體香)’때 그는 기뻐한다.
-
백설헌 한국한복협회 회장미국 빌보드 차트를 석권하면서 세계적으로 한국을 알리고 있는 보이 그룹 BTS가 도포를 입고 춤을 추는 사진을 보고선 미소를 지은 적이 있다. 속으로 "그래 이거야!”라고 외쳤던 기억이다. 긴 도포의 선이 BTS의 춤 선과 잘 어우러지면서 한복의 매력을 물씬 풍겼던 까닭이었다. 기자의 생각에 사물은 선이 고와야 예쁜 법이다. 옷과 춤이 서로의 곡선미를 위해 시너지를 발휘하고 있었다. 한복과 젊은 세대 간의 접점을 발견한 것 같아 흥분됐다. 청담동이나 압구정동에 이런 차림의 젊은이가 나타난다면 단박에 그 세대들 사이에서 인기몰이를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됐다. 작금의 한복은 우리 전통문화의 한 축임이 분명한데도 갈수록 존재감이 떨어지고 있다. 단순한 옷 차원을 넘어 우리의 정신이 오롯이 담긴 한복의 의미를 어떻게 되살릴 수 있을까, 한국음악과 한복은 어떻게 상생할 수 있을까, 이런 궁금증을 갖고 2005년부터 한국한복협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백설헌 선생을 만났다. (2021년 10월 12일 오후 2시 청담동 설헌 빌딩) Q. 16년 동안 한복협회 회장을 맡아 하시면서 한복의 발전을 위해 공을 많이 들이셨죠? A. 380여 회원들 간에 소통 기회를 마련한 것이 가장 큰 노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원래 한복하는 사람들이 자기가 최고라는 자부심 때문에 다른 집에도 안 가고 자기 집에 초대하지도 않았어요. 서로 상대의 작품을 보도록 기회를 만든 거죠. 서울과 지방에서 일하는 디자이너와 기능인들에게 교차 방문의 시간을 마련해줌으로써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배울 수 있도록 한 거죠. 한복의 소재, 색감, 문양, 디자인, 트렌드 그리고 마케팅 등에 관한 지식을 공유한 거죠. 그 덕에 식견이 다들 넓어졌어요. 색상도 파스텔 톤의 높낮이 조정과 원색의 임팩트(impact)화를, 염색 방면도 쪽이라는 식물을 발효시켜서 황산구리를 섞으면 진한 색을 얻을 수 있듯이 매염제에 따라 여러 색을 낼 수 있다는 지식도 알려주고, 롤 플레이(role play)도 했어요. 디자이너와 고객으로 나눠 역할 분담을 시킨 거죠. 그렇게 해서 상담차 들른 손님들에게 다양한 소재들로 상하와 고름, 깃, 노리개 등을 종류별, 색상별로 구성해 보여주면서 매력을 느끼도록 끌어내는 노하우를 가르쳤지요. 얼굴에 맞는 디자인, 겉감과 안감의 배색, 목 길이에 따른 동정의 폭 조정, 눈동자나 피부색에 맞는 색상 조정에 대한 감각 등 한두 가지가 아니었죠. Q. 한복 보급률도 낮고 인식도 낮은 게 우리 한복 문화 현실인 것 같습니다. 방법이 없을까요? A. 네 확실히 한복이 복식 문화를 이루지 못하고 있어요. 한복을 제대로 입을 줄 모르죠. 속치마를 앞에 입어야 하는데 뒤로 원피스처럼 입기도 하죠. 불편해하구요. 학교에서 교양 수업으로 한복 제대로 입는 법을 가르치면 좋겠어요. 생활 속에 파고들지도 못하고 있어요. 인생의 어떤 기념할 만한 날에는 한복을 입는 게 당연한 불문율처럼 조성이 되었으면 좋겠는데, 학교 교육서부터 방송에 이르기까지 협조가 필요한 부분이죠. 돌이나 입학식, 졸업식, 성인식, 결혼식, 결혼기념식, 잔치, 은퇴 기념식 등등의 날에 한복을 입는 문화가 정착되었으면 좋겠어요. 결혼식 때도 혼주나 신랑 신부 외에 가까운 하객들도 축하의 마음을 담아 우아하고 품격 있는 복식으로 성의를 보이는 그런 문화가 있으면 얼마나 아름답겠어요? 일본 여성들은 성인이 될 때까지만 해도 5벌의 기모노를 맞춰 입는다고 하지 않아요? 부모들이 애들 잘 자라게 해달라고 기도를 하러 갈 때도 반드시 전통 의상을 입혀서 데리고 간다잖아요. 전통문화가 스며 있는 옷을 입는다는 형식 절차가 인생의 한 매듭을 통과하는 사람에게 진지한 각오를 다지도록 역할하는 거죠. 우리는 성인식 때도 안 입죠. 우리도 한복에 대한 이해나 애정이 그 정도 되면 좋겠어요. 한옥 마을에, 한복이 어떻게 만들어지고, 어떤 역사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는지 보여주는 학습관을 세우면, 한복에 대한 인식 함양이나 홍보에 얼마나 효과가 커지겠어요? 그런 노력이 범국민적으로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Q. 사업상 파티나 동호인 모임, 손님 초대 때 드레스 코드(dress code)를 한복으로 삼는 것도 좋겠군요. A. 너무 좋죠. 한복 드레스 코드가 어려운 게 아니라 흔한 회색 계열에 하얀 스카프 하나 두른 홈웨어(home-wear) 같은 한복도 얼마든지 멋있을 수 있거든요. 입기 편하면서 멋을 낼 수 있도록 얼마든지 ‘디자인 한복’이 가능해요. Q. 한복의 디자인은 진화를 거듭해왔는데 어떤 메커니즘을 거쳤는지요? A. 궁중 의궤나 출토 복식 등에서 영감을 얻는 식이지요. 그런데 옛 복식은 굉장히 단순해요. 색상도 청, 홍, 녹, 황 등 몇 가지 안되고요. 거기에 바리에이션(variation)을 줘야죠. 원형에서 영감을 받아 그 위에 디자이너의 창의력이 가미되는 메커니즘을 거쳐 작품이 탄생합니다. Q 20세기 초 개화기 복식이 오랫동안 지배하다 현대에 들어 조선 초기나 중기의 스타일이 발굴됐죠? A. 네. 그래서 대학의 연구가 중요합니다. 사람들이 잘 몰라요. 궁중에서 입은 당의(唐衣)에는 짧은 저고리가 없어요. 남자들도 바지저고리 위에 꼭 두루마기를 걸쳤죠. 상복에 관한 논문을 쓰며 궁중에서 입던 흰색의 무명 상복과 하얀 족두리 등의 당의가 일반에서는 혼례식 때 쓰인 사실을 발견하기도 했죠. 계층별로도 복식이 다 달랐어요. 상민, 사대부, 기녀, 궁중 나인, 상궁, 왕족, 임금이 입던 복식이 다 따로 있었어요. 계절마다도 달라지고요. 기녀들이 디자이너 노릇을 하며 패션을 선도하기도 했죠. 가슴을 졸라매고 허리띠를 하고 치마를 풍성하게 만들었어요. 대학의 연구가 없으면 복식 문화가 뒤죽박죽이 돼버릴 겁니다. 이런 걸 알고 나서 디자인을 해야 제대로죠. 당의에 바탕하면 파티복 아니라 골프복도 만들 수 있어요. 꽃도 장식하고. Q. 대학의 관련 학과가 그런 점에서 큰 역할을 해왔군요. 그런데 연구나 발굴과 달리 디자인은 또 다른 영역인데 대학에서 한복의 디자인을 창의적으로 가르치고 배울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군요? A. 네. 한복의 디자인은 거의 도제 형식으로 전승되는 게 바람직하죠. 실제로도 그럴 수밖에 없고요. 그런데 저도 많이 받아봤지만,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사람들이 얼마 못 견디고 떠나버려요. 그들은 바느질을 배우고 싶어 할 뿐, 디자인에는 관심이 없어요. Q. 예술을 배우려는 게 아니라 기능을 배우려는 거군요. A. 네. 저희도 바느질을 배워서 직접 하지만, 중요한 것은 디자인을 만들어내는 창의력인데 문화를 계승하는 정신보다 손 기능을 더 배우고 싶어 하는 게 현실입니다. Q 오늘날 한복집들의 현주소겠군요? A. 네. 한때 동대문에 그런 한복 만드는 사람들이 4천여 명이 있을 정도였어요. 한복을 착용하면 궁궐 입장에 무료 혜택을 주는 게 그런 장사 마인드에서 비롯된 거죠. 그 결과 청바지 위에 한복을 덧입는 현상을 보이면서 한복의 우아한 멋이 실추됐다고 봅니다. Q 한복을 우리 정신문화의 한 축이라고 볼 때, 복식 디자인 능력을 함양하는 게 절실하겠군요? A. 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서 가죽 제품 제작을 가르치는 학교, ‘Leather School’을 보면서 부러워했던 것도 그런 까닭이었어요. 그곳에서는 구두서부터 옷까지 가죽으로 만드는 법을 교육하고 있더군요. 어떻게 착용해야 멋을 내는지도 가르치고. 우리도 옷을 짓고 입는 법을 가르치는 한복 학교가 생겼으면 하는 바람이 큽니다. Q. 직접 학교를 세워서 후진을 양성하실 의향은 없으신지요? A. 한복 제작의 선배로서 후배들을 가르치는 일은 꼭 필요하고 가슴 설레는 일이죠. 앞으로의 과제로 삼고 있습니다. Q. 한복 디자이너 브랜드는 몇 개나 되는지요? A. 글쎄요. 열 개나 될까요? Q 나머지는 모두 상인들 수준이군요. A.네. 그렇죠. Q 한복 디자이너들은 ‘한복장(韓服匠)’ 같은 명예 수여가 없나요? A. 바느질 분야에 바느질장은 있지만, 디자인에는 없어요. Q. 기능장들에게만 주는군요. A. 네. 한복의 복식이 전승되는 게 정신문화의 계승이라는 측면에서 볼 때 의미가 크지만, 디자이너들을 위한 명예는 마련이 안 돼 있어요. Q. 유기장, 한지장(韓紙匠) 등은 있잖아요? ‘한복 장인’이 없으라는 법은 없어 보이는데요? A. 그러면 정말 좋겠지만, 현실 정책은 그런 이상적 상황을 추구하지 못하지요. 안타까움이 드는 대목입니다. 정부 입장에서는 동대문 시장이라는 터전이 없어지긴 했어도 여전히 4만 명의 종사자들이 한복에 기대 밥을 먹고 있는 현실이 있어서 정책화하기가 쉽지 않은 문제일 거예요. Q. 기능인들이 만드는 게 상품이라면, 디자이너들이 만드는 건 작품 아닌가요? 일반인들을 위한 한복은 기능인들에게 맡기고, 디자이너들은 예술적 가치가 높은 작품을 만들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 예를 들어 국내외의 영향력 높은 유명 인사들에게 한복을 입혀 아름다움을 드러내게 하는 역할을 브랜드 디자이너들이 맡을 수 있도록 거시적 관점에서 정부가 지원해야 하지 않을까 싶군요. A. 네. 정말 최고의 생각입니다. (웃음) 왕년의 오드리 헵번이나 그레이스 켈리, 알랭 들롱, 요즈음의 안젤리나 졸리나 이자벨 아자니, 브래드 피트가 디자이너 브랜드의 한복을 입었다면, 전 세계에 보도되면서 한복의 위상이 많이 올라갔을 거라는 게 기자의 생각이다.시각 효과는 힘이 세다. 언젠가 일본 아키타에서 수양벚꽃이 핑크색을 발하며 늘어져 있고, 검은색 담장이 쭉 이어진 길을 붉은 기모노에 빨간 양산을 받쳐 든 일본 여인이 걷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 서울에서도 봄날에 키 작은 매화를 배경으로 퓨전 한복을 입고 선 모델 한혜진 씨의 사진이 한복의 우아한 아름다움을 한껏 풍기는 걸 본 적이 있다. 그런 효과를 디자이너 브랜드들이 작품으로 창출해줘야 한다. 그럴 수 있도록 정부가 복식 장인으로 대접해줘야 하지 않을까. Q.공급 측면에서 우리 한복업계에 절실하게 개선이 요구되는 분야가 있을까요? A. 네. 저는 소재 면에서 개혁이 있었으면, 하고 바랍니다. 지금까지 한복 하면 실크죠. 합섬 실크나 물 실크 모두 실크 계열 일색이에요. 겨울에는 양단을 쓰죠. 여름에는 모시나 삼베가 있는데 이 소재들 모두가 다 손질이 어려워요. 그런 소재서 탈피해 면(綿)을 써보자는 거죠. 만들기도 쉽고, 입기에도 편하고, 세탁하기에도 좋아서 생활 한복을 정착시키는 데 긍정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되거든요. 외국 면들 가운데는 꽃무늬도 들어 있고 누비는 퀼트(quilt)도 있어요. 익숙한 소재라서 외국인들에게도 호응을 얻어낼 수 있을 거구요. 면에 프린트가 가능하기 때문에 한국적 문양도 넣을 수 있고, 디자인하기에도 좋고, 서양식 옷들과 매칭 하기에도 좋고, 장점이 많을 걸로 판단됩니다. 대기업들이 장삿속으로 마구 대량 생산해내던 개량 한복이 아닌 디자인 한복을 만드는 거죠. 수요만 확보되면 정말 만들고 싶어요. 생뚱맞다고들얘기할 수도 있지만, 생뚱맞다는 자체가 창작이잖아요? 혁신이 될 수 있는 거죠. 면 업체들도 성장할 수 있고요. Q. 네. 좋은 시도가 될 것 같군요. 젊은이들에게도 어필할 것 같아요. 한복이 젊은 세대들에게도 받아들여지려면 불편하다는 느낌을 탈피해야 하고, 디자인 면에서도 서구 것과 퓨전이 가능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 상하의를 다른 문화로 입거나, 한복에 바카라나 스와로브스키 같은 크리스털을 장신구 엘리먼트로 달 수도 있겠죠. 퓨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최근 BTS가 바지 위에 도포를 걸쳐 입고 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선 2000년을 전후해 태어난 밀레니얼 세대와 한복 사이의 접점을 찾은 듯해서 기뻤던 기억이 있습니다. 청담동에 그런 차림의 젊은이가 상체를 노출하고 도포를 걸친 채이거나, 양복을 입은 위에 두루마기를 입고 나타나도 눈길을 끌 수 있을 것 같았거든요. A. 네. 동감입니다. 퓨전과 크로스오버가 한복의 트렌드 요소가 돼야 한다는 데 공감합니다. 그런 접점을 찾는 데 필요한 부분이 ‘한복의 면 시대’를 여는 것입니다. 면으로 만든 한복이 그런 트렌드를 실현할 수 있다고 봅니다. Q. 대학에서 한복 디자인을 배우고 있는 학생들이나 도제식 한복 제작을 이수하고 있는 사람들을 참가자로 삼아서 한복 제작 콘테스트를 가져보면 어떨까요? A. 몇몇 대학에서 실시한 바 있고, KOEX에서도 콘테스트를 연 적이 있습니다. Q. 아니, 제 말씀은 기존의 한복 제작 방식을 답습하라는 것이 아니고, 트렌디한 주제를 던져주자는 거죠. 예를 들어 ‘2021년 가을 청담동을 걷는 젊은이가 선보여서 주의를 환기하고 동영상이나 사진으로 널리 전파될 수 있는 그런 작품을 만들어보라’는 구체적인 주문을 하는 거죠. 그 과정을 국악 TV나 국악신문이 방송하고 보도하면서 분위기를 띄우면, 한복에 대한 젊은이들의 이목을 집중시킬 수 있지 않을까요? A. 정말 좋은 아이디어라고 생각됩니다. 그렇게만 할 수 있다면 큰 변화를 끌어낼 수 있을 거라고 확신합니다. 저희 한복협회가 주관해 행사를 치를 수 있도록 국악신문과 국악방송이 좀 힘써주시면 좋겠네요. (웃음) Q.한국음악과 한복은 어떻게 상생을 도모할 수 있을까요? A. 이미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가 돼 있습니다. 한국음악을 양복을 입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한국음악 공연자들 덕에 한복이 수요를 지탱하고 있죠. 요즈음 한국음악 오디션도 선풍적 인기를 얻고 있던데 참가자들의 공연 점수 외에 한복 맵시도 가산점을 주었으면 좋겠어요. 공연만 잘해서 되는 게 아니라 복식도 공연 문화의 일부가 돼야 한다고 보거든요. 기자는 어느 해 가을에 북촌의 고색창연한 조선집에서 고운 한복을 입은 여성이 부르는 정가(正歌)를 들은 적이 있다. 그때 청아한 목소리만큼이나 그 여성의 치마저고리 역시 전통음악을 대변한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확실히 형식이 내용을 지배할 때도 있는 듯싶었다. 한국음악은 소리로 시작해 복식으로 완성되는 형식미를 가질 법하다는 생각을 했다. Q. 교육대학을 나와 10년간 교직에 있다가 늦은 나이에 한복 디자이너의 길을 밟으셨어요. 성대 한복학과에서 공부해서 한복 디자인 정규 교육을 받은 1호 디자이너가 되셨죠? 사명감이 남다를 거라고 생각됩니다. 앞으로의 계획도 남다를 것으로 생각되는군요? A. 오늘 숙제가 많이 생겼어요. (웃음) 역시 사명감을 갖게 되는 것은 우리의 정신문화를 후세에 전할 수 있도록 방법을 찾는 겁니다. 한복이 저조해지면서 대학이나 대학원의 관련 학과들이 점점 없어지고 있어요. 앞서 얘기한 이탈리아의 가죽 학교 같은 한복 학교를 세워 교육에 종사하는 게 선배로서의 소명이라고 생각합니다. 생의 후반부를 그렇게 살 수 있도록 애쓰겠습니다. 지켜봐 주시고 도와주세요.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응원하겠습니다. 1959년을 배경으로 한 소설 <회색인>에서 작가 최인훈은 주인공 독고준의 입을 빌어 이야기한다. "성춘향과 이몽룡이 줄리엣과 로미오를 대신할 날이 올까? 그런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야.” 최인훈의 비관적 전망은 2021년 BTS가 얻고 있는 세계적 인기 앞에서 허물어지는 느낌이다. 외국인 팬들이 한글로 된 가사를 외워 따라 부른다. 한국어를 배우고 한국어로 피케팅을 하고 댓글을 단다.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춤을 추는 BTS의 춤 선에 매료당한다. 우리의 옷, 한복은 그 사건을 계기로 도약의 모멘텀(momentum)을 가져야 마땅하다.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믿는다. 그 일선에 한복 디자이너들의 창의력이 잘 닦은 창검처럼 빛을 번뜩이고 있다. 그 창검을 잘 쓸 수 있도록 지혜를 모으고 힘을 보태야 한다. "면으로 한복을 만들자”라는 백설헌 씨의 획기적 제안은 소구력(訴求力)이 커 보인다. ‘밀레니얼 세대를 어떻게 설득하느냐’가 한복 도약의 관건이다. 정부는 일선의 의견을 귀담아들을 필요가 있다. 한복 장인 제도도 만들어 한복 디자이너들을 대우하고 지원해야 한다. 상품이 아닌 작품으로서의 디자이너 한복이 세계인의 마음을 뺏을 수도 있다. 단순히 옷 이야기가 아니다. 우리의 정신문화를 온전히 지키고 널리 알리려는 앞선 세대의 공통된 사명감을 말함이다.
-
우리 소리를 다듬고 가꾼 40년, 악기장 박성기국악신문 혁신 재창간 1주년 기념으로 특별대담을 마련했다. 우리나라 국악기 제작사 중 고품질에 가격 대중화를 이룬 궁중국악기 창업자 박성기 명인과 국악에 관한 저서를 갖고 있는 전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대기자와의 대담이다. ‘언제나 떳떳하게 언제든 당당하게 양심을 최우선으로 하는 악기사’를 표방하는 박성기 명인은 2003년 세계문화예술대상, 장영실과학문화상 국악기술대상을 수상한 대명장이다. 전분야 국악기 개량의 최고 권위자로 트랜드를 형성해왔다. 하남시 궁중국악기사에서 국악기 90%를 개량하게 된 배경과 성공담, 그리고 우리 국악기의 앞날에 대해 진지하게 대담을 나눴다. 이 자리에는 정문교 전(前)신나라 사장도 함께 하였다. 대담 이동식(국악신문 대기자, 전(前) KBS해설위원실장) 이동식 대기자=우리나라의 거문고나 가야금 등 현악기들은 일찍이 담헌 홍대용이 말한 것처럼 먼지와 티끌로 가득 찬 이 세상의 어두운 생각과 우울한 기분을 풀어버리는데 그 효과가 시(詩)나 술보다도 나은 점이 있다고 하겠다. 흔히 백악지장(百樂之丈)이라고 말하는 거문고, 그와 같이 비유되는 가야금의 소리는 중국과 다르고 일본과는 사뭇 차이가 큰데, 이러한 우리 악기의 소리는 누가 내는 것이고 그 소리는 누가 만드는 것인가? 여기에 소리를 잘 내는 악기의 중요성의 핵심이 있다고 한다면 현대 우리나라에서 통용되는 현금 악기들을 만드는 악기장도 그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하겠다. 우리 국악기 중 현악기들을 만드는 곳이 전국에 수십 군데가 있는데 그중에서도 가장 사랑을 받는 곳이 ‘궁중국악기사’라는 곳이다. 이 악기사의 대표는 40년 동안 우리나라 현대 국악기를 가장 많이 만들어, 오늘날 우리 국악이 이처럼 많은 분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는 밑거름이 된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처럼 사랑을 받는 비밀이 아름다운 소리에 있다면,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비결은 무엇일까? 그 궁금증을 풀기 위해 경기도 하남시 천현산 자락에 있는 궁중국악기사의 박성기 대표를 찾아갔다. 박성기 명인=."현악기의 소리의 비밀은 당연히 나무에 있습니다. 얼마나 좋은 나무를 쓰느냐에 달려 있고요. 좋은 나무를 어떻게 잘 말려서 좋은 소리가 나게 하느냐에 있지요. 저 같은 경우 고향인 전라북도 장수와 근처 남원 임실 일원에 오동나무가 많았어요. 그것은 60년대에 나라에서 농가 소득증대를 위해 오동나무를 심으라고 권장한 데 따라 고향 일대에 밭이나 야산에 많은 오동나무들이 잘 자랐는데, 30년 이상 잘 자란 그 오동나무들을 일찍 악기용으로 확보를 해서 충분히 말린 것이 좋은 악기를 만드는 밑거름이 된 것이지요. 저희 고향에는 지금도 20~30년 잘 건조된 오동나무 편만 수천 장이 보존되고 있습니다.” Q.예순을 넘긴 나이지만 정력적이랄까 활력에 여전히 가득 차 있는 박 대표, 그런데 나무만 있다고 좋은 악기나 나오는 것일까? A."그렇지 않고요. 일단 나무가 있더라도 거기에 줄을 매야 하고, 울림통을 받칠 몇 가지 덧붙임이 있어야 하고, 줄도 좋아야지요. 그런 모든 것들이 어우러져야 좋은 악기가 되는 것은 더 말할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가야금의 경우에도 예전부터 전해오는 제작법에 따르면 악기의 줄을 맨 후에 자꾸 줄이 늘어나는 현상이 생겨 이 음들의 높이를 유지하고 조율하는 일이 무척 번거로운 일이기에 제가 줄 매는 쪽 뒤편에 조리개를 고안해서 이것으로 쉽게 줄을 맞출 수 있게 한 것이 많은 분들에게 저의 악기가 사랑을 받게 된 것 같아요.” Q.그런 말씀은 말하자면 전통악기를 개량한 것이라 하겠는데 12줄인 가야금을 22현으로, 25현으로 개량한 것이 박 대표라는 말이 있던데 그건 어떻게 된 것입니까? A."제가 정식으로 이 악기 만드는 일에 뛰어든 것이 1986년입니다. 사실 악기 만드는 것은 전수가 쉽지가 않습니다. 악기를 만들 때에 제대로 못하면 아까운 나무도 버리고 악기가 못 쓰게 되지요. 그래서 악기장들이 제자에게 전해주시지를 않아요. 이 때문에 악기 만드는 것을 배우고 터득하기 위해 사실 무척 노력을 많이 했고 숱한 시행착오도 겪었지요. 지금이니까 좋은 추억으로 회상하지만 정말 힘이 들었습니다. 실패를 하면 왜 실패를 했는지를 찾아내는 과정이 엄청 길고 힘들더라고요” Q.의욕이 강했기에 밤잠을 안 자고 연구를 하던 청년 박성기는 국악기의 주재료인 오동나무를 건조하는 방법을 고민하던 끝에 어떤 화학약품을 쓰면 쉽게 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단다. 먼저 적은 양으로 실험을 했었어야 했는데 금방 만들고 싶어서 고향집 마당에 많은 양을 쌓아놓고 한꺼번에 작업했는데, 이때 마을은 온통 퀴퀴한 냄새로 가득 찼고 그 작업도 실패로 끝났다고 한다. 나무를 오랜 시간 동안 서서히 말려서 악기를 만들었던 조상의 슬기를 몰랐던 것이다. 그와 같은 실패가 있었기에 더욱 노력을 해서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는 말이다. A."그렇게 해서 악기를 만들다 보니까 우선 줄이 문제인 것입니다. 당시까지 줄은 명주실로 촘촘히 꽈서 만드는 것인데 이게 자주 끊어지고 늘어나고 했습니다. 그래서 90년대 초에 줄을 새로운 소재인 나일론을 줄로 매는 방법을 고안했습니다. 그랬더니 소리가 훨씬 탄력도 늘어 좋고, 또 질겨서 일정한 소리를 낼 수 있어요. 맨 처음에 어른들이 안 된다고 반대를 하셨지만, 가곡 하는 조순자 님과 가야금 하는 황병기님이 좋다고 추천을 해주셨기에 점차 사람들도 쓰게 된 것이지요. 이렇게 줄을 개량한 것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게 되자 가야금 12줄을 17줄로 늘이는 악기를 개발했고 다시 박범훈 선생님이 기왕이면 음색과 표현력을 넓히기 위해 22현으로 해보자고 말씀하셔서 1996년에 22현 가야금을 만들어냈습니다. 여러분들이 좋아하고 많이 써 주셨습니다. 그 해에 북도 모듬북으로 만들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았고요, 그 가야금이 나중에 김일륜 선생님의 제안으로 25현으로 확대되었고요” Q. 박 대표에 따르면 이러한 실용신안 혹은 특허는 수도 없이 많다. 1998년에 대금 제조 방법에 특허, 2000년에는 해금과 가야금의 음량을 조절하는 방법이 실용신안으로 인정받았고, 2002년 현악기 제조 방법, 2003년 양금 등이 실용신안이 되었다. 실용신안이 15개나 된다. 드디어는 이러한 작업 중에 전기가야금도 태어났다. A."양악기 가운데에는 기타가 음량이 작아 결국엔 마이크의 도움을 받다가 아예 전기 기타가 나와 서양 대중음악을 휘어잡았는데, 국악기의 경우에도 전기를 쓰는 것이 대세는 아니지만 새로운 영역으로 뚫고 나가야 할 것이기에 전기나 전자의 힘을 어떻게 쓰는가를 고민했습니다. 전자가야금은 처음에는 가야금의 울림통 안에 마이크로폰을 달아서 연결하는 방법이었는데, 이게 각 줄의 음량 차이가 생기고 음이 제대로 잡히지 않지요. 그래서 각 줄마다 센서를 달아서 해결했습니다. 그렇게 하니까 음이 울리는 문제도 해결되었고요.” Q. 국악이든 양악이든 예전처럼 방안에서 몇 사람만을 대상으로 연주하는 것이 아니라 무대가 있고 많은 청중들을 대상으로 하게 되면서 악기의 성량이 큰 문제가 되었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으로는 가장 처음 생각할 수 있는 것이 악기의 크기를 키우는 것이었단다. 박 대표는 아쟁을 기존보다 20% 정도 키워 대아쟁을 만들어 보았는데 이렇게 되니 너무 커서 운반이 문제가 되더란다. 그래서 아쟁에 현침(絃枕), 곧 줄을 묶는 베개를 개발해서 응용을 했고 모든 줄에 조리개를 붙여 음을 맞추는 문제를 해결했다. 또 장식용으로만 있는 부분을 과감히 잘라내어 악기 무게를 줄였다. 이런 식으로 박 대표는 우리 국악기의 90% 이상을 현대적으로 개량해내었다. 그것으로 해서 우리 국악의 음의 표현력이 엄청나게 넓어졌고 대형 무대에서 많은 청중들을 상대로 하는 현대의 연주회의 특성에 따라 음량도 커져서 많은 애호가들이 즐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한다. 물론 이를 위해서 각 악기의 대가들이 자문해주셔서 가능했지만 이렇게 함으로써 국악의 저변이 확대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이렇게 악기를 만들고 그것을 개량하는 일에 뛰어들었을까? 원래부터 악기를 만드는 집에서 태어난 것인가요? A."그렇지 않습니다 전북 장수의 평범한 농촌 가정이었습니다. 다만 고향의 아는 형님이 민속 국악기 제작사를 하고 있어서 거기 들렀다가 가야금에 매료되었습니다. 그러다가 군대에 다녀왔는데 제가 원래 손재주가 있는 편이어서 가야금 만드는 데서 2년이 안 되게 있으면서 눈으로 보기는 했습니다만 제가 제 방식대로 직접 제작해보고 싶어서 제 몫으로 집에 있는 논을 팔아서 가건물을 하나 마련해 거기서 죽으라고 연구를 했지요. 세월 가는 것도 몰랐고요. 수많은 악기를 만들었다가 실패해서 깨어버리고 그 원인이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그러다 보니 악기에 대해 원리를 터득하게 된 것이고요.” Q.이처럼 악기에 대한 물리가 터져서 여러 악기들을 하나하나 만들어가고, 그것들을 현대에 맞게 개량해내자 점차 국악계에서 그의 악기를 선택하는 연주가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그의 악기에 대한 평가는 곧 세계문화예술대상, 장영실과학문화상 국악기술대상 수상(2003년) 등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사랑을 받으면서 회사는 가야금과 거문고만이 아니라 거의 모든 국악기를 만들어내었고 그 악기들은 모두 좋은 평가를 받아 많이 쓰이게 되었다. 사업이 늘어가면서 돈도 벌게 되었지만 그만큼 많은 국악 행사에 지원을 해왔다. 중요 공연만이 아니라 국악을 배우고 알리는 많은 기획이나 행사도 궁중 국악기사의 후원을 받았다. 궁금했다. 사람들은 상을 많이 받는다고 악기를 선택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비결은 역시 소리에 있는 게 아닐까요? A."악기에 쓰는 나무들은 결국엔 잘 말라야 하는 거지요. 잘 마르면 무게가 가벼워져서 아주 맑고 상쾌한 소리가 납니다. 반면에 덜 마르거나 재질이 좋지 않으면 둔하고 탁한 쪽의 소리가 나는 등 소리가 죽습니다. 가야금의 몸체를 한 번 들어보세요. 요즈음엔 이렇게 가볍습니다. 그만큼 잘 말랐다는 것이지요. 예전에는 그렇게 잘 마르지 못한 악기들이 많아서 소리가 일정하지 않았기에, 차라리 요즈음 악기들이 소리가 더 좋습니다. 다만 우리 악기들은 재질이 단단한 나무가 아니어서 서양의 현악기들처럼 수백 년을 가지는 못하는 아쉬움이 있습니다. 그런데 기왕이면 그런 명품 악기를 만들어 보고 싶어서 소나무 등 다른 목재들을 시도해 보았지만 소리가 못 따라 오더라고요. 우리 음악의 전통과 특성을 따라서 악기도 나오는 것이니 어쩔 수 없지요” Q.최근 우리 음악에 대한 인식이 넓어지고 국악을 좋아하고 배우려는 젊은이들도 많지만 국악기들이 생각보다는 값이 만만치 않아서 국악 확산에 어려움을 주고 있는 것 같은데 이 문제는 어떻게 보시는가요? A."네, 국악을 배우려는 분들이 늘어난 것은 사실이고 또 국악도 점점 다양해지고 전문화되어서 악기도 종류가 많아지고 있어요. 아시겠지만 가야금만 해도 정악가야금과 산조 가야금, 18현, 25현 가야금 등 종류가 많고 저음에서부터 중음, 고음 등 영역이 세분화되다 보니 전공하시는 분들의 경제적인 부담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 과정에서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유통되는 것도 있고요. 그래서 이 가격 부분에서 부담을 덜 수 있는 방법으로 국악기를 만들고 유통하시는 분들로부터 큰 전환이 일어났으면 합니다. 최근 국악 보급이 늘어나면서 악기 수요도 많아졌는데, 저는 사정이 허락하는 한 이용자와 수용자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고 생각을 합니다. 다만 제작 판매량이 적은 분들은 나름대로 어려움이 있을 것이기에 획일적으로 이래라저래라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저로서는 방법을 강구하고 싶습니다. 어려서부터 보다 많은 분들이 악기를 옆에 두고 늘 그 소리를 듣고 자라야 이 국악이 이 시대뿐 아니라 앞으로도 이어지지 않겠습니까? ” Q. 악기를 보급하는 입장에서는 더 많은 국악인들이 나오고 그래서 국악의 저변이 확산되는 것을 바랄 텐데, 그런 점에서 북한 국악의 현주소를 궁금해 하는 분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혹 남북 간의 협력이 이뤄지면 국악 발전이 더 가속화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들 말입니다. A."물론 남북 간 협력이 이뤄지면 더욱 좋겠지요. 그래서 예전에 통일음악회 등으로 남북 간의 교류 행사도 있었고요. 북한의 경우 국악기의 현대화가 많이 진행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전에는 남북이 음악 부문에서도 교류가 있어서 서로 악기를 주고받기도 하고 했는데, 북한의 악기 개량은 무대 위에서 신곡 연주를 위해 성량을 키우고 미세한 음까지 필요로 하다 보니 줄에 철사 등을 사용하고 있더라고요. 북한을 다녀온 박범훈 전 총장의 말로는 북쪽이 현대화에 관한 한 한 20년은 앞서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줄을 보면 우선 철사를 넣고 명주실로 둘러싸는 식으로 만들곤 하는데, 그게 음색이 많이 우리와 달라서 우리 쪽에서는 그리 반응이 좋지 않았고요. 나무도 우리만큼 좋은 것은 쓰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말하자면 형식은 앞서 가지만 내용이나 품질 면에서는 아직 미흡하다는 지적이 있더라고요. 지금은 남북교류가 끊어졌으니 많이 아쉽지만, 어쨌든 교류를 하고 형식이나 내용 면에서 진정으로 우리 민족이 좋아하는 국악으로 같이 발전하는 방안을 찾아야 되겠지요. 그리고 중요한 것은 전통을 고수하는 것만으로 살아남기는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 시대 현대인들과 함께 호흡하고 숨 쉬고 함께 위안을 받는 음악이 나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게 함으로써 국악도 진정한 우리의 음악이라는 영역으로 더 커나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Q. 아무래도 악기를 만드는 입장에서 보면 앞에서도 말이 나왔지만 그 기술이 전해지지 않는 풍토가 있다고 했는데, 앞으로 이 문제가 걱정이 됩니다만? A."다행히 제가 평생을 바쳐 걸어온 이 악기의 세계를 따라오는 아들이 있어 저로서는 덜 걱정입니다. 아들은 중고등학교와 대학에서 대금을 전공했는데 악기 연주를 넘어서서 저처럼 악기를 만들어 보겠다고 과거 저의 젊을 때처럼 10년 이상 밤잠 없이 일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 아들만의 문제가 아니라 요즘 젊은이들은 열심히 한다고는 하지만 예전 제가 하던 것에 비하면 많이 미흡하지요. 이 일은 죽을힘을 다해 도전해야 합니다. 그래서 아름다운 소리를 담아 놓은 악기를 저렴하게 많이 보급해야 합니다. 그러려면 매번 악기를 개량하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서양의 클래식이건 대중음악이건 강력한 소리와 요란한 박자로 우리를 공격하고 있는데 우리는 물론 우리 음악의 특색과 장점을 잘 지켜야 하지만 그런 외부적인 도전에 응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악기 분야에서 더 개량하고 개선할 점이 있는지를 찾아서 본인이 터득해야 합니다.” Q.가을은 음악의 계절이라고 합니다. 많은 분들이 박 대표가 만든 악기들을 사용하고 있어서 책임이 더 막중하게 느껴지시리라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국악 발전을 위해 어떤 계획을 갖고 계신 것이 있습니까? A."아, 물론 더 공부하고 연구하고 새로 개량하고 개발할 것입니다. 모든 분들이 국악을 정말로 부담 없이 사랑하는 날까지, 집집마다 가야금과 거문고 등 국악기 하나씩은 다 갖고 사랑할 때까지 일을 계속하겠습니다. 누구나 믿고 사랑해주는 악기를 위해 남은 시간도 소중히 하겠습니다. 이 코로나 바이러스 사태가 종식되어 많은 공연장에서 우리 국민들이 우리 음악의 아름다움을, 우리 악기를 통해서 접할 수 있기를 고대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실은 이후에는 국악의 역사를 알리고 국악기의 과거와 현재를 정리하고 새로운 미래를 기약할 박물관이랄까 누구나 가족이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만들고 싶습니다. 공연도 볼 수 있고, 할 수 있고, 같이 배우고 즐기고 하는 공간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한 시설을 갖추고 그것이 자생적으로 운영되도록 준비하고 싶습니다. 그것이 그동안 성원을 보내주신 모든 분들에 대한 보답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긴 시간 대담에 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시 뵙도록 하겠습니다. 궁중국악기사 주요 연혁 2010's 2017년 해금특허 출원 제10-2017-0120407 2017년 12현 저음대아쟁 개발 2015년 모든 악기 품질개발 악기 가격 현실화 2013년 한국문화재단 명인인증 2012년 12현 대아쟁 개발 2000's 2009년 음픽업장치를 구비한 전자 현악기 특허 제10-1003336호 2008년 중요무형문화재 제 42호 이수 2003년 개량북 개발 2003년 한국예술문화대상 2003년 가야금 실용신안 0326244호 2003년 양금 실용신안 0326243호 2003년 장영실과학 문화상 국악기술 대상 2002년 세계문화예술상 2002년 해금 주화 특허 0038137호 2002년 장식용현악기 제조방법 실용신안 0015989호 2000년 음량조절 해금 실용신안 027763호 2000년 음량조절 가야금 실용신안 0207762호 1980's ~ 1990's 1998년 대금제조방법 특허 0298678호 1997년 10현 중아쟁 개발 1996년 모듬북 실용신안 24649호(조율기 부착) 1996년 거문고9현 -이형환(당시 동국대교수), 9현대아쟁(정계종 국립국악원) 1996년 중앙대 김일륜교수(국립극장 단장)님과 22현 개발 1995년 소금, 중금, 대금, 피리 - 신용춘선생 1995년 고음해금, 저음, 고음가야금 1993년 17현 실용신안 077038호(고 황병주선생 공동) 1993년 가야금줄 실용신안 077038호 1993년 대아쟁 2중 현침 및 조율기 개발 1992년 대금 옷칠 및 자개 장구통, 해금 통 최초 1992년 로구로 기계 도입 해금 통 최초 1991년 개량줄, 키타조율기 17현가야금(황병주) 1989년 저음해금 국립국악원 개량악기 윤찬구씨(저음해금)
-
유영대 국악방송 사장 취임 기념 인터뷰국악방송 신임 사장으로 유영대 전(前) 고려대학 교수가 취임, 의욕적인 사업 추진을 계획하고 있다. 예산확보로 국악TV 활성화 등의 현안 타개와 개국 20주년을 맞아 기획 프로그램을 통한 활로를 모색하는 상황이다. 이에 본지는 사장 취임을 기념하고, 다양한 경륜과 실적으로 전개해 갈 국악방송의 내일을 전망하고자 특별 인터뷰를 마련했다. 대담은 안상윤 대기자, 사진 김동국 기자. 14일 오후 4시 사장실에서 40분간 진행되었다. 취임 2주, 첫 인터뷰 Q. 취임을 축하합니다. 취임하신지 며칠되셨죠? A. 9월 1일부터니까 2주일 됐습니다. Q. 아직 업무 파악을 다 못 하셨겠어요? A. 아직 완전히는 아니지만, 거의 파악은 했습니다. 전국에 본사 포함, 지국과 지소들이 모두 14개소가 있어 시간이 좀 걸리는군요. Q. 고려대학교 한국학과 교수를 올해 초 정년퇴직하셨죠? 그 후에 김영운 전임 사장이 국립국악원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잔여 임기 1년을 맡으셨는데, 그 전부터 국악방송과는 인연이 좀 있으셨지요? A. 네 제가 전주 지국의 자체 프로그램에도 참여한 적 있고, 여기 본사 프로그램 제작과 진행을 맡아 했습니다. 1998년에 전주 지국의 프로그램은 방송협회에서 주는 ‘올해의 PD상’을 수상하기도 했죠. 국립극장 창극단 예술감독 때인 2010년에는 ‘청’을 무대에 올려 좋은 평가를 받기도 했습니다. Q.‘청’은 대단했죠. 노래는 물론이고 통찰력이 묻어난 대사와 배경 장면, 회전식 무대 등이 몰입도를 높여 ‘코리아 브랜드’라는 별칭을 얻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예술감독 외에 문화재청 무형문화재위원과 판소리학회장도 하셨죠? A.네, 교수와 예술감독 그리고 방송인 이렇게 1인 3역을 하며 살았습니다.” Q.국악방송 시청자위원회 일도 하셨죠? A.네 시청자위원회 위원장을 맡아 국악방송의 발전에 나름 기여했습니다. 국악TV 개국도 그때 당시 저희 시청자위원회가 적극 지원했죠. 그런데 지금 국악TV가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어 안타까운 마음이 큽니다. Q. 문광부가 인사 보도자료에서 "최근 K-POP을 통해 국악의 세계화, 산업화를 향한 다양한 시도가 이루어지고 있는 시점에서 국악계에서 쌓아온 전문성을 바탕으로 국악의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고 국악방송의 역할을 더욱 확대해 나갈 것으로 기대한다.”라고 평가해 큰 기대감을 주고 있습니다. 이제 전문가가 아닌 경영인으로서 국악TV를 살려야 하는 과제가 주어졌는데 어떤 활성화 방안을 갖고 계신지요? A. 저는 줄곧 KㅡMUSIC을 지향해왔습니다. 국내 소수의 애호가들만이 즐기는 음악에서 세대를 초월하고 나아가 세계인이 다 좋아할 만한 장르로 외연을 넓히자는 것입니다. 이날치의 ‘범 내려온다’가 큰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게 좋은 예가 되겠죠. Q. 그렇지만 외국인들에게 국악은 멜로디도 낯설고, 가사 전달도 힘들고 해서 한계가 있지 않을까요? A. 그래서 제가 처음 시도했던 게 번역 자막 제공이었습니다. 그랬더니 의외로 어렵지 않게 창극의 내용을 이해하고 우리 소리를 좋아하더군요. 외국인 청중들이 ‘Evaluation(평가)’를 해주었는데 큰 감동을 받았어요. Q. 평가 내용이 어떤 것들이었나요? A. "눈물이 나도록 아름답다”라는 것이었습니다. 스토리도 노래도. 특히 심청의 효성과 부친 심학규의 딸에 대한 그리움 같은 내용이 지극히 동양적 가치를 표방하면서도 인간중심적인 모습을 담고 있어서 뭉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려는 심청의 희생이 그들의 마음을 울렸던 거죠. Q. 우리 소재 가운데도 찾아보면 외국인들에게 먹힐 꺼리들이 많겠어요. A. 그렇습니다. 잘 알려진 ‘심청전’이나 ‘춘향가’ 외에도 제가 ‘몽유도원도’를 현대적 감각으로 재해석해서 무대에 올렸는데, 이 역시 반응이 좋았습니다. 잘 알려진 것처럼 안평대군이 꾼 꿈 이야기를 화가 안견이 화폭에 재현한 것이 ‘몽유도원도’인데, 그 두 사람 외에 기록에는 없는 지고지순한 여성을 한 명 등장시켜 정치적 암살을 당하는 안평대군과의 슬픈 러브스토리를 만들었죠. Q. 네. 인문학적 소양과 호방함을 갖췄던 안평대군이 인왕산 자락에 비해당(匪懈堂)을 짓고 살면서 많은 일화를 낳았으니 러브스토리도 있을 법 했겠어요. 형 수양에게 유배지에서 대역죄로 사약을 받는 순간까지 두고 온 집 비해당과 인왕산 자락을 사무치게 그리워했겠다 싶었는데, 연인이 있었다면 그 슬픔은 배가되겠죠. 물론 음악이 장엄하게 뒷받침을 해주었을 테고요. 그런 스토리를 드라마타이즈해서 국악과 접목시키면 좋은 콘텐츠의 프로그램이 나오겠어요. A.신기하게도 외국인들을 포함한 청중들이 스토리 전개보다 그 내용을 축약한 노래들에서 더 감동을 받곤 하더군요. 우리 음악이 먹힌다는 확신이 들던 순간이었습니다. 비단 우리 소재만이 아니라 외국의 소재도 우리 것으로 변주하는 시도도 했었죠. 대표적인 게 '로미오와 줄리엣'의 국악 버전입니다. 카플렛가와 몬태규가의 갈등을 경상도와 전라도 가문의 갈등으로 대체하는 식이었죠. 스토리와 창(唱), 노랫말은 직접 우리 식으로 재가공했습니다. 물론 쉐익스피어의 화려한 대사의 맛도 살리구요. 원로 명창 무대, 씨리이즈 기획 Q. 참신한 발상이군요. 그런 식이면 ‘햄릿’이나 ‘오딧세이’, ‘오이디푸스’, ‘돈키호테’ 같은 스토리들도 우리 식으로 창극화할 수 있겠어요. A. 얼마든지 가능하죠. 퓨젼(Fusion)과 크로스오버(Cross over)를 과감하게 시도해야 세계화에 다가 설 수 있습니다. Q. EBS 교육방송도 2004년에 박인환, 김수영 등 50,60년 대 예술가들의 사랑과 우정 그리고 창작의 고통 등의 스토리를 담은 ‘명동백작’이라는 드라마를 기획방송해서 인지도를 높인 사례가 있지요. 국악 TV도 그런 소재들을 활용해 국악과 접목시키는 시도가 있으면 좋겠군요. A. 저희는 예산이 부족해 드라마는 언감생심이지만, 창극으로는 기획할 수가 있어요. 그렇게 해 볼 생각입니다. Q.편성표를 보니 24시간 방송이긴 해도 아직은 재방, 삼방 비율이 높더군요. 콘텐츠 개발이 시급하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금년이 개국 20주년 되는 해인데 특집이나 사업으로 기획한 게 있나요? A.그래서 저희가 못 보신 분들을 위해 ‘로미와 줄리엣’을 고화질 영상으로 방송할 계획을 하고 있어요. 또한 곧 천수(天壽)를 다하시게 되는 명창들을 위한 무대를 시리즈로 방송할 생각입니다. Q.국악 오디션 프로그램은 기획하지 않으시나요? 편성하면 환영을 받을 것 같은데요. A.사실 다른 방송사와 함께 기획을 했는데 "공동제작”이라는 자막만 하나 넣고는 방송은 못 하게 해서 파기해 버렸습니다. 국악방송을 우습게 보는 것 같아서 자존심이 매우 상했죠. 국악으로 탄탄하게 기반을 닦은 가수들이 트로트 장르에서 기량을 발휘하고 있는 추세이므로 저희 방송 자체만의 오디션 프로그램을 곧 기획할 것입니다. 그 부분은 포기하지 않을 생각입니다. Q. 아무래도 여기저기서 예산이 발목을 잡는군요? 예산 확보를 위한 복안은 있으신지요? A.열심히 정치인들을 만나 국악방송의 중요성을 피력하며 예산을 늘려달라고 호소할 생각입니다. 2019년 12월에 국악TV가 개국했는데도 저희 방송사의 예산이 오르기는커녕 해마다 삭감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지금 삼년 연속으로 5%씩 줄어들었어요. 국악방송의 위상이 아직 그 정도밖에 취급을 못 받는 거죠. 예산 줄이는 데 우선적으로 지목받는 게 국악방송이라는 얘기죠. 슬픈 현실입니다. 문화부, 기재부 등 관련 부서들도 찾아다니며 호소할 예정입니다. 사실 좋은 창극을 원활하게 중계방송 하려면 당장 중계차도 한 대 더 늘려야 하는데 그 비용이 적어도 40억 원이 소요되는 실정입니다. 관계 부서들은 이해가 약하고... 한숨이 나죠. Q.사장님의 개인적인 역량이 풀 가동돼야겠군요? A.하고 싶은 일은 많은데 예산은 부족하고... 그래서 ‘메세나 프로그램’도 기획하고 있어요. 아무래도 기업의 후원 없이는 재원 마련이 쉽지 않다는 판단에서입니다. 크라운해태 제과 윤영달 회장님 같은 국악 애호 기업인들이 한 열 분 계세요. 우선 그 분들의 이해와 지지를 이끌어내서 시작해보려 합니다. 직원들이 예산 삭감을 염두에 두고 기획을 줄이려드는 걸 보고 제가 그러지 말고 계속 추진하라고 독려했어요. 어떻게든 해봐야죠. Q.혼자서 힘들게 뛰어다니실 게 아니라 예산 확보를 전담하는 직제를 하나 둬야 하지 않을까요? 전담 본부장을 신설할 거라는 이야기도 들리더군요. A.저희 본부장은 방송 담당이라 힘은 들겠지만 아무래도 당분간 제가 뛰어다녀야 할 것 같습니다. KT, 곧 SKT에도... Q. 노출도 좀 원활하게끔 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현재 국악TV를 접하기가 어려워요. A. 네, 동감입니다. 현재는 KT만 태우고 있는데 곧 SKT에도 실을 예정입니다. 그러면 보다 많은 시청자들이 저희 방송을 볼 수 있게 될 겁니다. 누가 그러더군요. "망만 늘려도 국악방송 사장 일 절반은 한 게 될 거”라구요.(웃음) Q. 유 사장님의 목표를 보면 누군가가 펼쳐놓는 무대를 TV로 옮기기만 하는 게 아니라 아예 기획 단계서부터 대본, 공연, 방송에 이르기까지 전 과정에 국악방송이 소매 걷고 관여해야 할 것 같군요? A. 네 그렇게 할 생각입니다. 새로운 제작 시스템을 구축해야겠죠. 그럴려면 저희에게 운영 예산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산이 절대 필요합니다. 어떻든 국악방송 운영을 맡아 참신한 프로그램 생산과 직원 복지 향상 그리고 K-MUSIC을 포함하는 ‘K-CULTURE 구축’이라는 목표를 향해 매진해나갈 것입니다. Q. 응원합니다. 저희 국악신문과의 협업도 한번 생각해보시죠? 사업도 함께 기획하고. 저희 신문에 신규 편성에 대한 홍보도 하면 좋을 것 같군요. 홍보 소개글은 작가나 PD가 쓰면 될 테구요. A. 네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하고 싶습니다. Q. 그러면 서로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듯 싶군요. 이 정도로 취임 인터뷰를 마치겠습니다. 오늘 만나 청사진을 들어보니 국악방송에 대한 기대가 더욱 커집니다. ‘먼 데 사람 보기 좋고 가까운 사람 듣기 좋은 우리 시대의 방송국으로’라는 캐치 프레이즈가 빛을 발하기를 바랍니다. 앞으로 자주 뵐 수 있기를 바랍니다. A. 네, 또 기회를 만들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안상윤 대기자 1954년 경남 밀양 출생. KBS/SBS 32년간 재직. 다큐 PD, ‘뉴스 추적’ 앵커, 홍콩·베이징 특파원, 스포츠 국장, 논설위원, 중앙선거방송토론위원회 위원 등 역임. 현재 국악신문 문화정책/생활문화 대기자로 활동.
많이본뉴스
많이 본 뉴스
- 1토속민요의 힘, ‘일노래, 삶의 노래’
- 2국립국악원 민속악단 ‘일노래, 삶의 노래' 오는 23일부터
- 3공연예술로 하나가 되는 '더원아트코리아' 최재학 대표를 만나다
- 4(34) <br> 노동은의 ‘잘못된 조건’ 둘, ‘교묘한 조작’
- 5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82 <br>‘국악의 날’ 지정을 위한 제언(9) - “악학궤범은 새로운 가치 창출”
- 6전주세계소리축제 공식 포스터 및 키워드 공개
- 7제26회 서라벌전국학생민속무용경연대회(07/13-14)
- 8유인촌 문체부 장관, '국제문화정책 추진전략' 발표
- 9최고 명인명창 등용문 대명사 전주대사습놀이 전국대회 17일간 열전
- 10이애주한국전통춤회의 ‘우리춤 원류 찾기’ 첫 번째 여정 ‘법열곡’